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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_003 본문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
T0220
대반야바라밀다경 제3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 핵심요약
대반야바라밀다경 제3권
○ [pt op tr]
●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제시하는 사정
이들 내용들은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수행방안들이다.
그런데 왜 그에 대해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이것을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본래 이런 수행덕목은
현실에서 당면한 고통
그리고 현실에서 장래 받게될 고통
그리고 생사를 넘어서 죽은 다음 3 악도에 들어가 무량겁에 걸쳐 받아나갈 생사고통
이것을 제거하고
또 다른 한편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처럼 사정은 간단하다.
○ 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발생 원인
현실에서 어떤 생명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왜 그가 그 상황에서 고통을 받는가.
첫번째 사정은 그가 망집을 일으켜서 그 상황을 대하기 때문이다.
또 두번째는 망집을 일으켜서 그런 고통을 받을 만한 업을 행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각 부분에 공통된 망집 부분을 주의해서 살펴보자.
망집 == 그런 내용이 그 상황에서 얻어지지 않는데
그 주체는 이상하게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대하는 한편,
또 그 내용에 대단히 집착을 갖고 대한다.
=> 그리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 묶인다.
이런 관계다.
○ 방편적 가르침이 필요한 사정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사정을 깨우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게 이끌고자 하는데
문제는 그 중생이 그것을 못 알아 듣는 것이 문제다.
그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 주체가 망집에 붙잡혀 있고
그 상태에서 업을 행해서 생사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지금 제시하는 내용을 제시해도
그런 상태의 상대는 이를 도무지 못 알아듣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우선 당장은
그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올 수 있도록 기본적인 내용을
상대입장에 맞추어 제시하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
○ 방편적 가르침
'색'은 무상하다. => 그러니까 집착을 갖고 대하지 말라.
이런 가르침이 그런 취지의 내용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본래
현실 상황에 색이란 것이 있다거나
아니면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에 그런 것이 얻어진다거나 하는 입장이 아니다.
무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사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못 알아듣는다.
색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영희나 철수도 그렇고 마찬가지다.
그리고 거꾸로 반문하게 된다.
지금 자신이 손발을 움직이는데
이것이 자신의 손발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저기 영희가 자신을 쫒아오는데
저 부분이 영희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대부분 집착하는 재산이나 사업 지위 연애 가족
그런 모든 방면의 내용을 놓고 다 그런 형태로 반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상태에 대해서는
지금 반야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제시하기 힘들고
제시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일단 부처님을 믿고 기본적인 수행덕목을 잘 실천해서
어느 정도 업의 장애가 제거되고
복덕자량이 쌓이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수행을 잘 성취한 이후 단계부터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고 보는 내용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존의 망집에 단단히 묶인 상태에서
바쁘게 업을 행하고 쉼없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 놓여 있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오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이들 내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론상은 어느 상황에서나 정려 수행도 하고
반야 지혜도 닦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일단 계에 해당하는 항목을 잘 성취하여 업의 장애가 해소되고
그리고 복덕 자량이 어느 정도 쌓여야
현실적으로 정려나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이 가능하다고 보게 된다.
이런 내용은 논장 코너에서 살피는 『유가사지론』 등에서도 제시한다.
현실 사정을 보면 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계를 닦지 않아서
한 순간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 나오지 못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이 운동장 저 운동장 정신없이 뛰어 다녀야 하고
이 짐을 들고 저곳에 옮겨 놓고 저 짐을 다시 이곳에 옮겨 놓고
이 건물에서 저 건물 그리고 다시 저 건물에서 이 건물
이런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어떤 상태가 될 때까지
예를 들어 자신이 원하는 최고 재벌정도가 될 때까지
쉼없이 옮겨 다니기 바쁜 상황이고
한 순간도 정려 수행을 닦을 마음이나 육체의 여유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정려 수행을 닦아
욕계에서 벗어나라고 할 수 있는가.
또 그런 정려수행이 안 되는데
어떻게 반야 지혜를 닦겠는가.
이런 부분이 수행과 관련한 현실적 문제다.
그런 사정으로 부처님도
일반적인 중생을 처음 상대할 때
일단은 그 주체가 업의 장애를 해소해서
생사 묶임에서 일단 벗어나올 수 있는 방안을
그 현실상황에 맞추어 그렇게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그런 내용이나
그런 수행방안이 그 생사현실에 실답게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오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내용을 시설해 제시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후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생사의 묶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복덕자량이 쌓이고 나서는
위와 같은 자세는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놓고
다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고
고급 수행자를 상대로 다시 강조해 제시하는 부분이
현재 살피는 부분이다.
일단 쉬고 또 이어 살피자.
◈Lab value 불기2563/03/03/일/02:19
● 얻을 수 없음[무소득]의 의미와 무소득'방편'의 의미
처음 경장연구코너를 기획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다시 들르게 된다.
최근 녹야원을 한 2 년여만에 다시 구글여행사를 통해
시공간여행 방식으로 들렀다.
http://buddhism007.tistory.com/5663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여기서 이 사진을 놓고 얻을 수 없음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보자.
사진을 보거나 현실에서 눈을 떠서 세상을 대할 때
어떤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요구되는 것이
먼저 윤곽선 따기 작업이 필요하다.
앞에 모델로 본인이 서 있다.
어떤 이가 이 사진을 보고 그런 분별인식을 했다는 것은
본인 형체를 윤곽선을 따서
그 부분을 그처럼 묶고 다른 부분과는 또 나누어서 그 부분은 lab 이다.
이렇게 분별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내지는 그런 상을 갖고 임하면 곤란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위 내용은 눈을 떠서 얻는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을 놓고 자신이 마음 속에서
윤곽선따기를 실행해서 이 부분 저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일정 부분은 누구다. 바위다. 꽃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것은
분별 영역의 일이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처음 얻은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
이 때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그 직전까지 자신이 보던 것이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그 무엇인가가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무엇인가가
본 바탕영역에서 그대로 실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가 또 문제된다.
그것은 과연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얻은 모습과 일치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감을 때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한 주체는 현실에서
눈을 떠서 얻는 내용처럼 자신의 주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만 얻는다.
그리고 이런 본 바탕에 대한 내용은 그처럼 추리를 할 뿐
그 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한다.
불가득이란 말이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이런 의미다.
불가득이란 말은 무소유 불가득 이런 형태로 반복제시된다.
실답지 않은 꿈과 달리 진짜라고 할 참된 것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무소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얻을 수 없다. [불가득]
이런 의미다.
이 내용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의 내용과 관련하여 모두 해당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처음 제시한 것처럼
자신이 윤곽선을 따서
어떤 부분은 철수이고 어떤 부분은 영희이고
또 어떤 부분은 산이고 어떤 부분은 바위라고 자신이 생각하면
그 각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 성품이 그렇게 있고
더 나아가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현실에 그런 망집 분별에 바탕해서 집착해서 업을 행하며 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의 현실에 묶이게 된다.
이렇게 받는 생사고통이 실답지 않은데도
앞과 같은 바탕에서는 매 순간 생생하고 실답게 여겨지는 가운데
고통을 받게 되고 이 생사고통은
한 주체만 그런 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많은 주체가 그런 상태에 빠지고
또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무량한 기간에 걸쳐 대단히 반복해서 받게 되고
또 한 측면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단히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감각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받아나게 되므로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넓게 보아 무량한 주체가
길게 보아 무량한 기간에 걸쳐
깊게 보아 무량한 측면에서 받게 되는
이 생사현실의 고통의 해결이 문제가 되므로
가장 근본적으로 위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각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잘 관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그리고 이어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하고
또 단순히 그것으로만 충분하지 않고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서 쌓여진 업의 장애
즉,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끔 자신을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서 제거해 내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번뇌 - 업 - 생사고통의 관계를
근본원인부터 하나하나 제거하는 한편,
당장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원칙적으로
위와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기초적으로는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그리고 참된 진짜라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등을 이해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집착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하고
계, 정, 혜 3 학을 닦아서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것,
또는 평소 영희나 철수, 산, 바위 등등으로 여기고 대하던 것이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굳건하게 고집하고 머무려는 견해가 있게 마련이다.
현실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은 자신임에 분명하고
자신이 영희나 철수, 산이나 바위라고 여긴 그 부분은
그런 영희나 철수, 산, 바위인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더 옳고
반대로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고
그런 생각이 망상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오히려 엉터리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그 상태로 업을 행하면서
나아가게끔 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일단,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가
침대에서 누어 자면서 꾼 황금이나 바다의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사정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침대 => 꿈 속의 바다
이런 관계처럼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는
라면 => 사과 => 사람
이런 형태로 각 영역의 내용이 엉뚱한 관계로서
실답지 않다는 사정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본 바탕의 영역이 공하다는 것을 잘 관해서 이해해야 하고 [공해탈삼매]
또 한편 감각현실 영역의 내용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 그런 모습과 성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무상해탈삼매]
또 한편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관념영역에서 만들어 내는 쓸모없는 소원을 붙들고 추구해가면서 업을 행하는 것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무원무작해탈삼매]
그런데 위와 같이 각 영역의 내용을 직접 대조하면서 살피면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실답지 않는 내용임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사과를 붙들고 자신이라거나, 영희, 철수, 또는 산, 바위, 등등으로
분별하면서 임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여기게끔 하는
배경 사정이 있다.
아무리 자신이 영희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부분은 영희가 아니고
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부분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지금 임시적으로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그 부분만 그렇게 움직이고,
손을 뻗쳐 사과를 하나 집으면 그 때 그 모습도 보고 촉감도 얻게 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배도 부르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들 내용을 어떻게 실답지 않다고 하겠는가 하면서
계속 기존의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해나가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는 의미다.
이는 어떤 한 단면의 a 가 실답지 않지만,
그 a 는 다른 실답지않은 b 를 얻게 하고
그 관계가 자신 뿐만 아니라, 다수의 주체에게
그리고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단히 반복해서
그리고 하나의 내용만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내용을
얻게 해준다는 현실 경험에 의해서 지지된다.
이는 마치 꿈이나 게임상황과 사정이 같다.
꿈에서 바다에 자신이 빠져 있는데 배가 나타났다.
그 바다나 배나 모두 다 함께 실답지 않다.
그런데 꿈속에서 그 배를 올라타니 더 이상 물에 젖지 않고 빠지지 않는다고
이후 꿈을 꾸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그는 그 바다나 배가 모두 실답다고 여기면서
꿈을 계속 꾸어가는 것과 같다.
게임에서 어떤 커서를 어떤 부분에 대면 아이템을 얻는다고 하자.
이런 상황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게임을 하는 이는 다 상황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게임에 임하는 한 그 관계는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게임 속에서 아이템을 얻으면 소리도 나고 화면도 바뀐다.
그리고 그 아이템을 갖고 있으면 이후
게임 안에서 다른 곳에 가 물건도 살 수 있고 또 일정한 부품도 얻어낼 수 있다.
그러니 그 게임에 임하는 바탕에서는
그 아이템은 대단히 실다운 것이다라고 대하게 된다.
생사현실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들이 하나하나 실답지 않은데
이 실답지 않은 것들을 기준으로 잡고 다른 실답지 않은 것을 대하면
이들의 관계가 대단히 많은 주체에게 무량겁에 걸쳐
다양한 실답지 않은 내용을 반복해서 주게 되므로
그런 사정으로 그 실답지 않은 내용은
그 바탕에서는 대단히 실답고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한번 망집에 빠지면 이 망집과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스스로 벗어나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처음 제시한 것처럼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이
마치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의 꿈처럼
그것은 참된 진짜의 내용도 아니고 [무소유]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서[불가득]
실답지 않는 것인데도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이 대단히 실답고 생생하게 얻어지고
또 일정한 부분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게끔 되는
그 기본 배경 사정까지 함께 잘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원래 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 제시된 수행 내용으로서
특히 계를 잘 성취하면
일단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즉 극심한 고통과 공포에 묶여 무량하게 지내야 하는 지옥이나, 아귀 축생과
같은 3 악도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가장 기초적으로 제시된 수행방안인
계의 항목을 잘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다시 그런 상태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생사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한 가운데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하는 한편,
그렇게 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면,
왜 사정이 그런데도 현실에서
각 중생이 그런 상태로 망집을 일으켜서
업을 반복해 행하게 되는가 하는 그 배경사정도 한편으로 이해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 처음의 자신과 같이 생사에 묶여 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수행에 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제시되는 내용이
지금 살피는 『대반야바라밀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이
무소득을 방편으로 각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기본적인 원칙만을 놓고 보면
무소득을 방편으로 어떤 행위를 하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고 무엇인가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어떤 수행을 하거나,
또는 아예 수행을 하지 않거나,
원래 본 바탕의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어떤 차별도 얻을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비록 수행자는 그런 사정을 수행을 통해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가 상대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해야 하는 중생은
여전히 망집에 바탕해서 생사에 묶여 생사현실에 임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들 중생이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스스로 벗어나와야 한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수행자가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같이 들어가
다양한 방편으로 이들 중생을 이끌어 제도하지 않으면
스스로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는 것은
무량겁을 두고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고 생사에 묶인 중생들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려면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는 수행자가 직접 그런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그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 자량을 구족하고 지혜 자량을 구족해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사정 때문에 수행자는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홀로 벗어나고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모두 본래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이해하지만,
생사현실에 묶인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그런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 있는 수행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것을 잘 성취하려면
그런 수행을 하는 수행자부터,
그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수행을 잘 행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수행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로 인해 얻을 바가 없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켜 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원칙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또는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본 바탕에서는 아무런 차별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생사 현실 안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그런 수행자자신부터 생사에 묶이지 않아야 하고
더 나아가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행을 정진해나가야 하고
그 수행 역시도 그에 대해
스스로 무언가 이를 통해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망집을 일으켜 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자신부터
그 수행으로 말미암아 망집을 일으키고
스스로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고
더욱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지 못하게 되고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는
본래 이렇거나 저렇거나 얻을 바가 없는 것이지만,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는 가운데서는
인위적으로 무소득을 방편으로 취해서
일정한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본래 어떻게 행하던, 생사현실에 어떤 차별이 있거나 없거나,
그 일체가 본 바탕에서 얻을 바가 없다는 측면이 원칙적인 내용이라면,
이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수행함에 있어서는
인위적으로 무소득을 '방편으로 취해서'
그리고 아무런 행위를 아무렇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제시된 방안에 따라 수행에 정진한다는 이 내용은
그런 사정 때문에 제시되는 것이다.
>>>
처음 번뇌 => 업 => 고통의 관계에서
생사고통에서 당장 벗어나려면
우선 망집번뇌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단하고
쌓인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행하는 것이 당장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집착을 갖는 각 내용에 대해
그것이 집착을 가질만한 것이 아니고
넓고 길고 깊게 보아서
그것들이 그것을 통해 원하는 좋음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장구하게 가져다 준다는 사정을 잘 관해서
평소 행하던 업을 중단하고
수행의 방향으로 전환해
기본적으로 계의 항목에 해당하는 수행들을 잘 성취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일단 극심한 고통을 장구하게 받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오고
복덕과 수명과 지혜 자량을 얻어낼 바탕이 형성이 된다.
그런 가운데
가장 근본적으로 생사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해서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망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을 왜 공하다고 하는가.
감각현실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부분
또는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며 대하는 부분들이
왜 자신이 아니고 영희나 철수가 아니라고 하는가.
그래서 왜 현실에서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되는 아상이나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임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고
끝내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게 만드는 쓸데없는 소원을 잘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하고
대신 수행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면,
왜 본래의 사정이
그런데도 현실에서
각 중생이 그런 상태로 망집을 일으켜서
업을 반복해 행하게 되는가 하는 그 배경사정도 한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생사과정에서 처음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부터
어떤 형태로 망집을 일으켜서
지금 임하는 것처럼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또 왜 그런 망집에 바탕한 견해가 오히려 현실에 적절하다고 여기게 되었고
또 그 망집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는가까지 그 배경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이 부분은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등에서 아뢰야식과 관련해서
그렇게 처음 태어나 삶을 살아가게 된 그 배경을 이해하는 문제가 된다.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한 수행자는
이후 생사고통에 묶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들어가 임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중생이 임하는 망집의 생사현실과
수행자가 향하는 생사해탈이라는 두 면이 경계선에 놓여
겹치는 상황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 이런 상황은
기존에 망집에 바탕해서 생사고통을 겪다가
처음 수행에 임해 점차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그 이후 자신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계속 수행하려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된다.
이 상태에 놓이면 한편으로는
그런 생사 고통이나
그런 생사 고통을 받는 중생이나
또는 그런 중생을 제도하는 이나
제도하는 행위 일체를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는 한편,
그러나 생사현실안에서 고통받는 일정한 수행을 해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는 등의 내용이 시설되고 제시되는 한편,
또 중생 제도를 위해서는
그렇게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임해서 수행할 때는
다시 그런 것을 얻을 바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취해서
그러한 수행을 정진해야 한다는 측면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하나인데
이 내용을 어떤 면을 기준으로 잡고 대하는가에 따라서
약간 오락가락 혼동을 일으킬 측면이 있다.
비록 수행자가 이론적으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도
중생제도를 위해 중생의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고 임하고 몰입하다보면
자칫 처음 중생의 망집상태에 같아지는 측면이 있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3 악도에 처해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입장까지 고려하면
이 각 측면이 제시하는 내용의 간격이 상당히 크다.
즉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나 세상의 각 내용들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는 한편,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바탕해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여 매 순간 반응하면서 임하는 가운데
업의 장애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가
생사현실에서 가장 문제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이제 넓고 길고 깊은 관찰에 바탕해서
선악 인과를 판단해서 계를 지켜서
그런 3 악도의 묶임에서 벗어나 풀려나려 노력하는 상태가 있다.
이는 이른바 인천교에 바탕한 수행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0 선업을 닦아 고통을 받지 않는 인간이나 하늘 상태에 이르려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점차 정려수행과 반야 지혜를 닦아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다시 생사현실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기 위한 수행을 하게 되는 상태에서부터
같은 수행을 하더라도 다시 그 수행을 놓고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정진해나가는 자세가 요구된다.
물론 원칙적으로 처음부터 가장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서
이런 생사고통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고 원칙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보면
길을 가다가 어떤 강도가 자신의 지갑을 뺏기위해서
뒤에서 벽돌로 자신을 내리쳤다.
그래서 한참 후 깨어 났는데
자신의 신체 반절이 마비가 된 상태로 후유증이 남아 있고
한달 입원 재활 치료비는 1000 만원을 넘는 가운데 완쾌를 기대하기 힘들고
생계 해결 방안은 끊기고, 이런 상태에서 범인은 잡히지 않거나
범인을 잡았는데 범인부터 감옥에 들어가는 외에는 아무 대책이 없는 상태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놓고
이 상황에 그런 생사 고통을 받는 중생이나 그런 고통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는 각 내용들은
우선 망집상태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원칙적으로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있다고 보는 각 내용들이
본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또 그런 이해를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에 바탕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여여하게 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런데 다시 그런 바탕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해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 있는 수행을 정진해서
그런 내용을 구족해내는 것이 다시 쉽지 않다.
이런 여러 어려움이 있는데
그런 수행을 앞과 같이 극단적으로
자신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상태를 놓고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적으로 앞과 같이 사고를 당해서
신체 각 부분에서
매 순간 그 사고로 인해 심한 통증을 느끼고 신체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하고
또 생각해보면 별 이유없이 그런 사고를 당한 일도 대단히 억울하고,
거기에 생계문제와 함께 이런 여러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매 순간 분주하게 임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그런 고통이나 사건 자체를 얻을 수 없고
그런 고통을 겪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이 상황에선 그런 내용을 이해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이해해도
당장 매 순간 통증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 그 이론대로
그 상황을 극복하고 벗어나기 쉽지 않다.
하물며 자기 자신부터 신체가 마비되고
생계가 해결 안되는 상태에서
다른 중생의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곤란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신이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입장이거나
아니면 다른 중생의 제도를 위해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 자신이 이런 상태가 되면 안 된다고 우선 보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관하고
그로 인해서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고
일체 고액을 쉭 벗어났다.
라고 제시되지만,
현실에서 위와 같은 상황에 놓여서
그 내용대로 실천해서 그런 생사고통의 상황을
쉭 벗어날 수 있는 수행자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런 생사고통에 당면할 때
수행자라면 위와 같은 원칙적인 방안으로
그것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으므로
그 전에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를
예방할 수 있도록
미리 업의 장애를 만들지 않고
쌓여진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계의 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잘 성취해서
복덕자량을 쌓아야
비로소 그런 극한 상황에 처해도
그 상황을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또 성취해나갈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극한적인 고통을 받는 상황도
거기에 그런 생사고통이나
그런 고통을 받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일단 쉽게 제시할 수 있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이나
감각현실 영역이나
관념 영역에서나
한 주체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 의미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 그것만으로
잘 극복이 안되는가.
그래서 그 문제를 다시 잘 살펴야 한다.
사정이 앞과 같은데도
정작 현실에서 각 주체는 그렇게 생각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형태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생사과정 전후를 놓고
그렇게 현실에 임하게 된 그 배경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아뢰야식이란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처음 이번 생을 출발할 때
어떤 형태로 생을 출발하게 되었는가부터
그 배경을 잘 살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
여기서는 다음의
라면-바위-벽돌-사과-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이 상황을 이해해보기로 한다.
이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
라면이 있는 상황에서
감각현실로는 사과라는 내용을 얻고
그리고 관념분별영역에서는 그 부분이 사람 영희라고 분별하는
상태를 비유한다.
마치 침대에 누어서 자면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관계에
현실 사정이 같다는 것을 비유하는 내용이다.
본래 실재영역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해 공하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렇게만 제시하면 이 내용을 잘 이해하기 힘드므로
일단 라면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원래 존재의 유무가 문제될 때는
실재영역 - 감각현실 영역- 관념분별 영역만 놓고
주로 살피게 되는데
나중에 왜 각 영역의 내용이 실답지 않은데도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나
나머지 부분들을 그렇게 생생하게 실다운 내용으로
자신이나 세상의 내용으로 여기고 임하게 되는가
그 사정을 이해하려면
여기에 추가적으로 생의 출발 단계에서
작용하는 근본 정신과 제 7 식 등이 파악하는 내용도
추가해 넣어서 살피는 것이 좋다고 보고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선
자신이 사과를 손에 쥐고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색과 모습을 보고
귀로는 사과를 두드리면서 그 소리를 듣고
코로는 사과의 향을 맡고
입으로는 사과의 맛을 보고
손으로는 사과를 만지면서 촉감을 얻는 상황을 놓고
우선 분별 영역에서 행하는 분별을 살피기로 하자.
물론 현실에서는 위 상황에서
그것을 '사과'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위 비유는 그렇게 분별하는 것이
마치 사과를 놓고 사람이라고 엉터리로 분별하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다.
여하튼
본 바탕이 라면이라면 이 라면을 놓고
근본정신과 제 7 식은 각기 바위나 벽돌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다시 감각영역에서는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관념영역에서는 이를 사람으로 여긴다.
이런 상황이 현실 상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라면-바위-벽돌-사과-사람라는 비유가 나타내는 내용이다.
사과라는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좀더 세분하면
사과의 색,
사과의 소리
사과의 향
사과의 맛
사과의 촉감
으로 다시 나열할 수 있다.
원래 상태가 라면-바위-벽돌인데
이것을 각 감관이 대하면 위와 같이 각 감관별로 제각각 내용을 얻는 상태가
현실이다.
이 내용만 놓고 보아도 이들 각각의 내용은 서로 간에 대단히 엉뚱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시 이들 감각을 얻고 나서
그에 대해 행하는 분별은 또 다시 엉뚱한 것이다.
기존에 이 사정을 대단히 많이 반복해서 제시했다.
가장 간단히 행할 수 있는 실험은
사과를 하나 구해서 위처럼 눈으로 보고 만지는 상태에서
다시 눈을 감고
그 직전까지 본 사과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서
스스로 실험해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눈을 감더라도 그 사과에 대한 생각은 계속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신이 떠올리는 사과라는 생각내용에
눈을 감기 직전에 보았던 사과의 모습이 단 한 부분이라도 얻어지는가.
이것을 스스로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얻어진다면 그 부분만큼은 서로 일치한다거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상황이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 꿈의 내용과 같은 관계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대반야바라밀경』에서 불가득이란 표현으로 제시하는 것은
라면-바위-벽돌-사과-사람의 관계처럼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들은 본래
다른 영역에서는 불가득인 것이어서, 얻어지지 않는 내용들인데,
그런 관계로 얻어내는 것이어서,
이들은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에 집착을 갖고 대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런데 우선 현실에서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영희나 철수 또는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들은
단순히 그런 관념을 일으키게 한 재료로서 그 영역에 그렇게 있는 것일 뿐
그런 영희나 철수 또는 자신은 아니라는 이런 입장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보고
한번 영희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있는 것이고
또한 그런 감각현실이 그렇게 얻어졌다면
더 나아가 본 바탕이 되는 그런 실재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 그리고 자신이라고 여긴 그 내용은
대단히 그처럼 생생할 뿐 아니라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집착을 갖게 된다.
또 그런 망집을 갖게 되면 그에 바탕해서
각 상황에서 도저히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행위를 매 순간 행해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번뇌 - 업 - 고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아무리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실다운 자신이 아니라고 제시해도
눈을 뜨면 늘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다시 그처럼 대하게 되고
현실에서 앞과 같은 사고를 당하는 경우
평소 벽이나 의자라고 여기고 대하던 부분에서는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데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부분에서는 쉼없이 통증이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마음을 갖고 움직이면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부분만 윤곽선을 평소 그렸던 대로 그 부분만 떨어져 움직이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은
비록 그 부분에 자신이라고 생각한 내용은 없다고 해도
자신이라고 여길 도리 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임하게 된다.
그래서 추가적인 논의가 다시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번 생에 태어나는 과정에서
어떤 사정으로 망집을 일으켰기에
이런 형태로 계속 이번 생에 임하게 되는가 하는 사정까지
자세하게 살펴야 하게 된다.
현실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부분
그리고 외부 세상이고 외부 대상이며 정신과는 별개로 떨어진 외부 물질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들은 모두 자신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이다.
그리고 생사과정을 통해 매 생을 이어가는 실질적인 자신은
오히려 이런 내용들을 그 안에 받아들이는 마음이고
또 그 마음 가운데에서 근본 정신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다음 그림이 참고가 될 수 있다.
[img2-9]
08pfl--image/8식-9.jpg
그리고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은
그런 자신이 이번 생에 임시적으로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감각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은
소송에서 사용하는 가정적 항변과 같은 방법으로도 그렇지 않음을 살필 수 있다.
가정적 항변이란, 상대의 주장이 잘못된 엉터리지만,
설령 그것을 받아들인다해도 역시 그 자체로 엉터리라고 보아야 하기에
상대의 주장이 잘못임을 밝히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감각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면
왜 그것이 엉터리가 되는가를 추가적으로 살필 수 있다.
문수보살님이 멀리서 왔을 때 이를 본 이가 '문수보살님이 오셨다'고
문수보살님께 말하게 되면
이 때 문수보살님이 힐난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2 문수가 있겠다'고 힐난하는 내용도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수보살이란 것은 한 주체가 생각하는 내용이다.
물론 그가 그런 생각을 망집에 바탕해서 행할 때는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감각현실 영역의 재료를 놓고
그렇게 생각을 일으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또는 영희나 철수라고 보고
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만일 사정이 그렇다면,
그 상황에는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그 재료에도 그런 영희나 철수가 하나 있고
또 그런 영희나 철수를 대해서 다시 일으키는 영희나 철수가 있으니
그 현실 단면에는 두 영희나 철수가 있게 된다고 힐난하는 내용과 같다.
세상에 영희나 철수가 둘이면 어떤가
하나인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문수보살님이 이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그 주체가 일정한 감각현실의 재료를 얻고 나서
일정 부분은 문수보살이라거나, 영희라거나 철수라거나 또는 자신이라고 생각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생각을 일으킨 그 감각현실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미다.
이는 비유하면
어떤 이가 관념 영역에서
라이터를 생각하게 되면
그 라이터라는 생각은 다시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는가라고 물을 때
어떤 이는 라이터를 생각하면 이로 인해 연기나 재를 떠올리게 된다고 답할 수 있다.
그리고 한번이 아니고 매번 반복해 그처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라이터란 생각 내용에 연기나 재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서로 잘 구분해야 한다.
어떤 재료가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고 일으킨다는 측면과
어떤 재료에 어떤 내용이 있다거나
어떤 재료는 어떤 내용이다라는 측면은 별개의 문제다.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는 어떤 부분의 내용이 어떤 관념을 불러 일으킨 것은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한 감각현실이란 재료에
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재료가 그 내용도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망집현상은 외와 같은 현실 상황에서 그런 사정으로
뒤 부분처럼
그런 감각현실 영역에 그런 내용이 있고
그런 감각현실은 그런 내용이라고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그 감각현실 영역을 대하고 그에 머물면서 업을 행해 나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는
일정한 영역에서 있는 각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 다른 무언가를 반복해 일으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정을
비유하는 것이다.
● 격자이론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른바 격자이론이라는 명칭으로 반복해 설명한 바 있다.
집이나 사람이나 자동차를 놓고 생각하면 쉽다.
일정한 부분을 윤곽선을 따내서
일정한 부분이 집이고 사람이고 자동차라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그 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이를 관념영역에서 대응할 때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단면을 놓고
다시 달리 묶고 나누게 되면 그 때마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을 놓고
눈만 따로 떼어서 그 눈 부분이 사람인가 라고 물으면 사람이라고 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처음 영희 부분을 전체로 묶고 나눌 때는
영희는 걸어다니고 생각하고 말하는 성품을 갖고 있는 그런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영희에서 눈 부분만을 따로 묶어서 그 부분이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그 부분은 걸어다니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말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모습도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영희의 눈은 사람이 아니고 눈이라고 답하게 된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을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 영희라고 볼 수 없는 각 부분을 하나씩
제거하고 지우면 그 단면에서는 영희란 부분이 아예 없어지게 된다.
원래 격자이론은 처음 어떤 부분을 자신이나 영희라고 생각하였다면,
그 각 부분에서 자신이나 영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하나씩 떼어서
제거하면 그 부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 생각하는 그 내용은 그 부분에는 없다.
이렇게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러나 다시 처음처럼 영희라고 본 부분을 따라서 윤곽선을 잡고
떼내어 그렇게 묶고 나누면 이제는 그 부분은 영희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영희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알고보면 각 부분은 각 부분대로 각기 다른 성품과 모습을 가진 것이고
각 부분은 전체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고
또 전체는 각 부분이 갖는 성품과 모습을 갖지 않기에 각 부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하게 합쳐서 묶고 나누면
그 전체부분은 또 각 부분과는 다른 성품과 모습을 가진 '영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단면을 놓고 어떻게 묶고 나누는가에 따라서
그 때마다 매번 다른 분별을 행하고 다른 생각을 일으킨다는 이 현상을 놓고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 감각현실에 그대로 있다고 여기고자 하는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매번 묶고 나눌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관념분별 내용들은
본래부터 그 감각현실 영역에 그렇게 다 숨어서 있었던 것으로 이 상황을 여기게 된다.
그러면 처음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2 문수가 있겠다라고 힐난한 그 말은
힐난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한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즉 감각현실 영역에 그렇게 문수보살님이 있었던 것이 맞고
그래서 문수보살님을 만나면 다시 문수보살님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 상황에서 2 문수가 있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렇게 보고자 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감각현실을 격자(▦) 처럼 각 부분을 나눈 다음
이 각 부분을 어떻게 묶고 나누는가에 따라 무량한 관념을 일으키게 마련인데
이들 내용은 알고보면 그 감각현실에 그렇게 미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달리 묶고 나누면 처음에 생각한 그 내용을 그 상황에 대응시켜 일으키지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처음 영희라고 생각한 그 내용은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격자이론을 하나의 단면을 놓고 적용할 때
오히려 잘못 적용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의 오류를 이해하려면 처음의 원칙적인 방안,
즉 문제되는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을 직접 대조하는 방안이 효과적이다.
숨어 있었다고 하는 그 내용을 어느 순간 찾아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처음에는 영희만 있다고 여겼는데
영희의 손 부분에서 손을 찾아낸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이 찾아냈다고 하는 손은 관념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손을 찾아냈다는 그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이제 이 감각현실을 눈으로 잘 보고 나서 자신의 눈을 감는다.
이 경우에도 자신이 찾아냈다는 그 손이란 관념내용은 여전히 떠올릴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그 직전에 눈으로 보았던 그 손 부분의 내용이 하나라도 찾아지는가를
스스로 확인하면 된다.
즉 손이라고 새로 대하게 된 그 부분이 감각현실인데 그 부분 자체는
자신이 떠올리는 손이란 관념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위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면 된다.
이것은 원래 격자이론을 사용하기전에 문제되는 각 내용을
직접 대조하는 원칙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또 여기에는 다시 또 다른 가정적 항변을 추가로 동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단 이 상황에서는 시인을 많이 동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낙엽을 보고 시집간 누님을 떠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헤어진 애인을 생각하기도 하는 시인을 동원하거나,
막 흩뿌린 먹물 그림을 놓고 어떤 때는 거미로 보고 어떤 때는 나비로 보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리고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각 내용을 어떻게 나누어 보는가에 따라서
안경도 찾아내고 물고기도 찾아내는 사람도 필요하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여하튼 그런 각 주체들이 그 상황을 놓고
그런 모습을 찾아내고 본다면
역시 그런 내용도 거기에 미리 숨어 있었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앞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이 경우도 부정하기 힘들게 되는데
과연 그런가라고 거꾸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여하튼
감각현실 영역의 내용을 일정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관념영역에서
이렇게 분별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a + b => C 의 식으로 나타내면
이 식 자체에서 그런 과정으로 일으킨 C 라는 관념은
그런 생각을 일으킨 감각현실 a + b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각 경우마다 다른 관념을 끌어내는 그 과정 자체가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제시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시간적 격자이론 - 망집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사정
그런데 현실에서 일정 부분을
영희나 철수, 또는 영희의 손 발, 자동차 또는 자동차 바퀴 자동차 문,
이런 식으로 각기 그 때마다 묶고 나눌 때
각 부분들이 각기 성품과 모습을 달리 갖는다고 할 때
그런 성품과 모습이 현실에서 적절한 이해라고 여기게 되는
또 다른 사정이 있다.
이는 이른바 시간적인 격자 이론을 다시 살펴야 할 부분이 된다.
앞에서는 현실의 정지된 한 단면을 놓고
격자(▦) 이론을 적용했다면,
이제는 수많은 단면을 여러 내용을 연 이어 놓고
이들을 함께 묶어 살피는 가운데 일으키는 관념 내용들의 문제다.
먼저 사람이 저기에서 '온다'거나 '간다'거나
또는 없던 꽃이 '피어난다' '생긴다'. '없어진다'라는 표현이 위와 같다.
그런데 이 내용은 잘 살피면
현실의 한 단면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온다는 저 지점에 있다. - 그리고 나서 이 지점에 와 있다.
이런 내용을 묶어 가리키는 관념이다.
그래서 현실의 어느 한 단면에는 이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생긴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생긴다라는 것은 무언가 없다가 있다. 이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도 역시 어느 현실 한 단면에는 해당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각 현실 단면에는 이들 내용이 없는데
그러나 이들 각 단면을 이어서 죽 대하게 되면
그 상황을 여러개 묶어서 그 주체는
꽃이 없다가 있게 되고 => 생긴다.
영희가 저 지점에 있다가 여기로 와 있다. => 온다.
이런 식으로 관념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도 알고 보면 정지된 한 단면에서 살핀 격자이론과 같은 문제가 된다.
각 부분에서는 얻을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런 각 부분을 어떻게 함께 모아 놓고 보니까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보게 된다는 현상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이는 단순히 100 m 떨어진 곳에서 영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올 때
처음에는 콩알보다 작게 보인 영희가 자신 앞에 다가올 때는
킹콩만큼 크게 보이는 가운데
매순간 그 모습이나 크기가 다른데
이 가운데 어떤 부분이 영희의 대표인가 하는 판단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경우는 매 순간의 각기 다른 형태나 모습을 영희라는 관념과 대응시키는 경우로서
앞과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이는 하나를 영희라고 정하면 나머지는 왜 그것이 영희라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또 이와 비슷한 문제는
현실에서 한 주체는 비록 100 m 달리기 상황은 아니지만,
갓난아이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매 순간 그 육체적 구성요소나 정신적 구성요소를 달리 변화해가면서
그렇게 변화해왔다.
이런 경우도 그 매 순간 매 경우를 철수나 영희라고 관념을 일으켜 대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 경우에도 앞과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나 철수가
그 한 부분에 있다고 하면
나머지 부분은 왜 그것이 영희나 철수가 되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문제다.
● 각 영역별 격자이론 - 실재 영역과 감각현실 사이의 적용
여하튼 자신이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되므로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음이 분명하다고 고집하게 되면
이 격자이론은
차원을 넘어서 다른 영역에까지 적용하게 되기 쉽다.
처음에 본 바탕인 실재 영역 - 감각현실 영역 - 관념분별 영역
이렇게 크게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 기초적으로 감각현실 영역과 관념영역 사이의 격자이론을 살피는데
앞의 입장을 관철하면
같은 방식으로 관념에서 일으킨 내용은 그런 사정으로
실재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어서 그렇다라고 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의미다.
이 문제가 그래서 상당히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 인과 문제와 관련된 망집 - 생사현실을 해결해야 하는 인과문제와 인과가 실답다는 망집의 문제
현실에서 이런 착오를 일으키는 또 하나 사정은
인과 관련성 문제가 있다.
여하튼 자신이 종이라고 보는 것을 붙잡고
불을 붙이면 어김없이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그 상황을 보게 되고
지금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수천년전 앞을 가도 그렇고
뒤로 가도 마찬가지다.
그 상태도 단순히 그런 모습을 볼 뿐 아니라
소리나 촉감 등 다양한 내용을 준다.
그렇기에 이들은 실다운 내용이다.
이렇게 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종이라고 본 부분은
여기에 불을 붙이면 그런 성품과 모습을 갖는 내용을
뒤에 다시 얻게 하는 성품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 자신이 그 부분을
그런 성품과 모습을 가진
종이라고 본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정이 처음 종이를 종이라고 보고
영희를 영희라고 보고 망집을 일으키는 상황을
계속 유지시키고 더 나아가 그런 망집을 증폭시키는
배경 사정의 하나가 된다.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게 되는 그 배경 사정을 이해하려면 물론 앞에서 처음 말한 것처럼
처음 그 주체가 어떤 형태로 망집을 일으켜서
삶을 출발하게 되었는가까지 살펴야 하는데
우선 위 내용을 놓고 그것이 왜 망집인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물론 위 내용은 현실의 망집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사실 이 망집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바로 그 문제때문에 무량한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면 무량하게 반복해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관계가 있으므로
또 반대로 생사현실에서는 일정한 수행을 행해서
이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생사현실에서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실답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부분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지금 제시하는 것은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현실은 꿈과는 사정이 달라서
그 내용이 대단히 생생한 형태로
한 주체에게서만 아니고 무수히 많은 주체에게 같은 형태로
한 순간만이 아니고 무량겁에 걸쳐서 대단히 반복해서
그리고 단순히 눈으로 보는 색 영역만 아니고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느낌이나 관념 내용 등에 걸쳐서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게 반복해 받아가게 되므로
이 생사현실의 고통을 방치하면 안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것이 실다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실답지 않은데도 위와 같이 다수가 대단히 반복해서 무량하게
받아나가게 되므로 이것을 문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수가 대단히 반복해서 무량하게 그런 관계로 받아나간다는
그 내용이 그 각 내용을 실답다고 보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a + b => C 의 관계식이 의미하는 내용과 같다.
이 관계는 다수에게 무량하게 반복해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식 자체는
그렇게 나타나는 C가 그런 사정으로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 무자성이고
그 자체가 열반 적정이고 공하다는 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a + b => C 의 관계식자체가
왼쪽 부분과 같은 상태가 될 때 그런 C 가 나타났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왼쪽 부분에는 없는 내용이 그렇게 나타났다는 것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바로 그런 C 가 그런 사정으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C 가 실답지 않다는 내용을 무수하게 반복해서
제시한다고 해서 그로 인해 C가 실다운 내용으로 그 성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내용이 인과관계를 통해 다른 실답지 않은 내용과 관련이 된다고 해서
그 첫 내용이 실다운 내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밥이라고 보는 것을 먹는다면
1 시간 후에는 배가 부른다.
이런다고 할 때 1 시간 후에 배가 부른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으로 인해서
처음에 밥이라고 보는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정을 처음
꿈이나 게임 상황을 놓고 비유로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꿈에서도 배로 보이는 것에 올라타면 물을 건너고 물에 젖지 않는다.
게임에서도 어떤 아이템을 얻으면 그 뒤에 그 아이템으로
어떤 가게에 들러 다른 부품을 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그 게임에 임하는 한
게임을 하는 이 누구나 반복해서 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 얻어지는 실다운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두 내용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딱지를 산처럼 쌓아 놓고
이렇게 딱지가 많이 있으니
이것을 현금으로 보아달라고 주장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실답지 않은 딱지가
한 장 두장이 아니고
각 주체마다 무량하게 반복해서 쌓여서
그것이 실답지 않은데도
각 주체가 그로 인해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겪어나간다는 이 현상이 문제인 것이다.
일단 과거에 제시한 여러 내용과 함께
현실에서 실답게 여겨지는 내용들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대강 다시 살폈다.
나중에 조금 이들 내용은 한 곳에 모아서
체계적으로 다시 정리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만,
글이 길어졌으므로
여하튼 이 정도로 마치고
현실에서 있다고 보는 각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내용이고
그래서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 실재영역에서 불가득인 사정
더욱이 감각현실과 관념영역간의 문제를 떠나서
실재 영역과 감각현실의 내용을 놓고 살필 때도
이 문제는 똑같이 문제된다.
사과를 손에 쥐고
그 사과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촉감을 얻는다고 할 때
이들 내용을 모두 실재 영역에 있다고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이 문제를 또 한번 살퍼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a + b => C 의 형태로
감각내용을 얻는 각 주체는
실재 영역의 내용은 끝내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의 엉터리 주장을
받아들여서 앞과 같이 가정적 항변의 형태로 살피면
역시 마찬가지 문제점을 보게 된다.
자신이 눈으로 색을 보았다고
그 색을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밀어 넣으면
그 내용을 대해서 귀나 코나 입이나 손이 얻는
소리나 냄새 맛 촉감은 다 엉터리 내용이 된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엉터리 주장임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내용을 모두 다 합쳐 밀어 넣는다 해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합쳐진 내용에서 어느 한 부분은 부분적으로 일치한 것이 아닌가
여길 수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합친 내용이 실재 영역에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직접 얻어낸 내용이 아니다.
단지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밀어 넣을 수 있는 내용은
영희나 철수나 자신이 얻는 내용만 그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다.
메뚜기나 다람쥐 박쥐 상어 등을 비롯해서
오늘날 과학자가 사용하는 각종 관측기구를 다 동원하여
얻게 되는 각 내용도 그 성격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소리을 기준으로 하면 아예 없다라고 판단할 어떤 부분이
다른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있다라고 모순된 판단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없는 그런 이상한 자체 모순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에 엉터리 주장을 전제로 할 때 나타나는 모순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각 영역의 내용들이
이처럼 어떤 내용을 다른 영역에 밀어 넣어서 이해하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도 약점이다.
예를 들어 감각현실의 각 영역에서
소리를 눈으로 보는 색의 영역에 밀어 넣어도 된다거나
관념을 감각현실 영역으로 밀어 넣어도 된다. 그런 내용이 발견이 된다.
또는 느낌을 감각현실 영역으로 밀어 넣어도 된다. 그런 내용이 발견이 된다면
모르지만, 현실에서 이미 얻는 각 영역의 내용들 에서부터
그런 관계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주장은
사정이 그렇다면
왜 현실에서 나머지 영역들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가 찾아지지 않는가를
거꾸로 해명을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일단 이 정도로
현실의 각 내용이 본래 얻을 바가 없다고 불가득이라고
제시하는 사정을 간단히 살피고 마치기로 한다.
>>>
●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의 입장
원칙적으로 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은
그 내용이 침대에서 꾼 꿈과 마찬가지로 그 성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욕계 현실에서는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을 겹쳐 놓고
자신이 생각하는 일정한 관념내용은 바로 그런 관념을 일으키게 한
그 감각현실이다.
그 감각현실에 그런 관념내용이 있다.
더 나아가 그 관념은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한다.
그래서 그 관념은 실다운 내용이다.
이렇게 여기고 현실에 임한다.
그래서 자신이 영희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단순히 관념영역에서 머무는 내용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눈을 뜨면 보게 되고 손으로 만지면 촉감을 얻는 그런 내용들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면
그 바탕이 되는 재료 내용이 변화함에 따라서
그런 바탕에서는 그 주체가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받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욕계 생사현실의 문제점이고
특히 욕계에서 고통과 공포를 심하게 받는 3 악도의 상황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는 내용은
위와 같은 바탕에서 시설되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은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역시 얻지 못하는 것이지만,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그 상태에서 중생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두 측면의 경계선에서
마치 연못에 몸을 담그고 연꽃을 피우되
연못에 물들지 않는 상태처럼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는
한편으로는 본래 제도하는 수행자자신이나 제도할 중생이나 제도하는 행위나
본래 얻을 바가 없음을 잘 이해하여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는 한편,
그러나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자세로
수행방안을 택해 무소득을 방편으로 정진하여
각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무소득을 방편으로 한다는 것은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임해서 수행과정과 수행목표에 대해
수행자가 다시 일으키기 쉬운 집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을 제거하는 측면과 함께
본래 생사현실에서 무엇인가 얻을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망집에 바탕해 임하면 행하기 힘든 각 수행방안의 내용을
원만하게 잘 성취하게 하는데에도 필요하다.
통상 보시를 행한다 하면 보시를 행하는 이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갖는 좋음이 그로 인해 없어지고 자신부터 불편을 겪게 된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주저하기 마련이다.
또 보시를 해서 무언가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행하면
그 보시는 마치 장삿꾼이 장차의 이익을 얻기 위해
물건을 주고 받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임하게 되기 쉽다.
이것은 장사꾼의 장사행위인 것이고 보시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수행이 원만하게 성취되지 못한다.
그리고 나머지 수행덕목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수행이나 수행을 하는 자신이나 다른 중생이나
이런 수행을 통해 얻는 수행목표 상태들을
모두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임한다는 것은
이 수행과정에서 일으키는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시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끝으로 본래 그렇게 얻을 것이 없으면
도대체 현실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다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처음에 꿈의 비유에서도 이것을 살폈다.
침대에서 꾼 바다나 황금 꿈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침대가 없다거나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꿈을 생생하게 꾸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은 침대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 영희나 철수라고 보는 부분,
바위나 산이라고 보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을 제시하고
본 바탕의 실재영역이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감각현실을 얻고
일정 부분에 대해 자신이나 영희라는 생각을 일으킬 때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영역에서 얻어진 하나의 감각현실이라는 재료를 그런 형태로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은 그렇게 얻지만, 정작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분별내용을 일으킬 때 그런 분별내용을 그처럼 명료하게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분별내용에는 그 관념으로 가리키는 그런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감각현실에도 그런 분벌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생사과정을 통해서
생사현실을 무량하게 이어가는 주체는
생사현실에서 통상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내용을 매 순간 받아들이는 그 주체의 마음이 본질이라고 보아야 하고
또 그런 마음 가운데에서도 근본되는 정신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놓고 처음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은
그런 자신이 그 생에서 그 순간에 임시적으로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런 근본정신이나 마음도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할 것은 아니므로
이것이 참된 자신의 본 정체라고 다시 집착을 가질 것은 아니지만,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그런 자세로 무언가 수행을 한다고 할때
도대체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생사현실에서
생사를 이어가며 그런 수행을 해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이와 같이 이해하면 된다고 본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는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평소 대할 때
오히려 이들을 그 안에 담고 있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근본 정신을 염두에 두고
일반적으로 스스로 자신이나 영희 철수 산 바다 바위 등등으로
분별을 행하고 대하는 부분은
그런 내용을 일반인들이 그렇게 여기고 대한다는 사정을 한편으로 이해하여
그에 눈높이를 맞추고 대하면서
수행방안으로 임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내용은 그런 부분에서 얻어지지 않음을 이해하여서
그런 분별에 집착을 하지 않고
그 상황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망상분별을 행하며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가
저 부분은 영희 철수 바위 이런 등등의 분별 자체를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분별을 행하면서도
그 분별은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일반 중생이 그러한 상태로 분별을 일으키고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하는 상태임을 이해하는 한편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명확이 이해하고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또 제거하게 하기 위해서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내용은 눈병이 들어서 허공에 본래 없는 꽃모양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로 비유할 수 있다.
어느 순간 그런 꽃은 자신이 눈병이 나서 보게 되는 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런 꽃은 보이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꽃이 눈병에 의해 보게 되는 꽃이어서
실답지 않은 꽃임을 이해하고 대하는 상태가 이전과 다른 점은
그런 꽃을 계속 보게 되더라도 그 꽃이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지도 않고
또 그런 집착에 바탕해서 행하게 되는 업을 행하게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허공의 꽃을 붙잡으려 허공에 손을 뻗지 않게 된다.
그래서 『원각경』 등에서 제시하는 이런 비유처럼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는
한편으로는 중생의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는 한편
그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정진해 나가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Thibaut Derien - La Guerre Du Feu.lrc
Lab value 불기2563/01/02/수/15:03
● 기본 수행덕목과 니르바나 무복수지의 방안
『대반야바라밀다경』 제3권 학관품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를 배우고 닦는 방안에 대해서 설명할 뿐 아니라,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취지에 대해 널리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다를 배우고 닦는 방안은
결국 대부분 기본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이 정리된 형태다.
어떻게 보면 기본 경전에서 제시된
수많은 수행덕목을 다시 나열해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들 내용이 기본 경전에서 제시된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방안으로 제시되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살피면서
다음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는 과연 이런 수행덕목을
기본 경전에서 제시한 것처럼 닦아 나가는 이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이 문제부터 살펴야 한다.
과연 현실에서
살이 부풀어 오르고 곪아 터지고 색이 변하고 푸르딩딩하게 되고
새가 뼈를 쪼아 먹고 뼈가 흩어지고 해골만 남고
또는 화장터에서 불타서 재가 되고
이런 형태로 자신의 몸이나 다른 이를 관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가.
물론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룰 때 이런 모습을 가끔 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 중에 그것은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그런 것 뿐이다.
그 외 나열된 수행덕목들도 다 사정이 비슷하다.
현실에서 4 정려, 4 무량 4 무색정을 닦아 나가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가.
전혀 없지 않지만,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살피는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에서는
이들을 단지 그렇게 닦을 뿐만 아니라,
반야바라밀다에 바탕해서 좀 더 올바르게 닦아야 함을 제시하는 것인데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서는 그 자체를 닦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사실은 현실에서
우선 그런 기본적인 수행을 닦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다시 이 수행을 본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올바른 형태로 닦아야 함을 이해해서
올바로 닦아 나가야 한다고 단계적으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취지는
학관품 이하 부분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대단히 뛰어난 공덕을 얻고
중생제도를 잘 행하기 위해서
닦아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기본적 내용이지만,
현실을 놓고 보면 가장 처음
왜 이런 여러 수행덕목을 닦아야 한다고 하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는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살펴야 할 주제라기 보다는
기본 경전이나
아니면 니르바나 행복론 이런 부분에서 살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기본 수행덕목을 닦을 때
여기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 부분을 참조하여
이를 어떻게 대하고 닦아나가야
진정 올바른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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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관품에 나오는 여러 수행덕목은
이번 기회에 불교사전 등을 통해서라도 기본 항목과 개념을 정확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잘 정리해두면 앞으로 600 권에 달하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살피는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편의를 얻게 된다.
지금 보는 형태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앞에 나열된 기본 수행덕목 내용이 이후에 대단히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첫 부분과 끝부분과 간단히 적고 중간에 '내지'라고 축약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축약된 내용을 잘 파악하려면 지금 나오는 부분을 잘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 수행관련덕목 법수의 정리 암기
그리고 알고보면 이 부분에 수행자가 평소 행하는 수행덕목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기에
이 내용을 파악해서 평소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 또 요구된다.
물론 처음에는 4,4,4,5,5, 8, 9, 10, 11, 이런 형태로 계속 여러 내용이
나열되기에 어렵다고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 기본적인 내용이다.
이런 부분은 기초적인 내용이지만, 이것이 잘 되어야
이후 『대반야바라밀다경』을 대할 때 큰 불편없이 죽죽 읽어가면서
분량대비 성취감을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냥 자신이 반복되는 부분을 넘어가는 것과
이들 내용을 매번 하나하나 자신이 잘 꺼내서 음미하면서 넘어가는 것은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3 ~ 5권 부분 정도까지 처음 제시되는 이들 항목을 잘 정리해서
외우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본다.
● 법수의 암기방안
이들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는 처음
『대반야바라밀다경』 1 권을 살피면서
경전 품수를 외우는 방식에서 그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이 방안을 여기에 응용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기억할 수 있다.
참고로 여러 내용을 묶어서 이야기가 되는 한 문장 형태로 바꾸는 것이
기억에 편하다. 한글로는 문장이 잘 안 되는 경우에도
한자를 통해서 음미하면 대부분 시감상을 통해서 이야기가 되는 문장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게 제목과 내용을 묶어 놓으면 나중에 오래 기억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억할 내용이 많이 나타날 때마다
기억할 내용이나, 기억 암기하는 활동에 염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임하지 않고
되도록 오래 기억'하고 싶다' 이렇게 친근한 마음을 갖고 대하는 한편,
한번에 다 꼭 반드시 외워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부담을 갖는 형태로 생각하지 말고
이번에는 외어지는 부분까지만 외워보고 싶다.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나면
또 그 다음에 이어서 외우고 싶다.
이렇게 편하게 마음을 갖고 임해야 한다. .
mus0fl--Brigitte Bardot - Je T'aime Moi Non Plus.lrc
● 20 공의 암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대단히 많이 반복해 나온다.
內空
外空
內外空
空空
大空
勝義空
有爲空
無爲空
畢竟空
無際空
散空
無變異空
本性空
自相空
共相空
一切法空
不可得空
無性空
自性空
無性自性空
그래서 이렇게 반복되는 부분을 보면
처음에 볼 때 확실하게 잘 묶어 기억해 두면
이후 상당히 편해진다.
지금 본인도 외우고 있는 항목이 약간 많아서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20공 부분을 놓고 묶어서 시감상을 잘 해서 한문이던 한글이던
자신이 기억할 수 있게 문장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외우는 것이 한 방안이다.
반야 20 공~~內外內空大勝有無畢無
(無)-散無本自共一不無自無
반야 20 공이란, - 내외안에 공간이 큰데 / 승리가 있고 없음은 끝내 없음이다.
10-(무란) /흩어져 근본이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 함께 해야 하고
하나는 없는 것이 아니지만, 자체적으로는 없다.
이렇게 한자 첫글자를 뗀 내용으로 새로 시감상을 해도 되고
반드시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자신 나름대로 기억이 잘 되게끔 변형시켜서 적용하면 된다.
이는 원래 단어를 놓고 보면 조금 엉뚱한 시가 된다.
이 첫글자로 만든 시를 가지고 다시 원래의 단어를 꺼내려면 오히려 더 힘들수도 있다.
이들 내용은 단어가 짧으므로
논리적으로 앞 뒤 내용이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연결되게끔 연결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內 -> 外 -> 內外 - 空 - 大 - 勝義 - 有爲 -> 無爲 - 畢竟 -> 無際
散 -> 無變異 - 本性 - 自相 -> 共相 - 一切法 - 不可得 - 無性 -> 自性 -> 無性自性
이런 형태다.
그래서 앞 뒤 단어간에 서로 논리적으로 관련이 되므로
그렇게 연결시켜 묶어도 된다.
그런데 각 방안을 병행하면 조금 더 효과가 좋다고도 본다.
● 진여 12 가족의 암기
眞如
法界
法性
不虛妄性
不變異性
平等性
離生性
法定
法住
實際
虛空界
不思議界
두번째는 진여 가족 부분이다.
가족이라고 한 것은
진여를 말할 때 같이 나열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진여가족 - 眞法(界)法(性)不(虛)不(變)平離法(定)法(住)實虛不(思)
진!법!법!불!불 평이!법!법실 허!불 이렇게 첫글자가 나오는데
법이나 불이 너무 반복된다.
이런 경우는 첫 부분외에는 두번째 글자부분에서 떼내는 것이 낫다고 보기 쉽다.
진여~~진법성불변, 평이정주실 허불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우 시간이 지나면
어떤 부분은 첫번째 글자가 아니고 그것이 두번째 글자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그래서 첫번째 방법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결국 고민 끝에
진여가족- / 진-법계-법성-불허-불변-/ 평-리-법정-법주-실-/ 허-부(사의) -12끝
이렇게 한번 시도해보게 된다.
처음에 글자를 떼어 자주 반복하면 외어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좀 희미해진다.
그래서 결국 조금씩 묶어서 시나 소설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진여 법계의 법성은 불허망하고 불변이하고
평등하며, 생멸을 떠나고 법으로 정해져 머무는 실제여서,
허공처럼 부사의하다.
이렇게 앞뒤로 연결해 한번 묶어주는
조금이라도 낫다고 본다.
그런데 여하튼 각 방에 잘 배치해서
나중에 방 위치만으로 바로 바로 꺼낼 수 있으면 성공이다.
◈Lab value 불기2563/01/01 |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576#1893 |
-- 아래에 일일단상과 경전공부, 경률논코너, 불교 용어공부 코너 등에서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 사진, 풍광, 예술작품 자료 등을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ître Gims - Changer_(360p).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ohn Singer Sargent-bringing-down-marble-from-the-quarries-in-carrara-1911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egoniaPendula1-Asio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ndrea_V
♡석천사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Naver 지도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hristina-Robertson-princess-tatiana-vasilievna-yusupova-1841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égonia_FR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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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t Temple of San Diego,[4] San Diego ,California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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