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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현상에 대한 대처방안 본문

연구자료

중독현상에 대한 대처방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9. 5. 2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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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x--중독현상에-대한-대처방안.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53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중독현상에 대한 대처방안을 

드디어 확립했다. 


각 생명이 무엇에 대해 가장 집착을 

많이 갖는가를 놓고 살피면 


자신- 자신의 생명 - 재산 - 가족 

이런 내용들인데 

이것이 현실에서 심각한 중독현상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없어지면 

큰일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지속하던 생활이 

대단히 영향을 받는다고 보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에 들어서면 

그것이 그대로 확보되어 있고, 


또 대단히 좋고 좋은 

한마디로 현실의 생사의 고통을 얻지 못하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현실에 나와 

다시 중독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대할 때 


그 각 대상에 대해 

이전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모든 것을 대할 때 

자신의 복덕자량이 원만히 성취되는 것을 

이해해서 

그것을 잘 성취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중독을 일으켰던 대상을 

그 이전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대하는 한편 


그 내용들에 다시 

더 좋은 내용을 입혀서 대하는 방안을 

추가로 제시할 수 있다. 



이미 수행자의 자산 창고를 나열한 바 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상락아정에 해당하는 자신과 함께 

어느 세계에서나 환전이 되는 자산이고 


현실에서 집착하고 대하던 것들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보자. 

5 살 때 자신이 그 자신의 몸을 가장 

아끼고 집착을 가졌겠지만, 

지금 나이든 이라면 쉽게 사정을 이해하겠지만, 

그것을 지금 이 순간에라도 확보해낼 수 있는가 .


9 살 때 딱지나 장난감에 애착을 가졌다면 

그것을 지금 어떤 자산의 항목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무언가가 그 당시 무언가를 행했던 것이 

오늘날까지 유용한 자산의 형태로 확보된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 생사를 넘어 가치를 갖는 그런 자산형태에 

가까운 가치있는 자산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당장 자신이 집착을 갖는 것들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그 대부분 생사를 넘어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임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의 7 가지 재산[칠재]

또는 10개의 다함이 없는 창고 [10 무진장]

이런 항목은 늘 외우고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칠재는 

신재(信財)ㆍ계재(戒財)ㆍ참재(慚財)ㆍ괴재(愧財)ㆍ문재(聞財)ㆍ사재(捨財)ㆍ혜재(慧財)이고 

십무진장은 

신장(信藏)ㆍ계장(戒藏)ㆍ참장(慚藏)ㆍ괴장(愧藏)ㆍ문장(聞藏)ㆍ시장(施藏)ㆍ혜장(慧藏)ㆍ

염장(念藏)ㆍ지장(持藏)ㆍ변장(辯藏)

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현실에서 대하는 가운데 중독현상을 일으키는 대상 위에 

집어 넣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욱더 좋은 상태가 얻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하는 것은 

자신이 집착을 갖는 대상을 놓고 

그런 내용과 관련시켜서 

의미를 부여해 넣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대상이 

이전에 중독을 일으키는 대상인데 


이후로는 그에 바탕해서 

그에 대해 반응하던 방식과는 반대로 행하는 한편 

다시 수행자의 10 개 다함이 없는 자산 항목을 

그 의미에 포함시켜 넣어 버리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 자신의 신체를 놓고 

현실에서 이것을 가장 소중하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에서는 

그것이 없어져도 

관계없고 


사실 그런 경우에도 

자신의 본 정체에 해당한다고 할 

근본적인 자신은 

상락아정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상락아정'은 무상 고 무아를 제시하는 불교의 기본입장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는 생겨나고 멸하는 것을 떠나 있는 것으로서 

시적인 표현상 그렇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무엇이 그런가. 


이 부분은 이렇게 쉽게 이해하면 된다. 


어릴 때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이나 

자신이라고 스스로 보는 몸이나 세상의 모습은 

쉼없이 변화하는데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담아 얻어들이는 

정신의 정기 자체는 

그와 관계없이 늘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주체가 

갓난아이부터 늙을 때까지 그 모습이 변화하고 

심지어 생사를 바꾸어가도 

그 근본정신은 여전히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진짜의 나를 

찾는 경우에서 그런 진짜의 나는 역시 아니지만, 

그러한 가운데 생사 전 후를 이어주는 

자신의 본 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의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을 다 담아서 얻는 정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 정신 안에 들어온 내용을 놓고 

그 일부를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몸에 자신의 정신이 들어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 생활에서는 

그렇게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보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생각하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이므로 


일단 그렇게 중독을 일으킨 것을 놓고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의 내용을 통해 잘 

그 정체를 헤아리는 작업이 우선 필요하다.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 

그 감각현실이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생각내용으로서 '자신'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그것이 그대로 본 실재의 내용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에는 

그런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고 


또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에도 

그런 생각내용을 얻을 수 없으며 


이런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도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놓고 

문제되는 내용에 대해 

각각 공 - 무상 - 무분별 무원 무작의 해탈문을 

스스로 찾아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기본적으로 

자신의 망상분별과 번뇌로부터 해탈을 얻고 

니르바나를 확인한 다음 


이것을 본전으로 삼고 나서 

다시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을 서원으로 만들어서 

무량한 수행을 닦아 나가기 위해 

현실에 다시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어느 것이나 그런 서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다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만, 

그대로 기존에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잘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에 

그런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평소 자신이 주로 집착하고 대하던 것들을 놓고 


앞과 같이 그 방향을 달리하고 

관점을 달리하여 

수행의 방안으로 임하는 가운데 


동시에 그 내용들에 

앞에서 제시한 수행자 자산 항목의 의미를 갖도록 

그 내용을 대해감으로써 

이제 생사를 초월해서 그것이 

바로 수행자 자신의 자산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자신이 무엇이던지 외울 것이 있으면 

몸을 100 등분해서 

주산알처럼 방을 잘 배치해서 

그 안에 넣어두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경전의 게송이나 중요한 수행 항목들을 

먼저 자신이나 가족의 몸 각 부분에 

그렇게 기재해 넣으면 

더욱 금상첨화라고 보는 것이다. 



[...]

내주 복권 당첨 번호를 알아야 

복권 파는 곳에 가서 복권을 사고 

당첨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복권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주의 복권 당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현실의 많은 문제도 이와 성격이 같다고 본다. 



현실에서 판단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이 

현실에서 표면에 떠 있는 

감각현실을 얻는 정신과 

망상분별을 진행하는 의식에 의해 

점유되어 있기에 그렇다고 보게 된다. 


현실에서 드라마에 몰두하면 

대신 다른 계산이나 분별 판단을 

잘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이 

쓸데 없는 것에 붙잡혀서 

집착을 하는 상태를 빨리 제거해야 

비로소 정신이 맑아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본래 감각을 담당하는 정신이나 

분별을 담당하는 정신이나 

모두 근본정신과 그 재료나 특성이 같다고 

제시된다. 


근본정신이 이번 생에서 이런 정신을 

분화시킬 때 결국 같은 재로와 특성으로 

이런 정신을 분화시켰기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들 감각과 분별을 담당하는 

정신을 

집중하여 삼매에 들면 

바로 그 정신으로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내용에 대해서 

명료하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제시된다. 


그래서 평소 그렇게 정신을 

집중해서 맑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복권 당첨번호를 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그보다 훨씬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게 되어서 

그것과 비교하면 그것은 티끌보다 못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상태가 되어야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각 세계의 상태나 구조도 

이해하고 


왜 오늘날 과학자는 세계의 모습을 

이렇게 제시하는데 

경전에서는 엉뚱하게 제시하는가도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한마디로 자신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비례시켜 나가면 

세계는 그런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러나 그 기준을 달리하면 

그와는 달리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가장 올바른 내용인가는 

또 다시 수많은 if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가 있는가. 

어제 보낸 어제의 일들이나 내용은 어딘가에 

그렇게 또 실재하고 있는가. 


공간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가. 


이런 등등의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늘 


지금 당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슨 근거로 옳다고 할 것인가부터가 

그 모든 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해야 

이제 그렇게 생각한 과거나 

공간이 그러한가가 다시 문제될 수 있는 것인데 


처음 질문에 대한 답부터가 

사실은 엉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정리하다보면 

이런 문제도 같이 정리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무여열반 작전이 효과가 있으려면 

일반적으로 집착을 강하게 갖고 초점을 맞추게 되는 

부분을 대신 연구를 잘 할 필요를 느낀다. 


현실에서 아이들을 놓고 본다면 

대부분 공부는 싫어하는데 

그러나 게임이나 만화 

그리고 야외의 동영상을 보는 것은 

질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도 비슷하다. 

돈이나 술 담배 도박 다이어트 미용부분 이런 류에는 

상당히 관심이 높은데 

그러나 수행부분은 또 그렇지는 않다. 


사실 수행이나 무여열반작전이 

이런 부분과 같은 속성을 본래 갖는다면 


현실에서 수행을 잘 안해서 

축생 아귀 지옥의 3 악도의 상태의 고통을 받는 현상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에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연구 차원에서 

문제가 많지만, 

중독현상을 강하게 일으킨다는 

사이트들을 방문해서 

조사를 해보기로 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 사이트가 대단히 재미있고 좋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료로 이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니, 


그래서 당분간 연구를 쉬고 

자세히 살펴보고 돌아오기로 한다. 





연구를 일단 마쳤다. 

연구에 참고한 방대한 자료를 

함께 올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 


doctr 님이 글 전체를 

만화처럼 쉽게 읽히고 

내용은 내용대로 유익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고 본다. 


[...]


연구 결과를 중간 보고하면 이렇다. 


사회에서 문제가 된다고 보는 

어떤 중독현상에도 

당연히 무언가 좋은 점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좋다고 보는 내용도 

방편인 이상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고 


그런 문제점은 

물이나 전기 전등 이런 것에서조차도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했는데 


이 말을 반대로 적용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안 좋다고 보는 것도 

역시 선악무기의 성격을 같이 갖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핵심은 

여기에서 

좋은 것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취하고 


대신 나쁜것만 하나도 남김없이 

빼내 제거해버리는 방안을 

잘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원칙적인 연구 취지가 그런 것이기도 하다. 




딱 보아도 

대단히 좋다고 보게 되어 

흡인력이 강한 내용이 있다고 할 때 


그렇게 좋다고 보는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인가. 



사실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에서 

좋은 내용은 좋은 내용대로 얻으면서도 

그처럼 문제되는 나쁜 내용들만 남김없이 제거되면 

이 문장 자체로 볼 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잘 파악해서 

그것을 제거해내고 


반대로 이미 좋다고 보는 내용에 

다시 좋다고 보는 내용들을 

더 포개 넣으면 

또 말 표현 자체와 같이 

더욱 더 좋은 것이다. 


일단 연구 중간 보고 내용이 

이런 것이다. 



글을 길게 적으면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고 비난을 받는데 


좀 더 자세히 살피면 

기존에 아귀의 고통의 구조가  

바로 이 문제임을 살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중독현상의 문제점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이가 좋은 것을 놓고 

강하게 집착을 갖고 그것을 추구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한다면 

바로 그런 점이 문제인 것이다. 


좋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좋은 것이 함께 가져오는 그 부분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무언가 좋다고 보는 것을 놓고 

갈증을 일으켜 갈구하는데 

일단 그것이 뜻과 같이 성취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당장 갈증과 불만을 일으키는 증상이 문제다. 



이렇게 한 번 좋음을 대하고 나서는 

그 주체는 무언가 들뜬 상태에 놓이게 된다. 


다양한 좋음이 나열될 때 

그 주체는 그로 인해 

안정되고 평온하고 상쾌한 상태가 되지 못하고 

계속 유사한 것을 찾아 나서는 상태로 

불안정한 상태로 

들뜨다거나 달뜬 상태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성취되면 또 어떻게 되는가. 

성취되면 원래 가졌던 불만이 해소되고 

좋다고 해야 하는데 

그 증상이 또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을 가졌던 만큼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또 고통을 받게 되고 

그것을 놓고 아끼고 매달리는 상태가 되게 된다. 



또 그 집착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안을 가리지 않고 임하는 관계로 

다른 이가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는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생명도 다 그런 상태로 임하는 가운데 

서로가 얽혀서 

서로가 이런 관계를 계속 반복해 나가고 증폭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이 

대강 아귀 세계에서 아귀가 고통을 받아나가는 

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계속 머물다 보면 

이후에는 지옥의 세계에서 

고통과 공포를 무한히 받아나가는 상태로 

다시 넘어가게 마련이다. 


추상적으로 나열해서 별로 

공감을 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지만, 


목이 마른데 아무리 찾아도 물을 구하기 

힘든 무인도의 상황이 계속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바닷물을 마시는데 그 갈증은 사라지지 않고 

마실수록 더 갈증이 생기게 되고 

그러다가 고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마약 중독의 과정이나 

그 결과와 비슷한 것이다. 


마약이 나쁘다고 하지만, 

좋음이 전혀 없고 

어느 곳에서나 쓸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좋음에 그런 부작용이 

결합되어 있기에 그것이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음만 

딱 빼내오고 

나쁨은 취하지 않을 방안은 없을 것인가. 


그것은 일단 그렇게 문제로 지적되는 것을 놓고 

그것을 그처럼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방식으로 취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나쁨을 전혀 받지 않게 되면서 

오직 좋음만을 취하고 

다시 그에 다른 좋음을 모두 포개어 놓아 

끝내 보리의 깨달음과 해탈과 무여열반을 얻고 

성불에 이르게 하는 그런 상태를 목표로 일단 삼고 

연구를 하면 

사실은 방안이 있다고 보게 된다. 




원래 수행자가 취하는 수행방안은 

그래서 나쁨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하고 

나머지만 남겨 놓는 것이 

기본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알고보면 그래서 수행이 

무량겁에 걸쳐서 수행자가 행해도 

결코 지치지 않고 

계속 유희 자재 신통력으로 

생사를 받아가면서 

무량한 기간에 걸쳐 행해나가게 되는 기본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오죽하면 관세음보살님이 

이런 사업을 시작한지 

질린다거나 물러남이 없이 그 사업을 

지금까지 계속하겠는가. 


처음 이 사업을 언제 시작했다고 경전에 

제시되는가하면 

사업을 시작한 이래 

우주의 성주괴공을 한없이 반복해 다 겪고도 

여전히 계속 되는 사업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경전에서 천광왕정주여래님이 언제 계셨던 분인가 

이것을 찾아 보면 

그 문제의 단서가 발견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하튼 그만큼 사실은 

수행이 중독성이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수행은 

사회에서 문제되는 중독과 달리 

수행자는 그에 대해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전도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다시 그런 방편으로부터 얻게되는 

나쁨을 모두 제거한 상태로 그렇게 임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현실에서 중독증상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들에서 

좋은 것만 뽑아 취할 수 있는가할 때 


일단 그런 것을 연구과제로 할 때 

그것을 직접 일반적으로 중독의 폐해를 일으키게 되는 

방식으로 대하고 다루면 곤란하다. 

그러나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것을 거기에서 뽑고 

거기에 다시 온갖 좋은 것을 다 집어 넣으면 

말 표현처럼 그렇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고 연구에 임해야 한다고 본다. 



[...]

현재 조각글이 
산만하고 체계가 없음이 지적받는데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편한 것이다. 

미리 목차를 정하고 글을 써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목차에 따라 글을 쓰려 하는 가운데 
글 쓰는 이가 
지옥의 입시 수험생의 마음으로 곧바로 
변하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오늘 이 주제를 연구하고 싶지 않은데 
목차에 적혀 있다. 

그러니까 오늘 이것을 놓고 글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차에 맞춰서 
머리를 쥐어 짜야 하는 것이다. 


논문을 하나 작성한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 임하거나 하면 
그렇게 되기 쉽고 

거기에 제출기한까지 겹치면 
그것이 바로 아귀나 지옥고를 겪는 중생의 상태와 
그 실질이 다르지 않게된다. 

거기에 그것이 어떤 계약과 
작업을 통해 받는 대금과 관련되어 
묶여 있으면 더 상황이 악화되기 마련이다. 

작업을 마치지 못하면 
받기로 한 대금을 받지 못한다거나, 
또는 손해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거나 
하면 그 상황이 더 악화되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오죽하면 유명한 소설가가 자식에게 
유언성 충고의 말을 남기기를 
출판사를 믿지 말고 
잡지사에 돈 받고 글 쓰지말라고 했겠는가. 


일반적으로 등단을 하지 못한 문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꿈이라면 꿈인데 
왜 그럴까 의아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경험을 한 번 해보거나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가상모드로 그렇게 한 번 임해보면 
그 문제가 심각함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 


다만 관련 자료가 신문사에 올려진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기는 한데 
여하튼 그 소설가는 자식에게 
그런 충고를 남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아무리 그것이 유익하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행하는 이가 
'해야만 한다'라고 임하는 어떤 상황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도록 
상황이나 자신을 전환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일을 대하면서 
'하기 싫은데 그러나 하고싶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또 주의할 것은 
무조건 하고 싶다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면 되는가 하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쉽게 생각해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자신이 정말 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을 막 신나게 하면 되겠는가. 
그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고 좋은 내용이라고 해도 
그것을 하는 이가 
그로 인해서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고 고통을 직접 받지 않는 형태로 
행하면서 
또 그 결과도 좋고 좋은 형태가 되게 하는 것이 
사실은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각글은 그런 측면에서 
쓰고 싶을 때 쓰고 
글 가운데 오류가 보이면 
또 언제든지 쉽게 그 부분만 고치는 것도 편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많다고 본다. 

말은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수준이 상당히 높은 상태가 아니면 
곧바로 대중을 상대로 
설하고 또 설한 것처럼 자신이 행해 나가는 상태가 
되기 힘든 것이다. 

이미 미륵보살님이 그런 사정을 
노래에서 제시한 바가 있다고 보는데 
보기는 쉬어 보이는데 
직접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결국 그런 상태를 목표로 해서 
평소에 부단히 노력 정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내용을 놓고 
그리고 다른 중생들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를 
먼저 들어 보고 그리고 나서 의문을 제기해 보고 

그 내용을 일심으로 읽고 외우고 
그리고 대중 앞에서 그것을 분별해 설하고 
들은 것처럼 자신이 행하는 것을 
동시에 늘 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처음 어떤 내용을 대할 때 
뒤의 내용을 모두 함께 같이 행하고 
또 뒤의 내용을 행할 때는 
앞의 상황의 내용을 동시에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따로 따로 되면 
말 따로 행동 따로가 되고 

또 책을 볼 때는 알았는데 
다른 곳이나 그 내용이 정작 필요한 현장에선 
책에서 본 내용들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이런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가 무량행문의 수행을 하는 것은 
결국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 성불을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그 상황을 놓고 늘 
문제를 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방편의 문제를 다루는 데 
이 방편은 전도몽상이 일반적인 상황을 
전제로 수행자가 임하는 것도 의미한다. 

원래는 중생의 전도망상 상태가 
올바른 것이 아니고 
그런 문제가 그 안에서 얻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인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행문을 닦을 때는 
바로 이런 상태를 기준으로 
중생을 방편을 통해 깨달음과 해탈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해 수행에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사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런 방편을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시시비비에 임하고 
또 다른 이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증상이 극심한 상태에 임하는 것이므로 
수행자부터 이 문제를 잘 고려해서 
원칙적인 수행방안을 취해야 함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성취하고자하는 상태 자체가 
그 현실에서는 성취되기 힘들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모든 방편은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기에 

각 입장마다 극과 극의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문제삼지 말고 

수행자가 오직 좋고 좋은 내용이 나타나도록 

그 방편을 잘 취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 기본적으로 해탈을 얻게 하는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에서는 

일체가 공하고 

모든 현실에서 분별하는 것과 같은 상을 취할 도리가 없고 

그리고 망상분별에 바탕해 일으킨 분별이나 

그리고 그에 바탕해 추구하는 소원이 모두 쓸모없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지만, 


그러나 오직 이것만 취하고 머물면 

오히려 무량한 선법을 수행자가 닦아 나가지 

못하게 된다고 경전에서 지적한다. 


앞의 내용을 통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하지만, 


다시 이를 바탕으로 

생사 즉 니르바나 라는 사정도 다시 관하여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무량한 수행을 다시 닦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는 

다시 본래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이 

앞과 같이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 대한다면 

그 자체가 그대로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실도 

같이 이해해서 


이 모든 내용을 좋고 좋은 형태가 되도록 

원칙적인 수행을 잘 닦아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수행자의 입장은 그렇지만, 

그 수행자가 임하는 그 현실에서는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기에 

가장 표준적이고 원칙적인 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정이 

보시나 정계 안인 정진과 같이 

기본적으로 계의 항목에 해당하고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복덕자량을 성취하는 수행부터 

원만히 성취해서 그 바탕이 마련되어야 


이후 지혜자량을 성취할 수 있는 수행을 

잘 성취해나갈 수 있다고 제시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 각 항목은 

본래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나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도 얻을 수 없고 

또 보시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버리거나 어디로 오고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잘 이해하고 이를 방편으로 

수행자가 보시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나머지도 그 사정이 다 마찬가지임을 

대반야바라밀다 경전 등에서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계란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보호하고 지키고 얻을 바가 없는데 

다만 그런 사정 때문에 

그렇게 지키는 것이고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해서 

수행자가 그런 수행덕목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조금 이상하지만, 

본래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가 무언가를 감각하는 가운데 

그것이 A 라고 관념분별을 하는 그 상황의 

사정이 본래 그런 것임을 잘 이해하고 


그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 

수행자가 그 상황에 들어가 임할 때 

마땅히 가장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내용이라고 

제시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무언가 자신의 등이나 머리 위에 

무거운 금괴를 지어 주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대단히 좋아하고 

그것을 열심히 지고 가게 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 반대도 다 마찬가지다. 

그렇게 지고 가는 이에게서 

그 금괴를 내려 주면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고 

내려 주는 이를 해치려고 임하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항목이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실 이런 사정을 

수행자부터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깊이 잘 관하고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그런 수행을 

잘 성취하는 기본 방편이므로 

그것을 강조하여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즉, 그 사정을 그렇게 잘 이해하는 이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듯이 

행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로 행하면서 

우선 수행자 자신부터 

이를 통해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복덕자량을 원만히 성취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도 현실에서 어렵다고 보지만, 

그러나 이것부터 어렵다고 행하지 못하는 이가 

이것을 생략하고 

지옥에 임해서 


오온이 공함을 관하고 도일체고액의 상태가 되고 

무유공포의 상태가 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

무량행문에서는 

수많은 각 생명의 소원을 놓고 

수많은 if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입장에 따라 제각각 달리 그것을 대할 

사정이 있는데 


어떤 경우는 그 논의의 취지와 달리 

지극히 불쾌를 준다고 한다면 

그것을 또 그대로 방치하면 곤란한데 


그러나 원래의 취지는 또 살려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같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노래에서 제시하듯 

도망가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어떤 입장에서는 

그것이 지극히 불쾌를 주고 억울함을 느끼게 하고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내용이 되므로 


그런 내용을 놓고 사과해야 하고 

그래서 그처럼 그런 상황을 피해야 할 입장이 되는 

그 사정이 또 그처럼 있다고 본다. 


수행자가 현실에 임하는 사정이 

다 그와 비슷하게 되지 않는가 하는 점을 

이런 노래를 통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반복해서 

통편집 처리를 당하게 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런 방안이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어떤 동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데리고 가는데 


아버지가 타면 아버지가 아들을 고생시킨다고 하고 

아들이 타면 아버지를 고생시키는 불효자라고 비난하고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이 매번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권해서 


나중에는 당나귀를 

아버지와 아들이 매고 가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동화도 있는데 


방편지혜나 무량행문은 사실은 

대부분 이런 문제를 자체적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다해도 문제되는 내용은 

그 사정을 이해하고 

논의는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문제가 있다고 반복지적되므로 

이런 절충안이라도 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일단 첫 테스트를 해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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