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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의 세계여행 방안 본문

연구자료

시간과 공간의 세계여행 방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9. 5. 0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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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503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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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고 

또 이미 발생한 과거의 일을 

다시 변경시키는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그것이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 문제는 지금의 순간을 놓고 

모두 살펴보면 쉽다. 


과거의 내용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주로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a => b => C


이런 시간적인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현재의 C 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그것을 발생시킨 과거 a 시점으로 

돌아가 그것을 변경시키려고 하는 

취지다. 


여하튼 시간여행이나 만화의 스토리를 

구상하는 이의 시나리오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

과거의 a 를 다른 내용으로 변경시키는 것과 

현재의 C 를 다른 내용으로 변경시키는 것은 

사실은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굳이 그 문제를 과거로 돌아가 

원인에 해당한 내용을 변경시켜 

결과를 변경시키려고 

우회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 노력을 바로 현재의 내용에 적용하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현재 이 순간의 내용을 C 라고 본다면 

그것이 가능한가. 


이것이 바로 C 가 

만화영화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위난의 내용이라고 할 때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금강경에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제시한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순간에 그 당사자들이 

대단한 고통이나 위난으로 보는 내용이 

그 현장에 실답게 있지 않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또 가능한 것이다. 


비록 그 당사자는 무언가를 C 라고 보고 대하지만, 


그것은 실로 C 가 아니고 그런 C 를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그것을 C 라고 이름붙여 칭하는 것이다. 


이런 금강경 구절이 바로 

이런 사정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가리왕이 수행자를 붙잡아 

고문을 가하고 손발을 자르는 고통을 줄 때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수행자는 그런 상황에서 

상을 취하고 머물지 않아서 

평안하게 안인을 성취한다고 제시되는데 

그것이 곧 그 상황에서 

그런 위난을 벗어나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그 당장의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일을 발생시킨다고 보는 원인을 바꾸어서 

그로부터 일어날 일들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도 결국 앞의 방안이다. 



수행자가 수행의 방안으로 임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는 

각 주체는 자신이 당장 집착하고 추구하는 

어떤 좋은 부분만 얻게 된다. 


그것은 반대로 그 외 다른 부분들은 

제각각 위난이나 고통의 상태가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런데 수행의 방안이란, 


그것도 얻지만,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주체, 그리고 모든 생명 

지금 당장만 아니라 나중 그리고 무한한 기간 

이 측면만 아니라 다른 측면 그리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에서 

좋음을 얻어내고자 하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지금 당장 

그런 수행의 방안을 취하면 

그로 인해 다른 관련된 나머지 내용도 

모두 좋게 변화가 되고 


심지어 과거의 내용마저도 그런 내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본래 얻을 수 없는 가운데 

그렇게 제시되는 것이라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재의 어떤 C 가 

그것이 본래 그런 C 가 실로 없고 

바로 그런 까닭에 C 라고 이름붙여 칭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모두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렇게 매 순간 내용을 

변화시켜 임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하나의 좋은 점만 고집하고 

머무는 것이 현실의 삶의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온 생명의 좋음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데도 


단지 자신만 당장 좋게 되려고 하는 의식으로 

임하는 것도 바로 그런 안타까움이고 



어떤 공간을 


이것도 좋게 하고 저것도 좋게 하고 

두루두루 좋게 하고 


이 용도 저 용도 가지가지 용도로 

모두 활용할 수 있는데도 

단지 어느 한 용도로만 사용한다는 것도 

안타까움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행위를 통해서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익을 얻을 수 있는데 


단지 건강만 얻는다거나, 


또는 건강도 얻을 뿐 아니라 수입도 얻고 

다시 즐겁고 재미있게 생활할 수 있고 

단지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보람도 있고 아름답고 선한 가치도 

얻을 수 있는데 


단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간신히 얻는다면 

그것도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데 노력하고 

원래 얻고자 한 것도 

끝내 얻지 못한다면 

더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수행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 금강경 구절을 외우던 방식을 

조금 변경하니 

여행을 다니는 가운데서도 

구절들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 무엇이 조금 달라지는가 하면 

단순히 여행다니면서 

대하는 풍경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면에 경전의 내용을 하나 덧 붙여 놓고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요즘 무슨 포켓몬 게임이 있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현실상황에 포켓몬 케릭터를 등장시켜 

게임을 하고 

그런 가운데 사고도 발생한다고 

보고도 받는데 


경전 구절을 쉽게 외우게 되다 보니 

바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너무 경전내용에 몰두하면 

포켓몬게임이 일으키는 문제처럼 

사고를 당할 염려도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적절하게 임하면 

단순히 주어진 배경화면의 아름다움만 얻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경전의 내용까지 같이 덧붙여서 얻고 

이렇게 되면 이 두 내용이 또 화합을 일으켜서 

또 다른 내용까지도 얻게 해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앞에서 과거나 현재 미래의 내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제시했는데 

현실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데 


그 기본이론이 모두 금강경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과거나 현재 미래를 나누어 구분하지만, 

본래 그런 전제나 후제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경전의 기본 입장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무유정법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도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만일 자신이 대하는 현실이 

오직 C 로만 정해져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그 C 를 얻는 외에 

다른 것을 얻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현재 C 역시도 그렇게 얻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실재를 바탕으로 

각 감관마다 제각각 다양한 감각현실을 얻거나 

하나의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이리 저리 나누고 묶음에 따라 그 때마다  

다양한 관념을 일으켜 얻는 것도 그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만일 이것이 특정한 내용으로만 정해진 것이라면 

사실은 그런 것이 모두 가능하지 않고 

그렇다면 처음 문제삼는 C 조차도 

그렇게 얻기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알고 보면 

현실에서 C 를 얻는 관계식 

a + b => C 

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처음 a + b 가 

a + b 로 정해져 버린 것이라면 

그것은 C 를 그렇게 나타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C 를 그렇게 나타나게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묘길상 인턴연구원이 

왜 그 만화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보아야 했는가를 

놓고 아직도 궁금한데 


그것은 묘길상 인턴연구원의 연구주제가 

그런 것과 관련이 깊기에 그런 것이 

혹시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한 번 발생한 사실이고 

그것을 어떤 이가 C 로 여기는 상황인데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때 

그 상황에 어떻게 다른 내용을 

바꿔 자리잡게 할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내용을 달리 바꿀 수 있는가. 



이런 주제가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어떤 한 상황을 놓고 

각 주체가 그것을 다른 내용으로 얻기를 원할 때 

예를 들어 어떤 돌을 놓고 

그것을 금으로 보고자 하는 이는 금으로 보고 

금강석으로 보고자 하는 이에게 어떻게 그것이 

금강석으로 보이게 하는가 

이런 것도 비슷한 성격을 갖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턴연구원이 연구실 열쇠를 

혼자 5 -6 번 반복해 잃어버려서 

본인이 조금 짜증이 난 적이 있는데 

그것을 달리 생각하면 

대단히 좋은 점이라고 보게 된 적이 있다. 


어떻게 열쇠를 자주 잃어 버리는 것이 

좋은 일이 될 수 있는가. 


이것도 문제의 성격이 마찬가지라고 본다. 



어떤 내용이 반드시 좋거나 나쁜 것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그것은 대하기에 따라서 

또 다른 성격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앞에 제시한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안 되는 이상한 주장이라고 

여기기 쉽다고 본다. 


특히 일반적인 상식적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안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것이 그렇게 정해져 있고 


그것은 다시 그 각 내용이 선후관계로 묶여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어서 


과거의 a 과 변경되면 그로 인해 

그 이후의 것이 모두 도미노현상으로 다 변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늘 

가장 자신이 분명하게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재 시점의 정지된 한 단면을 놓고 

늘 검토를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관계를 살필 때는 

그 정지된 한 단면의 바로 직전 직후 이렇게 놓고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 

마음에 얻어지는 내용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비유하면 이는 만화책의 앞장과 뒷장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전후로 재료가 늘거나 줄지 않는다는 측면은 

마치 조각퍼즐을 맞출 때 

매번 조각퍼즐을 맞추어감에 따라 

전체적인 조각퍼즐의 모습이 달리 보이면서 

변화해 가는 것으로 보게 되는데 

그 조각퍼즐 자체는 그렇게 늘거나 줄지 않고 

그대로라고 보게 된다는 비유를 통해 


자신이 이해하는 시간의 전후 관계를 

음미해 볼 필요도 있다. 




요즘 여행을 다니는데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1회용인데다 값도 비싸서 부담이 많다. 


그런데 이 미세먼지들이 대부분 

자동차나 공장등에서 에너지 사용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론상 가장 청정한 에너지는 

수소 + 산소 => 물의 화합과정에서 

얻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데 

에너지를 발생시키면서 나오는 물질이 

물이기 때문에 


석탄이나 석유 가스 원자력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정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보다 더 못한 에너지 원으로 

나무를 베어 때는 방식도 사용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석탄이나 석유 가스 원자력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런 조금 더 나은 에너지원을 어떻게 찾아서 

사용할 수 있는가에 관련된 지혜였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빛 에너지를 얻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전구 필라멘트를 사용했는데 

효율이 훨씬 좋은 led 가 뒤에 개발되어 

빛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또 빛을 전기로 바꾸는 방식도 역시 

점차 효율이 좋은 형태가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을 왜 그렇게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면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그 부분에 대한 답 내용이 

온 생명을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고 좋게 만들고자 한다고 할 때 

그런 내용들이 비로소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그것을 얻는데 대한 장애들도 모두 

제거된다고 볼 수 있다.  


 

과학계의 상식은 아직도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다고 하고 

그래서 먼 다른 우주를 여행하려면 

빛처럼 빨리 달려도 10 억 광년이 걸린다는 등 

이런 구라를 아직도 공공연히 제시하고 있다. 


이런 경우 장님을 우주선 선장으로 임명해 

여행하면 계단에서 넘어질 수는 있겠지만, 

빛의 속도 한계를 넘어서는데는 

상당히 효과가 좋으리라고도 보게 된다. 



현실적으로 청정한 에너지를 바라는 희망이 많은데 

그래도 현재 과거에 문제가 많은 형태의 

에너지 예를 들어 석탄에서 

이후 석유를 사용하고 

석유도 더 정제해서 사용하고 

요즘은 가스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자원이 부족함을 탓하지 말고 

앞과 같은 장애를 먼저 제거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원래 아윈시타인 박사가 

e=mc2 이론을 제시한 것은 

현재 사용하는 우라늄만 질량이 에너지로 변화된다는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라늄만 핵분열이 보다 쉽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불을 일으키는데 

성냥만 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지만 


짚을 나무가지로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거나 

부싯돌을 부딪혀서 불을 일으키거나 하는 것보다 

그것이 좀 더 쉽게 불을 일으킨다고 보기에 

성냥을 사용한 것이지만, 


사실은 돋보기로 불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고 

다양한 방안이 다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앞의 질문이 여기에 문제되는 것도 

사정이 같다. 


왜 그을음이 많이 나는 석탄을 과거에 사용했을까. 

그 당시 석유는 없었고 다른 에너지원이 없어서가 아니고 

당시 지혜가 그 정도였고 

또 이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나 그 취지가 또 그런 것들이었기에 

그랬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제한이 본래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단지 그 수행자가 안인을 원만히 성취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더 이상 과거처럼 전도몽상과 집착을 바탕으로 

행해나가는 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되는 상태 

즉 불퇴전위에 오르는가 못 오르는가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세계여행이나 시간여행의 방안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게 된다. 


기초 이론은 이미 mun 님에게 오래전에 제공한 바 있는데 

당시에 mun 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여하튼 일반적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들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늘 간단한 부분부터 접근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정지화면을 하나 놓고 

자신이 그 상태에서 세계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모두 포착해 잡아 놓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지화면을 놓고 

메뚜기가 보는 세계와 박쥐가 보는 세계 

이런 것을 하나 또 놓고 

자신이 대한 세계를 놓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실 자신은 자신이 대한 세계만 내용을 이해할 뿐이고 

메뚜기가 보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한 단면을 놓고 

자신이 보는 세계와 메뚜기의 세계가 왜 따로 

문제되는지를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공간의 문제도 자신이 눈으로 보는 것과 촉감으로 얻는 것과 

이런 것을 놓고 잘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의 문제는 이렇다. 

시간을 이해하는 힌트로 

다양한 것을 제시할 수 있다. 

조각퍼즐을 놓고 조각을 맞추어감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테이프나 만화책이나 cd dvd 등을 놓고 

그것이 돌아가는 방향이 시간의 변화과정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마음대로 돌려 놓고 한 부분을 

찢거나 다른 것을 입혀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대하는 정지화면에서 

1 초전과 1 초후를 놓고 이 관계를 잘 생각해보는 것이다. 


늘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만, 

한 정지화면에서 자신이 무엇을 a 라고 본다면 

여기에 격자이론을 놓고 잘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그렇게 묶어서 대하면 그것은 a 인데 

달리 묶고 나누어 대하면 

그래도 a 인가. 이런 간단한 문제다. 


영희를 놓고 그렇게 묶어서 대하면 영희인데 

영희의 손이나 

손톱을 놓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부분만 묶어서 대하면 그것이 영희인가. 

손톱 부분만 하나 놓고 그것이 영희인가. 

이런 질문을 행하는 것이다. 


이 때 앞에서는 영희가 있었는데 

그 당시 그런 생각을 안하고 있다가 

새로 그 화면을 대하면서 손톱이라고 생각을 일으키면 

이 손톱은 그 때 새로 생겨난 것인가. 

생각을 하지 않아도 그 손톱은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 생각을 할 당시 

영희는 또 생각하지 않았다면 

영희는 그 순간 사라져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이해하려면 

일단 그 각각에 담을 어떤 내용이 무엇인가를 

함께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세 문제를 놓고 

지금 현재 이 순간에서 그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로 가서 무엇을 바꾸어서 

그것을 통해 도미노 현상의 연쇄 변화를 통해 

현재를 바꾸고자 한다면 

사실은 어리석은 행위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이가 

왜 현재는 못 바꾸는가. 


그런 경우는 미래로 가서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바꾼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대하면 같은 문제임을 알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 문제의 본 성격은 

원래 한 단면에서 제시된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무슨 문제인가. 



비유로 설명하면 

꿈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황금을 얻었다고 해보자. 


이로 인해 현실에 없던 황금이 어디에 생겨난 것인가. 

꿈에서는 얻었는데 그런가. 이런 문제다. 


또 꿈에서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나아가 

황금을 잃었다고 해보자. 

이로 인해 현실에 있던 황금이 어디로 사라져 없어져 버린 것인가. 

꿈에서는 그런 내용을 그렇게 잃어 버렸는데 과연 그런가. 

이런 문제인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세계 여행이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늘 문제되는 것은 

안인의 성취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안인이 성취되지 않으면 

여행허가권이나 비자가 발급이 되지 않는 것이다. 

혼자 가보았자 사막만 그냥 보고 돌아오는 여행이 

될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거꾸로 

안인이 성취가 안 된 

킹콩이나 메스스 바이러스를 

상대해야 할 경우를 놓고 

이해하면 사정이 쉽다. 


그리고 사실 앞에서 메뚜기의 세계로 자신이 여행을 하려면 

남들이 볼 때는 자신이 여기서 죽어서 사라지고 

어디선가 메뚜기가 하나 새로 생겨나 

돌아다닌다고 보는 상태가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돌아올 때도 사실은 사정이 같다. 

이는 왕복 티겟을 끊은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동안 번개가 치고 주변에 대홍수가 나고 해도 

자신은 그 세계의 일은 잘 파악을 못하는 것이다. 

다행히 자신이 돌아와 타고 다닐 자동차가 파손이 

안 되어 있으면 다행인데 

파손이 되어 있으면 어떤가. 


결국 새차를 하나 구하던지 

아니면 말던지 이럴 것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몸을 차로 놓고 이 상황을 

잘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수행은 

기본적으로 보시와 정계 안인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란 구절과 

사정이 같게 된다. 


이론적으로 셰계가 다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서 

일체고액을 건넌다고 제시되는 내용인데 

그 내용으로 정말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자신이 휙 하고 건너가게 되던가. 


레코드 판을 놓고 바늘을 움직여서 

첫 곡에서 세번째 곡을 듣다가 

다시 두번째곡으로 돌아와 듣는것처럼 

시간을 이해한다고 가정해도 

자신이 사는 현실에서 그것이 

그렇게 되는가. 

이것도 같은 문제다. 


그래서 이론으로는 설명을 그렇게 한다지만, 

정말 그 이론을 바탕으로 수행에 정진해서 

안인을 원만히 성취하고 

불퇴전위에 이르는가. 

아닌가가 

사실 중요한 것이다. 


그 사정은 자신을 놓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이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놓고 

생각해보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단 그런 상태에서는 

억지로 가봐야 할 곳이 자신이 원하는 곳보다 

더 많은 것이다. 


닭장이나 소우리나 그런 곳부터 일단 

하나하나 방문해서 일정 기간을 보내고 

그런 상태에서 묶임이 풀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안인이 성취되지 않아 

언제든지 수행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고 보는 상황에서는 

역시 더 이상은 진전이 안 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 그런 상태가 안 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자신부터 큰 위험이 

생긴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는 세계 여행과정에서 

매번 메르스나 킹콩이 만나주는 것이다.  

그 경우는 앞의 경우와 사정이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수행에 도움이 안 되는 상태로 

수행 이전상태로 돌아가서 

새로 묶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론은 이론이고 

수행은 또 수행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


각 생명이 각기 마음의 상태가 다르고 

감관도 다르고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까지 

다른 사정을 파악하였다. 


그 가운데 자신이 놓여 있는 것이고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내용에 의해 

자신이 올라 타고 있는 기차가 나아가는 궤도와 

대강의 예정지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가 축생이나 아귀, 지옥세계에 간다면 

가는 이유가 있고 가는 방안이 있는 것이고 

반대로 인간이나 아수라나 하늘세계에 간다면 

역시 가는 이유가 있고 가는 방안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 자신의 현재 상태 

자신이 집착하고 초점을 맞추고 대하는 내용이 

무언가에 의해 스스로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알아서 정해야 하는데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어느 것에도 정해진 법은 없고 

얻을 바도 본래 없음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렇게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알고 임하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뜨거운 솥에 손을 담글 때 

그나마 다행이라고 보는 것은 

그것이 뜨거운 솥임을 알고 그 뜨거운 솥에 

자신의 손을 대는 경우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외관은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것을 모르고 임하는 경우다. 


현실 법체계상 모르고 행하는 것은 

형 감면사유가 되는데 


부처님법은 모든 고통과 악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몰라서 차도에 뛰어들어 

장애자가 되었다면 

그 피해자를 놓고 법정에서 다시 처벌하지는 않지만, 


부처님은 그 상태에서 그런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받게 된 그 상태가 곧 

그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어리석음)을 

그 모든 고통과 악의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탐욕보다는 분노가 그 결과가 무겁고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무명(어리석음)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들인 것이다. 


무언가를 자신이 애착하고 아끼고 있다면 아귀세계를 향해 

자신이 나아가는 중임을 간파하고 

심지어 실질은 이미 아귀의 상태라고 스스로 관해야 하고 


자신이 무언가를 대할 때마다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키고 자주 대한다면 

자신이 지금 분뇨 지옥이나 무간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중임을 간파하고 

심지어 실질은 이미 지옥의 상태라고 스스로 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대변인지 금인지를 매 경우 

모르고 한 번 걸려서 풀려난 다음에 

조금만 지나면 똑같은 문제에 또 걸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스스로 붕어나 물고기과에 가깝다는 것을 

스스로 간파하고 

심지어 실질은 이미 치매상태에 있는 축생의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방금전에 죽 읽었는데 

덮고 나서 아무 내용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치매 보조 치료제를 투여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신이란 렌즈에 어떤 업의 장애로 

껌이 붙어 있는 상태인가를 점검하고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가끔 현실에서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익숙하다고 여기게 된 형체를 지니고 

무조건 오래 버티고 버티는 경기를 

자신이 진행 중이라고 착각하고 


어떻하던지 오래 생존만 하면 된다고 

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문제다. 


나중에는 어떻게 원하는 대로 즉시즉시 

자신의 형체를 필요한 형태로 변화시켜서 

각 상황에 임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사정을 모르는 이가 이를 지켜본다면 

송충이가 갑자기 죽고 없어지고 

어디선가는 나비가 새로 태어난다고 보지 않겠는가. 


여하튼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한 상태로 오래 버티는 것은 

그 상태가 좋다고 볼 때인데 

그것도 원하면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량수부처님이 지향하는 상태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전제는 그 상태가 좋고 좋은 상태일 때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암파리나 애벌레 구더기가 자신이 그 상태가 

익숙해서 편하고 좋다고 보고 

그에 집착을 가져서 계속 그 상태로 임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의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몸을 놓고 그렇게 대하는 것이 현실 상황이다. 

무엇때문에 대변 소변 피 고름 땀 이런 것이 

가득한 것을 놓고 집착을 갖는가는 

역시 곤충이 자신의 몸을 아끼는 것과 같은 사정이다. 


이미 그렇게 전도몽상을 일으켜 

그에 집착을 갖게 만드는 

최면 과정을 살폈던 것이다. 


자세히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한다면 

그것은 상-락-아-정의 상태가 아닌데 

그렇다고 잘못 뒤집혀서 무언가를 보고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을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라고 

분별하고 그에 집착을 갖고 임하는 상태인 것이다. 


앞에서 껌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누군가 그 껌을 밟으면 분노를 일으키고 

그래서 껌을 밟은 이를 가격하고 

그리고 다시 얻어맞고 그런 가운데 

감옥에 들어가는 경우는 

대단히 안타깝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하는 상황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껌은 그런 자신이 아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껌과 다른 특성이나 사정이 있기에 

그렇다고 여기면서 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 사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전도몽상을 일으켜 

홀려서 그렇게 임하는 가운데 

한 생을 보내고 또 다른 생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반복해가는 기본 사정인 것이다. 


그러니 헤아리려면 

대충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서 넘어가지 말고 

그것을 붙잡고 

실재와 현상을 함께 꿰뚫어서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서 

그 내용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어중간 하게 적당하게 임하면 

한마디로 애매한 텔레토비나 

애꿎은 텔레토비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상태가 

부부싸움 하는 것 옆에서 보다가 

날라든 깨진 유리병에 맞아 

눈이 멀어버리거나 

뇌진탕일으키고 마비상태로 

남은 생을 보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과보를 받는 근본원인이나 사정이 

그 주체에게 그렇게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앞과 같은 내용을 부처님이 제시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듯 

상-락-아-정의 상태의 것이라고 해도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방안은 


건강 보조제를 비싸게 구입해 매번 투여하는 것이 

그 방안이 아니고 

수행방안이 제시하는 수행을 정진하는 것이 

원칙적인 방안이다. 


즉 선업을 행하며 계를 지키고 

정려 반야 수행 등을 모두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그 방안이다. 


아무리 건강보조제를 열심히 섭취해도 

해결사로 바이러스나 세균조가 침투되거나 

현실의 인간 해결사가 투입되거나 하면 

곧바로 사망에 이르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데 왜 해결사가 그렇게 투입되는가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해결사가 투입될 때 다른 해결사를 

동원해 처리하면 된다고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음과 집착에 의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왜 줄어드는가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로마시대에는 평균수명이 20 세 정도였다고 

당시 역사가들이 소개하는데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그 사정을 대강 이해할 수 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나아가면 

서로 얽혀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도 유독 혼자 장수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그 나름의 사정이 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대 최고의 의료진이 옆에서 늘 대기하며 보좌하고 

심지어 매일 대변까지 맛보면서 

건강을 체크해도 

왕들의 평균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은 것은 

중국이나 조선이나 사정이 같다. 


그나마 중국이나 조선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정확히 기록해보려고 노력하는 입장이기에 

그것이 파악이 되는데 

그런 사정이 아닌 나라에서는 나중에는 

파악할 길이 별로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인도에서 얼마나 많은 황제가 

과거에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가는 

미스테리한 문제다. 


대강 돌에 기록이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어림짐작할 뿐 자세한 내용을 알 길이 없는데 

그래도 그곳에 각기 황제나 왕 노릇을 하는 이가 

있지 않았겠는가. 

후세 사람들이 아무리 그것을 몰라주어도 

그래도 당대 황제는 황제가 아닌가. 


오늘날도 인도부자는 세계적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그것이 이미 반복 제시한 내용 

즉 어떤 이가 자신의 즐거움이나 좋음을 얻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 도구인 자락도구에 집착해 

그 자락도구의 크기나 길이 양에 

삶의 초점이 있다고 보고 

거대한 자락도구를 구하고 집착하며 

임하는 경우와 같다. 


그리고 그것이 어리석음의 농도와 깊이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고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런 것을 놓고 집착하면 

그 만큼 더 어리석다는 것을 

그로써 옆에서 쉽게 파악하고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 지혜를 더 깊게 발휘하면 하는 만큼 

그 만큼 더 어리석다고 보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가치있는 황금이 옆에 있고 

아무 쓸데 없는 딱지가 있는 가운데 

어떤 이들이 그 가운데 

하필이면 딱지를 붙잡고 계속 딱지의 숫자를 세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어떤 이가 

그것을 붙잡고 아주 잘 센다면 

그것을 아주 잘 세는 만큼 

그것을 놓고 숫자를 못 세는 이보다는  

더 안타깝고 총체적으로 어리석다고 본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고 

그렇게 각 세계로 나아가는 사정은 


각 생명의 상태가 각기 서로 종류가 

다른 상태이기에 그렇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나비는 왜 하늘을 날고 

붕어는 왜 물에서 헤엄치고 

두더지는 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전등불을 켜면 왜 바퀴벌레는 숨고 

나방은 날라들고 

그러는가 


이런 넌센스 퀴즈와 성격이 같다. 



그런데 정말 무량한 생명을 

양분하는 경계선은 

어떤 생명이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장착하고 임하는가 아닌가에 의해 

그런 차별이 질적으로 달라진다고 

경전에서 제시된다. 


사정은 그 내용이 

바로 수행자와 수행자 아닌 상태를 구분하고 

변역생사와 분단생사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경계선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내용도 

양 방향으로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보리심을 장착한 입장에서는 

이후 무량행문을 닦아 지혜가 깊어지고 넓어지면 

그 수준이 더 향상된 상태로 보는 것인데 


그 이전의 상태는 그로 인해 

받는 고통의 깊이와 폭이 더 넓어지게 되고 

그래서 그 총체적 어리석음이 더 증폭된 상태로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쉽게 비유해보자. 


어떤 이가 서로 의견이 달라 

한쪽은 설악산에 가자고 하고 

한쪽은 지리산에 가자고 하는데 

같이 가야 한다. 


그런데 둘이 돌을 하나 던져 결정한다거나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였다거나 


한쪽이 이해타산과 계산에 능하지 못하고 

약간 치매기가 있어서 

그저 상대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다면  

그 나마 나은데 


이제 둘다 다 서로 자신이 똑똑하고 

이쪽으로 가는 것이 이런저런 사유로 더 좋음이 많다고 

서로 제각각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고집을 피우는 가운데 다투다가 


점차 말이 거칠어지다가 

이후 팔로 상대를 뚝뚝 밀어 보다가 

이후 도장에 나가 훈련을 마친 다음 현란하게 

발로 상대의 복부를 강하게 쳐보다가 


이후 돌을 집어 찍거나 던져보다가 

이후 집에 들어가 칼을 갈아 가지고 나와 겨뤄 보다가 

나중에는 총기를 놓고 다투고 

나중에는 화염방사기로 버스를 태우고 

나중에는 개스통을 폭발시키면서 

최종 승자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다면 

어떤가. 


그 과정에 사용된 수단과 방편과 기술과 동원된 지혜가  

얼마나 현란한가. 



그런데 알고 보면 그만큼 

더 어리석었고 

그래서 그로 인해 

서로가 주고 받은 고통과 과보가 

더 증폭되었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욕계 안에서의 최고정점은 

타화자채전이라고 보고 

최하점은 무간지옥이라고 보지만, 


이 하늘과 지옥은 서로 반대면의 관계로 

그 수명이나 복락과 고통이 서로 

비례관계가 형성되는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정은 무간지옥에 있는 한 생명이 그곳에서 탈출해 

타화자재천에서 같이 거주하기 시작하면 

이후 타화자재천은 곧바로 타화자재천이 아닌 것이 된다는 그 사정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화자재천이 타화자재천으로 계속 유지되려면 

반대로 어떤 지옥은 그 상태로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관계가 서로 형성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보다 수준이 더 높은 하늘은 

다시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사정을 이해해보자. 

지구 상에서도 

하루에 낮과 밤이 교차하는데 

낮은 햇빛이 비추이고 

밤은 그런 공짜 에너지가 비추이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 보고 좋아하는가는 각 주체마다 다른데 

여하튼 그 가운데 무언가를 좋다고 본다면 

그것이 하루에 교차하는 것이다. 


그런데 66.33 도를 경계점으로 하여 

그 상하가 그 사정이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그것이 6 개월 단위로 달라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낮과 밤만 기준으로 하면 

하루의 낮이 6 개월 분량씩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비례해서 밤도 6 개월 분량이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각 위치따라 서로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지구를 놓고 보면 

위쪽에서 서 있으면 

아래쪽에서는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하튼 그렇지는 않은 가운데 

각기 조금씩 다른 상황에서 

다른 종류로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 살아가는 곳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골고루 맛을 보면서 계절이 변화하는데 

그 사정은 

지구 지축이 이상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숫자 23.5 도 기울어져서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매일 이 상황을 감찰해야 하는 

달은 매번 같은 면만 서로 바라보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묘월삼매에 대해 

본인이 생각해본 내용이기도 하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많은 삼마지 명칭이 나열되고 

내용의 설명이 제시되는데 


수행자 승급시험에서 

묘월삼마지는 몇번째인가 

이런 문제가 종종 제출된다. 


설마 그런 숫자가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무시하기 쉽고 


묘월삼마지를 직접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쉬운데 


모두가 그런 상태에서는 

그것이 경전 몇 페이지에서 몇번째 나오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수많은 승급지원자 사이에서 승급여부를 결정해야 하기에 

사정이 그렇다라고 이해해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사실 상대가 

이런 저런 내용을 죽 나열한 가운데 

질문을 하면 


최소한 그 현장에서만이라도 

그것을 최소한 죽 기억해서 

같이 나열해서 답을 해주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 에티겟인 것이다. 


그런데 책을 덮자 마자 

곧바로 그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거나 


말을 듣고 이어 새 말을 듣는 즉시 

직전에 들은 말을 잊어 버린다면 

기본 에티겟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전화번호를 읊어주어도 

끝 번호 알려줄 때 

첫 번호 잊어 버리면 

몇번을 불러 주어야 하겠는가. 


그래서 적어 주면 

또 종이 잃어버렸다고 하고 


핸드폰 주면 분실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런 상태에서는 

각 세계를 여행하는 가운데 

보물을 지니고 이동할 도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여행 자체도 떠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또 그 자신 자체가 

각 세계의 기준 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0 겁을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여기가 어느 상태인지 잘 모르겠는데 

여기가 지옥인 것은 

시지프스가 저기에 있는 것보니 

확실하다 

이렇게 보게 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는 의미다. 


사정이 어려운 것이다. 



여하튼 현재 

왜 현실에서 

자신이 꽃을 꽃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가를 

열심히 살펴나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각 생명이 현재 어느 상태 어느 세계를 향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어떤 상태에 머물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바로미터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꽃을 꽃으로 보게 되지 않는가. 

거의 대부분 물을 물로 보지 않는가. 

그러면 인간 상태인 것이다. 


인간 가운데 

물을 보고 놀라고 공포스러워한다면 

몇 개월전 물고문을 어디서 당한 입장이거나 

공수병 걸린 개의 상태인 것이고 


물만 보면 반가워 하는 상태면 

현재 사막을 여행중인 입장이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물에 무슨 값이 있는가. 


이런 문제다.


원효대사가 중국 유학을 의상대사와 같이 

떠나다가 

배 타기 직전 돌아왔다는 것이 오히려 

유명한데 

왜 사정이 그런가는 퀴즈문제를 하나 만나고 나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녁에는 청량음료 

아침에는 구토를 일으킨 해골물 

이렇게 하나의 물이 매 상황마다 달리 변신을 하는데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정확한 내용인가라는 

수행자 승급 시험 문제 하나가 

원효대사님에 의해 세간에 유출되고 

세간에 제공되었는데 


정작 그 답은 아직껏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붙들고 후배 수행자들은 

또 풀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 아침에 본 물의 정체가 답이라고 보고 

적기 쉬운데 

이것이 답이 아니란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원효대사가 유학을 가기 직전에 

방향을 돌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답이 무엇인가. 


이것은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도 있다. 


눈을 떠서 보니 물로 보인다. 

그런데 눈을 감으니 안 보인다. 


그러니 그 정체가 무언가. 


이 간단한 문제에 답을 잘 못하니 

현실의 상태가 오락가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산은 산이다. 

물은 물이다. 


이런 식으로 자체적으로 형식적으로 

맞다고 보는 문장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고 

화두를 제시하고 

칠각지 역에서 비자발급신청하고 

정려 수행에 임하는 사례가 많은 것이다. 


위 문장은 이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문제다. 


상식적으로  ~ 는 ~ 이다라는 

문장 구조에 앞 뒤로 같은 글자를 

써 넣으면 

자체적으로 형식적으로 맞지만, 

아무 의미를 얻기 힘든 문장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단어 뜻을 풀이하는 사전도 

a 는 a 다

b 는 b 다

이런 식으로 풀이를 계속 붙이면 

자체적으로 가장 형식적으로 옳은 풀이를 붙였다고 보지만, 

그 사전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이는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문장을 놓고 

그런 의미라고 이해하면 

안 되는 것도 상식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의미가 아니고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가를 놓고 

칠각지 역에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 힌트는 

금강경에서는 이와는 반대 형식으로 

구절을 반복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a 는 a 이다. 이렇게 제시하지 않고 


a 는 실로 a 가 아니다. [없다.] 

그렇기에 a 라고 칭하여 설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구조가 대단히 많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앞 구조문장보다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을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가 다 사정을 이해하고 

그렇게 계속 말씀하시는 것이다. 


앞의 문장에 대입해보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런데 

산은 실로 산이 아니고 

물은 실로 물이 아니고 

그런 것을 실로 얻을 수 없기에 

그런 사정으로, 그런 까닭에 

그것을 각기 놓고 

산은 산이라고 하고 

물은 물이라고 이름을 붙여 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는 의미다. 


어떤가. 


여하튼 이런 내용은 

자신이 무언가를 놓고 

a 라고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a 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그 본 정체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하는 

퀴즈와 바로 연결된다. 


앞에서 원효대사가 물을 놓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퀴즈를 한 번 풀어 본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으니 

이 물이던 저 물이던 

그 모습이 다 잘 안 보인다. 


그러니 이것의 본 정체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 퀴즈가 바로 이들 문제와 

직결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을 풀면 그 상태가 

풀지 못하고 매 상황을 대하는 상태와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물은 한 번 물이면 

어느 경우나 다 물이고 

그 좋고 나쁨도 그 물에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하는 경우도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한가. 


자신이 목이 말라 물이 좋다고 생각된다고 

어제 물고문 받고 나온 이에게 

물을 가지고 자꾸 물을 마시라고 강요한다면 

상대가 얼마나 놀라겠는가. 

이런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진리와 가치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 고전 퀴즈를 늘 옆에 두고 

잘 음미하면서 풀고 


그것을 현실에 곧바로 접목시켜서 

자신의 서원과 

자신이 향하는 세계를 놓고 

스스로 매 경우마다 

잘 선택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



중론송에서 

어떻게 각 내용의 정체에 대해 

망상분별을 행하고 주장하는 입장을 

논파해나가는가에 대해 

대강 살폈다. 


다만 각 입장에서 다른 주장을 내세우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논파할 것인가가 문제되는데 

여기서는 그 전에 왜 이런 논의가 필요한가를 

살펴나가는 것이다. 


현재 글이 길기에 각 부분을 나누어 살피는데 

전체적으로는 계속 이어지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의가 왜 중요한가는 

거기에서부터 

해탈과 니르바나의 문을 들어가는가 

못들어가는가의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이 문제를 다시 살펴나가기로 한다.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 모습을 보는데 

그것을 산이라고 생각하고 

산이라고 이름붙여 부른다고 하자. 


그래서 자신은 자신이 보는 그 모습을 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산이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 

자신이 산에 대해서 아는 내용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산에 대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런 내용을 많이 자신이 얻어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왜 복잡해지는가를 

다시 살펴보자. 


누군가 인도에서 이상한 차를 가지고 와서 

그 차를 맛보고 

미국에 사는 누구에게 그 차맛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차맛에 대해 아는 바를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바로 생긴다. 


자신이 맛 본 차맛을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니 

설명하기가 힘든 것이다. 


차맛이 독특하고 

맛이 풍부하고 달콤한 듯 하면서 시큼하기도 하고 

복잡하다. 


이렇게 언어로 기술해보는데 

그런다고 그 언어표현이 차맛을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제 다시 그 차를 직접 보내고 

그것을 상대가 직접 맛보면 그 맛을 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냈는데 

상대가 그 차를 그냥 씹어 보거나 

불에 붙여 태워보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다고 가정해보자. 


결국 자신이 차를 끓이는 방법을 잘 기술하면 

그 상대의 혀나 감관의 구조가 아주 특별하지 않는한 

자신이 맛본 그 차맛과 비슷한 내용을 얻어 맛보지 않겠는가. 

그렇게 일단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다. 


자신만 놓고 생각해도 

그 차를 맛보기전에 

단 사탕을 맛본 다음에 맛을 본 경우와 

쓴 약을 먹고 난 다음에 맛을 본 경우와 

감기가 든 상태에서 맛을 본 경우 

심지어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맛본 경우와 

무언가를 바삐 하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맛보는 경우와 

또는 그것을 자신이 비싼 값을 치루는 가운데 맛 보는 경우와 

누가 자신에게 공짜로 선물해 준 것을  맛보는 경우 

등등이 다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차의 표준적인 맛인가는 

자신도 잘 파악하기 힘들다고 보는데 

상대는 또 어떨까 생각하면 

또 문제가 어려워진다. 


사실은 어렵다. 


왜 그런가하면 

과거에 맛 본 차맛과 

지금 맛 보는 차맛이 비슷하다거나 다르다고는 생각해도 

정작 현재 차를 맛볼 때 

과거에 맛본 그 맛을 다시 자신이 꺼내 확인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지금 맛보는 차맛과 

과거에 맛본 차맛을 현재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한 순간에 무엇을 가지고 자신이 

그런 비교를 하는 것인가. 


사실은 감각하는 감각현실을 놓고 

서로 비교한 것이 아님은  

위 내용으로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지금 과거에 맛본 차맛과 

지금 맛보는 차맛을 비교하고 있는 것인가. 


대충 넘어가면 쉬운 문제가 

엄밀하게 살피면 어려워지는 것이다. 


생활에 지장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무시하거나 건너뛰기 쉬운데 

사실은 이것이 생사 고통을 받는 과정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자신이 성삼문과 같은 상태로 묶여서 

인두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사실은 이 문제를 잘 살펴서 평소에 임했어야 하고 

그에 바탕해서 수행을 했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준이 되어서 

다른 불국토 세계로 여행을 떠나려면 

자기 세계 안에서 여행 허가를 받아야 하고 

상대 불국토에서 비자를 받아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 심사가 현실에서도 이뤄지는데 

그것은 자신과 다른 이상하고 괴이한 생명체를 놓고 

한 주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대하는가. 


예를 들어 

그 상대가 반갑다고 자신의 몸을 접촉하니 

곧바로 굉장히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 순간 자신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 수행자는 

그런 상황에서 평안히 참고 대할 수 있는가가 문제되고 

그 답은 그런 경우 모두 평안히 임하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에서 

먼 외계의 타 불국토 여행을 하려면 

먼저 현실에서부터 

극단적으로 이상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잘 임해 

평안히 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수행자가 그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어느 다른 세계에 가도 

그 수행자가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해서 

예를 들어 

다른 불국토에 방문하는 사바세계의 수행자가 

다른 국토의 생명들을 대하는 가운데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평소 보지 못한 이상하고 괴기한 모습이라고 여기고 

그들과 접촉하고 상대하면 

자신에게 이상한 증상이나 질환이 나타난다고 여기고 

보는 즉시 구두로 짓밟아 버리거나 

기타 도구를 동원해 해치고 

또 자신이 배가 고프면 

함부로 다른 생명을 해쳐 잡아 먹거나 한다면 

이것이 하나같이 문제가 된다고 할 것이다. 


가끔 어떤 오지 탐험의 프로그램을 보면 

오지에 들어간 이들이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데 


여기의 시청자들이 볼 때는 

그것이 그런 오지에 들어간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마땅한 당연한 활동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놓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생명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같이 문제상황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수행자가 평소 수행할 때 

모기나 파리나 기타 

자신이 평소에 잘 보지 못해 

괴이하다고 보게 되는 곤충을 대할 때마다 

그런 반응을 보이면서 수행을 해왔다면 


그 수행자는 이 지구안에서조차도 

조금만 거처를 달리 옮겨서  

바다에 가거나 하늘 공중이나 정글에 가거나 하면 

곧바로 그런 문제를 만나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 경우 상대 입장에서는 그 수행자가 

다른 곳에서 갑자기 방문하여 

그 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을 해치고 

심지어 그 곳의 어린 수행자를 비롯해서 

최고 수행자까지 보는 즉시 해치려고 임하니 

그곳에서는 그 수행자를 그곳에 침입하는 

테러범처럼 보게 될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사바세계의 수행자가 다른 불국토를 방문할 때마다 

그 다른 국토의 생명들이  

일제히 사바세계의 수행자를 기준으로 

그 수행자가 친근한 형태로 다 변신을 해 

그 수행자를 맞이해야 한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경우는 예를 들어  

한국의 수행자가 인도 정도만 방문한다고 가정해도 


인도에서 생활하는 수행자들이  

한국 수행자가 방문하면 그곳의 수행자들이 일제히 

한 순간 모두 

한국 수행자를 기준으로 

한국 수행자가 친근하게 여길 형태로 

옷도 한복으로 갈아입고 

음식도 한국 음식을 먹어야 하고 

또 서로 만날 때도 인사도 한국인처럼 서로 주고 받아야 하고 

기타 모든 문화나 언어나 생활형태를 

다 한국 수행자에게 익숙한 상태로 맞추어 주어야 한다고 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한데 

그런 상태에서 이곳 수행자가 방문할 때마다 

그런 사태가 반복되면 

결국 해당 국토에서는 이 사바세계에 

항의서한을 가득 보내오게 될 것이다. 



결국 이곳의 수행자가 다른 불국토를 방문하고자 할 때 

다른 불국토마다 모두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익숙하고 편한 형태로 다 뜻을 맞추어 

변화해 주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면 

반대로 

이 세계의 수행자가

먼저 다른 외계의 다양한 상황에 

자신이 맞추어 변화하여 임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만은 그런 각기 다른 상황을 

평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미리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결국 그것은 현실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어떤 수행자가 평안히 참고 임할 수 있는가 여부가 

핵심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다른 불국토를 방문할 

서원을 갖고 있다면 

그런 수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는 가운데 


사바세계의 여행허가 담당자나 

방문하는 불국토의 비자발급 당사자로부터 

그런 상태에 있는지 여부를 심사받기 위해 


안인 수행의 심사가 있게 된다고 보게 되는데 

그러나 수행자 자신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조금 미뤄도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테스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안인 수행을 하게 되는 사정이 

이미 금강경에도 그렇게 제시되고 있고 

그에 제시된 원칙을 그대로 준수하고 임하면 

바로 PASS 가 되는 것이다. 


즉 가리왕이 수행자를 별 이유없이 불잡아 

사지를 자르고 고문을 가할 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아 

이를 평안히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면 

안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상태라고 할 수 있고 


만일 수행자가 그런 상태에 이른다면 

그 이전 상태와는 수준이 달라 

널리 다른 불국토를 방문할 수 있는 

고급 수행자의 상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사바세계에서는 다른 불국토 자유여행 승인도 받은 상태가 

된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불국토에 비자를 신청하는 대로 

바로 바로 발급받을 수도 있는 상태라고 할 것이고 

이후 해당 수행자가 닦아 나갈 무량행문에서 

필요한 온갖 방편지혜도 

그 상태에 이른 후부터는 

선배 수행자들로부터 무상 공여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볼 것이다. 


그리고 원하면 

자신 스스로 다른 불국토의 중생들이 

자신을 대해 반대로 자신이 이상하고 괴이하게 생겼다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게 

수행자 자신이 상대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환삼매를 증득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반대로 외계 불국토에서 

사바세계를 방문하는 외계의 수행자를 놓고 보면 

그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위 단계를 원만히 통과하지 못하는 상태의 수행자인 경우는 

반대로 말하면 그런 상황이나 그런 방편을 취득할 경우마다 

그것이 하나같이 다 자신이나 다른 중생들과 관련해 

모두 문제가 됨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수행자가 

이론상으로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색불이공 공불이색 

...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하고 구절을 줄줄 외운다 해도 


실제 현실에서 만나는 매 상황마다 

특히 자신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 매 상황에 처해 

위 내용처럼 실제로 임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로 인해 수많은 상황에서 하나같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신이 이해하는 이론대로 

자신이 대하는 현실 일체의 본 정체에 대해서 명확히 잘 파악하여 

그 일체는 모두 본래 '생멸'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 이론 그대로 현실에서 임하여 

그와 같은 내용을 스스로 인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무생법인을 증득하는 것이 대단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생법인을 수행자가 증득해서 

어떤 상태에서도 평안히 임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과거의 상태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올라야 

보다 수준 높은 수행자로 임하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처음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장착하여 수행에 임하면 

모두 수행자라고 보지만, 

그러나 이런 보통의 수행자에서  

불국토를 뜻대로 방문하고 

온갖 방편을 취득하여 중생제도를 행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수행자가 되려면 

이런 수행까지 원만히 성취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이 현실에서 대하는 것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단지 

자신이 거리에서 무언가 앉아 생각하며 수행을 하는 경우처럼 

상대가 자신에게 특별히 고통을 가할 별 사유도 없다고 보는데 

상대가 자신을 갑자기 체포하여 묶고

 

그리고 불에 달군 인두를 들고 와서 

눈도 태우고 

코도 태우고 

손도 잘라내고 그런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하는가. 


큰 일 아닌가. 


그런데 그렇다고 보면 큰 일이고 

그러나 그 본 정체를 놓고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관하고 

임할 수 있으면 

또 그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런 수준 높은 상태에 이르려면 

그런 내용을 

이론상으로 먼저 잘 이해하여야 하고 


그 다음 그 이론대로 

정말 현실에서 임할 수 있도록 훈련에 정진해야 하는 것이 

현실에서 수행해야 할 중요 내용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수행과정에서 

먼저 자신이 그처럼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상황을 하나하나 생각해서 

이미지 트레이닝부터 잘 행하고 


그리고 꿈에서는 정말 

가끔 광속을 넘어 은하와 은하사이를 신속하게 이동해가는 가운데 

각 혜성이나 운석과 충돌해도 

별 탈이 없이 자신은 목적지에 그대로 오고 가고 하는 훈련도 하고 


그리고 현실에서 앞과 같은 

안인 수행 통과 시험을 잘 통과하면 

비로소 말이나 글로만 듣던 불국토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상태에서는 

또 그런 수행을 억지로 할 도리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수행자가 

아마존 정글에 도착하자 마자 

작은 뱀이나 곤충을 보고 곧바로 기절하면 어떡하는가. 


다른 여행단들은 이 분 때문에 

이후 각종 장애상황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



처음 진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차를 에를 들어 자신이 맛본 

차맛의 정체가 무언가를 놓고 

문제를 처음 살폈는데 


차맛의 정체를 하나 살피는 데에도 

대단히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자신 하나만을 놓고도 그 판단이 

그처럼 어려운데 

그러면 다른 이가 맛보는 차 맛은 

자신이 직접 확인가능한가. 



그런데 자신도 그것이 그렇게 어렵고 

다른 이도 역시 그러하다면, 


이제 서로 간에 그 차맛을 놓고 

논의한다면 

그 차맛의 정체는 

무엇을 가지고 서로 확인하게 되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가 기초적으로 제기된다. 




알고보면 감각을 통해 맛보는 

그런 차맛도 그렇지만, 


이 맛을 놓고 각기 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내용도 

사정이 비슷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내용을 

그대로 직접 확인이 가능한가. 

이런 것도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서로 언어를 통해서 

내용을 주고 받게 되어 

같은 말소리를 가지고 서로 대화도 하고 

또 같은 글자로 보고서도 제시하고 읽고 한다고 하는데 


어떤 소리나 글자를 놓고 

각기 어떤 의미를 받아가지는가는 

또 어떻게 확인하는가. 



알고보면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감각현실 하나를 놓고도 

논의하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보게 되는 

사정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차 하나를 놓고 

차맛의 정체를 확인하자고 할 때 

처음 만나게 되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중론송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보다 더 복잡한 논의를 초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더 살펴야 되는 것이다. 


일단 문제가 어렵지만,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데 

그렇게 무리하게 나아가면 

오늘 하루만 논의하다 본인이 곧 사망하고 

끝이 되기 쉽다. 


그래서 조금 쉬고 

다시 이어나가기로 한다. 





자신이 대하고 생각하는 내용의 

본 정체를 현상과 실상을 꿰뚫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반야바라밀다, 지혜의 수행이라고 한다면 


반야심경에서는 

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해서 

마음에 번뇌에 얽혀 걸리고 장애가 있는 상태를 벗어나고 

그래서 일체에 대해 공포를 갖지 않고 

전도몽상을 벗어나고 니르바나에 기본적으로 

이르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자신이 대하는 것의 

정체를 자신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우선 자신의 방안에서는 

평소 자신이 그 내용들을 잘 알고 

익숙하게 대하던 것들만 있어서 

이를 높고 

자신이 공포를 느낄만한 경우는 

보통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이를 

갑자기 괴한이 묶어서 

어디론가 데려가서 

눈을 가리고 

비닐 봉지에 무언가를 담아 놓고 

만져보라고 강제하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무언가 만지니 

이상한 것이 느껴지는데 

거부하니 자꾸 몽둥이로 가격해서 

억지로 만져야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대단히 공포를 느낄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같은 내용이라도 

그것을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그것이 무슨 의미로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하게 되면 

그로 인해 무슨 효용을 얻는가 등등으로 

그에 대해 전반적으로 사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상황을 대한다면 어떤가. 


그러면 앞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놓고 그 정체를 

정확히 잘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상을 정확히 관할 수 있게 되면 

사실은 그 일체에 그처럼 어떤 이가 

그렇게 고통이나 공포를 얻어가질 만한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일체의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고 

일체에 대해 공포를 갖지 않게 되고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고 

반야심경에서는 그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런데 앞에서 문제되는 산이나 

차나 그 어떤 것이던 

그것에 대해 잘 파악하자고 하면 


현실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내용들을 제시해야 하고 


어떤 내용들을 파악해야 

그에 대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잘 

아는 상태라고 보게 되는가. 



일반적인 상태를 표준으로 보고 

이 문제를 대하게 되면 

그런 경우 다양한 내용을 생각하게 된다. 





우선 가장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기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파악해 제시할 내용들로는 

어떤 내용들을 나열하게 되는가를 살짝 살펴보자. 


이것은 결국 6 하 원칙이라고 

기사 작성과정에서 요구되는 기본 내용을 

나열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놓고 그에 대해 모르면 

어떻게 물어보는가. 

의문사를 가지고 그 내용을 물어보는것이다. 

그러니 그 의문에 일일히 답 내용을 

잘 적어 내면 모르는 이에게 

무언가를 잘 알려준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누가? 무엇이?

언제?

어디서?

왜?

무엇을? 무엇(누구)에게? 

어떻게 ?

했는가. 


그리고 다시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있는가에 대해 

또 앞의 의문을 다시 물어 보면서 

계속 이어 나가면 

어떤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앞과 같은 내용은 

그에 대한 다양한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로 묶은 상위의 유개념으로서 

하나의 범주 카데고리라고 제시하게 된다. 


즉 주체 - 시간 - 공간 -목적 - 대상(객체) - 방법 


그리고 이런 내용을 원인과 결과관계나 

나타난 시간 순서 등으로 

각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나열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내용에 대해 

그 정체를 잘 파악하고자 임할 때는 

그에 대해 기술해야 할 내용에 대한 

체계적 범주부터 잘 확보해 놓는 것이 

요구된다. 


기사작성에서는 

위와 같은 범주가 효용이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진리의 논의에서는 

조금은 부족한 점이 보인다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그 범주부터 잘 확보하는 것이 

다시 논의대상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송을 할 때 더 예민하게 문제된다. 


예를 들어 

갑과 을이 다투는 상황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입장은 

이 사건을 과연 어느 재판부에서 담당해야 하는가가 

문제될 때 

이 사건의 내용을 일단 분류해 일정한 항목에 

넣어주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사건은 

민사사건인가. 형사사건인가. 

아니면 행정소송사건인가. 헌법관련사건인가. 

이런 식으로 그 사건의 내용을 

구분지어 어느 재판부가 

담담해 처리할 수 있도록 분류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건의 내용도 명료하게 파악하려면 

각 내용을 그처럼 분류해 파악해나갈 필요가 있게 된다. 


그래서 범주라는 용어에 해당하는 

카데고리는 사실 현실에서 

소송부분에서 그 필요성이 먼저 제기되어 

논의되고 제시되었다는 사정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무언가에 대해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여하튼 이런 문제가 처음에 제기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범주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제각각 다른 범주를 구분해 제시했다고 하는데 


지금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하고 제시하는 문제는 

불교에서도 똑같이 문제된다. 


그것을 다 나열해서 살피기는 힘든데 

여하튼 세상에서 문제되는 내용은 

어떻게든지 체계적으로 일단 묶어서 

분류를 해야 

논의를 잘 진행할 수가 있고 

또 그 논의가 편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입장에서 이 논의가 처음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생각하고 

논의할 만한 내용 그 일체의 것을 

하나하나 다 나열한다고 할 때 

이것을 어떤 체계로 묶어 분류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살펴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가 처음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를 다 논의하는 입장에서 

다른 것은 다 논의했는데 무언가 

그런 분류가 잘못되어서 논의를 마치고 보니 


정작 영희는 빠뜨렸다. 

다이아몬드는 빠뜨렸다고 해보자.  


그래서 기껏 일체에 대해 논의하고 

일체에 대해 살피며 

그에 대한 내용을 제시한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영희나 다이아몬드는 빠지게 되어 


그렇게 논의를 마친 내용이 

이들에 대해서는  

적용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마음이 가볍겠는가. 


논의를 했으면 일체를 다 해야지 

어떻게 그것만 빼놓고 논의하는가. 


또 이것을 다시 포함시켜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반대로 

예를 들어 어떤 것은 


여기에서도 한 번 논의하고 

또 저기에서도 한 번 논의하여서 

중복 논의가 된다고 해보자. 

그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더욱이 그 각 논의에서 

그에 대한 결론이 다 다르게 제시되면 

그것도 또 더 이상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같은 내용의 사건인데 

그 같은 사건을 

각 법원마다 다 제각각 

다룬다고 하고 


그리고 또 결과는 

다 다르다면 

당사자들은 어떡하는가. 


현실에서 민사문제와 형사문제는 성격이 다르기에 

각 판결이 다른 법원에서 내려져도 

그로 인해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그것은 그렇게 미리 범주를 분리했기에 그런 것이지만, 


예를 들어 

현실 내용은 민사적 손해배상관련 사건으로 하나의 내용인데 

각 법원이 이를 다 다룬다고 하자. 


그래서 각 법원의 판결이 하나같이 내용이 같다고 해도 

하나의 같은 내용을 여기저기에서 중복해서 취급하게 되면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가운데 

갑 법원에서는 갑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하고 

을 법원에서는 을이 반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한다면 

당사자들은 이를 어떡하라는 이야기인가. 

곤란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모든 존재를 빠짐없이 논의하여 살피고자 할 때는 

이 일체의 내용을 빠짐없이 포함하면서도 

또 체계적인 분류가 가능하고 

앞과 같은 여러 문제점이 없는 범주 체계를 

하나 확보하는 것부터가 

대단히 필요하면서도 

또 어려운 작업이 된다고 보게 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수동과 능동이란 

범주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 범주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04395&cid=40942&categoryId=31505


그러나 참고로 불교의 입장은 이와 같지는 않다. 



그러니 앞과 같은 기준에서 

이런 다양한 범주를 놓고 먼저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논의과정에서 

각 논의의 초점마다 조금씩 다른 분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일부 내용은 빠지게 된다거나, 

또는 어떤 내용은 중복 논의가 행해지게 되거나 

또 그러면서 

각 논의마다 다른 결론이 제시되는 등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하나의 불어 노래를 놓고 

하나의 노래 파일을 


외국 노래 폴더에 하나 분류해 넣고 

다시 시끄러운 노래라는 이름의 폴더에 하나 분류하고 

취미 오락 폴더에 하나 분류하고 그러면 

오히려 이것이 더 편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겠지만, 

그러나 논의를 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되면 상당히 논의가 혼란스럽고 

번잡하게 된다고 보게도 되는 것이다. 


[...]

지금 논의하는 내용이 

수행자의 불국토 세계 여행에도 필요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불퇴전의 상태에 이르고 

그래서 이후 

무량한 방편 지혜를 얻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제시했는데 

그래서 그 논의의 효용이 대단한 것이다.  



[...]

경전에서 제시된 바에 의하면 
상당히 거리가 멀리 있는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과 
동방의 엄격한 수행을 강조하는 환희국의 
아촉부처님 등이 

알고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한 때 
다 같은 형제로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는 다시  
어떤 경우는 부부로도 지냈다고도 제시되고 
다 사정이 다른데 

여하튼 한 때 각 방위의 부처님들이 
다 그렇게 한 친형제사이로 가족이 되어 
지냈다는 내용도 제시되고 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까마득한데 

여하튼 그 시간을 제시하는 내용 자체가 
상당히 헤아리기 복잡한 시간 단위 
즉, 진점겁이란 단위로 헤아리는 시간으로 
경전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런 시간이 지나서 
그 형제들이 다 각 방위에서 부처님이 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제자를 
그 불국토에 여행보내려고 하는 상황이 되고 나니 
각 세계의 생명형태가 너무 달라진 상태가 
일단 된 것이다. 

경전을 보면 
아미타부처님은 형체가 투명한 상태이라고 하니 
일단 현실의 인간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복잡한 사정이 다 있게 되었는데 
알고보면 이 분들이 다 한 친형제간이었다는 
점이 또 중요한 것이다. 

[ 참고 법화경- 화성유품 - 삼천진점겁 - 16 왕자 - 대통지승여래 ] 


[...]

이제 현실에서 대하고 생각하는 어떤 것의 
본 정체를 살피는 문제를 다시 보기로 하자. 

앞에서 이와 관련해 먼저 범주를 살펴야 할 필요성을  
제시했는데 
늘 그렇지만, 

당장 영희나 산의 정체 파악이 문제될 때 
논의를 추상적인 부분으로 넘어가 
범주론부터 살펴나가자고 하면 
상당히 논의가 어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일단 하나의 구체적 문제를 놓고 
논의를 시작하게 되면 
이런 논의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것이 거꾸로 종합적이고 추상적인 범주론의 논의까지 
논의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는 사정만 
대강 미리 파악하고 이는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이에 덧붙이면 
경전에서 이와 관련하여 
5 온이라거나 
6 대라거나 
12 처 18 계 등의 법수를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이 
현실에서 대하는 일체의 내용을 
빠짐없이 포함시키는 한편 
그 분류항목이 다른 내용을 같이 포함해서 중복되지도 않고 
그 일체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제시하는 
체계가 된다는 것을 
미리 대강 파악해 둘 필요는 있다. 

논서 등에서는 이와 함께 
5 위의 체계[심-심소-색-불상응행법-무위법]도 제시하고 
법화경 등에서는 10 여시 항목 등도 제시하는데 
이것들도 다 나름대로 그런 체계와 관련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보면 
그 분류는 논의 초점에 따라 
수없이 다른 형태로 분류제시할 수는 있다. 

자신이 가장 모든 문제와 관심의 초점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일체의 것을 놓고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그 나머지 일체 
이렇게 간단히 분류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일체를 
노란 색과 노란 색이라고 할 수 없는 그 나머지 일체
이렇게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인데 

문제는 그 분류가 논의를 진행하는 데 
적절한가 
즉 주요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잘 분류했는가. 
서로 중복되거나 
이런 분류로 논의할 대상에서 빠지게 되는 것은 없는가 등이 
그 분류가 적절한 분류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제 구체적 문제로 들어가보자.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보고 그것을 영희나 산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하자. 

그런 가운데 
자신이 그렇게 본 모습과 생각한 내용을 놓고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따지고 살펴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영희가 문제된다면 

영희는 ~ 이다 이런 형태로 
많은 내용을 나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 는 ~~ 이다라는 형태에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 내용들이 무엇무엇인가가 
결국 앞에서 살핀 범주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앞 부분이던 뒷 부분이던 그런 부분에 
들어갈 내용을 구체적으로 무량하게 나열할 수 있다고 할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체계적으로 묶어 보자면 
어떤 개념(유개념~ 범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곧 앞에서 살핀 범주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 그 내용을 나열하면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살피기도 전에 
이것을 다 종합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보자고 하면 
처음부터 이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는 뒤로 넘기고 
일단 산이던 영희던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이에 대해 어떤 내용들을 파악해서 
제시해야 
그에 대한 정체를 올바로 파악한 것이 
되는가를 살펴보자는 의미다.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처음 산이나 영희라는 한 내용을 놓고 
그에 대해 어떤 내용들을 파악해야 
그 산이나 영희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잘 파악한 것이라고 보게 되는가. 


일반적으로 보면 
먼저 자신이 파악하고자 하는 A 에 대해서 
그 A 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 A 는 다른 B C 등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즉 어떤 부분을 놓고 그것이 B C 등과는 구분되기에 
그 부분을 A 라고 따로 묶어 A 라고 생각하거나 칭하면서 문제삼는다면 
그 부분은 다른 B C 등과는 다른 특성, 성품 등이 그 부분에 있기에 
그 부분은 다른 것과 달리 그것을 A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A 라고 한다면 
그 A가 다른 것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품을 갖기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므로 
그 성품을 제시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희를 영희라고 부르는 것은 
영희라고 보는 부분에는 
영희나 철수나 모두 함께 갖는 공통적인 성품(사람임, 생명임)도 있지만, 
영희는 철수와 달리 어떤 영희만의 자신의 성품을 갖고 있기에 
그것을 영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내용을 찾아 나열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A 는 그것이 어떤 구성부분들로 구성되어진 것인가를 
다시 제시해줄 필요도 있다. 
그것이 자동차라면 자동차는 바퀴나 차문이나 범퍼나 그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는 어떻고 
그 각 부품의 결합관계나 체게는 어떻다 이런 것도 제시해줄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A 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A 가 어떤 기능을 갖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인가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타고 달리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식이다. 

그리고 다시 A가 어떤 동작을 하는가도 설명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살핀 기사작성과정에서 요구하는 각 내용을 
넣어서 기술하게 되는 내용도 그런 것일 것이다. 

그리고 A 에 대해서 또 자세히 설명하자면 
A 가 그런 형태로 나타나게 된 
원인을 설명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자동차는 무엇을 재료로 해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다. 
이 참외는 어떤 씨를 뿌려 어떤 밭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런 내용이 그런 내용인 것이다. 

그 원인가운데 결과에 직접적인 것은 인이라고 하고 
간접적인 관계가 된다고 보는 것은 연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데 

참외를 놓고 보면 
참외씨는 참외하고만 직접 관련이 되기에 
참외와 관련해서는 참외의 인이라고 보게 되고 

참외가 길려진 땅은 
참외와 관련은 되지만, 
반드시 참외하고만 관련된다고 보기는 힘들고 
참외나 수박 사과 기타 건물 그 모든 것과 다 관련이 되는 것이므로 
참외에 대해서는 연이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A 에 더 자세히 살피면 
A 가 거꾸로 앞과 같은 원인이 되어서 
발생시키는 결과들도 제시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참외는 직접적으로 먹으면 배가 부른다. 이런 것도 제시할 수 있는데 
참외가 앞에서 연의 위치에서 낳을 수 있는 간접적인 여러 결과들  
또는 그 결과로부터 또 발생된다고 보는 또 다른 결과들도 
망라해 제시해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동차를 놓고 설명하면 
자동차는 물건이 사람을 이동시키는 결과가 직접적인 결과라고 보게 되지만, 

자동차가 반드시 그런 결과만 발생시킨다고 할 수는없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을 이를 통해 만나게 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부상도 발생시키고 
또 그런 결과가 다시 발생시키는 결과들까지 
그에 의한 간접적인 결과로 포함시켜 제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것들이 결국 
어떤 A 에 대해 그 정체를 자세히 살펴보자고 임할 때 
현상적으로 그에 관련된 내용을 나열할 때 
나열할 수 있는 기본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내용들이 골격이 되어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이제 
무량한 내용으로 나아가게 됨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를 살필 때도 

문제삼는 A가 B 와 결합하면 어떻게 되고 
또 C 와 결합하면 어떻게 되고 
또는 D 와 와 결합하면 어떻게 되고 
또는 B 와 C 와 D 등과 다 함께 결합하면 어떻게 되고 
..... 이런 식으로 자세히 살피면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그 A 의 모습이나 성품을 처음 파악해 제시할 때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하면 이렇고 
이런 렌즈를 끼고 촬영하면 이렇고 
적외선 카메라로 살피면 이렇고 
그것을 몇 만배로 확대해 살피면 이렇고 
이런 식으로 나열하면 또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성재료나 구성부분 체계를 살필 때도 
각 부분을 얼마나 자세하게 나열하는가. 
그리고 그 부분들의 상호관계나 조직도 그렇고 
문제삼는 a 가 도 다른 내용들과 
전체적으로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도 역시 문제되는 것이다. 

즉 전체와 부분, 부분과 다른 부분들, 
그리고 그것과 그것을 포함하는 다른 전체와의 관게 
이런 것들이 다 문제삼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체적으로 엔진 자동차문, 바퀴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동차는 엔진을 통해 움직이는데 
그 엔진은 또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또 이 자동차는 또 전체적으로 교통수단들에 포함되고 
차고 안의 다른 물건과 어떤 관계에 위치한다던지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이런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가운데 

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열해서 종합적으로 살피고 
그 본질을 꿰뚤어 그 실상을 관하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면 
그런 가운데 그 궁극적인 내용은 
결국 모두 차별없이 평등하다고 하는 내용까지 
제시하게 되는 것이 
불교 경전의 기본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런 내용은 
어떤 A 가 문제될 때 
그에 대해 파악할 큰 골격으로 
법화경에서 제시되는 10 여시의 항목을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상(相)ㆍ성(性)ㆍ체(體)ㆍ역(力)ㆍ작(作)ㆍ인(因)ㆍ연(緣)ㆍ과(果)ㆍ보(報)ㆍ본말구경(本末究竟)
이런 항목들과 관련되는 내용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위 글자를 놓고 
각기 어떤 의미로 이해하는가는 
또 그 각 글자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는 문제가 된다. 

한 단어를 놓고 그 정체를 파악할 때는 

A 의 개념 
구분개념
광의로서의 A의 의미 
협의로서의 A의 의미
또는 물리학에서의 A 의 의미 
또는 화학에서 사용할 때의 A의 의미 
철학에서의 A의 의미
어떤 저서에서 사용하는 A 의 의미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그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어떤 단어를 놓고 
그 의미나 내용을 설명할 때 
이런 방편이 모두 사용되는 것이다. 

앞에서 상(相)ㆍ성(性)ㆍ체(體) 이런 단어가 
무슨 의미인가가 정말 문제되면 
사실 각 입장마다 수없이 다른 의미를 
또 이들 표현으로 나타내는 사정이 있기에 
그것도 또 대단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혹시 성(性)ㆍ체(體) 란 표현이 
현상에서 현실적으로 어떤 주체가 얻을 수 있는 내용으로서 
성품이나 구조 재료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런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본질적이고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본성이나 본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의미한다고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영희나 산이나 자동차 이런 것을 놓고 
그 정체를 파악하자면 
일단 현실에서 그러그러한 내용을 나열해 놓고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면 
결국 위에 제시한 내용은 일단 명칭과 관계없이 
일단 살피기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놓고 
또 그 실재의 내용이나 본체가 어떤가를 
다시 살피는 것도 가능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현실에서 무언가에 대해 
내용을 제시할 때 그런 내용들을 일단 
나열하게 된다고 보는 입장에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실체나 실재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10 여시 항목과 관련해서는 
최종적으로 이런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실체는 무아 무자성 무소유이고 
그 실재는 공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므로 
이 모든 것이 다 차별없이 평등한 것이다라고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결국 범주에 대해서는 생략해 넘어가고 
구체적 문제를 살핀다고 하면서 
10 여시의 항목을 설명한 것이 되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놓고 살펴나가자면 
자연스럽게 그러그러한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살피고 그 내용을 나열해야 되기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나열해 살피는 것이 
현실에서 문제되는 어떤 a 에 대해 
일반적으로 살피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인과도 제시하여 살핀 것이고 
모습 (상)이나 성품도 제시하여 살핀 것이고 
그에 관련된 명칭들도 하나하나 나열해 
설명하고 제시하는 것인데 

왜 종국적으로는 
이들이 다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고 
중론송이나 경전에서는 
또 다시 그 정체에 대해 설명하는가. 

사실 이 부분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정을 논의하는 것이 
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이 핵심적으로 
설하시게 되는 핵심 내용이기도 하고 

또 일반 불교신자들이 많이 대하는 
금강경 반야심경 기타 
여러 대승경전 등에서도 
이런 입장에서 
그 실상에 대해 자세히 제시하고 


또 이러한 내용을 다시 
더 보충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각 보살님들이 논서를 저술해 설명하는데 

결국 용수보살님의 중론송의 주된 초점은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놓고 
다시 이런 내용을 
실재하는 내용으로 그리고 실다운 내용이라고 
고집하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 

그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논의이므로 

중론송의 논의는 일반적인 설명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

참고로 중론 송등에서 논의는 
주로 앞과 같이 나열하는 내용을 
어떤 이가 이를 실답다고 보고 고집하고 주장할 때 
그것을 논파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고 
왜 현실에서 실답다고 보는 내용을 
하나같이 꿈이나 환여처럼 실답지 않고 
그것에는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이 [무아, 무자성,]
그 실재 내용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공한 것이라고 제시하는가. 

이런 것이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위에 붙여 놓은 노래에서도 
그런 사정을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고 
시감상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은 차별적인 모습과 내용을 얻고 대하게 되는데 
보디사뜨와 수행을 하는 가운데 알고보니 
그것들을 다 부수고 버려할 망상적인 분별인 것으로 

알고보면 생멸 변화를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으로서 
그 실재는 공하여 
생멸변화를 얻지 못하는 무위법에 해당한다고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 내용을 보디사뜨와 수행자가 
확실하게 파악하고 깨닫고 이해해야 하는데 

언뜻 생각하면 실상이 그러하기에 
모든 것이 다 같이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을 통해 
오히려 실망을 받게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바탕에서 
수행자는 모든 생사 고통을 벗어나서 
사바세계를 포함해서 온갖 불국토에서 
유희 자재 신통력으로 임할 수 있게 되고, 

현실에서 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 멀리 떨어진 
불국토까지도 뜻대로 여행을 다녀오고 
온갖 중생을 제도할 방편지헤도 원하는 대로 
다 취득하고 
또 자신이나 외부세계나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켜 임할 수 있는 여환삼매도 증득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여 
끝내 법신을 증득해서 성불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 매인 상황에서는 
이렇게 경전에서 제시되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이해도 안되고 
공상적인 구라성 내용이라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또 대단히 필요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자신이 바위나 
꽃 하나를 대하고 
그 본 정체가 무언가를 자세히 살피게 되면 
그 모든 것에서 다 그 사정을 그렇게 
살피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

무언가의 정체를 살피는 문제는 
그 동안 많이 살펴온 내용이기도 하므로 
과거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제시하면서 

왜 현실에서 무엇을 놓고 그것이 A 라고 하고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제시하게 되는 내용들을 하나같이 
꿈이나 환영과 같이 실답지 않고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것(무위법)이라고 제시하는가. 

이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결국 수행이란 기본적으로 다양한 수행을 통해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에 들어서서 
해탈을 얻고 
생멸변화가 없는 이계과를 
기본적으로 얻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글이 길어져서 지치게 하는 감도 있기에 
조각글을 바꿔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이 꽃이라고 여긴다면 

이 꽃을 놓고 그 정체가 과연 정확히 무언가를 
살피는 문제는 
혼자서라도 간단히 실험을 해볼 수 있다고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 사투리로는 '이뭐꼬' 라는 화두처럼 
이것이 무엇인가를 주제로 놓고 
깊이 연구하는 활동을 시작하면 
쉽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 실험에 도움이 되는 힌트를 제시한다면 
자신이 대하는 내용을 놓고 
자신이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지는데 
자신이 얻었던 그 모습은 그 정체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상태에서 돗수가 센 색안경을 구해 
썼다 벗었다를 하면 그 모습이 한꺼번에 
다 달라지는데 
자신이 처음 본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자신의 손가락을 눈에 대면 
그 모습이 이그러지기도 하고 

또 손을 뻗쳐 그 모습에 대면 
촉감도 느껴지고 
소리도 나는데 
또 이것들은 무언가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이 처음 대한 그 내용과 
그에 대해 생각한 내용들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이 그 힌트가 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런 실험을 자신만 홀로 해도 되지만, 

다시 다른 이에게 그런 실험을 하게 하고 
그 보고를 들어보면서 
자신이 행한 내용과 관찰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기도 하고 

비록 그렇지는 않아도 
위와 같은 상황을 혼자 생각해보면서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음미해보거나


또는 자신을 그런 제 3 자의 위치에 놓는다고 하고 
그런 자신을 다시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처음 관찰한 그 내용을 검토하면 또 어떤가 
이런 것을 놓고 


깊게 생각하면 

현재 반야바라밀다경전이나 
중론송 등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본 내용과 그 의미가  
무엇이고 

그리고 
왜 현실에서 어떤 a 를 놓고 
이렇다 저렇다, 그런 a 가 생겨나고 멸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내용들 일체를  놓고 

그 모든 것에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
얻을 바가 없어서  
무소유이고 불가득이고 
무아 무자성 공하다고 제시하면서 

그 일체가 모두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게 되는가.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내용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핵심사항이자, 
광대무변한 불국토를 여행하고 
심지어 시간 여행까지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이론이기도 하니 
이번 기회에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5.txt ☞◆vqtf6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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