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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의 핵심-다라니와 삼매 본문
sfxx--방편의-핵심다라니와-삼매.txt.htx
sfxx--방편의-핵심다라니와-삼매.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52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방편의핵심-다라니와 삼매
요즘 로봇산업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그래서 현실에서 행하는
많은 힘든 일을 로봇에게 대행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는 이런 시대가 되면
할 일이 없게 되어 굶어 죽지 않게 될까 걱정한다.
사실 이런 걱정이 기우인 것은
굶어 죽을 것이 걱정인 이들이
그렇게 굶어 죽지 않으려 하기에 기우인 것이다.
로봇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사용된 것이다.
반야경전에서는 수선다부처님이 이미
이런 로봇을 사용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런 로봇 부처님은
보살들에게 수기도 줄 뿐 아니라,
일반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과
그 공덕이 동일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 77. 육유품
이런 경전 내용 뿐만 아니라
일반 현실에서도 이런 로봇을 많이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그냥 사람이 들고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이동시킬 때
사람들이 수레를 사용한 것과 사정이 같다.
그렇다고 그 전에 같이
그 짐을 들고가던 이들이
이런 수레가 있게 된 것이
자신에게 일을 뺏고
손해를 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수레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은 힘을 덜고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을
찾아 더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써야 할 일은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또 달리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트랙터를 몬다거나
지게차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이 다 마찬가지다.
로봇은 여기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일 뿐이다.
요즘 암기나 재생이나 계산 분야에서는
컴퓨터를 사람이 따라잡기 힘들다.
그래서 다라니나 경전 암송을
컴퓨터에 맡기면 어떨까.
그것도 좋은 방안인데
그러나 그 효능이 자신에게 발휘되고
그것이 컴퓨터의 소유여부에 의존하지 않고
언제든지 가능하려면
역시 다라니는 자신이 외울 도리 밖에는 없다.
현재 새로 다라니를 외우는데
기존에 장소에 부착시켜 외었던
다라니가 조금 불편해서
늘 확보되는 장소로
다시 이를
중복해서 저장해두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자신이 어디를 가도 늘 확보된다고 보는 장소는
역시 자신의 몸이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1 나나바 모마 마옴살 수나
11 바나혜 살아 살마다 아노
21 가이마 살마 마구도 마다
31 지새자 마목 이실아 바불
41 호호사 실소 모모미 나타
51 파사싯 사마 싯새사 나사
61 마실사 파사 자사파 사나
71 사마사 나나 바새사
전부 78 구로 되어 있는
다라니를 첫글자만 떼어서
몸에 부착시키는 작업이다.
원래 다라니 자체에 뜻이 없는 가운데
무량한 뜻을 담는다고 하는데
첫글자만 떼낸 새 다라니도
사정이 같다.
다라니 첫글자만 떼낸 다라니에
다시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잘 외어지지 않는다.
결국 잘 외우려면 억지라도
시감상을 잘 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잘 기억이 되도록 하고
신체를 100 등분한 가운데
그 각 다라니가 몇번째 방에 들어 있는지
바로 바로 꺼낼 수 있도록
평소 훈련을 해야 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잘하면
정작 컴퓨터는 그렇게 잘 행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이것을 사람이 매 상황마다 잘 이용하려면
사람 자신이 자신의 마음에
잘 기억을 해두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다라니를 아무리 보아도
그 의미를 모르겠는데
그것을 외우면 무엇하는가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라니의 효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 의미를 아무나 쉽게 알면
그 다라니는 가치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금고를 여는 열쇠가 있을 때
이 열쇠를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경우와
사정이 같게 된다.
주인도 열고 도둑도 열고 아무나 연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다라니는 그런 의미도 갖고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 방대한 방편지혜를
짧은 다라니에 저장해 두고
그것이 오로지 선한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통제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다라니가 그 안에 담고 있는 방대한 내용은
그 다라니를 처음 제공해준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고
이 다라니를 수행자에게 전해줌으로써
그 사용권을 수행자에게 넘겨 준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단은
그것을 잘 외어서 사용하면 되는 것이고
다라니를 잘 사용하는 가운데
점차 하나하나 그 다라니에 담긴 내용을
익혀 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라니에 담긴 효용을
당장 수행자 자신이 사용하는데는
다라니를 잘 외우고
다라니를 전해준 분이 가르쳐 준대로
그 다라니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수행자가 거꾸로 자신이 다른 중생에게
그런 다라니의 효용을 베풀고자 할 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다라니 수행이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시 그 다라니에 담긴 내용 자체와
그 원리까지 익혀 나가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수행자가 기존 다라니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결국 삼매를 통해 그 방안을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라니와 삼매는
수행자가 무량행문을 닦아나가는
두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자가 방편지혜를 닦아나갈 때는
이처럼 다라니와 삼매에 의존해
그것을 닦아 나가지만,
그것을 익히고 나서도
역시 그처럼 보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라니 자체가 무량하기에
수행자가 무량행문에서 익혀야 할
내용이 무량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하나의 다라니에 담긴 내용도 무량하기에
역시 수행자의 무량행문은 다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바나혜 살아 살마다 아노의 비밀
수행자가 닦는 무량행문은
방편이고
그 방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닐 뿐더러
그 방편은 선악 무기의 성격을 가져서
반드시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지엽적인 것이고
그 지엽적인 내용은 상당히 하나하나
방대한 내용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라이터 화두를 놓고 생각하면
라이터 하나를 만드는 방안만 해도
얼마나 복잡한가.
재료는 어디서 얼마에 구하고
어떻게 조립하고 어떻게 판매해야 하는가를 놓고
이에 관한 지식을 모은다면
그것도 백과사전 하나의 분량이 될 것이다.
그런데 라이터를 만들어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좋게 편한 생활을 위해
사용될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시장에 내놓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는 문제다.
항공기에 탑승할 때는 라이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 이유도 그런 것이다.
아윈시타인이 e=mc2 이런 이론을 발표할 때
그는 그것이 좋은 내용이고 진리라고 생각하고
발표한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두통을 앓는 원인의 제공자는
사실은 이 아윈시타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에디슨도 마찬가지다.
에디슨이 전등을 개발할 때도
좋은 것이라고 그것을 개발한 것인데
오늘날 밤에 범죄를 행하는 이들이 이 전등을
사용하여 그 피해를 키우는 것은
역시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들이 각기 좋은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그런 부분이 하나라면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나쁜 목적에 사용되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호신도구를 가질 때
그것만 보면 좋은 것 같은데
바로 그것때문에 오히려
더 심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이 오히려
다른 이를 해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누구나 보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방편에 관련된 내용은
다라니와 삼매의 형태로 그것을
수행자가 익히고 그렇게 보존해야 한다고 제시
되는 것이기도 하다.
좁고 짧고 얕게 어떤 것을 관찰하면
자신이 무언가가 어디엔가 좋은 효용을 갖는다고
그것을 사용하게 되지만,
방편적인 지혜에서는 그런 예외가 없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의술도 사정이 같고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반대로 보면 세상에서 나쁘다고 보는 것도
또 사정이 같은 것이다.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을 그것만 놓고 보면
그것을 아예 만들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그 물질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또 현실에는 대단히 많은 것이다.
[...]
옥상에서 쉬면서 노래를 듣는데
담배를 무엇하러 그렇게 피우는가.
이런 메세지를 전하는데
이것도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것은 또 반대로 보면
세상에서 좋다고 보는 어떤 약도
다 부작용을 갖고 있고
죽을 만큼 섭취하면 죽는 것은
어떤 것이나 다 사정이 같은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실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좋다고 섭취하는 것들이 그를 죽이는 것이고
어떤 이를 결국 죽음에 몰고 가는 사건도
대부분 자신을 지켜준다고 보고 대한 것들이
모두 그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것임을
현실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듣는 입장에서
그 자세한 내역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하면
원래 그를 잘 도와주고 지켜준다고 하던 이들이
그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준다는 사정을 보는데
그것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나중에 보면 자신을 해치는 이들은
아주 멀리 있는 어떤 괴물형상을 갖고 있는
외계인이 자신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늘 사랑하고 좋아하던
아주 친근한 것들
즉 자신이라고 본 자신의 몸
또는 자신이 대단히 애착을 가진 것들이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런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다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무량한 if 논의에 임하면서
논의는 필요하지만
핵심적이지 않고
지엽적이면서도 복잡한 논의를
조각글에 써나가기 위해
새로운 체계를 마련했다.
지금과 같이 적어나가는 방안이다.
이로써 일부 연구원들이
가끔 문제를 제기하고
올린 글들을 모두 통편집처리하는 문제점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방편지혜라는 것은
예를 들어 공터에 황금이 널려 있고
이것을 누구나 다 갖고 싶어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얻어내는가.
또는 질병이 걸렸는데 이것을
어떻게 빨리 완치하는가
이런 것과 관련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원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것만 바라보고
그에 집착되어 있기에
그것을 성취해서 자신이 좋음을 얻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놓고
자신이 다른 이들의 입장이나
다른 순간 다른 측면에서
스스로 되살펴봄으로써
그 문제를 쉽게 알 수 있다.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이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온 측면이 다 좋아야 하는데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해 위 내용 가운데
어느 부분인가가 좋지 않고 나쁘다면
말 그대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해결해야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생명이 대단히
집착하고 갈구하는 소원은
대부분 위 성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당장 이 측면에서 좋다고
집착을 갖는것이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소원이 잘 성취되지 않는 것은
반대로 보면
바로 이런 부분이 그 성취를 장애하는
장애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설령
그 소원이 성취되더라도
그 반대의 힘에 의해
곧바로 붕괴되고 무너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구조로 소원을 갖고
추구하는 경우는
대부분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서
묶여 지내게 될 도리 밖에는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소원이 성취되는 과정은
그 자신에게는 아귀의 형태가 되고
그것이 다른 생명에게 손해나 불쾌를 주는 경우는
다른 생명과 얽혀
자신에게 고통을 주게 되어 지옥세계에
묶여 끌려가는 원인이 되고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소원만 집착하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을 의미하기에
축생 세계에 묶이는 원인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 상태가 가장 심한 것은
현실에서 성추행범이
그런 범죄를 반복하는데
그가 왜 그 행위를 반복하는가 묻는 수사관의
질문에
그것이 너무 좋아서
그런 충동이 일어나면
스스로 억제할 도리가 없고
도저히 끊을 도리도 없다.
이렇게 답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니 수사관이 이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충동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서
거세를 하려고 한다거나
그런 충동이 일어나도 도저히
그가 그런 일을 행할 수 없는
감옥에 가두어 놓는 방안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뵤면 그 사람을 죽 따라가면
그가 그런 충동을 일으켜
소원을 성취하고 그 이후
그 성취로 인해 그런 고통을 겪게 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아귀가 갈증을 일으키다가
그 물이나 음식을 먹으면
그로 인해 목이 불타는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 있는 경우는
그 자신의 실질이 아귀인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계속하면
그로 인해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고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도
이를 통해 그 이치를 여전히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고 임하면
그 실질이 축생의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계속 머물면
그 성향이 나중에 그 자신을
그런 세계로 묶어 그런 세계에서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 살아가게끔
변화를 시키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축생계는 그렇게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되어
서로 자신보다 더 강한 다른 생명체로부터
해침을 받고 묶이어 고통을 받는 상태를
두려워하면서 그렇게 좋음을 추구하는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축생계의 원리인데
축생의 수가 현실에서 많아 보인다고
그 원리가 일반적인 삶의 원리로 알고
그렇게 임하면
그 스스로가 축생의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어떠한가하면
그와 반대의 원리로 삶을 살아가는
생명이 대단히 많고
경전상에는 미세 공간에 가득하다고 제시하는데
정작 왜 자신은 그런 존재를 잘 보지 못하는가하면
자신부터가 그런 상태가 아니기에
그런 존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귀가 먹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옆에서 큰 음악을 틀어 놓아도
자신의 눈에는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에 임하는 경우와 같다.
또 장님은 반대로 소리는 크게 들리는데
그러나 무엇이 지금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다라니를 외우기 위해서
방을 만들어 놓고
그 각 부분에 다라니 첫글자를 배정시키고
외우는데
다라니란
뜻과 관계없이 무조건 그 소리를 외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외울 때도
무조건 외운다고
그 소원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다라니를 외울 때도
그것을 제공한 이가
요구한 방식을 따라
진실되게 외우고 념을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 다라니가 길다고 해서
자신이 함부로 짧게 줄여서
형태를 달리 하여 외운다거나
원레 제공한 것과 다른 형태로 바꾸어
외우는 것은
그 효과가 발휘될 수 없다고 보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119 를 번호를 눌러야
소방소 대원이 출동하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시간이 없고 바빠서
11 만 누르면
소방대원이 자동으로 알아서
자신의 집을 찾아와 불을 꺼주는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가하면
이런 다라니를 통해서 성취되는 내용은
사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그 중생이 이를 통해
끝내 무여열반에 이르고
보리의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시설되는 내용들이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당사자는 질병이 낫는 것이
가장 최고의 목표상태라고
그 상황에서 생각할 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본래 그런 병은 얻을 수 없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음에도
중생이 망상분별 속에서 그런 증상을
갖게 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또 그가 그 질병을 그렇게 낫는다고 해도
나머지 모든 문제가 그로 인해서
좋은 형태로 해결된다고
볼 도리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런 상태는 차라리
조금 더 질병 상태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볼 경우마저도 있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히틀러 같은 이가 건강하고 장수한다면
더 많은 유대인을 고통을 받게 할 것같은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돈만 내고
어떤 처방전만 내면
병을 고쳐준다는 경우와는
다라니의 사정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다라니가 어떻게 그런
각 생명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가는
사실은 그 다라니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알아낼 도리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라니가
아무리 보아도 뜻도 알 수 없고
외우기도 힘들다고 하지만
소원성취를 위해서
어떤 수행자가 그 다라니를
정성스럽게 외우기 시작하면
이미 그렇게 외우는 것 자체가
그를
무여열반에 가깝게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뜻을 모른다 .
그런데
자신의 소원성취가 간절하기에
그것을 외어야 한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서 외운다고 하면
그렇게 다라니를 외울 때
그 외우는 마음 자세가
그를 곧바로
준 삼매의 상태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앞에도 이상한 어구를 적어 놓았는데
뜻도 모르는데
외워야 한다고 하고
외운다면
일단 자신이 정신이 산만한 상태에서는
그것을 도저히 외울 도리가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래서 외우려면 일단
자신의 마음이 정돈이 되고
집중이 되어야 그것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의미가 그것이 있다면
쉽게 외울 도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의미도 없는 경우는
상황이 더더욱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외우려고 하면
그 마음이 그에 집중하게 되고
그 상태가
곧바로 삼매의 상태로 그를
진입시켜 주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그런 전도망상과 집착을 일으키게 한
근본 원인이 되는 번뇌와 잡념을
제거시켜 사라지게 해주는
사마타의 효능도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라니를 외우면
기본적인 효과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이런 소원의 신청을 접수받는 입장에서
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그가 소원이 성취된 상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검토해서
그것을 곧바로 신속하게
성취시켜 주게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119라는 숫자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기에 불이 꺼져야 할 원리나 방안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번호를 누르면
관련된 소방대원이 출동해서
최선을 다해 불을 꺼주는 것과
다라니는 그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또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다라니를 철저히 외우고
철야 기도를 한다해도
왜 그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고
그 소원이 성취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 답 내용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리고 나아가 그 수행자가
최종적인 수행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는
그 다라니는 아무리 외어도
효용이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까지
이런 다라니를 외어서
그것이 뜻대로 다 성취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왜 어떤 경우는
아무리 다라니를 외어도
성취가 안 되는가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입장에서
그 사정을 스스로 되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 다라니를 외우는데
그 다라니를 떠듬떠듬 외우는 가운데
다시 첫글자를 때내
각 방에 배치하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기억의 희미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양한 방안을 동원하면
조금 더 쉽고
오래 기억하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여러 효용을 함께 갖게 되는 측면이 있다.
다라니 각 구절이 또 있는데
그 첫 한글자를 대할 때
나머지 글자가 다 생각나게 하면서
외어야 하는데
이것이 외어지면 어떻게 되는가하면
그것이 바로
어떤 외국어를 하나 익힌 것과
같은 효과를 또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언어 자체나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의 수가 적으면
그 범위에 그 스스로 갇히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많은 것이
결합되면
예를 들어
'아'라는 글자나 소리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수많아지고 나중에는 무량하게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사실은 이것이 다라니의 원리이기도 한데
그럴려면 그런 훈련이 먼저 필요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바나혜 살아 살마다 아노란 어구를
지금 외우는데
각 한 글자가 긴 어구를 또 꺼내와야 한다.
그런데 처음 이것을 외울 때는
일단 이 자체는 이 자체대로
또 죽 외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글자는 각 방의 위치에
정확이 위치해서
각 방에는 무슨 글자가 있는가를
바로 바로 알 수 있게 되어야 한다.
15 번째는 무엇? 아 -> 아예염
이런 식으로 바로 바로 알아야 되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처음부터 다 꺼내야 한다거나
바나헤 살아 이렇게 외운 내용을
꺼내면서 손가락을 꼽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가 확고하게 자리잡으면
마치 한국어를 확고하게 익힌 이가
그것을 통해 다른 수많은 내용을
파악하게 되듯
부수적으로 이런 힘을 이를 통해서
갖게 되는 것이다.
지금 노래를 듣는데
불어를 잘 말하는 이는
본인이 감상하는 내용을 잘 모르고
또 한국어와 불어를 다 잘하는 이도
역시 그것을 잘 모를 수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한국어를 아는 이는
또 반대가 된다.
왜 사정이 그런가하면
한국어를 이미 알고 있는 이는
모르는 소리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관련시키고 연상시켜서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없다거나
그런 내용이 있어도
달리 불어를 잘 알아서
불어의 의미가 더 명확하게 들어오면
그렇게 잘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상태가 나은가하면
원하면 어떤 형태로던 다 의미를
꺼내 가져올 수 있는 형태가 좋고
그것이 무량하면 더 좋은 것이다.
음악을 모르는 이가
교향곡을 들으면
그저 시끄럽다라고만 느끼기 쉬운데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직접 이 악기 저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소리가 섞여 있어도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대로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다 분별해 감상하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어떤 부분이
조금 이상하다 아니다까지
다 찾아내면서 감상을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원래 수행자는
나중에는 귀는 1200 공덕
눈은 800 공덕 이러면서
단순하게 들린다 보인다 이런 상태가 아니고
그런 상태로까지 나아가고
눈만 예를 들면
단순히 육안으로 보는 눈만 문제삼지 않고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이렇게 눈의 종류를 나열하고
천안의 상태는 근시이고
헤안은 원시이고
이런 식으로 분별하면서
각각 필요한 렌즈를 구해서
착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옆에 자신을 해치려는
귀신이 옆에 붙어 있어도
자신은 아무 일도 없다고 여기는 것은
일단 무슨 눈이 없어서 그런가하면
천안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 병원에서 사용하는
x- ray 기기가 없어서
몸 안에 병이 있어도
자신은 보이지 않기에
그런 것이 없다고 하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
다라니를 외우는 과정에서는
다음 노래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된다.
○ [pt op tr] ▼mus0fl--Taxi Girl - Chercher Le Garçon.lrc
일단 다라니를 자신이 마음대로
개조해서 외우면 곤란한데
적힌대로 그대로 소리내어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라니가 제시될 때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요구한 방식을
그대로 준수해서 외우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약을 콜라와 같이 먹으면
안 되고
식사 후에 먹으라고 했는데
환자가 콜라와 같이 먹고
공복에 먹어서 그 약으로 오히려
위에 구멍이 뚫리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위 다라니도 사정이 같다.
원레 대장경에 제시된 형태로 잘
방식을 준수해서
외워야 하는데
자신 마음대로 다라니만
하나 잘 외우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마음대로 외우면 오히려
곤란한 것이다.
해당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을 준수해서
외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만일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동남·동녀가
이 주문을 외우고 지니려면,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고
먼저 마땅히 저(관세음보살)를 향해
이러한 원을 발해야 하나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빨리 모든 법을 알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일찍 지혜의 눈을 얻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빨리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일찍 좋은 방편을 얻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빨리 지혜의 배에 올라타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일찍 고통의 바다[苦海]를 건너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빨리 계(戒)가 충족된 도(道)를 얻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일찍 열반산에 오르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빨리 무위의 집[無爲舍]에 들기를 원하옵니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제가 일찍 법성신(法性身)과 같아지기를 원하옵니다.
제가 만약 칼산[刀山]지옥을 향하게 되면
칼산이 저절로 꺾어지이다.
제가 만약 화탕(火湯)지옥을 향하게 되면
화탕(火湯)이 저절로 사라지이다.
제가 만약 지옥을 향하게 되면
지옥이 저절로 없어지이다.
제가 만약 아귀를 향하게 되면
아귀는 저절로 배가 불러 만족해지이다.
제가 만약 수라를 향하게 되면
나쁜 마음은 저절로 길들여지이다.
제가 만약 축생을 향하게 되면
저절로 큰 지혜를 얻어지이다.
[ 한문으로 외우면 좀 더 짧아 외우기가 쉬울 수 있다 .]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智慧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善方便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乘般若舩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越苦海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得戒足道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족도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登涅槃山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열반산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同法性身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
我若向刀山 刀山自摧折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我若向火湯 火湯自消滅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我若向地獄 地獄自枯渴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
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
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
我若向蓄生 自得大智慧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이렇게 원을 발한 다음
지극한 마음으로 제 이름(관세음보살)을
입으로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며[稱念]
다시 저의 스승 아미타불을
입으로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한[專念] 후에
이 다라니 신주를 외우되
하룻 밤 동안 3*7 (21) 편이나 7*7 (49) 편씩 외우면
몸 가운데 있는 백천만억겁토록
나고 죽으며 지은 큰 죄가
없어질 것입니다."
K0294V11P0964b01L;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智慧眼
출처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佛說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陁羅尼經)
≪K0294≫ ≪T1060≫
● 대비심다라니주의 여러 판본에 대한 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682#001
sfed--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_K0294_T1060.txt ☞대비심다라니
sfd8--불교경율논코너sp_2558_12.txt ☞ ☞● 대비심다라니주의 여러 판본에 대한 문제
내용을 잘 살펴보면
조와 속이 번갈아 반복되는데
일찍과 빨리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제 마음대로 바꾸면
별 탈이 없다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그래서 수행자 승급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례가 간혹 있다.
혹자는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이런 부분을 놓고
이런 좋은 소원은
자신(我)만 가질 것이 아니고
여럿이 다 함께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원 오등(吾等-우리들) 이런 식으로 바꾸어 외우기도 하는데
그 취지가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한국에서 불날 때 119 로 전화 걸지 않고
911 전화걸어서 소방대원 요청하는 것과 상황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정 그런 취지를 담으려면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
이 부분에서 아를 조금 길게 아~ 이렇게 발음하면서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
나쁠 것은 없는데
함부로 고치면
이것이 습관되면
제멋대로
경전이나 다라니를 함부로 위조하고
위경을 편찬하는 결과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럴려면 차라리
관세음보살님에게 요청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이름을 그 부분에 넣어서
나무●●● 이렇게 시작하는 구절을 만들어서
다른 이에게 제공하는 것이
낫다고도 보게 된다.
mun 님이 이런 형태를 보이기에
이런 주의를 여기에 덧붙이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끔 축약형 다라니도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만의 새로운 다라니도 만들어
유포시키는데
최근에 본인이 하나 받은 것으로는
침인용보배
이런 다라니도 있는 것이다.
침묵하자. 인내하자. 용서하자. 보시하자. 배려하자.
이런 의미라는데
여하튼 그래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mun 님이 본인에게 그렇게 임하지 않을 때
그 내용을 제시하면 조금
상태개선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하튼 경전에 제시된 원칙을 준수해야
그 다라니가 효과가 있는 것이므로
자신 마음대로
외우면 원칙적으로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지금 다라니를 외우기 위해
이 다라니를 새로 앞글자만 떼어
축약했는데
그대로 되겠거니 하고
몇 번을 외우라고 했는데
1 번만 외우면 되겠지 이러면
약사가 준 약을 그렇게 자신 마음대로
변경시켜서 섭취하는 것과
상태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속과 조의 의미는
속도를 빨리와
시기를 일찍이라는 다른 의미인데
그러나 알고 보면
여기에 관세음보살님이
처음 수행자로 진입하던 당시의
사연이 깃들여 있다고 시감상을 하게 된다.
당시 무인도에 버림을 받아
동생과 함께 죽게 되었을 때
그 때 자신들을 버린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일체중생을 이런 위난으로부터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일으키고
죽음으로써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수행이
시작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 불행한 사고의 현장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형제의 이름의 첫글자가
조와 속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조속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라도 잘 외우고
홀짝 위치를 잘 잡아야 하는데
- 이는 조속히라는 말과는 순서가 반대다 -
이렇게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관세음보살님이
동생의 이름을 먼저 그처럼 앞세우고 있다고
시감상을 하게 되는데
알고보면
그 동생분은
지금 대세지보살로 활동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이 분들이 상당히 무서운 형제 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
그 수행을 시작한지
지금 우주가 몇 차례 성주괴겁을 반복하는데
이상하게
우주가 성주괴공을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버림을 받고 죽음을 당했던
그 섬이나 그 장소도
다시 재현이 그렇게 다시 나타나고는 한다는데
무생물에 적용되는 성주괴공의 이치
즉 땅과 바다나 우주가 생성되고 멸하는
인과의 이치가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하튼 다라니를 외울 때
경전에 제시된 내용을 제시된 방식으로
외어야 하는데
이 부분을 다 빠뜨리면
다라니만 열심히 붙들고 외어도
별 효과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사실 관세음보살님 입장에서는
중생의 업의 장애를 해소시켜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것은
그 취지가 앞 부분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상도 갖지 않고
나와 남의 차별을 갖지 않아야 하는데
개별중생이 그런 망상을 갖고 있기에
부득이 그런 내용을 넣은 것인데
mun 님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등이라고 바꾸는 것은
이 부분에서 큰 문제가 없다고 해도
그 의식자체가
대단히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을 자신이 해야 하는데
우리가 하자 이런 식으로 의식하는 것과 같고
정작 보면 자신은 안 하는 사례가
현실에 대단히 많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연구실 청소를 하자.
이렇게 해놓고
정작 지켜 보면 자신은 안 하는 것이다.
우리 이런 서원을 갖자 이렇게 해놓고
자신은 또 대충 임하는 의식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세상 사람 다 그런 서원을 안가져도
자신만은 그런 서원을 갖고
임해야 갰다 이렇게 임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제시된 내용을 잘 보면
사실은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중생이 소원을 가질 때
왜 그것을 성취시키고자 하는가.
그 소원이 성취되면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 그 내용임을 쉽게 보는 것이다 .
그래서 사실은
이 내용이 핵심인 것이기도 하고
그 취지를 잘 이해하면
왜 위 노래에서
소원을 성취를 돕기 위해 활동하시는 분들이
사실은 다라니보다
핵심 내용이 담긴 산문체 경전 내용을
더 존중하는가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방편으로 제시되는 다라니도
그 자체에 다양한 의미와
효용이 들어 있으므로
이것을 정성스럽게 외우면 당연히 금상첨화
동가홍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본인이 제시한 축약 다라니도
별도로 의미가 깊다고 보게 된다.
현재 외우는 바나혜 살아 살마다 아노의
뜻을 본인이 시감상하기를
자신을 지혜로 관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자신이라고 보는
그 살 하나하나마다
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근본 정신만 그렇게 살고
자신의 몸이라고 본 부분에 들어 있는
수많은 손님들
바이러스 세균 기생충....암세포
및
자신의 근본정신에 들어와 았는
손님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일으킨
엉터리 주인들은
다 고통받는 상태로 끌려가게 된다.
이런 시감상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듯하지 않은가.
mun 님이 자신도 좋게 되지만,
남도 좋게 해야 한다고
원문의 아의 표현을 가끔 오등(우리들) 이런 식으로
바꾸어 외우고는 하는데
자신은 그것이 취지가 좋다고 여기지만,
본인은 그런 자세가 그런 의식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큰 장애가 된다고 보게 된다.
좋은 내용을 자신도 행하고
남도 행하게 권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좋은데
우리~ 이런 의식에는
그런 의식보다는 남에게 무언가를
떠넘기고 조건을 다는 형태가 있기 쉬운 것이다.
[...]
mun 님이 아란 표현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나를 부정하는 자세가 오히려 나쁘다고
명백히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가.
현실에서 문제가 잘 안 풀린다는 경우를 놓고 보면
제 각각 자신이 해야 마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모두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임하는 경우를 대단히 많이 보기 때문이다.
일일히 예를 들기가 힘들고
대부분 그렇다는 사정을 볼 수 있다.
일을 시킨 이는 자신이면서
정작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다 넘겨버리는
경우가 또 대부분이다.
원래 현실에서 얽혀 있는 문제는
제각각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입장을
다 겹쳐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인데도
한 부분만 떼 놓고서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해자의 지위에서는
참미원용사의 마음을 갖고 임해야 하고
가해자의 지위에서는
참서현의 자세를 갖고 임해야 하는데
여기서 참미원용사란
참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함을 의미하고
참서현은
참회하고
온 생명을 제한없이 차별없이 모두 다 좋고 좋게 만들고자 하는 서원을 일으키고
그 서원을 마음과 말로만 그치지 않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실현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느 주체도
이 두 지위를 다 제각각 함께 다양한 측면에서
동시에 갖고 있으므로
늘 이 두 내용을 함께 갖추고 임해야 하고
또 그것은 자신과 관련된 다른 이에게
그것을 같이 요구하면서
그것을 조건으로 그렇게 임하면 곤란한 것이다.
즉 상대가 자신에게 참미원용사의 마음을 갖거나
참서현의 자세를 취해야만
자신도 상대에게 그렇게 임하겠다고 하면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런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 대부분 안 되는 것이다.
상대가 자발적으로 참회하지 않는 상태인데
이것을 억지로 요구해서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선생님이 싸우는 두 학생을 붙들고
서로 사과하라고 할 때
억지로 사과를 한 학생은
그로 인해 더 불쾌감과 억울함을 갖게 되고
나중에 선생님이 안 보이는 곳에서
더 교묘하게 그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계속 해나가게 마련인 것이다.
현실에서 그렇지 않다고 볼 사례가 있는가.
누구나 그런 입장이 되면
그렇게 행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라도 앞과 같이 임하면
그 즉시 그 자신부터 그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그 자신이 풀려나면
이후 상대도 그로 인해 같이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장발쟌에게 신부가 은촛대까지 왜 안가졌갔는가 라고
했다면 신부는 벌써 그런 범죄의 피해로부터
풀려 난 것이고
이후 그로 인해 장발쟌도 풀려 나는 것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처음 신부가 그렇게 임할 때
적어도 신부와 장뱔쟌 사이에서는
그런 사건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지 않으면
장뱔쟌 앞 내용이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현실의 소원을 놓고
방편을 구하는 입장에서
그 묶임에서 풀려나는가에서는
다른 이를 고려하지 말고
자신부터 일단 수행자의 기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리도 다른 이가 그런 수행자의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취지가 좋다고 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그런 수행자의 기본 목표를
갖자고 자신이 생각할 때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이를 대하면
그 자신부터 어떻게 되는가.
공연히 탓을 그런 남에게 돌리고
원망하고 그런 마음을 갖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 혼자라도 세상에 수행자의 자세를 갖고
임하겠다고 하면
사실은 이로 인해 온 생명이 다 함께
제도될 계기가 거기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를 염두에 두고
연대의식을 갖는 것은 여기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자신부터 어렵다고 보이는 수행을 잘 성취하고
그리고 다른 이를 권하고 이끄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상대도 그렇게 해야 자신도 하겠다.
우리 같이 하자.
이런 의식이 일으키는 부작용도
상당히 큰 것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현실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형태로 얽혀서
그 문제가 풀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만 할 도리를 잘 하자.
하나가 제도되면 이로써 도미노 현상으로
관련된 이가 다 제도되게 된다.
현실에서 예수님 한 분
또는 부처님 한 분이
현실의 모습을 많이 변화시킨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남들은 고려하지 말고
자신부터 먼저 잘 하자.
이렇게 임해야 좋다고 보는 것이다.
위 노래가 그런 메세지를 강하게 전해준다고
시감상하는 것은
이 글을 적고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지만,
현실에서도 이런 사정을
주의할 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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