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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관념분별이 실재가 아님을 밝히는 방안에 대한 논의 본문
sfxx--관념분별이-실재가-아님을-밝히는-방안에-대한-논의.txt.htx
sfxx--관념분별이-실재가-아님을-밝히는-방안에-대한-논의.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14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생각해보면 연구실에서 지내다
이처럼 더 이상 그 모습을 보기 힘들게 된
인턴연구원들이 꽤 있다.
사진이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한때 연구실에서 본인을 괴롭히던 이 인턴연구원들은
지금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찾아내기 힘들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기운이 빠지고 우울해지게 된다.
그래서 옥상 기지에서
향 공양을 하고 쉬면서 음악을 들으려 하니
이전에 들었던 곡이 또 들린다.
저런 사진과 같이
일정한 부분이 a 이다.
a 가 저렇게 서 있거나
뛰거나 놀거나 하고
이리 왔다가 저리 가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애착을 갖고 집착을 하게 되는데
부처님이 지적하는 문제현상은
바로 여기에 그 모든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시정해내기 위하여
수많은 가르침을 베푼 것인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게 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 세상을 떠난 수순이는
그래도 묻어주기라도 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연구실에서 사라져 버린
인턴연구원들은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
여하튼 이전 조각글에서
이 문제를 살폈는데
눈을 뜨고 세상을 대하면
이렇게 나누고 저렇게 묶어 가면서
어떤 부분은 a 이고 또 어떤 다른 부분은
b 라고 생각을 일으키는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이
그런 감각현실에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부터가
전도 망상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러한 감각현실을 얻고
그러한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이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면
아예 감각도 하지 않고
관념분별도 얻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탐욕이나 분노가 문제라고 지적하면
아예 좋다 나쁘다라는 느낌이나 감정 판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데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그런 관념분별을 하고,
그 내용이 실재나 감각현실에도
그처럼 있는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며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하고
그에 접착되고
일으키는 반응들을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얻되
그것이 그런 내용이 아님을 잘 이해하고
분별을 하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만,
그에 접착되지 않고
그에 탐욕과 분노로 대하지 않으면
그 하나하나가 그대로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하며
그것을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을 하기에
중생들이 살생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판단을 한 다음
그에 대해 어떤 자세로 반응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좋다고 본 다음
그에 탐욕을 일으키고 접착되어 반응하거나
또 나쁘다고 본 다음
그에 분노를 일으키고 접착되어 반응하면
그로부터 모든 고통을 받아 나가므로
이를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제거하라는 것인데
그 부분을 제거하라면
아예 감각도 하지 않고
관념분별도 하지 않고
좋고 나쁨도 따지지 않고
아예 그런 감각이나 분별과
기억이나 계산도 못하는
바위처럼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수행목표라면
독극물을 구해 감각기관에 주입해
감각을 못하는 상태가
수행목표라고 보는 것과 같다.
이를 꿈을 놓고 비유하면
꿈이 실답지 않음을 깨닫고
꿈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그에 접착되어
꿈내용으로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또는 꿈의 내용에 바탕해 무엇을 행하려고 하지 말라고
현실에서 제시한다면
그것은 그런 부분을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지
꿈 일체가 문제라거나
꿈을 꾸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감각을 하고
그에 대해 이 부분과 저부분을 묶고 나누며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얻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놓고
그런 분별 내용이 그런 현실에 실답게 있다고 여기거나,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 실재한다고 여기는
부분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분별한 내용이 본래 그 각 바탕에
그렇게 얻을 수 없는데도
그것을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고
그런 분별과 그 좋고 나쁨에 집착하여
탐욕과 분노의 반응을 해나가므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처럼 각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놓고
그에 접착되어
그런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구하니
그것도 문제이지만,
그 상태에서 행하는 그 반응들이
그 감각현실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그런 상태를 전제로 할 때는
그 모든 것이 고통을 주게 되는 사정이 문제인 것이다.
이를 불교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이는 경전에서 다음의 관계로 제시된다.
...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태어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나락가(那落迦-지옥)이나
방생(傍生-축생)이나
아귀(餓鬼)나
천상이나
아소락(阿素洛-아수라)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
fr 해심밀경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결국 이는
무명 전도망상 번뇌 => 업 => 생사고통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혹-업-고의 관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데
여기서 문제는 생사고통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을 그것을 겪는 그 현장에서 바로 제거해내던지
아니면 그런 현장에 이르기 이전에
그래도 조금 더 여유가 있다고 보는 상황에서
장차 고통의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을
미리 제거하던지 해야
그 생사고통의 문제가 해결되기에
그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수행을 할 필요성이 제시되는 것이다.
앞에서 중론송에서
복잡한 논의를 일부 제시했는데
그런 주제를 놓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그 자체가 목표라기 보다는
이를 통해서
고통을 당장 받는 현장에서 고통을 제거해내고
또 장차 고통을 받는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미리 수행의 방향으로 진입하여 원인을 제거할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귀로 무언가를 듣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고 하는 가운데
이렇게 나누고 저렇게 묶고 하면서
어느 부분이 a 이다라거나 아니다 등으로
분별을 일으키는데
그런 현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이를 통해서
전도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런 감각현실에 그런 관념분별내용이 있다고 여기며
그 감각현실을 붙잡고 취하고 머물고 행하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의 경전상 표현으로는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고, 상에 집착하고,
그런 색수상행식을 행하는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등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라는 것은
눈을 떠 모습을 일체 보지 말라거나
그런 모습에 대해 일체 생각을 하지 말라는 요구가 아니고
눈을 떠서 보는 모습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집착하면서
매번 행해나가는
그런 생각과 말과 태도 자세 행위를
모두 제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그것은 실다운 자신이 아니고
굳이 자신을 찾는다면
그런 내용을 매 순간 얻어나가는 정신이고
또 매 생마다 그런 생명형태에 얹혀
그런 정신을 분화시키고
생을 맞이하고 보내게 하는
근본정신을
오히려 그런 주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령 그런 근본정신을 놓고
그것이 진짜의 나라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일으켜도 문제인데
그런 정신이 받아들인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하니
이것부터가 뒤바뀐 것이다.
각 생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근본정신에서 처음 분화되는 제 7 (말나)식이
처음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해
아견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되고,
이후 감각을 맡은 정신이 내용을 받아들이고
다시 그 가운데 일부분을 자신이라고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마음에 손님과 티끌처럼 들어오는 그런 일시적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그에 집착하며 그에 바탕해 행해나가니
이 바탕에서는
무한한 기간 수없이 많은 고통의 세계를
그런 형태로 계속 바꿔가며 돌고 도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망상분별을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행하고
또 다른 남에 대해서도 그렇게 행하는데
그런데 그 다른 생명들도 또 역시
자신과 상태가 비슷한 정신적 망상 편집증 질환의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서로 얽혀
그런 고통을 계속 증폭해가면서
서로 주고 받아 나가는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금 더 복잡하고 번잡한 논의 부분은 또 별도로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일단 그것은 그렇지만,
그런 상태에서 애착을 갖고
대하던 내용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이제 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여하튼 우울하고 슬픈 일이 아닌가.
조금 쉬고 이어서 이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이전 조각글에서
중론송 논의를 대강 소개했는데
막상 중론송을 대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 이 논의가 번잡하게 전개되는 사정을
간략하게 제시한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사정이 이렇다.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영희라는 인물이
저기에서 이쪽으로 오며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을 보고 듣고 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 대부분 그 상황을 놓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영희는 선생님이다.
영희가 저기에서 이리로 온다.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영희가 남이 아닌 자신인 경우에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자어로 표기하면
상(相))과 상(想)의 관계라고 표시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면
그것이 곧 아상(我相)과 아상(我想)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폈는데
감관을 통해 감각현실을 얻게 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할 때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실답지는 않지만,
그런 내용을 각 상황에서 일으켜 얻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그 주체가 이 내용을 놓고
이를 대하는 기본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우선 상(相))과 상(想)의 글자를 보면
나무 목(木)과 눈 목(目)이 결합하여
모습 상((相)이란 글자를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자에 마음 심(心)을 붙이면
생각 상(想)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의 내용과 문제상황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글자대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나무의 모습을 얻는 상황을 생각하자.
그 경우 그런 모습은
감각현실로 상(相-모습 Lakṣaṇa)을 생생하게 얻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이제 일정한 부분을 나누고 묶는 가운데
그 가운데 일정한 부분은 나무라고 생각하며
나무라는 상(想-Saṃjña ) 일으키는 것이다.
감각을 하며 생각을 동시에 하여서
이 두 내용이 마음에 동시에 있을 때
일단 이 둘을 구분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눈을 감아보기로 하자.
이 경우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에 대한 생각은 계속 할 수 있다.
이 경우 그런 생각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렇게 마음에서 일으켜
마음에 얻고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상(想-Saṃjña )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 내용을 얻지 못하고
눈을 뜨면 그 순간 바로 얻게 되는 내용이 또 있다.
이것이 곧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의 내용으로서
상(相-모습 Lakṣaṇa)인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주체가 얻는 두 내용을 놓고
온갖 망상분별과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상황을 비유하여
어떤 이가 길에 떨어진 껌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어느 순간 생각한 다음
그 껌을 다른 이가 밟으면
불과 같이 분노를 일으키면서
그 상대에 가서 따지고 발로 차고
또 그로 인해 상대로부터 다시
얻어 맞고
고문틀에 묶여 고통을 당하고 한다면
얼마나 그 상황이 엉터리이고 우스꽝스러운가.
그런데 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생명이
그와 같이 행하면서
지옥이나, 아귀세계나 축생세계에 묶여 끌려가서
그렇게 임한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 원인은
처음 무언가 껌과 같은 것을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임하게 된 첫 단계에서
그렇게 얻는
상(相-모습 Lakṣaṇa)과 상(想-Saṃjña )을 놓고
이에 대해 그처럼 뒤집혀 거꾸로 분별을 하고
그에 집착하고 임하게 된 것이
가장 근본 원인인 것이다.
그러니 이 첫 단계의 내용을
하나의 정지화면으로 놓고
여기서 무엇이 잘못된 판단이고 반응인가를
면밀하게 잘 헤아려
자신이 놓인 상황 자체를 스스로
잘 깨닫고
이런 묶임에서 벗어나오는 것이
수행의 핵심사항인 것이다.
원래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일으키는 본 바탕인
실재(원성실상)이나
또 이를 바탕으로 일으켜 현실에서 내용을 얻게 되는
상(相-모습 Lakṣaṇa-의타기상)과
상(想-Saṃjña - 변계소집상)자체는
그 상태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이 제거된 상태에서 얻고 대하는 이들 내용은
그 자체로 생사 고통의 문제가 본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각 주체는
이 재료를 가지고
곧바로 망상을 일으키고
그런 내용이 다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켜서
자신의 생각을
그 모습에 접착시키는 가운데
그 모습을 대하고 행위해나가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처음 눈으로 나무의 모습을 얻을 때
그 상황은 상(相-모습 Lakṣaṇa)이란 글자가 나타내듯,
나무 목(木)의 모습을 + 눈 목(目)이 대해
그런 내용을 얻어낸 것과 비슷한 상태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첫단계에서
각 주체가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정신이 얻어낸 그런 내용과 모습을 놓고
그것이 곧 그런 모습을 얻게 한 '외부대상' 자체라고
착각을 일으키는 점이다.
그런데 현실의 판단과정에서
이런 착각을 일으키지 않고 현실에 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과학자나 철학자나 논리학자나 일반인이나
기본적으로 대부분 이런 오류를
평생 시정하지 못하고
생을 시작하고 그 상태로 생을 마치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확인해보자.
자신이 지금 막 눈을 떠서 모습을 보는 가운데
다시 책상 위에 있는 연필 하나를
손을 뻗혀 만진다고 해보자.
자신이 눈을 떠서
그렇게 손의 모습도 보고
연필의 모습도 보는데
자신이 눈으로 본 그 연필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이것이 첫 문제다.
손을 댈 때
손이 대하는 그 부분이 연필 모습이라면
그 연필 모습을 손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눈을 떠서 나무 모습을 얻을 때도
그렇게 눈이 대하는 외부 대상도
바로 그 부분의 나무 모습이 곧 자신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대부분 범하게 되는 잘못된 판단으로
거꾸로 뒤집힌 판단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판단을 평생 행하면서
생을 시작하고 그 상태로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다음에 다른 생명형태로 생을 시작할 때도
또 사정이 그와 같은 것이다.
처음 자신의 정신이 받아들인 그런 내용을 놓고
그렇게 얻는 내용 가운데 일정한 한 부분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 자체라고
오류의 판단을 할 때
스스로 이 오류를 바로잡고
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오류를 시정하게 되면
이제 자신이 얻고 문제삼는 그 일체의 내용은
모두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고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은
이런 내용 안에는 없다[유식무경]고 선언하게 되지만,
그러나 이 상태에 이르는 것 자체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
한편
두번째 전도몽상 증상으로는
자신의 정신에 얻어 놓은 감각현실 내용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영희나 나무라고 생각할 때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 자체는 일단 문제가 아니라 할 것이지만,
현실에서 앞과 같은 바탕에서
그처럼 생각을 일으키는 입장은
대부분 그로 인해 곧바로 전도몽상 상태에 들어가므로
현실에서 이런 생각 분별을 갖는 것은
그 대부분이 곧바로 문제 상황에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처음 감각현실 부분을 나누고 묶어
일정한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할 때
그런 관념분별을 행하는 정신이 상대하는 대상은
그런 감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 내부대상]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이 그렇게 나누고 묶어가며 생각을 할 때
그런 나뉨과 결합이
감각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생각을 하면
이제 그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대로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되고
그런 바탕에서 이후 생각을 진행하고
그런 바탕에서 그 감각현실 부분에 접착되어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그 감각현실부분을 마음으로 취하고
그 부분에 머물러 접착된 상태로 임하고 행위 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망상 분별의 시작 부분이다.
경전에서
상을 취하고
상을 머물고
상에 집착하고
분별하여 색수상행식을 그와 같이 행하고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내용들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주체가
그런 감각기관을 통해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분별을 일으켰다는
전반적인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런 생각내용은
그렇게 관념분별을 행하는 영역에서 일으킨 것일 뿐
그런 분별내용과 그 감각현실은 본래
그렇게 접착되어야 할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이후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가운데
계속 그 부분에 집착하여
그 부분에 스스로 접착된 상태로 생각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받아 나간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슨 희망을 갖고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추구하고 노력한다고 할 때도
다 그런 바탕에서
모든 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후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자세를 취하는 것이
모두 이 바탕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자신이 병들고 죽어서
스스로 고통을 느낀다고 할 때도
자신이 집착을 갖는 그런 부분이
그렇게 된다고 여기기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임하는 것이다.
또 누군가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그렇기에 자신도 그 상대를 해친다고 하면서
서로 고통을 주고 받고 하는 경우에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고 업을 행하면
그에 따라 감각현실도 변화하는데
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하나같이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죽 이어 따라가면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어느 상황부터는
양적인 변화가 쌓이고 쌓여
어느 임계점이후에는
완전히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그 몸 형체도 달라지는 가운데
그가 대하는 상황도 달라지고
한마디로 말로만 듣고
평소 설마설마 그런 세계가 있겠는가 하던 지옥이
드디어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계속 생생하게
그런 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고통을 직접 매 순간 생생하게 받아나가는
그 현장의 상황도 문제라고 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매 순간 그런 세계로 묶여 끌려갈 원인이 되는 업을 행하여
그처럼 그런 세계에 묶여 끌려 들어가는 부분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부분을
각기 잘 해결해내는 것이
곧 수행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 현실에서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놓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행위하던
그로 인해 이후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고
또 그 어떤 상황에 놓이던
어떤 주체가 그로 인해 그 내용으로 당장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그 모든 내용을 다 그저
정말 실답지 않은 유희로 알고
그냥 다 이를 허용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선 그런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는 업을 행할 때는
그 주체는 그런 고통을 직접 당장 받지는 않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지만,
나중에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 상황에서 그런 상태를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고통을 그대로 다 받아나가는 것이다.
처음 무언가를 놓고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살피고 논의하는 것은
현실에서 당장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주지 않고
쓸데없고 한가한 논의라고 여기며 무시하기 쉬운데
그러나 그렇게 매 순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고통의 결과를 받게 만드는 기본 원인은
매상황을 그렇게 뒤집힌 상태로
거꾸로 대하고 생각하는 전도된 망상 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이 사실은 가장 근본 원인인 것이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그 자신이 생사고통을 받고
지옥 아귀 축생세계로 묶어 끌려 가게 되는 것이고
또 그처럼 그런 세계에 묶여 처하게 되면
그 상태에서 현재처럼
매 순간 생생한 내용을 얻고 대하면서
고통을 그대로 다 받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래서 이 두 부분이
모두 문제인 것이다.
결국
1- 당장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것을 그렇게 보고 고통을 받는 것
2- 또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로 끌려갈 업을 그렇게 보는 가운데 행하는 것
이것이 모두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처음
현재 정지된 단면을 하나 놓고
그것을 자신이 대하는 가운데
생각하는 내용들의
본 정체가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해하여 깨닫고
처음에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의 묶임에서
풀려나는 것이
처음 해탈을 얻는 한 방안이고
다시 그런 상태에서
이후 그런 고통을 받는 상황으로
묶여 끌려가게 만드는 업을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로
수행을 통해
그렇게 만들어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해내는 것이
그 다음 방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추가되는 수행은
자신도 그렇게 하여
그런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다시 다른 중생도
그런 상태에서 풀려나고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가지 않도록
수행에 진입하게 하는 것이
그 다음 목표가 되는 것이다.
>>>
처음 어떤 주체가
상(相-모습 Lakṣaṇa)과 상(想-Saṃjña )을 얻고
그것이 나무가 되었던 영희가 되었던
그와 관련해서 뒤집힌 상태로 일으키는
전도몽상 문제는
이후 그 본 정체에 대해 논의할 때
문제삼는 실재나 실체의 존부 문제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진행된다.
서양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과거에 이런 논의가 진행된 적이 있다고 한다.
영희를 선생님이라고 칭할 때
영희는 자신이 눈을 떠서 볼 때
그가 대하는 정지단면에서
그에 해당한다고 보는 내용을 직접 얻게 되기에
그런 영희는 실재한다고 보는데
그러나 영희나 철수 명숙...이런 이들이
모두 선생님의 역할을 하기에
이들을 함께 공통적으로 선생님이라고 칭한다면
그런 선생님은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서는 직접 상응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고 단지 명칭 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상당히 유치한 수준의 논의라고 보는데
여하튼 그런 논의에서
서양철학사 상으로는
유명론(nominalism, 唯名論)과 실재론의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재라고 표현하는 내용을
불교에서 말하는 실재라는 표현과
의미가 같다고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유명론과 실재론에서는
영희라는 내용은
감각현실에서 그에 해당한 내용을 직접 감각을 통해 얻는다고 보고
그렇기에 실재한다고 칭하는 것이어서
불교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다른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철학자들이 당시 문제삼았던 것은
그렇게 영희에 해당하는 내용은
곧바로 감각현실로 얻고 그 안에서 찾을 수 있기에
실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단지 보편개념에 해당하는 선생님이나
사람 등과 같은 유개념을 놓고 살피면
감각현실에서 그에 곧바로 상응한 내용을
찾아낼 수 없다고 보기에
그런 내용이 실재하는가를 놓고 따진 것이다.
물론 이 논의도 깊게 들어가면
과연 당시 이에 대해 논의한 철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했고
각 표현으로 어떤 내용을 나타내고자 했는가를 놓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야 하기에
대단히 번잡하게 되기 마련이다.
다른 이의 생각을 살피기 위해
그가 쓴 모든 저술을 다 살피고
각 표현이 나타내고자 하는 본의를 찾아나서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것은 자신이 쓴 과거의 글을 놓고 살펴도
사정이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외국어를 번역해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고
사정이 더 심한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내용을
당시 문제삼고 논의했다고 하니
대강 그처럼 그 내용을 개설적으로
대강 살피고 넘어가는 것이 편한 것이다.
참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8418&cid=41978&categoryId=4198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650&cid=41799&categoryId=41800
그런데 여하튼 그런 문제에 대해
과거에 정말 어떻게 논의가 되었는가 여부를 떠나
일단 오늘날
앞과 같은 문제가 현실에서 제기되고 문제되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과거 철학자들의 논의를 떠나서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
예를 들어
저기 오는 저 사람이 영희인데
영희는 그렇게 감각을 통해 그 내용을 직접 얻기에 실재하고
영희를 선생님이라고 할 때는
선생님은 거기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영희를
사람이나 동물이나 생명이라고 관념할 때도
이 각각의 내용이 다 그런 성격을 갖는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 그런 보편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서 얻어진다고 보는가.
이런 문제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 사람, 동물, 생명과 같은 보편개념뿐 아니라.
영희라고 칭할 때
그 영희라는 명칭까지 포함하여
이 모든 관념분별이
하나같이 관념분별인 것으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에서
그런 내용이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어진다고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모두 엉터리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어떤 이가 영희라고 보는
그 부분을 놓고 보아도
사정이 같다.
자신은 그 부분을 영희라고 칭하고 관념할 때
그 내용이 대단히 구체적인 관념이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영희도
1 밥 먹을 때 영희
1 그리고 일어나 걸을 때 영희
1 여기 있던 영희
1 저기로 간 영희
이렇게 놓고 보면
영희가 한 둘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모두를 다 나열해 놓고
이들을 다 함게 영희라고 칭하게 할만한
공통되는 어떤 내용이
그 각 부분들에서 얻어지는가.
그런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따지면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구체적으로
감각현실의 단 하나의 정지된 단면을 고정시켜 놓고
그 어느 특정 부분만 영희x 라고 구별해 칭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 부분은 감각현실인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칭하는 내용은
그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 관념분별이거나 언어인 것이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가 처음부터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
앞에서 제시한 서양철학자들의 논의에서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때
그에 상응한다고 보는 감각현실을 직접 얻을 수 있으면
이와는 달리
그런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관념분별들
예를 들어 평화나 아름다움 이런 추상개념이라거나
각 관념을 엉터리로 조합시켜 새로 만들어 낸 관념
예를 들어 털이 있고 하늘을 날라다니는 거북이
또는 수학적으로 만들어 낸 허수 이런 관념과 달리
그런 경우는 그 내용에 상응하는 감각현실의 부분을
현실에서 얻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사정으로 그런 관념은 다른 관념과 달리
현실에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이들 모두가 다 함께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념분별은 어디까지나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으로서
그 관념분별에는
그것이 가리켜 상응한다고 여기는 감각현실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또 아무리 그런 관념분별이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에 상응한다고 여기고
또 그런 부분을 그 관념이 가리킨다고 여겨도
정작 그 감각현실 자체에서는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 얻은 감각현실에
자신이 나누고 묶은 내용처럼
영희나 바위 꽃 등이 먼저 그렇게 나뉘고 묶여서
그렇게 물체로서 존재한다고 당연히 전제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각 부분을
그런 관념으로 나누고 묶어 가리킬 때
그런 영희나 바위 꽃 등은 한편으로 관념분별이면서
또 그에 해당하는 감각현실 부분은 또 그와 같은 내용이라고
당연히 전제하고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현실을 얻는 것은
그런 나뉨과 묶임이 없이 전체로서 그냥 얻는 것이고
그것을 그처럼 이렇게 묶고 나누는 것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행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관념은 구체적 관념으로
직접적으로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으로서 물체를 가리킨다고 여기고
어떤 관념은 유개념이나 추상개념 보편개념으로서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가운데
구체적 관념은 마치 보편관념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른 것처럼 여기는 가운데
위 논쟁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인 '실재'의 영역을 놓고 살피면
이들은 다시 하나같이
본바탕의 내용이라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들도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 실재여부를 논의할 때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주로 논의를 하기에
그래서
어떤 관념에 상응하는 내용을
감각현실 영역에서 직접 얻는가 여부로
실재 여부를 논의하는 앞의 논의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사정이 그와 같은데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들 내용의 관계를 매 순간 그렇게 보고 임하기에
그에 바탕해서
그 이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내용들도
하나같이 모두 뒤집힌 상태에서 일으키는 업이 되고
그 업으로 인해
결국 그 주체는 세세생생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정이 이러므로
이런 망상이 출발하는 첫단게에서부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시정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그런데 그와 같이 온갖 형태로
망상 분별을 전개하고 그 내용을 고집할 때
그런 생각들이 하나같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키는가가
용수보살의 논의 초점이었다면
논의초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대부분
그런 전도 몽상분별을 그처럼 행하고
온갖 사견을 고집하며 주장할 때
그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일체는
결국 그가 그처럼 감각현실로 얻거나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관념내용을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그 일체의 존재는
결국 이 안에 있는 어떤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제시하게 되는 내용은
이처럼 각 주체가 무언가가 있다 없다고 따지는
그 온갖 '일체'는 모두 그런 영역 안에 있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6 근 - 6 경 - 6 식의 내용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는
눈 - 색 - 눈과 관련된 정신
귀- 소리 -귀와 관련된 정신
...
의근 - 법(관념분별) - 분별과 관련된 정신
이런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존재를 문제삼는
그 일체는 그것이 어떤 것이던
이런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처음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론송에서는
그렇게 망상분별 상태에 있는 이들이
있다 없다를 가지고 논의하는 그 일체의 것을 놓고
그런 차원에서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시 그런 내용들이
그 본 바탕에 해당하는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으로 실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초점으로 하여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재의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문제삼는 일체의 내용은
하나같이 실재 영역에 실재하지 않고
따라서 실답지 않은 내용을
그렇게 얻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본 바탕에서
각 주체의 정신이 '관계하면'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을 그처럼 얻고
그것을 주장하고 문제삼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증론송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들 각 주체가 주장하고 고집하는 내용은
실재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실답지 않은 망상임을 밝히는 것을
초점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재는
각 주체의 정신과의 '관계를 떠난' 것이어서
한마디로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깃이어서
현실에서 직접 그 내용을 얻어내
주장에 제시하거나
비판의 근거로 삼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장자가
자신의 정신에서 얻는 내용을 가지고
실재도 그렇고 그래서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망상적 주장을 행하니
그 잘못을 이해시키기 위해
상대가 얻고 주장하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실재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
그런 내용을 실재에서는 그렇게 얻을 수 없다는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논의과정에서
정작 문제되는 실재를
그 누구도 직접 얻어 제시할 도리가 없으니
그런 상태에서 진행하는 이 논의가
복잡하고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정신이 관계해 얻게 된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들로서
감각현실내용과 관념분별의 내용으로
온갖 주장을 세워
그것이 곧 실재하는 내용이고 실다운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고집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런 상태에서
이런 상대가 일으키는 망상증을
어떻게 해소시켜줄 수 있는가가
논의의 초점이고 핵심인 것이다.
이 논의에서 문제되는 실재의 내용을
이 가운데 그 어떤 이도 직접 얻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이런 논의를 진행하게 되므로
상황이 답답한 것은 사실인데
여하튼 이런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하고
논의를 살펴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여하튼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가운데
이렇게 생활하는 자신이나
다른 이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확인하고
각 순간에 무언가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니
이 각 부분을 잘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번잡해 보이지만,
현실에서 무언가를 놓고 그것을 a 라고 볼 때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
사실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을
눈으로 얻는 색깔
귀로 얻는 소리
이런 식으로 색,성,향,미, 촉을 나열할 때
이들 내용은 다시 넓은 개념으로 색이라고 묶어 제시하고
이런 내용을 앞에서 상(相-모습 Lakṣaṇa)이라고 표시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어떤 주체가 분별하고 생각하는 내용은 그와 달리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으로서
상(想-Saṃjña )이라고 표시하여 구별한다고 할 때
결국 우리가 대하고
그 내용을 얻는 세계나 자신의 일체의 내용은
이런 성격을 갖는 두 차원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색과 무색의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한 주체에서는 이런 내용이 결합되어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므로
삶의 시작단계에서는 이런 상태를
명색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명은 앞에서 말한 상(想-Saṃjña )과 관련된 내용들이고
색은 앞에서 말한 상(相-모습 Lakṣaṇa)과 주로 관련된 내용들이다.
이들 내용이 그런데 모두 다 마음 안에서
얻어지고 머무는 내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에 대해 물질과 정신이란 표현을 여기에 붙이기는 곤란한데
그러나 이미 기존의 망상상태에서는
자신의 마음에서 감각과정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들 예를 들어 색이나 소리 등등을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며 물질이라고 관념하는 것이고
다시 이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게 되는 내용은 이와 달리
정신적 내용이라고 관념하므로
결국 명색은 그런 입장에서는
그런 물질과 정신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자신이 대하는 세계의 구성요소는
기본적으로 위와 같다는 것도
이 기회에 이해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처음에서도 지적했듯
이 각 재료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생멸이나 생사고통도 얻을 수 없고
문제가 없다고 보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 재료를 얻고
이를 대하는 주체는 일반적으로 대부분
이들을 망상분별을 일으켜
서로 관련시켜 대하는 것이므로
이들을 재료로 한 3 계 6 도는
하나같이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생사를 받아나가는 문제상황인 것이다.
앞에서 색계나 무색계는
그 성격이 제시된 셈인데
그러나 욕계의 기본 성격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욕계는 바로 위와 같은 바탕에서
각 생명이 이들 재료를 놓고
어떤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일으켜
어떤 희망을 갖고 임하는 과정에서 부터
그 세계가 구분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희망이란 관념영역에서
만일 (좋다고 보는 내용)이 있게 되면 좋을텐데라는
구조로 분별을 일으키는 가운데
감각현실을 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희망으로
분별과 감각현실을 놓고
관련시키며 양 내용을 대하는 것이다.
처음 분별이 망상인데
이런 희망을 통해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서
그 망상의 부작용이 이처럼 심화된 상태가 되면
그로 인해 이를 전제로
각 상황에서 고통과 공포를 겪고 대하는 지옥의 세계와
그 반대로
각 상황에서 즐거움과 희망과 의욕을 일으켜 대하는
하늘의 세계가 구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준해
다시 아귀나 축생 인간 아수라의 각
세계가 또 나누어 시설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하는 세계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 이외에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얻게 되는 세계의 내용이
달리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연구과정에 필요하니
혹시라도 위와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내용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긴급하게 메일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문제삼는 세계의 일체가
다 그런 것이다라는 명제는
상당히 중요한 기본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깨뜨리는
어떤 내용이 따로 있다면
그것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문제삼는 모든 것은
그처럼 6 근 6 경 6 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을
놓고 일체라고 한다는 명제는
오래전부터 제시된 것이고
그것은 아직 부정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행을 행하고
정려 수행을 행해 나가게 되면
앞과 같이 욕계에서 행하는 그런 망상이 해소되고
점차 그런 문제가 해소되어
색계의 하늘 세계에 진입하고
무색계의 하늘세계에 진입해서
그 세계에 태어나 살아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각 내용을 놓고
그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느 것이던
이들 내용을 놓고
그 정체를 정확히 깨닫고
그에 바탕해서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찾아
그 안에 들어서야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얻고
비로소 이런 3 계 6 도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
니르바나의 상태를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 니르바나의 상태란
본래 그 각 주체가 임한
그 상태가 본래 그러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본 상태를 놓고
각 주체가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갖고 임한 이후부터
그처럼 무색계 색계 욕계의 각 세계에
묶여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고 수행에 임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상하다는 것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인데
그런데 알고보면
수많은 것이 그렇게 평소에
다 사라지고 무상한 상태로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이 조금 애착을 갖고
집착을 갖고 대하던 것들을 놓고
그것을 주로 문제삼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그런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 사항인 것이다 .
그리고 그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그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노력이
다시 요구되는 것이다.
[...]
앞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내용을
상(相-모습 Lakṣaṇa-의타기상)과
상(想-Saṃjña - 변계소집상)이라고
표현하는 가운데
이들이 모두 한 주체의
정신에 맺혀 얻는 내용들임을 제시했다.
그래서 이들 내용이
과연 정신자체와는 어떤 지위에 놓이는 내용인가가
다시 문제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시 다음과 같이 놓고 살펴보자.
자신의 정신이 색상이나 소리를 감각현실의 내용으로 얻을 때
그 내용이 곧 그런 정신작용을 하는 정신 그 자체인가.
이렇게 문제를 내고 살펴보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 문제에서는 기존에 제시한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일반적으로 1 이 눈을 떠서 보면
위와 같은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1 은 먼저 다른 세계의 모습과 함께
그림에서 1과 같은 부분의 내용을 얻고
그런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1 이 다시 2 와 같은 다른 이를 관찰하는 상황을
위 그림이 나타낸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눈을 떠서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는
그 내용이 어떤 지위에 있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런 내용을 얻고
잘못 거꾸로 뒤집혀 전도 몽상 분별을 일으키는 가운데
그렇게 얻은 내용을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 자체라고
잘못 판단하게 되는 사정을 제시했는데
그 사정이 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1 이 4 라는 꽃의 모습을 보면
그것을 자신이 그 모습을 얻게 된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관찰하는 2 를 놓고
이 상황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쉽게 된다.
2 가 눈을 뜨면 무언가가 보인다고 보고하고
눈을 감으면 다시 그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1은 그 상황에서 별 변화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변화는 2 의 영역에서 그처럼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고
그 내용을 위 그림에서 5 ^ 처럼 그려 놓고
추리를 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이 추리도 사실은 엉터리이지만,
일단 이런 추리가 이 상황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 가 그의 마음 안에
5 ^ 와 같은 모습을 얻는다고 추리하고
이 상황을 지켜본다면
그것이 바로 1 이 눈을 떠서
위와 같은 모습을 얻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1 이 눈을 떠서 얻는 그 일체의 감각현실은
일단 1 의 마음에 얻는 내용이고
그것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1 이 평소
자신의 손이라고 보는 것을 뻗어
4 라는 꽃을 만진다고 여기는 상황도
이에 준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2 를 놓고 볼 때
그런 모습을 5 ^ 영역에서 얻는다면
그런 내용이 서로 대상과 주관이 되어
어떤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미 이런 내용에 대해 반복해 기술하였는데
그러나 좀처럼 현실에서
그런 전도 망상
즉 뒤집혀서 그 관계를 이해하는 증상이
잘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먼저
그렇게 얻는 감각현실과
그런 내용을 얻는 어떤 주체의 정신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 정신이 얻어 놓는
위와 같은 감각현실의 내용이
곧 그런 정신작용을 행하는 정신 그자체인가를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정신 그 자체가 곧 그 정신이 얻은 감각현실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그렇지는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다음 의문을 제기해보자.
그렇다면 그런 내용이
그런 정신을 떠나서 얻는 것이고
정신과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 역시
그렇지도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정신과 정신이 얻은 내용과의
관계는 조금은 미묘한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정신에 얻는 내용들이
정신 작용을 행하는 정신 그 자체는 아니므로
이들 내용을 일단 정신과는 구별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전도몽상 상태에서
이를 분별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대하는 색상과 소리 등을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외부 대상이고
자신의 주관적 정신과는 구분되는 '물질'로서
객관적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관념하는 한편,
이에 대해 그 각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등의 관념내용은
다시 정신작용이거나
정신적 내용이라고 보고
앞과는 구분해서 관념하는 사정을 보았다.
이처럼 뒤집혀 분별을 행하는 상태에서는
그처럼
세계를 물질과 정신이라고 이분적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눈을 통해 보는 색깔이나
귀를 통해 듣는 소리를 무엇이라고
보는가하면
그런 외부세계의 객관적 물질로 보는 것이고
자신이 이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은
그런 물질과는 다른 것이라고 또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그 내용들이 모두 하나같이
정신 안에서 얻고 그 안에 머무는 내용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기존의 그런 내용을 참작해서
감각현실은 색, 성, 향, 미, 촉을 모두 포함해
넓은 의미로서의 색의 범주에 넣어 분류하고
이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의 내용은
그런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얻어내는 정신도 아니기에
'비색 비심 불상응행의 법'이라고 일단 명칭을 붙어 시설하고
이 범주에 분류해 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얻어내는 정신이나 정신 작용은
다시 심과 심소의 내용으로 다시 분류해 넣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 색이나 불상응행법들이
그런 심을 떠나서 얻는 것이고
그래서 심과 떨어져 있는 것인가를 검토하면
다시 그렇지는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은
일단 크게 이런 범주로 묶어 제시하고
이들은 모두 마음과 마음 안에 머무는 내용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에는
정작 이들 내용을 그처럼 얻게 한
외부 실재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제시하는 사정까지
살핀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을 놓고
다시 그 본 정체가 무언가를 다시 살피는 것이다.
.
중론송에서 이들 내용을 놓고
이들이 실재가 아니고
실다운 내용이 아니며
실재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실재에서는 그처럼 무엇이다 아니다 등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인데
여하튼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고 문제삼는 이런 내용들은
하나같이 실재 자체의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내용을 놓고
각 주체가 그것이 실재의 내용이고
실다운 내용이라고
분별하고 주장하고 고집을 세우니
결국 이들이 얻는 그런 내용을 통해
다시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왜 그런 논의가 필요한가는
역시 이미 앞에서 살핀 취지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잘못 보면
본래 그런 상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행하는 상태에서는
그 주체는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여 버리고
그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첫단계에서 이 내용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그리고 나아가
왜 이번 생에서
그 자신이 그런 감관이나 그런 상태로
이런 내용을 그처럼 얻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 업을 계속 죽을 때까지 하게 되는가를
잘 헤아려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결론만 제시하면
그런 상태에서 업을 행하면
근본정신에 그런 내용을 씨앗[종자]형태로 저장해 두게 되고
이제 생을 마치면
그 근본정신에 저장된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그 근본정신은
그런 업에 상응하는 세계에 나아가
그에 상응한 생명형태에
의탁을 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그 초기의 생명형태에 근본정신이 얹힌 가운데
그 초기의 생명형태가 갖는 명색( 앞에서 살핀 물질과 정신의 결합상태)를
유지 발전시키고
그것은 다시 그런 정신을 분화시키고 유지시키는
상호관계를 통해서
점차 생명형태가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현재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아주 작은 세포 형태로 있다가
그것이 점차 발달하고
각 감관이 생성 발달되는 가운데
독립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출생하여 생활하는 가운데
아이가 되고
그리고 청소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 상태에서 처음
근본정신이 과거의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일으킨 업에 의해
각 세계에 나아가 각기 새로운 생명형태에 얹히게 되면
처음 이 근본정신이 분화시켜 내는 제 7 말나식은
그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집착하고 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아이가 태어날 때
밀가루나 일정한 바이러스나 세균을
처음 어머니의 몸 안 등에서 대하는 가운데
어떤 것은 자신의 생체의 물질이라고 관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며 달리 대하는 상황에 비교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태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한 아이가
어떤 것을 자신의 생체와 친한 물질로 대하게 되거나
그렇지 못하게 되는데
초기에 그렇게 되지 못하면
이후 그런 물질에 대해 이후에도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는
밀가루나 땅콩을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
어떤 이는 그런 것을 대하면
그것이 자신을 해치는 적이고 외부 이물질로 대하며
반응하며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상태가 되어
알레르기 반응등을 일으키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주체가 처음 어떤 것을 놓고
그것이 자신의 몸인가
아니면 외부의 적인가.
이런 구분을 행하면서
반응을 달리하기에 그렇다고 보게 되는 현상인데
이는 처음 근본정신에서
제 7 말나식이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과정과
사정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점차
다른 제 6 의식이나
감각을 담당하는 전 5 식을 분화생성시키는데
이후 이렇게 생겨난 감관과 그 정신을 통해
세계를 대할 때도
앞과 같은 그 근본사정이 그대로 토대가 되어
세계의 내용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정으로
메뚜기는 메뚜기대로 세상을 달리 대하고
박쥐는 박쥐대로 그 상태에서 세상을 달리 대하는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각 생명마다
그 생명이 얻는 세계의 내용은 조금씩 다른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을 놓고도
눈으로 얻는 새깔의 세계와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가
서로 내용이 전혀 다른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여하튼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상태로 갖게 된 감관을 통해서
그렇게 분화된 각 정신이 얻는 내용으로
세계의 내용을 얻고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대하고 이해하는 세계의 근본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한 주체가 생각하는 그 일체의 내용은
그처럼
6 근 - 6 경 - 6 식의 범주로 묶어
모두 제시할 수 있다고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록 박쥐나 돌고래나 두더쥐나 개미 등이
각기 그 감관으로 어떤 다른 내용을 얻을것인가를
추리는 할 수 있지만,
정작 사람이 자신이 얻고 대하는 세계의 내용과 어떻게 다르고
그런 다른 생명이 대하는 세계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는
직접 확인하기 곤란한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물은 비록 하나라고 할 것이지만,
하늘은 이 물을 감로수라고 보고
아귀는 타는 불로 대하고
사람은 물로 본다는 내용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이렇게 나누고 묶는 가운데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분별을 행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자신의 정신 안에 얻는 내용이
세계의 절대적 표준이고
기준이라고 제시하면서 나아가려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그런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대로
실재가 그러겠는가 아닌가가
논의의 핵심주제인 것이다.
사람이 눈을 떠서
그러그러한 색깔과 모습을 얻고
귀로 그런 소리를 듣고
그것이 각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 본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가
본 논의의 핵심 논의 대상인 것이다.
쉽게 이 상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니
꽃으로 보이는 어떤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에서 눈을 감으니
그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눈을 감았다고
눈을 뜰때 본 그 모습이
완전히 없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더라도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내용이 따로 있는가.
그리고 그런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문제삼는 것은
꿈의 비유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에서 황금을 얻는 꿈을 꾼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는 황금을 얻었는데
꿈을 깨니 그 꿈 내용인 황금을
잠을 잔 침대에서 아무리 샅샅이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꿈에서 황금을 얻었는데
그 황금이
꿈 밖에서도 그처럼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꿈을 깨고 현실을 대하면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어내지 못하니
이런 경험을 반복하는 가운데
꿈에서 꾼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내용으로서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내용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살피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위 사정을 미리
잘 념두에 두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문제삼고 논의하는 것은
현실에서 얻는 그 모든 내용이
비록 잠자면서 얻는 꿈내용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그 성격이
위에서 본 꿈과 그 성격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그런 내용을 얻는 그런 조건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만,
그러나 그런 조건을 떠나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그 내용은 그런 본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실답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뼈대와 같은 내용으로서
그런 조건과 관계없이
언제나 늘 고정되고 영원불변한 내용으로서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는 것이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리고 그것을 얻는다고 보는 본 바탕의 실재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정신기관과 관계하지 않는 가운데
실재한다고 할 내용은
그것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신은 끝내 직접 얻어낼 수 없고 [불가득 공]
그래서 있다 없다.
무엇이다 아니다
무엇과 같다 다르다.
생한다 멸한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온갖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고 [불이법]
그래서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을 두고
그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는
위와 같은 내용을 가장 핵심적으로 파악할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사정을 올바로 관해서
꿈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듯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도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잘 관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생사 고통을 받는 묶임에서
당장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풀려나고
또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여
각 세계에서
때로는 메뚜기로 때로는 바퀴벌레처럼
축생과 아귀 지옥 세계에서 태어나
고통을 매번 받아나가게 되는
원인 행위를 중지하고
반대로 수행을 통해
그런 고통을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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