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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무량한 if 논의의 시발점 본문
sfxx--무량한-if-논의의-시발점.txt.htx
sfxx--무량한-if-논의의-시발점.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54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머리가 복잡한 if 문장
prince 님의 망상증 내지는 의심증은
주로 IF 문장과 관련해서 일어난다.
쉽게 보면 의처증 의부증 환자의 증상과
그 사정이 같다.
우선 자신이 무언가를 놓고 의심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상대가 조금 늦게 들어왔다.
그런데 왜 늦게 들어왔을까.
그리고 자신이 어떤 생각이나 추리를 하는데
그럴 듯하게 추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건이 하나 없어질 때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고 추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각 의심과 의문을 해소해주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이런 의심증이 한번 일어나면
평생 해소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
그것은 그 의문을 갖는 이가 그 의문을 해소시키기가
본래 곤란한 상황에서
그런 의문을 일으켜 갖고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문을 갖는 경우
어떻게 되어야 그 의문이 시원하게 해소된다고
보게 되는가하면
그가 의문으로 갖는 그 사정을 직접 보아야만
그 의문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러나 직접 그것은 볼 수 없게 된 그런 상태에서
그런 의문을 일으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그 의문을 갖는 이는
본래 그 의문을 명확하게
해소시키기 곤란한 상태에서
그런 의문을 일으키고 그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보지 않고 있을 때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했을까 이런 것을 놓고
의심을 가질 때
그 문제 자체에
그런 성격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그것을
직접 보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조작이라고
또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를 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사실은
그렇게 자신이 무언가를 놓고 망상을 일으키고
그런 가운데 자꾸 의심하기에
그 증상이 그렇게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왜 그가 처음에
그런 의심을 갖고
그 문제를 대하는가부터 또 살펴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그가 집착을 갖는 것이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에
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그런 의심증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그 부분부터 해소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각 논서에서
if 구문을 사용해서 논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도 상당히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성격을 그 안에 갖는다고 보게 된다.
그처럼 세상에는 제각각 달리 고집하여
주장하게 되는 망상적 주장이 상당히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하나같이
그런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그런 경우 한 방법은
그가 주장하는 것을 다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가 그 바탕에서
계속 나아가면 장차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가를
스스로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한 방안이다.
그것이 prince 님이 말하는
IF 항변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사실 대단히 피곤한 작업이다.
상대의 복잡한 망상과정을 다 헤아려주고
그 바탕에서 그 결론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그 망상이 일으키는 문제가 제거되는 상태로
귀결시켜주어야
비로소 그 망상이 일으키는 문제가 해소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의심증에 걸린 이가 그런 의심을 가질 때
어떤 방안이 그 의심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겠는가.
현실에서는 어떤 방안을 취해서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입증시켜줄
방법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의심증을 갖는 이는 그 상태에서는 무슨 내용을 제시해주어도
그것을 달리 망상적으로 해석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을 일단 다 받아들여 인정해주고
그리고 상대가 그런 의심을 일으킨 근본원인
즉 상대가 집착을 강하게 갖는 그 부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시켜주거나
그렇게 이끌어 줌으로써
그런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도 사정이 오늘날과
거의 비슷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각 논서별로
그런 의문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유가사지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망상적 주장을 대표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첫째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는 이론[因中有果論]이요,
둘째 연을 따라서 나타난다는 이론[從緣顯了論]이요,
셋째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있다는 이론[去來實有論]이요,
넷째 내가 있다고 여기는 이론[計我論]이요,
다섯째 항상하다고 여기는 이론[計常論]이요,
여섯째 전생에 원인을 지었다는 이론[宿作因論]이요,
일곱째 자재(自在) 등이 만든 이[作者]라고 하는 이론이요,
여덟째 살해함이 바른 법이라고 하는 이론[害爲正法論]이요,
아홉째 끝이 있고 끝이 없다는 이론[有邊無邊論]이요,
열째 죽지 않음에 어수선한 이론[不死矯亂論]이요,
열 한째 원인이 없다는 이론[無因見論]이요,
열 둘째 아주 없다는 이론[斷見論]이요,
열 셋째 공허하다는 이론[空見論]이요,
열 넷째 망녕되이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론[妄計最勝論]이요,
열 다섯째 망녕되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이론[妄計淸淨論]이요,
열 여섯째 망녕되이 상서롭다고 여기는 이론[妄計吉祥論]이다.
이런 여러 입장을 나열해서
그 각 주장이 왜 잘못인가를 밝히는 것인데
prince 님 문제는 주로 일곱째 내용과
관련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인가는 만든 이가 있어야 존재한다.
이런 주장을 할 때도 사정이 같다.
원래는 처음 문제되는 그 무엇이 존재하기 이전 상황에
그런 존재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놓고
그런 관계가 이들 간에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확인을 해야
그 문제가 풀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되는 상황에서는
앞의 상황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럴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직접 확인이 안 되니
주장과 의문만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그렇다고 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무언가가 존재하려면
그것을 만든 이가 있어야 한다고 하므로
그렇게 무언가를 만든이 역시
하나의 존재이므로
다시 그런 존재도
그 존재를 만든 이가 또 있어야 된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무한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어느 존재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처음에 전제한 내용
즉 무언가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만든 이가 있어야만 한다고
처음에 전제한 내용 자체가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음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 문제를 놓고
스스로 헤아려 보라고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 처음 보는 돌이나
바이러스나 기타 현상이 발견되면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를 놓고
앞의 내용을 적용해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경우도 대부분 비슷하다.
IF 구문을 사용해 논의하는 것은
대부분 그 문제 자체를 살피는 것은 곤란한 가운데
그 주장 자체는 이치에 맞지 않은데도
그런데도 계속 상대가 망상적 주장을 하기에
그렇게 if 문장을 사용해서 논의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런 망상적 주장이 끝도 없이
나열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골치가 아파오는 성격의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단순한 방안은
앞에서 문제가 제시하는 내용을
자신이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현재 상황 눈 앞에 바로 끌어다 놓고
그것을 직접 잘 헤아리는 것이다
온갖 문제가 제기되고
그 존재가 문제되는 영역으로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렇게 놓고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이
그 각 영역에서 얻어지지 않는데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을 갖는 것이
바로 망상증상인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심하게 부작용이 있는 경우는
병원에 수용되게 되는데
그 환자의 상태가 그런 것이다.
어떤 그릇이 있는데
그는 그 그릇을 대하면서
그것이 우주인의 기지라고 자꾸 생각하고 망상을 전개하는 것이다.
의사는 그 그릇을 아무리 보아도
우주인이 안 보이는데
그 망상환자는 그런 생각을 일으키고
그것을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증상이 prince 님이
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도
상황이 같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앞의 방안이 가장 간단한 것이다.
실재가 바로 그 감각현실인가
한 번 묻고 확인해보고
그러나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은 것인가를
또 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도 마찬가지다.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을 놓고 생각할 때
그런 감각현실이 곧 그 생각 내용 그 자체인가
한번 확인하고
그런데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런 생각을 일으켜 갖게 된 것인가를
또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얻는 내용을
다 놓고 직접 실험하면 되는 것이다.
무엇이 어려운가.
불교계에서 널리 읽히는
짧은 경전 가운데 반야심경이 있는데
여기에 그 사정이 제시되고 있다.
반야심경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방대한 내용을
핵심을 추려
짧게 제시한 내용이기도 한데
그에 해당한 부분이
대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되는 것이다.
색을 하나 놓고 문제를 보자.
색이란 여기서는 색성향미촉을 다 포함한 의미이지만,
단순히 눈을 떠서 보는 색깔이라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 색의 정체를 놓고 판단할 때
앞에서
이 색깔은 실재 그 자체인가.
그리고
이 색깔은 그런 실재를 떠나서 얻는 것인가.
이렇게 물어 본 것이다.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 이다 ~ 아니다 - 있다 없다 등의 분별을 모두 떠나는 것인데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므로
위와 같이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런 색깔을 얻는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공함이란,
그 색깔 그 자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색깔은
또 그런 실재의 공함을 떠나서
얻은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색은 실재의 공함과 다르지 않고
실재의 공함은 또 색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고
사정이 이렇기에
색은 곧 실재의 공함이라고 하고
실재의 공함은 곧 색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의 공함과 색의 관계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제시한다고 해서
그러면 실재에 그런 색이 그 안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그렇지 않음을 다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그런 내용이 그렇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는
앞과 같은 내용까지 추가하여 제시하는 가운데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지만,
결국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그 입장이 같은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
그런데 이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처음에 이런 내용이 어떤 질문을 기초로
제시되게 되었는가를
먼저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한 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색깔을 놓고
앞의 질문을 다시 놓고 스스로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실재는 곧 그 자체가 감각현실인가.
그렇다고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가.
그 질문을 통해서
위 내용이 위와 같은 형태로 제시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으므로
곧 공한 실재는 그런 색이라고 한 것이고
그렇다면
실재에 색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왜 뒷 부분에서는 다시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라고 하여 다시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위 문장을 놓고 그 내용을 잘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색의 공함은 색이 아니지만,
색의 공함은 색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 不離 ]
=> 그래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렇게 제시하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비(非)나 무(無)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공이란 표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공의 의미를 이해시키려는 입장이기에
이 공을 놓고 상대가 이미 이해하는
언어상 표현 즉 유나 무 시나 비라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정을 이해시키고 시정해주려는 입장이기에
그런 표현을 사용하게 됨을 이해해야 한다.
본래는 어떤가 하면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를 분별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prince 님처럼
실재는 A 이다.
실재에는 A 가 있다.
이렇게 망상을 일으켜 고집하고 있으므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다시 아니다 없다 이런 식으로 시정해주면서
공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 표현으로
'아니다' '없다' 에 묶이면
또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세히 살피자면 반야심경처럼
짧게 제시할 도리가 없지만,
자세히 살피면 이렇게 아니다 없다라는 판단에
오히려 묶일 때는
다시 그것을 부정해서 오히려
이다 있다라고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열반경에서는 처음에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제시하는데
이에 반대되는 상락아정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모두 그런 사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간혹 열반의 상태를 놓고
이는 어떤 이가 죽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이렇게 오해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이다.
어떤 이가 수행을 해
성불하는 이유와 취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하튼 직접적으로 그 사정을 바로 알려면
위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온갖 IF 문장과
온갖 주장을 다 쫒아다니면서
헤메 돌아다녀야 하는데
뒤 경우는 노력은 힘들지만,
그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해야 한다.
세상의 철학자들의 철학서적을 다 쫒아다녀도
그 문제를 놓고서 시원한
해결을 못하는 상태가 될 뿐이다.
그런데 이 논의가 왜 시작이 되었는가를 놓고
또 이 문제를 살펴야 한다.
여기서 다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그처럼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등을 놓고
일으킨 그런 망상과 집착이
생사 고통을 가져다 주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 내용을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에 첫 부분에
그 해법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단순히 관자재보살 이 부분만 하나
놓고 평생 념해도
그것만으로도 소원성취도 하고
보리(깨달음)을 얻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고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첫 부분에
직접 일체 고통과 재난을 쉭 벗어날 방안을
다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본래 상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망상 속에서 온갖 생사 고통을 다
겪으면서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깊게 닦아 행하고 [행심]
밝게 비추어 보고 [조견]
~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서 ~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도~]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본래 상태가 청정한 니르바나인데도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그런 무명 근본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그 망상안에서 각종 번뇌와 견해를 일으키고 집착하면서
각종 iF 문장 성격의 주장을 따라다니면서
생사고통을 받아가면서
헤매 돌아다니게 되므로
그 관계를 그렇게 제시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통해
그런 망상상태를 벗어나면
이제 다른 세계가 그에게 열리는 것이기도 하다.
a +b => C
의 관계를 놓고
그래서 그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도
그래서 그 효용을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그렇게 머리카락 하나로
우주를 이동시키는 일도 그래서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a +b => C 의 내용을 놓고
기본적으로 이 내용이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을
다 제시하는 내용임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이
또 C 라는 내용을 생생하게
현실에서 나타나게 하는 방안도
제시하는 것임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저 식 자체가
그런 C 가 그렇게 얻는 무상하고
그래서 그에 집착을 가지면 고통을 주고
그리고 그 관계로 얻기에
그것이 그 안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는 무아 무자성의 것이고
그리고 그런 것을 나타나게 하는 본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 고통 일체를 얻을 수 없기에
본래 열반 적정의 상태임도 이 관계가 제시해주는 것이고
그리고 그 실재는 그러한 상태이기에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는 것도
모두 이 내용이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 식이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행하면 그런 결과를 성취하는 것도
역시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그 사정을 잘 이해한 가운데
망상상태가 일으키는 번뇌와 고통을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현실에서 문제되는 사건이 하나둘이 아닌데
그 하나하나가 다 그 주체를 괴롭히는
주제가 될 것이라고 보게 된다.
한 때 겨울에 prince 님이 추위와 난방 문제를
걱정한 적이 있는데
현실에 그것만 해결되면
삶에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고 보는가.
바탕화면에는 군인들 모습도 보이는데
가끔 트럼프 치다가 갑자기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돈을 번다고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도
대단히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종합 사정을
삼계 화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나라가 멸망하고 생겨나고 했는데
그것이 하나같이 삼계화택의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빨리 망상문제를 해소시키지 못하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삼계의 붙타는 집안에서 고통을
겪을 도리 밖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위 내용을 잘 관하는 가운데
망상을 벗어나면
모든 고통과 재난을 벗어나고
그 삼계가 곧 안온하고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반야심경 첫 문장에 제시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또 그런 상태에서
올바른 수행방안을 취해 임하면
또 그에 따른 결과를 그렇게 성취한다고
반야심경에서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구절이
그 최종 상태를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
수행자는 처음 아상을 제거하는 가운데
수행에 임하고
다시 수행자가 다른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무량행문과 방편지혜를 닦아 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거꾸로
타상을 갖고 임하고
또 그런 수행에 다시 집착을 갖고 임하기가 쉽다.
그러면 사실은 그 자체가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문제와 그 사정이
금강경에서 그렇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금강경에서는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
‘내가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리라’ 하면,
보살이라고
이름하지 못할지니,
무슨 까닭이냐?
수보리야,
진실로 보살이라고
이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온갖 법은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
수자상이 없다’ 하느니라.
...
그런데 이 내용은
그렇게 기본 사정을 알고
그렇게 중생이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그에 대해 상을 일으키지 않고
그에 집착을 갖지 않되
그러나 그러한 바탕에서
그처럼 끝없는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 노래가
그런 사정을 다시 안타깝게
전하는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지옥고와 무량행문 시설과 if 항변의 관계
비록 같은 내용이지만,
연구나 논의에 있어서 비판이나 항변이 필요한 것은
말을 하는데 말소리와는 관계없이 숨이 필요한 것과
사정이 같다.
위 문장을 요즘 tts 기능으로 작동하면
기계적으로 말소리를 내게 할 수 있는데
개발자가 처음 이 경우 사람이 말하는 소리와는 달리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두 내용을 비교한 결과
다음의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쉴 때
사이사이 내쉬는 숨소리도 있고
가끔 헛기침도 하고 속도가 조금씩 다르고
이런 여러 내용이 다 함께 있어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말이 들린다는 점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것을 넣고 빼고 함에 따라서 전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if 논쟁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세속제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잘못 판단하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논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제는 알고보면 그 자체가 희론이고
실답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속제를 빼면
승의제(제일의제)의 내용을 알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에서 방편이 중요시되는 것은
방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방편을 넣고 빼고 함에 따라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상태가 얻어지는가
얻어지지 않는가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방편이 없는 지혜는
그 자체가 해탈이 아닌 속박이라고 제시되고
방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무량한 복덕자량이 수행자에게 필요가 없다고
보게 되지만,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대단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법화경과 같은 경전에서
방편은 곧 진실이라는 명제가 제시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높은 암벽으로 된 산을 등산하는 데 있어서
산을 빙빙 돌아서 길을 내거나
케이블카를 시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원래는 어떤가 하면 요즘 가끔 체육공원에서 보듯
맨 손으로 암벽등반하듯
돌 조각을 손으로 잡고 수직으로 올라가야 할
코스라고 보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아주 특수한 이들만
몇 명 올라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산정상까지 어떤 이가
나사 형태로 빙빙 길을 내고
잔도를 붙이고
또는 케이블을 걸쳐서 케이블카를 만들어 놓으면
장애가 있어서 부목을 한 이나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상태에서도
그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상황을 놓고 거기에서 그런 방편을
빼고 넣고 해보면
그 차이가 무엇인가를 쉽게 보는 것이다.
if 논의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부분 그런 성격이고
부처님이 언어를 통해서 설했다는 내용이
대부분 그런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부처님은 수보리를 상대로
다시 물어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한 마디라도 설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 존자께서는
매 상황마다 부처님의 질문에 답을 잘 하시는데
그러니까 경전이 짧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만,
만일 if prince 님이 그 상황에 있으면
대단히 경전이 길어지게 되는 사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질문부터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말에 붙잡혀서
계속 말꼬리를 붙잡고 논의하면
그렇게 짧게 금강경이 제시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존자와 부처님이 문답을 나누기에
경전은 짧아지는데
따라서 수보리존자 자체가 다시 이런 질문을
부처님에게 올리게 되는 사정도 있는 것이다.
이 경전을 후세에 누가 대한다면
과연 이 경전이 무슨 내용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또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또 논사분들은
여기에 다시 무언가를 보충해서
수보리 존자님이 걱정했던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또 노력을 다시 덧붙이게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수보리존자님이 걱정했던 것처럼
prince 님이 그 내용을 보고
자체적으로 말도 안되고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기고
그냥 무시하고
그래서 장구한 세월동안 지옥의 고통을
알아서 받아나가게 되는 그런 복잡한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글은 길지만,
여기서 그런 의미에서
if 논쟁의 한 내용을 한 번 놓고
살펴보기로 한다.
처음 a + b => C 의 관계를 제시하면
이것을 놓고
이런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다.
우선 위 관계식은 그렇게 얻는 C 가 아무리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어지고
진짜처럼 여겨져도
그 관계식 자체가 그것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은 것이고
그런 사정으로
무상한 것이기도 하고
그런 사정으로 또 지금 사라져 없어져도
단멸해서 아주 없게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사정으로 그 C 가 그 순간은 아무리 좋게 보여도
그것이 고통의 상태로 묶어 끌고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그렇게 얻는 일체가 다 고통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괴고'
즉 무너져 사라져서 얻게 되는고통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위 관계식이 그런 C 와 관련해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지 않다는 것도
제시해주는 내용이고
등등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한다고 설명하게 된다고
반복해서 제시한 바 있다.
눈을 뜰 때 보는 모습을 놓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눈을 감아서 보지 못하게 되면
그전에 보던 내용이 아무 것도 없게 되는가
그렇지 않고 자신이 관계하던 않던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의 내용은 있는 것인가.
그런 실재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할 때도
위 관계식이 그 사정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위 관계식으로 얻는 C 는
일단 그런 입장에서 찾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는 그런 관계로만 일체 내용을 얻는
주체는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사정도 위 관계식이 나타내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관계식이 그런 사정을 말해주어서
그렇게 얻는 C 하나가 실답지 않고
집착을 가질 내용이 못된다고 제시하는데
prince 님은 이제 그 관계식을
무수히 반복하고 쌓으면
그로 인해서 그 내용이나 그 관계가
다 실답다고 주장하는 입장인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이 매번
그런 경험을 반복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기에 자신이 그런 관계로 얻는 내용이나
관계도 실다운 것이다라고
이런 주장을 하고
prince 님이 자신이 현실에서 무언가를 얻고
그것을 C 라고 생각한다면
그 내용은 실재나 감각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something special 한 것이
그렇게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 representative
이론이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놓고
실재가 그대로 감각현실인가.
또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가
이런 문제를 제시해서
스스로 그 문제점을 잘 파악하라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번 엉터리인데
그것이 무수하게 반복한다면
그 사정으로 그 만큼 엉터리가 깊어진 것이지
그로 인해서 그것이 참된 내용으로 된다고
보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눈을 뜰 때마다 매번 자신의 방에서
일정하게 화분의 꽃이 보인다고 누가 주장한다면
그에 비슷한 횟수만큼
그 때마다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얻지 못함을
그만큼 반복한 것이기도 한데
그 주장자는 여기서
말 사이에 숨소리가 별 의미가 없다고 무시하는 것처럼
그것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a + b => C
의 관계식을 놓고 또 어떤 망상분별을 일으키는가를
하나의 사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은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제시한 것처럼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는 이론[因中有果論]을
하나 생각할 수 있다.
또 자세히 살피면 C 란 아무 인과관계가 없이
그렇게 얻는 것이다라고 하는 무인론도
생각할 수 있다.
무언가 있고 없음을 놓고 따질 때
이 모두가 다 그런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대부분
자신이 망상분별을 일으켜 생각하는 내용이
그 감각현실이나 실재에 있다고 하는 증세가
우선 급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데
처음에 감각현실이나 실재에 그런 C 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그래서 이제 그 C 가 없다라고 제시한 것으로
내용을 이해한다.
그래서 다시 그것이 아니라고 제시하면
이제 그 C 가 있다라고 또 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망상상태에서는 이 두 극단만
오가면서 망상증상을 증폭시켜 나가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이 망상분별에서 벗어나오는 것인데
자신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라는 판단 자체를
그렇게 망상분별이 진행되는 영역에서 세워 놓고
매번 그 문제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문제의 시정이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여하튼 처음 원인 가운데 결과가 들어 있다라는
주장은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거의 유사하다.
쉽게 상황을 설명해보자.
눈이 내렸다 .
그런데 눈을 보니 나중에 물이 되는 것을 누가 보는 것이다.
눈 => 물
또 물은 나중에 얼음이 되는 것도 보는 것이다.
물 => 얼음
이런 식으로 인과의 관계를 처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각 내용을 연결시키는데에는
앞의 내용과 사정이 같다.
그 상황에서 그것을 빼고 넣고 해보면
결과라고 지목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사정을
그가 그렇게 기술하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이 내용을 살피니
이제 어떤 생각을 하는가하면
눈이 녹으면 물이 되는 관계는
다른 경우에서는 그런
a + b => C 의 관계를 보지 못함을
같이 제시하는 것이다.
즉 눈에서만 물을 보게 되지
다른 바위나 나무 등등에서는 그런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니 이제 prince 님과 같은 추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비록 눈에서 물은 보이지 않지만,
그 눈이라고 하는 원인에는
물이 이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일종의 prince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같은 성격을 갖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다른 수많은 인과관계도 다 비슷하다.
봄에 참외씨를 밭에 뿌려서
나중에 참외라는 열매를 얻는다면
그 경우도 또 그런 주장을 하게 된다.
참외 씨를 아무리 보아도
참외가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 씨에는
예를 들어 딸기씨나 사과씨나 등등과는 달리
참외를 나타나게 하니
그 씨에는 이미 참외가 그렇게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if 논쟁의 한 내용이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망상증상을 해소시켜주는가가
문제가 될 때
물 => 얼음을 놓고
물에는 그러니 얼음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
또 반대로 얼음에는 물이 그 안에 들어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이렇게 일단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논의는
중관론도 취급하고
유가사지론도 취급하는데
여기서 취하고자 하는 결론이 무엇이겠는가.
이미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그런 있다 없다의 망상을
제거해내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우선 있다고 하는 주장을 붙잡고
그렇게 주장하는 바탕에서는 이러이러한 상태가
되게 되어 그런 주장이 잘못임을 논증하면
그 상대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1 그 결론이 잘못 도출되었다.
1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낸 추론 과정이 잘못되었다.
1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게 한 전제( 있다 ) 가 잘못되었다.
1 그래서 만일 그렇다면
이제 있다가 잘못이라고 한 것이므로
이것은 없다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 논증과정에서 서양 논리학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나아가버린다.
귀류논증식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귀류논증을 행하는 이유는
직접 밝히기는 곤란한 내용을 놓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와 모순되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망상을 고집하는 것이다.
중관론도 그래서 그런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또 다시 논의를 진행해야 할 사정이 있는 것이다.
1 그렇게 본다면 -- 이제 없다라고 하는 경우를 놓고
또 그것도 잘못되었다고 앞의 방식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되면
그 상대는 상대가 아예 자체적으로 말이 안되는
궤변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또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prince 님처럼 거꾸로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상대가 그런 논증을 했다면
일단 그런 논증에 사용한 추론식이나
그 논증을 출발시킨 전제나
그 논증과정에서 모순을 끌어 내기 위해 중간에 확립시키는
그 명제나
아니면 주장 과정에 사용하는 시설해내는 그 관념이라도
일단 제시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거꾸로 문제를 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의 주장을 놓고
그렇게 문제점을 지적하니
자신도 그런 상대를 붙잡고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임하는 것이다 .
나중에는 그런 결론 자체도
그런 내용들을 바탕으로 꺼낸 것이니
역시 그 결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해서 상대를 재비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이다.
주장자는 처음 그렇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입장은
그런 입장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고 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그렇게 주장하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추론식을 통해
그런 망상을 일으키니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고 제시한 것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비판하는 이는
이를 통해
무엇이 있다 없다라고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여려운 if 항변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망상을 정리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논점이 많게 되겠는가.
비유를 들면
저 사람은 남자라고 하니
저 사람은 남자라고 하면 이런 문제가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문제된다고
그 사람을 붙잡고 신체검사를 할 도리가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하튼 if 문장을 사용해서
그렇다고 본다면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때
그 논의를 통해서
상대는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주장을 통해서
그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고 주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에서 귀류논증법을 사용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 어느 쪽이나 다 망상이므로
다 제거해야 된다고 제시하는 입장인 것이다.
일단 if 항변의 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어려움이 있음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있음'을 부정하면
대부분 어디에 가서 머무는가 하면
이제는 거꾸로 없음 아주 없음 이런 것을
붙잡고 또 같은 망상증상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여기서 먼저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쉬고 또 살피기로 한다.
얼음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
반대로 물에 얼음이 있는가
없는가.
이는 자신이 사람으로 보는 부분을 놓고
거기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문제와 성격이 같다.
이미 if 항변의 한 방식으로
격자 논의를 살폈는데
그것을 놓고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if 논의가 골치가 아픈 사정이 있다.
그 if 논의는 처음 그런 식으로
엉터리 주장을 하는 이의 사정부터
자세히 파악해야 하는 문제가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주고 논의에 임하는데
그 사정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이 논의를 보면 무슨 논의를 하는 것인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무라는 포현을 사용하거나,
열반경에서 상락아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승만경에서 여래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기타 본각과 성불 등등의 내용이 제시될 때도
다 사정이 같다.
중간에서 그 표현들만 놓고 문제를 삼으면
부처님이 자체적으로 자신의 원래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을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자세히 그 사정을 보면
그 부분만 뽑아 놓고
그 전후 내용을 무시하고 있거나
예를 들어 반야심경은
반야경전의 핵심을 제시하는 내용인데
핵심을 뽑았다고 할 때
그렇게 그 핵심 내용을 뽑아내게 된
다른 부분은 무시하고
그것을 대하기에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각 경전의 앞 뒷 부분에 그 내용을 그렇게
오해하지 않게 하는 내용이
다 자체적으로 제시되는데도
그것을 다 무시하고 건너 뛰고
그것을 붙잡고 문제삼는 것이다.
이런 사정처럼 if 항변의 논증을 행할 때는
또 상대가 어떤 바탕에서 어떤 식으로
엉터리로 망상적 주장을 제시했는가를
다 건너뛰고 내용을 대하니
엉뚱하게 그 논의내용을 또 대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잘 이해하자고 임하면
그것 자체가 복잡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
한 수행자가 극락세계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어떻게 보면 지옥에서 중생이 고통받는 과정과
그 성격이나 외관이 같아 보이기도 한다고
보게 된다.
알고보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을 두고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방편 원 력 지 등의 수행을
닦아 나가는 것은
무량행문이라고 하고
와관은 그와 같아 보이는데
현실에서 중생들이 생사를 겪으면서
들이는 그 노력은 왜 그렇지 않다고 보게 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 경계선에 if 항변의 논의가
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통해서
현실에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찾아
그 안에 들어서서
잘 이해하고
그리고 나와 수행에 임하면
그 외관은 전혀 달라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의 중요한 핵심 요소가 차이가 있음으로써
그 내용이 곧 무량행문의 내용이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참고로 본인이 자꾸 반야바라밀다를 닦으면
머리카락 하나로 우주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경전 내용을 소개하게 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이 방안을 알고 있다.
쉽게 사정을 설명하면
TV 를 켜는데 어떤 이가
어떻게 TV 부품을 다 조달해서
그것을 조립하고 그리고 전기를 만들어내서
그것을 연결하고 켜는가
이렇게 어렵게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것을 문제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이 측면은
라이터 화두와 내용이 비슷하다.
그런데 아무리 현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라이터를
자신이 직접 만들려면 힘들다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또 원하면 구하기 쉽고
누구나 그것을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보더라도
그래도 라이터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라이터를 제공해주면서
그 라이터로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놀라고 할 도리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 어떻게 Tv 를 리모콘 버튼 하나 눌러서
켜는가는
사실은 라이터 화두나 도미노 게임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세상의 도미노를 어느 부분을 하나 넘어 뜨리면
다 넘어지게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 하나도 넘어 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면
머리카락으로 우주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그저 꾸며낸 구라성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위 내용을 놓고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사실은 본인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약간 구라성이다.
여하튼 a + b =>C 의
if 항변논의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날 과학자들은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는
인과관계를 통해서
무엇이라고 제시하는 가하면
바로 인중유과론적으로 내용을 제시하고
또 나아가 그것이 곧 객관적 실재요 진리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H2O 라는 화학식으로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자신이 눈으로 내용을 보는 상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단 그 내용을 자신이 확인한 이상
그런 변화를 대하는 눈이 없어도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런 견해가
망상분별의 증상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그 망상이 그렇게 나타난 사정을
다시 근본어리석음 무명을 바탕으로
그런 상태가 전개되고
그래서 그 바탕에서 생사과정이 전개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하는 내용은
따라서 그런 생사를 전개시키는
근본 무명을 수행을 통해 제거해내면
그런 생사를 벗어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환멸연기의 내용이다.
이런 환멸연기의 수행을 통해
그 수행자가 얻는 수행결과를
이계과라고 제시하는데
이것은 생멸변화가 없는 상태로 무위법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언어에 붙잡히는 경우는
그 내용이 아무 것도 없다고 이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으므로
수행을 통해서 얻는 상태가 그렇다고 이해하는 이를 상대로 할 때는
다시 아예 상락아정의 상태라고
그것을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또 이 말을 놓고
또 망상을 일으키는 이는
위 두 내용을 한 없이 오가야 할 것 같은데
여하튼 이계과는 그래서
인과이론에서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상태와
대단히 밀접한 내용이고
또 그것을 얻는 과정은
환멸인이라고 제시하고
그 반대로 망상증상을 증폭시키고
같은 일이고 같은 내용인데도
매번 대할 때마다 생사고통이자
지옥의 고통으로 대하게 만드는 .것을
유전인과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유전인과는
처음 무명을 가지고
이후 전도망상분별을 행하고
생사를 겪는 과정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불교의 12 연기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a + b => C 라는 그런 내용을 놓고
prince 님이 걸리는 방식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면
유전연기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이므로
곤란하고
그 내용이 의미하는 내용을 올바로 관해서
이 두 측면을
모두 수행의 방향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생사 고통을 나타나게 하는 측면은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결과를 낳는 원인을 제거하는 수행으로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이 제시되는 것이고
반대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처럼 임하는 과정은
또 무량행문의 과정으로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처음 이게과를 얻어내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확보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알고보면 이 이계과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어서
어떤 수행으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계과는 결과의 하나라고 제시하는데도
알고보면 결과라고 하기 힘든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본각과 성불의 관계와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망상속에서는 무엇이 생멸하고
그래서 그런 가운데 이계과를 처음 얻게 된다고 이해하지만,
그 망상 밖에서 이 상황을 보면
본래 있는 상태를 가리고 있던 망상분별을 제거함으로써
그렇게 그 내용을 새로 얻는 것처럼
그가 보는 것 뿐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런 이계과를 얻는 원인을
진실견이라고 진실견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학자가
물과 얼음 수증기 눈 서리 등등을 놓고
분별할 때는
H2O 를 떡 제시하는 것이다.
당신의 눈에는 얼음으로 보이지만,
물을 만들어 낸다고 보는 원인으로서 그 얼음 그 안에는
물이 이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하고
그것이 실재도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것을 받아들이고 질문을 해보자.
여하튼 H20 인데
왜 이 상황에서는 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엉뚱한 얼음이나 눈이나 서리나 수증기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인가.
나머지 경우도 다 마찬가지 형태로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떻게 대답하는가.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사실은
여기에도 격자이론을 사용할 만하다.
물은 H2 + O + 좀 많은 열
얼음은 H2 + O + 좀 적은 열
수증기는 H2 + O + 좀 상당히 많은 열
이렇게 구별해 주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어떤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그 모습이 변화하는 과정에
그런 열이 들고 남이 있어서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므로
그렇게 제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놓고 보면
[ H2 + O + 좀 많은 열] 에는
[ H2 + O + 좀 적은 열] 이 들어 있는가.
이것이 격자이론과 밀접한 문제가 된다.
격자이론이란 단순하다.
어떤 이가 어떤 감각한 내용의 한 부분을 붙잡고
그것이 사람이라거나 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부분을 딱 붙잡아 두고
이제 그 부분을 포함해
감각으로 얻은 그 전체부분을 격자로
나누어 놓고
각 격자부분을 이리 묶고 저리 나누어가면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라고 본 부분에서
각 부분을 나눈 다음
손의 한 털을 붙잡고 이것이 사람인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또 발을 하나 놓고 이것을 사람이라고 하는가
이렇게도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각 질문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그 부분들을 다 검은 색으로 칠하면
처음에 그 한 부분이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전체를 다 검게 칠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하면
이것이 사람이 그 감각현실에 '없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일단 이렇게 해서
그런 감각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망상분별하고
고집하고 집착하는 증세를
조금 완화시켜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치면
prince 님처럼 그런 비판을 제시하는 본인을 놓고
총과 칼 도끼를 사용하지 않고
멀쩡하게 있는 사람을 없앤
살인자라고 비판하는 사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또 그런 없다를 놓고
같은 방식을 사용하게도 되는데
이 문제가 바로 있다 없다를 오가면서
각 극단에서 망상을 일으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망상분별 편집증의 일반적인 증상이기도 한 것이다.
여하튼 a + b => C 의 관계를 놓고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세한 논의는 중관론이나 유가사지론 등에 모두
제시되고 있는데
같은 내용을 여기에 복사해 붙일 생각은 없다.
if 항변은 그런 성격인 것이다.
쉽게 그 내용을 따라가 살피면
왜 그 각 내용이 엉터리임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고 보지만,
문제는 그것이 또 다른 망상을 일으키는
내용이 되면 곤란하다는 것만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수행에서 중요한 점은
그러나 오히려 다음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수행자가 행하는 안인 수행의 내용은
금강경과 같은 경전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수행자가 억울하게 붙잡혀
손과 발을 다 잘리우는 고문을 당하는
그런 상황에서
상을 취하지 않고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그 고통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분노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외관만 놓고 보면
이는 어떤 내용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알고보면
지옥에서 중생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외관만 놓고 보면
이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래서 결국 수행자가 생사를 받고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과정은
알고보면
지옥에서 중생들이 고통을 받는 외관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관이 같은데
이것이 실질적으로
왜 차이가 있는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부처님이 갖추는 32 상만 갖추고 있다고 해서
전륜성왕과 부처님이 같다고 이해하는 입장과
문제가 같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 H2 + O + 좀 많은 열]
[ H2 + O + 좀 적은 열]
를 놓고 보자.
외관이 같게 보이는 사정은
이 두 내용에 H2 O 라는 내용이
파악된다고 하므로
그렇게 이해하는 측면과 비슷하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눈을 통해 보면 완전히
그 모습이 서로 동떨어진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자의 무량행문과
지옥에서 지옥중생이 고통을 받거나
수행자가 서원을 추구하며
유희자재신통력을 바탕으로 행하는 수행이나
아귀세계에서 아귀가 소원성취를 집착하면서
고통을 받아가며 행하는 내용이나
외관은 같아 보일 수 있는데
무엇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그렇게 달리 내용을 시설해
부처님이 제시하는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반대로 말하면
바로 이런 사정으로
아주 작은 내용만 살짝 바꾸어 놓으면
지옥이나 아귀 축생세계의 중생들은
곧바로 수행자가 될 수 있고
또 지옥 중생은
지옥이 곧바로 청정한 극락이고 불국토임도
관할 수 있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또 반대로 말하면
청정한 극락이나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도
그처럼 살짝 작은 내용이 바꿔지면
곧바로 지옥 상태가 될 수도 있음도
함께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열쇠가
if 항변 논의에서 대부분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
왜 물고문을 행하는 순간에 물을 맛보고
얼음이 주어지면 또 얼음고문을 당한다고 여기는가.
그 시원하고 상쾌한 물과
그 좋은 얼음을 왜
각 중생은 그렇게 대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물을 취해서
왜 벌은 꿀을 만들어 내는데
왜 뱀은 독을 만들어 내는가.
이런 주제가 다 이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이 없다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극심한 차별과 생사고통을 겪고
그 문제를 호소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
무량한 if 논의의 시발점
무량한 if 논의가 그다지 그 예후가 좋다고 보지 않는데도
원론 부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연구원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 실재가 그대로 감각현실인가.
또는 감각현실이 그대로 관념분별인가라고 물을 때
그렇지 않다고 안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도 쉽게 파악하고
그래서 곧바로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에
들어설 수 있다고 제시하는데
조금 설명이 부족해보인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온갖 것을
다 놓고 보자.
일단 그것이 무엇이던 그것을
a 라고 칭하고 문제삼는 것이다.
그 a 가 그 본 바탕에서는 어떻다고 위 질문이
제시하고 있는가를 잘 음미해야 한다고 본다.
여하튼 그것은 그런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그런 내용들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하면
관념분별영역에서 그렇게 일으켜서 머물고 있는 내용이고
그리고 현실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계속 문제삼는 것이다.
실재나 감각현실을 놓고 다시 살펴보자.
비록 그런 관념분별 a 로서
일정한 부분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정작 그 영역에는 그에 해당한 것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그처럼 생생하게 얻는
그러한 것이라고 단순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나아가
그것이 감각현실처럼 그 내용이 생생하던
아니면
진여실재처럼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것이던
그 모두는 그처럼 a 라는 관념분별의 내용이 아니고
또 그렇게 규정할 내용이 아닌
단지 그런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a 라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들이
그 자신이 현실에서 지극히 집착을 갖게 하고 문제삼는
것들이라고 할 때
그 a 라는 관념으로 가리키는 그 본 바탕의 내용들은
하나같이 일단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이 아니고
또 그런 관념분별의 내용이나
감각현실의 내용이나,
그런 본 바탕의 지위에 있는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또 그런 내용들은 거기에서
그처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의의 핵심에서 그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 a 가 현실에서 지극한 고통을 주는 내용이고
집착을 일으켜 생사 고통을 겪게 하는 내용들일 때
실재나 그 본바탕이 되는 감각현실은
사실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고 있는
묶임에서 풀려나 해탈을 얻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무량한 if 논의에 들어가고
또 현실에서 각 생명이 대단히 집착하고 대하는
그 모든 내용을 논의하더라도
사정은 같은 것이다.
결국은 그 내용에서
위 내용을 보고
그 부분에서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그 바탕에서 다시
무량행문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무량행문은 그야 말로 생사 고통과 무량한 번뇌의 입구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점이 중요하다고 보고
반복해 강조하는데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은
표현으론
실재가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공한 그 무엇이라고
표현할 때의 내용과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에서 자신이 행하는 관념분별이
실다운 것이고
그래서 그에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내용을 제시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반복해 제시한 것이다.
[...]
[...]
시감상 내용처럼
어떤 망상에서 바탕해서
시를 감상하고 노래를 듣는가에 따라
그 때 마다 제각기 다른 의미를 얻어 갖는 현상이
바로 관념분별 과정에서 이뤄지는
변계소집상의 특성이라고 할 만하다.
경전에 보면 미륵보살님이 나중에
설법하실 때 모이는 청중이 대단히 많다고 나오는데
그 때까지 여하튼 같이 애를 써야 하고
이번만 보고 지나칠 일들이 아니고
앞으로 두고 두고 또 보고 보게 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모든 문제를 좁고 짧고 얕게 살피지 말고
넓고 길고 깊게 관찰을 하면서 임해야 하고
그리고 본질적으로 서로 의견이 조금 다르고
이해관계가 달라도
세상의 메르스 바이러스나
문어 오징어 바퀴벌레 등등을 포함하여
일체 생명이
결국은 한 몸 한 형제이고
또 이들이 모두 장차 성불할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다 함께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
경전에 비유하면
누군가 수레 하나를 원할 때
그처럼 핵심 내용이 장착되면
그로 인해
원하는 수레가 그 안에 포함된
우주의 세트 자체를
아예 다 통채로 얻게 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한 것이다.
[...]
[...]
● [pt op tr] fr
힘빠지는 if 논의
물과 수증기 얼음 눈 서리 ... 등을 놓고
이것이 왜 이렇게 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다.
얼음을 녹이면 물이 된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놓고
얼음을 원인으로 본다면
나중에 얼음에는 이미 물이란 결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입장이 있다.
이제 수소와 산소가 화학반응하면 H2O 가 되어 물이 된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수소와 산소의 상태에는 물이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러 내용을 놓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if 논의를 하려면
그 사정부터 헤아려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는
다른 관계에선 그런 결과를 보지 못하는데
자신이 원인과 결과로 묶어 대하는 관계에서는
그런 내용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원인에는 비록 그런 결과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는 그런 결과를 낳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같은 성격을 갖는 입장임을 제시한 바 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데
눈만 뜨면 자신이 늘 대하는 익숙한 모습을 또 대한다.
눈을 감으면 다시 사라진다.
그런데 눈을 감았다고 정말 자신이 그 전에
본 모습이 완전히 전혀 없어진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눈을 감거나 감지 않거나
그 자체적으로 실재한다고 볼 내용이 있을 것인가.
있다면 무엇일까하는 논의에서
prince 님은 아무리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해도
그러나 매번 눈을 뜨고 대하면
자신이 보던 모습을 보게 되므로
그런 실재에는 그런 모습을 얻게 하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그렇게 상응한 형태로
있다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성격이 앞의 내용과 비슷한 것이다.
이상하지만, 얼음을 녹이면 물이 나오지 않는가.
다른 것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러니 얼음에는 그런 물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게 된다는 사정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래는 이런 있다 없다의 논의에
가장 직접적인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를 가지고 논의한다면
그 실재가 그대로 감각현실인가를 한 번 묻고
그 다음
그 실재를 떠나서 그 감각현실을 얻은 것인가를
한 번 또 물어서
스스로 실험하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방안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감각현실이나 실재에 관한 문제는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한 다음
그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일정한 부분을 꽃이다 바위다 이렇게
시설해 놓고
그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에서
가장 직접적인 방안은
그렇게 문제삼는 감각현실을 놓고
또 앞과 같은 형식으로 질문을 하고
스스로 검토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그 일정한 부분은 꽃이라고 하니
그 감각현실이 그대로 그런 관념분별인가를 한 번 묻고
그 다음
그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런 관념분별을 얻은 것인가를
또 한번 물어 보는 것이다.
그에 대해 자신이 답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이 논의는
더 진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 와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있다가 없다. 없다가 있다. 있다가 계속 있다.
생한다 멸한다
등등의 온갖 문제가 다 같은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prince 님의 망상 증상이 이것으로
끝이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리 보아도 꽃은 꽃이고
자신이 차를 타려면 차문을 열고
차를 타고 운전을 하면
차가 움직이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왜 꽃이나 차를 얻을 수 없고
오고 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그런 주장을 붙잡고
if 논의가 진행되게 된다는 사정이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 if 논의를 진행시키는
현실의 망상분별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생각해보자.
수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망상 속에서 일으키는
쓸데 없는 소원과 집착도
그처럼 무량한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해소시켜도
그에 대한 번뇌와 갈증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못한다.
그래서 늘 원칙적인 근본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만 계속 제시하면
또 그 증상이 해소되지 않으므로
수행자가 그렇게 임하지 않고
무량행문을 닦고
방편지혜를 닦아 나가는 사정이
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과 같은 A + B => C 의 관게식에는
이미 그 자체에
앞에는 C 가 없다고 이미 쓰여져 있다.
그런데 주장자가
A + B 안에서 C 가 보인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다.
실재를 얻지 못하는데
자신이 매번 눈을 뜨면
꽃을 보는 이도
상태가 이와 같다.
얻지는 못하지만,
실재는 자신이 얻은 감각현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분별의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두 심정이 같은 것이다.
왜 그런가.
prince 님이 하소연하는 증상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현실에서 살다보면
A + B => C 의 관계를
반복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계에서는 C 를 얻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더라도
A + B 안에는 C가 있다고 해야 한다고
나서는 것이다.
이 이상한 망상증상이
단순한 망상 그자체로만 끝나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후 겪는 온갖 생사고통은
바로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일으키는 것이니
그것을 방치하기는 또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런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다시 그렇다면 하는 논의가 시작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의는 그 자체가
희론의 성격을 짙게 갖게 되고
쓸데없으면서도 복잡한 성격을 같이 갖는다.
처음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그렇게 상대의 복잡한 망상체계에 들어가
그 내용을 일단 받아들이고
다시 그에 바탕하면 어떤 문제가
나타나는가를 일일히 살펴야 되는 것이다.
처음에 문제삼는 그 C 를
문제삼는 그 내용들에서 얻을 수 없는데
일단 그렇다면
하고 그것을 살펴나가는 것이니
그 사정은 복잡하면서
알고 보면 쓸데없는 논의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쓸데없는 것인가하면
그렇지 않다.
그런데 논의가 복잡한 가운데
정작 쓸데없게 되는 것은
복잡한 논의를 하면서
왜 이 논의를 하게 되었는가 자체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런 경우가 대단히 많다.
나중에는 이런 논의를 시작하다가
엉뚱한 데에서
논의 하는 이들이 다른 감정의 전투를
이후 계속 진행해가는 모습도
현실에서 자주 대하게 된다.
무엇때문에 그런 논의를 시작했고
무엇때문에 그런 분야를 연구를 하기 시작했는가도
다 잊어 버리고
이제 논의 자체에 함몰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런 모습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일반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런 망상과 집착을 없애고
생사고통을 벗어나오라는 그런 취지인데
정작 이런 가르침을 놓고
집착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당사자는 그 문제를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옆에서 보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 쉽게 보는 것이다.
다른 이가 갖고 있다고 그가 지적하는 증상과 병이
온전히 그에게 다 있음을
다른 이들은 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IF 논의는 번잡한 가운데
그런 성격을 그 안에 갖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위에서 A+ B => C 의 관계를 놓고
원인인 A+ B 에는 결과 C 가 이미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
IF 논의는 어떻게 진행해야 할 것인가.
일단 상대주장대로 그렇다고 하자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기에
그런 바탕에서 어떤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가를
대신 살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데 그렇다면
원인에서의 모습과
결과에서의 모습이 서로 다른가. 같은가부터 물어보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if 논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 같다고 본다면
어떻다는 것인가.
이것은 쉽게 말하면
물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 경우에는 이것이 무슨 원인이고 결과인가
이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한다면 어떻다고 할 것인가.
유가사지론에서는
이 경우를 다시 다음과 같이 나눈다.
원인 중에 결과의 성품은
아직 생기지 않은 모양인가,
이미 생긴 모양인가,
이렇게 나눈 다음
만약 아직 생기지 않은 모양이라면
곧 원인 중에서 결과가 오히려 생기지 않았는데
이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앞의 예에서는
얼음을 놓고 아무리 보아도
물이 안 보이는데
왜 물이 있다라고 해야 하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생긴 모양이라고 한다면
어떤가.
역시 처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이미 결과가 생겼는데
왜 얼음으로부터 생긴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이치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대가
그 망상증상을 중지한다면 다행인데
그러나 대부분 보면
그 예후가 좋지 않다 .
여기에 맛을 들이면
이후 온갖 IF 논의에 다 뛰어들게 된다.
특히 논의 과정에서 원래 문제삼은
결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논의과정에서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다거나,
상대의 태도에서 기분이 상했다거나
기타 이런 경우
논의는 논의이고
그 논의를 통해서 원래 얻고자 한
변화자체가 그로부터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그런 비판을 한 상대를 붙잡고
계속 물고 늘어지게 되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는 이가 있는가
이런 세속의 말이 있는데
상대의 주장을 놓고
살펴나가면 어디에 문제가 없겠는가
하면서 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증상인가.
자신이 논의 중에 감정의 상처를 받았으니
보복을 해야겠다는 심리일 뿐이다.
원래 이 논의의 취지는
그런 문제를 놓고 그렇게 반응하게 하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그렇게 수행해나가도록 하기 위한
그 방편의 하나로써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데
결과는 그 취지와 달리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점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수많은 논의가 진행되는데
옆에서 보면
같은 분야 같은 주제를 놓고
연구에 임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관계가 원만하게 보이는 경우가
대단히 드물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학회등에서 어떤 발표를 할 때
자신이 발표한 내용을 놓고
다른 학자들이 다 좋다 좋다
대단하다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 상황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하고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대답하기 곤란한 난문을 던지는 이가
누구인가 하면
그 주제에 대해 같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다른 이는 아예 그 문제를 잘 모르는 것이다.
모르면 질문을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듣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 이후부터
서로의 관계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그래서 많은 경우
그런 이들이 나중에 사석에서는
커피 한잔도 같이 안 마시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서로 상대가 기분이 나쁘고
건방지고 ... 등등이라고 삐지고
어떤 경우는 억울하기도 하고
분노가 끓어 오르는데 간신히 참는다.
이런 증상을 호소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실은 IF 논의가
그다지 효용이 없다고도 보게 되는 것이다.
본인도 IF 논의를 하면
이후 예후가 좋지 않음을 많이 경험한다.
방치할 수도 없다고 보는데
안타깝지만
그냥 방치하는 것보다도
이후 상태가 더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정서적인 번뇌가
일으키는 폐해도 심한 것이지만,
견해가 일으키는 번뇌의 독은
그보다 더 날카롭게
그 자신과 다른 이를 해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논의 상대가 그런 상태에 이르지 않다면,
그런 논의를 같이 진행하면
그 자신부터 대단히 곤란하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IF 논의를 자주 진행하는 이들은
현실에서 법가 사상가들이 만나는 운명과
거의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의 견해나 잘못을 시정해준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일단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일단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너는 얼마나 잘났는데...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늘 음해하면서
방해를 한 제바달다라는 인물은
불교에서 대표적인 악인으로 지목되는데
그 제바달다가 세세생생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임한 그 기본 사정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런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제바달다가 무언가를 멋있게 발표하는데
그 내용의 잘못을 부처님이
논파를 했기에 그 뒤부터
그런 증상이 일어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IF 논의는 그런 위험성을 그 안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런 상태가 아니면
그런 방안은 그다지 좋은 방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함께 주의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본인도 가끔 IF 논의를 소개하는데
이후 예후가 안 좋은 것을 경험한다.
현실에서도 안 좋지만,
그외로도 안 좋은 것이다.
그래서 그 복잡한 논의들은
원래 그런 희론의 성격을 갖고 출발한 것이고
그 자세한 내용은 그런 부작용이 조금 덜한
책 안에 다 들어 있으므로
직접 궁금한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된다.
책을 가지고 자신이 스스로 이해하면
그 부작용이 덜한데
다른 이가 그런 내용을 제시하면
삐지는 현상이 심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이 열심히 어떤 주장을 했는데
상대가 그 문제점을 지적해서
자신이 무안해지는 경우는
그 예후가 안 좋게 되는 것이다.
이 증상이 얼마나 오래가는가 하면
상대에 따라서 무한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런 상태라고 보면
더 이상 덧나지 않게 하고
중지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다.
망상증상에서
의심증까지 겹치면
그 예후가 더 안 좋다고 보통 보게 된다.
그런 경우는 무엇을 주어도
다 그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를 놓고 보자.
이미 견해가 달라
시시비비를 놓고 심하게 대립하고 감정이 상해 있는데
그래서 원수로 보는 상대가
자신에게 케익을 하나 선물로 보냈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 그 상대는
처음에 그 케익을 놓고
그 안에 무언가 독이 있지 않은가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다 조사했는데
독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의심은 쉬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경우는 그가 생각하기를
그 케익을 먹어서 살쪄서 뚱뚱해져서
병이 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이렇게 해서 무언가 자신을 엉뚱한 덫으로
유인해 묶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또 보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경우는
아무 이상이 없는 물이나 음식을 먹더라도
그로 인해
자체적으로 자신의 신체 곳곳이
헐고 궤양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는
앞의 사정과 같다.
무엇을 대하던 그렇게 대하기에
그런 상태에 스스로 빠지는 것이다.
입장이 서로 다를 때
처음에는 서로 다 좋게 되자는 의미에서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놓고 논의를 하게 되는데
나중에 의견이 다른 가운데
논의를 진행하다보면
입장이 달라서 감정이 상하게 되고
그렇게 감정이 상하게 된 이후부터는
이후 백약이 무효인 상태로 된다 .
왜 그런가하면
그런 논의에서
감정이 심하게 상해서
어떤 이야기도 그의 귀에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이론상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분노를 일으키지 말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어서
그것을 대부분 그렇게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는
다른 생각이 정지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기지에서 노래를 하나 들었는데
여기서도 무언가 의견과 입장이 서로
달라서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다고
감상하게 된다.
mus0fl--Les Enfoirés - Toute la vie.lrc
결국 이처럼
이러한 사정으로 다른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만리장성을 혼자 쌓아야 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되는 경우를
주의해야 하는데
자비롭다고 하시는 부처님도
그런 경우에 취하는 방안은 마찬가지다.
두 번 정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방치한다.
그러면 알아서
상대가 벌을 받고
알아서 죽고
알아서 이후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된다.
그렇기에 두 번 말해서 안 들으면
부처님도 그런 상대를 그렇게 방치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경전에서는
조금 다른 심한 표현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여하튼 안타깝더라도
그런 상태의 상대에게
더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방치하는 것보다
그 예후가 더 안 좋으니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내용을 놓고
매번 의심으로 대하는 이들이
현실에 많다.
그런 사정으로 대승경전 대부분은
나중에 소설가들이 상상을 통해 기술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그런 견해를 취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이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내용을 놓고
부처님 당시 그러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니
도무지 신뢰할 수 없다고 본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반대로 생각해보자.
어떤 경전 부분을 가려 놓고
어떤 소설가가 그 부분을
그렇게 채워 넣을 수 있겠는가를 놓고
생각해보고
어떤 소설가가 경전 각 부분을
그렇게 정말 잘 채워 넣을 수 있다고 한다면
왜 그 소설가는
그렇게 행할 것인가를 또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그런 소설가도 드물지만,
그런 소설가가 있다고 가정해도
소설가가 그런 내용을 꾸며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이가 생각하듯
그처럼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그 소설가는
정작 그 재주로
그렇게 남 좋은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남이라고 보는 것은
그런 학자가
각 경전은 그렇게 서로 다른 이가
그런 내용을 제시했다고 주장할 때
서로 다른 이가 그처럼 다른 이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자신이 이전 이들보다 더 지혜가 뛰어나서
자신이 그 전 이들이 깨닫지 못한 내용을
새로 깨달아 알아냈다면
그가 무엇하러 그렇게 하겠는가.
이것도 IF 논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그렇다고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가
라고 다시 그런 주장을 하는 이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IF 논의는 다음 질문도 하게 된다.
만일 그래도 이전 이의 작품처럼
보이게 하고 위장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오늘날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문헌학자가 경전을 살피면서
쉽게 알아보듯
왜 근본경전과 대승경전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형태로 위조품을 만들겠는가.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이는
그렇게 볼 사정이 없다는 것도
같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초등학교 수학이나
중고등학교 수학교재의 내용이
다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교재를 집필하는 집필진이나
수학교수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재를
기준으로 놓고 보는 이는
이것을 한 집필진이
이들 각 과정의 교과서를 모두 체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냈다고 보기에는
각 내용이 너무 다르다고 보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만원짜리 지폐가 이미 인기가 대단해서
유통이 잘 되어서
어떤 이가 자신이 만든 딱지를
이에 편승시켜 같이 유통시키기 위해 위조를 하는 경우라고
만일 가정한다면,
그 IF 논의에서는
그 소설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보게 되는가.
그 경우에는
누가 봐도 기존의 만원짜리 지폐와
형태와 내용이 비슷하게 만들어야 할 것인데
그러나
오늘날 학자가
처음 다양한 불교 문헌을 놓고
그것을 문제삼을 만큼
그리고 누구나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소설을 써서
유통시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그런데 오늘날 학자들이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각 경전의 차이나 성립에 대해 문제를 삼고
시시비비의 논의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설령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 현장에 가서 직접 살펴봐도 그 의심은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
왜 그런가하면
지금 당장 현실에서
어떤 글자 하나를 놓고도
똑같이 그 정체를 스스로 확인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아'라는 글자를 하나 놓고
그 글자에 아가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물을 때
이 문제부터 그 당사자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다라니 삼매의 수행도 사정이 같고
심지어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대해서도
입장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아무리 보아도 그 내용을 놓고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거꾸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명백한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임해도
경전에서 방편에 관련된 내용을 놓고
그렇게 제시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사정이 그런가는
거꾸로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거꾸로 놓고 살펴서
그 사정을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제 경전에서는 10 번만
아미타불을 념하면 된다고
제시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 극락세계에 가면
무량한 수명을 얻고
곧바로 일생보처의 수행자의 상태가 된다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1000 원만 내면
수십억원의 당첨금을 준다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 경우 어떤 문제가 그로 인해 일어나는가하면
그로 인해 아미타부처님 앞에는
장삿꾼들만 가득 줄서게 되는 것이다.
장삿꾼들 입장에서
1000 원을 투자해서
10 억이 아니라
2000 원만 얻게 된다는 것이 명백해도
그 앞에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미타 부처님 입장에서는
그런 장삿꾼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극락세계를 만들어 놓는 것이 전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소원을 갖고
갈증을 일으키는 입장은
자신의 소원이 왜 성취가 안 되는가를 놓고
똑같은 상태가 된다.
문제는 그 소원이 하나 성취된다고 해서
그 증상이 없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그렇게 부처님이 소원을 하나 성취시켜 준 다음
그 이후 하나라도 소원이 성취가 되지 않으면
이제 그렇게 가진 기대만큼
오히려 원망을 갖고 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렇게 안 될 것 같지만,
거기에서 예외인 경우가 드문 것이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어떤 범죄자가 처음 법정에서
어떤 기도를 했는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형이 줄어들지 않아서
그 이후 더 극심한 범죄를 이후
그런 종교시설 주변에서 오히려 행해 나갔다고 하는데
그만 유독 그런 심정을 갖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들어주면
또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로 인해 문제가 나아지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의 사정을
스스로 살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여하튼 이러한 문제 증상이
결국 언제 없어지는가 하면
이런 내용 저런 내용
이렇게 저렇게
그저 듣던 내용을
자신이 직접 조용히 혼자 생각해보고
그리고 자신이 자신이 수행을 행해서
그런 내용을 직접 경험해서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그 사정을 경험할 즈음에야
멈추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은 수행자 자산에
그런 항목이 수행자 자산항목으로 나열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 번 경험한 일을
자신의 자산 창고에 잘 보관해두지 않으면
결국 붕어나 치매환자처럼
매번 같은 증상을 반복해 나가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런 사정으로
업의 장애현상을 벗어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님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지혜를 발휘한다고 임하는 경우
대부분 자신의 지혜에 스스로 묶여서
스스로 벌을 받아나가는 상황에 처함을
쉽게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지혜가 없어도
수행의 기본 마음 자세로 임하는 경우는
또 그 반대의 결과가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렇게 똑똑하고
모든 부분에서 잘 했는데
나중에 그처럼 되려면
처음부터 뭐하러 그렇게 했었는가
그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그렇지 않았으면
그 자신도 덜 고통을 받고
그로 인해 다른 이도 덜 고통을 받고
더 나았을 것 같다고 보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IF 논의도 그 성격이 같다.
그 복잡한 논의의 사정이나 배경을
다 그렇게 잘 이해하고 따지고
안다해도
그러나 정작 거기에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논의를 할 때는
그 논의를 처음에 왜 사작하게 되었는가를 늘 점검하고
그래서 그에 바탕해서
그 결론을 이해하고
그에 바탕해 수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나 대부분 논의를 열심히 하는 가운데
본 취지 자체를 망각해버리고
오히려 더 못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중관론에서는 이런 상태를
뱀을 잡으려다가 뱀에 물리는 상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그 논의의 취지인데
오히려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 등만 붙잡고
온갖 논의를 하는 가운데
정작 필요한 수행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대단히 많은 것이다.
현실에서 다라니를 놓고 살펴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 다라니를 놓고
아무리 그 다라니를 또 보고 또 보아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다라니가 범어로 되어 있다고
범어 사전을 펼쳐서 단어 뜻을 파악하고
그것이 다라니의 뜻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다라니의 본 취지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라니를 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가 보시하고 배려한다는 내용을
간단히 보배라고 줄여서
다라니처럼 지니고 다닌다고 할 때
다른 이가 그 말을 듣고
보배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서
보배는 보물의 의미라고 이해하고
그것이 그 의미라고 대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본래 다라니는 뜻이 없다고 제시하는 가운데
그 안에 무량한 뜻을 담아두는 것이기도 하는데
왜 정작 그에 담긴 내용은 제시해주는 경우가 드문가.
그것도 앞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 경우도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내용을 그렇게 다 제시해주면
어떻게 되기에 그런가를
자신이 거꾸로 그것을 놓고 생각해보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다라니를 외우고 수행하면
그에 따라 소원이 잘 성취된다고 임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아무리 외어도 성취되는 경우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정이 바로 그 사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본다.
사실은 그렇게 되어야 그 다라니가
그 효용을 잘 발휘하게 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던 그 사정이나
원리가 같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 스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에서
장삿꾼은 사실 필요없는 것이다.
장삿꾼이 무엇 하나 가지면
그로 인해 장삿꾼이 좋다고 여기는 것은
잠깐이고
그로 인해 길게 그 자신도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다른 이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장삿꾼의 마음을 갖고
그런 내용을 대하는 이들이 행하고 얻는 내용들을
그대로 따라가보면 그 사정을
다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얄팍한 장삿꾼의 계산과
그 장삿꾼이 발휘하는 지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그대로 두면
그가 알아서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을
스스로 받게 된다는 것도
그런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원래 어떤 현실의 방편이나
그처럼 다 선악 무기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전등 하나를 놓고 보아도 사정이 그렇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다.
물도 마찬가지다.
같은 물인데
하늘은 감로수로 보고
아귀는 타는 불로 보고
공수병 걸린 개는 공포를 주는 지옥의 물이고
사람은 그저 물이라고 보는데
그러나 사람에게도 상황에 따라
사막에서는 그 물이 갈증을 해소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수단인데
어떤 곳에서는 사람을 고통을 주며 고문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사정 때문에
같은 물인데
벌은 그 물을 취해 꿀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게 되고
원효대사는
자기전에 마신 물은 갈증을 잠재우는 청량한 음료수였는데
깨고나서 대하니 해골 썩은 물이었다고 보고 토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원효대사님이
굳이 중국으로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의상대사와 헤어져 돌아왔다고 전하는데
그런데 그 현장에서 그 물은
어떤 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1 감로수
1 해골 썩은 물
이 가운데 답이 있다고 보는가.
이는 사실은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을 준 법의 물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답이
무엇인가는
원효대사 외에는 잘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오늘날 정화조의 물을 퍼내서
스스로에 실험을 해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놓고
왜 부처님이 수많은 내용을 제시하면서
그러나 방편에 관한 내용들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드문가.
그리고
질병을 낫고
소원을 성취하는 등에 관련된 내용은 제시해도
내용을 알 수 없는 다라니로 제시하는가도
스스로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다라니를 외우면
소원이 척척 잘 성취된다고 하는 이도
나중에 보면
다라니를 아무리 외어도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이제는 그런 단계나 상황이 아니기에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도 보게 된다.
그리고 수행자가 처음에 수행에 임할 때
기본적으로 행하는 수행은
복덕자량을 얻고
자신의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이 기본인데
그러나 복덕자량이 방편이지
수행자의 궁극 목표가 아닌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그런 사정이 잘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수행자는 어느 단계가 되면
안인 수행을 잘 성취해서
무생법인을 스스로 증득하여
스스로 붙퇴전위에 이르러서 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유치원생처럼 매 문제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에게 매달려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임하면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prince 님이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을 놓고
어떻게 머리카락 하나로
우주를 이동시키는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사정이 간단하다.
현실에서
자동차를 놓고
길이 막혔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할 때
그런데 그 요청을 받은 이는
운전을 못한다고 하자.
어떻게 하는가.
자동차를 움직이려 한다고 해서
자동차 바퀴에 붙어 있는 나사를 붙잡고
열심히 움직이면 자동차가 움직이는가.
아니면 어떻게 하는가.
또 현실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났는데
자신이 수리할 방안을 전혀 모르면
어떻게 하는가.
이 각 경우에
운전할 수 있는 이를 부르거나
서비스 기사를 부르는 것이
방안이 아닌가.
그리고 나서 그 분은
어떻게 하는가를 또 살펴보는 것이다.
머리카락으로 어떻게 우주를 이동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본인은
머리카락을 하나 붙잡고
그것을 그렇게 이동시킬 수 있다고 하신 분에게
부탁을 드리는 것이
그 방안이라고 일단 보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어떻게 어떤 자세로 붙잡고
어떻게 부탁하는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러나 그렇더라도
중요한 핵심은 늘 있는 것이다.
왜 그런 소원의 성취를 바라는가.
그리고 그 소원이 성취된 상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기에 그런 것인가를 놓고
자신이 답을 잘 작성해서
그렇게 진실되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에 해당하는 내용을 놓고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에게 그런 청원을 만일 드리면
앞의 질문에 대한 답 내용이 좋으면
곧바로 성취시켜 줄 것이지만,
답이 어중간하면,
거꾸로 본인에게 이렇게 요청할 것이다.
너부터 네가 갖고 있는
네 것부터 네가 하나씩 들고
원하는 그 장소로 옮겨라.
관세음보살님이 모든 중생에게
그렇게 시킬 것이니까
너부터 그렇게 하면
곧바로 옮겨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답하게 될 것이다.
자동차를 놓고
문제를 그렇게 푸는데
그런 경우는
자동차에 있는 네 짐부터
옮길 장소로 들고 옮겨 놓아라.
바퀴 나사가 네 것이면
그 나사라도 풀어서 그 자리에 옮겨 놓아라.
이렇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알고보면
자동차 운전하는 이는
키를 꼽고 엑셀 페달밟고
원하는 곳에 옮겨 놓고
브레이크 채우고 내리는 것 뿐이다.
또 수리하는 이는
본 네트 열어서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을 찾아내고
고치기도 하고
정 안되면
공장에서 아예 새차를
새로 만들어서 해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경우는
아무리 자동차를 다 분해하고
살펴보아도
방안을 알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핵심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이 하나 해결되면
이제 생사의 고통은 다 해결되는 것인가.
자신도 그렇고
온 생명도 다 그런가.
그것을 놓고 늘
무량한 IF 문제도 살피고
온갖 방편지혜도 살피고
온갖 무량행문의
수행의 문제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는가.
그 내용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동차를 옮겨야 한다고
바퀴를 붙잡고 돌리려고 하는 것이
방안인가.
현실에서 어떤 소원의 성취를 바랄 때
그저 마음의 분별 안에서
자신 혼자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최면과 같은 방안이 하나가 있고
감각현실까지 다 함께 변화시켜서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여기게 하는
그런 방안이 있다.
수행자가
중생의 문제에 대해
뒤의 방안으로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를
여환삼매라고 칭하게 되는데
왜 그것이 삼매로 그렇게 되는가는
앞의 사정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현실에서 전등을 켜는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모르는 가운데
온 벽을 다 더듬거나
전등에 머리를 부딛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대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정지된 한 단면에서
자신이 꽃이나 바위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부터
잘 확인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핵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의
시작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의 열쇠도
얻어내게 되는 것이고
그 이후
기본적인 수행부터 원만히 성취시켜서
자신을 묶어 고통의 생사를 받게 만드는
업의 장애도 해소시키고
복덕 자량을 얻어야
그 이후의 수행이 진행될 바탕이 마련이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 안인 수행의 고지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하면
그 이후의 수행은 더 진행될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하면
또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그 사정의 이해가 쉬운 것이다.
그런 상태의 수행자가 무엇 하나라도 갖고 있으면
그 수행자부터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관련된 중생들이
다 함께 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장님이 자신 스스로 눈을 뜨려고 하지는 않고
왜 불을 안 밝혀 주는가
왜 어두운가만 불평하기 쉬운데
그 사정은 빛을 비추는 태양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장님에게 그렇게 되는 사정이 있다는 것부터
스스로 이해해야
그 상태를 벗어날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이다.
안인 수행이 필요할 때
그 안인 수행을 원만히 마치지 못하면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좀 더 편한 상태로 옮겨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로 인해 오히려
더 심한 상태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 상황은
물을 하나 놓고 실험하면
이와 같다.
같은 물인데 이것을
찬 물에 손을 담고 있던 이가 대하면 따뜻하다고 여기고
더운 물에 손을 담고 있던 이는 차다고 여긴다고 하자.
수행과정에서
어떤 물을 대하는 가운데
그 물이 차갑다고 하면서
못 참겠다고 할 경우
그렇다고 해서
그 수행자가 늘 따뜻한 물을 얻는
장소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감옥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감옥에서 자꾸 불평하고 소동을 피우면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주 만족을 느낄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또 그렇게 해주면
그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후 그로 인해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왜 안인 수행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하는 수행자에게는
더 이상의 수행이 진행될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 하면
그런 상태는 이후
쉽게 원 상태로 물러나게 되기에 그런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방편지혜를 그가 하나 갖고 있으면 그 하나만큼
또 둘을 갖고 있으면 그 둘 만큼
그에 비례헤서
그가 받는 고통과
그로 인해 다른 생명이 받는 고통이
증폭되기에 그런 것이라고
그 사정을 스스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보지만,
자신이 다른 이를 놓고 그 문제를 보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자신의 부모에게 요청한다고
부모는 그 금고 열쇠를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주면 그로 인해
초등학생이 오히려 더 심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수행자가 안인 수행이 요구될 때
그것을 잘 성취하지 못하면
이후 그보다 더 심한 상태에
장소를 옮겨서
수행에 임하게 되는 사정이 있음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바세계는 안인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불국토로서
각 세계의 수행자들이 대단히 좋은 불국토라고
부러워하는 곳이기도 한데
그런데 현 상태에서
대하는 문제를 잘 성취해내지 못하면
그렇다고 장소를 옮겨서
극락세계로 수행을 하라고 옮겨 주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런 수행자는
이제 무간지옥이나
아귀 축생계에서부터
다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누구나 보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보살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중생들의 선근이 자체적으로
성숙할 때쯤
하산을 하셔서
제도하겠다고 임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대략 56 억년 정도 된다고 하니까.
생각해보면
무량 겁 수행을 놓고 보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왠만하면 수행자가 비명을 지를때
미륵보살님이 타월을 던지면서
자신을 구해주시기 위해 나타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경우는 드문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있어서 병이 걸리면
환자가 생각하기를
아무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없는
무균실에서 자신을 살게 하면
좋으리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되면
이후 그 환자는 그 무균실에서 벗어나오면
생활할 도리가 없고
곧바로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연두가 무서운 병이었을 당시
천연두를 낳게 한 백신은
사실은 그런 환경에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던 목동들의 상태를 보고
제너가 백신을 찾아내서
오히려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기도 하다.
[...]
[...]
[...]
[...]
[...]
수행에 임하는 연구원들은
다양한 경우를 놓고 수행방향을 잘 선택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
본인부터 그런 예외가 아닌 입장에서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는 바는
실재가 그대로 감각현실인가.
실재를 떠나서 감각현실을 얻는가의 내용을 놓고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하고
조견 오온개공한다고 할 때
자신의 손가락을 쇠톱으로 잘라갈 때
정말 도일체고액과 무유공포의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수행부터
정진하고
안인을 원만히 성취한 이후부터
MUN 님 옆에 같이 임해야 한다고 보게는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애 쓰는 것은 같은데 효과가 안 나오는 것이다.
순서를 뒤바꾸어서
단계가 되지 않았는데
교재를 엉뚱한 것을 붙잡고
지옥의 공 수행부터 먼저 임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수행자도 자신의 단계에 맞지 않으면
다른 중생을 제도한다고 임하다가
입장이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
다 미래에 성불하고
아미타불과 같이 된다고 해도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농사를 짓는 이도 밤늦까지 애쓴다는 내용을 취하여
수행에 힘쓰되,
그렇지만, 경로를 달리해서
MUN 님과 떨어져 수행을 해야 함도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생각해보면 그냥 책을 보면 되고
논서가 이해가 안 되면
그냥 경전을 펼쳐보면 되고
경전이 이해가 안 되면
또 다른 경전을 보면 되고
그것도 잘 안 되면
그냥 바위나 꽃을 놓고
정체가 무언가를 연구해나가면 되고
그런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농사짓는 이가
열매가 다음날 당장 열리지 않아도
씨를 뿌리고 밤늦게까지 노력하는 정신으로
수행에 임하면
되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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