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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6-09-07_연생론_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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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6-09-07_연생론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12. 23. 20:58



®

『연생론』
K0641 
T1652

연생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연생론_K0641_T1652 핵심요약





♣0641-001♧
『연생론』




연생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연생론



 

연생론(緣生論)



울능가(鬱楞迦) 지음

달마급다(達磨笈多) 한역

유옥영 번역



하나[一]에서 셋[三]이 생기고,

셋이 전전(展轉)하여 여섯[六]이 생긴다.

여섯[六]에서 둘[二]이 생기고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기며,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


여섯에서 셋이 있고,

이 셋에서 다시 셋이 있다.

셋에서 넷이 생기고,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


셋에서 하나가 생기고,

저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기니,

그 가운데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


열두 가지의 차별이

훌륭히 청정해서 공(空)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연생지[緣生分]의 힘 때문이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


무지(無智:無明)ㆍ업(業)ㆍ식(識)과

명색(名色)ㆍ근(根:六入)ㆍ세 가지 화합(和合:觸)과

앎[知:受]ㆍ갈[渴:愛]ㆍ취(取)와

모임[集:有]ㆍ나옴[出:生]ㆍ무르익음[熟:老]ㆍ뒤의 끝[後邊:死]이다.


첫 번째와 여덟 번째ㆍ아홉 번째는 번뇌이고,

두 번째와 열 번째는 업(業)이며,

나머지 일곱은 모두 고(苦)이니,

이 세 가지에 열두 가지 법이 포함된다.


처음의 둘은 과거이고,

뒤의 둘은 미래이고,

나머지 여덟은 현재이니,

이것을 삼시법(三時法)이라고 한다.


번뇌가 일어나면 업이 과보를 감응하며,

과보는 다시 번뇌를 생기게 한다.

번뇌는 또 업을 생기게 하고,

업으로 인해 또 과보가 있게 된다.


번뇌를 여의면 어찌 업이 있으리,

업이 무너지면 과보도 또한 없다.

과보가 없으면 곧 번뇌를 여의니,

이 셋이 각기 저절로 소멸된다.


다섯 가지 원인(因)이 결과(果)를 생하게 하니,

이것을 번뇌의 업이라고 부른다.

일곱 가지는 결과이니,

일곱 가지의 괴로움[苦]을 응당 염(念)해야 한다.


원인이 공(空)하므로 결과가 없고,

원인 가운데는 원인 또한 없다.

결과가 공하므로 원인이 없고,

결과 가운데에는 결과 또한 없다.


원인과 결과가 모두 공하니,

지혜 있는 이는 공과 상응한다
[범본(梵本)에서는 한 게송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한 게송 반(半)으로 한다].



세간 속의 네 가지는

원인과 결과의 화합으로 있는 것이고

번뇌와 업과 과보가 화합하면

여섯 부분이 되어야 한다.


유(有)의 마디[節]가 포함되기 때문에

두 개의 마디와 세 가지 요약[略]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섞여 마디를 이루므로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둘과 둘과 셋과 셋과 둘,

괴로움의 시기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짓는 자[作者]와 모태[胎歲]와 경계(境界),

전생(轉生)이 시작됨[發轉]과 흘러감(流行)이다.


미혹과(迷惑果)ㆍ발기과(發起果)와

보과(報果)와 진류과(津流果)의 둘은

근(根) 중에서

하나ㆍ하나ㆍ셋ㆍ둘과 상응한다.


열뇌과(熱惱果)ㆍ빈핍과(貧乏果)와

전출과(轉出果)ㆍ진류과(津流果)는

남은 부분의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과 상응한다.


이 열두 가지는

똑같은 힘의 반연으로 저절로 생겨나니,

중생도 없고 수명[命]도 없고

움직여 짓는 자[動作者]도 없음을 지혜로 알라.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결과로서의 나도 없고 나의 원인[我因]도 없음,

이 네 가지는 지혜 없는 공(空)이고,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다.


단멸[斷]과 상주[常]의 두 극단[二邊]을 여의면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니

만약 이것을 깨달아 성취하면

그 깨달음의 주체[覺體]가 바로 모든 부처이다.


부처님[仙聖]은 다 깨닫고 나서 대중들에게

내가 없음[無我]을 설하셨으니,

일찍이 『성유경(城喩經)』에서

큰 스승[導師]께서 이러한 뜻을 설하셨다.


『가전연경(迦栴延經)』에서는

정견(正見)과 공견(空見)을 설하시고,

『파라구이경(破邏具膩經)』[장수(張宿)의 이름이다]에서도

수승한 공에 대해 설하셨다.


만약 반연하여 생김[緣生]에 대해 바로 알면

이러한 앎이 공(空)과 상응하며,

만약 반연하여 생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저 공함도 알지 못한다.


만약 공에 대해 아만[慢]을 일으키면

오취온(五取蘊)을 싫어하지 않게 되고

만약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는 곧 연생의 의미를 미혹한 것이다.


연생에 미혹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만을 없애서 저 공함을 알면

또한 오취온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업과 과보의 화합[業果合]을 미혹하지 않는다.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겨나니

또 이것1)에 반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공을 반연하여 마땅히 이것2)이 있는 것이니

업보의 수용(受用)이 갖추어지게 된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앞에서 이미 연생(緣生)이라고 했다.

그것은 번뇌와 업(業)과 고(苦), 

셋 가운데

법대로 포섭된다.


세 가지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일곱이 생기며

일곱에서 다시 셋이 생기니

이와 같이 바퀴처럼 돌고 돈다.


인과로 인해 생기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공한 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연(緣)에 의지해 번뇌가 생기고

연에 의지해 또 업도 생기며

연에 의지해 과보 또한 생기니,

어느 것도 연 없이 생긴 것은 없다.


송(誦)ㆍ등불[燈]ㆍ도장[印]ㆍ거울[鏡]ㆍ소리[音]와

햇빛[日光]ㆍ씨앗[種子]ㆍ식초[酢]와

오온은 이어지지 뛰어넘어 이르는 것이 아니니,

지혜로운 자는 이 두 가지3)를 잘 관찰해야 한다.


연생삼십론(緣生三十論)의 본송(本頌)을 마치고, 

이제 연생삼십론에 대해 차례대로 해석하겠다.


하나에서 셋이 생기고,

셋이 전전(展轉)하여 여섯이 생긴다.

여섯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기며,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


‘하나에서 셋이 생긴다’에서 ‘하나’란 지혜가 없는 것[無智]을 말한다. 

지혜가 없는 것은 무명(無明)이다. 

이는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에 대해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복행(福行), 

복이 아닌 행[非福行], 

동요하지 않는 행[不動行]의 삼행(三行)이 있게 된다. 

또 그것이 전전하여 몸으로 짓는 행[身行], 

입으로 짓는 행[口行], 

마음으로 짓는 행[心行] 등이 생겨난다.

‘셋이 전전하여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이 삼행(三行)에서 육식신(六識身)이 생긴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이다.

‘여섯에서 둘이 생긴다’는 것은 이 육식신이 전전하여 두 가지를 생기게 한다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명(名)과 색(色)이다.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명과 색 두 가지가 전전하여 육입(六入)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안입(眼入)ㆍ이입(耳入)ㆍ비입(鼻入)ㆍ설입(舌入)ㆍ신입(身入)ㆍ의입(意入)을 말한다.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이 육입이 전전하여 육촉(六觸)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을 말한다.


여섯에서 셋이 생기고,

이 셋에서 또 셋이 생긴다.

셋에서 또 넷이 생기고,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


‘여섯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그 육촉신이 전전하여 삼수(三受)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말한다. 

‘이 셋에서 또 셋이 생긴다’는 것은 다시 이러한 세 가지의 수가 전전하여 세 가지의 갈애[三渴愛]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욕갈애(欲渴愛)ㆍ유갈애(有渴愛)ㆍ무유갈애(無有渴愛)를 말한다. 

‘셋에서 또 넷이 생긴다’는 것은 이 세 가지의 갈애가 전전하여 사취(四取)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고행취(戒苦行取)ㆍ아어취(我語取)를 말한다.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는 것은 사취에서 전전하여 세 가지의 유[三有]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를 말한다.


셋에서 하나가 생기고,

그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긴다.

그 가운데에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


‘셋에서 하나가 생긴다’는 것은 이러한 삼유(三有)를 반연을 지어서 앞으로 하나의 태어남[生]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긴다’는 것은 다시 이 한 가지에서 늙음[老]ㆍ죽음[死]ㆍ근심[憂]ㆍ슬픔[悲]ㆍ괴로움[苦]ㆍ고뇌[惱]ㆍ곤궁[困]의 일곱 가지가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에 모든 괴로움이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 과정은 무명을 시작으로 하고 고생을 끝으로 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셀 수 없는 종류의 괴로움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고 간략하게 말씀하셨다.


열두 가지의 차별은

훌륭한 청정으로 공(空)이라고 말한다.

연생지[緣生分]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


‘열두 가지의 차별은 훌륭한 청정으로 공[空]이라고 말한다’란 이러한 무지(無智) 등은 서로 달라 섞이지 않아서 열두 가지가 있으며, 

또 그것들은 모두 자성이 모두 공함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듯이 오직 이 공한 법[空法]이 스스로 공한 법을 생기게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란 차례로 연생지의 세력에 의하기 때문이니, 

이 열두 가지 법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 미혹의 모습[迷惑相]은 무명이다. 

저 행의 구처[行句處]4)는 쌓여서 존재하는 모습이 행(行)이다. 

저 식의 구처[識句處]는 그 다음에 생명을 받아 분리의 전변으로 모습을 출현한 것이 식(識)이다. 

명색의 구처[名色句處]에는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이 화합하는 것을 명색이라고 한다. 

육입의 구처[六入句處]는 모습이 모습을 안치하는 것을 육입이라고 한다. 

촉의 구처[觸句處]는 안(眼)ㆍ색(色)ㆍ식(識)이 함께 모이는 모습을 촉이라고 한다. 

수의 구처[受句處]는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면서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라고 한다. 

갈애의 구처[渴愛句處]는 만족할 줄 모르는 모습을 갈애라고 한다. 

취의 구처[取句處]는 잡아 지녀서 섭취(攝取)하는 것을 취라고 한다. 

유의 구처[有句處]는 명신과 색신의 모습을 유라고 한다. 

태어남의 구처[生句處]는 오온이 생겨나는 것을 생이라고 한다. 

늙음의 구처[老句處]는 무르익은 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죽음의 구처[死句處]는 목숨(命根)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근심의 구처[憂句處]는 마음이 높게 들뜬 모습을 근심이라고 한다. 

슬픔의 구처[悲句處]는 우는 소리[哭聲]를 슬픔이라고 한다. 

괴로움의 구처[苦句處]는 몸이 뜨겁게 타는 모습을 괴로움이라고 한다. 

고뇌의 구처[惱句處]는 마음을 졸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고뇌라고 한다. 

곤궁의 구처[困句處]는 매우 피로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곤궁이라고 한다.


무지(無智)ㆍ업(業)ㆍ식(識)과

명색(名色)ㆍ근(根)ㆍ세 가지의 화합[三和合],

앎[知]ㆍ갈증[渴]ㆍ취(取)와

모임[集]ㆍ나옴[出]ㆍ무르익음[熟]ㆍ뒤의 끝[後邊]이다.


여기서 무지(無智)란 무명이다. 

업이란 행(行)이고, 

식은 이해[解]이고, 

명색이란 오온이 모두 모이는 것이고, 

근이란 육입이고, 

세 가지 화합이란 촉(觸)이다. 

앎이란 수(受)이고, 

갈증이란 갈애(渴愛)이고, 

취함이란 잡아 지님이고, 

모임[集]이란 유(有)이다. 

나옴이란 태어남[生]이고, 

무르익음이란 늙음[老]이고, 

뒤의 끝이란 죽음이다.

이들 차별은 서로 포섭하므로 그것을 차례대로 설명하겠다. 

그 속에 업과 번뇌와 과보의 차별이 있다.


첫 번째와 여덟 번째, 

아홉 번째는 번뇌이고

두 번째와 열 번째는 업(業)이며,

나머지 일곱은 모두 고(苦)이니

셋에 열두 가지 법이 포함된다.


세 가지 번뇌란 무명ㆍ갈애ㆍ취이다. 

두 가지 업이란 행ㆍ유이다. 

일곱 가지 과보란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생ㆍ노사 등이다. 

이 열두 가지 법이 세 가지에 포함된다.

또 시간[時]에 의한 차별이 있다.


처음의 둘은 과거이고

뒤의 둘은 미래이고,

나머지 여덟은 현재이니

이것을 삼시법(三時法)이라고 한다.


처음의 두 가지인 무명ㆍ행은 과거이고, 

뒤의 두 가지인 생ㆍ노사는 미래이고,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갈애ㆍ취ㆍ유의 여덟 가지는 현재이다.

또한 이것들은 각각 차례대로 생겨난다.


번뇌가 일어나면 업이 과보를 감응하며

과보는 다시 번뇌를 생기게 한다.

번뇌는 또 업을 생기게 하고

업으로 인해 또 과보가 있게 된다.


번뇌ㆍ업ㆍ과보 세 가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 번뇌로 인해 업이 있고, 

업 때문에 과보가 있게 된다. 

또 과보 때문에 번뇌가 있고, 

번뇌 때문에 업이 있으며, 

업이 있기 때문에 과보가 있게 된다.



【문】‘번뇌가 다하게 되면 업과 과보가 각각 없어지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답】게송으로 말한다.


번뇌를 여의면 업이 어찌 있으리.

업을 없애면 또한 과보도 없다.

과보가 없으면 곧 번뇌를 여의니

이 셋이 각기 저절로 소멸된다.


만약 이 마음이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으면 곧 업이 쌓이지 않게 된다. 

업을 짓지 않으면 이는 곧 과보를 받지 않게 된다. 

과보가 소멸하면 번뇌도 또한 생겨나지 않게 되니, 

이와 같이 세 가지가 각각 저절로 소멸된다.

또 이것에는 원인과 결과의 구별이 있다.


다섯 가지의 원인이 결과를 생기게 하니

이것을 번뇌의 업이라고 부른다.

일곱 가지는 결과이니

일곱 가지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의 원인을 번뇌와 업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명ㆍ행ㆍ갈애ㆍ취함ㆍ유이다. 

‘일곱 가지의 결과가 생긴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곱 가지의 괴로움이니, 

이를테면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생ㆍ노사이다.

또 이 원인과 결과 두 가지는 공(空)한 것이다.


원인 가운데에는 공하므로 결과가 없고

원인 가운데에는 원인 또한 없다.

결과 가운데에는 공하므로 원인이 없고

결과 가운데에는 결과 또한 없다.

원인과 결과가 모두 공하니,

지혜 있는 이는 공과 상응한다[범본(梵本)에서는 한 게송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한 게송 반(半)으로 하였다.]


여기서 말한 원인과 결과 두 가지 중에서 만약 그 속에 원인이 결과를 갖지 않는다면 결과도 또한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원인은 또한 원인을 갖지 않고 결과 또한 결과를 갖지 않는다. 

이 네 가지 경우와 마땅히 상응해야 한다.


이것에 또 다른 구별이 있다.


세간 속의 네 가지 구별은

원인과 결과가 화합하기 때문에 있다.

번뇌ㆍ업ㆍ과보가 화합하면

여섯 부분이 되어야 한다.




‘세간 속의 네 가지 구별은 원인과 결과가 화합하기 때문에 있다’는 것은
이치상의 다섯 가지 원인과 일곱 가지 결과가 화합하기 때문에
전체를 간략히 하면 네 가지가 된다. 

차례로 네 가지 구별이 있다. 

그 중에서 무명ㆍ행은 과거의 법으로 두 법이 제1분(第一分)이다.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는 현재법으로 제2분(第二分)이다. 

갈애ㆍ취ㆍ유도 역시 현재법으로 제3분(第三分)이다. 

생ㆍ노ㆍ사는 미래법으로 두 법이 제4분(第四分)이다. 

이것을 네 가지 구별이라고 한다.

‘번뇌ㆍ업ㆍ과보가 화합하면 여섯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번뇌ㆍ업ㆍ과보의 세 가지가 화합하면 순서 때문에 두 근본에 여섯 가지 부분이 있게 된다. 

그 가운데 무명을 포함해 수(受)까지는 무명을 근본으로 하고, 

갈애(渴愛)를 포함해 노사(老死)까지는 갈애를 근본으로 한다. 

무명근 중에서 무명은 번뇌 부분[煩惱分]이고, 

행은 업 부분[業分]이며,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는 과보 부분[報分]이다. 

갈애근 중에서 갈애ㆍ취는 번뇌 부분이고, 

유는 업 부분이며, 

생ㆍ노사는 과보 부분이다.

또 마디의 구분과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유(有)의 마디가 포함되기 때문에

두 개의 마디와 세 가지 요약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섞여 마디를 이루므로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유(有)가 마디의 기본이 되어 두 개의 마디가 생긴다. 

이를테면 유와 생, 

두 가지 사이가 첫 번째 마디이다. 

행과 식 두 가지 사이가 두 번째 마디이다. 

이 두 개의 마디는 모두 업과 과보의 마디이다. 

수와 갈애 중에는 원인과 결과가 함께 섞여 있으므로 세 번째 마디이다. 

이 세 개의 마디는 또 네 가지 전체적인 요약[總略]이 있다. 

무명ㆍ행의 두 가지는 첫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고, 

식ㆍ명ㆍ색ㆍ육입ㆍ촉ㆍ수, 

다섯 가지는 두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며, 

갈애ㆍ취ㆍ유, 

세 가지는 세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고, 

생ㆍ노사, 

두 가지는 네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다. 

이것을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라고 말한다.

또 이들 법 가운데에는 머무는 시기[住時]의 차별이 있다.


둘[二]과 둘과 셋[三]과 셋과 둘로

괴로움의 상태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짓는 자[作者]ㆍ모태[胎歲]ㆍ경계(境界)와

전생(轉生)이 시작됨[發轉]과 흘러감(流行)이다.


‘둘과 둘’이란 무명ㆍ행의 두 가지와 식ㆍ명색의 두 가지를 말한다. 

‘셋과 셋’이란 육입ㆍ촉ㆍ수의 세 가지와 갈애ㆍ취ㆍ유의 세 가지를 말한다. 

또 ‘둘’이란 생ㆍ노사의 두 가지를 말한다. 

이들 다섯 가지의 법은
괴로운 상태의 짓는 자ㆍ모태ㆍ경계ㆍ전생의 시작ㆍ태어남[出生]이고 그 가운데의 흘러감[流行]을 숫자의 순서대로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무명ㆍ행의 두 가지는 괴로운 상태의 짓는 자라고 설하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식ㆍ명색의 두 가지는 괴로운 상태의 모태이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육입ㆍ촉ㆍ수의 세 가지는 괴로운 상태의 전생이 시작됨이며, 

생ㆍ노사의 두 가지는 괴로운 상태의 태어남을 말한다.


또 과(果)의 차별이 있다.


미혹과(迷惑果)와 발기과(發起果)와

보과(報果)와 진류과(津流果)의 둘은

상응하는 근(根) 중에서

하나ㆍ하나ㆍ셋ㆍ두 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무명근과 갈애근이다. 

첫 번째 무명근에는 미혹과ㆍ발기과ㆍ보과ㆍ진류과가 있으니 네 가지의 과라고 말한다. 

하나ㆍ하나ㆍ셋ㆍ두 가지로 나뉜 가운데 차례대로 상응해야 한다. 

그 가운데 무명은 미혹과(迷惑果)이고, 

행은 발기과(發起果)이며, 

식ㆍ명색ㆍ육입은 보과(報果)이고, 

촉ㆍ수는 진류과(津流果)이다.


또 다른 과(果)가 남아 있다.


열뇌과(熱惱果)ㆍ빈핍과(貧乏果)와

전출과(轉出果)ㆍ진류과(津流果)는

남은 부분의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과 상응한다.


앞에서 말한 두 번째 갈애근 중에서 열뇌ㆍ빈핍ㆍ전생ㆍ진류과 등은 숫자의 순서대로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에 상응한다. 

그 중에서 갈애ㆍ취는 열뇌과이고, 

유는 빈핍과이고, 

생은 전출과이고, 

노사는 진류과이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의 과가 있다.


이 열두 가지는

똑같은 힘의 반연으로 저절로 생겨난다.

중생도 없고 수명[命]도 없고

움직여 짓는 자[動作者]도 없음을 지혜로 알라.


이와 같이 무명이 처음이고 노사가 끝인 열두 가지는 똑같이 수승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반연으로 생겨나서 중생도 없고[無衆生], 

수명도 없고[無壽命], 

움직여 짓는 자도 없음[無動作]을 지혜로써 알아야 한다. 

그 중에 ‘중생이 없다’는 것은 고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고, 

‘수명이 없다’는 것은 나[我]가 없기 때문이고, 

‘움직여 짓는 자가 없다’는 것은 짓는 자[作者]가 없기 때문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결과로서의 나도 없고 나의 원인[我因]도 없다.

이 네 가지에 대한 무지는 공하고,

나머지 부분도 이와 같다.


내가 없다는 것에 대한 무지, 

나의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무지, 

결과로서의 내가 없다는 것에 대한 무지, 

나라는 원인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무지이다. 

이 가운데에는 내가 없기 때문에 네 가지의 무지(無智)는 공하다. 

이 네 가지가 차례대로 무지가 공하듯이 행(行) 등의 나머지 부분도 모두 공함을 알아야 한다.


단멸[斷]과 상주[常]의 두 극단[二邊]을 여의면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니

만약 이것을 깨달아 성취하면

그 깨달음의 주체가 바로 모든 부처이다.


있음은 상주[常]에 포섭되고, 

없음은 단멸[斷]에 포섭된다. 

이와 같은 두 극단이 다른 것을 반연하게 되면, 

그곳에서 모든 존재[有]가 전변하여 생기게 된다. 

이 두 극단을 여의면 바로 중도인데, 

지혜가 없는 외도들은 극단에 떨어진다. 

이미 깨달은 모든 부처님이라면 깨달음의 주체가 되어서 이 세간에서 홀로 성취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모두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은 다 깨닫고 나서 대중들에게

내가 없음[無我]을 설하였다.

일찍이 『성유경(城喩經)』에서

부처님께서 이러한 뜻을 설하셨다.


세존께서는 이 중도를 깨닫고 나서 모든 대중들에게 내가 없음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여기는 어린아이와 같은 범부와 법을 들은 적이 없는 부류는 가명(假名)에 수순해 떨어진다. 

그 가운데에는 다시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생길 때에는 다만 고통이 생기고 소멸할 때에는 다만 고통이 소멸한다.”

부처님께서 이미 『성유경』에서 이러한 뜻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가전연경(迦栴延經)』에서는

정견(正見)과 공견(空見)을 설하시고,

『파라구이경(破邏具膩經)』[장수(張宿)의 이름이다]에서도

수승한 공(空)에 대해 설하셨다.


이들 세 가지 경(經)과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것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반연하여 생김[緣生]을 바로 알면

그러한 앎은 공과 상응한다.

만약 연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것의 공함도 알지 못한다.


앞에서 연생을 말한 것처럼 만약 바른 앎이 있으면 차별 없음을 아는 것인데, 

또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공에 대해 알게 된다. 

‘만약 연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것의 공함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만약 연생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것이 공한 것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공(空)에 대해 자만[慢]을 일으키면

오취온(五取蘊)을 싫어하지 않게 되니,

만약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는 곧 연생의 의미를 미혹하는 것이다.


‘만약 공에 대해 자만을 일으키면 오취온을 싫어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만약 공에 대해 자만심을 일으키면 오취온[五受衆]에 대해 싫어해 여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는 곧 연생의 의미에 대해 미혹하게 된다’란, 

만약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러한 연생의 의미를 미혹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의 견해 중에서 어떤 견해를 따라 취하게 되는가? 

첫째는 소멸하여 없어져 버린다는 견해[斷見], 

두 번째는 항상한다는 견해[常見], 

세 번째는 자유자재로 말하는 대로 변한다는 견해[自在化語], 

네 번째는 오직 숙세에 지은 업에 따른다는 견해이다.


연생을 미혹하지 않기 때문에

자만을 여의고 그것이 공함을 안다.

또한 오취온을 싫어하기 때문에

업과 과보의 화합[業果合]을 미혹하지 않게 된다.


‘연생을 미혹하지 않기 때문에 자만을 여의고 그것이 공함을 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각각의 연생을 미혹하는 마음이 없고 아울러 나와 나의 것을 취하는 것에서 자만을 여읜다면, 

그러면 능히 법대로[如法] 공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취온을 싫어하기 때문에 업과 과보의 화합에 대해 미혹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오취온[五受衆]에 대해 나와 나의 것을 취하기 때문에 모든 세간에서의 ‘윤회’가 멈추지 않게 되고, 

그 오취온을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업과의 상속에 대해 전도되지 않고 미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 묻는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기니,

이것을 반연하지 않음이 없다.

연이 공하므로 반드시 이러한

업보의 수용(受用)이 있게 된다.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기니, 

이것을 반연하지 않음이 없다’란 번뇌와 업의 염오[染]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업으로써 중생을 밀어내 버려 옆ㆍ위ㆍ아래에서 상속(相續)하여 생겨난다. 

만약 이러한 업(業)이 없다면 연을 짓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업을 짓지 않았는데도 오게 되고, 

또 이미 지었는데도 잃게 된다. 

‘온다[來]’는 것은 업을 짓지 않았는데도 그 과보가 곧 오는 것을 말하고, 

‘잃는다[失]’는 것은 업을 이미 지었는데도 그 과보를 문득 잃는 것을 말한다. 

‘연이 공하므로 반드시 이러한 업과 과보의 수용이 있게 된다’란 이러한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업으로 인해 과보의 수용이 있다면, 

곧 자성(自性)이 공한 것이다. 

본래 내가 있어 연을 짓고 과보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니, 

저 자성이 공함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지금 그 뜻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열두 가지의 차별이

연으로 생김은 이미 앞에서 설하였다.

저 번뇌와 업과 괴로움의

셋 가운데 법대로[如法] 포섭된다.


무명을 처음으로 하고 노사를 끝으로 하는 이 열두 가지 연생의 차별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 가운데 세 가지는 번뇌에, 

두 가지는 업에, 

일곱 가지는 고(苦)에 모두 포함된다.


세 가지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일곱이 생기며

일곱에서 다시 셋이 생기니

이와 같이 바퀴처럼 돌고 돈다.


무명ㆍ갈애ㆍ취의 세 가지에서 행ㆍ유의 두 가지가 생긴다. 

이 두 가지에서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생ㆍ노사의 일곱 가지가 생긴다. 

이 일곱 가지에서 앞에서 말한 세 가지가 다시 생긴다. 

이 세 가지에 또 두 가지가 생기고, 

이 두 가지에서 또 다시 일곱 가지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차례로 끊임없이 바퀴와 같이 돌고 돈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공한 법(空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란 무명ㆍ행ㆍ갈애ㆍ취ㆍ유의 다섯 가지를 원인이라 하고,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생ㆍ노사의 일곱 가지를 결과라고 한다. 

이들이 존재하는 모든 세간, 

즉 나[我]거나, 

혹은 중생이나, 

혹은 목숨[壽]이나, 

혹은 태어나는 자[生者]거나, 

혹은 장부(丈夫)나, 

혹은 사람이나, 

혹은 행위를 짓는 주체[作者]와 같은 이런 것들을 첫머리로 삼아서 차례로 분별하면 모두 공허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이는 오직 공한 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란 말하자면 자성의 공함[自性空] 가운데 오직 거짓 이름[假名]뿐인 번뇌ㆍ업ㆍ과이니, 

단지 따로 공한 거짓 이름이 있어 번뇌ㆍ업ㆍ과의 법이 생김을 말한다. 

이것이 그 뜻이다.


연(緣)에 의지해 번뇌가 생기고

연에 의지해 또 업도 생기며

연에 의지해 과보가 또한 생기니,

어느 것도 연 없이 생기는 것은 없다.


만약 번뇌가 있으면 곧 수없이 많은 종류의 업이 있게 되고, 

그 갖가지의 업에서 과보가 생기게 된다. 

그들은 모두 인(因)을 공유하고 연(緣)을 공유하고 있으니, 

어디에도 인연 없이 생기는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 이러한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제 다시 비유를 말한다.


송(誦)ㆍ등불[燈]ㆍ도장[印]ㆍ거울[鏡]ㆍ소리[音],

햇빛[日光]ㆍ씨앗[種子]ㆍ식초[酢]와 같이,

오온은 이어지지 뛰어넘어 이르는 것이 아니니,

지혜로운 자는 이 두 가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

가령 송(誦)에는 송을 가르치는 자와 송을 배우는 자가 있는데, 

가르치는 송이 배우는 사람에게 이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르친 송은 여전히 가르치는 사람에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친 송이 상속하는 것도 아니니, 

그 이유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등불이 차례로 생겨날 때 처음의 등불이 뛰어넘어 이르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 등불이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장[印]과 찍힌 형상[像]의 두 가지, 

얼굴[面]과 거울[鏡]의 두 가지, 

소리[聲]와 메아리[響]의 두 가지, 

햇빛[日]과 불[火]의 두 가지, 

씨앗[種子]과 싹[芽]의 두 가지, 

식초[酢]와 입 속의 침[舌涎]의 두 가지, 

이러한 것들은 모두 뛰어넘어 이르는 것도 아니고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인(因) 없이 그 두 가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취온이 상속하여 이를 때에 첫 번째의 취온이 뛰어넘어 이르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의 취온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인(因)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오취온의 상속이 뛰어넘지 않고 차례로 도달함을 응당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또 외수용(外受用)과 내수용(內受用)에 각각 열 가지가 있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여야 한다. 

그 중에 외수용의 열 가지란, 

첫째는 항상하지 않음[非常], 

두 번째는 완전히 끊어짐이 아님[非斷], 

세 번째는 뛰어넘어 이르는 것이 아님[不超到], 

네 번째는 중간이 없음[無中間], 

다섯 번째는 앞의 몸이 아님[非彼體], 

여섯 번째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님[非別異], 

일곱 번째는 짓는 자가 없음[無作者], 

여덟 번째는 원인이 없지 않음[非無因], 

아홉 번째는 생각 생각이 공함[念念空], 

열 번째는 같은 종류의 결과가 함께 묶임[同類果相繫]이다.

저 외부의 모든 종자[外種]는 남김없이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싹이 생겨 나오기 때문에 완전히 끊어짐이 아니다. 

종자가 소멸하여 다 없어졌을 때 그 싹은 본래 없었으나 지금 생기기 때문에 뛰어넘어 이르는 것이 아니다. 

저 상속하는 바가 단절됨이 없이 원인과 결과가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간(中間)이 없는 것이다. 

종자와 싹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앞의 몸이 체(體)는 아니고, 

그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인연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으며, 

종자가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지도 않다. 

종자ㆍ싹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 등이 서로 연결되어 서로 생겨나기 때문에 생각 생각이 공하다. 

달고 시고 짜고 쓰고 맵고 떫은 것은 원인에 따라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결과가 함께 묶이는 것이다.

그 중 내수용의 열 가지란, 

첫째는 죽은 오취온은 남김없이 멸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다음 생의 오취온을 얻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죽은 오취온이 남김없이 없어졌을 때 다음 생의 오취온이 본래는 없다가 이제 생기기 때문에 뛰어넘어 이르는 것이 아니다. 

네 번째, 

오취온이 상속하며 끊어짐이 없고 원인과 결과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간이 없다. 

다섯 번째, 

죽은 오취온과 다음 생의 오취온이 다르기 때문에 앞의 몸[彼體]이 아니다. 

여섯 번째, 

앞의 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지 않다. 

일곱 번째, 

인연의 화합으로 생겼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다. 

여덟 번째, 

번뇌와 업이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지는 않다. 

아홉 번째, 

가라라(迦羅邏, kalala)ㆍ알부타(頞浮陀, arbuda)ㆍ폐시(箄尸, peśi)ㆍ가나(伽那, ghana)ㆍ발라사거(鉢羅奢佉, praśakhā)ㆍ출태(出胎)ㆍ갓난아기ㆍ어린아이ㆍ청소년ㆍ어른 등으로 연결되어 상속하여 생기므로 생각 생각이 공하다. 

열 번째, 

선(善)과 불선(不善)의 훈습은 원인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 나오므로 같은 종류의 결과[同類果]가 함께 묶인다.

또 세 개의 게송이 있다.


마치 등불이 불꽃이 끊임없이 타오르듯이

식신(識身) 또한 마찬가지라서

앞 찰나[先際]와 뒤 찰나[後際]가

모여 쌓임이 없다.


생기지 않는 것[不生]과 생기는 것[生]에 대해

파괴해서 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생겨났어도(生已) 머무르지 않으니,

이것이 업의 굴림[業轉]을 짓는다.


만약 저 연생(緣生)에 대해

능히 잘 관찰하여 공함을 알게 되면

그것이 시설한 가르침이고

그것이 또한 중도(中道)라네.


이 가운데 무명ㆍ행ㆍ갈애ㆍ취ㆍ유는 집제(集諦)이고,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생ㆍ노사는 고제(苦諦)이다. 

이들 열두 가지가 소멸하는 것이 멸제(滅諦)이다. 

만약 연생(緣生)에 대해 진실하게 알게 되면 이것이 도제(道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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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空)을 말한다.

2 업보의 수용(受用)을 말한다.

3 원인(因)과 결과(果)라는 조건(緣)을 말한다.

4 구처(句處)란 이치(理致)`의미(意味)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 [pt op tr]



◆vvuw5045

◈Lab value 불기255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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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6-09-07
θθ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와 함께 쓰이는 말.
생사와 열반이 상즉불이(相卽不二)함을 표시, 범부에 있어서는 번뇌와 보리게 아주 다르지마는,
불지견(佛知見)을 얻으면 번뇌에 번뇌의 모양이 없고, 열반에도 열반의 모양이 없어서 온전히 하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답 후보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석가(釋迦)
선(禪)

선교(善巧)
선남자선녀인(善男子善女人)
선실(禪室)
선종(禪宗)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K0641 

10gfl--2012-09월_난해잡설.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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