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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거사님과 불제자사이의 논의 본문

연구자료

유마힐거사님과 불제자사이의 논의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2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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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x--유마힐거사님과-불제자사이의-논의.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487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유마힐 거사가 대림역 근처에 있는 모 병원에서  

입원해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어떤 상태인가 알아보는 중인데 


일단 환자 상태가 

병 증세를 확인하는 방문객의 질문에 

자신의 병을 중생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는 등 

오락가락한 상태로 답을 해서 

환자의 증상자체를 잘 확인하기 힘든 상태인 것으로 보게 된다. 



몸과 마음 어디에서 생긴 병인가를 묻는 질문에는 

몸도 벗어났고 마음도 벗어났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또 자신의 병이라고 주장하는 상태인 것으로 보아 

결국 총체적으로 유마거사님의 

정신적인 부분에 병의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유마힐 소설경을 보다보면 

유마힐거사가 자신이 앞에 주장한 내용과 

뒤에 주장한 내용이 서로 일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하게 된다. 


유마힐 소설경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굳이 그 사례를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한 예를 들면 이렇다.  


일체 중생이 여여하고,

일체법이 여여하며, 

모든 성인과 현자도 여여하니, 

그대 미륵까지도 여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 미륵이 수기를 얻었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수기[예언]을 얻은 것이 됩니다. 


왜냐 하면 

여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기[不二不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마힐 거사님의 주장을 놓고 

현실에서 본인이나 prince 님을 보면 

본인과 prince 님이 수기를 얻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심지어 doctr 님이나 mun 님까지도 그렇다고 보아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주장은 여여함이나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님[不二不異]을 

하나의 동일함으로 볼 때만 가능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여여함에 그런 동일함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즉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다[不二不異]는 내용이 

곧 하나의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인가. 

누가 여여함이 하나의 동일함이라고 제시한 적이 있던가. 


그러나 그렇다면 

바로 그런 사정으로 

어떤 축사에서 돼지가 지낸다면 

위와 같은 불이불이의 사정으로 인해서 

유마힐거사나 부처님도 

오늘 축사에서 그렇게 돼지의 형태로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여기서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님[不二不異]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아나율이 천안통을 갖고 있는데 대해 

다음과 같이 유마힐거사는 문제를 제기한다. 


'아나율이여, 

천안으로 보는 것은 

작용[作相]입니까, 

무작용[無作相]입니까? 


만약 작용일 것 같으면, 

그 때 그것은 외도들의 5통(通)과 같을 것이고, 

만약 무작용이라면, 무위(無爲))이니 

본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데 정작 유마힐 거사자신은 

다양한 신통과  

불가사의 해탈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 때 장자 유마힐이 신통력을 발휘하자마자 

그 나라의 부처님께서 

3만 2천의 사자좌를 유마힐의 방에 들여보내셨는데, 

그 사자좌들은 

한결같이 높고 넓고 장엄하고 깨끗하였다. 

..

여기에 대해 유마힐거사가 아나율에게 

행한 질문을 적용해보자. 


유마힐거사가 하는 것은 

작용인가 무작용인가. 

작용이면 외도들의 신통과 같을 것이라고 

유마힐 거사가 주장했으니 

역시 이 경우도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용이지만 예외인 경우도 있어서 

자신이 행한 것은 그런 예외에 해당한다면 

역시 아나율의 경우도 그런 경우일 수도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또 무작용이라면 무위라고 하니 

역시 유마힐 거사가 선 보인 것도 

그 경우에는 그와 같이 생주멸 변화가 없는 무위로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 양 경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그외로 전반적으로 유마힐거사가 

주장하는 내용을 죽 대하다보면 


이 때는 이렇게 승의제 측면에서 이야기하다가 

어떤 때는 세속제적인 측면으로 이야기하는 등 

오락가락하면서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유마힐거사와 같은 분들이 

상대에 따라 수없이 다른 칼을 매 경우 달리 빼들어 

상대의 문제를 치유하고자 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유마힐거사 자신부터 

병이 걸려 있는 상태이어서 

치료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치료를 위해 

좀 더 유마힐거사의 증상 전반을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

참고로 타화자재천의 왕을 보통 파순이라고 칭하며 

마왕이라고도 한다. 


욕계의 타화자재천은 

자신과 타의 경계를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어  

욕계 안에서는 제일 수준이 높은 하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색계 무색계의 하늘보다는 수준이 낮고 

여하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어느 영역에 머문다는 것은 

아무리 복이 많고 수명이 길다 해도 

생사 생멸과 번뇌에 묶인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하튼 

유마힐소설경에 보면 

이 파순의 정체에 대해 소개가 된다. 


....

그 때 유마힐은 

대가섭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시방의 무량아승기의 세계에서 

마왕이 된 자의 대부분은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르는 보살들입니다. 


그들은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마왕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 가섭이여, 

시방의 무량한 보살에게 


손·발·귀·코·머리·눈·뇌수(腦髓)·피·살·가죽·뼈를 구걸하고, 

마을·거리·

아내·자식·하인·하녀와 

코끼리·말수레나 온갖 탈것들, 

금·은·유리·차거(車)·마노(馬瑙)·산호·호박·진주·

의복·음식 등을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보살들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방편으로 당신들을 시험하고, 

이로 하여금 

마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


유마힐 소설경을 읽다 보니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을 보는 중에 

졸리움을 느끼게 된다. 


본인이 앞에서 유마힐 소설경의 

유마힐거사의 발언과 태도에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고 제시했는데 

그러나 그 전체가 그렇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부분은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가운데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이법(不二法)의 논의에서는 

처음 유마힐거사가 

수많은 보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러분, 

보살은 어떻게 하여 

상대적 차별을 뛰어넘는[不二, advaya] 법문(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지 

저마다 생각하는 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여 수많은 보살이 답하고 난 다음 

문수보살님이 반대로 

유마힐 거사의 생각은 어떤가를 물으니 

유마힐 거사는 아무 답변도 못했다는 것이 

경전에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경전에 제시된다. 


"훌륭하고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文字)로도 

언어의 설명[語言]까지도 

전혀 없는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의 경지에 깨달아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온 세상의 모래와 바위가 다 함께 

최고의 유마힐거사와 동급이 되어서 

불이의 경지에 깨달아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래 이 문제는 

커피를 맛보고 그 맛을 

말로 설명해보라는 

유치한 수준의 문제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제기된다. 


본래 혀로 맛본 커피 맛은 

관념분별도 아니고 

또 언어의 내용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설명해보라고 요구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바위를 하나 갖다 놓으면 

그 커피 맛에 대한 설명이 이뤄진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래서 일체 침묵하는 것이 

이 커피맛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 불이라는 문제를 살필 때 

이 불이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본다.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인가. 


처음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여여한 내용이 하나이니 

한 사람이 수기를 받으면 다 받은 것이라고 하여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위에 적은 바와 같다. 


즉 다음 부분이다. 

...

여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기[不二不異] 때문입니다.

..


실재가 불이[不二]이기에 

미륵보살님이 수기를 받으면 

전 중생이 수기를 받은 것이다. 

이런 주장은 


불이[不二]를 둘이 아니니 

거기에는 동일한 하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입장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든 주장이다. 


이 경우는 

실재가 무엇인가라고 문제가 제기될 때 

왜 실재가 얻을 수 없어 공하다고 하고 

무아 무자성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와 같은 하나를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떡 제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불이[不二]가 무엇인가가 문제될 때 

둘이 아니니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쉽고 

또 위와 같은 문제로 하나도 아니라고 하면 

이제는 그러면 셋인가. 넷인가. 다섯인가 이렇게 

나아가기도 쉽고 

그것도 아니면 0 인가. 

이렇게 나아가기 쉽다. 


나중에는 왜 둘이 아니라고 한 것이고 

이것을 문제삼는 것인지 

자체를 모르고 혜매돌기도 쉽다. 



여하튼 이 불이[不二]와 관련하여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것이 분별이나 말을 떠난 상태라고 해서 


이 문제에 

그처럼 분별이나 말을 떠나 있는 바위를 

하나 가지고 와 제시하면 

답이 된다고 보는가. 


위 경우에 유마힐 거사가 답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떤 내용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어떤 내용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긍정한 것도 아니고 

또 나중에 문수보살님이 해석을 붙였지만, 

또 그런 입장인지 아닌지 

명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또 답을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그런 형태나 태도로 바디 랭귀지 형식으로 

무언가를 표현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그런 사정 때문에 

바위를 답이라고 제시한 경우처럼 답답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역시 이런 문제와 관련해 

서로 답답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공한 상태라고 볼 것이 하나 둘인가. 


만일 공이 무언가를 누가 물을 때 

이 세상에 있는 것 가운데 

공한 것을 찾아서 

만화책이 공하기에 그 만화책을 떡 제시하면 

그것이 공에 대한 답이 된다고 할 수 있는가. 


불이법이 무언가라는 주제로 논의할 때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본다. 


분명 지금 문제삼는 불이의 상태가 

분별을 떠난 상태로서  

말을 할 수 없고 

말을 떠난 상태이므로 

 그런 것을 하나 떡 제시하면 

될 것도 같은데 

그것이 위의 상황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또 문제되는 것은 

이 경우 그렇게 침묵하는 바위를 하나 답으로 제시한 것과 

다른 것을 제시한 것과는 

어떤 특별한 차이가 있는가를 

또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화책도 제시해보고 

바위도 제시해보는 가운데 

이 가운데 무엇이 공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무엇이 불이법이 아닌 것이 있는가. 

이것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불이법이나 공한 상태를 설명하는데 

어떤 사정으로 어떤 내용이 

비교적 적절한 내용이라고 볼 것인가. 


이런 문제를 또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언설을 떠난 상태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기에 한마디도 말씀한 것이 없다고 하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행한 설법들은  

기본적으로 희론인 것인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생들이 그렇게 말을 떠난 상태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러한 희론을 멈추고 떠날 수 없게 되기에 

그런 것이라고 제시하는 사정도 

이들 상황과 관련된다. 





>>>



사람의 신체를 레고 블록으로 비유하면 

사용한 레고블록 중 폐기대상들이 생기게 마련이니 

이것을 교체하기 위해 

외부에서 들여온 레고블록 덩어리를 

자신의 생체를 구성할 수 있는 형태로 부수어서 

각 부분에 이송을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물리적 분해와 화학적 분해과정을 위해  

에너지가 상당히 필요한데 

식사를 하게 되면 이런 활동에 에너지가 대부분 소모되기에 

반대로 정신적인 분야에서 이런 레고 블럭 분해 결합작업을 하던 활동은  

대신 줄어들면서 졸리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식사를 많이 하면 

공연히 쓸데없이 이런 작업을 하게 되므로 

식사량을 적절히 하고 

공연히 많이 먹고 많이 분해하고 많이 배설하는 것은  

신체에 그다지 좋지 않다는 학계의 보고를 받게 된다. 

전혀 이런 활동을 하지 않아도 문제지만, 

공연히 과잉된 활동으로 신체 전부분이 빨리 노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많이 먹다 보면 졸립게 된다. 


정신작업도 사실은 이런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쓸데없이 망상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소설이나 영화도 보고 내용을 섭취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무언가를 새로 생각하는데 

이것도 너무 쓸데없이 영양이 없는 내용을 많이 대하면 

좋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 중에 졸리운 것은 

연구 주제에 대해 자신이 85 % 정도는 대강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나머지 부분을 탐구할 때 가장 흥미를 갖게 되고 

그 이하나 그 이상은 흥미를 잃고 졸립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기 힘든데 

그 주제를 연구해 얻게 될 효용 자체를 모르거나 

내용을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만으로 가득하면 

관심을 갖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또는 반대로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만 

자꾸 반복되면 역시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되어 

졸리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3 가지 이유때문에 종합적인 졸리움을 느끼고 

있다가 

그래도 수사를 시작했는데 발표는 하고 끝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시 이어서 연구하기로 한다. 






 




>>>





유마힐 거사가 많은 수행자의 수행에 

참견하여 물의를 일으킨 내용들이 

유마힐 소설경에 제시되고 있어서 

현재 수사중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제일 사리자 

신통제일 목건련존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이분으로터 

핀잔이나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늘 송사는 한쪽 주장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양쪽의 주장을 들으면서 

판단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이미 이전글에서 유마힐 거사님이 각 방면에 

개입해서 여러자기 물의를 일으킨 내용의 

일부를 지적하는 한편 


그런 유마힐 거사님이 병이 걸렸다고 해서 

병문안을 가보니 


알고보니 큰 병은 아니고 

오히려 각종 신통력을 선보일 정도로 

건강상태가 양호함이 판명되었다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당시 여러 수행자나 

부처님을 상대로 기망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그 취지가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면 유마힐 거사님이 걸린 병명은 

무엇인가 전신피로인가 위궤양인가 


이런 것들이 하나같이 

역시 수사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문제도 한쪽 당사자만의 주장을 

듣고 수사를 진행하거나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이 내용을 살펴야 하는데 


일단 신원파악을 위한 기본 신문 단계에서 부터 

진술을 거부하기도 하고 

여래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온갖 일체와 공통된 내용을 여래에 대한 내용으로 

기술하는 등 

일단 수사에 잘 응하는 분은 아니라고 보게 된다. 


참고로 prajna 님의 도움으로 

유마힐거사님에 대한 인정신문(認定訊問) 기록을 

덧붙이기로 한다. 

참고 유마힐소설경 12 아촉불국품 http://buddhism007.tistory.com/3184 ☞


피의자인 유마힐 거사가 인정신문절차에 진술을 회피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럴수록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처음에 살피는 사건은 

지혜 제일 사리자 존자가 좌선 수행을 하는데 

유마힐 거사가 비판한 사건이다. 


○ [pt op tr] 사리자 존자 좌선수행 참견사건에 대한 수사보고 

유마힐 소설경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사리자 존자가 세존에게 호소한 

사건 내역은 다음이다. 



저(사리자)는 예전에 숲 속 나무 밑에서 

좌선[연좌(宴坐), phatisaṃ layana]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리불이여, 

반드시 이렇게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란 것은 

몸과 마음의 (작용이) 

삼계(三界)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멸정(滅定)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온갖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道法]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세속의 일상 생활[凡夫事]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닫혀 있(어서 고요함만을 탐닉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혼란하)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온갖 견해에도 요동하지 않으면서도 

37도품(道品)을 닦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고서도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 


만약 이같이 앉을 수 있는 자라면 

부처님께서는 

인가하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러한 말을 듣고서도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 내용을 보면 

사리자 존자가 좌선 수행을 하는데 

유마힐 거사가 위와 같이 참견하여 

지혜 제일 사리자존자님이 

좌선수행을 통해 평안함을 얻는데 실패하고 

말문이 막히는 불편함을 

겪게 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당히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하튼 수사를 담당하는데 있어서 

한쪽 입장만 살필 수는 없고 

유마힐 거사님처럼 사정을 아실만한 분이 

왜 그랬는가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판단을 해야 한다고 본다. 


본인의 수사결과보고서는 

다음이다. 





○ 사리자존자의 좌선수행 참견사건 수사보고


우선 

3계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나열할 때 

이들은 망상분별을 바탕하여 

생멸을 전제로 한 세계의 분류이다. 


그리고 선정은 

욕계에서 망상 번뇌에 잡혀 있는 마음을 

집중시켜 번뇌를 제거하고 

색계 4 선 무색계 4 선의 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수행으로서 

선정 수행을 닦으면 

욕계의 상태를 떠나 

색계 무색계에 든다고 제시된다. 


그래서 사리불도 또한  

숲 속 나무 밑에서 

그렇게 앉아서 좌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좌선은 

현실에서 세속의 일반인들이 

평소 망상분별과 번뇌에 사로 잡혀  행하는 

생각이나 말 행동과 달리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유마힐 거사가 나열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들과 관련되는 것일 것이다. 


● 위의를 나타냄 

● 진리의 법[도법]을 버리지 않음 

● 마음이 안으로 밖을 향하지 않음( 혼란하지 않음 )  

● 온갖 견해에 요동하지 않음 

● 생사고통을 벗어난 열반에 듬 




그런데 여기서 유마힐거사는 

좌선이란 그런 형식에 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수행을 하던 하지 않던 

본래의 실재 진여와 현실은 

모두 그런 생사 생멸을 떠난 니르바의 상태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실재나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본래 그런 생사와 생멸을 떠난 상태임을 

관할 수 있어야 함을 제시하게 된다고 본다. 


즉 본래부터  몸과 마음은  

삼계에 드러날 바는 없는 것이고 

수행자는 현실이 본래 이런 상태임을 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수행자가 이들 생멸하는 3 계가 

그대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하고 

현실을 대할 수 있어야 함을 

1 차적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앞과 같이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상태만 그런 것이 아니고 


- 일상생활과 번뇌가 있는 상태도 

본래 그런 것이 없는 상태이므로 

수행자는 그렇게 관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유마힐 거사가 제시하는 다음의 내용들은 

그런 측면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 


● 색계 무색계 정 또는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음 

● 3 계에 드러나지 않음 

● 번뇌를 끊지 않음 

● 세속의 일상생활을 나타냄  


결국 위에 나열한 내용은 

일반적인 성문승의 입장과는 다른 부분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본래

생사현실이 그대로 

그런 생사고통을 떠난 열반의 상태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감각을 하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기에 

그런 상황에서는 

번뇌를 끊고 세속의 일상생활을 떠나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르러  

근본 정신과 공한 실재만 남기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보고 

수행을 처음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만, 



이제 그런 수행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면, 

번뇌가 있는 일상 상태가 

그대로 본래 생멸을 떠나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

'번뇌를 끊지 않고서도 

열반에 드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현실 상태 그대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하고 

그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임할 수 있어야 함을 

1 차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를 종합하면 

현실은 본래 생사 생멸을 떠난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서 중생들이 망상분별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있으니 

그런 현실상황에서는 

다시 좌선수행을 통해 

망상분별에 점유된 정신을 집중시켜 

그런 번뇌 상태를 떠나게 만들고 

본래의 상태에 상응하게 만드는 수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행은 

현실이 본래 생사를 떠난 것임을 관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하고 


그리고 이후는 그런 상태를 기본적으로 관한 바탕에서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런 상태에서  

현실의 번뇌가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떠나 있음을 관하지만, 

그러나 수행자는 다시  

그처럼 중생들이 망상을 바탕으로 생사를 받는 상태에 


수행자 자신도 생사를 받고 들어가 

중생들이 그런 망상상태를 떠날 수 있도록 제도하고 

성불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시 37 도품도 닦고 

중생의 번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는 것임을 

제시하는 취지라고 이해한다. 



...

좌선이란 것은 

몸과 마음의 (작용이) 

삼계(三界)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


이부분은 결국 다음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본래 삼계( 생멸하는 세계)에 드러나는 것은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관하는 수행자는 

현실에서 망상분별이 전개되고 그런 생멸이 있다고 여기는 

중생들의 생사에 들어가서 

좌선을 닦아서 

단순히 욕계에서 색계 무색계에 드는 것을 목표로 

좌선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의 상태에 '상응하게' 

삼계(3계)에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이는 

원래의 본 상태는 그러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지만, 

다만 현실의 망상상태에 빠져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좌선수행을 하게 되는 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수행을 통해 

욕계를 떠나 색계나 무색계에 드는 것을 

절대적으로 보고 수행에 임한다면 곤란하므로,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관하는 가운데 

그런 수행에 임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해 

유마힐거사님이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여하튼 다툼이나 소송 시시비비의 대립관계의 

분쟁 해결은 언제나 

당사자간의 화해가 최상이라고 보는 가운데  


이런 입장 차이도 

각 입장에서 장점을 취해 

원만한 수행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본다. 


본래는 그렇게 묻거나 따지거나 시비를 일으킬 내용이 없고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있고 없음을 따지는 유무문제와 관련해서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일단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현실에서 수행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이런 시시비비 논의에 휘말리지 않고 

원만한 수행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



○ 유마힐거사님의 수사 기본 방향


현재 계속해서 유마힐거사님의 

사건을 수사 중이다.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유마힐 거사님의 주장에는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듯한 내용이 

반복해 제시된다. 


대표적으로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 

이런 형태로 주장을 제시하는 가운데 

원래 수행을 잘 하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수행자들에게 핀잔성 비판을 반복하여 

이것이 사건이 되어서 

그 사건기록이 상당히 많이 

쌓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일단 하나하나 위와 같이 살피다 보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현재 위 사건 다음의 목건련 존자님과 관련된 사건과 관련해서 

무엇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논의되면 


이 사건 하나만 해도 한 달 정도가 걸리지 않을까 

예상이 되어서 

미리 수사 방향을 제시하고 수사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보게 된다. 





[...]

원래 사리자 목건련 수보리 존자 등등 

세간에서 명망이 높은 수행자를 지지하는 입장도 많지만, 

유마힐거사님을 지지하는 입장도 또 상당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수사가 잘못 행해지면 

수사관 자체가 현실에서 매장되는 수가 발생할 수 있다고도 

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노래를 들으니 

아무래도 수사 기본 방향을 먼저 잘 발표하고 

사건을 살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원래 현실 소송 문제에서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문장이 아무리 길어도 
하나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본 취지나 사정은 잘 모르는데 
문장이 하나가 아니면 2 장 3 장 판결문이 이어질 때 
다른 내용을 하나 끼어 넣어 판결 내용을 전체적으로 
변조 내지는 위조하는 것이 쉽다고 본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도 되는데 
여하튼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을 다루는 고난탐정의 입장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문장을 많이 넣어서 
수사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앞 수사보고서를 보다보면 글을 작성한 본인부터 
무언가 같은 내용을 한 서너번 반복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본다. 
지면제약이 있어 내용을 간단하게 만들자면 한 번만 
제시해도 될 내용을 여러번 반복해야 
그 사정이 이해가 쉽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하나를 앞 뒤나 중간에 
더 추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고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그 문장을 또 추가하게 된다. 

다음 문장이다. 

"이들 내용은 모두 희론이다."

이 내용은 여러번 반복해 넣는다고 
수사 보고에 효과가 더 많은 것은 아니기에 
자주 추가하지는 않지만, 
상황 판단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많은 경우 
주의를 가끔 환기시키기 위해서 
이 부분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본인이 편집을 맡은 사이트는 
이 사정 자체가 사이트명에 
이것은 소설입니다. 
이것은 구라입니다. 
다음 내용에는 진실아닌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잘 반영이 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조금 사정이 다르기에 
좀 더 많이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고 본다. 

구라 거짓말 소설 이야기 희론 
이런 표현은 다 같은 의미라고 보게 되는데 
사실 본 사이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진실된 내용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위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
이런 내용에 위 내용에는 구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이 추가됨으로서 
전체적으로 진실된 내용이 된다는 의미다. 


위 노래에도 그런 메세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무아라고 표시하면서 
그 무아를 무시해라. 이런 내용을 
제목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경전과 관련해서 
부처님이 무아, 무자성, 이런 내용을 
무상, 고, 열반적정, 공 등의 내용과 함께 
강조하기에 
이들 내용만은 절대 확고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많다. 

다른 것은 다 무너져도 
위 내용만은 무너지면 안 된다. 
이런 강박관념을 갖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에 대해서 
부처님이 설하신 일체가 
다 희론이라고 밝히시므로써 
전체적으로 부처님이 진실을 진실되게 
설하시는 입장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게 되는데 

현실에 수많은 사건 수사에 임하는 고난탐정인 
본인도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수사결과에 위 문장을 첨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이전 조각글부터 
유마힐 거사님의  피의 사실을 사전에 공표해서 
수사가 진행되는 사정을 제시했는데 

수사의 기본 방향 자체가 이와 같다는 것을 
미리 확인하고 수사내용을 참조하는 것이 
대단히 도움이 된다고 보게 된다. 

과거에는 용수보살님이 또 
수사대상에 오른 적도 있는데 

부처님이 인과나 연기에 대해서 강조해 
설하시고 무명-행-식--- 이런 12 연기도 
말씀하셨는데 
 
용수보살님이 생멸을 부정하여 불생불멸을 주장하고 
어떤 A 가 있고 없음도 부정하는 가운데 
그런 A 도 얻을 수 없고 
더 나아가 그 A 의 생멸도 얻을 수 없는데 

그런 상태에서 A가 무엇을 원인으로 
어떻게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가를 
도대체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과도 부정한다고 해서 
수사가 진행된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유마힐 거사님 사건도 
그 성격이 이와 유사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원래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하는 입장이라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자신이 논의하는 주제가 
언어와 분별을 떠나고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는 [언어도단]
그런 내용이라고 잘 이해하는 입장이라면 
이런 논의마다 
어떤 입장을 취해야 적절하다고 보겠는가. 

일체 이야기를 하면 
자체적으로 문제가 되어 
곤란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자신이 주제로 하는 내용이 
언어 분별을 떠났다고 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가. 
자체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비판을 역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그런 입장에서 
본인이 유마힐 거사님의 혐의 내용을 
사전에 공표해서 지적한 바도 있는데 

세간의 오해가 있기에 수사는 하지만, 
그러나 수사의 기본 방향은 
위 입장을 잘 배려해서 
피의자 신분인 이분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이 사정을 과거에는 
소송에서 다루는 
가정적 항변의 문제로 제시한 바가 있다. 


A 가 있고 없고를 따질 때 
A  가 없다고 주장을 하는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A 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그 사실만 주장하고 
더 이상 다른 내용을 논의하거나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 주장을 세우고 고집을 하는 경우 

일단 그 상대의 주장을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나서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로 인해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떠어떠한 결과를 만나게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상대가 
해결할 것인가. 
이렇게 주장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소송전문용어로는 가정적 항변이라고 
한다는데 
여기에서는 그 용어자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보고 
IF 논의라고 표현하게 된다. 

즉 무아 무자성 공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아예 말을 처음부터 일체 하지 않거나 
말을 하더라도 


그런 내용은 얻을 수도 없고 
언어를 떠나고 분별할 도리도 없다 ,.
그리고 그런 내용은 없다. 
이런 사실 정도만 주장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망상분별 상태와 집착이 심하여  
엉터리 내용에 접착되어 고집을 갖는 상태가 심각하므로 

이것을 해소시키기 위해 
상대의 그런 주장이나 내용을 
일단 받아들인다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적 항변'에서는 가정적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인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상대처럼 자신도 같이 
망상상태로 지내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은 아니고 

상대의 망상상태를 치유하기 위해서 
일단 상대의 망상분별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 상태에서 계속 나아가면 
어떤 문제가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가를 
제시해서 
상대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벗어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그런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IF 논의 과정에서는 
상대에 따라서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는데 
이 처음 기반이 
사실은 원 주장자가 주장하지 않는 내용이라는 점이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이 주장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본래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하도 망상분별상태가 심하니 
일단 상대의 그런 주장을 '그렇다고' 받아들여주고 
그런 상태에서 언어와 분별을 행하고 
그런 상태에서 상대가 주장한 내용을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이 부분을 IF 문장을 사용해서 제시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는 본래 
이런 주장을 하는 입장에서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이것을 가지고 
그런 항변을 제시한 이에게 문제를 제기할 도리는 
본래 없다. 

이 사실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고 
이미 용수보살님의 사건에서도 제시한 바가 있다고 보는데 
여하튼 이러 사정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어떤 내용을 제시하는 경우는 
그 주장만 떼어 놓고 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기 쉽지만, 
사실 그 문제는 그런 주장을 제시한 입장에서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하면 
그런 주장을 통해서 
상대가 망상을 해소하게 되기를 바라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 뿐이고 

IF 문장에 사용되는 
처음 주장과 
그 IF 문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결론이나 
또는 그에 사용되는 추론식이나 
그 일체가 

그가 그 내용을 그렇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정적' 항변이 갖는 
본 의미인 것이다.  

IF 논의란, 만일 상대가 그런 주장을 한다면...
여기서부터 시작된 논의이고 
그 이후 전개된 그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런 논의를 통해서 상대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을 폐기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주장자는 그 IF 문장 이후부터의 내용은 
처음부터 자체적으로 엉터리라고 일단 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다. 

여하튼 수사의 기본 방향을 일단 이렇게 
제시하면서 
앞으로 계속 엄정한 수사를 진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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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유마힐 거사님이 부처님제자들에게 제시한 내용이 

왜 수행자에게 혼동을 유발시키게 되는가

이 문제를 살펴나가야 하는데 

 

이 부분은 결국 있고 없음의 문제와 

깊게 관련이 된다고 본다. 



이미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최면의 상황을 들어 설명하였는데 

다시 이 내용을 놓고 이 상황을 설명하기로 한다. 


이전 조각글에 올려 놓은 

최면 관련 자료인데 

일정 부분 그대로 복사해 붙이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최면 관련 자료 내용이 

현실에서 있고 없음을 논의하는 데 

기본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본다. 





- Hypnotist Marc Savard makes every volunteer on stage CRY! - 

https://www.youtube.com/watch?v=9Mdz_GKZ0X4






Don't shoot me with the hypnotic sleep gun!!

https://www.youtube.com/watch?v=k9Wnq27g88k


이외에도 최면 관련 자료는 검색이 많이 되므로 

개별 참조할 수 있다고 본다. 


처음 최면 자료는 

관객은 여기에 처음부터 개가 없음을 보고 있는데 

최면에 걸린 이들은 

처음부터 없는 개를 놓고 

처음에 그런 개가 있다고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 개가 죽었다고  슬퍼하고 

또 어느 순간 다시 개가 살아났다고 좋아하는 내용이다. 


두번째 최면자료는 

최면술사가 부메랑 총알을 개발해서 

선 보이는 장면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최후에 남은 1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데 

그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

[조각글 인용 부분끝] 





있고 없음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최면의 상황을 들어 설명하였는데 

다시 이 내용을 놓고 이 상황을 설명하기로 한다. 


위 최면자료에서 첫번째 내용을 놓고 보자. 



최면에 걸린 이들이 그 상황에서 

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을 놓고 

관객은 거기에 그들이 말하는 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상황에서 

다양한 기준 다양한 입장에서 

있고 없음이 문제되는 것을 일단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한 주체도 마찬가지다. 


색깔은 눈으로 보면 있다고 하겠지만, 

귀로 대하면 그런 것을 있다 없다 자체를 

문제삼기 힘들게 된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는 귀로 대하면 있다고 하는 것이지만, 

눈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것을 역시 있다 없다 자체를 

문제삼기 힘들게 된다. 


여기서 귀로 대할 때 색깔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색깔이 

있다고 하기도 곤란한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미리 잘 검토해두는 것이 

현재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피는데 

기본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유마힐 거사님의 입장은 

실재나 실체의 존부를 따지는 영역에서 

이를 기준으로 하여 

현실의 수행자들의 수행상황을 대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고 


현실에서 수행을 행하는 입장은 

전도망상과 집착을 바탕으로 

생사와 생멸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수행에 임하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입장간에 약간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고 기본적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언어 분별을 떠나고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본래 생사와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실재 영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실의 모든 내용이 그대로 

그렇게 생멸을 떠나고 

생사고통도 얻을 수 없고 

그런 사정으로 그 상태 그대로 

청정한 니르바나다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이 상태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언뜻 생각하면 

마치 현실에서 일체 수행도 필요없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거나 

또는 반대로 기존대로 집착을 강하게 갖고 

무엇을 행하거나 

또 오히려 심하게 악행을 행하거나 

그외 어떤 상태라도  

그대로 방치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기 쉽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던지 그렇지 않던지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는 

실재 영역을 기준으로 이를 판단하면 

그런 문제자체가 거기에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한다거나 

저렇게 수행을 해야 한다거나 할 필요자체도 

없다고 보기 쉬운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승의제만 놓고 

문제삼으면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최면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쉽다고 할 수 있다. 


두 최면자료를 보면 

최면걸린 이들이 

개가 죽었다고 슬퍼하고 

살아났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최면술사가 손가락으로 

부메랑 총알을 발사하기전까지 

총에 맞기 싫어서 대단히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 자체가 거기에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 입장만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렇게 보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상황을 놓고 

일단 다양한 기준에서 

그 있고 없음을 문제삼게 되고 

생사 고통과 관련된 문제를 따지게 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현실의 수행자는 어떻게 

이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수행에 임해야 원만한 상태가 되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마힐거사님이 

그런 입장에서 이 두 입장을 

잘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평가를 할 부분이 많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


현실에서는 등으로 상징되는 것을 

자신이 하나 갖고 있으면 

이것을 아끼는 경향을 갖기 쉽다. 


심지어 자신이 어떤 옷을 하나 백화점에서 

사입고 거리를 걷는데 

자신과 똑같은 옷을 다른 이가 입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상당히 언쨚게 여기기도 한다. 


이것이 전도망상 집착에 의한 일반적 증상인데 

사실 이런 마음에 바탕해 무언가를 행하면 

결국 실답지 않은 최면과 같은 상황이나 

꿈과 같은 상태에서마저도 

스스로가 고통을 받고 

다른 생명에게도 역시 고통을 주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사정으로 인해 

그 자신이 그 옷을 입지 못하게 

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등을 아끼는 이도  

그로 인해 나중에 지혜를 잃고 

어리석게 현실에 임하게 되는 현상도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거나 이렇지 않거나 어떤 경우던지 

본 바탕에서는 아무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승의제[언설을 떠난 진리]의 내용이기도 하다. 


문제는 승의제의 차원에서 

언설을 떠난 실재나 무아 무자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공하며 [불가득 공]

그런 내용이 본래 없어서[무아 무자성]

문제가 안 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같고 최면이나 환영과 같이 실답지 않지만, 

그 각 생명들이 생생하게 대하고 임하는 생사현실에서는 

그런 상태로 임하게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1


그러니 현실에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승의제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실답지 않은 현실에서의 

이런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그런 내용이 없음에도 

실답지 않다고 할 생사현실에서

각 생명이 생생하게 매순간 받아나가는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 수행자가 

현실이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관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러한 바탕에서 

그에 상응하게 현실에 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2 



그리고 그런 수행자가 그런 사실을 관하고 

그에 바탕해 생사현실 속에서도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게 

생사고통을 떠나 여여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제시되지만, 


설령 수행자가 그런 수행을 통해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그런 수행자와는 달리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 경우에는 

그런 상대에 맞추어 또 올바른 

수행자세를 취해 나가는 것이 다시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래서 상황은 하나인데 

이 각각의 측면에 따라서 대강 크게 보아도 

위와 같이 1, 2, 3 과 같은 형태로 

제각각 다른 내용이 요구되는 사정이 본래 있는 것이다. 








이제 유마힐 소설경에서 

유마힐거사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수행하는 내용을 놓고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수행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이와 정반대의 내용이라고 볼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 내용은 수보리 존자에게 

유마힐 거사가 공양을 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 



...

그대에게 

보시하는 자에게 

그대가 복전(福田)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가 

3악도(惡道)에 떨어져 

많은 악마와 더불어 

손을 잡아 온갖 번뇌[노勞]의 벗이 되고, 


그대는 온갖 악마와 모든 번뇌[진로塵勞]와 

똑같이 하나가 되고, 

모든 중생에게 원한을 품고, 

모든 부처를 비방하며 

정법[법法]을 훼손하고, 

승가[중수衆數]에 동참하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멸도滅度]을 얻지 않는다면 


그 때 밥을 먹어도 좋습니다.' 

...


K0119V09P0982b02L; 汝若如是乃可取食時我世尊聞此語

출처: 유마힐소설경 제 3 제자품 

참조 http://buddhism007.tistory.com/3195



우선 

수행자는 전문적으로 수행을 행하는 가운데 

세간을 방문하여 음식 공양을 받게 되면 


그런 음식을 수행자에게 

어떤 대가없이 그리고 차별없이 공양한 이는  

그 수행자를 복의 밭으로 삼아 

그에 복의 씨를 심어 복을 거두게 되는 관계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세간의 복밭이 된다고 하여 

복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위 내용은 이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 중생에게 원한도 품고 

부처도 비방하고 

정법을 훼손하고 

승가에도 동참하지도 말고 

깨달음도 얻지 말라. 

그런 경우라면 

자신의 공양을 받으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힐 거사가 수보리 존자를 상대로 

이런 내용을 제시하니 

일반적으로 고난 탐정의 수사가 진행될만하다고 

보게 되지 않는가. 


유마힐 거사가 제시한 위 내용을 표현만 보면 

명백히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는 것과 정반대 내용을 행하라고 하는 것이어서 

대단히 큰 문제라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실재가 공하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을 실재에서는 얻을 수 없기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하고 

그런 내용은 실재로 얻을 수 없는 것인데 


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한들 어떠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들 어떠하리 

또는 기존의 망상분별 집착의 상태에서 행하던 것을 

그대로 고집해 행해나간들 어떠하리 

심지어 악을 심하게 행한들 어떠하리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악취공견의 

대표적 내용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 

그대로 이를 방치하면 

이런 말을 따라 행하거나 

이렇게 행하도록 권유한 이들이 

모두 아비지옥에 들어가서 

그 상태에서 이리저리 쇠못 위를 구르거나 

끓는 물 속에서 몸을 튀겨가면서 

위 이론을 수행해야 하는 

지옥의 공수행자 형태가 되어 

아주 심한 고통을 겪게 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아비지옥 상황에서도 

위 이론은 그대로 적용된다. 


말 그대로 

그런 아비지옥의 상황도 역시 

그 실재의 측면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고  

그런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다른 입장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비지옥은 별도로 하더라도 

당장 현실도 그렇다는 것인데 


이 현실에서조차 

아비지옥에서 받는 그런 심한 고통은 아니더라도 

단순히 손가락 하나를 꺽거나 

톱으로 자르거나, 허리가 부러지는 상황만 되어도 

위 이론만 가지고는 

그 상태에서 고통을 겪지 않고 

이를 평안히 받아들이고 이런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행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유마힐 거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렇게 수행자가 행해 나가면 

그런 상황에 곧 직면하게 되고 

그 상황에서는 

그런 상태 역시도 

실재는 공하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런 내용은 본래 없다는 

위 이론만으로 그것을 극복해 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유마힐 거사는 자신은 

아주 수행을 많이 한 상태여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아비지옥이 아니라, 

현실에서 손가락 하나만 부러진 상황이라고 해도 

과연 그 이론대로 그 상태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극복해 낼 수행자가 얼마나 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내용을 주장한 유마힐 거사에 대해 

수사가 진행될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론이 잘못된 것은 또 아니라고 보아야 하고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어느 한 부분만 뽑아서 

이처럼 제시하고 수사를 진행하면 

또 억울한 입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문제가 이렇게 제기된다는 것을 

살피고 

좀 더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나가야 한다고 

보게 된다. 



>>>





>>>




여하튼 

이제 그런 현실을 놓고 

여기에 그런 내용은 본래 없고 

얻을 수 없다는 무소유 불가득 공의 

내용을 다시 놓고 

이 현실의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수행을 통해 실상을 관하는 수행을 하다보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 본래 없고 

그런 것은 실재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심지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그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런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자체로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것을 관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런 내용을 반야심경에서도 

같은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런 부분에서 오온개공 이 부분이 

그런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관자재보살이 

그렇게 실상을 깊이 꿰뚫어 관하는 

깊은 지혜인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그렇게 관할 때만 

현실의 그 모든 것(오온)이 공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관자재보살이 그렇게 보던 안 보던 

이렇던 저렇던 

원래 그 상태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위 내용은 사정이 본래 그러니까. 

그렇게 어떤 수행자가 보던 안 보던 

현실에서 겪는 일체의 생사고통과 일체고액이 

다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런 것이다. 


어떤 수행자가 그렇게 일체가 공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관해야만 

비로소 세상이 공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중생들이 겪는 생사고통이 

그런 사정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이 내용을 위 구절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위와 같은 사정을 이해하고 관하여서 

그런 승의제의 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사정만으로 모든 생사고통이 

저절로 해결된다고 위 내용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깊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위 구절에서는 분명 

관자재보살 '행심'[ 깊이 있게 닦는다. ] 반야바라밀다시 

조견 [ 밝게 비추어 본다.]  오온 개공


그래서 도 [ 건너벗어난다. ] 일체고액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행자의 행심, 조견 도, 

이런 노력이 없어도 

원래 사정은 오온이 공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현재 유마힐 거사님이 

제시하는 승의제의 내용과 

깊은 관련이 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유마힐 거사님도 그래서 사정이 마찬가지다. 


사정이 그렇기에 

수행자가 이렇게 수행을 하던 

저렇게 수행을 하던 

즉 유마힐 거사님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행을 하던 

아니면 원래 각 수행자가 행하던 방식으로 

다르게 수행을 하던 


본래 승의제의 바탕에서는 

이렇거나 저렇거나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언설을 떠난 승의제의 본 입장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보게 되는가.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가. 


유마힐거사님부터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유마힐 거사님도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임하면 곤란하고 

이러이러하게 잘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주의를 붙이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경전 내용을 잘 살피고 

그 취지가 무엇인가를 

잘 음미해야 한다고 본다. 



>>>

[...]

유마힐거사가 위에 제시한 내용 다음에 
다음을 제시한다. 

...
모든 말[언설言說]도 
꼭두각시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에 이르러서는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는다
...


현실에서 있다고 보는 것은 

본래 실재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불가득 공]

그런 것은 없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


이런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인 것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지만, 

여하튼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일단 내용을 빨리 전개하려면 

그것이 이해가 안 되더라도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그 사정이 비유로 제시하면 

최면 걸린 입장에서는 

무엇이 보이고 들리고 하면서 

또 그 내용은 A 나 자신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상태인 것이다. 


꿈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꿈에서는 황금을 얻었는데 

그 꿈을 자면서 꾼 침대에는 그런 것은 없는 것이다. 


인과식으로 이 관계를 제시한다면 

a + b => C 의 관계를 계속 반복한다해도 

이 식 자체가 그런 C 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a 나 b 의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니 그 사정을 이해하면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실재의 영역에서 찾거나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 있다면 반대로 

위와 같은 관계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면 이 비유나 위 식을 보고 

그 사정을 빨리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눈으로 본 내용은 

귀로 내용을 얻는 정신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손을 부딛히는 모습을 볼 때 

그 손이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해를 하고 대하지만, 

여기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데 그런 내용을 보고 

무엇이 있다고 여기고 

또 그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갖고 그렇게 행하게 되었는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처음에 그렇게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돌아서 그렇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최면과 꿈의 비유를 동원하면 

그렇게 최면을 당해서 

그 상황에 놓여서 삶을 시작하고 

그런 상황에서 삶을 마치니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실답지 않은 현실에서 

그 각 당사자들은 

제각각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 문제 상황을 살펴보자. 


유마힐거사님이나 부처님이나 

기본적으로 

그런 내용은 없다. 

또 어떤 주체가 관계하지 않은 실재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나 생멸은 

이 바탕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문제삼을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최면걸린 이들은 

무슨 개가 있다가 사라졌다거나 하면서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꿈을 꾸는 상황에서는 그 꿈에서는 

어떤 황금이 가득했다가 다 없어졌다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문제삼는 그런 것들은 

원래부터 없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측면만 강조하면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고 

각 세계를 돌고 돌아다니는 각 생명의 고통을 

일체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각 세계란 

아무리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것을 대하는 것처럼 여겨도 

메뚜기가 대하는 내용이나 

박쥐가 대하는 내용이나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이 눈으로 대하는 내용이나 

귀로 대하는 내용이나 

이런 것들이 다 제각각의 내용이어서 

그것이 하나의 세계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각 세계를 그런 상태로 

돌고 도는 상태라고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원래 그런 것이 없고 

실재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왜 그러나 각 생명은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는가. 


이것을 문제삼는 것은 

그런 바탕에서 그 생명이 

생사고통을 겪기에 그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것이 실답지 않게 그런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꿈과 같은 성격의 내용일 뿐이라도 

거기에 그런 고통을 생생하게 진짜처럼 여기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생명이 없다면 

그것을 앞과 같은 이유로 하등 문제삼을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최면의 상황을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최면에 걸린 이들이 엉뚱한 내용을 있다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태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런 최면에 빠지던 말던 큰 관계가 없다고 

관객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왜 없는데 그런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고 겪게 되는가는 또 별도 

자세히 살펴야 할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그 내용이 

바로 위 a + b=> C 의 관계식이 

나타내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어떤 화학자가 

나트륨과 염소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거기에 소금이 없는데 

왜 소금이 나타나는가 하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하는가. 


물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서 

얼음이 보이지 않는데 

왜 얼리면 그것은 금이 되지 않고 

하필이면 얼음이 되는가의 문제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손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서 소리가 

보이지 않는데 왜 부딪히면 

소리가 매번 들리는가. 

이런 유형의 문제를 쉼없이 무한하게 

제출할 수는 있는데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답은 

그렇게 무언가가 각 경우마다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 각 주체가 

처음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전도망상분별을 행하여 임한 것이 

그 모든 내용에 대한 원인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 상태를 전제로 하면 

계속해서 

 prince 님 처럼 

정작 a 는 자신이 C 가 아닌 것이라고 적어 놓고 

그 a 가 b 와 관계하면 

그 상태에서는 매번 C 를 얻게 된다는 사정을 말하면서 

그 C 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상태를 전재로 하면 

또 그 바탕에서 그와 같이 임하고 

그런 생각과 그런 말과 행위 태도를 취하고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그가 생생하게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묶여 끌려가게 된다고 

여기서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부터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글이 다시 길어지는데 

이 상황 때문에 

수행자가 바로 그런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이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시된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그런 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자신에게 생생하게 나타나고 얻게 되는 

그런 내용을 놓고 

그에 집착을 일으켜 행위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관자재보살이 그런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깊은 지혜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수행을 행하지 않고 
또 현상의 그 모든 것(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밝게 비추어보지 않는다해도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래 그런 상태인데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 없는데 
현실에서는 그런 상태에서 
망상을 일으킨 다음 
생사고통과 일체고액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받아나가는 
중생들이 그렇게 임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그 상태가 본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상을 꿰뚫어 관하고 
밝게 비추어 보는 그런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 내용이 '행심' 반야바라밀다 '조견'오온개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행심' 이나 '조견'의 수행이 없이 
원래부터 공한 것이니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각 중생이 받아나가는 그 상태가
그대로 아무 문제없고 괜찮다고 
여기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런 상태가 아닌데 
그 사정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전도된 망상을 일으켜서 그렇게 집착을 일으켜 가진 상태에서 
그렇게 행하는 가운데 
그런 고통을 받아 나가는 것이 문제이니 

그 사정을 먼저 잘 살펴 보아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밝게 비추어 보면 
그로 인해 그 망상을 제거하고 
또 그에 대해 갖던 집착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상태가 되면 
이제 1차적으로 그런 고통을 당장 겪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2 차적으로는 또 그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뜻과 말과 행위(업)을 행하는 관계를 중단하고 
반대로 그런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로 
자신을 묶어 끌고 가는 과거의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그런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하는 
수행도 

앞과 같은 방식으로 망상에 바탕해서 
어렵다고 보지 않게 되고 
원만히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런 수행을 통해서 
또 그런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에 
처하게 되지 않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수행의 기본인 것이다. 


그 다음 내용은 
자신은 그런 방안으로 
실상도 관하고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 
생사고통을 벗어나 머물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또 다른 중생은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위 상태로 그쳐서는 안 되고 
다시 이런 상태를 바탕으로 
무량한 중생을 그런 상태로부터 제도해내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불국토도 장엄하고 
성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모두 
망상에 바탕해서 관계를 살피는 
좁고 짧고 얕은 관찰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실상을 꿰뚫어서 관하는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바탕으로 행해질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수행은 
그런 중생을 제도하는 생사현실에서 
그와 같이 행해지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본 바탕은 그렇지 않지만,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도몽상과 집착을 바탕으로 중생이 돌고 있는 상태이므로 
수행자는 그 사정을 이해하지만, 
그런 중생을 기준으로 맞추고 
그런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수행방편을 
통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 모두를 
원래 그런 내용이 없고 
얻을 수 없는 바탕에서 실피면 
이 내용들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런 수행을 하더라도 해야 한다고 
유마힐 거사님이 제시하는 것인 것이다. 

무슨 내용인가하면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그런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을 하면 
그 자신도 문제고 
다른 중생도 다 함께 문제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마힐 거사님이 
각 수행자에게 무언가를 제시하는 것은 
이런 각 부분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에 임하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고 
제시하는 입장인 것이다. 

간단히 보면 
수행자가 자신만 생사고통을 벗어나면 
된다고 보고 
다시 수행목표로서 열반이나 해탈의 본 취지나 의미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수행목표에 집착을 갖고 수행에 임한다거나, 

또는 수행을 하더라도 
자신이 그로 인해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잘못 여기면서 
수행목표로서 불국토나 성불 부처님의 상태를 
잘못 파악해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수행에 임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원래 그런 상태는 없는 것이니 
아무렇게 해도 된다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다도 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고 

수행은 수행대로 하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은 본래는 얻을 수 없고 
일체가 본래 다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실은 
이해하는 가운데 
그렇게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입장인 것이다. 


즉 실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처음 수행자가 현실에서 문제라고 보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내용도 
알고 보면 하나같이 모두 
그런 생사고통이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인 것이어서 
번뇌 즉 해탈 
생사 즉 열반 이런 상태임을 
수행자만은 잘 파악하되 

다만 중생을 제도할 때는 
또 수행자는 그런 망상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입장에 
맞추어 그런 중생을 제도하고자하는 것이므로 
그런 취지에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그런 수행을 해도 해야 한다고 
이 두내용을 겹쳐서 
계속 제시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얼마나 그 사정이 복잡한가. 

그래서 처음 전도망상 상태에서 
막 수행을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방안은 제시하기 힘든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일단 그런 입장에서는 
당장 갈증을 일으키고 
갈구하는 소원부터 일단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 자신의 생사고통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기에 

유마힐 거사님의 그런 내용은 일단 
이런 상태에서는 잘 적용하기 힘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보면 
수행을 시작해서 최고의 상태가 되었다고 보는 
부처님의 상수제자분이나 
일생만 수행하면 장차 56 억년 후에 성불하기로 
예정이 되었다는 미륵보살님을 상대로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이런 입장이 처음부터 제시되고 
수행자가 행하면 좋다고도 볼 수 있고 

더 심하게 말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뚜렷히 관하고 
당장 손이 잘라지고 
금강경에 제시되는 것처럼 
가리왕으로부터 
온갖 신체를 다 잘리우는 
그런 상태에서도 
그런 자세로 평안하게 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고 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일단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하나하나 천천히 단계를 밟아서 
수행을 하는 가운데 
그런 상태에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 사정이 그렇게 
복잡한 면이 있기에 그런 것이지 
원래 각 입장따라 
없던 것이 있기도 하고 
얻을 수 없는 것이 어떤 경우는 얻을 수 있기도 하는 등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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