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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투자자 100원으로 30조벌기-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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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496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자신이 좋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있다면 좋겠다거나 아주 좋겠는데
이런 마음을 일으켜 갖고
현실을 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는가를 놓고
이런 인과문제가 하나같이 문제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에 대해 분별하는 내용 가운데
옳다고 보게 되는 내용과
옳지 않다고 보게 되는 내용이 또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 부분에서는 승의제 차원에서
그런 내용 자체를 본래 논의할 바탕이 없다고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그렇지만, 그래도 분별을 한다면
그 가운데에서 옳다고 보게 되는 내용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내용을 또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본래는 실재나 감각현실에 2 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이 부분을 살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는
2 도 있고 3 도 있고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현실이고
현실에서의 분별인 것이다.
그럴 때
2 더하기 2 는 4 라고 답하는 것은 옳지만,
2 더하기 2 는 5 나 9 라고 답하면 엉터리다.
이런 구분을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 분별영역에서는
소설도 있고
상상으로 그려 놓은 만화책도 있고
시인이 쓴 시도 있고
기타 철학자의 사변적 주장도 있고
과학자가 주장하는 내용도 있고
등등 수많은 분별 작용이 있다고 할 것인데
이런 것들에는
일단 분별하는 가운데에서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 엉터리가 많이 들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분별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희론의 바탕에서 분별을 행하고자 할 때는
그래도 옳은 분별을 해야 한다고 보고
이것을 구분해서
분별하는 가운데 가장 옳다고 볼 내용을
불교에서는 다시 세속제라고 표현하여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것은 분별이 희론임을 전제로 할 때도
다른 견해는 이러이러해서
그 자체로 엉터리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그래도 비교적 옳은 내용을 세속제라고
구분해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록 그것이 기본적으로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해도
그렇게 세속제를 확립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현실에서는 바로 이런 세속제를 바탕으로
언어를 떠난 승의제를 얻을 수 있게 되기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살피면서
또 이와 함께 현실에서 예민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내용
즉 어떻게 하면 소원을 뜻대로 다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미 보았지만,
소원이 100 % 성취되었다고 여기게 되는 어떤 정지 단면을 놓고도
그 상태에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바로 승의제의 차원에서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사정이 그렇지만,
그러나 어떠어떠한 상태는 그런 소원이 전혀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고
그러나 그와 달리 어떤 상태는 그런 소원이
성취된 상태로 보게 되지 않는가.
투자를 했다면
비록 이 어느 경우나 그 정지단면에서
자신이 문제삼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승의제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는 투자액보다 많은 수익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경우와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앞의 문제와 관련해서
살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
자신이 투자한 종목을 매도한 다음
급 상승하고
매수하면 급격히 하락하면
투자자 마음이 어떻게 되는가.
속이 쓰린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 신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이런 투자를 하면
초단위로 변화하는 가격에
마음이 편할 도리가 없게 되고
그런 상태로 오래 생활하면
결국 몸도 상하게 마련이라고 본다.
직업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이
나이가 들면 오래 이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는 것도 그런 사정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특히 이처럼 가격 변동이 심한 종목에 투자하는 경우는
기존의 주식투자나 선물거래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는 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고 보는 것이 일반이다.
기업을 경영하거나 사업을 하면서
여유자금을 재태크 차원에서 관리하는 일이나
원래 주식이 갖는 본 취지가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닌데
시세변동에 올라타서 시세차를 거두어 수익을 얻기 위해
임하는 것은
결국 그 원리가 도박의 원리와 같은데
도박장에서 직접 도박을 하는 것보다
더 문제가 많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도박장과 이런 거래소의 거래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수익을 얻어도 거래에 참가한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수익을 거두고
손실을 볼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clean 한 도박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성격이 도박의 중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을
더 증폭시키고 심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이런 거래소에서는
지렛대 (leverage) 효과를 제시하면서 신용거래를 허용하는데
수익이 발생할 때는 상당히 좋다고 할 만하지만,
자신이 주사위를 매번 던져서 숫자를 맞추어내는
신통력이 있다거나,
또는 매번 주사위를 던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숫자가
나타나게 할 신통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순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할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는 상태와는 달리
대단한 심적 압박을 갖게 만드는 원인도 되는 것이다.
앞에 붙인 표에
변동하는 가운데 기록한 최고가 408 최하가 243 이런 숫자가
그런 입장에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것이고
생사를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숫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이런 거래를 통해
큰 수익을 거둔 경험이 있게 되면
이후 꾸준히 씨를 뿌리고
성실하게 물도 주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노력 자체를
외면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한 번 잘 투자하면 은행에 10 년 예금하거나
사업을 열심히 해서 얻는 수익을
바로 거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 부분에 관심을 더 기울이지
밭에서 씨를 하나하나 뿌리고
가꾸는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중독증상이 생겨날 때
옆에서 말려주는 이가 있으면 좋은데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대단히 cool 하고
clean 한 측면이 있기에
일일히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컴퓨터 게임에 몰입해서
날밤을 보내는 아이들처럼
어른들도 이런 종목에 빠지면
본업을 제치고 이런 분야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평생을 보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보낸 평생은
그것이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정리해야 하는가.
거래소 그래프 변동표에 접착되어 달라붙어
자신의 삶의 궤적이 그렇게 표시되는 가운데
한 평생이 그렇게 쉭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어떤 경우에 확실히
그 중독증상이 해소되는가하면
그런 거래를 반복하다가
잔고에 can 이란 글자만 가득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경우가 대단히 현실에 많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위험성을 미리 잘 파악하고
재태크 차원에서 거래를 하더라도
여유자금을 놓고 마음 편한 상태로 임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좋지 않고
심한 경우는 곧바로
이상한 향 공양 이른바 번개탄 공양을
올리려고 나서는 경우가 많게 되는 것이다.
파도물결이 일어나는 바다에서
자신만은 남과 달리
늘 잘 올라타고 잘 내릴 수 있다고 자신도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단히 희박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관적인 내용만 제시하면
환영을 받겠는가.
그래서 또 그런 위험성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지만,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면서 대박 수익을 거둘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잘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인과 문제나
어떤 것의 본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갖는 가치는
다른 것과 어떤 경중의 차이가 있는가
문제등을 다각도로 살펴나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살필 때
가장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다음을 먼저 잘 확인해보자.
즉, 눈을 감고
금괴 1 톤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따고 할 때
그렇게 마음에 떠올리는 그런 금괴의
무게나 길이를 잴 수 있는
저울이나 자가 마음에 있는가.
이런 것이 있는지
잘 먼저 확인해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눈에 줄자도 보이고
무게를 재는 저울도 보인다고 하지만,
그러면 거기에 그 길이나 무게가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이 줄자나 저울의 눈금을 보고
분별하는 그 영역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할 것인가.
지금 이것을 먼저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현실에서 매 경우마다 이것을 문제삼으니
어딘가에는 그것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 일단 확인해보자는 의미다.
이미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 있는
문제점을 반복해 살폈는데
여기서도 똑같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금괴의 크기를 재고
무게도 달 수 있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이므로
그래서 그것을 일단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그렇게 문제삼는
길이나 무게를 놓고
길이를 재는 자는 어느 영역에 있고
무게를 재는 저울은 어느 영역에 있다고 할 것인가.
[...]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다.
슈라바스티(śrāvastī[) 한자어로는 사위성이라고 하는
지역에 있는
기원정사가 그곳인 것이다.
https://3.bp.blogspot.com/-lla9Qo4q5y4/WT61nlSxQ0I/AAAAAAAAeeE/lQMPOKm6ee4BSqbyMlHSwMXj3ahCaVdaQCLcB/s1600/%25EC%2588%2598%25EB%258B%25AC%25ED%2583%2580%25EC%259E%25A5%25EC%259E%2590%25EC%259D%2598%25EC%25A7%2591%25ED%2584%25B0P1060626-1_ct24.jpg
https://2.bp.blogspot.com/-_7Ou7kFfOVw/WT62hgYaZsI/AAAAAAAAeeQ/alvOpemiVuUad7lROjWW0l-egMrxRN4vgCLcB/s1600/The_Eight_Great_Places_ar27.jpg
https://3.bp.blogspot.com/-9jY31knRaeg/WT62hmvM68I/AAAAAAAAeeM/Ktwlan94Zb8EGDuoBCD5Ki28BF0ygxbQACLcB/s1600/The_Eight_Great_Places_exc.jpg
인도에서 또 하나 전설적인 투자를 행한 인물로는
아소카 왕을 떠올릴 수 있다.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모래 한 줌을 투자해서
인도 전체를 얻은 인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그 아소카왕이 인도를 전체를 차지하고
인도 전역에 세운 탑주라고 한다.
인도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런 유적을 통해서
그 일부분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데
여하튼 모래 한 줌으로 지도에 보이는 광활한 인도를 차지했다는 것이니
투자 수익률만 놓고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 [pt op tr] fr
● [pt op tr] fr
>>>
이미 이전 글들에서
투자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투자란 수익을 얻고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좋음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것인데
그로 인해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받으면 되겠는가.
그래서 좋음에 따르는 부작용과 위험성을
살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방편에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특히 중독현상이 강한 부분에서
주의를 기울이고 잘 임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독현상이 문제된다고
완전히 이것을 배제하는 것만 능사라고 오해하면
오히려 곤란하다.
그러나 약간 좋은 점이 있다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점을
모두 무시하면 또 곤란한 것이다.
투자에서 신용으로
즉 자금을 대출받아 투자에 임하면
수익을 거둘 때는
대출받은 자금은 고정이율로 반환하면 되기에
자기 자본을 기준으로 거둘 수 있는 수익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주사위를 매번 던지면서 자신이 매번 주사위 번호를 알아맞출 수 있다거나
또는 매번 자신이 원하는 번호로만 나타나도록 만들 수 없기에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자신이 투자하는 부분도 사정이 같다.
그런데 자신의 기대와 달리 투자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그 자금의 성격이
자신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고 보는
여유자금인 경우와
자신의 생존이나 생계가 바로 직결된 자금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그 자금이
자신의 자금인 경우와
타인의 자금인 경우는 또 성격이 달라진다.
그런데
손해가 발생하면 누구나 대부분
속이 상하는 것은 보통인데
그래도 그것이 자신의 자금이면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주체의 입장은 또 자신과 다른 것이다.
이는 쉽게 자신을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자신이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을 보는 경우와
자신이 다른 생명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을 놓고 보는 경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원래는 같게 보고 존중을 해야 마땅한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손해가 발생할 때
다른 이에 대해서는
지극히 가혹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투자가 실패할 때
자신이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으면서
자책하는 것과
다른 이가 쫒아와서 압류를 하고
기타 법 이외의 온갖 수단방편을 다 동원해서
자금을 회수하려고 하는 경우는
그 압박의 정도가 다르다는 의미다.
투자가 실패해서 can 이 되었을 때
자신은 그래도 can 이란 글자를 보면서
자신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can 을 다른 의미로 보는 것이다.
발로 차면 구르면서 소리라도 나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동전이라도
몇 개 꺼낼 수도 있다고 보고 과감히 차고 굴리고
그래도 끝내 속이 풀리지 않으면
발로 찌그려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자신이 자신과 다른 생명을 놓고
아상도 갖지 않고 타상도 갖지 않고
차별없이 모두 존중해서
바이러스나 세균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생명을 다 각기 우주보다 더 가치있다고
존중하고 대해왔다면 그래도 모르는데
자신부터 자신만 존중하고
매끼 식사를 위해
다른 생명은 고통받으며 지내다가
끝내 도살당하고 없어져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평소 임해왔다면
자신도 다른 이로부터
특별히 다른 것을 기대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아닌가.
그래서 그런 위험을 미리
대비하지 않고
그저 높은 수익률만 쫒아서 임하면
그 하나의 가능성이 현실이 될 때
곧바로 벼랑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또
극단적인 경우에도 별 문제는 없고
그래서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해도 그런 자세에는
여전히 큰 문제가 있다고
또 사정을 제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이다.
>>>
그것은 모든 좋음의 방편이 갖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생명이나 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범위가 대단히 넓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 그 주체가
좋다고 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할 것인가.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고
또 여자는 멋있는 남자를 좋아하고
그런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문제다.
좋은데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리고 수행에서는 원칙적으로
대부분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되는 것을 놓고
모두 그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라고 제시하는데
그러나 왜 그것이 좋은데
그래야 한다고 할 것인가.
누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그 이유는 그것이 그렇게 좋은 한편
그렇게 단순하게 좋은 것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하게 좋을 뿐
좋고 좋고 좋고 좋은 것은 아니기에
바로 그 부분이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단순하게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면
그로 인해 그 단순한 좋음만 얻을 뿐
나머지 무량하게 좋고 좋고 좋고를 얻지 못하므로
그 부분이 알고 보면 손해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좋음이란,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이 다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온갖 측면이 다 좋을 수 있는데
만일 이 가운데
나 자신만
지금 당장
이 측면에서만 좋고
나머지가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런 부분이 문제이고
또 그런 내용 때문에
그 좋음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음은 반대로 그것에 집착하는 만큼
나머지 부분의 좋음을 장애하고
나쁨과 고통을 자신에게 돌려주기에
또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무량한 좋고 좋음을 얻지 못하고
대단히 손해를 보는 것인데도
그러나 당장 그 주체는 그것을 놓고 대단히 좋다고 여기며
집착을 갖고 대하는 가운데
그에 접착되어 그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접착 상태로 인해
또 반대로 무량하게 좋고 좋은 내용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기에
그 주체가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의해
좋다고 여기는 것은
그가 그에 대해 '좋게 여기고 접착을 갖게 되는 그 강도 만큼 '
그것이 더 문제라고 제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는 것을
제거해야 할 사정은 위와 같은데
그 사정이 얼마나 간단한가.
비유를 들어
현실에서 현미경으로 무언가를 들여다 보는 이는
그 상황에 놓여 있기에
들판의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고
또 들판의 나비에 접착되어 그것을 대하는 이는
또 바로 그 상황에 놓여 있기에
넓은 우주를 보지 못하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비유로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산수로 간단히 표현하면
10 에 접착된 이는
20 을 보지 못하고
20 에 접착된 이는
30 을 보지 못하고
그런 식인데
여하튼 무언가에 접착이 되면
그로 인해 무량한 좋고 좋음을 보지 못하고
또 얻지도 못하게 되는 문제가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매 순간 10 에만 접착되어
그것을 착실히 다 얻어나가고
그것을 모두 모으면
무량한 좋고 좋음이 얻어지게 된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10 에 접착되면
그것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그로 인해 무량한 좋고 좋음은 얻지 못하게 되는
관계가 있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량한 좋고 좋음을 얻는 경우는
10 은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서
얻을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무량행문에 임하는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물러서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한 방편지혜를 닦고 수행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에서 모든 방편이 다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청정한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거나,
청정한 니르바나로부터 본래 떨어져 있는 것도
하나도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니 무량행문의 수행에 임할 때는
처음 수행을 하던 상황과 달리
배우지 않고 닦지 않아야 할 것이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방편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지만,
수행자는 이런 나쁨을 제거하고
이를 좋고 좋은 형태가 되도록
이를 고쳐 사용하는 것이 요망된다고 할 수 있고
바로 이런 사정으로
무량행문의 수행은
삼매와 다라니로 그 내용이 모두 압축되는 사정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그 내용이 무량하고 광대하기에
그런 사정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같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같이 갖기에
그것이 오로지 좋고 좋은 방향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수행단계에서부터
통제를 하는 사정도 있는 것이다.
원칙적인 수행에 임할 때는
보통 음악이나 음식 향 기타 등등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는 것을
모두 절제하고 금하는 것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극단적 고행을 행하는 것보다는
가장 좋은 수행결과를 얻어낼 수 있도록
중도를 취할 것을 제시하고
또 늘 다른 이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며 수행하기 보다
스스로 진리인 법과 자신에 의존하여
수행에 임할 것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런 각 극단의 방안이 모두
다 성불에 이르게 하는 방안인 사정도
제시되는 것을 경전에서 살피게 된다.
그 대표적인 분들이 경전에서 그 사례로 제시되는데
약왕보살님이나
묘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 등이
이들 각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로
또 제시되는 것이다.
이 분들이 한결같이 현일체색신삼매 내지 여환삼매를 증득하여
원하는 형태로 자유자재하게 그 모습을 변신해서
후배 수행자들을 지도하는데
그러나 또 경전에 보면 각기 조금씩
다른 특색이 있음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는 수행이란
현실에서 문제삼는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넓고 길고 깊게 실상을 꿰뚤어 올바로 관하는 가운데
그 정체나 그 가치를 관하고
또 그 인과를 살피거나 하여
수행방안을 실천해나가 수행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보는 것인데
앞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수행방편을 취하여 수행결과를 증득하는
사례들이기도 한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행해야 할
원칙적인 수행노력을 하지 않고
고행을 행하거나
또는 음악과 식사 공양만 꾸준히 행한다거나,
단순히 보살님 명호나 부처님 명호만
한결같이 극진히 념하여
수행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또는 경전의 내용을 스스로 연구하고
궁리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그 자체로는 뜻이 없고
아무리 외우고 읽어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다라니만 붙잡고 념송하여
수행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법화경등에서는
그러한 방안도 모두 성불에 이르는 방편이 된다고
그 대표적 사례들을 뽑아 제시하고 있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유마경에서는 방편과 속박 및 해탈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고
합니까?
보살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空, unyat),
무상(無相, nimitta),
무작(無作, apraihita)의 (세 가지 해탈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有方便慧解, upyoptta-prja]이라고
합니까?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무상· 무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조복시키지만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음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
이런 부분은
속박과 해탈의 차이의 핵심은
집착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와
그 지혜와 방편을 통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그 기준이 됨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왜 하나의 수단이나 방편이
이렇게 달리 평가받게 되는가는
세상에서 문제삼는 온갖 좋음을 놓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이 목마를 때 마시면 좋음이지만,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물은 고통을
주는 것과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무량행문에 있어서는
단순히 외관만 놓고서는
그것이 올바른 수행인가 아닌가를
살피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mun 님의 립싱크 수행이
문제되는 부분도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본다.
독경 테이프로 경전을 열심히 듣고 따라 읽는 것 같은데
그것이 정말 수행자의 마음에서
임하는가 아닌가
또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듣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그 차이가 있는데
그러나 이런 립싱크 수행은
와관만으로는 그것이 쉽게 구분이 되지 않기에
바로 이 부분에 mun 님이 살짝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표준적인 수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관만 보면 좋고 나쁨에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것 같은데
잠시 황진이가 나타나 유혹하면
곧바로 집착 증세를 일으키 임하거나,
또는 수행자는 여인을 멀리하고
집착을 제거하라고 했다고 하여
임신한 여인히 출산을 하려는 가운데
도움을 요청할 때도 외면해 버린다거나
하는 것은
수행의 본 목적과 그 방안에 대해서
혼동을 갖고 임하기에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현실에서 일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을 놓고도
그 사정을 쉽게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일단 오락을 즐기기 보다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는 역시 하나의 좋음은 그 좋음을 주는 대신
그에 접착되기 쉽게 만들고 그로 인해
무량하게 좋고 좋음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기능을 하기에
기본적으로 그런 표준적인 수행방안을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임하여
성적도 아주 우수하고
남들이 다 원하는 지위도 차지하는데
나중에 보면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또 그 반대로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나중에 보면 놀라운 성취를 하고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경우도 있는 것은
또 각 방편이 모두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취지에서
실질적으로 추구되는 것인가에 따라
그 사정이 달라지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
>>>
일반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어떻게 투자하면 수익을 많이 내는가
이 부분인 것 같다.
왜 많은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많은 수익을 얻어서 그 상태에서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더 나아가 위 답에 다시 앞의 질문을 계속 해나가서
그 궁극적인 답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러나 그보다는 당장
원하는 수익을 많이 얻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게된다.
[...]
[...]
[...]
[...]
[...]
[...]
[...]
보게 된다.
[...]
● [pt op tr] fr
>>>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7 번을 반복해 보고 또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 번 좋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무한히 보아야 한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그것이 의미를 잃게 되고
또 어느 시점부터는 그로부터 고통을 겪게 된다고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막에서 물을 먹던 시점에 물이 지극히 좋았다고 보는 경우가 있는 반면
수도만 틀면 물을 먹는 상황에서는 물은 그저 물이라고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물 맛을 보게 되면
물은 지극히 고통과 공포를 주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과
같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 물과 나중의 물이 그다지 다른 것은 아닌데
왜 그렇게 의미가 바뀌는가.
여기에는 MUN 님의 암파리 화두도
또 관련이 된다고 본다.
이는 무엇이 좋음이고 아름다움인가를
연구하기 위한 화두이기도 한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사람은 파리를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나 수파리는 암파리의 뒷다리를 아름답다고 보고
암파리는 수파리의 날개가 황홀하게 멋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파리로 수시로 변해서 파리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는
MUN 님의 입장과 달리
일반적으로는 상상만 할 뿐 그런지 안 그런지 알기 힘들다고
할 수 있는데
여하튼 공중을 자유롭게 날라다니는 파리가
어느 시점에 보면 서로 붙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여하튼 그래서 그렇게 추정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여하튼 이들 파리는 서로를 그렇게 대하는데
그러나 또 파리는 ○ ○○ 양이나 ○ ○○ 군과 같이
아름답고 멋진 미녀 미남 배우를 지극히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면서
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파리는 동료 파리들이
그런 미녀 미남 배우에 가까이 날라가면 바로 사망에 이르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앞의 내용은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과 똑같은 형식의 문장의 반복을 피하지만,
역시 각 경우에 마찬가지로
왜 사람은 그렇게 이상하게 대하게 되는가를 놓고
똑같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8 M 이상에 달하는 내장에
가득 대변을 채우고 세균과 바이러스가
가득 담겨 있고 소변 땀 피 고름이 가득한
몸에 겉만 피부로 덮어 놓은 것뿐인데
왜 그것을 아름답다거나 멋있다고 여기고
대하는가.
이런 것이 경전에서 제시되는 부정관 수행과 관련된
현실 문제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목표의 성취와
TURN 이란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미투자자 생존 이론을 통해
DOCTR 님이 목표 투자액을 달성하기 직전인 이 시점
그렇게 쉽게 목표치를 달성했다고 해서
계속 무한히 그 상태로 나아가면
결국 본인이 처음 지급한 무한카드와 무한화폐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도달할 뿐
더 의미는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결국 또 물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대하는 물처럼 여겨지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TURN 할 방향을 찾아내지 못하면
계속 그 상태에서 그렇게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같은 영화를 무한히 보아도
매번 재미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아름답고 선하게 될 수 있는가를
먼저 찾아보아야 한다.
사실은 같은 영화를 7 번 같은 형태로 보는데 질리지 않고
앞과 같이 보는 방안은 무언가라는 문제의 답은
그 문제에 그 답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1 나누기 3 은 얼마인가.
또는 제곱해서 2 가 되는 양수는 얼마인가.
이런 문제가 제출될 때
그 문제가 곧 그 답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있다.
알고보면 그것이 맞는 말인 것이다
1 나누기 3 의 답은 1/3 이렇게 적어 놓으면
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도 √2 이런 형태로 적으면
그것이 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세계 각국마다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의 희망사항이 다르고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어서
동시에 그것을 모두 다 성취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볼 때
어떻게 이것을 다 함께 동시에 성취하고 만족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가 제시될 때에도 마찬가지다.
위 문제가 바로 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서로의 희망사항이 다르고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어서
동시에 그것을 모두 다 성취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볼 때
제 각각 이것을 다 적어 놓고
이것을 다 함께 성취하고 만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답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느 상황에서
이것이 어느 한 입장이라도 성취가 되지 않으면
그 부분이 문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결국 위 문제 내용처럼 되는 것이
그 답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을 놓고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위 자체에 그것이 성취되기 힘들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데
그러나 위 문제가 곧 답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사실 어떤 목표가 다 성취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계속 머물거나
무한히 그런 형태로 나아가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 TURN을 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회향이란 수행덕목과
깊이 관련된다.
그래서 사실은 이 방안도 함께 검토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무리 TURN 을 해도
어느 부분에서는 결국 앞과 같은 문제를
또 만나게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목표를 다 성취했다고 할 때는
또 마찬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방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나가고자 한다.
[...]
수행자 가운데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입장에서는
외관상 축생 아귀형 지옥 중생과 같은 형태로
수행에 임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
무량행문에서 닦아 나가는 방편 지혜를 닦는 수행에는
본래 그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모든 방편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데
그 외관만으로는 그것이 잘 구분이 되지
않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물이 어떤 상황에서는 지극히 좋음을 주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지극히 고통을 준다는 내용도
바로 이를 설명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행자가 중셍제도를 위해
이런 무량행문의 수행을 닦다 보면
그런 성격 때문에
외관상 축생과 같고
아귀와 같고
지옥중생과 같이 임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닦으면
그로 인해 역시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과보를 받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수행자가 처음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불퇴전위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량행문을 잘못 닦아 나가면
수행의 성취보다는
그 스스로 축생이나 아귀 지옥에 갇히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생법인을 증득한 이후부터는
또 사정이 달라진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수행자가
설령 무간지옥에 들어가 임하더라도
그 상태 자체가 극락과 전혀 다르지 않게
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수행자와
그렇지 않고 이론상으로만 그렇다고 여기는
수행자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 구분 경게선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는 스스로
곧바로 실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갑자기 자신의 손을 망치로 때린 상태에서나,
펜치로 손톱을 억지로 뽑아 놓은 상태에서도
그 상태에서 평안할 수 있는가를 살피면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직접 실험할 필요가 있겠는가.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상을 갖지 않아서
안인을 성취했다고 하는 부분은
이런 내용보다 더 심한 상태이지만,
굳이 그런 상태가 아니더라도
앞과 같은 실험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정말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수준의
수행자인가 아닌가는
위와 같은 실험정도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또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런 경우는 또 표준적인 수행방안만을
취하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가 무량행문을 닦는 과정에서
축생과 같고
아귀와 같고
지옥중생과 같은 형태로 수행에 임하면
무생법인을 증득한 상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수행자는 문제가 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이론상
수행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게 되는데
정작 못하게 되는 것이다.
축사에 갇혀 지내거나
사막에서 물없이 지내거나
물 끓이는 솥에서 담겨 있어야 하거나 하는 상황에서도
이론상 정려 수행도 하고 반야수행도 할 수 있다고
할 것이지만,
정작 그것이 안 된다는 의미다.
문수보살님과 같은 경우는
그래서 정려 수행을 닦을 때
처음에는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만 정려에 들 수 있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행주좌와 어느 경우나 늘 정려 수행을 닦아나갈 수 있다고도
제시하고
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그로 인해 자신이 지옥에 무한히 지내게 되는
방편이라도 다 취해서 제도하겠다고 임하면서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수행을 갓 시작한 입장에서는
이론상으로는 맞다고 보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수행자가 취하면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
[...]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일반적으로
대부분 수행에 곧바로 들어가지 않으므로
[...]
이미 아승기란 숫자를
1000000..... 이런 식으로 표기하려고 하면
현재 전 세계에 있는 하드디스크를 다 동원해도
그 숫자를 표기할 수 없다고 제시한 바 있다.
이미 디스크에 010101 이런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0의 숫자를 적은 것으로 간주하고
본다고 해도 사정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무량한 방편 지혜나
무량한 진리는 그런 방법으로는
어디에 담아서 이동할 도리가 본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문수보살님이
아라바자나 라는 글자에 그렇게 담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결론적으로 처음의 참 이하 부분은
삼삼하지 이하에서 전개되는 본격적인
수행에는 그다지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이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는데
앞 부분이 다 잘 가동되고
도미노가 다 동시에 쓰러져서
결국 현실에서 무한대의 소원이 다 성취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결국 쓸모없는 것임을 이해한 다음
무원무작 해탈문을 열고
수행에 들어온 부분부터 할 일을
찾아서 한다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
일단 300 원이던 3000 원이던
30 조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면 다 상황이
같다고 보게 된다.
300 원을 놓고 임하는 자세는
나중에 30 조원이 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사실은 대부분 소시민의 경제 생활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30000 원을 놓고 대하는 태도는
나중에 수십조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설령 123 층 빌딩을 세우고 하는 상태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평소에 미리 그런 상황을 준비하고
또 그렇게 임하고 훈련하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의사가 되려고 희망하는 초등학생이 있다면
처음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의사면허증을 발급받았다고 여기고
그렇게 계속 임하면서
평소 부족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
그런데
삶의 모든 것이 대부분 약간의
도박성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떤 결과를 예측을 하며 행하기는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 예측이 반드시 100 % 맞는다고 보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대충 맞는 경우도 있고
각 경우마다 사정이 다른데
그런 사정은 결국
삶의 매 순간 선택이나 결정이
도박적인 요소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특히 그 각 경우에 따라서는 그로 인해
삶이 함께 위험이 많아지고 불안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버스를 하나 타는데
버스를 타고 나서 매번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되고
그 확률이 각기 1/2 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그렇지는 않다고 보지만,
그러나 자신의 예측한 정확한 시간에
정확히 갈 수 있는 것은 또 아니고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타게 되고
또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 등도
또 다 예측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매 선택에는
약간의 도박성이 들어 있다고 보게도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도박성이 삶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고
원래 행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을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
도박 중독성향을 일으켜 임하게 되면
그것은 문제라고 본다.
그러나 투자하자마자 몇 십 % 씩 바로
손실금액이 발생하면
이후 손실을 회복해 내려고
계속 시세를 보게 마련인데
어떻게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경우는 문제라고 본다.
[...]
개미투자자의 생존이론에서 제시한 내용은
개미투자자는 정확히 미래의 가격 변동을 예측할
신통력도 없고
다시 가격이나 거래 물량을 변동시킬 신통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금을 어느 형태로던 보존하고 수익을 얻고자 하는 입장에서
투자를 행하는 입장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에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여유자금으로 투자하고
위와 같은 능력이 없이 투자한 것이니
그 범위에서 상황을 잘 헤쳐나가야 한다고
일반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최악의 경우에도 무방하다거나
무방하게 될 방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투자 원금이 다 사라졌는데
어떻게 무방하게 되는가.
그러니 그렇게 되어도 무방하다고 볼 범위에서만
개미투자자는 투자를 해도 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향 공양을 올리게 되기 쉽게
몰리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그런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앞과 같이 급락하는 경우 등에서
하루를 보내는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별 내용이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손해를 보아서 조금 씁슬하더라도
그저 그렇다라고 임할 수 있는 경우와
얼굴색이 노랗게 되는 경우는
서로 상황이 다른 것이다.
[...]
투자와 원금 상실의 문제를 살폈는데
이것이 왜 경전에서
법에 a 가 없다라는 내용과
관련이 된다고 하는가.
그것이 바로 위 내용을 제시하는 취지이기 때문이다.
앞의 사례를 다시 높고 보자.
자신이 100 원을 투자했는데
투자를 잘못해서 그것이 다 사라졌다고 하자.
사실은 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경전에서는
그렇게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들을
죽 나열하면서
그런 것이 없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있는 것이 없게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경전에서는 그렇게 본래 없는 것을 놓고
현실에서 각 생명들이
망상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집착을 갖고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 있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그런가.
이것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어떤가.
무엇을 얻어도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잃어도 그것이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혼자 무엇이 생겼다 없어졌다 이러면서
온갖 번뇌와 고통을 다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꿈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이 사정이 이해가 쉽다.
꿈에서 황금이 묻힌 동굴을 찾아서
황금을 다 얻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없던 황금이 있게 되었다고 할 것인가.
또 그 상태에서 이후 도적이 쳐들어와
황금을 다 빼앗겼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어디에 있던 황금이 없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꿈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황금이 정말 생겼던 것도 같고
그것이 다시 없어진 것 같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 상황이라고 경전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유마힐 거사님이
경전에서 그런 내용은 없다고 반복해 제시해도
현실에서 사람들이 문제삼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들을
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없다고 보는 경우가
대단히 드물다.
여전히 황금은 황금이고
또 투자 수익은 수익이고
손실은 손실이고
더 나아가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기 자신이라거나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이런 것들이 다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매 순간 대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매 순간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신구의3업]
그런 업을 통해서
생사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으로 묶여 지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혹[번뇌]-업-고의 관계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지극히 고통스런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데
경전에서 유마힐 거사님은
그렇게 문제삼는 것이
없다고 지금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는
그런 매 극한 최악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어떻게 대하게 되는가와
바로 직결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꿈에서 황금을 훔쳐간 이가
자신이 아는 어떤 이라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실답다고 여기는 이는
그것을 대단히 문제라고 여기고
꿈을 깨고 나서도 그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황금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인데도
그로 인해 무언가를 행하게 되면
그 이후가 엉망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꿈에서 또 그 황금이 자신의 집 마당에
묻혀 있는 것을 본 이라면
그런 엉터리 생각 때문에
자신의 집을 허물고
금을 캐내려는 노력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엉터리 생각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이후 또 다른 생각과 말과 행위를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그 이후 사태가 생사고통의 상태로 묶이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위 내용을 잘 이해하는가
하지 못하는가는
생사고통을 계속 받아나가는가.
아니면
깨달음을 통해서 생사를 벗어나고
그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한히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게 되는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경계선인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불교 경전의 표현들이
한 번 읽어서 바로바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낯선 표현들로 되어 있고
그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더라도
자세히 살펴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현실에 임해나가도록
변화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
현재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과 함께
유마힐소설경에서
현실에서 집착하고 중요하다고 보는 내용들을 나열하여
법에 그런 a 가 없다는 내용을 살피고 있다.
[...]
그런데 일반적으로 어느 부분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는가 하면
100 원을 투자해서 얼마 안 지나
300 만원이 되는 투자 방안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상화폐 투자에서
그런 내용이 발생했다고 언론보고가 되어서
요즘 본 연구실에서도 이에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수행자의 가치투자 문제와 함께 관련해서
살피고 있는 중이다.
이를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악화와 법의 이론
>>>
우선 어떻게 100 원을 투자해서
300 만원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을 살피기 전에
기본적으로 다음의 망상분별 문제부터 먼저 확인하기로 한다.
어떤 망상증 환자가
매번 무언가를 대하면서 그것에서 C 를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대할 때마다 거기에서 C 라는 생각을 일으킬 때
그는 그것이 곧 C 라는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prince 님이 그런 주장을 하는 대표라고 할 수 있다.
a + b =>C 의 관계식을 놓고
위 관계식이 이미 앞 내용들에
그런 C 가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관계를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 C 가 a + b 가 있는 그 상태에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 가 C 는 아니라고 해도
위의 관계에서 a 에서 C 를 또 얻고 또 얻고 하니
그 a 에 C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무언가 특별한 것]이론과
representative [대표] 이론과 대단히 관계가 밀접하다.
예를 들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제기될 때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법(일체존재)에 a 가 없다라는 주장과 관련하여 이런 의문을
갖게 마련이다.
자신이 눈을 떠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런 꽃이 없다고 하는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고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은 그 자체가 관념분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해도
다시 위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감각현실은 매번 대할 때마다
자신이 꽃이라고 생각하게 되니
그 감각현실 그 부분은 비록 관념분별 자체는 아니지만,
매번 대하면 그런 꽃이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그 무엇으로서
그것은 결국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그런 꽃이라는 생각을 일으켜 갖게 할만한 무언가 특별한 어떤 것
즉 something special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something special 한 감각현실 그 부분은
관념분별 영역에 그 대표로서 그런 꽃이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의 골격이다.
그리고 이 관게를
존재가 문제되는 각 영역으로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전반에 같은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a + b =>C 관계식 자체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어떤 a 를 그런 상태에서 대하면
C 를 반복해 얻게 되기에
그 a 는 곧 C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식으로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어떤 생각을 일으켜
얻게 되었으면
그런 사정으로
실재나 감각현실도 그런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고집해 머무는 것이다.
>>>
그리고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행하여
집착하여 머무는 이들의 상태도 대부분
이런 prince 님의 상태에 준하는 상태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때
자신이 무언가를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행하기에
그러므로 그런 분별내용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에 없다고 할 것은 아예 아무 것도 없다고
하게 된다.
왜 그런가. 무언가 a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마저도
분별영역에서는 그런 생각과 그런 a 라는 관념분별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관념분별로서의 a 는 그 마음에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그런 사정으로
비록 그 내용을 얻지 못해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때는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내용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따지면 이들은 다 같은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논의가 젼혀 아닌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기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기에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여하튼 그런 사정으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켰다거나 행하고 있고
그래서 그의 마음에 그런 관념분별내용이 있는 것만은 의미하지만,
정작 그런 내용이 자신이 문제삼는 각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어서 실답게 있다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이 점을 망상분별을 행하는 상태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꿈의 비유나 최면의 비유와도 사정이 같다.
침대에서 황금꿈을 꾼 이는
그 꿈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그런 꿈을 꾸게 한 침대라는 상황에
그런 황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꿈 안에서만 그렇게 얻어지는 것일뿐
그 꿈을 꾸는 침대의 현실상황에는 없는 것이다.
최면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마힐소설경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는 것들이
모두 이와 상황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관념분별 내용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지 않고
또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또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관념분별 내용은 얻을 수도 없고
또 실재에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불가득, 공 ]
그리고 이들이 문제삼는 그 일체의 것은
모두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의 내용이 없는 것이다. [ 무아, 무자성, 승의 무자성, 무소유]
이와 같은 사정으로
법에는 그런 a가 없다라고 제시하는 것인데
prince 님은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서부터
눈을 뜨거나 해서
일정 감각현실을 얻으면 그 상태에서
그 일정부분은 꽃이나 바위로 자신이 생각하게 되니,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주장하고
실재도 마찬가지고
실체의 문제도 또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입장인 것이다.
여하튼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또 현실의 투자 문제에서도 똑같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본다.
다만 일반적 입장에서는
100 원을 어떻게 투자해야 300 만원이 되는가
이런 문제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에
우선 이 문제부터 천천히 살피면서
궁극적으로 생사를 벗어나
무량행문을 어떻게 닦아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그런 상태에 쉽게 임할 수 있는가를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이라는 주제로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일단 다음 문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하튼 무언가가 있다 없다라는 판단에서
앞과 같은 형태로 1 번 망상을 일으킨 이가
매번 대할 때마다 그런 형태로 망상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렇게 망상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 망상이 옳은 판단이 되는가
이 문제부터 먼저 확인하자.
그렇다고 보는가.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돈이
그 한장으로 엉터리 가짜 화폐로서 물건을 사기 힘든데
그것을 모두 모아서 수십억장 쌓아 놓으면
이제 그래서 그것이 진짜화폐가 된다고 보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고 현실에 임하게 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은
알고보면 철학 분야에서 결코
외로운 입장이 아니고
특히 서양 철학사상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위 문제를 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위 문제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투자 과정에서는 장님 개미투자자의
반복된 엉터리 예측에 바탕한 투자가
어떤 결과를 얻게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한 투자자가 매번 왜 그 종목의 가격이
그렇게 형성된 것인지도 모르고
다시 한 시간후의 가격이 어떻게 될 지를 모르고
투자를 행하는데
이렇게 반복해서 또 투자하고 투자하면
원하는 수익을 종합적으로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런 문제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처음 1 번이라도 정확히 에측한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러나 한 번도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해서
종합적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존재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정지 단면 하나를 놓고서도
그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료만 수없이 보고 또 본다고 해서
그것이 합쳐져서 종합적으로
옳은 결론을 얻게 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다 같은 성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를 보자.
투자의 문제를 동전을 던져서 앞 뒷면을 맞추는 홀짝 게임으로
놓고 생각해보자.
매번 동전을 던져서 어떤 면이 나올지를 알 신통력도 없고
또 동전을 던질 때마다 자신이 원하는 면이 나오게 할 신통력도
없는 어떤 이가 그 상황에서
1 번 던지고 또 두번 던지고 그런 행위를 반복하면
나중에 그런 신통력을 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살펴보자.
대부분 이 실험을 하면
동전의 앞 뒷면도 잘 맞추기 힘들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투자에 임하는 이는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싶다는 희망에 바탕해서
자신이 얼마간의 자금을 투자하면
자신만은 아주 특수하게 예외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임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앞의 문제부터 스스로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동전하나를 던지는 문제에서라도
그 결과를 매번 잘 예측할 수 있는가.
또는 동전 하나라도 자신이 원하는 면만
매 순간 나올 수 있게 공중에 던질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데 왜 수많은 이가 거래를 하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장래의 시장가격의 변동을
자신이 다 잘 예측할 수 있고
또는 그 시장가격을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임하게 되는가.
사실 일반적인 개미투자자와는 달리
현실 시장에는 다음과 같은 예외가 있다.
주식을 놓고 말한다면
일부의 소수주주나 경영인은
그 회사 자체에서 어떤 좋은 사업 아이템을
새로 개발한다거나 경영에 혁신을 거두거나
또는 그와 정반대가 되는 부정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그 주식 가격을 변동시킬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현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이 100 이라고 할 때
그 가운데 50 이나 60 % 씩의 물량을 거래할 정도의
어떤 막대한 자금을 갖는 이라면
공급이나 수요량을 변화시켜서
가격을 변동시킬 힘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구매량(수요)을 늘려 가격을 올리게 하고
매도량(공급)을 늘려 가격을 떨어지게 하여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행하여
원하는 형태로 시세의 변화를 매 순간 이끌어낼 수 있고
그래서 전반적으로 시세 변동 그래프도 그렇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도 보게 된다.
또 그가 그런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미리 계획하는 가운데
생각하면
미래 시세의 변동과정도
자신이 미리 잘 예측을 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미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통력이 모두 결여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개미투자자는
투자를 하여 수익을 거두고자 임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동전을 던져서 어느 면이 나타나는가 문제부터
잘 확인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또 1 번 그런 상태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데
그런 상태를 반복하면 없던 신통력이
그 뒤에는 생겨난다고 볼 수 있는가의 문제도
또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전 던지기 문제는
수학에서 다루는 1/2 확률의 문제와 같다.
이를 조금 더 응용하면 주사위를 놓고 1/6 의 확률문제로 바꿀 수도 있고
로또 복권의 1/800 만 의 확률 정도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는 확률과 함께 기대값과
통계에서 문제삼는 중간값 중앙값 최빈값, 평균값
이런 문제에서도
많이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결국 이들 수학문제들은 투자와 관련해서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어떤 결과를 예측하고
임하는가 하는 문제와 기본적으로 관련된다.
또 가상화폐의 투자와 관련해서는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을
먼저 살필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실질가치가 적은 화폐가 실질가치가 높은 화폐와
같은 평가를 받고 시장에서 거래되면
실질가치가 높은 화폐를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구축(驅逐)]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미 오래 전에 mun 님이 이 내용을 통해
실질가치가 없는 화폐가 통용되면
이로 인해 실질가치가 높은 화폐를 새로 만들어내게 된다. [구축[構築)]는
내용도 나타낸다고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이
가상화폐투자와 관련되고
또 수행이론과도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본다.
시장에서
질이 나쁜 것과 질이 좋은 것이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점차 질이 좋은 것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앞의 내용이라면
질이 나쁜 것이 어떤 질이 높은 것과 그렇게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면
이로 인해 실질가치가 대단히 높은 입장에서는
그처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받는 상태를
추구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고 보는데
그 부분은 뒤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를 쉽게 현실 상황을 놓고 보자.
우선 처음의 그레샴 법칙은
현실에서 10 원짜리 동전이나 1 원짜리
동전이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된다고 본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가운데
어느 순간 동전을 만드는 재료로서
동이나 니켈의 재료 가격이
액면 가격보다 더 높게 되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15 원의 재료비를 들여
10 원 동전을 찍어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화폐당국은
그보다 재료값이 덜 들어가는 형태로
새 동전을 만들어 공급하게 된다고 하자.
또 어느 순간 대부분의 거래를 카드로만 거래해서
결제 시스템 상의 숫자변화로만
결제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자.
이제 이런 상황에서
그것들이 모두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나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굳이 실질 가치가 높은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장에는
실질가치가 적은 것만 남고
실질가치가 높다고 보는 것은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측면은 앞의 그레샴 법칙과 관련되는
측면이라고 할 것이다.
가상화폐와 현실 화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은행이 돈을 만들려면
위조가 어렵게 인쇄도 해야 하고
그에 해당하는 실질 자산도 구비해야 하고
이렇다고 보는데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서
교환과 거래에 더 유용한 형태가 나타나면
결국 이들이 같은 평가를 받는 가운데
기존의 화페가 점차
그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도 일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자,
현금이 점차 사라지고
동전은 더더욱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는
현실도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 한편
재료값자체가
액면의 명목가격보다 더 비싼 동전은
누군가는 이것을 모두 모아 녹여
다른 제품을 만드는데 사용하고자
시도하게 될 것이다.
이 측면은 뒤의 내용과 관련되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재료값이 비싼 동전들은
비록 그것이 불법이라고 하더라도
여하튼 재료값이 비싼 동전이
다른 결제수단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현실에 임하려 하기 보다는
좀 더 높은 가치평가를 받는 상태로
변화하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악화가 활동하면
실질가치가 높으면서도
그것과 같은 평가를 받게 되는 다른 입장은
이와는 차별적으로 좀 더 높은 가치를 받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하게 되어
더 나은 가치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측면도 있다고
mun 님이 제시한 것이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어떤 장사가
쌀을 한번에 두가마씩 들어 올려
마을에서 대단한 존중을 받았는데
어느 날 기중기와 같은 기계가 들어와
수없이 많은 무거운 물건을
높이 다 들어올린다고 하자.
또 다른 상황도 있다.
현실에서
무예를 10 년씩 닦아서 상대를 쓰러뜨리는데
어떤 이가 손가락만 움직이면 상대를 쓰러뜨리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하자.
어차피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목표인데
더 쉬운 방안이 나온 것이다.
또 몇 십년 공부해서
오목도 두고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는데
어느날 컴퓨터가 이 분야의 최고선수를
모두 다 제압한다.
이런 식이다.
계산도 과거에는
열심히 산수계산을 훈련하고
주산도 배우고 암산능력을 키워서
계산을 했는데
요즘은 컴퓨터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
또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초상화화가가
인물을 그대로 묘사해 그리면
대단히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로 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사진기로 한번 찍으면
대단히 섬세하게 같은 사진을 얻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풍경도 마찬가지다.
포토샵까지 동원하면 더 예술적인
사진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화가 입장에서 아무리
똑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되면 사진과 같은 평가를
받는 것 뿐이 되게 된다.
그러니 화가가 그런 형태로 예술 창작활동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문제와 같다.
그런데 여하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같은 평가를
받는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 놓고 보면
우선 기존에 그런 활동을 하던 이들은
이제 그 시장에서는
없어지게 되는 현상이 일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에 그런 활동을 하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기중기나 총이나 컴퓨터나 사진기와 같은
기계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런 무대에서는 자취를 감추는 한편
대신 그 노력에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해서
무언가 더 가치가 있다고 보는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여
기존 상태보다 더 가치있는 상태로 변해 가게 된다.
이런 측면이 있다고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mun 님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에서
몰아낸다는 구축을
쌓아서 건설해낸다는 구축의 의미로
변화시켜 새로 제시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의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곧 현실에서
전도망상과 집착에 바탕해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각 생명들이
작용 반작용 관계로 얽히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재주를 피우는 곰과
이를 통해 돈을 버는 사육사와
또 이를 바라보고 즐거움을 얻는 관중의
상태로 얽혀 함께 생사고통을 겪는 가운데
결과적으로는 mun 님에게
매일 음식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우주적 세트로 함께 묶여
기능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수행자는 그런 일은
기계나 축생이 행해도 무방한 것이라고 관하고
자신은 어차피 같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고 할 때
자신의 활동으로
훨씬 가치가 높은 상태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그 방향을 수행의 형태로 전환해나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돈을 놓고 말하면
술집에서 술을 파는 아저씨 입장이라고 해도
매달 1 억 이상을 번다고 하고
코인만 거래해도 누군가는
30 조원의 수익을 단숨에 거둔다고 한다면
어떤 이가 연구를 해서
한달에 몇 백만원의 급여를 받는다고 하면
이 활동은 점차 시장에서
제거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왜 그 노력으로
술집에서 술을 파는 아저씨나
코인거래를 쉼없이 행하는 이보다 못하거나
겨우 동등한 평가를 받는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장에서는 사라지고
대신 같은 노력을 통해
훨씬 높은 가치를 갖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게끔 전환이 되게 하는
힘도 갖고 있다고 제시하는 측면이다.
알고보면 당신은
코인 100 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치이고
많아야 한 10 개 정도일 뿐이야
이런 평가를 받기에
당사자가 이에 반발을 하게 되고
그 자신은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게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업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수십 억원에 해당하는 재화를 만들고
수익을 거두고 사회에서 존중을 받았는데
어느날 알고보니
가상화폐 시장에서는
컴퓨터에 잔뜩 쌓여 있는
암호 파일이나 마찬가지 평가를 받거나
그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어떤가.
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이 고작
컴퓨터 전자 암호 파일 몇 천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붙잡고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본인이 어떤 사고를 당하면
보험회사측으로부터
결국 이런 전자파일 몇 백개 정도만
받는 상태로 평가받는가.
[비서] 넵, 사실입니다.
어떤가.
그런 상태가
현실의 내용이고 사실인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임하면
곤란하다는 것도
이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코인이나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 전체가
그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상태가 되지 않기위해서는
다시 그 상태에서
무언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추가로 해서
자신의 가치가 적어도
이보다는 훨씬 높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보게 되고
또 그런 입장에서
그렇게 자세를 전환해서
그런 상태를 향해 추구해 나가는 상태가 나타난다면
바로 이런 측면을
또 다른 그레삼 법칙의 측면이라고
mun 님이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수행에서는
사실 이런 의미의 내용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여하튼 이런 화폐와 관련해
투자를 한다거나 할 때는
이 화페나 물건들이
다 제각각
일정한 가치를 생산하여
교환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인데
이런 가치가 정체되지 않고
순환이 되면
원래 시장에 공급된 기본 공급량을 바탕으로
신용창조를 통해서
그 실질적 공급량과 가치가 증폭되게 된다는 측면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는 100 원이 A 에게 10 년간 단순히 비닐에 싸여 밭에
비밀스럽게 보관된 경우와
그 100 원이 1 초당 1 회씩 계속 각 주체사이를 순환하여
100 억명 사이를 돌아다닌 경우와의
그 의미 차이와 관련된다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100 원인데
어떤 경우는 0 원의 의미를 갖고
어떤 경우는 ∞ 원의 의미를 갖는 문제가
이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앞의 형태에서는
어떤 자금이라도 투자하면
그것은 곧바로 0 원이 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 투자하면
그것이 단 100 원이라도
이후 계속 ∞ 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상태로
변화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투자와 관련해
중요한 핵심 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서 어떤 이가
자금을 어떤 부분에 투자한다면
그로 인해 그 국가나 사회 전반이
이처럼 가치가 무한히 증폭되어가는 형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그 반대로 어떤 투자나 행위를 했는데
그로 인해 전체 국가나 사회가
전쟁이나 내란 상태로 들어가서
있는 건물이나 재화를 다 태우고 부수고 한다면
그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환과 투자이론의 관계에서는
또 한편 그와 관련된 부작용으로
밀가루 분식회계의 문제와
피라미드형 폰지 사기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환이 된다는 것은
대부분은 판매와 구입이라는
거래 관계를 통해 이뤄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자잉여와 생산자 잉여의 문제와 함께
수요 공급의 형성 동기와
이런 거래의 총량이
가치 판단의 적정성에 어떤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고
이는 또 넓게는 교역조건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런 내용들이 모두 투자와 관련해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소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논의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수익- 비용의 관계에서
어떻게 투자활동을 통해 수입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극소화하는가 하는
방안이 무언가 하는 것이 또 문제된다.
알고보면 간단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최극단의 방안이 수행이기도 한 것인데
그러나 이를 하나하나 살피려면
상당히 논의하기에 복잡한
문제라고도 본다.
여하튼 조금 낯선 개념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기로 하고
현실의 투자 이론이
곧 수행자의 가치 투자로서 수행방안의 실천과 밀접하고
더 나아가 유마힐 소설경에서 제시하는
내용과도 밀접하다고 보는 가운데
관련된 내용을 이어서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
현실에서 가장 단순하게 투자를 하는
개미투자자를 놓고 투자 문제를 간단히 살피면 이렇다.
먼저 100 이라는 원금을 여유자금으로 갖고 있는데
그는 우선 이 자금을 다양한 형태로 보유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현금을 그대로 보유하거나
은행에 예금을 하거나
금이나 보석과 같은 가치대표재에 투자할 수도 있고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외국 달러화나 일본 엔화의 형태로 보유할 수도 있고
등등으로
여하튼 어느 형태로든 그것을 보유하는데
이 경우에 이왕이면 현재 가치가 높거나
장차 높아질 형태의 자산으로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이
대부분의 기본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100을 어떤 품목에 투자했는데
다음날 시장에서 가격을 확인하니
50 이 되었다는 경우와
150 이 되었다는 경우를 단순히 놓고 살펴보자.
이전 글에도 제시한 바 있는데
여기에 엉터리 망상분별자 가운데 하나인
뉴톤과 같은 이가 개입하면
이 변화과정을 이렇게 분석하게 된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이런 식으로 변화과정에 내재한 법칙을 제시하고
이것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어제 100 원이 오늘 50 원이 되었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 일단 이 상태로 계속 현상유지될 것이다.
- 이런 추세로 계속 비례해서 더 가속도로 나아갈 것이다.
- 아니다 이에 반발하여 내일은 오를 것이다.
대강 이런 예측을 각각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
어제와 오늘 누구나 다 보고 확인하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예측을 행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과거 내용은 뚜렷하게 파악하는데
정작 엉터리로 행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판단부분이다.
이는 신통한 점술가의 경우도
사정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과거의 자료를 놓고
미래사정을 예측해 나가는 입장도
크게 이와 다르지 않게 된다.
이는 물리적으로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관계에서
대부분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일반 망상환자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쉽게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만화책을 하나 구해 놓고
100 페이지에 그려진 내용은
그 앞 99 페이지들의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본다면 바로 이런 관계 분석과 사정이 같다고 할 것이다.
앞 97 페이지의 내용을 찢거나
다른 형태로 바꾸면
100 페이지의 내용도 달리 바뀌게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앞에서
그렇게 현실에서 운동의 변화도 살피고
그 관계를 운동의 법칙으로 제시하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앞 내용을 대하는 투자자들이
현실에 수요공급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엉터리인 것이다.
이것이 홀짝이나 주사위 숫자 맞추기 원리와
같은 방식이다.
우연히 한 번
자신의 예측이 맞을 수는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는
다시 수학의 확률문제와 관련이 된다.
주사위를 던지고 숫자를 맞추는 문제에서
예를 들어 6 이 나올 확률이 1/6 이라고 하는 것은
6 번 던지면 반드시 그 가운데 1 번은 6 의 숫자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100 번을 던졌는데도
6 이 그 가운데 한 번도 안 나온다는 사실을
확률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확률이란 역설적으로 이렇게
100 번을 던져도 6 이 한번도 안 나오게 될
그 값을 숫자로 제시해주고자 하는 취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확률값이 1/6 이라는 것은
주사위를 무한히 던지고 던지면
그 전체 횟수에서 6 이 나온 횟수가
1/6 에 가깝게 되어 갈 것이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상태에서 또 다음 번에
어떤 숫자가 나올 것인가를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6이 계속 99 번 나왔다.
다음 번에는 어떤 숫자가 나올까
이 때 확률계산이 어떤 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관계를 보게 되는 입장은
귀납논증의 추론의 오류와 밀접하게 된다.
어떤 이가 800 만장의 로또복권을 구매했는데
799 만장까지 확인해보니
1 등 당첨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복권들도 이런 경향으로 볼 때
당첨이 안 될 것이다라고 보려는 추론이
귀납추론식이 사용하는 추론이기도 하다.
사실 800 만장이 현실의 복권에서 조합가능한
총수는 아니므로
나머지 복권에 1 등 당첨번호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미 앞에 확인한 내용들이
다음에 확인해보는 복권의 당첨여부와
어떤 관계나 영향이 있다고 볼 것인가.
이 문제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기는 곤란한데
그러나 또 그것이 그 내용을 그렇게 결정하는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다.
이것이 만화책에서 이전 99 페이지까지의 내용과
다음 100 페이지째 내용의 관계와도 유사한 것이다.
현실에서 만화가가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전개할 때
100 페이지의 내용을 이전 99 페이지까지 전개되어온 내용과
전혀 동떨어지게 그릴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99 페이지의 내용이
100 페이지 째 내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앞 페이지를 몇 장 찢거나
또는 다른 내용으로 바꾼다고 할 때
100 페이지의 내용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투자 이론에서
개미투자자의 생존이론을
수행자의 가치투자 수행방법론과 관련해
살피는데
사실 이는 좋음을 어떻게 하면
가장 넓게 길게 깊게 얻어내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다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
[...]
[...]
[...]
● [pt op tr] fr
>>>
이하에서는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과
유마힐 소설경에서 제시된 문제를
샅샅이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 문제를 반복해 살피는 것은
두 문제가 모두
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미투자자가 수익을 조금 얻어보려고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갑자기
깡통만 하나 들고
거리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거나
또는 번개탄과 같은 것을 놓고
이상한 향공양을 올리려고 분주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극적인 일이라고 본다.
가치저울에
한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와
그 투자액을 양쪽 저울에 올려 놓고 비교할 때
생명이나 신체가 갖는 그 가치를 숫자로 비교해
표시할 도리가 없이 대단히 소중한 것인데
왜 그런 상황에 몰리게 되는가.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이 작용하고
그런 상태에서 눈이 가리워지고
당장 직면하는 고통을 평안히 참는 수행도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면에 불이 둘러살 때
100 층에서도 창문밖으로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게 되듯
그렇게 상황에 몰려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모로 살펴보아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국가나 사회의 측면에서도
그런 한 개인이 그런 지식을 습득하고
생활하게 되고 또 그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는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그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당사자나 가족들이 겪는 고통도
역시 대단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 이런 비극을 방지하고
2차적으로 개미투자자가 원하는 것처럼
100 원을 투자해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될 수도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개미투자자가 수억명인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제로섬 게임이나 축구결승전처럼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2000 년전의 상황과
지금 상황의 기본 재료가 같으므로
현재 누군가 123 층 빌딩을 보유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자산을 갖고 살게 된다면
제로섬 원칙에 의하면 그외 나머지는
2000 년전의 상황을 기준으로
모두 다 그 보다 훨씬 못한 상태로
지내야 한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이제 그런 방안이 무엇인가를 놓고
또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개미투자자의 끝판왕과 있다 없다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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