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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있고 없음의 문제의 논의의 중요성 본문
sfxx--있고-없음의-문제의-논의의-중요성.txt.htx
sfxx--있고-없음의-문제의-논의의-중요성.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488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파순과 관련하여
있다 없다의 문제가 제기될 때는
수행자의 기본 처방은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앞글에서도 지적했는데
어떤 이를 있다 없다의 문제를 살피게 해서
해탈문에 들어서게 하려고 하면
누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가하면
어떤 이가 그런 망상과 집착에 묶여
지냄으로써 가장 큰 수익을 거둔다고
보는 입장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색계 무색계의 하늘도 아니고
욕계 하늘 가운데 타화자재천이
가장 예민하게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이 설법을 중지하는 것을
파순이 가장 반겨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생사고통을 벗어날 입장 역시도
이런 있다 없다의 문제에 대해
그런 파순과 함께 엉뚱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비유하면 축사에 있는 소를 구출하기 위해
누군가 활동하면
목동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정작 그 소 역시도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예
여물에 집착하고 있는 소를 구출해 내기 위해
어떤 이가 여물을 치운다면
소부터 당장 이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몽상과 집착에 묶여
서로 얽혀서 번뇌에 묶여
서로 사역을 시키고 스스로 사역을 당하는 관계에
놓여 있는 생명들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런 경우 그냥 내버려두면
그 당사자들은 생사고통에 방치되어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 당사자들이 앞과 같이
불안해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또 그처럼 망상분별과 집착에 묶인 생명들에 의해
우주 세트가 이전처럼 계속 잘 돌아가게 되어
또 이로 인해 mun 님이
또 하루 짜장면을 큰 문제없이
편하게 먹게 되는 점도 있는 것이다.
[...]
>>>
있고 없음을 놓고 문제삼는 것은
결국 있고 없음의 판단과 관련해서
누가 돌았나 이런 문제에 관한 수사라고 할 수 있다.
그 효용은 생사고통에 묶여서
자신이 원치 않는데도
축사에서
태어나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아니면 생사를 벗어나
무량행문을 무한히 닦아나가는 상태가 되는가
이런 차이를 얻게 되는 것이 중요한 효용이라고 보게 된다.
망상분별 상태에서
어떤 이가 자신이 방금까지 사용하던
펜이 없어졌다.
지금 연구실에 펜이 없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자.
여기에서부터 있다 없다의 논의가 사실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망상분별 상태에서 있다 없다를 문제삼는 것은
상당히 유치한 수준의 유무 논의라고 할만한데
현실에서는 대부분 이런 수준의 유무 논의를 진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것부터 일단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다음과 같은 있고 없음의 논의는
논의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는 점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떠서 바라보니
무언가 보이는데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꽃이 있다.
이렇게 있다를 생각하는 경우가 사실은 문제인 것이다.
이미 처음에 이 문제를 살폈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대하고 그것이 A 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 a 가 거기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대표적인 망상분별자의 주장이기는 한데
이런 형태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것은
대단히 곤란함을 이전에 살핀 것이다.
여하튼 현실에서 전도 망상 상태의 사람들이
있고 없음의 수사에 임할 때
위와 같은 형태로 있고 없음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망상증상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있고 없음의 논의는 상당히 복잡하고
혼동을 유발시키는 논의가 되는데
이 문제를 잘 정리해야
전도몽상 증상을 해소하고
현실에서 해탈문을 즉시 즉시 찾아내서
해탈과 니르바나를 기본으로 확보하고
이후 생사고통을 벗어난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무는 가운데
생사현실에서도 이에 상응한 상태로
여여하게 무량행문을 닦아 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
원래 있고 없음의 수사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눈을 뜨면 자신의 몸도 보이고
자신의 물건도 보이고
다른 사람도 보이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오가는 것도 보이고
사람들이 여기서 태어나고 죽는 것도 보고
이런 여러 망상증상을 일으키는데
유독 유마힐소설경에서만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불교 경전 전반에서 이런 것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이런 것은 없고
그 실재 또한 얻을 수 없는데
전도된 망상 증상으로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을 포함해
이런 것들이 있다고 여기면서
자꾸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해나가므로
이로 인해 더욱 상태가 악화되어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제되는 내용은
유마힐소설경 제자품에서
법에는 내 것[我所]이 없으니, ...
이러 형태로
현실에서 중요하다고 집착을 갖는 내용들을
나열하면서
법에는 a 라는 것이 없다라고 제시한 부분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법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가 문제되고
각 부분에 없다고 나열한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고
여기서 있다 없다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다 혼동을 일으키는 문제가 되기에
자세하게 살피면 상당히 복잡한 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현실에서
전도몽상 상태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놓고 있고 없음을
따지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살펴나가기로 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연구 중에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펜이 '없다'고 말한다면
여기서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대로 펜을 찾았다.
펜이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이것부터 살펴나가기로 하자.
전도몽상 상태가 현실의 일반 상태이므로
위 내용은 사실은 일반 현실에서
있고 없음을 따지는 대부분의 경우가
위와 같은 형태로 있고 없음을 따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엉터리지만, 그래도 이 상황부터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있고 없음의 문제는
위 상황에서 그 연구인이
펜을 찾았고 그래서 펜이 여기 있다라고 하는
그 상황에서도 그러한 '펜은 없다'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다양한 기준에서
실답게 보아야 할 진짜의 펜이나
그 펜의 실재 역시 그러하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현실에서 있다 없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어떤 상태를 놓고 있다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부터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간단히 살피면 이렇다.
그 연구자가 펜이 없다라고 말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펜이 있다면 지금 이 장소에서
자신에게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고 있다라는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거나
방이 어두어서 펜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또는 자신이 찾는 펜이란 어느 장소에서도 어느 시간대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나타내기 위해서 없다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가 펜이 없다고 말한 내용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자신의 눈에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눈을 뜨고 있어 사물을 볼 수 있는 상태이고
그리고 현재 빛도 밝게 비추이고 있어서
만일 사물이 있다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상태인데
그러나 자신이 찾는 그 무엇(여기서는 펜)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종합해서
여기에 '펜이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전제에서
여기에 '펜이 있다'라는 것은
또 앞과 같은 상태에서
펜에 해당하는 무언가의 모습을 보고 있다거나
만지고 있다거나 한다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있다 없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는
의미는 대부분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도몽상상태에서
분별을 행할 때 일으키는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지적되는 내용인 것이다.
즉, 어떤 이가 펜이 있다라고 위와 같이
판단하는 그 상황을 놓고
그가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이 바로 전도된 망상분별이라고
일단 지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전도몽상상태에 있는 입장은
이 정도로 일반 과학자들이 일으키는 망상 정도에 그치는 것이
보통이고
좀 더 깊게 철학자가 일으키는 망상까지는 아닌 것도
의미한다.
과학자나 일반인은 보통 이 상태에서
어떤 망상을 더 전개하는가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보는 펜의 모습이나 성품
그리고 자신이나 남이라고 보는 모습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있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이런 망상을 바탕으로 이후 논의에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 부분이 엉터리이므로
이후 전개하는 내용은 당연히 이 엉터리에 기초한
엉터리임도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의 경우는 조금 이와 사정이 다른
망상을 전개하게 된다.
그것은 적어도 어떤 이가
눈으로 보는 내용이나 생각하는 내용은
그런 실재가 아니라는 반성을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후
어떤 주체와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이나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얻게 하는 본체의 존재와 관련하여
또 새로운 망상분별을 전개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일반적인 망상분별자가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잘 행하지 않는 생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는 어떤 이가 어떤 물건을 살 때
이것이 실재나 실체인가
이런 식으로 따지면서 현실생활을 하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하튼 위와 같은 문제가 역시
문제가 되므로 같이 살펴야 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바로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 등이 제시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유형의 대표적인 망상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현실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때
실재에도 그에 상응한 특별한 내용이
그렇게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런 실재의 대표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인데
바로 이런 주장이 대부분 철학자들이
실재나 실체에 대해 주장하는 망상분별에 해당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쉽게 비유하면
침대에서 황금 꿈을 꾸었다고 하여
침대에 황금이 그처럼 있어서 그런 꿈을 꾸게 된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태와 비슷한 것이다.
일단 있다 없다의 논의가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되게 되는 사정을 살폈는데
일반인이 생각하는 입장과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입장이 서로 어떻게 다르고
여기서 무엇이 큰 문제인가를 잘 살피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
그런데 일단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 이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내용부터 살펴나가기로 하자.
우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펜이 안 보여서 없다거나
펜이 보여서 펜이 있다는 식으로 망상분별을 행하는
입장을 놓고 보자.
이런 상태에서
그가 무언가 있다 없다를 따졌던
기본 조건( 눈 + 빛 ) 등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사람은 이런 펜이 '있고 없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를 또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불이 꺼져서 깜깜하거나
또는 눈이 붕대로 감겨져 있다거나
눈에 병이 나서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펜이 있는가 없는가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판단하게 될 것인가.
일단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이는
그 상황에 설령 펜이 있다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자신이 펜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펜이 없다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나 그런 상태여서 펜을 보지도 못했는데
펜이 있다라고도 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기에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있고 없음의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또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여하튼 문제는
앞과 같은 증상을 겪으면
그것이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므로
이 문제를 여하튼 잘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
경전에 의하면 오백진점겁이라고 표현되는
장구한 세월동안을 그렇게 내용을 못 알아듣고
계속 헤매도는 상태에 있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5 백진점겁을 설명하자면 다시 시간이 걸리므로
간단히 설명하면
현재 불기로 2561 년이라고 표기하는데
최소한 부처님이 이런 내용을 설명한지
2561 년이 지났는데도 적어도 이 기간동안도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헤매돌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5 백진점겁이란 시간을 이해하려면
먼저 10 억세계를 티끌로 만들어서
그 티끌 수를 세어서 그 수로 겁을 지날 동안을
일단 계산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10 억 세계가 1 부처님이 관장하는
불세계이기 때문이다.
불교용어로 삼천대천세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를 다시
5 백천만억 아승기 수만큼 확보하는 것이 또
요구된다.
일단 이것을 모두 모아서 티끌로 만드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티끌을 모두 모아 놓고
다시 5 백천만억 아승기 수의 불세계를 지날 때마다
티끌 하나를 떨어뜨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티끌이 떨어진 범위의 세계를
모두 다시 티끌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 이런 작업이 필요한가하면
겁의 수를 세기 위한 티끌이 그만큼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승기란 수를 많이 설명했는데
아승기란 수는 그 수자를 십진법으로 나타내고자
1000000..... 이런 식으로 표시할 때
자리수를 나타내는 0 의 숫자를
현재 전 세계에 있는 하드디스크를 다 동원해도
표기하지 못하는 수라고 할 수 있다.
수학적으로는 7 곱하기 2 의 103 승 개의
0 이 필요한 수인 것이다.
그런 수가 다시 5백천만억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겁의 기간 동안
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생사고통을 계속해서 받아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위 기간만큼 또 그런 상태로 지내게 '
된다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축사에 갇힌 축생이 그런 상태로
있으면 어떤 이가 그로 인해
좋음을 얻는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는가 하면
바로 축생을 키우는 목동이 그런 망상을
일으키고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축생이 안타깝다고 누군가
옆에서 축생을 축사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자 하면
목동부터가 신경이 예민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사실은 이런 상태에서
목동부터가 빨리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보고 이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다른 생명을 사역해서
이익과 즐거움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이가
스스로 그런 망상분별에 묶여
스스로 번뇌에 묶여 번뇌의 사역을 당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도 그렇게 번뇌의 사역을 시키는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다음 자료 화면을 또 참고해보기로 하자.
이미 여러 차례 소개한 최면 관련 자료인데
이런 내용이 일단 있고 없음을 논의하는 데
기본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본다.
- Hypnotist Marc Savard makes every volunteer on stage CRY! -
https://www.youtube.com/watch?v=9Mdz_GKZ0X4
Don't shoot me with the hypnotic sleep gun!!
https://www.youtube.com/watch?v=k9Wnq27g88k
이외에도 최면 관련 자료는 검색이 많이 되므로
개별 참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이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지는 데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최면 자료는
관객은 여기에 처음부터 개가 없음을 보고 있는데
최면에 걸린 이들은
처음부터 없는 개를 놓고
처음에 그런 개가 있다고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 개가 죽었다고 슬퍼하고
또 어느 순간 다시 개가 살아났다고 좋아하는 내용이다.
두번째 최면자료는
최면술사가 부메랑 총알을 개발해서
선 보이는 장면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최후에 남은 1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데
그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그외에도 자료가 많이 검색되는데
여하튼 여기에 나오는 최면술사는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최면술의 기술을 선보이는 것일뿐
악당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상상을 해보자.
어떤 최면술사가 이런 기술을
악의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최면에 걸린이가 한 회사의 사장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회사의 사장이 매번 애써 벌어들인
수입을 무었때문인지는 모르는데
최면술사에게 이상한 이유로 자꾸
가져다 주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현실상황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에 묶여서
본래 없는 것을 놓고 그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무언가 열심히 행하는 입장은
사실은 이런 상황에 준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축사에서 소와 같은
동물을 기르는 입장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소를 놓고 보면 소는 사람보다
훨씬 몸집이 크다.
그런데 그 소가 왠지 사람보다
어리석다는 이유로
꼼작없이 잡혀서 그렇게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런 가운데 축생을 키우는 입장은
이로 인해 생계도 해결하고
수익도 거두는 입장인데
누군가 소에게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마냥 좋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있다 없다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전도몽상을 벗어나고
생사 고통을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원래 자신이 그런 상태로 묶여 지내게 된
과거의 업의 장애를 해소하지 못하면
그것이 본래 곤란한 사정이 있음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 기간이 10 년 20 년이 아니고
앞에서 나열한 그런 기간을 넘는
기간에 걸쳐서 자신이 쌓아 놓은 업의 장애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있다 없다의 문제를 잘 파악하면
그 상태에서 제일 먼저
1차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행해야 할 수행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계속 자신을 그런 형태로 묶어
끌고 다니게 하는 업의 장애부터 해소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앞글에서 제시한
기본적 수행이 바로 그런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 기본적 수행이
자신이 과거에 만들어 놓은
시한폭탄의 뇌관을 해체하고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어 두게 하는
족쇄를 풀게 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인 것이다.
아무리 있다 없다의 문제를 잘 파악하게 되고
일체가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도
이런 수행이 따르지 않으면
그렇게 사정을 이해한 상태로
축사나 아귀 지옥의 상태에 갇혀서
지내는 상태가 되기 마련인 것이다.
현실에서 그렇게 놀라운 학업성적을 거두고
좋은 직장을 갖고 지내도
교도소에 수감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그 사정을 잘 안다하더라도
업의 장애를 해소하지 못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이 무아 무자성이고
실상이 공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도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업의 장애를 증폭시키는 경우는
이른바 악취공견을 갖고 수행에 임해
지옥의 공수행자의 형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제시했듯
자신의 손가락을 붙들고 꺽는다던지
톱으로 자른다고 할 때
그 상황을 놓고
거기에 그런 내용이 없고
실상이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원래는 이런 깨달음으로
그런 상태에 들어갈 행위를 행하지 않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도 그 고통을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론만으로는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하더라도
앞과 같은 상황이 되면
고통을 그대로 받는 것처럼
아무리 무아 무자성 공의 내용을 잘 이해해도
그런 바탕에서 제시되는
기본적 수행을 정진해 업의 장애를 해소하지 못하면
결국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손을 톱으로 자르는 상황과 같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 묶여 버리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앞의 이론만으로
그것을 극복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어쩔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수행자가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있다 없다의 문제에서
비록 현실에서 생생하게 각 내용을 얻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꿈과 같고 환영이나 최면술사에 의한 최면과 같은 내용이어서
여기에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
실재의 내용이 아닌데
그러나 매 순간 마치 진짜인것처럼
각 내용을 생생하게 얻게 되는 상태라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수행을 해야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어놓는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이제 비로소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수행에 정진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쌓아
무량행문을 닦아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기 힘든데
수행자가 그에 관련된 내용을 제시하면
그로부터 자신이 당장 피해를 받는다고 여기는
입장도 있기에 위와 같은 경고메세지가
나오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보면
망상분별 상태에서 공연한 걱정을 하는 입장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눈을 떠서
자신을 둘러싼 사물을 대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가를
잘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
이제 있다 없다의 문제를 살피는데
앞에서 제시한 최면 상황을 놓고 있다 없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면상황을 검토해보자.
최면에 걸린 이가 개가 있다고 한다. - 관객은 개가 없다고 본다.
이 두 내용 간에 어떤 것이 적절한 판단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최면에 걸려 있는 이는
비록 최면에 걸려 있어도 여전히 무언가를 감각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 '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면걸린 상태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그에 대한 판단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을 문제삼으면 곤란하다.
어떤 이가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a 라는 관념분별을 행한다고 할 때
그런 관념분별 a 가 있다고 해서 그런 a 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즉 a 의 있고 없음을 따질 때
a 라는 관념이 관념영역에서 어떤 사유로든 일으켜 얻게 되었기에
그런 'a는 있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있고 없음의 문제를 따질 실익이 없는 논의라는 점이다.
즉 최면에 걸린 상황에서도 그는
관객이 없다고 보는 개나 그가 생각하는 내용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으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논의할 필요가 그다지 없는 것이 된다.
이미 앞에서도 이 문제를 살폈다.
만일 이런 식으로 논의한다면
누군가 a 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 a 는 관념영역에서는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즉 무언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마저도
그런 a 를 일단 관념으로 세우고 논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광속도로 우주공간을 날라가는 장님 거북이'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것이 문제될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현실에 있던 없던
위와 같은 논의를 할 때 이미 그런 내용은
관념영역에서는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관념영역에서 관념의 내용을 일으켜 얻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무엇이 있다는 논의를 한다면
그런 있고 없음의 문제는 희론의 논의일뿐,
논의할 실익이나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당연한 내용이 문제되는가하면
대부분 망상상태에서는
위와 같은 성격의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있고 없음의 문제라고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망상분별 상태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 모습을 보는데
그 부분이 꽃처럼 생각된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고
그 부분이 꽃이라고 생각하니
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상황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 상황에 무언가 생생한 감각현실을 얻었다.
+ 그리고 그 부분이 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꽃이 정말 있는가 없는가가 논의될 때
자신이 무언가를 생생하게 감각하고 +
그리고 그 부분을 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여
꽃이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앞의 입장과 같게 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그런 관념을 일으켜 얻었다는 것 외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의미가 무언가는 다음 상황과 비교하면 쉽다.
어떤 이도 무언가를 셍생하게 감각하고 +
그런 가운데 그 가운데 어느 부분을 광속도로 우주공간을 날라가는 눈먼 거북이로 '생각한다'면
그 경우에도 그런 거북이가 거기에 '있다'라고 할 것인가 .
이 문제와 관련된다.
이 두 형식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어떤 관념분별을 했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그 관념분별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어떤 계기로 어떤 관념분별을 일으켰기에
그 내용이 관념분별 영역에 그렇게 '있다'라고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런 관념이 있는 것은 맞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있다 없다의 논의에서는
그런 것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부터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있다 없다는
문제삼는 그런 내용이
관념분별 '이외의' 영역에서도
있는가를 문제삼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
[...]
[...]
'자신'이 현실에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어떤 이가 위 문장에 '자신'이란 글자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이것도 검토해야 한다.
또 위 논의를 할 때
자신이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자신이 마음 속에 떠올릴 수 있는 '자신'이라는 생각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해도
이것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있고 없음을 논의할 때
같은 측면에서 살피기 곤란하지만,
서로 관련된다고 보는 다양한 측면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사실은 논의과정에서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주된 요소다.
이것을 잘 정리하지 않으면 논의과정에서
대단히 혼동을 겪기 쉽다.
무엇이 있고 없고의 논의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없다.
통상 이처럼 자신과 자신의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악당의 기본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생명인 이상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이고
일체 법(존재)에 자신과 자신의 것이 없다는 명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잘 살피는 것이
사실은 악당과 수행자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잘 살피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한데
그러한 바탕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자신이 갖는
태도가 변화하게 되지 못하면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위 이론을 가지고 주로
축생이나 아귀 지옥 세계에서 거처하면서
아주 오래 위 이론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상태가 되면
더 이상은 그런 내용을 검토하지 못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런 상황이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말해주는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리저리 고통과 공포를 받으면서
정신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을 놓고
일체 법(존재)에 자신과 자신의 것이 없다는 명제는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하거나 않거나
본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는 단순히 그렇다라는 것을
알면 끝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기존에 갖던
생각이나 말이나 태도 행위의 내용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원래 그런 것이 없는데도
그런 것이 있다고 망상을 일으킨 다음
정신없이 축생과 아귀 지옥 세계에서
헤매고 다니게 된 상태와
차이가 없개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단지 그런 사실을 알고
기존에 갖고 있던 자신과 자신의 것을 놓고
취하던 모든 반응을 중지시키고
그 내용을 수행의 뱡향으로
바꾸는데 이 내용이 기능을 하지 못하면
결국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기존에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을 갖고
행하던 내용을 계속 행하게 되어
생사 고통을 그대로 받게 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아주 특이한 형태의 수행자
즉, 지옥이나 아귀 축생세계에서 묶여 지내는
지옥의 공 수행자의 형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손가락이 꺽어질 때
처음 이 상황을 놓고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게 손가락으로 보이고
또 통증도 느껴진다고 해도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이 본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면서
왜 그런 모습이 보이고
또 그것이 자신의 손이라고 생각되고
또 그 손이 꺽여져서
그런 고통을 그 상황에 느끼는가.
그것은 1 차적으로는
그 상황에서 그런 깨달음에 바탕해
온전히 수행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그런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좀 더 길게 관계를 살피면
그 이전에
그런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와 태도를 취하면서
업을 쌓아 놓았기에
그런 상황에 들어간 것이 원인이라고 제시할 수도 있다.
통상 예를 든것처럼
손가락이 그렇게 꺽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것인데
그가 그런 상황에 처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위 두 내용이 같이 관련되어서
그렇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손가락이 꺽여서
고통을 당하는 것도 그렇지만,
나중에 당하는 생사 고통도 역시 마찬가지로
설명하게 된다.
첫번째는 그 한 정지단면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이 없는데
그러나 망상 분별로 그 상황을 대하면서
그런 고통을 자신의 마음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제시할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지금
그런 상태로 묶여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데
자신이 지금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해 바탕해
매순간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기에
그로 인해 그런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으로
묶여 끌려가게 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를 전제로 할 때는
역시 그런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첫번째 살핀 것처럼 그는 그렇게 그런 내용이 없는데도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진짜처럼 얻는 가운데
그 고통을 그대로 다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받는 고통이 그런 관계로
받게 된다고 설명하게 되듯
장래에 받는 생사고통도
그렇게 받게 된다고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수행방안이고
그런 수행을 하게 되는 기본 바탕이
바로 현재 살피는 있다 없다의 문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잘 이해되면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고
그렇게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면
사실은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여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
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행할 도리도 없게 되고
여전히 이전과 같이
전도망상에 바탕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에
집착을 갖고 매달리는 가운데
업을 행하게 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 그가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로 묶여 들어가게 되고
또 그런 상태에서는 그 내용을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자신과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관하면서 벗어나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생생하게 자신과 자신이 받는 고통이라고
대하면서 진짜처럼 그 고통을 다 받아나가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의 의미는
현실에서 간단히 설명하면
지금 손가락을 꺽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면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이 논의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손가락을 꺽던
톱으로 자르던
마사지를 하던
여기에서 차이가 없다면
그런 자신에게만은 그렇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자신과 관계하는 다른 생명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을 갖고
행하는 행위의 내용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MUN 님이 제시하는
99 % 거의 예외없이 작용 반작용의 상호관계에 묶여서
그렇게 고통을 받는
세계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으로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의 생명이 활동하고
그 결과 MUN 님에게 하루에 짜장면을
제공하게 되는 우주 세트가 가동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그렇게 각 내용을
분별을 행하면서 집착을 갖고 행하는 생명이 없으면
사실은 축생세계나 아귀세계나 지옥세계도
그것이 하나같이 그렇게 되지 않고
또 그 결과 MUN 님에게 짜장면이 제공되기도 힘들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모든 세상의 고통은
MUN 님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 생명이 그처럼
망상을 일으켜서 그에 바탕해서
수없이 얽혀서 작용 반작용의 관계를 갖고
행해 나가는 것이 세상인데
MUN 님은 이런 바탕에
짜장면 하나를 놓고 살짝 그 위에
올라 앉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이다.
본인이 라이터를 구하기에
세상에서 라이터를 만들어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라이터를 만들어 제공하는 상태에
본인이 살짝 올라 앉아서
이 라이터를 보고
어떻게 이런 라이터가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하면서
라이터를 편하게 사용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 세계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강한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
행위해나가면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각 주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가 곧 망상분별을 해결하지 못한 경우
바로 자신의 생사고통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 든 비유에서
자신이 눈을 떠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을
신발에 붙은 껌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는데
자세히 검토하면
껌과는 대단히 차이가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는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사실 경전에서는 껌이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고
자신의 몸을 강 건너에 있는
불타는 나무라고 비유하는 것이지만,
여하튼 그 사정은 같다.
강 건너 불이 타는 나무나
신발에 붙은 껌이나
나타내고자 하는 그 성격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신발에 붙은 껌과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자신의 몸은
대단히 많은 차이가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함께 검토해야
이 문제가 잘 정리되고 해결될 수 있다.
결론의 내용은 위 내용이기에
이 논의가 어떤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답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은
망상분별에 의해서 그렇게 분별하고
집착을 갖는 것일뿐
'자신'이나 '자신이 것'이 아니다.
이것이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애 대해 가졌던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들어가 수행방안을 취하고
실천해야
앞에 제시한 생사 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서커스를 보는 이가
아무리 서커스를 열심히 구경하고 또 구경해도
자신이 서커스 훈련을 직접 행하지 않으면
공중 그네를 타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과 자신의 것이 있다 없다.
실상이 공하다 등을
아무리 이해하고 논의해도
이에 바탕해서
수행을 하나라도 성취하지 못하면
그 논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것이 없다. 공하다.
즉 무아 무자성 공 이 내용은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주문이라고 보기는 곤란한 것이다.
그러니 손가락을 지금 꺽어 놓고
무아 무자성 공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그로 인한 고통을
해소시키는 곤란할 것이다.
이론상은 사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그 상황에서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고 제시되지만,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그 내용만 이해하고
그 상황에 처하면
그 고통을 극복해내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고
서커스 쇼를 구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것만으로 자신의 것이 되거나
자신의 상태가
지옥이나 아귀 축생 등의 생사 고통과
아무 관계없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눈을 감은 상태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눈을 뜨니
무언가가 보인다.
이 실험에서는 위 내용을 반복해서
눈을 뜰 때 그 순간 그렇게 얻어지는 내용을
잘 확보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여기서 감각현실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면
감각현실에는 종류가 다양하므로
이것은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라고 할 것이다.
여하튼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은
눈을 뜰 때
마음안에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다 같은 성격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앞과 같은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이다.
왜 눈을 떠서 얻는 감각현실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은데
그 가운데
신발에 붙어 있는 껌과
자신이 자신의 몸이나 자신의 손이라고 보게 되는
부분을 구분하게 되는가.
이것부터 먼저 잘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원래는 앞과 같은 사정으로
이 두 부분들은 다 같이
자신의 마음에 얻어 놓은 감각현실인 것 뿐이다.
그러나 생황을 하다보면
신발이나 껌과
자신의 손이나 몸은 다르다고 여기고
또 신발은 외부 세계에 속하는 내용이고
자신의 몸은 자신에 속하는 부분이라고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망상증상이라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이 내용을 도저히 부정하기
힘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 상태로
처음 삶을 출발하게 되었고
그 상태로 삶을 마치게 되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내용 가운데
이러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갖는 망상분별이 가장 근원적인 망상분별이 되므로
이 문제를 잘 붙잡고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결론은 역시 그런 것은 없고
그런 생각은 망상분별이라는 것이지만,
그런데 왜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이
발생하게끔 되었는가를 다시 살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또 그 이전의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한 업에 의한 결과라고 제시되지만,
여하튼 일단 한 단면을 끊어서
이 내용과 그 사정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은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은
신발이나 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망상때문에 그렇게 보고 대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도저히 보지 못하고
오히려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대할 만한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눈을 떠서 감각현실로 얻는다는 점에서는
신발이나 자신의 몸이나 다 같다고 할 것인데
자신이 살면서 공연히
현재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에
특별히 애착을 갖고
공연히 관심을 가져서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삶을 이번 생에 이 형태로
시작했다면
마치 소가 송아지로서 처음 삶을 그렇게 시작한 경우와 같이
그 시작단계에서부터
그런 껌과 같은 내용을 자신이라고 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결국 근본정신이
이번 생의 단계에서 생을 시작할 때
분화 생성시킨 제 7 식의 문제부터 살펴야 하는 문제가
되지만, 여하튼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이
생사고통을 받게 묶어 이끌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망상분별이 되는 것이므로
이 문제는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여하튼 일단은
실재~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에서
무엇이 있고 없고에 관련한
망상분별문제는
또 별도로 살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대부분이 일으키는 문제는 다음이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 자체는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감각현실을 대하게 되면
자신은 그로부터 그것이 A라는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 감각현실은 A 다.
그래서 거기에 A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반복해 주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왜 그 감각현실이 A 라는 관념분별 그 자체가 아닌데도
그것을 A 라고 하는가를 물으면
그것은 곧바로 직접적으로 즉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어서 답할 필요도 없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런 유형의 전도망상증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는
실재와의 관계나
실체의 존부를 살펴 나가게 되겠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통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실체나 실재와 관련된 문제는
사실 잘 문제삼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껌을 하나 사면서 가게 주인에게
이 껌의 실재는 공한가요?
또 이것은 영원불변한 실체를 갖는 진짜 껌이 아닌 것이어서
이것을 눈을 뜨고 보거나 씹을 때만 잠시 껌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면 그와 관계없이 언제나 껌인 그런 진짜 껌인가요?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껌을 얻기 위해
그 실재가 공한 화폐를 자신이 과연 건네야 하는가를 문제삼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는 껌이 있다고 여기고
그 껌을 파는 상대와 자신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고
그 껌은 또 그런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 내용을 대하면서
문제삼는 전도망상증상은 기본적으로
장착이 된 상태로 현실에 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기준으로 할 때는
위 망상분별을 먼저 잘 정리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는 실재가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고 하는 내용보다,
당장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신의 내용은 없다.
이런 내용부터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 그렇게 보는
그런 자신의 관념이나
그런 감각현실 부분이 모두 다 그 실재가 공하고
또 이 어디에도 그와 관련하여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다는 내용은
앞과 같은 문제가 해결된 바탕에서
자세히 논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
대단히 중요한 논의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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