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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증상에서 좋음만 얻는 방안 본문

연구자료

중독증상에서 좋음만 얻는 방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31. 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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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x--중독증상에서-좋음만-얻는-방안.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17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중독현상과 관련해 생각하면 
결국 중독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좋음만 얻어내고 
그로부터 얻게 되는 나쁨을 모두 제거하는 방안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의 입장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술이나 담배 도박과 같은 것만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끊기 힘들다고 보는 
권력이나 명예 지위 돈 애정 수면 그런 일체의 것을 
그런 중독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두 끊으면 
이제 정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수행이란 
결국 일체가 무소유 불가득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제거하고 
어떻게 보면 죽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나 
바위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본다. 

그런 경우를 경전에서는 
전도망상과 번뇌 집착에 의한 생사 고통은 제거하지만, 
무량한 선법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사실 수행이 목표로 하는 상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결국 일반적인 탐욕과 분노에 접착되어 
번뇌의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고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기본으로 확보한 다음 

앞과 같은 중독의 나쁜 점을 제거한 상태에서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 성불을 목표로 
무량한 수행을 닦아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큐빅 다이아몬드를 하나 얻고 
상당히 비싼 전자담배를 구매한 이야기를 했는데 
경전에 보면 이런 형태로 인도를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인도를 통일한 왕으로 아소카 왕이 있는데 
그가 전생에 아이로서 모래로 장난을 하는 가운데 
부처님이 지나가자 
그 모래를 밥이라고 해서 부처님에게 
건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중에 아소카왕이 인도의 왕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것이 정말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가 여부는 
역시 확인할 길은 없더라도 

여하튼 모래를 건네서 인도 전체를 얻는다는 것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담배를 놓고 생각하면, 
담배는 연기도 나고 
니코틴 등도 제공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이바지한다고 보지만, 

피 순환도 나쁘게 하고 
모세혈관도 안 좋게 하고 
기타 다양하게 신체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러니 그 가운데 담배가 주는 장점만 취하고 
단점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어떤 것의 희망의 성취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어떤 희망이던 그것이 성취되면 
좋다고 보지만, 
역시 그와 함께 일정한 나쁨을 가져다 준다고 보게 되는데 

정말 좋다고 볼 내용은 
그것으로부터 오로지 좋음만 얻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이 곧 수행의 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어떤 이유로 수행은 그렇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본다. 



식사를 놓고 생각할 때 
그냥 식사를 하지 않고 
식사했다고만 생각하면 배가 부른가. 

그래서 식사를 하면서 
배도 부르고 건강하면서도 
그러나 식사가 불러 일으키는 부작용을 
해소시키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렇게 주제를 바꾸어 생각하면 
이것이 모든 희망의 성취과정에서 
그로부터 좋음만 얻어내고 
나쁨은 얻어내지 않는 방안의 문제와 
성격이 같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

[...]


건행 삼마지와 

보인 삼마지에 이어 


사자유희(師子遊戱)삼마지 

를 살핀다. 


각종 중독현상에서 좋음만 얻어내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나쁨은 일체 받지 않으면 

결국 어떤 상태가 되는가는 


사자가 유희하는 상태가 된다고 보고 

답을 찾기로 한다. 


사실 답은 이미 앞에 쓰여 있다. 



담배나 술을 마셔서 문제가 생길 경우 

어떻게 그로부터 얻는 좋음은 다 얻는데 

그로부터 문제된다는 것은 다 빼내는가.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늑대나 여우 하이에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자가 되는 것이다. 





사자(師子)란 결국 사자(獅子)를 의미하는데 

사자가 거닐면서 노니는 상태는 


물소나 여우가 정신없이 노닐다가 

맹수에게 물려 잡히는 상태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미 답을 다 제출했으므로 

문제는 간단한데 


수행자는 늘 유희 자재 신통하는 가운데 

쉼없이 보물을 줏고 

쉼없이 주변에 있는 지뢰나 시한폭탄을 제거하고 

기본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 방안이 바로 수행자의 

보시 - 정계 - 안인이란 

기본 수행 내용이기도 하다. 


보시 정계 안인의 내용은 

쉽게 표현하면 

세상의 중생들이 좋다고 보는 내용(+)를 아낌없이 베풀고 

세상의 중생들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지 않고 

나쁘다고 보는 내용(-)을 가하지 않고 

반대로 자신의  좋음(+)이 침해받을 때는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참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일반 생명의 입장에서는 

전도된 상태에서 그것이 

당장 자신에게 좋음을 준다고 보고 

그에 접착되어 행위해 나가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런데 본래 수행자의 입장만 놓고 보면 

이것은 탐욕과 분노에 수행자를 접착시키게 만드는 요소로서 

본래 이것을 취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논리를 일관되게 한다면 

수행자 자신에게 그런 내용이 좋지 않다고 본다면 

그런 좋음을 다른 중생에게 베푸는 것도 

역시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수행자 자신에게는 

탐욕과 분노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반대로 다른 중생에게는 

그 중생이 갖는 그런 탐욕과 분노를 

성취시켜 주는 방향으로 

수행자가 임하라고 하는 것인가. 


즉 왜 중생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을 베풀라고 하고 

중생이 분노를 일으켜 해를 끼칠 때 

그것을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인가. 



원래의 논리대로라면 

수행자만 그렇게 임할 것이 아니고 

일반 중생도 수행자와 똑같은 바탕에서 

곧바로 그렇게 바로 임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반 중생에게 

곧바로 전도망상 상태와 집착의 상태에서 벗어나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에 진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된다. 


이론상으로는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오늘 처음 길을 나선 이에게 

하나의 수직암벽을 놓고 곧바로 바위를 붙잡고 

올라가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게 된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 힘들고 

따라서 이들 중생들이 곧바로 그런 지혜 해탈문을 얻게 하기 힘들므로, 


일단 수행자는 

중생들이 뜻하는 대로 베풀어 주는 것을 

제도의 방편으로 삼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생의 입장에선 

수행자가 자신에게 당장 좋음을 주므로 

수행자를 좋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런 상태가 되어야 

이후 수행자를 친근하게 대하는 가운데 

그 상태에서 수행자가 이끌어 들이는 

해탈문을 받아들이고 들어오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일 수행자가 

자신부터 중생과 같은 입장에서 

그런 전도몽상상태와 집착을 바탕으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그런 가운데 다른 중생과 이익을 다투는 가운데 

다른 중생을 해치고 

또 다른 중생이 자신을 해치면 분노를 일으켜 반응한다면 


결국 다른 중생은 이로 인해 

그 수행자를 꺼려하고 

그로 인해 수행자에게 깊은 원망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반응을 중지해야 

수행자 자신부터 자신의 업의 장애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고 

수행자 자신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하면 

결국 자신부터 번뇌에서 풀려나고 

또 반대로 그로 인해 복을 얻고 

또 자신이 과거에 쌓은 업의 장애로 

자신에게 장차 돌아와 터질 지뢰나 시한폭탄을 

제거해내는 것이 된다. 




결국 

수행자가 각 중생들이 제각각 좋다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들을 놓고 

이것을 아낌없이 베풀면 

중생들도 이를 좋다고 여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수행자에게 복덕자량을 가져다 주고 

지혜자량을 닦아 나갈 바탕을 그렇게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면 

세간에서 쓸데없고 먹으면 탈이나서 먹을 수도 없고 

처리하기에 힘든 음식쓰레기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을 자신이 붙잡고 있거나 

아깝다고 자신이 취해 먹으면 

자신에게 탈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이것 하나하나를 어떻게 변화시켜 

꽃을 기르는데 필요한 기름진 비료나 퇴비를 만들까를 놓고  

아무리 궁리하고 

일일히 그것을 붙잡고 자르고 가공을 한다해도 

그렇게 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낌없이 내다 놓고 

세균과 바이러스에게 베풀면 


그 세균과 바이러스는 

그것이 좋다고 보고 

그에 접착되어 행해 나가는 가운데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이가 

그것을 아끼지 않고 그냥 바이러스나 세균에게 

맡기면 

그 수많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그에 달라붙어 

그에게 결국 

필요한 기름진 땅을 

만들어 제공해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유처럼 

수행자는 현실에서 

모든 중생이 전도망상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고 집착하고 대하는 것을 

놓고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밝게 관하는 가운데 

이것을 아낌없이 중생에게 베풀어 주면 

그로 인해 수행자 자신은 복덕 자량을 얻게 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수행자 자신이 

지혜자량을 얻어낼 수 있게 되는 한편 

다른 중생을 다시 무여열반의 상태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바탕도 

그로 인해 마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앞과 같은 비유에서 

그런 음식물 쓰레기를 대하는 가운데 

자신마저 이런 바이러스나 세균처럼 

세상에 임하려고 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비유로든 음식쓰레기와 같이 

일반 중생들이 전도 망상의 상태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고 

좋다고 대하는 모든 것도 

그런 성격을 갖는 것이다. 




세상의 쓸데없으나 

좋다고 보는 모든 것들은 

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내는가. 


결국 탐욕과 분노에 접착되어 

그에 바탕해 쉼없이 행하는 생명들이 

그렇게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것을 하나같이 

중생을 무여열반의 상태로 이끌어 들이는 

재료와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은 

또 수행자인 것이다. 




수행자는 이 과정에서 

일반 중생이 하는 방향과 반대로 행하여 

스스로는 자신의 번뇌와 생사 고통을 덜어내는 한편 


중생이 전도망상과 집착을 갖는 상태에서 

당장 집착하고 갈구하는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여 줌으로써 

좋음을 주고 


그로 인해 수행자 자신의 업의 장애도 제거하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자가 복덕 자량을 구족하게 되면 


이런 상태에서 자신이 좋음을 베풀어주는 중생을 

해탈 지혜문으로 이끌어 들이게 되면 

중생이 조복된 상태에서 곧바로 

해탈 지혜문에 들어오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 집착하는 이익을 놓고 

중생과 다투며 

그것을 아끼고 베풀지 않고 


오히려 상대가 집착하는 좋음마다 

이를 침해하고 


또 반대로 다른 중생이 그런 침해를 자신에게 행하면 

그런 경우마다 분노를 일으켜 임하면 


그 중생 하나하나가 

모두 그 반대로 상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자는 위 내용과 

모든 경우에 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수행자자신부터 

그런 업의 장애로 번뇌에 묶이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또 자신의 복덕자량마저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다른 중생에게 

아무리 해탈 지혜문을 제공해도 


다른 중생이 수행자가 제공하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입장을 바꾸어 

어떤 다른 생명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베풀어 주지도 않고 

매번 자신의 좋음을 침해하고 

자신에게 매번 분노로 대하고 

자신을 해치면, 

그런 상대가 어느날 무언가가 좋은 것이라고 제공한다해도 

자신부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이 중생에게 무언가 

중생이 집착하는 좋음을 베풀지 않고 

복덕자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해탈문을 제공해주려고 해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원래는 중생을 곧바로 

해탈문과 지혜문으로 들어오게 해야 할 것인데 


중생은 당장 자신이 집착하는 것에 

접착된 상태로 임하기에 

쉽게 곧바로 해탈문과 지혜문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런 사정으로 수행자는 

기본 수행방안을 통해 

자신부터 복덕자량을 갖추고 

이후 무량행문을 닦아 나감으로써 

이런 방편을 통해 

중생을 무여열반의 상태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가 위와 같은 수행을 통해서 

중생이 집착하는 좋음을 아낌없이 베풀고 

상대의 좋음을 침해하지 않고 

안인의 수행을 행함으로써 

복덕자량을 성취한다고 하지만, 


이는 

수행자자신부터 그런 복덕을 집착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그런 수행방안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수행자 자신마저 

중생과 같이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일으킨 가운데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런 우회적인 수단과 방편을 택해야 한다고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이 

금강경에서 

'불수복덕'이란 표현으로 제시되는 내용이다. 


즉, 수행자는 복덕에 탐착심을 일으켜서 

그것을 수행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아닌 것이고 


그래서 비록 수행방안을 행하고 

이를 통해 무량한 복덕을 얻지만, 

그런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한편, 

수행자는 중생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는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해 나가는 것인데 


이런 가운데 

중생이 당장 그런 전도망상과 집착에 의해 

별 가치없는 것만 집착하고 

그로 인해 곧바로 해탈의 상태에 이르지 못해도 


너무 이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같이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쉽게 표현해 

아무리 잘해도 

다음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마저도 

56 억년의 시간이 있어야 성불한다고 할 때 


일반 중생이 당장 그것을 통해 

무여열반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여 

이에 같이 집착해서 임하면 

오히려 수행자 자신부터 스스로 

번뇌에 묶이게 되고 

그로 인해 중생의 제도를 이루기가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당장 어떤 수행을 통해 

수행자가 다른 중생을 곧바로 

무여열반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해도 

수행자 자신부터 그에 집착하지 않는 가운데 


꾸준히 중생들을 

보시와 정계와 안인의 자세로 임하여 


중생들이 수행자를 통해 

점차 해탈문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도록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기본적 수행을 통해 

끝내 중생을 무여열반의 상태로 이끄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그전에 우선 당장 

중생들이 집착하고 갈구하는 것을 

흡족하게 성취시켜 줄 수 있도록 

수행자는 가장 기본적인 

보시 정계 안인의 수행에 

집착없이 정진해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갈구하는 좋음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놓고 

무량하게 매 순간 연구하면서 

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수행자가 취하는 중독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독현상은 

곧 중생이 집착하는 소원의 성취와 밀접하다. 


그리고 소원의 성취는 

인과의 문제와 대단히 관련이 깊다. 


농부가 수박이나 참외를 얻기를 원할 때 

봄에 어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하는가가 문제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할 

인과를 알아야 자신의 소원을 성취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모든 종파의 스승의 지위에 있다고 하는 

용수보살이 중론송에서 제시하는 

중요한 내용은 다음이다. 


(답) 모든 법이 자체에서 생겨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며

그 둘을 합한것에서도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알라. 


『중론』sinsu 30. p.02b06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중론』sinsu 30. p.02b07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1-1)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āṃ nāpy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용수보살이 제시하는 해탈문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무엇이 생겨나고 멸한다고 보는데 

생겨남이란 그처럼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이 말을 통해서 

바로 그 이치를 깨닫고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탋문에 들어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저번주까지 이곳에 참외가 없었는데 

여기 참외가 열려 있는데 

이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없던 참외가 생겨난 것은 

참외 자신이던 

참외를 제외한 다른 것이던 

또는 그 둘을 다 합한 것이던 

그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원인이 없는 상태에서라도 

그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도박에 중독된 이는 

어느 날 자신이 도박장에서 한번에 거금을 타고 

이후 그 도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다 잃어도 

이후로는 성실하게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한 번에 곧바로 거금을 번 경험이 있는데 

어떻게 하루에 몇 만원 몇십만원을 번다고 

그 노력을 하겠는가.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중독현상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도 정상적인 노력을 하는 것보다 

술이나 담배 등으로 곧바로 

그것을 해소하려고 자꾸 임하기에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원인을 자신이 알던 모르던 

그렇게 무엇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은 분명한데 

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또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제시하는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붙잡고 있다고 해서 

그 자신이 놓여 있는 생사고통에[서 

풀려날 수 있겠는가. 



사실 위 주제는 반야지혜를 통해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한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저런 주제 자체를 

생각해볼 여유나 시간 자체가 확보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 상황이다. 


그리고 복덕자량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 

일반인다. 


쉼없이 뛰고 벼랑을 기어 오르고 해야 할 

지옥의 상황에서는 어떻겠는가. 


저런 말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들어 온다고 해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 그렇기에 

계속 생사 고통에 묶여 

돌고 돌아야만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이 어디에서 

그 해결의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가 하면 


수행자가 처음 보리심을 일으킨 다음 

가장 기본적인 수행을 시작할 때 

그 때에 그 계기가 주어지기 시작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 부분이 

중생과 수행자를 경계짓는 선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초발심시변성정각이라고 하여 

발심을 하면 

그 중생은 이제 다른 중생과 그 본 바탕은 

차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중생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상태로 

평가받고 


보리심을 일으킨 그 자체만으로 

그는 오히려 부처님이 곧바로 될 존재로서 

부처님이나 다른 대력보살들과 그 지위가 

대등한 상태라고 간주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올바로 깨닫게 되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생명이 보리심을 일으켜서 

온 생명을 차별없이 모두 제도하고 

좋고 좋은 상태로 이끌겠다고 

서원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수행자가 무량행문을 닦는 과정에서 

방편 지혜 자체를 놓고 

수행목표와 혼동을 하는 경우는 

문제가 된다. 


[...]


방편이란 사실 

중생이 집착하고 갈구하는 것을 

당장 성취시켜 주는 내용이 되기에 

중생이 그것을 갈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치 아귀에게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일어나는 

소금물을 제공해주는 것과 사정이 같다. 


잠시는 갈증을 잠재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 인해서 더 갈증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삶에서 중독현상을 일으키고 

쉼없이 매달려서 중생들이 또 하고 

또 하는 것들이 갖는 것들의 공통성격이 

모두 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상대가 그로 인해 

자신이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세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그렇게 하면 결국 스스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다른 생명을 사역시키는 가운데 

생사 고통에 묶인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 


다행인데 

그러나 그 경우 

그것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임하는 

양 쪽에게 모두 부정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미 그것을 갖고 임하는 이에게는 

귀류논증과 같이 그것을 끝까지 집착하고 임할 때 

그가 맞이하게 되는 그 끝을 미리 보여주어서 

그를 공연히 약올리고 비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을 조롱한다고 받아들이고 오히려 반발하게 되고 


그것을 갈구하는 입장에게는 

상대가 아무 것도 제공해주지 않으면서 

공연히 힘만 빠지게 만들고 

허무하게 만든다고 오해를 받는다. 



오락을 즐겨해서 문제가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재미있는 오락기기가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가를 

놓고 보자. 


오락기기가 재미있음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공연히 자신을 약올린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그것을 제공해주면 

정신없이 그것만 가지고 놀게 되어서 

결국 아이가 망치게 되게 된다. 


이 두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은가. 


모든 것을 오락이 주는 즐거움만 가지고 

평가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왜 오락기기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그것을 문제삼는가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사실은 조금은 약을 올려도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그가 

그것을 포기해도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것으로 

자신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대하는 것이 그래도 

그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그를 대하게 되기에 낫다고 보는 것이다. 



방편과 관련해서는 

모든 방편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기에 


물이나 소금이나 전등이나 

라이터나 그 모든 것이 다 같은 성격을 

갖게 된다. 


그래서 본래 수행자가 닦아 나가는 

방편은 

다라니 삼매 수행으로 시작해서 

다라니 삼매 형태로 그것을 정리하고 

끝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인 것이다. 




다라니를 외우는 방안도 사정이 사실은 같다. 

이것도 방편이다. 


원래는 

처음 아이가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과정처럼 

그냥 무조건 외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외워는 것이 원칙이다. 


답답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소원이 성취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고 


안 되어도 사실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중생이 문제삼는 온갖 생사고통은 

사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수행자까지 같이 덩달아서 

그것을 놓고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서 

중생이 무여열반에 이르게 되는가 

안 되는가가 초점인 것이고 


그를 위해서 그 모든 방편이 

시설되는 것뿐이다. 


그러니 수행자마자 

중생과 같은 상태에서 

생사 고통을 같이 대면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비유하면 환자를 치유하는 의사는 

환자처럼 손과 발이 잘라지고 안 잘라지고를 

같이 문제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자르거나 안 자르거나 

그를 통해서 환자가 끝내 치유가 되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환자와 같이 손발을 바라보면 

그 손발을 잘라야 비로소 

그 환자의 병이 낫고 생명을 건지는데 

그 손발을 자르지 못해서 

결국 환자마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처럼 

무여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 목표일 때 

그 상대가 생사고통을 겪거나  

지옥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는 것

또는 살면서 원하는 소원을 성취하고 하지 못하고를 놓고 

같이 집착을 갖고 문제를 삼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옥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이 무여열반을 

얻는데 도움이 되면 들어가게 해야 하는 것이고 

무여열반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를 놓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중생과 같이 복덕을 얻고 안 얻고를 

놓고 문제를 바라보면 

그것이 결국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수행자가 발보리심을 일으킨 후에부터 

다라니와 삼매의 수행도 익히고 

그리고 그 내용을 기억하고 지니는 것이 

수행자의 보물이 되는 것이라고 보지만, 

그 이전에는 그것도 

사실은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약사여래님이 

병자의 병을 고쳐준다고 할 때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약사여래님의 목표가 

아닌 것과 사정이 같다. 


사실은 고통을 당하다가 

벌레처럼 죽어가도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 당사자만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망상 속에서 바라보고 임하는 것 뿐이다. 


모든 방편을 놓고 

그것이 좋다고 보고 집착하고 임하는 입장에서는 

그 성취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수행자는 이런 중생과 상대할 때는 

그것을 통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할 방안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무관하다고 임해야한다. 


그것을 뜻대로 성취하지 못한다고해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은 

전도몽상에 바탕에 임하는 그 중생의 입장에서만 

그런 것이고 


본래 생멸과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고 임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다시 음식 쓰레기를 놓고 비유하자면 

그 상대가 세균처럼 그 음식 쓰레기를 차지해서 

그가 죽을 때까지 원하는대로 

그것을 다 차지하고 맛을 본다고 해도 

관계없고 


또 그것을 그렇게 못한다해도 

어느 쪽이던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균들 입장에서는 

이 경우와 저 경우가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그것을 대하고 임하는 것 뿐이다. 


수행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음식쓰레기가 세균의 활동으로 

부패가 되어도 무방하고 

부패가 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데 관점은 이 과정에서 

어느 게기를 통하여 

보리심을 일으키고 

해탈문을 열어 들어와서 해탈을 얻고 

무여열반을 얻게 될 수 있는가가 

초점인 것이다. 



[...]


그래서 음식쓰레기를 놓고 

그것을 세균이 한 평생 그것을 차지하고 잘 살던 

아니면 중간에 차지하지 못하고 말라 죽던 

그것을 놓고 

수행자가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되고 


다만 이런 과정을 

그렇게 매 순간 전도몽상과 집착에 바탕해 

무한히 계속 반복해 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무여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어떤 방편이 좋은가를 놓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량행문과 방편의 수행이 

요구된 것이다. 


그러니 그 방편지혜도 

역시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가 닦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라니와 삼매로 

임해야 한다고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겨울에 불을 켤 줄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고 

어떤 수행자가 라이터를 개발해서 

온 동네 아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그 방안을 가르쳐주고 


더 나아가 만나는 수행자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을 놓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잘하는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수행자에게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한마디로 쓸데없는 일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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