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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12-10_대반야바라밀다경_427 본문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
T0220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27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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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 핵심요약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27권
현장 한역
27. 산화품(散花品) ②
■ 용어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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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야바라밀다경
해제보기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27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김월운 번역
27.
산화품(散花品) ②
“또 교시가(憍尸迦)야,
네가 먼젓번에 묻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는 어디에서 구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는데,
교시가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는 마땅히 물질[色]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물질을 여의고서 구하지 말 것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여의고서 구하지 말 것이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一切智)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일체지를 여의고서 구하지 말 것이며,
도상지(道相智)와 일체상지(一切相智)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도상지와 일체상지를 여의고서 구하지 말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반야바라밀다와 구하는 것과 물질과 내지 일체상지(一切相智)와 이와 같은 온갖 것들은 다 상응하는 것도 아니요,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빛깔도 없고 볼 수 없고 대할 수 없는 한 모양,
즉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이 아니요,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여읜 것도 아니요,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가 아니요,
일체지를 여읜 것도 아니요,
도상지와 일체상지가 아니요,
도상지와 일체상지를 여읜 것도 아니며,
물질의 진여도 아니요,
물질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진여가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의 진여가 아니요,
일체지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요,도상지와 일체상지의 진여가 아니요,
도상지와 일체상지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며,
물질의 법 성품이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법 성품이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의 법 성품이 아니요,
일체지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요,
도상지와 일체상지의 법 성품이 아니요,
도상지와 일체상지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가 있지 않아서 도무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있지 않아서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우는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이 아니요,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내지 일체상지가 아니요,
일체상지를 여읜 것도 아니며,
물질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며,
내지 일체상지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이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내지 일체상지의 법 성품이 아니요,
일체상지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니라.”
그때 제석천왕이 선현에게 말하였다.
“대덕(大德)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는 드넓은 바라밀다[大波羅蜜多]이며,
한량없는 바라밀다이며,
그지없는 바라밀다이니,
모든 예류(預流)들이 이 가운데서 배우면,
예류의 과위를 얻을 것이요,
일래(一來)들이 이 가운데서 배우면 일래의 과위를 얻을 것이요,
불환(不還)들이 이 가운데서 배우면,
불환의 과위를 얻을 것이요,
아라한(阿羅漢)들이 이 가운데서 배우면 아라한의 과위를 얻을 것이요,
독각(獨覺)들이 이 가운데서 배우면 독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요,
보살마하살들이이 가운데서 배우면 한량없는 백천 구지(俱胝) 나유다(那庾多)를 이루어 주어 그들의 상응하는 바에 따라 삼승의 도에 두며 갖가지 불국토를 장엄 청정하며,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할 것입니다.”
선현이 말하였다.
“그렇느니라,
그렇느니라.
그대의 말과 같으니라.
교시가야,
물질이 드넓은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드넓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드넓은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드넓으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가 드넓은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드넓으며,
도상지와 일체상지가 드넓은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드넓으니라.
왜냐 하면 교시가야,
물질과 내지 일체상지의 앞ㆍ뒤ㆍ중간 시간을 모두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드넓다고 하나니,
그것이 드넓은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드넓다고 하느니라.
이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를 드넓은 바라밀다라 하느니라.
교시가야,
물질이 한량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한량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한량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한량없으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가 한량없는 까닭에 보살마하살들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한량없으며,
도상지와 일체상지가 한량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한량없나니,왜냐 하면 교시가야,
물질과 내지 일체상지의 한량[量]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비유컨대 허공의 한량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물질 등의 한량도 얻을 수 없나니라.
교시가야,
허공이 한량없는 까닭에 물질 등도 한량없으며,
물질 등이 한량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한량이 없나니,
이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를 한량없는 바라밀다라 하느니라.
교시가야,
물질이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으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으며,
도상지와 일체상지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나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물질과 내지 일체상지의 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비유컨대 허공의 끝을 얻을 수 없는 것 같이 물질 등도 그러하여서 그지없다 하느니라.
교시가야,
허공이 그지없는 까닭에 물질 등도 그지 없으며,
물질 등이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또 교시가야,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제석천왕이 물었다.
“어떤 것이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다 하는 것입니까?”
선현이 대답하였다.
“일체지의 지혜[一切智智]도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또 교시가야,
법계(法界)의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제석천왕이 물었다.
“어떤 것이 법계의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는 것입니까?”
선현이 대답하였다.
“법계가 그지없는 까닭에 반연할 바도 그지없으며,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법계도 그지없으며,
법계의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또 교시가야,
진여의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제석천왕이 물었다.
“어떤 것이 진여의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는 것입니까?”
선현이 대답하였다.
“진여가 그지없는 까닭에 반연할 바가 그지없으며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진여도 그지없으며,
진여의 반연할 바가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또 교시가야,
유정이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느니라.”
제석천왕이 물었다.
“어떤 것이 유정이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는 것입니까?”
선현이 대답하였다.
“너의 생각은 어떤가?
유정이라 말하는데,
유정이란 어떤 법을 더하는 말[增語]인가?”
제석천왕이 대답하였다.“유정이라 말하나 유정이란 법을 더 하는 말이 아니요,
법을 더 하는 말이 아닌 것도 아니어서 다만 임시로 세운 헛된 이름에 포섭되며,
일 없는 이름에 포섭되며,
인연 없는 이름에 포섭되는 것일 뿐입니다.”
선현이 다시 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떤가?
이 반야바라밀다의 매우 심오한 경전 가운데서 실다운 유정이 있다고 표현한 것이 있는가?”
제석천왕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대덕(大德)이시여.”
선현이 말하였다.
“이 반야바라밀다의 매우 심오한 경전 가운데서는 이미 실다운 유정이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 까닭에 그지없다고 말하나니,
그 중간[中]과 변두리[邊]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네 생각은 어떤가?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긍가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겁을 지나도록 이 세상에 머물면서 모든 유정의 이름을 말한다면 그 가운데 진실로 유정들의 나고 멸함이 있겠는가?”
제석천왕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왜냐 하면 모든 유정의 본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본래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현이 말하였다.
“이 때문에 내가 말하기를 ‘유정이 그지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도 그지없다’ 한 것이니라.
교시가야,
이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를 그지없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28.
수기품(授記品)
그때 무리 가운데서 제석천왕들과 욕계(欲界)의 모든 하늘과 범천왕(梵天王)들과 색계(色界)의 모든 하늘과 이사나(伊舍那) 신선과 천녀(天女)들이 소리를 맞추어 세 번 구수 선현이 말한 것을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존자(尊者) 선현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매우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잘 말씀하시니,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인연이며,
위없는 법문이로다.
만일에 보살마하살이 능히 이와 같이 매우 심오한 반야바라밀다에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여 멀리 여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를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섬기리라.
왜냐 하면 이 반야바라밀다의 매우 심오한 경전 가운데는 얻을 법이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이 가운데는 물질을 얻을 수 없을 수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얻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를 얻을 수 없으며,
도상지와 일체상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와 같은 모든 법을 얻을 수 없으나,
3승의 성스러운 가르침 즉 성문승(聲聞乘)과 독각승(獨覺乘)과 무상승(無上乘)은 시설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하늘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느니라,
그렇느니라.
너희들 말과 같으니라.
이 반야바라밀다의 매우 심오한 경전 가운데서는 비록 물질 등의 모든 법을 얻을 수 없으나,
3승의 바른 가르침을 시설함이 있나니,
보살마하살이 이 반야바라밀다에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말씀과 같게 수행하여 멀리 여의지 않는 이는 너희들 모든 하늘들이 항상 공경히 섬기기를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과 같이 하라.
왜냐 하면 모든 하늘들아,
이 반야바라밀다의 매우 심오한 경전 가운데는 비록 3승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다고 널리 말하였으나 보시 바라밀다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보시 바라밀다를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내지 반야 바라밀다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반야 바라밀다를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내공(內空)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내공을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내지 무성자성공(無性自性空)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무성자성공을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4념주(念住)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4념주를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도 없으며,
내지 18불불공법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18불불공법을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일체지를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도상지와 일체상지에 의해서 여래를 얻을 수 없으며,
도상지와 일체상지를 여의고서도 여래를 얻을 수 없나니라.
모든 하늘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에서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이러한 보시 바라밀다와 내지 일체상지를 부지런히 닦고 배우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 반야바라밀다에서 능히 바르게 수행하여 항상 멀리 여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그러한 보살마하살을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처럼 공경히 섬겨야 할 것이니라.
하늘들아,
잘 알아야 하느니라.
내가 과거 연등(燃燈) 부처님 때에 중화왕(衆華王)의 서울 네 거리에서 연등 부처님을 뵙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바쳤으며,
머리털을 풀어 진흙 위에 덮고 묘한 법을 들었나니,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은 까닭에 곧 보시 바라밀다와 내지 반야 바라밀다를 여의지 않았으며,
내공과 내지 무성자성공을 여의지 않았으며,
4념주와 내지 8성도지를 여의지 않았으며,
4정려(靜慮)ㆍ4무량(無量)ㆍ4무색정(無色定)을 여의지 않았으며,
온갖 삼마지문(三摩地門)과 온갖 다라니문(陀羅尼門)을 여의지 않았으며,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해(無碍解)와 대자(大慈)ㆍ대비(大悲)ㆍ대희(大喜)ㆍ대사(大捨)와 18불불공법(佛不共法)을 여의지 않았으며,그밖에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그지 없는 불법(佛法)을 모두 여의지 않게 되었느니라.
그러자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큰 깨달음의 수기(授記)를 주시되 ‘선남자야,
너는 미래 세상에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지나서 이 세계의 현겁(賢劫) 동안에 부처를 이루리니,
석가모니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라 할 것이며,
반야바라밀다를 널리 말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때 모든 하늘들이 모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거룩하십니다.
선서(善逝)이시여,
이러한 반야바라밀다는 매우 심오한 것으로서 보기 드문 것이라 할 수 있나니,
모든 보살마하살로 하여금 속히 일체지를 받아들이게 하되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온갖 물질에 대해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게 하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에 대해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게 하며,
내지 일체지에 대해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게 하며,
도상지와 일체상지에 대해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게 하나이다.”
그때 부처님께서 사부대중의 화합을 관찰하시니,
이른바 필추(苾蒭)ㆍ필추니(苾蒭尼)ㆍ오파삭가(鄥波索迦)ㆍ오파사가(鄥波斯迦)와 모든 보살마하살들과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과 내지 색구경천(色究竟天)들이 모두 모여들어 함께 증명하였다.
그때 제석천왕을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어떤 보살마하살이건 필추ㆍ필추니ㆍ오파삭가ㆍ오파사가이건 모든 천자와 천녀들이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건 일체지의 지혜[一切智智]를 여의지 않고,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이 반야바라밀다를 공경히 듣고,
외워 지니며,
부지런히 닦고 익혀서 이치와 같게 생각하며,
남에게 설명해 주어 널리 퍼뜨리면이러한 무리들은 온갖 악마와 악마의 무리가 요란시키거나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은 물질의 공함[空]ㆍ모양 없음[無相]ㆍ서원 없음[無願]에 잘 머물렀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공함ㆍ모양 없음ㆍ서원 없음에 잘 머무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의 공함ㆍ모양 없음ㆍ서원 없음에 잘 머무르기 때문이며,
도상지와 일체상지의 공함ㆍ모양 없음ㆍ서원 없음에 잘 머무르기 때문이니,
공함으로써 공을 요란시키거나 해칠 수 없으며,
모양 없음으로써 모양 없음을 요란시키거나 해칠 수 없으며,
서원 없음으로써 서원 없음을 요란시키거나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가 제 성품[自性]이 없어 요란시키거나 해치는 이와 요란시키거나 해치는 대상 모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인비인(人非人)들이 해치지 못하리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모든 유정에 대해 자애로움ㆍ불쌍히 여김ㆍ기뻐함ㆍ평정의 마음을 닦기 때문이니라.
또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끝내 온갖 험악한 인연에서 해롭힘을 입지 않으며,
또한 횡사(橫死)하지도 않으리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보시 바라밀다를 수행하여서 모든 유정을 바르게 잘 기르기 때문이니라.
또 교시가야,
이 삼천대세계에 있는 사대왕중천들과 내지 광과천(廣果天)들이 이미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켰으되 이 반야바라밀다를 아직 듣거나,
외워 지니며,
부지런히 닦고,
배워서 이치와 같게 생각하지 않은 이는 마땅히 지금부터라도 일체지의 지혜의 마음을 여의지 말고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이 반야바라밀다를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외워 지니며,
부지런히 닦고 익혀서 이치와 같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또 교시가야,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일체지의 지혜의 마음을 여의지 않고,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이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외워 지니며,
부지런히 닦아서 이치와 같게 생각하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집에 있거나,
넓은 들판에 있거나 험난한 길과 어려운 곳에 있을지라도 끝내 겁내고 두렵고,
놀라서 털이 곤두서지 않으리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일체지의 지혜의 마음을 여의지 않고,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내공과 내지 무성자성공을 잘 닦은 까닭이니라.”
그때 이 삼천대천 감인(堪忍) 세계에 있는 사대왕중천들과 내지 색구경천들이 공경히 합장하고 함께 부처님게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에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일체지의 지혜의 마음을 여의지 않고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항상 이 매우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외워 지니며,
부지런히 닦고 익혀서 이치와 같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면 저희 모든 하늘들은 항상 따라 다니면서 옹호하여 온갖 재앙이 침노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곧 보살마하살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영원히 지옥(地獄)ㆍ방생(傍生)ㆍ귀신 세계[鬼界]ㆍ아소락(阿素洛) 등의 모든 험악한 갈래가 없어질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모든 하늘 사람과 약차(藥叉)와 용(龍)들이온갖 재앙ㆍ질병ㆍ빈궁ㆍ기갈(飢渴)과 추위와 더위 등의 온갖 고통을 영원히 여의게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모든 하늘 사람과 아소락들이 갖가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영원히 여의고 가는 곳마다 전쟁이 영원히 그쳐 온갖 유정들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세간에는 10선업도(善業道)와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과,
보시 바라밀다와 내지 반야바라밀다와,
내공과 내지 무성자성공과,
4념주와 내지 18불불공법과,
내지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가 있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세간에는 찰제리(刹帝利)의 대종성ㆍ바라문의 대종성ㆍ장자(長者)의 대종성ㆍ거사(居士)의 대종성과,
작은 나라의 국왕들ㆍ전륜성왕(轉輪聖王)ㆍ신료(臣僚)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세간에는 사대왕중천들과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범중천(梵衆天)과 내지 색구경천(色究竟天)과,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과 내지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세간에는 예류(預流)와 예류의 과위[預流果]가 있으며,
내지 아라한(阿羅漢)과 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가 있으며,
독각(獨覺)과 독각의 깨달음[獨覺菩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이 때문에 세간에는 모든 보살마하살이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시켜 주고,
불국토를 장엄하며,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
묘한 법륜을 굴려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하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세간에는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필추승보(苾芻僧寶)가 있어서 온갖 유정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까닭에 저희들 하늘대중과 아소락과 모든 용과 약차들과,
큰 세력이 있는 인비인(人非人)들이 항상 따라 다니면서 이 보살마하살들을 공경하고 수호하여 온갖 재앙이 침노하지 않게 하고,
반야바라밀다를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닦아 익혀 이치와 같게 생각하고,
베껴 쓰는 일들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제석천왕과 다른 하늘들과 용과 아소락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느니라,
그렇느니라,
너희들 말과 같으니라.
이 보살마하살 때문에 모든 유정들이 나쁜 갈래를 영원히 단절하고 내지 삼보(三寶)가 세간에 나타나서 모든 유정에게 큰 이익을 주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들 모든 하늘과 용과 귀신과 그리고 큰 세력이 있는 인비인들은 항상 따라 다니면서 이 보살마하살을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여 부지런히 지키고,
보호해주어 온갖 재앙이 침노하지 않게 하라.
너희들이 만일 이 모든 보살마하살을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여 부지런히 지키고,
보호하면 이는 곧 나와 시방의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을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여 부지런히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이 보살마하살을 따라 다니면서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여 부지런히 지키고 보호하되 잠시도 저버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늘들아,
가령 삼천대천 부처님 세계에 마치 감자(甘蔗)ㆍ갈대ㆍ대숲ㆍ벼ㆍ삼[麻]ㆍ풀더미들이 빈틈 없는 것처럼 성문ㆍ독각이 가득할 경우 어떤 선남자와선여인이 그 복밭에다 한량없는 종류의 높고 묘한 음악 기구로써 그들의 목숨이 다하도록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단 한번 처음으로 마음을 일으켜 6바라밀다를 여의지 않는 보살마하살에게 잠시동안이라도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할 경우,
앞의 공덕을 이 복덕과 비교해보면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오파니살담(鄥波尼殺曇)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왜냐 하면 성문ㆍ독각에 의하여 보살마하살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보살마하살에 의하여 세간에는 성문ㆍ독각과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들 온갖 하늘과 용과 아소락과 인비인들은 항상 이 보살마하살을 수호하고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여 온갖 재앙이 침노하지 못하게 해야 하느니라.
너희들이 이렇게 하여 얻은 복덕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늘 가운데 항상 안락을 얻을 것이며 나중에는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리니,
이렇게 얻은 복덕은 항상 다함이 없으리라.”
29.
섭수품(攝受品)①
그때 제석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매우 신기하고 희유하시니,
이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녀 외우고,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나이다.
이렇게 희유한 현재 공덕의 수승함을 섭수하여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하게 하며,
한 불국토에서 한 불국토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 세존을 친근하여 받들어 섬기며,모든 선근에 대해 좋아하는 바를 따라 모든 부처님께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한 까닭에 곧 자라나서 속히 원만케 하며,
모든 부처님께 바른 법을 들으면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한번도 잃지 않고,
속히 받아들여 종성(種姓)이 원만하고 낳아주실 어머니가 원만하고 태어날 몸이 원만하고 권속이 원만하고 상호(相好)가 원만하고 광명이 원만하고,
훌륭한 눈이 원만하고 훌륭한 귀가 원만하고 음성이 원만하고 등지(等持)가 원만하고 총지(摠持)가 원만합니다.
또 방편 선교의 힘으로써 스스로의 몸을 교화하여,
부처님의 형상과 닮게 되고 한 세계로부터 한 세계에로 나아가되 부처님이 없는 국토에 이르러서는 보시 바라밀다와 내지 반야 바라밀다를 찬탄하여 말하며,
내공과 내지 무성자성공을 찬탄하여 말하며,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을 찬탄해 말하며,
4념주와 내지 18불불공법을 찬탄해 말합니다.
또 방편 선교의 힘으로써 모든 유정을 위하여 법문을 말해 주어 타당하게 삼승법 가운데 안치케 하고,
영원히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벗어나서 무여의반열반(無餘依般涅槃)의 세계를 증득하게 하며,
혹은 온갖 나쁜 갈래의 고통을 구제하여 하늘과 인간에서 온갖 묘한 쾌락을 받게 하시나이다.”
그때 제석천왕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와 같이 하여 반야바라밀다가 매우 신기하고 희유하니,
만일에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다를 받아 들이면 곧 6바라밀다를 구족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지 18불불공법을 구족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예류ㆍ일래ㆍ불환ㆍ 아라한의 과위와 독각의 깨달음과,온갖 보살마하살의 행과 모든 부처님의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과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구족히 거두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제석천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느니라,
그렇느니라.
그대의 말과 같으니라.
만일에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다를 받아들이면 곧 6바라밀다를 구족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지 일체상지를 구족히 받아들이는 것이니라.
또 교시가야,
만일에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능히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갖가지 현재와 미래 세상의 공덕과 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마음가짐을 지극히 선하게 가져야 하느니라.
내 기꺼이 너희들을 위해 분별하고 설명해주겠다.”
제석천왕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대성인이시여,
바라던 때가 왔으니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기쁘게 듣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어떤 온갖 종류의 외도들이나,
욕계 자재천(自在天)의 악마와 그 권속이나,
혹은 그밖의 난폭한 증상만(增上慢)을 가진 이들이 이러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에게 갖가지 이롭지 못한 짓을 하여 반야바라밀다를 멀리 여의게 하고 어긋나게 하며,
싫어 등지게 하고 비방하게 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마음을 일으키자마자 재빨리 재앙을 입어 스스로가 멸망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하리라.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보살마하살은 오랜 세월동안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를 수행하였기 때문이니라.
모든 유정들은 간탐하는 마음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다툴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안팎의 것을모두 버리고 방편으로 그들을 보시 바라밀다에 머무르게 하고,
만일 모든 유정들이 오랜 세월동안 계율을 깨뜨릴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안팎의 온갖 것을 모두 버리고 방편으로 그들을 정계 바라밀다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모든 유정들이 오랜 세월동안 성낼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안팎의 온갖 법을 모두 버리고 방편으로써 그들을 안인 바라밀다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모든 유정들이 오랜 세월동안 게으를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안팎의 온갖 법을 모두 버리고 방편으로써 그들을 정진 바라밀다에 머물게 하며,
모든 유정들이 오랜 세월동안 어지러울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안팎의 온갖 법을 모두 버리고 방편으로써 그들을 정려 바라밀다에 머물게 하며,
모든 유정들이 오랜 세월동안 어리석을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안팎의 온갖 법을 모두 버리고 방편으로써 그들을 반야 바라밀다에 머물게 하느니라.
모든 유정들이 나고 죽음에 유전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항상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수면(睡眠)과 번뇌로 그 마음을 얽매이고 흔들리며,
갖가지 이롭지 못한 일을 지을지라도 이 보살마하살은 방편 선교로써 그들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수면과 번뇌의 얽매임을 끊고 4정려ㆍ4무량ㆍ4무색정에 머물게 하며,
혹은 4념주와 내지 8성도지에 머물게 하며,
혹은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에 머물게 하며,
혹은 예류의 과위와 내지 아라한의 과위에 머물게 하며,
혹은 독각의 깨달음에 머물게 하며,
혹은 보살의 10지에 머물게 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의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머물게 하느니라.
교시가야,이것이 이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는 보살마하살이 현재의 공덕과 훌륭한 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이니라.
교시가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 까닭에 미래 세상에 속히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 묘한 법륜을 굴려 한량없는 대중을 교화하며,
본래부터 서원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써 안립하여 삼승(三乘)의 수행을 끝내게 하고 내지 무여열반을 증득하게 하느니라.
교시가야,
이것이 이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는 보살마하살이 미래 세상의 공덕과 훌륭한 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이니라.
또 교시가야,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린다면 그 지방의 어떤 악마나 악마의 권속이건,
혹은 갖가지 외도의 무리들이건,
혹은 그 밖의 포악하고 증상만을 가진 이들이건 반야바라밀다를 미워하여 장애하고,
파괴하고,
숨기게 하고자 하여 방편으로 비난하고,
업신여기고,
저항할지라도 이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이니라.
그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반야의 소리를 들은 까닭에 뭇 죄악이 점점 사라지고,
공덕이 점점 생기며,
나중에는 삼승에 의하여 괴로움의 끝을 다하여 혹은 나쁜 갈래를 벗어나거나,
혹은 인천(人天)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니라.
교시가야,
비유하자면 막기(莫耆)라 이름하는 묘한 약과 같나니,
이 약의 위력은 능히 뭇 독기를 소멸시킬 수 있어,이러한 묘한 약이 있는 곳에는 모든 독충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어떤 독사가 굶주려 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다가 산 짐승을 만나 쏘아서 먹으려 하거든 그 짐승이 두려운 생각을 내어 달아나다가 이 묘한 약을 만나면 뱀은 약 냄새를 맡자마자 곧 도망치나니라.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묘한 약은 큰 위력을 갖추어서 몸과 생명을 이롭게 하고,
뭇 독기를 소멸하기 때문이니라.
반야바라밀다가 큰 위력을 가진 것도 이와 같아서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면 모든 악마들이 이 보살마하살에게 나쁜 짓을 하고자 하여도 이 반야바라밀다의 위신력 때문에 그 나쁜 일들이 그 자리에서 곧 사라져서 아무 짓도 하지 못하리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이 반야바라밀다는 큰 위신력을 갖추어 능히 뭇 죄악을 소멸하고 선법(善法)을 불어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다가 능히 뭇 죄악을 소멸하고,
선법을 불어나 자라게 하는 것이겠는가?
교시가야,
이 반야바라밀다는 능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무명 내지 순수한 큰 고통의 다발[苦蘊]ㆍ가리움[障蓋]ㆍ수면(隨眠)ㆍ얽매임[纏垢]ㆍ결박(結縛)과 나[我]라는 소견ㆍ유정(有情)이라는 소견ㆍ보특가라(補特伽羅)라는 소견ㆍ아주 없다는 소견[斷見]ㆍ영원하다는 소견[常見]ㆍ있다는 소견[有見]ㆍ없다는 소견[無見]과 내지 갖가지 나쁜 소견들과 탐냄ㆍ계를 깨뜨림ㆍ성냄ㆍ게으름ㆍ어지러움ㆍ어리석음과 항상한 생각[常想]ㆍ즐거운 생각[樂想]ㆍ나의 생각[我想]ㆍ맑은 생각[淨想],
그리고 그 밖의 온갖 탐냄ㆍ 성냄ㆍ어리석음ㆍ자만심ㆍ의심 등의 견해의 행들을 소멸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의 집착과 내지 의식의 집착을 멸하며,눈의 집착과 내지 뜻의 집착을 멸하며,
빛깔의 집착과 내지 법의 집착을 멸하며,
안식의 집착과 내지 의식의 집착을 멸하며,
눈의 접촉의 집착과 내지 뜻의 접촉의 집착을 멸하며,
눈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의 집착과 내지 뜻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의 집착을 멸하며,
보시 바라밀다의 집착과 내지 반야 바라밀다의 집착을 멸하며,
내공의 집착과 내지 무성자성공의 집착을 멸하며 4념주의 집착과 내지 18불불공법의 집착을 멸하며,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의 집착을 멸하며,
보리 열반의 집착을 멸하느니라.
교시가야,
이러한 반야바라밀다는 능히 이러한 온갖 나쁜 법을 소멸하며,
능히 그들을 물리치는 법들을 불어나게 하나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큰 위력을 갖추어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다 하느니라.
또 교시가야,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면 이 선남자들과 선여인들은 항상 삼천대천세계의 사대천왕과 제석천왕과 감인(堪忍) 세계의 주인인 대범천왕(大梵天王)과 정거천(淨居天) 등과 하늘ㆍ용ㆍ약차ㆍ아소락들과 그 밖의 착한 신들이 모두 와서 옹호하여 온갖 재앙이 침노하지 못하게 하리니,
법답게 구하는 일은 불만족스런 일이 없으며,
동ㆍ서ㆍ남ㆍ북과 네 간방과 위ㆍ아래의 긍가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의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들도 항상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을 옹호하여 죄악은 점점 소멸하고 선법은 점점 불어나게 할 것이니라.
이른바 보시 바라밀다와 내지 반야 바라밀다를 불어나게 하나니,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기 때문이요,
내공의 관찰과 내지 무성자성공의 관찰도 불어나게 하나니,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기 때문이요,
4념주와 내지 18불불공법도 불어나게 하나니,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기 때문이요,
온갖 삼마지문과 온갖 다라니문도 불어나게 하나니,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기 때문이며,
또는 일체지와 도상지와 일체상지를 불어나게 하나니,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이런 까닭에 말씨가 엄숙하여서 듣는 이가 모두 공경스럽게 받아들이고 요량하거나 말하는 데 말에 어긋남이 없으며,
은혜에 보답할 것을 잘 알며,
선지식을 견고히 섬겨 아낌[慳]ㆍ질시함[嫉]ㆍ성냄[忿恨]ㆍ가리움[覆]ㆍ번민함[惱]ㆍ아첨[諂]ㆍ속임[誑]ㆍ꾸밈[矯] 등에 의해 가리워지지 않으리라.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스스로가 산 목숨 죽이는 일을 여의고는 또 남에게 권하여 산 목숨 죽이는 일을 여의게 하며,
뒤바뀜 없이 산 목숨 죽이는 일 여의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산 목숨 죽이는 일 여읜 이를 찬탄하며,
내지 스스로가 삿된 소견을 여의고는 또 남에게 권하여 삿된 소견을 여의게 하며,
뒤바뀜 없이 삿된 소견 여의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삿된 소견 여읜 이를 칭찬하며,
스스로가 보시 바라밀다를 행하고는 또 남에게 권하여 보시 바라밀다를 행하게 하며,
보시 바라밀다를 행하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보시 바라밀다를 행하는 이를 칭찬하며,
내지 스스로가 반야 바라밀다를 행하고는 또 남에게 권하여 반야 바라밀다를 행하게 하며,
뒤바뀜 없이 반야 바라밀다를 행하는 법을 칭찬하고,기꺼이 반야 바라밀다를 행하는 이를 찬탄하느니라,
스스로가 내공을 행하고 또 남을 권하여 내공을 행하게 하며,
뒤바뀜 없이 내공 행하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내공 행하는 이를 찬탄하며,
내지 스스로가 무성자성공을 행하고,
또 남을 권하여 무성자성공을 행하게 하며,
뒤바뀜 없이 무성자성공을 행하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무성자성공을 행하는 이를 찬탄하며,
스스로가 온갖 삼마지문을 닦고,
또 남을 권하여 온갖 삼마지문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온갖 삼마지문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온갖 삼마지문 닦는 이를 찬탄하며,
스스로가 온갖 다라니문을 닦고 또 남을 권하여 온갖 다라니문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온갖 다라니문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온갖 다라니문 닦는 이를 찬탄하느니라.
스스로가 4정려를 닦고,
또 남을 권하여 4정려를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4정려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4정려 닦는 이를 찬탄하며,
스스로가 4무량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4무량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4무량을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4무량을 닦는 이를 칭찬하며,
스스로가 4무색정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4무색정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4무색정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4무색정 닦는 이를 칭찬하느니라.
스스로가 4념주를 닦고 또 남을 권하여 4념주를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4념주를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4념주를 닦는 이를 칭찬하며,
내지 스스로가 8성도지를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8성도지를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8성도지 닦는 법을 칭찬하며,기꺼이 8성도지 닦는 이를 칭찬하며,
스스로가 3해탈문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3해탈문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3해탈문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3해탈문 닦는 이를 칭찬하며,
스스로가 8해탈문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8해탈문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8해탈문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8해탈문 닦는 이를 칭찬하며,
스스로가 9차제정을 순서대로 하고 역순으로도 하며,
남에게도 권하여 9차제정을 순서대로 하게 하고 역순으로도 하게 하며,
뒤바뀜 없이 9차제정을 순서대로 하고 역순으로 하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9차제정을 순서대로 하고 역순으로 하는 이를 칭찬하느니라.
스스로가 부처님의 10력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10력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부처님의 10력을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부처님의 10력을 닦는 이를 칭찬하며,
내지 스스로가 18불불공법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18불불공법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18불불공법 닦는 법을 칭찬하고,
기꺼이 18불불공법 닦는 이를 칭찬하느니라.
스스로가 잊음이 없는 법[無忘失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恒住捨性]을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잊음이 없는 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을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잊음이 없는 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잊음이 없는 법과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 닦는 이를 칭찬하느니라.
스스로가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닦고 또 남에게 권하여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닦게 하며,
뒤바뀜 없이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닦는 법을 칭찬하며,
기꺼이 일체지ㆍ도상지ㆍ일체상지를 닦는 이를 칭찬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보시 바라밀다와 내지 반야 바라밀다를 수행하되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모든 유정들과 함께 평등하게 공유하고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로 회향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항상 생각하되 ‘내가 만일 보시 바라밀다를 행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빈천한 집에 태어나서 오히려 세력도 없었으리니 어찌 온갖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며,
더구나 일체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만일 정계 바라밀다를 지키지 않았으면,
응당 온갖 나쁜 갈래에 태어나서 오히려 하천한 인간의 몸도 얻지 못했으리니 어찌 온갖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며,
더구나 일체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만일 안인 바라밀다를 닦지 않았으면 응당 모든 감관[根]이 무너져서 겉 모양이 추해 보살의 원만한 몸매를 갖추지 못했으리라.
만일에 보살의 원만한 몸매를 얻고 보살의 행을 행하면 유정들이 보고서 깊이 기쁜 마음을 내어 말하는 것을 믿고 받으며,
반드시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겠지만 만일에 이 원만한 몸매를 얻지 못하면 어찌 온갖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며,
더구나 일체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만일 게을리 하여 정진 바라밀다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오히려 보살의 훌륭한 도도 얻지 못했을텐데 어찌 온갖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며 더구나 일체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만일 마음이 산란하여 정려 바라밀다에 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보살의 훌륭한 선정도 얻지 못했을텐데 어찌 온갖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며,
더구나 일체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만일 지혜 없어 반야바라밀다를 배우지 않았다면 오히려 방편 선교로써 2승의 지위도 초월하지 못했을텐데어찌 온갖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며,
더구나 일체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항상 생각하되 ‘나는 탐냄의 세력을 따르지 않으리니,
그의 세력을 따르면 나의 보시 바라밀다는 원만해지지 못하리라.
나는 계행(戒行)을 깨뜨리는 세력을 따르지 않으리니,
그의 세력을 따르면 나의 정계 바라밀다는 원만해지지 못하리라.
나는 성내는 세력을 따르지 않으리니,
그의 세력을 따르면 나의 안인 바라밀다는 원만해지지 못하리라.
나는 게으름의 세력을 따르지 않으리니,
그의 세력을 따르면 나의 정진 바라밀다는 원만해지지 못하리라.
나는 마음 산란한 세력을 따르지 않으리니,
그의 세력을 따르면,
나의 정려 바라밀다는 원만해지지 못하리라.
나는 나쁜 지혜의 세력을 따르지 않으리니,
그의 세력을 따르면 나의 반야바라밀다는 원만해지지 못하리라.
만일 내가 닦는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를 원만케 하지 못하면 끝내 일체지의 지혜를 얻지 못하리라’라고 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일체지의 지혜의 마음을 여의지 않고,
얻을 바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반야바라밀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 지니고 외우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베껴 쓰고 설명하여 널리 퍼뜨리면 반드시 이와 같은 현재와 미래 세상의 공덕과 훌륭한 이익을 얻으리라.”
○ [pt op tr]
mus0fl--Tony Esposito - Sinue'.lrc
Lab value 불기2562/12/13/목/18:42
●망집에 바탕한 무량겁 생사윤회와 3 해탈삼매 및 반야바라밀다
●현실에서 수행과 생명의 감가상각비용을 고려해야 할 기간의 문제
『중아함경』, 20권 염신경 및 16권 비사경을 살필 때부터
현실에서 수행할 필요성에 대해 살펴오고 있다.
현실에서는 살아 있는 동안
적은 비용을 들여 많은 수익 즉, 많은 좋음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이런 활동에 들어가는 기본 자산으로서 자신의 가격을 생각해야 한다.
즉,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도대체 그 가격을 현금 얼마로 적어야 하는가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기본자산이 되는
자신의 신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여 0 으로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하루 활동하여 소모되어 없어지는 자신의 가치는 또 얼마나 되는가를 헤아려야 한다.
자신은 자신의 신체나 생명을 우주보다 가치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또 한편 그런 자신이 언젠가 죽어 0 의 상태가 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하루에 최소 100 억원 이상은 없어져 간다고 계산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비용을 들여 하루에 무언가를 한다면
이를 통해 어떤 가치를 얻어내야 현명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가장 높은 가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한가를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자신 활동의 기본 자산이 되는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감가상각문제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자신이 내일 죽는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죽기전까지 자신의 삶이나 생명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가치는
우주보다 가치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결국 죽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던 신체나 다른 자산도
자신을 기준으로 하면 0 이 된다.
따라서 하루하루 그 가치가 조금씩 사라져간다고 회계장부에 기재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이 단지 우주보다 가치있다고 시적으로 표현하면 숫자계산이 곤란하다.
그래서 일단 오늘날 국가예산액을 기준으로 대략적으로 469 조원보다는 많다고 하자.
그러면 수명을 100 년 정도 잡고 계산하면 하루당 100 억원 이상의 감각상각비용이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런 비용을 들여서 하루에 무언가를 일을 해서 좋음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그 좋음이 단순히 현금수입일 때는
순수익 = 현금수입 - 앞에 대략적으로 현금액으로 계산한 100 억 이상의 감가상각비용이 된다.
이렇게 되기에 현실적으로 수익이 발생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현금 수입액 가운데에서는 현금이 갖는 특성때문에 우선 성격을 나누어야 한다.
먼저 최소한의 생계비와 이를 넘는 나머지 수입으로 나눠야 한다.
최소한의 생계비는 최소한의 의식주에 들어가는 현금비용이다.
이것이 마련되면 하루의 삶을 연장할 수 있다.
따라서 앞에 산정한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가치와 거의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그 나머지는 또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아무리 많아도 생존기간을 늘려주는데 관련이 적다.
물론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옷이 많거나 음식이 많거나 잠자고 쉬는 공간이 넓어도
생존기간을 그 양에 비례해서 2 배 3 배 늘려주지 못한다.
이는 오히려 주관적으로는 최종적으로 즐거운 맛에 기여하게 된다.
물론 수행방편과 관련하면 이외의 가치를 바꿔 갖는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주관적으로 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최종적으로 즐거운 맛을 얻는데 기여한다.
예를 들어 많은 현금 => 좋은 자동차. 고급음식, 편리한 기계=> 사용 효용 => 즐거운 맛.
그런데 이런 즐거운 맛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수행방편 측면에서 갖는 가치도 그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일단 성격을 이렇게 나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어떤 활동을 해야 하루활동에 들어가는 생명 신체의 감가상각 비용을 넘는
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한한 현금을 갖고도 얻을 수 없는 가치가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한 주체가 생존을 해결한다고 가정하자.
그런 바탕에서는 무한한 현금을 갖고서라도 끝내 얻고자 하는 가치가 무언가를 헤아려야 한다.
그래서 돈으로 평가하기 힘든 돈 이상의 가치를 갖는 내용을 찾아야 한다.
그런 가치를 얻어내야 수익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현금 수입을 얻고자 하는 경우에도 이런 활동과 관련되면 역시 가치를 갖게 된다.
즉, 그런 가치를 최종적으로 얻어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우다.
그런 형태로 현금수익을 추구하면 종합적으로 수익이 발생한 것이 된다.
한편, 일반적으로 평균적으로 예상되는 수명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활동으로 그 수명이 감축되면 반대가 된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건강을 해치는 활동 등을 통해 수명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
또는 범죄나 사고와 관련되어 생존은 하지만,
그 가치가 전반적으로 마이너스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렇게 되지 않도록 이들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80 세까지는 대부분 산다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술과 담배와 과식을 심하게 한다고 하자.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은 하지 않아 일찍 병이 들었다고 하자.
그래서 일찍 사망하게 되었다는 경우가 있다.
또는 어떤 폭행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어서
감옥이나 중환자실에서 남은 기간을 보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단순한 감각상각비용 이상의 손해를 한꺼번에 입은 것이 된다.
내일 사망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남아 있는 기간에 대한 주관적 가치 평가액은 우주를 넘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
이를 고려하면 이는 단지 하루 100 억 원의 손해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그 손해가 몇 십조원 이상으로 막대하다.
이렇게 각 경우 숫자로 바꿔 인식하면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단멸관을 전제로 한 가치회계평가가 된다.
단멸관이란 한 주체가 이번 생에 태어나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입장이다.
즉 죽음 이후 그 주체와 관련되어 이어지는 내용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경우 죽음으로 없어지는 생명 신체의 가치를 고려해야 했다.
이것이 앞에서 살핀 생명과 신체의 감가상각비용의 문제였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다음생에 또 다른 생명의 형태로 삶을 이어간다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이런 경우는 생사 과정에서 다음 생에 어떤 생명 형태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가 앞 문제와 관련된다.
따라서 생명과 신체의 감가상각비용 문제는 다음 생의 생명형태와 관련해
매 경우 달리 평가해야 한다.
만일 3 악도에 태어나야 한다면 역시 거의 0 나 마이너스를 놓고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 다음에도 다시 지금 생과 비슷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이는 비용을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다음에 하늘에 태어난다면 거꾸로 계산해야 한다.
인간의 삶의 줄어들면 오히려 하늘에서의 플러스 효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자동차 폐차의 상황과 사정이 비슷하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구입해 사업을 해간다고하자.
예를 들어 1 억원에 자동차를 구해서 사업을 했다.
그런데 5 년후에 폐차가 되었다.
그런데 폐차가 되면 그 기간 얻은 수입으로
다시 좋은 새차를 구해 사업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폐차가 되고 다시 자동차를 구할 때는
이전보다 조금 상태가 나쁜 자동차를 얻게 된다면 문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달리 생각해야 한다.
1 억원을 들여 구입한 폐차시점까지 그 자동차로 얻은 수익이 5000 만원이다.
이런 수익은 자동차의 감가상각비도 충당하지 못한 손해를 본 것이다.
생명과 신체의 문제도 위와 비슷하다.
단멸관을 취하면 이번 생만 고려하고 임하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이 이번 생에 행한 활동과 관련해
다양한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다음 생의 생명형태는 자신의 과거 무량겁에 걸쳐 행해 온 업에 따라 정해진다.
그리고 이번 생에 생명과 신체를 자산으로 해서 열심히 활동한 것도 중요하다.
그런 가운데 삶을 마치고 다음 생에 바퀴벌레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면
치명적이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현실의 삶에서 수행을 통해 높은 가치를 얻어야 할 사정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반대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행방안에 대해서는 과거 조각글에서도 살폈다.
■■■
●단멸관과 무량한 생사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5275#025
sfed--중아함경_K0648_T0026.txt ☞중아함경 제 16 권
sfd8--불교단상_2562_12.txt ☞ ☞●단멸관과 무량한 생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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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에서 생명에 대한 감가상각비용 계산과 수행으로의 진입
http://buddhism007.tistory.com/5275#001
sfed--중아함경_K0648_T0026.txt ☞중아함경 제 16 권
sfd8--불교단상_2562_12.txt ☞ ☞● 현실에서 생명에 대한 감가상각비용 계산과 수행으로의 진입
----
■■■
● 생명에 대한 감가상각비용을 넘는 가치를 얻기 위한 방안
http://buddhism007.tistory.com/5275#035
sfed--중아함경_K0648_T0026.txt ☞중아함경 제 16 권
sfd8--불교단상_2562_12.txt ☞ ☞● 생명에 대한 감가상각비용을 넘는 가치를 얻기 위한 방안
----
그래서 이와 관련된 내용들은 위 링크들에 넘긴다.
여기서는 한 주체가 자신의 생명과 관련해 고려할 기간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단멸관을 취하면
현실에서 자신으로 보는 몸이 죽음을 맞이하여 사라지는 그 기간까지만
단순히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생사윤회를 인정하면 무량겁에 걸친 기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윤회 문제를 살피려면 다음을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사람으로 살았다.
그런데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형태를 변화해 태어나 살아가는 일이 있을 것인가.
또는 반대로 개로 지내던 이가 다음 생에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일이 있는가.
또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각 생명이 그렇게 다음 생에 태어나게 되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중아함경』 비사경에서도 생사윤회를 부정하는 입장이 나온다.
여기서 비사왕은 사람이 개로 태어난다는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구마라가섭 존자가 이에 대해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동원한 비유다.
따라서 생사윤회에 대한 명확한 논증은 아니다.
그래서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27권 27. 산화품(散花品)을 살피면서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함께 이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4_0406_134733
이는 우선 경전에서 제시하는 다음 내용들과 관련된다.
본래 일반적으로 생사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이를 바탕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병이나 사고를 통해서
더 이상 신체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또 이것이 자신의 삶의 끝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생사윤회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
사실은 그런 생사현실에 그런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생사를 겪는 주체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올바로 깨닫고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서 제거하면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한편 그런 사정을 잘 관하여 깨닫지 못하고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무량겁에 걸쳐
3 악도에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겪게 된다는 내용도 제시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수행이란
그런 무량겁에 걸쳐 받아나갈 3 악도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고
생사고통을 겪지 않게 하는 방안인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 수행자 가운데
중생을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는 경우는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는 가운데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한 가운데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수행에 임한다.
이런 내용도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경전에서 제시하는 조금씩 다른 이런 각 내용들이
서로 혼동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에
이 부분을 이번에 살피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내용과 관련시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 본래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음 [불생불멸]
1 무시무종인 상태로 무량겁에 걸친 생사윤회의 고통
1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여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서원의 성취
이들 내용은 모두
한 주체의 삶의 본 정체를 무엇으로 보기에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주체의 삶의 기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기에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다시 그렇게 무량한 시공간과 관련시키는가.
이런 문제와 모두 밀접하게 관련이 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일단 과거에 자주 제시했던 그림을 올려 놓고
하나하나 살펴나가기로 한다.
>>>
일단 쉬기로 한다.
앞과 같이 주제만 걸어 놓고
그간 살피지 못한 다른 경전 부분들을 살폈는데
위 내용들은 과거에 대단히 많이 반복해 살폈기에
되도록 과거에 살핀 부분을 잘 정리해서 링크로 걸고 생략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3 일간 과거 조각글을 살폈는데 찾지 못했다.
>>>
● 세계와 자신의 정체의 파악을 위한 3 측면
[img2-9]
08pfl--image/8식-9.jpg
위 그림이 현실사정을 이해하기 쉽게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위 그림에서 처음 1! 과 관련된 부분을 이해하려면
다음 그림을 참고하면 된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위 그림은 어떤 이가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보게 되는
자신의 모습 1 부분과 그리고 다른 주체 영희 철수 2,3 그리고 꽃 4 등과 같이
1이 자신 이외의 외부 세계로 이해하는 내용을 대강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위 그림 [img2-02] 에서 1 로 표시한 부분이
처음에 붙인 그림 [img2-9] 에서 1! 안의 a! 에 해당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물론 [img2-9]에서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은
한 주체와 관련된 다양한 정신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들 내용은 최근에 살핀 『현양성교론』의 내용을 조금 참조하면
이런 각 정신이 어떤 내용을 나타내는 것인가를 조금 이해하기 쉽다고 본다.
참조
>>>
[문] 무엇이 식(識)인가?
[답] 식에 여덟 종류가 있다.
아뢰야식, 안식, 이식, 비식, 설식, 몸의 인식과
뜻[意:제7 말나식]과 의식(意識)을 말한다.
『현양성교론』 제1 섭사품(攝事品)
한편, 현실에서 이렇게 감각하고 분별하는 가운데
그 존재의 정체와 그 존재의 있고 없음을 주로 따지게 되는 내용을 놓고 살필 때
주로 실재 - 감각현실[색,성,향,미,촉] - 그에 대한 관념분별
이런 형태로 그 각 존재의 정체와 관계를 살피게 된다.
이는 불교 안에서는 일단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살피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427권 산화품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반야바라밀다의 정체를 살피는데 이 반야바라밀다를
먼저 한 주체가 감각해 얻는 현실내용[물질(색)]과의 관계를 살피면서
이를 물질, 물질의 '진여', 물질의 '법성품'
이렇게 각기 달리 나열하여 그 관계를 살피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 내용이다.
>>>
반야바라밀다는
♣0001-427♧ "물질"이 아니요,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며, ...
"물질의 진여"가 아니요 물질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며, ...
"물질의 법 성품"이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며,
위와 같은 판단을 위해서는
우선 다음과 같은 여러 질문을 전제로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인가. =>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여읜 것도 아니다.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의 진여인가. => 물질의 '진여'가 아니다. 그것을 여읜 것도 아니다.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의 '법 성품'인가 => "물질의 법 성품"이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다.
이런 형태로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살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여기서 잘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ort Shuman - Le Lec Majeur.lrc
Lab value 불기2562/12/13/목/18:42
이 관계를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로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라면을 하나 놓았는데
옆에 갑자기 펑하고 바위가 생기고
그렇게 바위가 펑하고 생기니 다시 또 옆에 사과가 평하고 생기고
사과가 평하고 생기니 다시 옆에 벽돌이 펑하고 생기고
그리고 그렇게 벽돌이 펑하고 생기니 다시 사람이 평하니 생겼다.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 각각의 내용이 서로간에 너무 동떨어지고 엉뚱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내용들이 연이어 생겨났다지만, 그것뿐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어느 한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다른 내용에 있는 내용이라고 갖다 붙이려 하면 안 된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제시하기 위한 비유인가.
경전이나 논서에서 어떤 내용을 제시하게 되면
어떤 이가 그 내용을 그냥 받아들이고 바로 그 내용을 실천에 옮겨서
곧바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용이 이해가 되어도 실천이 대단히 힘들다고 보게 되지만,
그런데 이론적 이해부터가 안 되면 그 실천은 더욱 힘들다.
그래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위와 같은 비유를 든 것이다.
이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실험을 해보자.
그래서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어떤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일단 이론적으로 이해를 해보기로 한다.
지금 책상위에 사과를 하나 놓고 바라보자 .
그 사과를 손으로 붙잡고 눈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손을 두드려 소리를 듣고
그리고 코를 가까이 대서 냄새도 맡고
그리고 입을 대서 사과 맛도 보고
그리고 손으로 만져 촉감도 느껴 본다고 하자.
이 경우에 그 자신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만지는 그 사과를
모두 동일하게 대상으로 삼아서
이처럼 그 순간에 그런 모습도 보고
그런 소리도 듣고
그런 냄새도 맡고
그런 맛도 얻고
그런 촉감도 얻는 것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그렇다고 받아들인 가운데
이렇게 각 감관으로 얻게 된 각 내용을 서로 대조해보자.
이들 가운데
서로 간에 단 한 부분이라도 다른 내용과
같거나 공통한 무엇이 찾아지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선 각 감관으로 얻는 각 내용들은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한 관계라는 사정을 잘 파악하고
우선 위에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로 제시한 관계가
바로 위와 사정이 같음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눈으로 본 내용은 빨간 사과 모습인데
손으로 만지면 이런 이상한 촉감이 되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매번 반복해 이런 관계로 이들 내용을 대하므로
이제 자신이 얻은 촉감이
그처럼 눈으로 본 사과 모습이라거나,
그런 사과모습에 들어 있다고 하면 과연 옳은가.
또 반대로 촉감은 그 사과모습이라거나,
그런 촉감 안에 자신이 눈으로 본 그 사과 모습이 있다고 하면 옳은가.
이런 문제다.
그런데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는
각 감관마다 서로 엉뚱한 내용을 얻는 관계를 설명하는 취지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관계들을 설명하려는데 의미가 있다.
이는 다음 그림과 관련된다.
위 그림에서 우선 각 감관별로 감각내용을 각기 얻는 정신은 1,2,3,4,5 로 표시했다.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색성향미촉]을 얻는 각 정신을 나타낸다.
한편 6 은 이에 대해 관념분별을 행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7 과 8 은 또 다른 정신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각 정신이 어떤 내용을 얻어내던 얻어내지 못하던
그와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보게 되는 #실재를 또 표시해 놓았다.
그래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의 관계를 살피자면
#실재 -- 제 8 식에서 얻는 어떤 내용 -- 제 7 식에서 얻는 어떤 내용 - 제 1,2,3,4,5 식에 얻는 어떤 내용 - 제 6 식에서 분별하는 어떤 내용
이렇게 크게 5 개 영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1,2,3,4,5 라는 각 감관별로 얻는 내용들을 검토해보면
이들 내용이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하듯,
이들 각각의 내용들도 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한 주체가 표면적으로 얻는 내용은 주로
1,2,3,4,5와 같은 감각현실(색성향미촉)과 6을 통해 얻는 분별 내용이다.
즉 비유로 든 내용에서는 벽돌- 사람 이 정도 뿐이다.
그래서 나머지 부분들은 설명을 위해서
동원한 비유적인 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실재에 대해서는
그 실재 진여가 공하고 언설을 떠나기에
현실에서 분별한 것처럼
각 부분을 분할하거나 어떤 내용을 시설해 제시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단지 공하다고만 표현하고
이 관계를 살피면 내용을 잘 파악하기 힘들다고 보기에
일단 라면을 하나 집어서 실재에 넣고 생각해보자는 의미다.
그리고 이처럼 각 영역들의 관계를 비유를 통해 살피게 되면
현실에서 각 주체가 일으키는 망집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한 주체가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윤회를 하는 그 사정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
일단 다시 쉬기로 한다.
종전에 적었던 내용을 다시 적으려니 의욕이 많이 떨어지기는 하는데
이전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제시하는 한편
조금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간단히 줄여서 제시하고
이 페이지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런데 다 적고 오타를 수정하고 보충 교정할 부분들을 살피다 보니
내요이 많이 길다고도 보게 된다.
그래서 쉬는 곳마다 페이지가 새로 바뀌는 것으로 간주하고
한 부분씩 잘 정리하고 다음 부분을 살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된다.
>>>
mus0fl--Mireille Mathieu - Je Ne Suis Rien Sans Toi.lrc
Lab value 불기2562/12/14/금/17:45
우선 이런 내용을 살필 때 사용하게 되는
언어 시설 방편이 갖는 의미부터 기본적으로 확인해보자.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
그것은 감각현실의 하나다.
그것은 관념분별이나 언어가 아니다.
그런데 언어 시설 방편을 통해서
눈으로 보는 그런 내용을 좁은 의미로 '색'이라고 일단 '언어'로 표현하는 한편,
이런 색과 소리, 냄새, 맛, 촉감을 모두 묶어
다시 넓은 의미로서 '색'이라고 표현한다.
현실에서 얻는 각 감각현실로 '색'성향미촉을 나열하거나,
'색' -안-안식 이렇게 제시할 때의 색은
눈이 보는 색깔을 나타내는 좁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요소를 '색'수상행식' 이렇게 묶어 분류해 제시할 때는
이 색은 앞에 나열한 '색'성향미촉을 모두 포함한 넓은 의미의 색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각 부분에서 이런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믜의 색도 구별을 잘 해야하지만,
또 전체적으로 이런 언어 표현이 갖게 되는 성격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우선 한글번역서에서는
눈을 통해 얻는 내용 즉 좁은 의미로 '색'이라고 가리키는 내용은 '빛깔'이라고 표현하고,
넓은 의미의 색은 주로 '물질'이라고 번역해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색성향미촉을 모두 묶은 넓은 의미의 색을
'물질'이라고 번역하게 되면
이런 감각현실로서 색성향미촉이
정신과 상대되고 정신과 떨어진 별개의 외부 물질인 것으로
잘못 여기게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여하튼 번역서에서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 주체가 감각을 통해 얻는 색성향미촉[색깔,소리,냄새,맛,촉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런 색과 관련된 다양한 차원의 내용을 다시 잘 구분해야 한다.
먼저 이런 색성향미촉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상태에서
그 각 부분이 꽃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영희, 철수. 바위, 등등이라고 생각할 때
그처럼 생각하고 분별하는 그런 관념내용은 이런 감각현실은 일단 아니다.
그래서 눈을 떠 색깔을 볼 때
그런 '색깔[색]'은 '눈[안]'에 의존해서 '안식'을 통해 얻는다고 표현한다면
앞과 같은 분별 내용은 법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법'은 '의'에 의존해서 '의식'을 통해서 얻는다라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색-안-안식
성-이-이식
향-비-비식
미-설-설식
촉-신-신식
법-의 -의식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한편 어떤 주체가 감관이나 정신을 통해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런 주체가 관여하지 않아도 그래도 있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은
이를 다시 '실재' '진여'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는 예를 들어 이런 문제다.
어떤 이가 눈을 뜨니 꽃이나 바위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눈을 감으니 이제 안 보인다.
이 경우 그 직전까지 눈을 떠서 보던 꽃이나 바위는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무언가가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눈을 떠서 본 그런 모습과 일치하거나 비례하고 유사한 어떤 것인가.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색'이라고 언어로 표현할 때
이런 하나의 언어표현은 이들 각 내용과 모두 관련되고
때로는 이들 각 내용을 모두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혼동이 발생하기 쉽다.
대반야바라밀다경 산화품에서
A 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할 때
먼저 B 를 하나 제시하면서
그 A 는 B 인가.
그 A 는 B 의 진여 실재인가.
그 A 는 B 의 법성품인가.
이런 식으로 B 를 여러 측면으로 나눠 놓고
A 와의 관계를 살피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앞에서 색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색이 기본적으로 눈을 떴을 때 얻게 되는 내용 일체를 가리키지만,
그런 내용을 놓고 자신이
그것을 색이라고 표현하는 가운데
그에 대해 어떤 분별을 행하고 생각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관념적 내용으로서 색의 '성품과 모습'에 해당하는 내용이 된다.
한편 한 주체가 이런 내용을 얻을 때
그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은 다시 색의 '진여, 실재' 이런 식으로 구별해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제시할 때
이들이 모두 색과 관련된다고 여기지만,
이들부터 서로 잘 구분해야 한다.
이 경우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부터 잘 구분하면 된다.
자신이 눈을 뜨면 보이지만, 감으면 그 순간 사라지는 그런 내용은
자신이 눈을 통해 얻은 감각현실이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무엇이 그 때마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인가부터 잘 구분해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일정하게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내용
예를 들어 자신이 바라본 그런 내용은 꽃이라거나 바위거나 또는 색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관념분별 내용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부분은 어떤 성품을 갖고 어떤 모습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내용들은
알고보면 모두 이런 관념분별 영역안에서 일으킨 관념내용들이다.
그래서 이것을 앞의 감각현실과 먼저 서로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편,
한 주체와 관계하지 않고도
그대로 실재하는 본 바탕을 실재 진여라고 표현한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또 앞의 내용들과 잘 구분해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제 이 각각의 내용은 서로 무언가 서로 관련은 된다고 보지만,
이들을 각각 대조하면서 살피면
이들이 앞에서 제시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처럼
엉뚱한 내용들이라고 비유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 실험을 하려면
먼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면서 어느 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 때 눈을 뜰 때 얻게 되는 내용을 먼저
잘 포착해서 마음에 확보해 두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감각현실은 방금 직전에 본 내용도 다음 순간에 다시 되살려 얻을 수 없지만,
여하튼 그런 내용을 가리킨다고 잘 이해하는 가운데 이 문제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한편 눈을 감고 뜨고와 관계없이
방금 전에 눈으로 본 내용에 대해 일정하게 생각을 계속 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방금 전에 본 것은 바위였다고 여긴다면
그 바위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해본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 가운데
그 직전에 눈으로 본 그 내용 가운데 단 한 부분이라도
이 안에서 찾아지는가를 스스로 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그런 것이 없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신이 평소 영희나 철수에 대해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때는
물론 현실에서 매 순간
영희나 철수에 대해 감각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그런 생각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 생각하는 내용 안에는 그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꿈과 같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침대에서 누어서 자면서 황금과 바다꿈을 생생하게 꾸었다.
그 침대도 현실에 그렇게 얻어지고
자면서 꾼 황금과 바다꿈도 생생하다.
문제는 꿈에서 꾼 그 황금이나 바다는
침대가 있는 현실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꿈을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주체가 꿈을 생생하게 꾸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꿈은 생생한데
그런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 일시적으로 그가 얻은 내용일 뿐이고
그 꿈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꿈 내용에서는 그에 기대하는 다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꿈에서 꾼 황금은 현실에서 황금이 갖는 기타 여러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분별 내용도 이와 성격이 같다.
그래서 이것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나중에 거리에서 사람이 여기저기 오가고
저 사람이 저기서 태어나서 저기서 죽고 이런 등등의 상황을 놓고
그 상황에 그런 오고감이나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도
1 차적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상해탈삼매와도 관련된다.
자신은 현실에서
눈을 떠서 일정부분을 영희나 꽃이라고 여기고 [상(想 Saṃjña)]
그 부분[상(相 Lakṣaṇa )]을 그런 내용이라고 붙잡어 취하고
그에 바탕해서 업을 행해 나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그 감각현실에 그런 분별내용은 없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무상해탈삼매에 우선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 사정을 쉽게 표현하면
그 감각현실이 그처럼 생생하게 얻어지는 것이지만,
그 감각현실은 자신의 분별 내용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나누어지거나 묶인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 1相 ]
그리고 그에 대해 자신이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가면서
저 부분은 영희, 저부분은 꽃, 이 부분은 자신 이렇게 분별하면서
각 부분을 현실에서 대하지만,
정작 그런 상은 그 감각현실 영역에 없다. [ 無相 ]
특히 현실에서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초점을 맞추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자기자신'
즉,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그 부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자신이 여기저기 오고 가고자 뜻을 일으키고 움직이면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그 부분만
그 뜻에 따라 변화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사정 때문에 그 주체는
일단 현실에서 눈을 떠 대하는 그런 부분을 다른 부분과 따로 떼어서
그 부분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대하고
평소 그에 바탕해서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 반복해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그 주체를 그런 상태로
무량하게 생사윤회를 받게끔 하는
근본 망집현상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자신은 그런 생각을 일으킨 다음
자신이 대하는 그 감각현실이 자신의 분별처럼
각 부분이 그렇게 이리저리 나뉘고 묶여서
이 부분은 꽃, 저 부분은 바위,
이 부분은 영희, 저 부분은 철수,
그리고 이 부분은 자신 이렇게 되어 있다고 여기면서
각 부분을 대하는 한편
그 각 부분은 또 다른 부분과 달리
일정한 성품과 모습을 갖고 있다고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고 다시
그에 대해 관념영역에서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 가며 분별을 일으킨 바탕에서
그런 분별에 따라
감각현실 영역에서 상을 취하고
상을 그렇게 붙들고 집착하고 늘어지면서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망집현상이다.
욕계안에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내용이어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대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바로 이처럼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해 나가는 사정으로
그 주체가 결국 욕계안의 3 악도에 묶여 들어가고
또 그 상태에서도 매 순간 위와 같은 바탕에서 임하는 가운데
결국 무량겁에 걸쳐서 바로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본 사정은 어떻다는 것인가하면,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과 같이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각 부분에 있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매 순간 임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위 부분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분명 저 부분은 영희이고 이 부분은 자신인데
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이것을 먼저 기초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이 내용을 잘 이해하면
다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도
감각현실과의 관계가 또 그와 마찬가지임을
또 한 번 잘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도 사정이 그렇지만,
본 바탕인 실재와 감각현실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즉, 현실에서 실재를 바탕으로
어떤 주체가 눈을 뜨거나 귀를 대하거나 해서
각 감각현실 내용을 얻는데
이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얻으면
본 바탕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는 공해탈삼매와 관련이 되는 부분이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공하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다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해 일으키는 망집에서 벗어나와야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을 놓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일정부분은 영희나 철수 꽃 집 바위 등등이라고 여기면서
분주히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 정신없이 살아갈 뿐이지,
이런 내용들의 본 바탕으로서 실재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일으키고
이것을 문제삼는 경우는 대단히 희박하다고 보아야 한다.
경전에서는 이런 실재 진여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고 반복해 제시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실재 본 바탕이 무언가를 의식하고 문제삼는 경우 자체가 대단히 드물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뜨고 얻는 감각현실 자체를 바탕으로 해서
앞처럼 망집을 일으켜서 분주히 임하는 것이 현실의 대부분 상황이기에
처음에 제시한 무상해탈문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더 현실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이 된다.
그리고 금강경 등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현실에 임하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다.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 것은 이런 측면이다.
그러나 자신이 현실에서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가운데
일정 부분을 자신이나 꽃이나 영희 철수로 대하면서 상을 일으켜 각 부분을 대할 때,
그렇게 상을 일으키는 기본 재료가 되는 그런 감각현실이
다시 실다운 것인가 아닌가를 살필 때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또 놓고
그런 내용이 실재에서도 얻어지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꿈에서 황금이나 바다 꿈을 생생하게 꾼 것은 사실인데
왜 그 꿈을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가
그 사정과 마찬가지다.
매 순간 한 주체가 생생하게 색깔과 소리나 촉감을 얻고 살아가는데
본 바탕에서도 과연 그런 내용이 얻어지는가.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감각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이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진여가 공하다는 그 사정을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이를 통해서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결국 공해탈삼매 수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에서
처음 제시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내용이다.
알고보면 자신이 바위라고 대하는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고
다른 영역에서는 비유에 든 것처럼 라면과 같은 것일 뿐이다.
물론 여기서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을 라면이라고 일단 제시한 것은
공하다는 내용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드므로
비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달과 '물에 비친 달그림자' 이런 비유와 그 사정이 같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런데 자신의 정신이 이를 일정한 관계에서 대하면 바위의 형태로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얻는 내용을 또 다른 정신이 대할 때는 또 엉뚱하게 사과의 형태로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과의 형태로 얻는 것을 다시 다른 정신이 대하면 이제는 벽돌의 형태로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 벽돌을 놓고 그 주체가 생각하기를 그것은 사람이다
이렇게 지금 파악하면서 현실에 분주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위 비유가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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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적는다고 하고 적기 시작했는데 글이 길어지고 있다.
일단 쉬자.
mus0fl--Justin Nozuka - Zaho - Heartless.lrc
존재의 유무나 그 정체를 문제삼는 주요 영역의 내용을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으로 제시하면
이는 이미 앞에서 살핀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통해서
이들 각각이 서로에게 대단히 엉뚱한 관계임을 일단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는 각 영역에 내용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한 영역에서 얻어진 내용은 비록 그런 내용이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어져도
마치 침대에 누어 생생하게 꾼 바다나 황금꿈처럼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그런 내용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재가 공하다고 표현할 때도 이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실재가 공하다는 표현은
실재 영역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어떤 내용이 없어서 무아 무자성의 상태지만,
그러나 아무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신이 관계해서 내용을 얻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직접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있고 없음 같고 다름 등등의 온갖 분별과 언설을 떠난 상태라는 의미다.
그러나 일단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실재영역은 그런 내용이 아닌 그 어떤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중에 여러 논서에서
거리에서 사람이 오고가고 죽고 살고
무언가가 펑하고 터지며 나타나고 불도 일어나고 하는 상황을 놓고
여기에 그런 일체의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생멸이나 오고감이나 타고 꺼짐 등등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이것이 무슨 뚱단지같은 황당한 주장인가라고 여기지 말고
그런 언어 시설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앞과 같은 사정을 이해시키는데 그 취지가 있음을 잘 파악해야 한다.
눈을 뜨면 자신이 영희라고 보는 어떤 이가
자신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다.
자신은 이를 피해 열심히 뛰어 간다.
이런 상황이라고 해보자.
이 상황에 자신이 그렇게 여기면서 대하는
그런 감각현실이 매순간 하나같이 생생하게 분주하게 들고 나면서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이런 감각현실 내용이 현실에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한편 그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 일으킨 '분별'내용은
또 한편 그의 분별 영역에 명료하게 있다. 이것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처음 1차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생생하게 얻어지고
그에 대한 분별 내용은 분별내용은 명료하게 얻어지지만,
정작 그런 분별 내용은 그 영역을 떠나서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편 이런 관계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진여 영역도 마찬가지다.
실재영역에서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이것을 기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감각현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관념분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실의 거리 상황에
영희가 오고가고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 그 현실을 놓고
거기에 그런 영희도 얻어지지 않고 영희의 오고감도 없다고
경전에셔 제시할 때 이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위 내용이 위에 적은 그런 글자[언어]가 없다고 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두번째 자신이 눈을 떠 본 그런 감각현실내용이 얻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세번째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서
저 부분은 영희 이 부분은 자신 그리고 지금 상황은 영희가 자신을 잡으러
뛰어 오는 상황 이런 식으로 생각한 내용이 분별 영역에서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즉, 경전이나 논서에서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이들 각 영역의 내용들을
기본적으로 먼저 잘 구분해서 정리해야 한다.
지금 문제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서
이 부분은 영희 저 부분은 꽃 이 부분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생각 내용 안에는 그 생각으로 가리키는 그런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그 감각현실 안에도 그런 생각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1 차적으로 제시한 것이 이 부분이다.
여기서 먼저 다음의 구분을 잘 해야 한다.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바탕해서 일정한 생각을 관념영역에서 '일으켰다'는 사실과
그 감각현실 안에 그런 관념내용이 '있다'를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런 생각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내용이 그 감각현실 영역에는 없다.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 감각현실은 그런 관념내용이다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망집상태에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편
그 부분이 바로 영희이고 꽃이고 또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 부분을 붙들고 그 부분을 취하고
그에 바탕해서 온갖 업을 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처하게 되는 3 악도의 세계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상황에서도
이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에서도 위 사정은 다르지 않은데
현실에서 그렇게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는 입장은
그로 인해 3 악도에 들어가 임한 상황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임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3 계 6 도의 생사 윤회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 자신과 영희나 꽃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면
예를 들어 나중에 축사에 들어가 지낼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그렇게 축사에서 지내게 된다.
그래서 일정 계기를 통해서 한 순간도 이런 상태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매 순간 매순간 이렇게 임해서 무량겁을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생사현실의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는 어떻다고 제시하는것인가하면
어떤 한 단면에서도 그가 생각하는 내용은
그의 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일 뿐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반복했지만, 다시 이들 각 내용의 관계를 정리하면
그 관념안에는 그 관념으로 가리키는 내용이 없다.
또 그 관념이 가리킨 그 감각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은 본래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망집을 일으킨 재료가 된 감각현실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 감각현실은 그가 아무리 매순간 생생한 형태로 반복해 얻더라도
그것은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고
그의 마음안에 일시적으로 그러나 반복해 얻는 내용일 뿐이다.
또 본 바탕인 실재 진여에서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관념분별과 본 바탕인 실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2 차적으로 실재의 공한 사정을 잘 이해해서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에 대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만 제시한다면
처음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로 제시한 내용 가운데
라면 - - - 사과 - 벽돌 이런 비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게 된다.
이런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기본적인 관계가 잘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처음에 제시한 각 감각현실의 상호관계를 놓고
다시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사과를 하나 붙들고 두드리고 만지고 맛볼 때
각 감관을 통해 '색깔'과 '소리' '냄새' '맛' '촉감'을 각기 얻는다.
그런데 색깔도 생생하고 소리도 생생한데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색깔에 소리가 얻어지는가.
이런 문제다.
그렇지 않기에 색깔을 얻는 영역에는 소리는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소리가 얻어지는 영역엔 색깔은 없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한 그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고
더 나아가 위에 제시한 내용들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것은 매번 생생하게 반복해 얻지만,
그러한 사정으로 꿈처럼 실다운 내용이 아니고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니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왜 중간에 바위- 사과가 더 들어갔는가는
사정이 그런데도
왜 현실에서 자신은 자꾸만
사람은 없고 사람이 얻어지지 않는 벽돌을 붙잡고
자꾸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그 벽돌을 붙들고 늘어지고
그리고 그 벽돌과 춤도 추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자꾸 행하게 되는가.
이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을 다시 중간에 넣은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현실의 한 단면에서 표면적으로
자신이 생생하고 얻는 감각현실과
명료하게 일으키는 관념분별만 놓고 살피면 곤란하고
또 그런 내용을 얻는 표면적인 정신 즉 1,2,3,4,5,6 이런 정신만 놓고 살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자신이 현실에서 매순간 그런 망집을 반복해서 일으키고
그런 상태로 무량하게 삶을 출발하고 마칠 수 밖에 없는가하는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런 상태를 만들어낸 기본 바탕이 되는
7 식 8 식과 함께 이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중간에 바위 - 사과 이런 내용을 추가해 넣은 것이다.
일단 비유의 사정도 함께 잘 파악하면서
경전에서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왜 망집을 자신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평소 생각하고 행하는 그것이
더 정상이고 옳다고 여기게 되는가. 왜 그런가.
그것을 조금 더 이어서 살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살필 내용이 상당히 많아진다.
사람이 생사 과정에서
망집에 바탕해 이런 현실의 정체와 인과 전반을 잘 관하여 벗어나지 못하면
1차적으로 개나 돼지와 같은 축생 형태로 다음 생을 맞이하게 된다.
좀 더 상태가 심해서 망집에 붙잡인 정도가 반절 이상을 넘어 7 할 정도 이상 채워진 상태로 삶을 살고
탐욕이 심한 상태로 무언가를 대단히 아끼고 집착하며 업을 행하고 살았다면
아귀세계로 옮겨 간다.
더 상태가 심해서 이런 망집에 거의 대부분 바탕해서
매순간 분노를 빈번히 일으키고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치면서 업을 행해 왔다면
그 경우는 지옥 세계로 옮겨 간다.
이렇게 경전에서 제시하는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 설명만으로 조금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 바탕과 현실에 본래 그런 내용이 없는데
그러나 망집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했다.
그러면 그 뿐이지 왜 그렇게 되는가.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농부에게 물어봐도 이상한 일이다.
왜 봄에 작은 씨를 뿌렸는데
여름에는 그 자리에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가
다시 가을이 되면 그 씨나 꽃은 보이지도 않고
대신 그 자리에 이들과는 그 모습과 성품이 완전히 다른
엉뚱한 열매가 떡 나타나는가.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인데
그런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그런 내용이 무한히 반복해서 일어나기에
그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사정을 미리 잘 파악하고
현실에서 수행을 미리 잘 임해서
이런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벗어나라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본래 그런 내용이 없고 그렇지 않으니까.
그 사정만 잘 관하면 곧바로 이것을 쉭 하고 벗어나올 수 있을 것도 같다.
앞에 처음 제시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로 제시한
각 내용들에 대한 관계들이 사실은 그런 취지로 제시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원칙적 내용만 가지고는
그런 망집상태를 곧바로 이해하고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라면에 벽돌은 없다.
그런데 라면을 바탕으로
벽돌을 얻게 되는 관계는 무량하게 반복된다.
벽돌이 아무리 생생하게 얻어져도
그것은 꿈과 같은 성격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현실로서 벽돌은 꿈과 같아,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니어서
무량한 주체가 무량한 겁에 걸쳐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반복해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것이 곧 현실에서 중생들이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리고 지금 살피는 것은 이 부분이다.
그 가운데 한 예를 들어
지금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묶인 상태에서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손가락을 하나 칼로 잘려지는 상태라고 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앞과 같은 원칙적 내용만으로
그 상황에서 평안히 임하면서 고통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 원칙적 내용만으로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쉭 하고 벗어날 수 있고
그 문제의 해결이 되는가.
현실에서 수행 문제는 이 부분이다.
이론만으로는 그렇게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중생의 현실이다.
자신이 자신의 몸이나 손으로 보는 그 부분이
알고보면 벽돌이나 라면에 불과하고
경전상 표현으로 하면 공하다.
이런 원칙적 내용만 이해하고
위 내용만으로 위와 같은 생사현실에서
곧바로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대단히 높은 단계의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수행자를 상대로 한 경전도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위 내용만 제시하고
이제 각자 알아서 잘 하자고 제시하면
거의 대부분 그대로 3 악도에 들어간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위와 같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 내용은
사실 위처럼 지극히 간단하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래도 배가 고파지면 밥을 먹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밥을 먹자고 일어서면
어느 부분이 일어서게 되는가.
이것부터가 문제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그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서 임하게 되는 것이 곧 '아상'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는 이런 아상의 문제는
그대로 본 바탕인 실재 진여에 대해서도 적용이 된다.
즉 그런 망집을 가진 상태에서는
본 바탕도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다고 다시 여기고
이를 실답게 여기고 집착을 갖고 현실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앞과 같이 묶여 손발을 잘리우는 상태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고
원래의 망집상태에서 행하는 반응[업]을 그대로 행하고
더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상태에 있는 경우에서는
일단 그 주체가 그런 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3 악도의 고문 현장으로 붙들려 가는 것을
일단 예방하고 피하는 것이 그 차선책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손과 발이 칼로 잘려지고 톱으로 썰려지는 그런 상황에서
앞의 원칙적 내용만으로 쉭 바로 벗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일단 그런 고문을 받는 상태로 끌려가게 하는 원인을
먼저 제거하고 해소하는 수행이 요구된다.
즉 망집에 바탕해
자신에게 좋음을 준다고 여기고
그가 매일매일 쉼없이 열심히 정신없이 행한 업을 통해
쌓여진 업의 장애부터 제거하고 해소하는 수행부터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자신의 손과 발이 칼로 잘려지고 톱으로 썰려지는 그런 상황에서
앞의 원칙적 내용만으로 쉭 바로 벗어날 수 있다면
계속 무한히 그렇게 있어도 무방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단히 수준이 높은 수행자를 상대로 했다는 경전들이
제시하는 측면이다.
즉, 수행자라면 수행에 임할 때
현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실상이 공하고
생사현실 일체가 곧 니르바나임을 잘 관하고
그 바탕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얻을바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잘 임해야 함을 제시하는 부분들이다.
그리고 이미 그런 측면을 제시하는 내용을
『설무구칭경(유마힐소설경)』이나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등등을 살피면서 많이 살폈다.
그래서 그런 경전과 관련해 먼저 다음을 묻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과연 그런 원칙적인 내용대로
자신이 묶여 손과 발이 하나하나 잘려지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상황이 니르바나와 차별이 없고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관하면서
평안하게 임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가.
현실에서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지금 누군가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수행자는 오래전에 무생법인을 이미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이르고
경전에서 제시된 온갖 방편을 구족한 상태로서
일반적 경우와 수준과 차원이 다른 수행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원칙상 그런 내용이 옳고
또한 이론상은 사정이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고,
또 경전에서는 그런 수행자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 상황에서는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고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정이 그렇기에
일단 그런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그런 3 악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렇게 묶여 가게 되는 업의 장애부터 제거하고 해소하는
계의 항목에 해당하는 수행이 우선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이유없이 어떤 주체가 그런 상태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3 악도에 하필이면 어떤 주체가 묶이는 사정은
그가 의식했던 안했던
앞과 같은 망집에 바탕해서 그가 아주 오랜 기간
쉼없이 업을 행해서 업의 장애가 쌓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보시- 정계- 안인 - 정진과 같은
계의 항목에 들어가는 기본 수행을 열심히 잘 성취해서
그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중생제도를 위해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하는 수행자도 이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수행자가 생사가 곧 열반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이상하게 수행을 임해서
정작 그 수행자는 매번 고통받고 굶주리고 전염병에 걸려 있고
감옥에서 고문받고 그런 상태라면
그러한 상태에서 그가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곤란하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는 수행자는
역시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런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 망집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을 구족할 수 있는 수행을
또 정진해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내용이 다 같은 내용이다. .
그래서 위 기본 수행이 원만히 성취되지 않으면
이론상으로는 앞의 원칙적인 내용만으로
모든 중생이 쉭 쉭하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와야 할 것 같은데
사정이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계의 성취를 통해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복덕자량을 구족하지 못한 상태는
또 이후 앞과 같은 깨달음을 얻고 다양한 방편을 취득하기도 곤란하다
쉼없이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정려수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반야 지혜를 닦고
세속에서 중생을 제도할 방편지혜를 닦는 수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히 곤란하다.
그런데 일단 그런 사정때문에라도
현실에서 각 주체가 수행상태로 잘 진입해야 하는데
거기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놓인 상황이
그처럼 3 악도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는 그 사실자체부터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당장 씨를 뿌린 밭에
싹도 안 보이고, 꽃도 안 보이고, 열매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그런 씨로부터 그런 열매가 나타난다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자신의 눈에 안 보이는 한편,
앞에 제시한 내용은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한 순간이라도 살아가려면
결국 처음에 일으킨 망집 내용처럼
저기 걸어오는 것은 영희고
지금 열심히 뛰어 도망가는 것은 자신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행할 도리 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다시 망집을 잔류시켜 임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왜 그런 업을 행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끔 되는가
그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론상으로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 붙인 그림처럼
각 정신의 내용을 살피는 한편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된
그 기본 사정도 함께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가 동원된 것이다.
>>>
일단 또 너무 길어졌다.
또 조금 쉬고 살펴나가기로 한다.
mus0fl--Michel Pelay - Clara Veut La Lune.lrc
처음에 붙였던 그림을 다시 놓고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림을 보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직접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해가며
이 그림의 각 내용이 자신의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의 몸 일부분도 1 처럼 보이지만, 앞에 2 라는 철수가 보인다.
이 상황을 위 그림이 나타내고 있다.
지금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떠보자.
그리고 그 상황에서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긴 그 부분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보자.
이 상황에서 경전에서 수행자가 가지면 안 된다고 제시하는 '아상'을
먼저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현실에서 평소 어떤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했는가라는
먼저 잘 살펴야 한다.
평소 자신이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편
평소 그 부분을 그렇게 자신이라고 취한 것이다.
자신이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식사를 한다거나
어디로 간다고 할 때도
바로 이 부분이 그런 옷을 입고
식사를 하고 어디로 이동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아상'을 취하고
그에 집착을 가지면 곤란하다고 반복해 제시해도
현실에서 이것을 부정하고 현실 생활을 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
그런데 일단 이처럼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본 그 부분이나 외부 세계로 이해한 부분들이
그 정체가 무언가를 다음 그림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처음 그림에서 자신이라고 본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위 그림에서는 1! 안의 ◇ 즉 a! 로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1! 전체는 평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의 마음을 그렇게 표시하고 있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세상의 모습은
산이나 높은 빌딩에 올라가 보면 대단히 넓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보면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들임을 위 그림이 우선 나타낸다.
이 사정은 앞의 [img2-02] 그림에서 철수의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쉽다.
옆에 서 있는 철수에게 눈을 감고 뜨고를 반복해보라고 요청하면
철수가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한다고 하고
눈을 뜨면 무언가가 보인다고 보고하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1 자신이 보면 별 변화가 없다.
그래서 그가 눈을 뜨면 보인다고 하고
눈을 감으면 안 보인다고 하는 변화는
오직 철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사정은 1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감으면 사라지고
눈을 뜨면 나타나는 그 일체를 그 순간 잘 파악한다면,
바로 그 내용이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눈을 떠서
그 순간에 얻는 내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망상분별을 행하고 대하는 상태다.
즉, 일반적으로
자신이 눈을 뜰 때 얻는 그 내용은
그것이 곧 외부 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또 자신의 마음과는 떨어져 있고 마음 밖에 있는
마음과는 다른 성격의 외부 물질로 그것을 이해하고 대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잘못 파악한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의 기본적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기로 한다.
●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망상분별
http://buddhism007.tistory.com/4615
그래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내용이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들의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을 비유하면 바다가 자신을 파악하기를
바다 안의 물방울 하나를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상태처럼
거꾸로 뒤집혀 전도된 상태로 판단한 가운데
그 바탕에서 현실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이제 위 상황에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를 놓고 이 관계를 이해해보자.
이는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어떻게 생사 윤회를 밟아 나가는가.
어떻게 사람이 개가 되고 개가 돼지가 되고 사람이 되는가.
그리고 사정이 앞과 같은데도 한번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왜 ◇ 과 같은 부분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살게 되는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나가면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게 되므로
대단히 곤란하다고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왜 ◇ 과 같은 부분을 그렇게 여기며 대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기 힘든가.
이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 ◇과 같은 부분이
자신의 마음에서 얻어진 내용이라고 해도,
그러나 바로 그런 ◇과 같은 부분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해야
현실에서 차도 운전하고 업무도 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보게 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비록 그런 내용이 자신이 눈을 떠서 본 마음안 내용이라고 해도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은 마음 밖에 그와 일치한 내용이 있기에
그렇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을 시정하는 수행이 곧
앞에 제시한 공해탈삼매와 관련되는 내용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어떤 모습을 볼 때
그 내용은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의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본 바탕의 실재는 공하다.
이런 사정을 잘 관해서
앞과 같은 망집을 일으켜 임하지 않아야
생사에 묶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현실의 본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현실 어느 순간 어느 한 단면에서도
◇ 과 같은 부분에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을 얻을 수도 없고,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사정을 그렇게 관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임하는 것처럼 임하면
그 상태에서는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바로 자신이고
그 부분에 자신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느 단면에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매 순간 순간 임하면서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윤회를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경전에서 그런 것을 한 단면에서도 얻을 수 없고
그가 보는 내용 일체는 그의 마음안 내용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 사정을 그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비록 마음안 내용들이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 과 같은 내용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그 마음 밖에도 또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이 현실에서 마음에 얻는 이들 내용을
마음 밖의 영역에 모두 밀어 놓고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를 들게 된 사정이다.
먼저 다시 앞의 사과를 놓고 두드리고 만지고 맛보는 상황에 들어가 살펴보자.
자신이 사과를 만지면 촉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 경우만 한 번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사과를 보고 만질 때마다 매번
이와 같은 형태로 촉감을 반복해 느끼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촉감을 자신이 보는 사과 색깔이나 모습을 얻는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밀어 넣으면 적절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또 마찬가지로 자신이 눈으로 보는 사과색이 빨갛다고 해도
그 색깔은 자신이 듣는 소리 영역이나 냄새 맛 촉감 영역에 밀어 넣을 도리가 없다.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못 얻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번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색깔을 보게 된다.
사정이 그렇기에 매번 그렇게 되는 것은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렇게 있어서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각 감각에서 얻는 내용은 사정이 그렇지 못함을 현실에서 확인하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는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모두 그처럼 있다고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려 하는 경향을 일반적으로 갖는 사정은 간단하다.
자신의 모든 생활의 바탕이 되는 감각현실이
그렇게 본 바탕에서도 실재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망집상태를 지지해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망집상태에서는 그렇게 믿고 싶어하고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보는 꽃이나 건물이 있는데
그것이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 전혀 얻을 수 없는 가운데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그러면 망집상태에서는 오히려 충격을 받고
처음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을 대할 때처럼 당황하고 어리둥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아무리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그렇게 생생하게 본다고 하지만,
그것은 소리나 냄새 맛 촉감 영역에서는
아예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
실재와 관념분별의 관계는
그와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각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다.
이상하지만, 그 관계가 그렇다는 의미다.
손을 마주치면 손뼉소리가 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매번 손을 마주칠 때마다 손뼉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 손뼉소리가 자신이 눈으로 보는 손에서 찾아지는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를 놓고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라면에는 벽돌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라면을 대하면
그 주체는 매번 벽돌 모습을 그처럼 보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전에는 게임기 상황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게임 화면에 마우스를 갖다대면 아이템을 얻거나 화면이 바뀐다.
그런데 그런 것은 화면 밖에는 본래 없는 일이다.
사정은 그렇지만 매번 마우스를 갖다대면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그 게임을 하는 대부분이 그렇고
또 그런 상황이 되면 게임에서 생생하고 다양한 내용을 그런 형태로 얻는다.
그래서 이런 게임을 놓고도
매 순간 생생하게 얻어지는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경전 사정을 비유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 두 측면을 제시하게 된다.
자신이 집착을 갖는 벽돌은
본 바탕인 라면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 따라서 벽돌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먼저 강조한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있다고 보는 온갖 생멸이나 생사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러니 이 바탕에서는
온갖 차별도 세울 수 없고
생사 윤회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태를 바탕으로
매번 벽돌을 얻고
다시 그 벽돌을 대하면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그 상황이 문제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지금만 잠깐 그런 것이 아니고
또 특수한 어떤 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수많은 중생들이 무량한 기간에 걸쳐서
다양한 형태로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으면서
그런 상태로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실 상황을 알고보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형태로
각 영역에서 단지 위와 같은 재료만 얻는 것 뿐이다.
그리고 단 한순간 한 단면에서도
그 주체가 그 상황에 있다고 여기는 것을 다른 영역들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 주체가 위와 같은 내용을 얻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그 상황에서 그런 벽돌을 붙들고
그것이 곧 자신이나 철수'이다'라고 여기고
또 한편 그 벽돌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철수가 그렇게 '있다'고 여기며
그 벽돌을 붙들고 그렇게 계속 행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이제 그런 주체가 생각하는 그런 주체와 그런 각각의 내용의 생멸도
그처럼 있고
또 그 주체가 생사를 겪어 나가는 현상도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
그가 생각하듯, 그런 상태는 그 주체나 철수가 죽어서 끝이 나는 것이 결코 아니고
그런 업을 바탕으로 엉망이 되는 벽돌과 모래들을 다시 놓고
그는 이제 축생이나 아귀 지옥 중생에 처한 상태가 되어서
이들 재료를 놓고 그것이 그 자신의 뜻과 달리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주는 그 무엇이라고
대하면서 계속 그런 형태로 생사윤회를 무량겁에 걸쳐 겪어 나가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망집의 측면에서는
그런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 생사윤회가 이어지는 현상이 있다고 제시하는 한편,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그 매 상황 매단면 어느 부분에서도
본래 그런 것은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려면
현실의 각 내용이 본래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앞 비유에서 벽돌과 같은 것인데도
왜 자신 뿐만 아니라 철수나 영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다 그 벽돌을 대해서 사람이라고 여기고 대하고
또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무량겁을 걸쳐서
그런 망상분별을 계속 행하게 되는가.
그래서 처음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된 배경 사정까지 함께 잘 이해해야
비로소 이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를 통해
조금 더 살펴야 한다.
>>>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는데
압축해서 간단히 줄이고 마치기로 한다.
mus0fl--Michel Delpech - Fais-Moi Une Place.lrc
현재 망상분별 집착과 생사윤회와 생사고통 문제를 살피는 중이다.
그리고 망상분별 상태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실재 - 감각현실(색,성,향,미,촉)- 관념분별의 상호관계를 앞에서 살폈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색,성,향,미,촉)- 관념분별이라는 재료를 얻는 것은
일반적으로 일반적 입장과 수행자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 재료를 놓고 한 영역에서 얻어진 내용을 다른 영역에도 그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그 다른 영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그런 전제에서 계속 그것을 대하며 생사고통을 겪어 가는 증상을 의미한다.
이 망상분별증상이 기본증상은 위와 같지만,
그 뒤로 이런 망상분별증상은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부분에서 증폭되어 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일반인이 갖는 단멸관도 이런 내용의 하나다.
자신이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여기며
대단히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바탕으로 자신이 당장 초점을 맞추는 측면에서
좋음을 얻어내는 것을 집착하여 추구하며 업을 행하며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에서 그 주체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게된다.
그리고 망집과 생사윤회를 통해 겪는 생사고통 문제가 모두 이와 관련된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적 상황을 만들어 보았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다고 하자.
어떤 나라에 왕과 왕자가 있다.
그런데 이 왕국에 사는 대부분이 왕을 비롯해서 눈이 멀었다.
그래서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알아볼 수 있는 수단으로
왕자에게 특이한 목걸이를 하나 주고
매번 왕자를 만날 때마다 그 목걸이를 통해서
왕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목걸이가 다음 왕위를 이어나갈 신분을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린 왕자는 어릴 때부터
그 목걸이를 대단히 소중하다고 여기며 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린왕자는 매번 목걸이가 바로 자신이고 왕자라고 여기고 대했다.
왜냐하면 이 목걸이가 있어야 왕궁도 출입하고 왕자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는 가운데
어느날 말을 타고 가다가 목걸이가 길에 떨어져 깨졌다.
그런데 그것을 주으려다 그 왕자가 달려오는 다른 말에 부딪혀
그 목걸이도 부서져 없어진 한편 그 왕자도 역시 또 눈이 멀어버렸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이런 이상한 비유적 상황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처음 목걸이가 왕자 자신이 아닌데
왕자도 그렇고 왕이나 다른 신하들도 그렇고
모두 그 목걸이를 통해서 자신이나 왕자를 확인한다는 사정이다.
이는 현실에서 어떤 아이가 처음 무언가를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의식하는 성장과정과도 관련된다.
부모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어느 순간 자꾸 무언가를 보면서 철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도 그 부분을 대하면서 자꾸 철수라고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철수가 자신이 배가 고파서 무언가 먹고 싶을 때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철수가 배가 고파.
지금 이 현상을 위 비유가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철수의 부모도 그렇고
철수도 그렇고
무언가를 철수나 철수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위 이야기에서 왕자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와 같다.
현실에서 대부분 아상과 인상 중생상 등을 갖고 현실에 임하는 상황이
바로 위와 같다.
현실상황이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를
다시 처음 그림을 통해 확인해보자.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어떤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떴을 때 보게 된 내용이 위 그림과 같다.
그런 가운데 위 내용에서 1 과 같은 부분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또 그에 준해서 2 와 같은 부분은 다른 사람,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현실에 떡 임하게 된다.
앞의 비유적 이야기에서 목걸이라고 표현한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이다.
2 와 같은 철수를 놓고 이야기한다면
자신이나 영희 기타 여러 사람이 다 증상이 비슷해서
2 와 같은 부분을 대하면 그것이 철수라고 여긴다.
그리고 철수도 스스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조금 엄밀하게 보면 철수 2는 눈을 떠서 대할 때
위 그림에서 2^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위 그림에서 1 이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여기서 처음 제시한 내용,
즉 『대반야바라밀다경』 산화품과 관련해 살핀 내용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 - 그리고 1이 얻은 위 그림과 같은 감각현실 전체와 -
그리고 그가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그림에서 1 과 같은 부분 어디에도
-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 즉 자신이라거나 철수라거나 영희 등등의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이런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
지금까지 철수나 자신이 모두 그런 부분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열심히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그런 부분이 자신이 아니라고 하니, 그러면 이렇게 임하는 자신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이런 일로 인해 자신은 이 순간 갑자기 현실에서
없어져서 사망한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는 것인가.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오해 끝에 본인이 이런 주장을 제시하면
본인이 한 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다 살해해 없애는 활동을 하는 것 같다고도 한다.
왜냐하면 현실에 수많은 사람과 자신이 이처럼 있고
분주히 이 일 저 일 하면서 오가고 있는데
여기에 그런 사람이나 그런 일 자체가 없다고 하니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런 오해를 제거해야 한다.
지금 오해는 망집 상태에서 자신이 각 영역의 내용을
접착시켜서 각 내용을 대하기에 일으키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실재나 감각현실(색,성,향,미,촉) 그리고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
이들 재료는 대부분 비슷하게 얻고 있는 것이다.
물론 뒤에 나열한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경우따라 얻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얻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대부분 이들 재료는 엇비슷하게 얻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망집현상이라는 것도 이들 재료를 놓고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이들 재료를 각 영역에서 그처럼 얻고 나서
그 주체가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을 가지고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
그래서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바탕해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다른 영역을 놓고 업을 행해서
다른 재료 영역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는 그 이후 그렇게 자신이 업을 행한 이후 처하게 되는 그 상황이
그에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주게 되는 3 악도의 상황이 되기에
이것을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 뒷 부분이 없다면 앞 부분도 문제삼을 필요나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한다.
비록 그런 망상분별이 실답지 않고 옳은 내용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아무런 생사고통을 겪게 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것을 문제삼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이것이 문제가 된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일체 내용은
생사현실 안에서 각 주체가 겪는 생사고통 때문에
그런 내용을 반복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알기도 힘들고 복잡한 내용을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생사현실에서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한 망상분별 - 업 - 생사고통
이 관계가 무량하게 수많은 중생에게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생한 생사고통을 가져다 주기에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재료는 어차피 엇비슷한데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기에 그렇다고 하는가.
그 근본이 되는 원인이 그런 업을 행하게 된 망상분별과 집착이고
또 그 가운데 온갖 망상분별과 집착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부분이
앞에 제시한 부분이다.
즉, 눈을 떠서 위와 같은 내용을 얻고 난 다음
1이 위 그림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편
2 와 같은 부분은 또 다른 남, 사람, 철수 이렇게 여기고
현실에서 떡 임한다는 그 부분이다.
그리고 그 뒤 온갖 망상분별은 이로부터 증폭되어 나타나게 된다.
현실에서 갖는 온갖 망집은 주관적으로
모두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는 자기자신에 대한 망집과 관련이 되기에
그 정도에 비례하여 일으키고 문제삼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 제시한 이야기를 놓고 조금 더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자나 왕이나 모두 목걸이를 가지고 왕자를 확인했다.
=> 목걸이에 집착해서 왕자가 목걸이가 떨어지자 그것을 급하게 주으려고 하다가 눈이 멀었다.
=> 이후 그 목걸이는 파손되어 없어지고 그 왕자는 왕자대로 평생 장님이 된 상태로 대단히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이 부분이다.
여기서 왕이나 왕자가 대하는 목걸이나 그 상황의 재료 자체는
일반인의 경우나 수행자의 경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이 차이가 있는 것은
이야기속 왕이나 왕자는 목걸이를 왕자로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한다는 부분이 다르다.
그리고 그런 엉뚱한 집착에 바탕해서
하지 않아야 할 행위[업]은 행하고
해야 할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맞이하는 그 이후 내용은
그런 전제에서 대단히 고통스러운 상황이 된다.
이 부분이다.
그래서 수행이란 이런 시나리오를 놓고
이 내용을 조금 좋고 좋은 형태로 바꾸어 보자는 의미다.
이야기에서 눈이 멀게 되는 사고가 나기 직전의 상황으로 가보자.
그전에 이것을 막으려면 그런 목걸이를 줍는 행위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러면 또 그 목걸이는 목걸이일뿐
그것은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것이라고 여기며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왕자가 그 목걸이를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어야 한다.
이렇게 제시할 수 있다.
또 그러려면 왕자뿐 아니라 왕이나 다른 왕국의 사람들도
역시 그처럼 눈이 먼 상태가 되어 있지 않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런 사고가 설령 발생해도
왕이나 왕자나 그와 관계없이 평안하게 잘 지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다음을 더 추가할 수 있다.
만일 왕국의 왕이나 왕자를 비롯해 왕국내 모든 사람이
목걸이를 왕자라고 여기는 그런 망상 증상이 아예 없다면,
사실은 그 목걸이가 파손되고
심지어 그 왕자도 이후 눈이 멀게 되는 그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정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원칙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시나리오 전개상 이 뒷부분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다고 보기에
공연히 뒷부분을 붙였다고도 보게 되는데
나중에 제시하는 경전내용까지 잘 이해하려면
결국 이런 시나리오를 통해 미리 이런 내용까지 념두에 두는 것이 좋다고도 본다.
경전 등에서 알고보면 지옥에서 고통을 심하게 받는 그 상황도
사실은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고 극락과 다르지 않다.
이런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지금 현실에서 분별하는 내용들이
본 바탕에 비추어 옳지 않고 사실이 아닌데
그러나 각 주체가 그렇다고 여기면서
그런 바탕에서 그 이후 업을 행해서
생사고통을 겪는 비극적인 사정을 비유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정으로 생사고통을 겪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생사고통은 그렇게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만
하나같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내용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업이나
그로 인해 겪는 생사고통이나
그런 업을 일으키게 한 망상번뇌가 제거되면
원칙적으로는 다 함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앞에서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망집 - 업 - 고통의 관계로 무한히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생사윤회가
그렇게 전개되어 그런 내용이 있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망집을 일으키지 않은 바탕에서는
이들 일체와 그 생멸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경전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각 주체에게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수행방안의 내용이기도 하다.
다만 현실에서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상태에 처해서
그런 원칙을 적용해 그런 생사고통에서 쉭하고 벗어나오기 힘드므로
우선 그런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상태로 처하게 만드는 원인부분
즉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제거하고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이 기초적으로 요구된다고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3 해탈문 가운데 아직 제시하지 않은
무원무작해탈삼매문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차를 마시고 희망한다고 해보자.
이런 희망을 욕계 안의 한 생명이 일으켜 갖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 주체가 앞과 같은 망집상태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 희망을 갖고
그런 희망을 추구하는 활동[업]을 행해나간다는 것을 함께 의미한다.
그래서 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가 차를 마시고 싶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가 마음의 관념영역에서 무언가 좋다고 보는 여러 내용을
조합해서 그런 희망을 만들어 가졌다는 것을 일단 의미한다.
문제는 다음이다.
그가 차라고 생각하는 그 내용을
그가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일으킨 것은 사실인데
그 희망이 성취된 상태를 어느 영역에서 구하는가가 문제다.
철수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한 것은
차라는 관념분별을 관념영역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다.
철수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희망한 내용은
관념영역안의 내용이지만,
그가 그런 희망을 성취하고자 한다는 그 내용은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도 없는 감각현실 영역을 놓고
그런 희망을 추구하는 업을 행해나가고자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철수가 하는 일은
그가 눈을 떠서 거리를 보다가
차를 파는 곳이라고 보는 곳에 가서
차라고 보게 되는 어떤 것을 구해서 마시는 활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감각현실이란 재료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재료를 대해 일으키는 또 다른 망상분별들과 함께 관련이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그냥 물이고
이것은 그냥 쥬스고
또 이것을 마시면 잠시후 배가 부른다. 등등이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 영역에서 어떤 상태가 나타나면
그것을 놓고 자신이 차를 마시고 싶어한 희망이
이제 뜻대로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한편 만족해 한다.
이런 망상분별 증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에서 원칙적으로 제시한 내용은
이 현실 어느 단면에서도 본래부터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철수는 이와 반대로
같은 재료들즉 색성향미촉 이라는 감각현실 상황을 대하는 가운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이해하면서 이를 대하는 상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일정한 감각현실 즉, 색성향미촉과 같은 재료를 대하면서
일정한 경우는 자신의 관념분별로서 희망에 일치하여 부합한 상태로서 좋은 상태인 반면
또 다른 일정한 경우는 자신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대단히 나쁘고 고통을 주는 상태라고 여기는 가운데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또 한편 앞으로 그런 상태가 나타나리라고 생각이 들면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또는 그럴까 아니면 그런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마음이 오락가락하며 불안해하는 등등의 이상한 망상증상을 일으킨다는 것이
바로 욕계내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각 중생의 상태다.
그런데 망집상태에서 업을 행하면
3 악도에 거의 대부분 들어가게 된다.
그 비율은 산 전체에서 손바닥에 올려진 흙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그 사정이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사정은
망집을 일으킨 이가 업을 행하는 그 현실 사정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이 상황을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로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여기서 실재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에 대한 비유부분인
라면 벽돌과 사람만 뽑아서 이 사정을 살펴보자.
본 바탕은 라면이다.
그런데 갑은 이를 대해서 벽돌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고나서 그것을 사람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을 병 정 등등은 다 사정이 다르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면
갑은 이 벽돌을 자신의 아들로 여긴다.
을은 이 벽돌은 자신의 남편으로 여긴다.
병은 이 벽돌은 자신을 해친 강도로 여긴다.
정은 이 벽돌을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고마운 분으로 여긴다.
...
현실에서 충분히 이런 관계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황에서
병이 그 벽돌을 강도로 여기고 발로 심하게 찼다는 부분이다.
그러자 갑, 을 병, 정 이들이 이 벽돌을 놓고
모두 다 제각각 달리 이 사태를 대하는 가운데
또 제각기 반응을 해나간다는 것이 욕계현실의 문제점이다.
원래는 어떤가하면
갑 을 병 정이 그 벽돌을 놓고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그 각 주체의 관념영역안의 내용일 뿐이고
벽돌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갑 을 병 정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것이 욕계 현실의 문제다.
그리고 이후 이 각 주체가
각자 입장에서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고
또 반대로 싫다고 보는 것을 열심히 피하는 한편
뜻과 같지 않은 어떤 좋지 않은 상태를 만나면 분노로 반응해 나가는
이런 증상에 바탕해서 정신없이 분주하게 업을 행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가해와 피해의 중첩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그 벽돌을 같이 대하는 각 주체
또는 조금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면
실재의 라면을 같이 대하는 각 주체가 이 상황에 얽혀 들어가서
각기 무언가를 정신없이 분주하게 행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각 주체에게는
그 벽돌이 처음과 다른 형태의 벽돌로 변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경전에서 경고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그렇게 갑을 병정이 열심히 벽돌을 놓고 무엇이라고 여기면서
분부하게 업을 행했다.
그런 결과 벽돌이 변화하게 되었는데 그 상태가 곧
갑은 아귀세계에 처한 상태가 되었다.
을은 축생세계에 처한 상태가 되었다.
병은 지옥세계에 처한 상태가 되었다.
을은 인간세계에 처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형태가 되게끔 된다는 그런 의미다.
이것이 경전에서 혹(번뇌)- 업- 고의 관계로 제시하는 내용이다.
각 세계가 왜 이런가는 쉽게 현실을 놓고 이해하면 쉽다.
자신이 생선이 썩어서 냄새가 나서 밖에 버렸다.
그런데 조금 있자 그 생선에 파리가 가득 붙어 있다.
분명 같은 내용을 서로 대하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달리 대하고
각기 다른 세계에 처했다고 제시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누구의 입장이 옳은가.
자신의 입장이 옳은가.
파리의 입장이 옳은가를 놓고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파리는 파리의 눈으로 파리의 손과 발로
무언가를 대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지극히 좋음을
주는 무언가로 여기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인간의 눈으로 인간의 손과 발로
그것을 대하면서 이 생선도 그렇고 파리도 그렇고
같이 상대하기 곤란하다. 이렇게 대하는 상황이다.
여하튼 현실의 한 단면이 이런 상태다.
그래서 일단 파리가 대하고 파리가 무엇이라고 여기는 세계의 내용과
인간이 대하고 인간이 분별하는 세계 내용이
여기서 서로 다르다는 것부터 확인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사과를 보고 두드리며 손으로 만지는 상황에서
눈으로 본 색깔이
귀로 듣는 소리 영역에서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소리 영역에서는 색깔이란 그 존부 자체를 살필 근거가 없다.
그렇다고 색깔이 전혀 없다고 할 것도 아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소리는 색깔을 얻는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색깔은 소리를 얻는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이 대하는 세계는 자신이 이해하는 것처럼
단일한 하나의 세계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각 주체별로 그리고 각 주체의 감관별로 그 세계가 다른 형태가 된다는 사정도
이런 내용을 놓고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왜 사과 하나를 같이 대하는 것 같은데
각 주체나 각 주체의 감관별로 각기 엉뚱한 내용을 얻고
또 그에 바탕해서 엉뚱한 반응을 일으키면서
그 이후 그 주체가 대단히 고통을 겪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가.
그 사정은 이런 기본 바탕에서 각 주체가
자신의 망상분별에 바탕해 무언가를 집착해서
당장 자신에게 좋다고 보는 내용을 추구하면서 업을 행하면
그것이 욕계 내 각 주체와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형태가 되고
그것이 업의 장애를 만들게 되어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 한 주체가 행한 업의 내용과
그로 인해 그 주체가 받아나가는 과보의 내용은
서로 성격이 다르고 내용이 달라서
따지고 보면 서로 대단히 엉뚱한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이상하지만,
여하튼 그런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무량한 중생들이
대단히 다양하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가 반복해서 나타나기에
이것을 생사현실의 문제점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이런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그런 사정을 잘 관하는 한편
그런 생사고통을 만들어 내는 망집에 바탕한 희망과
그것을 추구하는 활동[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하고 제거하는 한편 [무원무작해탈삼매]
그와 반대로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좋고 좋은 상태를 얻어내게 하기 위해
또 그런 상태로 고통을 받는 생명을 제도하기 위해
자비심을 바탕으로 서원을 일으켜
생사현실에서 행해나갈 수행방안을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
너무 길어졌다. 글이 길므로 다시 조금 쉬고 이어 살핀다.
지금 위 비유로 살피고자 하는 것은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마음의 문제와 생사윤회문제를 살피고자 한 것인데
그 부분은 살피지도 못하고 너무 길어졌다.
일단 조금 더 쉬고 이어나가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제시한 주제부분은
대략적으로라도 살피고 일단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mus0fl--Indochine - Mao Boy.lrc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에서
현실에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알고보면
사람이 아닌 라면이고 벽돌일 뿐인데
왜 그것이 생사고통을 가져다 주는가 하는 사정을 앞에서 잠깐 살폈다.
자신이 벽돌을 놓고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상태에서
업을 행하면 이후 그것이 벽돌의 사정부터 변화시키는 가운데
그 벽돌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형태가 된다.
앞에서 이 사정을 라면과 벽돌을 함께 대하는 갑을병정의 관계에서도 보았는데
또 썩은 생선을 하나 놓고 서로 달리 대하는 사람과 파리의 관계로도 보았다.
생사고통이 나타나는 사정을 다시 쉽게 이해하려면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갑이 이 파리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옆 가게에서 무언가를 하나 사가지고 온 일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이른바 파리지옥이라는 끈끈이판 이런 것이다.
무언가 꿀과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한번 파리가 거기에 붙으면
떨어져 나오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붙어 있게 하는 끈끈이 판이다.
파리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 상태가 무슨 상태인지 잘 헤아리기 힘들다고 보지만,
여하튼 평소 자신이 날아가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날아 다니던 파리가
이후 죽을 때까지 날지 못하고 그렇게 붙어 있어야 하니
상당히 불쾌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상황이라고 헤아릴 수 있다.
첫 단면에서 발생한 이후 내용이 이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갑이 최소한 생선 가게 하나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여하튼 이들 파리가 그런 상태로 들어가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하다고 보게 된 것이
그런 파리 지옥이 거기에 설치된 그 이유라면 이유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보는 현실 내용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해서 생선가게를 경영하는 갑이
행복하게 잘 살다가 삶을 마친 것으로 이해하고
이 생사현실에 대한 이해를 마치기 쉽다.
그리고 교훈으로 받는 것은
죽은 파리들은 말이 없다.
한번 죽으면 끝이다.
사는 동안 자신이 좋은 것을 원없이 하다가 죽는 것이 최고다.
이런 이상한 교훈을 남기고 삶을 마치기 쉽다.
적어도 그런 파리지옥이 설치되어서 갑이 그 이후로 어떤 고통을 받았다.
죽은 파리가 다시 되살아나서 보복을 가해서 갑이 대단히 힘들다.
이런 내용도 보고받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은 위험한 교훈이 되기 쉽다.
이것이 앞에서 제시한 단멸관의 한 내용이다.
그런 단멸관을 갖게 된 사정은
역시 처음에 무엇을 놓고
자신과 남, 사람과 파리라고 여기면서 대했는가 하는 부분부터가
잘못이었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그래서 그렇게 단순하게 적당히 짧고 얕게 이 관계를
살피면 대단히 곤란하다.
이것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가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경전 곳곳에서 제시하는 사례가 그런 비극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생사관계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대비바사론』에서
500 생을 걸쳐서 서로가 상대의 자식을 해치는 일을 되풀이 하는
두 주체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하기도 하는데
석가족이 나중에 옆 나라의 침입을 받아,
백성들이 땅에 묻혀 코끼리에 밟혀 죽음을 당하고
여인들은 여인들대로 벌거 벗겨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이런 내용도 알고보면 위 사건과 성격이 같은 내용이라고 제시된다.
가까운 원인은 물론 이웃나라의 왕을 석가족이 모욕한 일에서 비롯되지만,
그 사건의 성격도 위와 같이 500 생을 걸쳐
반복해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관계와 마찬가지여서
첫 발단은 사람들이 호숫가에 있는 물고기들을 떼로 잡아서
먹이로 삼았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처님이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 라면을 놓고 왜 서로 입장이 다른가.
이 문제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을 들여다 보면 이 사정은 쉽다.
여름철에 어디 놀러가서 닭을 먹는 상황이 바로 그 상황이다.
자신은 열심히 놀고 닭 백숙을 하나 주문했는데
그렇게 자신이 즐겁게 놀고 저녁에는 맛있는 닭 백숙을 또 맛있게 먹은 그 일이
닭에게는 상당히 공포스럽고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한 일이었다. 이런 이야기다.
그렇게 놓고 그 주체가 매일 매일 가장 맛있다고 여기며
매끼 찾아다니는 식사들을 살펴보니
거의 아우슈비츠 상황이 반대쪽으로 죽 나열되는 사정을 보게 된다.
그 종류도 대단히 다양해서
축사에 있는 소 돼지 오리 몇백만마리부터 시작해서
토끼, 장어, 송어, 광어, 오징어, 게 이렇게 변화를 보이면서
나열하기 힘들 정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죽은 사체만 열심히 먹었지 직접 죽인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은 명령만 내렸지 직접 죽인 일이 없다고 하는 히틀러 아저씨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알고보면 도축업자가 열심히 도축을 하는 그 사정은
바로 그런 음식을 좋다고 여기면서 쉼없이 주문을 하는 자신 때문에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이 좋음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삶에 임한 현실의 의미다.
그래서 이 내용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파악해야 한다.
자신은 열심히 좋은 맛을 취하고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에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기에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렇게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도 소멸되지 않는다.
이렇게 경전에서 제시하는 사정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 생사현실을 그렇게 대충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그것과
또 남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들
그리고 파리나 생쥐, 소나 돼지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부터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안 되어 있기에
당장 지금 이 순간만 자신의 입장에서 좋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끝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보를 받을 때는 다시 그 사정을 모른 가운데
현실에서 지금 각 축사에 갇힌 축생들 경우처럼
또 그렇게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그렇게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관계를 무량하게 이어나가는 것이
욕계의 생사고통의 현실이다.
이런 사정으로 기본적으로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와야 함을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 기본 방안이
앞에서 제시한 공해탈 무상해탈 무원무작해탈삼매의 방안이기도 한데
이미 매 순간 쉼없이 이어온 그 업이 대단히 방대하게 쌓여 있기에
위와 같이 기본적인 사정을 잘 관하는 바탕에서
다시 계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을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하필이면 매생마다 극심한 고문을 쉼없이 당하는 상황에 처한 가운데
앞과 같은 원칙적 내용만 가지고 고통을 잘 벗어나와야 한다.
이런 상태는 중생제도에도 도움이 별로 안 되지만,
앞의 원칙적 내용을 이해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오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어렵다.
이미 기본 원칙은 앞에서 충분히 살폈다.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가 그것을 말한다.
지금 자신의 손과 발이 톱으로 잘려지고 있어서
대단히 고통을 겪는 상황인데
그런데 자신이 지금 자신의 손과 발로 보고 있는 것
그리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알고보면 라면이고 벽돌일 뿐이다.
경전에서 원칙적으로 제시한 내용은 이것을 의미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이 부분이다.
그래서 곧바로 쉭 일체고액을 벗어나왔다고 반야심경에서 제시한다.
그런데 그 원칙적 내용이 그 고문현장에서 성취가능한가.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주체가 성취가능하다고 보는가가 문제다.
원칙은 원칙이지만 대단히 수준 높은 수행자가 아니고서는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다른 생명을 상대로 업을 행해온 입장에서는
자신은 가해 역할만 하고 그 반대 역할은 결코 맡지 않고
생사현실을 벗어나오고 싶어 하겠지만,
무량겁을 두고 관찰해보건대
그런 경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잘 행한 수행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 내용을 경전에서 경고한다.
그러니 그 사정을 미리 잘 파악해서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올 수 있도록 기본 수행부터 잘 임해야 한다.
세상에 용감해서 다른 생명을 몇천씩 해치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용감하게 되는 주요 사정은 바로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손과 발이 잘려지고 부러질 때
자신은 그와 관계없이 그런 고통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남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과보를 되돌려 주는 일도 없다.
이렇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감하고 과감해진다.
무식함이 용기를 만드는 상황이다.
그런데 사실은 사정이 이와 다를 때 그렇게 임할 수 있으면
그 때는 상당히 수준 높은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억울하게 자신의 손과 발이 잘려지고 부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사실은 라면이고 벽돌이고 강 건너 불타는 나무일 뿐
나 자신이 아니고 여기에는 그런 나나
그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음을 잘 파악하고
이 원칙만으로 그 상황을 평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대단히 수준 높은 불퇴전위에 이른 수행자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수준에 이른 수행자는 별로 없고
반대로 앞과 같은 무식해서 용감한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고통을 수없이 증폭시켜 만들어 내는 기본 바탕이다.
예를 들어 1 인이 500 인을 상대로 욕설을 메일로 한번에 보내거나 발표했다.
그 이후 500 인이 다시 욕설로 답신을 보냈다.
이런 형태로 매번 500 제곱을 해서 500 번을 오간다.
이것만 생각해도 왜 무량겁에 걸쳐 갇혀 지내는 아비지옥이 운영되는가 하는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지만,
문제는 욕설을 담은 이메일만 오가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것이 여기에 함께 실려서 오가게 된다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적당히 대충 현실을 파악하고 임하면 곤란하다.
이제 현실을 놓고
무엇을 과연 자신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리고 적당히 멈추지 않으면
왜 무량겁에 걸쳐서
우주의 성주괴공을 몇 차례 되풀이할 때까지도
이런 생사고통에서 끝내 못 벗어나고
계속 그것이 이어진다고 하게 되는가
그 기본 사정을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에서
설명을 생략했던 앞 부분의 바위- 사과와 관련된 내용을
관련시켜 살펴야 한다.
>>>
그런데 상당히 길다.
조금 더 쉬고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mus0fl--France Gall - Sacre Charlemagne.lrc
지금 망집과 무량겁에 걸친 생사윤회의 문제를 살피는 가운데
반성중이다.
원래 과거에 적은 내용이 대부분이기에
그 부분을 찾아 링크를 걸고 넘어가고 새로 보충할 부분만
좀 더 보충하면 된다고 보는데
문제는 조각글을 작성한 다음 제목을 붙여 정리해두지 않았기에
그 부분을 바로 찾지 못한 가운데 대부분 다시 적게 되기에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분량도 길어지고 있기에 반성중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현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현실에서 과거의 일을 잊고 같은 형태로 비극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임진왜란 한일합병 이런 내용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지만,
오늘날은 과거 왜 부산까지 갑자기 밀려 내려갔는가.
또 왜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또 1월 4 일날 후퇴해야 했는가.
이런 두 사실부터 복기하며 해결 방안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또 되풀이하려는 경향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된다.
극과 극으로 다른 두 상황이 교훈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경전에서 제시한 것처럼
자신이 과거에 잡아 먹은 물고기가 어느날 황제로 등극해서
자신을 수용소에 묶어 가두는 일이 과연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시하기 쉬운데
지금 경전에서는 있다고 제시한다.
그것도 무량겁에 걸쳐서 한번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과거에 잘 지내다가 갑자기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입장이라거나
여기저기 춤과 노래만 선보이고 집시로 유랑을 다니다가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 경우라거나
또는 대부분 잘 아는 비극적 사건처럼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당한 입장을 놓고
왜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살피면
일단 가장 가까운 원인은 그 당시 선생님으로 나타나 활동한 이의 입장에서볼 때
그 자신이 그런 곳에서 그런 고통을 심하게 겪어야만
좋음을 얻게 된다고 보았기에 그렇다라고 밖에는 사정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사실들로부터 짧게 교훈을 얻으면
살면서 재수없이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이 정도로만 교훈을 얻고 끝나기 쉬운데
사실 제대로 교훈을 얻으려면
자신이 마치 신이나 황제인 듯 다른 생명을 대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부터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에 갑자기 방문한
파리나 모기 바퀴벌레 개미 등등을 놓고
자신이 평소 어떻게 대하는가를 놓고 잘 검토할 문제가 된다.
자신부터 그렇게 하지 않은 상태라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어떤 무서운 선생님이 나타나
어떤 수용소에 지내게 된 일을 놓고 의아하게 여기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평소
자신보다 못하다고 보는 생명을 그렇게 대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적당히 좁고 짧고 얕게 살필 일인가를 놓고
자신과 남의 정체와 생사윤회 문제를 살펴야 한다.
이는 처음에 붙인 그림을 놓고
무엇을 과연 자신의 정체로 보고
어떤 바탕에서 현실에 임하고
어떤 생각과 말과 행위 즉 어떤 성격의 업을 행하여
얼마만한 기간에 걸쳐 그런 상태가 되는가를 살피는 주제가 된다.
반복되지만 이 내용을 살피기 위해 다시 그림을 붙여야 한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은 그림의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현실에서 분주히 생활중이다.
좋은 옷을 입고자 하는 것도 1 부분이고
살을 조금 빼고 체력을 좋게 만들어야겠다.
또 오래 조금 살아보아야겠다
또는 조금 돈을 많이 갖고 편하게 지내보아야겠다고 여기는 것도
모두 1 부분과 관련된 내용들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1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임하는 것이 바로 거꾸로 뒤집혀진 전도망상분별이고
이 증상 때문에 3 악도에 묶여 끌려가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 사정이 무언가는 다음 그림을 또 참조해야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앞 그림에서 1 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은
위 그림에서는 ◇ 부분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체의 각 정신은 일단 동그라미 형태로 1,2,3,4,5,6,7,8,
이렇게 그려져 있다.
여기서 현실 감각내용을 얻는 정신 영역은 1,2,3,4,5 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한 주체가 사실은 매 순간 외부 현실로 이해하고 외부 세계로 이해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를 또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고 있다.
그런데 위 그림에서는 그 일체가
그 주체의 마음 안에 얻어진 내용임을 제시한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최근에 제목을 붙여 링크로 걸어 살필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되풀이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전체 내용은 다음이다.
● http://buddhism007.tistory.com/4053
dict-list--editing_text.TXT
○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그런데 그 가운데 특히 다음 부분들이 본 주제와 관련된다.
여기서 처음
한 주체가 눈을 떠 대하는 현실내용들을
과연 마음안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 존재에 대한 일반적입장과 전도망상분별
http://buddhism007.tistory.com/4035#002
sfed--불설마요란경_K0694_T0066.txt
sfd8--불교단상_2562_02.txt ☞○ 존재에 대한 일반적입장과 전도망상분별
----
○ 존재에 대한 일반적입장과 전도망상분별
그리고 이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실험방안이 다음에 소개된다.
■■■
○ 기본적 실험방안과 추가적 실험방안
http://buddhism007.tistory.com/4035#003
sfed--불설마요란경_K0694_T0066.txt
sfd8--불교단상_2562_02.txt ☞○ 기본적 실험방안과 추가적 실험방안
----
○ 기본적 실험방안과 추가적 실험방안
■■■
그외 위 페이지에 링크된 여러 내용들이
모두 자신의 본 정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는 주제와 관련된다.
■■■
●자신의정체에 대해 확인하기
http://buddhism007.tistory.com/5185#003
sfed--불설노여인경_K0216_T0559.txt
☞●자신의정체에 대해 확인하기
----
●자신의정체에 대해 확인하기
일단 이런 링크도 참조하지만,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조금 더 추가할 내용만 여기에서 간략하게 살피고 마치고자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앞에 제시한 그림에서
일반적으로 ◇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 경우 #실재 - 그런 감각현실로서 ◇ - 그리고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로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여기는 관념내용 [위 그림에서 a@]
의 관계를 앞에서 열심히 살폈다.
그리고 이것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에서
라면 - - - 벽돌 - 사람의 비유가 의미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재료 자체는 일반적 입장이나
경전과 수행자의 입장이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런 재료를 놓고
분별 영역에서 다시 어떤 망상을 일으키고
이들 내용을 대하게 되는가 여기서부터 큰 차이가 있다.
재료는 위와 같은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나머지 부분은 외부 세계, 외부 대상, 정신과는 다른 외부물질 이렇게 여기고
이것을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를 잘못 이해하기 쉽다.
자신의 정신은 오히려 이런 정신안에 들어온 내용
즉 자신이 평소 외부 물질로 보는 이런 내용들로 인해서 나타난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정신은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 부분 가운데
오늘날로 보면 생체를 해부하면 보게 되는 뇌와 같은 부분에 머문다.
그리고 마음이란 것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육체부분에서 외부의 물질 사이에서 보듯
자극 - 반응의 연쇄관계로 나타나는 반응일 뿐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오늘날 생리학자나 의사의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큼 뒤바뀐 판단인가는
처음의 그림을 놓고 살피면 이해가 쉽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다시 위 그림을 보자.
철수 2 가 눈을 뜨고 보는 내용을 놓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자신이 볼때 1 이라는 이는 자신이 보는 1^다.
그리고 그런 1 의 마음은
철수가 보는 그런 1^ 부분 즉 1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 안에 들어 있다.
이렇게 여기고 그 부분을 대한다.
그리고 1 이 무언가 반응하고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은
철수가 보는 1^ 과 4 ^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극 반응관계의 연쇄적인 내용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위 그림에서 5^ 로 표시된 부분들이 그 부분이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1 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놓고
다음과 같이 판단하는 것은 엉터리다.
예를 들어
철수가 2 처럼 보일 때 그 2 부분이 철수이고
철수의 마음은 2 와 같은 부분에 있다.
더 자세히 살피면 2 가 죽은 다음 해부해서 보게 되는
뇌 부분에 2가 무슨 생각을 하는 작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알고보면 자신이 보는 4 와 같은 꽃과
2의 육체가 물질적으로 자극 - 반응의 관계로 연쇄적으로 이어져서
2 의 뇌 안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다.
그런데 처음 철수가 생각한 내용이 엉터리이듯
이런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일반적 이해가
결국 바다의 정체가 무언가를 파악할때
바닷가의 물방울을 하나 바라보면서
이것이 바다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판단이다.
위와 같이 1이 눈을 떠서 보는 그 일체는
일단 1 의 마음안 내용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 안 내용을 놓고
다른 주체가 어떤 내용을 보거나 얻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안에 철수가 영희가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 그림에서는 마치 2 라는 철수가
자신이 본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해서
무슨 내용을 얻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이 관계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지만,
이는 이해를 돕기 위한 표시일 뿐 사실은 엉터리다.
그리고 이런 이해가
곧 현실에서 자신과 남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분별의 근본이 된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등을 갖고
현실에 임하면 그 자체로 수행자 라이센스를 박탈당하게 된다고
금강경에서 제시한다.
이런 망상 증상도 문제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저런 내용을 눈을 떠서 보았다면
위와 일치하거나 그와 비례하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밖에 그대로 있다고 여기면서 임하는 것은
조금 더 심한 증세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정을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였다.
이런 입장은
자신이 눈으로 파란 색을 보는 순간 소리를 들었다면
귀로 듣는 소리 영역에도 그 파란색이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로 엉터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적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를 들었다.
자신은 사람으로 여기고 대하는데 그 감각현실 부분은 벽돌이다.
그리고 감각현실로 얻은 벽돌 부분은
본 바탕에서 알고보면 벽돌이 아니고
라면과 같은 것이라고 일단 비유로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사정을 이해하고
이 상황을 기본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재료는 같고
그 재료들도 실재 영역을 포함해서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그 각 내용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이 상황을 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런 내용이 벽돌 부분에도 있고
라면 부분까지도 그렇다고 주장하면
그 증상이 바로 망집현상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과보가
3 악도의 생사고통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들 내용도 많이 반복하였다.
여하튼 현실에서 용감하게 행하는 현실 내용 대부분은
자신이 좋다고 보는 어떤 일이
다른 생명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자신이 직접 당장 느끼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또 그런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나중에 어떤 과보를 자신이 돌려 받는지를
미리 헤아리지 못해 그런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무지함의 용기다.
그래서 매 경우 자신 입장에서 대단히 좋다고 여기는 일을
분주히 행하는데
이것이 하나같이 자신을 3 악도로 묶어 끌고 가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리고 대부분 욕계내 중생이 단 한순간도 그렇게 임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수행을 통해서 먼저 제거해야 하기에
현실에서 얻는 재료 자체에 대해
그 정체와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 내용을 이미
공해탈삼매 무상해탈삼매 무원무작해탈삼매의 내용을 통해서 대강 살폈다.
재료는 같다.
# 본 바탕이 되는 실재 - 색성향미촉의 감각현실 - 그리고 그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분별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재료를 얻고 나서
관념 영역에서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그 가운데 자신이 좋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열심히 업을 행하여
결과적으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3 악도 상태에 묶이게 된다.
쉽게 설명하자면
자신이 지금까지 식사한 횟수와 동등하게
매번 도마 위에 올라가 전신을 난도질 당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죽으면 끝인데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는가.
자신이 어제 먹은 물고기나 돼지가
언제 자신 앞에 황제로 나타나서
고문을 받는 수용소에 자신을 가두고 고통을 가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위 내용을 통해서 다시 살펴야 한다.
물론 한편으로 다음 내용도 확인해야 한다.
처음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로 제시한 내용처럼
자신이 자신이나 남이나 현실 세계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일체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생사고통도 마찬가지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재료는 같은데
그 같은 재료를 놓고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평소 이해하고 대하는 것처럼 임하는 한편
단 한 순간도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매 순간 그렇게 임하는 가운데
무량겁을 두고도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상태에서는
그렇게 망집을 바탕으로
지금 이 현실에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고
또 다른 생명은 인간이나 파리나 돼지 소로 여기고
또 일정 부분을 의자나 책상으로 여기고 대하듯,
그런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윤회를 겪게 된다.
이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보충할 부분은
왜 그것이 이번 생으로 끝나지 않고
무량겁에 걸쳐 이어진다고 하는가.
이것을 살피려고 하는 것이다.
● 망집에 바탕한 생사과정은 왜 무량겁에 걸쳐 이어지는가.
망집에 바탕한 생사과정은 왜 무량겁에 걸쳐 이어지는가의 문제를 살피려면
처음 현실에서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고
현실 내용을 그처럼 얻어내는 마음의 본 정체가 무언가하는 부분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생리학자의 입장처럼 이히해하면
자신이 현실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듣고 하는 과정은
자신이 평소 외부물질과 자신의 육체로 여긴 그런 내용들간의
작용 반작용 자극 반응 이런 관계를 통해
이런 내용을 얻게 되는 것으로 이 관계를 뒤집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그처럼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경우는
그런 활동을 하는 바탕인 그런 육체가 소멸되어 없어지는 경우에는
그 주체의 삶도 끝이고 그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또 그런 주체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단멸관을 쉽게 취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각 망상분별이 서로 관련되게 된다.
그래서 앞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눈에 볼 때 철수로 보는 그 부분은
이제 철수가 죽어서 다 사라지고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무슨 철수가 그 뒤에 또 있어서 무엇을 한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여기게 되는 문제다.
그리고 처음 생리학자가 이해하는 내용이
거꾸로 뒤집힌 망상분별이라는 것은
그 생리학자가 관찰한 그 내용들이 모두
사실은 그 마음안에 들어온 마음 내용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다른 이의 마음안 내용을 가지고
평소 보고 생활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수나 파리나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잘못된 견해는
처음에 자신이 자신의 정체나 철수의 정체나 파리나 모기의 정체부터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대충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임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경전을 보면 결국 이들 모든 생명은
다 위대한 부처님이 장차 될 분이라고 전제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과거 가섭부처님이 수행할 당시는
가섭부처님의 옷에 붙어 있는 이였다 이런 내용도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과정에
앞에 제시한 것처럼 그 각 생명이
언젠가는 황제도 되고 무서운 선생님도 되어 나타나
과거에 자신에게 고통을 가했던 이들은
수용소에 가서 고통을 받는 것이 대단히 좋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그렇게 되는데는 일정한 사정과 연유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파리를 하나 파리채로 때려 잡고
파리의 내장이 터져 나와 죽게 된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어떤 고통을 받는다면
이 두 내용은 서로 또 얼마나 엉뚱한가.
자신이 파리채를 휘두른 일과
수용소에서 몽둥이로 하루 종일 맞는 일을 놓고 대조해보면 서로 얼마나 엉뚱한가.
그것을 경전에서 밭에 뿌린 씨와 그 씨로 인해 나타나는 싹- 가지 - 잎- 꽃 -------- 열매
이런 관계로 설명하게 된다.
현실에서 위 내용은 서로 얼마나 엉뚱한가
엉뚱하기로 말하면 손을 부딪힐 때마다 손모습과는 전혀 엉뚱한 손뼉소리가 나는 것처럼
대단히 엉뚱한 관계다 .
그래서 한자어로는 이 관계를 이숙(異熟)이라고 표현한다 .
한자어를 풀어 말하면 모습이나 성품이 다른 형태로 익어서 나타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내용이 바로 이런 관계로
무량하게 반복해 나타난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관련되어 제시하는 관계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상황을 구성하는 위 내용들에서
우선 벽돌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런데도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벽돌을 대하고 매 순간 사람이라고 여기는 현상은
'무랑하게' 반복해 그렇게 나타난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일으켜 그 재료를 대하는 상태에서는
그런 상태로 무량한 주체가
그런 다양한 생사고통을 무량한 시간대에 걸쳐
지금 현실처럼 생생하고 실답게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생사고통을 겪는 각 주체가
생생하게 얻고 명료하게 여기는 그런 내용은
그 생사현실 어느 단면 어느 영역에도 얻을 수 없다.
이 두 측면을 함께 제시한다.
그래서 대반야바라밀다경전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원칙적인 사항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처럼 본 실상은 공한데
그런데 수행자가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에 임하면
무량하게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성불한다.
이 내용도 마찬가지다.
이 내용은 처음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측면과
정반대가 되는 측면을 또 그렇게 제시한 것이다.
라면에서 벽돌을 얻고
벽돌을 얻고 나서
그것을 사람이라는 내용을 일으켜 얻는 현실 상황의 재료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원칙적으로
그 현실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일체 얻을 수 없다.
아상, 인상, 영희상 철수상 의자상 연필상 각종 상을 취하고 임하지만,
그것은 전체로 하나의 1 상이고 또 그래서 무상이고
그리고 실상은 공하다.
그런데 또 한편
앞과 같은 바탕에서 그 재료를 놓고 망집을 일으킨 측면에서는
이 부분은 자신이고 저 부분은 영희고 철수고 의자고 연필이고
이렇게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업을 행하여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어 나간다.
그런데 다시 그런 바탕에서
처음의 원칙적인 입장에서 그런 본 사정을 잘 관하는 가운데
그 생사현실에서 수행에 잘 임하면
그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게 하고
불국토을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다.
이 두 측면의 내용을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사정이 왜 그런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알고보면 벽돌이어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러나 왜 그 주체가 이번 생을 마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지 않고
무량겁에 걸쳐서 한쪽은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무한히 반복해 겪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행자가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헤를 구족해서 성불하게 되는가.
이 부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처음 생리학자가 이해하는 내용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부터 잘 파악하고
자신이 육체로 보고 대한 그 부분과
자신의 마음이 어떤 관계인가부터 파악해야 한다.
다시 그림을 붙여보자.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여기서 2 가 눈을 떠 본 내용 5 ^ 부분을 참조해보자.
사실은 1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다.
처음에 2 가 생각하기를
2 ^ 라는 몸 부분 안에 자신의 정신이 머문다거나
그런 몸안에서 물질의 자극 반응관계로 얻어지는 것이 마음현상이라고 잘못 이해하였다.
그런데 위 그림을 1이 바라보면서 살피면
알고보면 2 가 외부세계나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고 대한 그 일체 내용은
2 의 마음 안에 들어온 외부 손님과 같은 내용들일 뿐이다.
즉, 마음안 내용이다.
1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 실재 방면으로 한번 더 나아가서 이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앞과 같이 한 주체가 외부세계나 자신의 몸이라고 여긴 부분이
알고보면 자신 마음안 내용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티끌 손님[객진] 이렇게 제시하고
이를 이해하게 되면
망집을 갖고 이를 대했던 입장에서는
눈을 떠 대하는 이들 내용은 비록 자신 마음안 내용이지만,
마음에서 이런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은
마음 밖에 그와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어떤 내용이
외부에 그대로 실재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다시 이해하고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해를 위해서 일단 그렇다고 하자.
이는 가정적 항변의 형태로 살피자는 의미다.
가정적 항변이란
비록 그의 주장이 엉터리지만,
그것이 엉터리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렇다고 상대입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한 바탕에서 그 다음을 살펴서
무엇이 그 주장의 문제인가를 살피자는 취지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공한 실재 영역에 대해
라면이라는 내용을 하나 적어 놓고
비유를 동원하여 설명하게 된다.
상대의 주장대로 일단 그렇다고 해보자는 의미다.
위 그림을 잘 보고
2 의 외부에 위 5^ 로 표시된 내용과 비례하는 어떤 내용을
모두 일단 밀어 넣어 보는 것이다.
그래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지금 저 그림을 잘 보면
철수라는 2 의 마음은
그 안에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니 그 안에 그려진 철수의 몸 2 ^ 부분을
모두 마음 밖으로 실재 영역에 밀어 넣는다면
5 ^ 부분으로 표시한 철수의 마음도 역시 그에 비례한 상태로
실재 영역에 밀어 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안의 내용들은
다 마음 밖에 그와 비례한 형태로 밀어 넣지만,
그러나 정작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이 경우에도 그런 내용들과 5 ^ 라는 마음의 관계를 살필 때는
일단 그렇게 실재 영역에 밀어 넣는 내용과
이 마음은 일단 서로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마음안 내용을 무조건 밖에 밀어 넣는다고 해서
처음 생리학자가 이해하듯 그런 내용들간의 관계로
마음이나 마음작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참고로 마음과 실재의 관계는 혼동을 많이 일으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
처음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는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라는 사실부터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일단 그렇게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가 마음안에서 얻은 내용이어서
그 일체가 마음이라고 이해하는 한편,
그 마음은 정작 마음에서 얻는 현실 내용과 달리
그 주체가 그 마음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질 수 없다.
한편, 실재는 이처럼 자신의 마음으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이런 내용을 얻는 자신의 마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을 실재나 진여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여 실재란,
이제 마음과 마음이 얻은 내용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런 마음 밖에 마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하는 그 무엇을 가리킨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 주체가 마음이 얻어낸 '현실 내용'들은 비교적 생생하게 얻어 확인하지만,
정작 그 마음은 직접 보지도 못하고 확인하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이런 마음은 앞에서 제시한 실재 영역에 있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실재와 다른 감각현실 영역에 있는 무엇이라고 할 어떤 것인가가 문제되면
앞의 실재 문제와 혼동을 우선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한 주체가 얻는 현실 내용 그 일체가
모두 하나의 마음을 바탕으로 얻어진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시 제시받게 되면
자신은 세상에는 갑과 을 병, 등등이 있다고 여겼지만,
세상에는 오직 마음 하나 밖에 없는 것인가.
그래서 세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고 성불했다면
자신도 성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혼동도 또 일으킨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처음에 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이런 마음을
있다고 시설해 제시한 것인가부터
그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마음이
앞과 같은 바탕에서 문제삼은 진여 실재와는 또
어떤 관계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진여 실재는 본래 언설을 떠나고 한 주체가 얻을 수 없고
한 주체와 관련없이도 실재하는 본 바탕으로서 공하다고 제시하는데
여기서 살피는 마음도
결국 한 주체가 얻지 못하는 점에서는
결국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혼동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또 관계되는 곳에서 따로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가운데
앞과 같이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게 되는 내용이 마음안 내용이라고 할 때
그런 내용들은 마음 밖 실재 영역에 그 내용들이 실재하기에 그런것이다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모두 실재 영역으로 밀어 넣어 이해하려고 하기 쉽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마음과 마음안 내용이 실재 영역에서는
다시 어떤 관계로 있다고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본래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분별과 시설 자체가 가능하지 않고
그런 주장자체가 엉터리다.
다만 여기서는 일단 가정적으로 그런 상대의 엉터리 주장을 받아들인 가운데
그런 바탕에서 그 주장의 문제를 살피려고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위 논의 자체는 이런 바탕에서 행하는 가정적 논의임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마음은
그런 본 바탕인 실재를 떠나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 ---
그리고 현실에서 다음 내용을 놓고 또 살펴야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우선 어차피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사정이 그렇더라도
1,2,3,4,5,6, 까지는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는데
왜 7 과 8 이라는 엉뚱한 부분까지 추가해 넣었는가.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무량한 겁에 걸쳐 이어지는 생사를 비롯해서
현실에서 갓난아이에서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한 주체가 그 수많은 내용을 다 자신의 일로 관련시켜 대하게 되는데에는
사실 이 부분이 갖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자신이 육체로 보는 내용과 별도로
이런 마음을 따로 시설해 살펴야 하는 사정은
이미 앞 링크부분에서 제시한 바 있다.
그냥 마음이 따로 있다고 하자.
이런 형태로 무조건 마음이 있다고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하튼 위 그림에서 1,2,3,4,5,6 과 같은 마음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눈으로 어떤 색깔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 활동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7, 8 은 현실 이 순간에도
각 주체마다 보유한 정신이라고 제시되지만,
정작, 한 순간도 그 정신과 그 정신이 매 순간 얻어내는 내용은
그 주체는 잘 파악할 수 없고 애매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파악하기 힘들고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번 생을 마치고
축사에 가서 지낼 일은 전혀 없다.
축사에 갇혀 지금 지내고 있는 축생들은 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쉽게 여기고 태연하게 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위와 같이 마음에 들어온 각 내용을 재료로 놓고
예를 들어 처음에 자신이 현실에서 벽돌을 한 영역에서 얻고
그것을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있게 되었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통해서
그런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 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망집에 바탕해 무량겁에 걸쳐서
3 계 6 도안에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때로는 축사에서 때로는 아귀 지옥세계에서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한 주체가 무량겁에 걸쳐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되는 그 사정은
사실은 위 7,8 부분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먼저 이런 정신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제시된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그것은 또 왜 생사를 통해서 같이 육체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무량겁에 걸쳐서 이어져 나가는가. 이런 것을 함꼐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처음 자신이 자신의 육체라고 여기고 대하는 ◇ 부분과
그런 내용을 얻는 정신과의 관계부터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와 같은 부분은 한 생을 통해서 관찰하더라도
어린 갓난아이시절 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쉼없이 들고나고 하면서 바뀌어 온 내용이다.
심지어 눈 한번 뜨고 감는 상황에서도 그 내용은 사라지고 나타나는 변화를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1 이라는 정신을 기준으로 잡고 살피면
이들 내용은 그 정신안에 잠시 들어오고 나가는 티끌이나 손님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내용을 얻어내는 그 마음은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사정이 지금 순간도 그렇지만,
그 전후도 그렇고
그 전전후후도 그렇다.
그리고 이제 수학에서 무한을 증명하는 식을 응용하면
이것이 무시 무종에 걸쳐서 이런 관계로 이어져 나간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1,2,3,4,5,6,7,8 이런 여러 형태로 제시했지만,
마음의 근본 재료나 특성은 사실은 마찬가지라고 잘 파악해야 한다.
물론 색깔을 보는 정신은
소리를 듣는 정신이나
촉감을 얻는 정신들과
그 정신이 받아들이는 내용에서 차이는 있다고 할 것이지만,
그 자체의 특성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편 ◇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하는데에는
그런 배경 사정이 따로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 배경 사정이 바로 7,8 부분과 관련이 깊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매 생마다 모두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공중 3 회전을 거쳐서 그렇게 변화해서
현실에서 지금 대하는 형태로 자신은 자신대로 인간의 정신 형태로
원숭이는 원숭이 형태로
돼지는 돼지 형태로
파리는 파리 형태로
이렇게 되어서
이번 생을 출발하고 마치게 되지만,
그렇다고 근본정신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정을 현실의 지금 이 단면과 그 전후를 놓고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이론상으로만 보면 이 관계를
정말 무량겁 전과 무량겁 후를 오가면서
이 관계를 살펴야 결론을 얻어낼 것 같지만,
그것은 그렇게 살핀다고 해도 실효성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문제는 이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장차 3 악도에 들어가 생사고통을 겪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살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일히 그런 지옥이나 아귀세계에 무량겁에 걸쳐 처한 다음
그리고 나서 그 관계를 종합해 살피겠다고 임하면
그 관계는 살피더라도 정작
그런 생사고통을 예방하는 효용은 대신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에 대해
지금 이 순간 이 단면을 잘 살피고
또 이 단면의 전후와의 관계를 놓고 한번 살피고
다시 이번 생을 출발하기 직전과 직후를 놓고 한번 살피고
또 이번 생을 마치는 순간과 그 직전과 직후를 놓고 살피는 가운데
이론적으로 미리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서 결국 무량겁에 걸쳐서
앞의 망집현상으로 비롯되는 문제현상을
수행을 통해 잘 시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론적으로 살핀 위 내용을
무량겁을 놓고 직접 자신의 현실에서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경전에 제시된 형태로 그런 생사고통을 밟아나게끔 된다는 사정을
미리 잘 헤아려야 한다.
>>>
너무 길어졌는데 아무래도
이 정도만 대략적으로 살피고
이후 내용은 페이지를 옮겨서 살피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일단 쉬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너무 글이 길어져서 이것을 페이지를 옮겨 적을까 하다가
어차피 쉴 때마다 노래도 올리고 휴식지점을 표시하면서 적고 있으니
페이지를 나누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너무 내용이 길어도 골치가 아파오니까
무량겁에 걸친 생사윤회를 어떻게 이론상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
마음현상에 대해 핵심 내용만 키워드 형태로 일단 제시하고
더 자세한 내용은 별도로 논의하고 연구해가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조각글을 적으면서 또 한편으로 과거에 적었던 조각글이나 경전 내용들을 살피면서
교정도 하고 정리해 올리게 된다.
하나의 작업만 계속하면 정신적 피로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자만 따라 다니면서 읽다 보면 많이 읽은 것 같은데
다 읽고나서 방금 무엇을 읽었는지 스스로 되물어 보면
경전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 내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에 원고를 놓고 인쇄를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글자를 글자판에서 하나하나 뽑아서 인쇄소에서 인쇄를 했다.
그런 경우 원고를 보고 해당되는 글자를 뽑아내는 일을 계속 한다고 할 때
정작 그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직접 그런 일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문서편집과정에서 글자나 마침표 기호 이런 것만 교정하면서
문장을 보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런 경우 아무리 많은 문장을 대하더라도
정작 그 내용은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내용을 대할 때는 늘 자신이 무슨 경전을 보고
그 핵심 내용이 무언가.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전체 내용에서 중요한 한 문장이나 한 단어 정도만 뽑아내면 무엇인가.
이런 의식을 갖고 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거 6 월달에 적은 조각글들을 살피면서
『불설흥기행경』이란 경전을 잠깐 살펴봤다.
그런데 지금 그 경전 제목을 적으려는데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이 글을 적으려고 방금전까지 외었는데 막상 생각이 안 나서
다시 펼쳐보고 적게 되는데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
mus0fl--Yves Jamait - Reviens.lrc
『불설흥기행경』에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과거에 어떤 업을 행한 경우 설령 부처님이 되어도
그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부처님도 그런데 하물며 일반적인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
“너는 여래를 보라.
뭇 악이 모두 다하고
여러 선이 널리 갖추었으며
하늘과 용ㆍ귀신ㆍ제왕ㆍ신민이며
기고 날고 꿈틀거리는 동물까지 제도할 수 있고
모두 무위(無爲)의 안락을 얻게 한다. *
비록 이런 공덕이 있다 손치더라도
오히려 전생의 인연을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또 어리석고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로서
몸과 입과 뜻을 껴잡지 못한 이러한 이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불설흥기행경』 1. 부처님이 손타리의 전생인연을 말씀하시는 경[불설손타리숙연경佛說孫陀利宿緣經]
>>>
손타리는 한국말로는 손해를 볼 것이다는 의미가 연상이 되는데
손타리라는 여인은 석가모니 당시 대중들이 있을 때
까닭없이 석존에 대해 악한 비방을 일으킨 여인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손타리 여인이 하였는가.
이에 대해 가까운 원인도 무언가 있겠지만,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은 까마득한 전생에서
석존이 행한 업 때문에 그런 과보를 받는다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아무리 수행을 해 부처님이 되어도
한번 행한 업에 따른 과보를 피할 수 없다면
수행을 하는 의미가 도대체 무언가.
그런 것이 없어져야 수행할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
앞의 내용을 잘 보면 그 사정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업에 따른 과보는 받는다.
이렇게 또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제시한 내용을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망집에 바탕한 생사현실에서는 생사가 윤회한다.
그런데 그 생사현실의 재료를 그대로 놓고
그런 것은 일체 본래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쉬는 동안 올려진 음악을 듣다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보이겠는가.
이런 메세지를 반복해 듣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 파순을 제도하게 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몇몇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파순과의 관계를 제시한다고 듣게 된다.
그런데 과연 불어 노래에 원래 이런 내용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본래 그런 내용이 없다고 제시하는 한편
그러나 한국어로 만일 이 소리를 듣는 경우는 그런 메세지로도 들릴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 사정과 위 내용의 사정이 같다.
무언가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러나 일정 조건에서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고 여기는
이 뒷 부분은 일종의 망상분별 현상과 관련된다.
물론 앞 부분은 결국
문제삼는 그런 것 자체를 본래 일체 얻을 수 없다.
즉, 실상은 본래 공해서 한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소리라는 감각현실 영역에는 그런 일체의 분별을 얻을 수 없고
분별은 단지 분별일 뿐 그런 감각현실을 구성요소로 본래 갖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측면이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을 생사현실과 관련시켜 제시하는 것이다.
이번에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살피면서
망집과 생사윤회, 그리고 이를 벗어나는 3 해탈문 이런 내용을 살피면서
마음의 정체와 함께
왜 무량겁에 걸쳐 생사윤회를 한다고 제시하는가를 살폈는데
무량겁에 걸쳐 생사윤회와 관련되는 마음 현상을 이제 살펴나가야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처음 위와 같은 그림을 제시했다.
위 그림에서 1,2,3,4,5,6,7,8 로 표시한 것은
한 주체가 갖는 마음을 이렇게 나누어 시설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눈으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표시할 수 있는가를 처음에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을 놓고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어떤 이가 눈을 뜨면 무언가를 본다.
이 때 처음에 1 이라는 마음이 있어서 본 것인가.
아니면 그런 마음이 없어도 보는 것인가.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다.
마음이 없어도 그런 것을 본다는 입장은
예를 들어 돌을 호수에 던지면 호수에 파장이 일어나고
그 파장이 나중에 호수가에 와 닿는 현상.
또는 도미노를 쌓아 놓고 하나를 쓰러뜨리면
계속해서 도미노가 쓰러지고 나중에 그 도미노가 어떤 부분에 부딪히는 현상
이런 식으로 마음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마음현상이란, 따로 어떤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이가 외부 세계에서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자신의 육체를 구성하는 들에서
작용반작용 - 관성- 가속도의 법칙 이런 형태로 일어나는 상호관계
또는 자극- 반응 이런 형태로 각 물질이 변화해가는 관계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이 저런 표시처럼 별도로 있다고 제시하려면
조금 더 논의를 해야 한다.
그 내용은 링크를 건 부분에서 살피고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여하튼 처음에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현상을 놓고
1 이라는 마음을 별도로 시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 중요하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이런 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이 관계를 먼저 현실에서 확인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논의를 할 때
각 영역의 내용이 발생한 순서를 생각하면
#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순서로 각 내용을 얻게 되었다고 보지만,
그러나 논의를 할 때는 이 반대 순서로 각 내용을 찾아가는 사정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논의할 때는 관념분별을 한 상태에서
그 영역에서 각 내용을 가리키면서 논의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대해서도 논의하게 되는데
알고보면 그것은 순서가 원래 발생한 순서와는 반대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기기를 조립하고 분해하는 과정에서
분해는 조립의 역순 이런 말이 있다.
이 경우도 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에서 어떤 한 주체가 생활하고 생각할 때
본래는 위 그림에서 8이나 7 로 표시한 내용들이 먼저 발생하고
그리고 1,2,3,4,5,6, 이 발생하고
이런 순서로 각 내용이 발생한 다음
그리고 그 바탕에서 각 영역에서 각 내용을 얻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현실에서 각 주체는 일단 자신의 마음 자체를 보거나 만지지도 못한 가운데
단지 마음에 들어온 내용만 매 순간 얻으면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상태다.
그런 가운데 어느 순간 무언가를 계기로
자신이 무언가를 보거나 생각하는 활동 자체를 놓고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앞과 같이 과연 어떤 마음이란 내용이
따로 있어서 이런 내용을 현실에서 얻는가.
아니면 그냥 외부 물질과 신체내 물질의 상호 반응관계일 뿐인가.
이런 형태로도 살피고
그리고 처음에 1 과 같은 마음 하나를 시설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다.
원래 발생한 순서를 놓고 보면 거꾸로라고 보지만,
여하튼 그런 형태로 위와 같은 내용을 찾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 사정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
조금 더 쉬고 이어 살피자.
mus0fl--Mistinguett - Mon Homme.lrc
앞에서 분해와 조립은 역순인 사정을 살폈는데
이것이 한 주체의 무량한 생사윤회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보는 가운데
그 부분이 각기 무엇이라고 분별을 행하면서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의 이런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과정에
자신이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내용을 보게 됨을 이해하게 된다.
즉,
일반적으로는
그처럼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자신이 눈을 떠 보는 그런 내용들은
자신 외부의 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눈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고
정신과는 떨어져 있고 정신과는 다른 외부물질로 잘못 이해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니, 그것이 아니고
그런 내용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마음내용들'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보는 활동을 하고
그렇게 본 내용을 통해서 그런 마음이 그렇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시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분해와 조립의 순서가 서로 거꾸로 되어 있다는 사정과 관련이 된다.
즉 앞과 같은 형태로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설하게 되지만,
이는 사실은
그런 마음이 '먼저 전제'되어 있어서
그런 내용들을 현실에서 보게 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음을 의미한다.
즉, 그런 마음이 먼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그런 내용을 보지 못한다.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잘 이해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무량겁에 걸친 생사윤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앞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면
마음이란 자신이 무언가를 보는 활동을 통해서 '후발적으로' 그런 마음이 생겨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
본래 그 마음이 그렇게 먼저 있고 난 연후에만 후발적으로,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얻고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1,2,3,45,6,7,8 들에 관한 내용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그런 입장에서 다음과 관계도 살펴야 한다.
일단 일반적인 망집 상태에서는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들 가운데
그림에서 ◇ 로 표시한 부분과 같은 일부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생활하게 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산화품에서 살핀 내용과 앞에서 살핀 내용은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에서 제시한 내용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 과 같은 부분에 대해
- 그 부분은 자신이다. 이런 관념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에서
이들 각각의 관계는 비유하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음을 먼저 제시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위 내용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앞에서 ◇ 부분과 같은 감각현실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였다.
그런 점에서 ◇ 부분을 취해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아상을 갖고 현실에 임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분별하는데에는
사정이 젼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내용도 과거에 상-락-아-정의 요소에 배당해서 반복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매번 눈을 떠서 볼 때 다른 부분들은 그 때마다 달라지지만,
그래도 ◇ 부분과 같은 부분은 늘 파악된다. [상]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여 가야겠다고 뜻을 갖고 움직이면
◇ 부분만 그 뜻에 따라 변화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나머지 부분은 매 순간 들고 나고 하는데 ◇ 부분만 계속 파악되는 한편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하고 즐거움을 주는 부분도 그 부분이다. [락]
또 현실에서 ◇ 부분이 다른 부분에 닿으면 그 순간에 촉감을 얻는 등 여러 내용을 얻게 된다.
그래서 ◇ 부분은 주관이 위치한 자신이 위치한 부분이고 나머지는 그 주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다.
이런 등등의 사정 때문에 현실에서
◇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망상분별을 일으킨 가운데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들로 ◇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라면
그런 관념에 적절한 부분은 사실은 ◇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위 그림에서 1,2,3,4,5,6,7,8 로 표시한 마음을 차라리 자신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되는 8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차라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자칫하면 처음 ◇ 부분을 놓고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일으킨 잘못된 망집을
거꾸로 8 과 같은 부분에 대해 옮겨 오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 같은 부분을 위와 같은 사정으로 자신이라고 여기려고 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8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8 과 같은 부분도 진짜의 참된 자신은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 대해서도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차라리'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도 역시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라는 내용을 통해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그처럼 망상분별을 현실에서 일으키고 생활하는데에
전혀 이유나 사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조립과 분해의 역순의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 이런 뜻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 부분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임하는 것이
망상분별이라고 할 때
이 망상분별 현상은 그런 망상분별 때문에
그 부분이 위와 같은 특성을 갖게 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부분을 쉽게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순간 자신이 책상 위에 있는 고무지우개를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킨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 고무지우개가 앞에 나열한 ◇ 부분이 갖는다고 보는 여러 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다.
즉, 자신이 눈을 뜰 때마다 다른 것은 다 들락날락 변화하는데
고무지우개를 자신이라고 여긴 이후부터는 고무지우개만은 그렇지 않고 늘 함께 파악된다.
또 고무지우개를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켰다고 해서
어디론가 자신이 움직여 가야 겠다고 할 때
그 고무지우개부분이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앞에서 ◇부분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망상분별이기는 한데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그래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달리 자신이라고 여기게 하는 특성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순서가 그와는 반대로
현실에서 그 부분이 다른 부분과는 일정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 것으로 파악이 되기에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켜 갖게 되었다.
이런 의미다.
즉 그런 망상분별을 잘못 일으켜 갖게 된 그 과정의 순서가 그렇다는 뜻이다.
그래서 ◇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망상분별이어서 문제이지만,
그것은 가장 후발적인 부분에서 나타난 문제다.
그리고 그런 현실 상황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갖지 않고 있어도
여전히 ◇ 부분은 앞에 나열한 특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분별 영역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가져서 => ◇ 부분이 그런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순서가 아니고
◇ 부분이 그런 특성을 갖게 되었다 => 그래서 ◇ 부분을 취해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갖게 된다. => 그리고 ...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런 순서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조립과 분해는 역순이다는 내용을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
앞으로 살필 핵심주제만 간단히 키워드 형태로 압축해 제시하고 마치려고 하는데
자꾸 글이 길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꾸 쉬게 되는데 쉬는 가운데 듣는 노래에서
수리 문제를 언급하는 것 같다.
mus0fl--Edith Piaf - Padam Padam.lrc
지금 살피는 문제도 수리문제와 비슷하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축사에서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고 있다.
날씨가 추운데 난방도 잘 안 되고 배는 고프고
그런데 별 방안이 없다.
이런 등등의 생사고통이 널려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보도되지만,
보도되지 않은 생사고통이 세상에 널려 있다.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아서 희희낙락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 경우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머지 않아 그런 상태로 옮겨 가는 것인데
다만 그 주체가 그것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사전예방차원이던 사후수습차원이던 수리를 해야 하기에
지금 이 논의를 하는 것이다.
단지 지적 호기심이 발동해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논의하는 것이 아니고
수리 방안을 알아내서 시급하게 수리를 해서
위와 같은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기기도 그렇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라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수리에 임해야 한다.
신체에서도 어떤 질병 증상이 생길 경우도 마찬가지다.
손에서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른다.
또는 성인병 증상이 있다.
이런 경우도 사정이 같다.
그 증상을 방치하면 우선 당장 다양한 문제가 있기에
그 증상을 우선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증상만 제거한다고 그 문제가 또 해결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위와 같은 질병이 발생하면 어떻게 방안을 찾게 되는가.
우선 그 증상도 문제지만,
무엇때문에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인가를 또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방치하면 큰 문제라고 보고
일단 피가 흐르지 않도록 묶게 되는데
또 그렇게 묶기만 하고 피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해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상태가 또 해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꾸 자신을 칼로 자꾸 베어서 피가 흐른 것인데
그 상황에서 흐르는 피만 막으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또 예를 들어 혈압이 높아져서 문제라고 하자.
그 상태를 방치하면 약한 혈관이 터져 그 부분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거나 심장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문제이므로 혈압을 낮추게 하는 약을 복용한다면
그것만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또 예를 들어 몸이 비만해졌다. 비만하게 보이면 옷도 불편하고 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비만한 부분을 묶어 가린다고 하자.
그려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또 예를 들어 통증이 온다.
그것을 방치하면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하겠고 다른 일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통증을 못 느끼도록 진통제를 투여한다.
그런데 그렇게 진통제만 먹고 통증을 느끼지 않게 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또 예를 들어
현실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이 활동한다.
일단 그런 범인을 방치해두면 계속 피해자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문제가 되므로 일단 범인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 놓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만 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이 각 경우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문제현상을 방치하면 곤란하므로
일단 그것을 제거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또 그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게된 원인을 찾아내서
원인까지 제거하는 노력을 함께 잘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자꾸 칼을 휘두그리게 그로 인해 피가 흐르는 것이라면,
일단 상대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려면 왜 상대가 자꾸 그렇게 하는가를 파악해서
그 원인을 또 찾아 제거해야 한다는 이런 의미다.
그러니 그 순서를 잘 찾아내서
원인부분에서도 그 문제를 잘 해결해야
병이면 치료가 되고 기기면 수리가 잘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분간 증상은 보이지 않아서
처음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여도
또 그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그 첫 문제가 더 악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혈압이 높아진 것이 문제라면
사실은 어떤 원인 때문에 혈압을 높여야만 다른 문제가 해결되기에
높아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혈관이 좁아졌다거나 비만하거나 짠 음식을 많이 섭취했다거나
신장 기능이 안 좋다거나 등등 여러 사유가 있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면
보통 혈압으로는 각 기관이나 말초부위에 영양분을 공급할 수가 없게 되어서
혈압이 높아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혈압이 높아지면
결국 약한 부위혈관이 터지고 그 부분이 기능을 못하게 된다.
또 심장은 심장대로 계속 높은 압력으로 피를 보내려고 임하기에 심장은 심장대로 두꺼어지고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일단 그 증상을 제거하는데
그러나 처음 그 증상이 발생하게 된 문제까지 같이 해결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어 간다.
어떤 원인으로 혈압을 높여야 되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면 문제가 되기에 일단
약을 복용해 낮춰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방치하니
그로 인해 또 말초부위는 혈류가 제대고 공급이 안 되고
그 약이 다시 일으키는 부작용들이 또 새로 발생하거나 그런 여러 문제가
누적되게 된다.
통증도 마찬가지다.
이유가 있어서 통증을 느끼는데
그대로 있으면 잠도 못 자겠고 다른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통증을 방치하면 곤란하기에 일단 진통제를 투여해 통증은 없어졌는데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방치한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원래 통증이 발생한 부위는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치유해주지 않으니까
점점 더 통증을 발생시킨 부위는 악화되어간다.
생사윤회문제를 살피다가 갑자기 가지를 쳐서 다른 내용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문제다.
현실에서 당장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 경우 일단 그 주체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고 안락하게 해준다.
그러면 일단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취직이면 취직, 결혼이면 결혼, 사업이면 사업,
이런 것을 뜻대로 성취시켜 주면
일단 그 번뇌는 해결되어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결국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근본 원인부분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그 생사고통의 문제가 더 증폭되고 더 악화되어서 나타난다.
사회에서 범죄를 행하는 경우도 사정이 같다.
일단 그 범인이 사회에서 활동하면 피해가 계속 발생하므로
그 범인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어두게 된다.
그래서 그 범인을 감옥에 가두어둘 동안은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에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어서,
이후 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난다.
요즘은 핵무기가 또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핵무기가 없던 상태도 문제가 결코 만만하지 않았는데
핵무기까지 있게 되어서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이 사실이고
이를 방치하면 곤란하기에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핵무기만 하나 제거한다고
또 그 문제가 잘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래서 근본원인 부분까지 병행해 문제를 잘 해결되지 않으면
설령 핵무기를 완전히 제거해도 그 문제는 더 악화되어 간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과거 60 여년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받았던 것은
핵무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핵무기를 제거하는 노력도 해야지만,
이와 함께 근본원인부분도 함께 해결하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해결하는 방식은 다 마찬가지라고 잘 이해하고
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덧붙일 부분이 있다.
앞과 같이 그 자체로 문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제현상이 발생한 경우
그 문제현상을 일단 제거하는 한편
그런 증상을 발생시킨 원인만 제거한다고
또 그 문제가 잘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 증상을 제거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더 이상 증상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조치를 병행해 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또 이미 발생한 그 상태를
원래 바람직한 상태에 가깝게 되돌릴 수 있도록
다시 그렇게 될 방안을 찾아서 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예를 들어
몸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른다.
그래서 일단 피가 흐르는 부분을 천으로 묶어 지혈하는 한편,
자꾸 상처가 나게 하는 가시 등을 제거하고
더 이상 가시가 있는 나무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앞으로 또 피가 흐르게 되지는 않게 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미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난 그 부분이
원 상태처럼 돌아가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피가 흐르는 상태를 놓고
원래 상태처럼 회복하기 위한 추가노력이 또 필요하다.
또 예를 들어
혈압이 높다. 수도관이 터져 물이 품어 나온다.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선 그렇게 방치하면 곤란하므로 일단 그 부분을 처치하게 된다.
또 한편 그렇게 혈압을 높이거나 수도관을 터지게 한 원인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을 병행한다.
그러면 다시 높아지거나 터지지는 않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미 높아져서 문제가 생긴 부분이나
이미 터진 수도관이 원래 상태로 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놓고
또 그 부분들을 원래처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수도관이 터져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주변 청소도 하고
물에 젖은 각 부분도 말리고 그런 노력이 또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도
이런 내용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종합적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수행방안이란,
일단 생사고통의 현장에서
그 생사고통의 정체를 먼저 잘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와 함께 그것을 발생시킨 원인이 되는
무명 어리석음 망집 - 업을 파악해서 그것을 제거하는 노력을 병행하는 한편,
다시 바람직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방안을 또 찾아
이들을 수행방안으로 묶어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4 성제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장난 기기의 수리나
질병 문제나
생사고통의 문제나
모두 같은 원리에 의해서 이를 접근해야 할 문제가 된다.
다시 생사윤회의문제와 마음을 파악하는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현실에서 눈을 떠 세상 모습을 보는 가운데
그 한 부분인 ◇ 부분을 붙잡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생활해간다.
이것이 망집현상이다.
이 망집을 방치하면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3 악도에 들어가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현실에 그런 일을 얻을 수 없다고 관하면
그런 문제가 다 쉭하고 사라지게 되는가.
또는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한 업을 앞으로 행하지 않고 임하면
이 문제가 이로써 발생하지 않고 해결된다고 할 것인가.
이 문제다.
앞에서 조립과 분해는 역순이다는 내용을 제시한 것은
그럴 것 같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사정을 제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상황에서
평소 ◇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망상분별을 일으켜 임하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매 순간 자신이 ◇ 부분을 자신이라고 의식하면서 임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평소 현실에서 그런 의식을 하지 않고 임하면
그 ◇ 부분은 처음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한 그런 특성이 없어지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주체가 심하게 술을 먹어서 의식을 잃었다거나,
또는 기절을 했다거나,
더 심하게 혼수상태가 되고 식물인간 형태가 되었다고 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평소 그가 자신이라고 여겼던 ◇ 부분
그리고 남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망상분별에 바탕해 그 사람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그 ◇은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대하던 상황과 거의 비슷하게
계속 그런 상태로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앞처럼 ◇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망상분별이어서
그 상황을 그렇게 대하게 되는 한편,
또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어서
그래서 그런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 ◇ 부분에 발생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상황을 앞의 여러 사례를 놓고 주의깊게 잘 살펴야 한다.
◇ 부분이 그런 특성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후발적으로 그에 대해 일으킨 망상분별 때문이 아니고
그 이전에 그렇게 된 근본 배경 사정이 또 달리 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다시 찾아서 그 문제까지 같이 병행해서 해결해야 한다.
또 그렇게 원인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보기 힘들고
이미 그런 상태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또 바람직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추가적인 노력이 또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수행과정에서 종함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은 경전에서 제시된 수행 방안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하고
실현해 성취해야 함을 의미하지만,
왜 이렇게 사정이 복잡한가를 앞의 여러 사례를 놓고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어제까지 잘 들리던 음악기기가 고장이 났다.
이 문제 하나만 놓고 해결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데
어떤 이가 태어나서 고통을 받고 살다가 죽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후 무량겁에 걸쳐서 더 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로 바삐 옮겨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냥 갑자기 떡
아니면 철야기도 3 일 이것 하나만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상식적으로 라디오 기기 하나만 고장나도
그렇게 해서 수리되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좀 복잡하지만,
앞에 제시한 형태대로 하나하나 사정을 잘 살펴서 대처해야 한다.
일단 왜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런 ◇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현실을 그렇게 생사고통의 내용으로 망상분별을 일으켜 대하는가
이 부분도 잘 살펴야 한다.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나 무상해탈삼매 공해탈 삼매 등으로
첫 부분에 제시한 내용이 그와 관련된다.
그리고 한편 그런 생사고통에 처하게 되는 것은
그런 망집에 바탕해 평소 꾸준히 매 순간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열심히 추구해서
결과적으로 3 악도에 묶여
장구하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게 된다는 사정을 파악하여
일단 그렇게 된 원인이 되는 내용을 현실에서 제거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그런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 업을 행해온 사정 때문에
이미 발생시킨 많은 문제상태는 또 그것대로
추가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아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그것들은
종합적으로 경전에서 제시한 수행방안인
계 - 정 - 혜 3 학
또는 보시- 정계 - 안인 - 정진 - 정려 - 반야바라밀다의 수행과 같은
수행을 종합적으로 원만하게 잘 성취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그런 방안이 그렇게 제시된 것인가
그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현실에서 병이 생겼을 때
일반적으로 이를 대처하는 방식대로
일단 당장 급한 것은
그 병에 대해서 잘 아는 의사나 약사분이 그 사정을 그렇게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처방전을 제시할 때
일단 그런 처방전을 제시하는 의사나 약사를 신뢰하고
그 처방전을 받아서 약을 복용하고 치유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처방전을 받고 왜 그런 처방전이 그렇게 제시되었는가를 놓고
의과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제시하는 학술적 내용을 붙들고
실험하고 임하면 되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처방전에 따라 약을 복용하여 자신의 병을 치유하는 한편,
자신이 장차 다른 환자도 치유하고
더 나아가 아예 의과대학 교수나 총장이나 이사장이나 병원장 정도까지 되어서
활동하려면 위와 같은 노력과 함께
다시 각 질병마다 왜 그런 처방전들이 제시된 것인가를
또 한편 깊게 살피고 연구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지금 살피는 문제는 사실은 뒷 부분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아무리 연구해도
정작 제시된 처방전에 따라 약을 복용하고 치유노력을 하지 않으면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정이 현실의 질병 치유과정과 마찬가지다.
어떤 환자가 병에 대해 그 분야 전문의사 이상으로 대단히 자세하게 안다.
그런데 정작 의사가 제공하는 처방전에 따라 약도 복용하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병은 낫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약의 화학성분과 약리 효과과정을 아무리 살피고 또 살핀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살피는 것은 그 병에 대해 자세히 알고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이를 실천해 병을 낫기 위한 노력인데,
정작 그렇게 해서 제시된 처방전은 실천하지 않는다면 효과는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마음이 어떻고 실상이 공하고 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배워도
그에 바탕해서 행해야 할 수행노력을 열심히 병행하지 않으면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는
매번 고문대에 묶여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 가운데
실상이 공하고 현실일체는 마음 내용이란 것만 가지고
그 상황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론상 원칙적으로 그 문제가 그렇게 잘 해결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그 이론적 내용들은
그런 생사고통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그런 사정을 한편으로 잘 이해하는 바탕에서
또 생사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으로 필요한 일정한 수행들을 모두 원만히 성취해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시해준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에서 압축해 제시하는 내용도 그것이다.
본래 제도할 중생도 얻을 바가 없고
보시할 상대나 보시하는 자신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도 얻을 수 없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하여 이런 망집을 제거하고
얻을 바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상을 취하거나 상에 머물지 말고
그 바탕에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무량한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오해하면 안된다.
즉 일체가 공하고 차별이 없고 얻을 바가 없다.
사정이 그러니 그런 줄 알고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
또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또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악한 행위를 해도 된다.
또는 수행을 하더라도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수행이나 수행을 통해서 무언가 얻을 바가 있다고(유소득)
망상분별을 일으켜 집착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해도 된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일체가 다 마음이고
일체가 다 실상이 공하다고 제시하면
간혹 자신이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면허장을
자신에게 주는 내용이라고 잘못 오해하고 임하기 쉽다.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 사정을 알아도
처방전에 해당하는 수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떤 병에 대해서 샅샅이 잘 아는 의사가
정작 그 병을 치유할 약도 먹지 않고
치유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임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
그래서 본인도 잠깐 쉬어야 한다고 본다.
소신 공양을 하기 위해서다.
지금 상황을 보니 글이 길어도 너무 길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인도 건강을 비롯해서 여러 사정이 좋지 않다.
최근 살핀 설무구칭경에서 유마힐거사님이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생각해보면 그원인이 본인에게도 있는 것이다.
유마힐거사님이 왜 병이 들었는가하면
본인과 같은 일반 중생들이 한결같이 생사라는 병에 걸려 있기에
그렇게 병이 걸린다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본인 상태도 좋지 않고 제반사정이 다 문제다.
조금만 글을 적으면 과거와 달리,
몸 전반에 이상증상이 느껴진다.
그래서 자주 쉬는데 쉰다는 활동이 사실은
대부분 소신공양 형태인 경우가 많아
이것이 더 상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글이 한없이 길어지면
더 사정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빨리 핵심만 제시하고 서둘러 마치려고 하는데
그런 생각과 달리 자꾸 길어지고 있다.
이번 노래에서는 무언가 상처를 꿰매고 잘 치유해야 한다.
그 방안이나 원리가 다 같다는 메세지를 전한다고
개인적으로 시감상하게 되는데
이런 증상이 사실은 지금 제시하는 망상증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그 원인이 그렇게 이상하게 감상하는 본인에게도 있지만,
이런 노래를 부르고
또 누군가 올려 놓고 이런 것이 또 선행한 것이기도 하다.
mus0fl--Jakie Quartz - A La Vie, L'amour.lrc
이제 마음과 무량겁에 걸친 생사윤회 문제를 살피자.
앞에서 처음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현실을 놓고
그런 사정 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이 미리 전제가 되어 있었기에
현실에서 그런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제시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관련부분으로 넘긴다.
또 현실에서 그렇게 얻는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에서
◇ 부분을 취해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증상이
그 자체만 놓고 보아도 망상분별임을 제시했다.
그것이 처음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로 제시한 내용이고
꿈의 비유를 통해서 살핀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데
그런 분별을 행하면서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내용이 감각현실 ◇ 에 있다.
그리고 감각현실 ◇ 부분은 그래서 자신이다.
이렇게 분별하고 업을 행하는 것이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상황임을 기본으로 살폈다.
그런데 그 ◇ 부분을 놓고 그런 분별을 행하게 된 것은
그런 분별 때문에 그 ◇이 그런 분별을 행하게 된 사정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선후가 뒤바뀌었다는 것까지 다시 살폈다.
그래서 ◇ 부분이 왜 다른 부분과 달리
현실에서 자꾸만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이전의 사정을 다시 살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리 결론을 제시하면
매 생을 출발하는 그 단계에서
근본정신 영역에서부터
공중 3 회전에 걸쳐 망집을 일으켜
각 정신을 분화생성시켰기에
그 바탕에서 태어나 삶을 출발하고 현실을 대해서
앞과 같은 현실 상태가 된 것이다.
즉 공한 실상의 바탕에서 3 능변이라고 표현하는 형태로
망집을 중접시킨 상태로
매 생을 출발하게 되는 배경사정 때문에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런 현실 내용을 얻고
그에 대해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사정을 파악하려면
역시 분해 조립은 역순이라는 원리에 의해
이것을 거꾸로 해서 하나하나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처음 근본정신에 해당하는 제 8 식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처음 망집을 일으켜서 임하게 된 제 7 식을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이것을 찾아내려면
처음 눈을 떠 무언가를 보게 될 때
사실은 마음이 미리 전제가 되어야 그런 활동이 가능함을 이해하는 한편,
또 한편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현실에서 각 감관별로 감각내용을 얻고, 또 분별도 행하는데
그러나 예를 들어 술을 심하게 마시거나
갑자기 사고로 의식을 잃거나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 부분에서 이뤄지는 일반적인 활동이나 기능이
여전히 이뤄진다. 이 부분을 다시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그래서 ◇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다른 특성을 갖고
현실에서 파악되게 되고
그래서 처음에 제시한 것과 같은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 배경에는
그 이전에 그렇게 사정을 만든 원인이 또 달리 있다.
이렇게 찾아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처음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놓고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을 찾아낸 과정부터 다시 잘 음미해야 한다.
잘못 생각하면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보기에
그런 사정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해서 마음을 찾게 되지만,
분해 조립과정을 잘 이해하면
사실은 그런 마음이 전제가 된 바탕에서만
그런 내용을 그 주체가 얻는다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제 8 식과 제 7 식을 찾아낼 때는
마찬가지로 먼저 12,3,4,5,6 식을 현실에서 찾아 시설하고
그런 내용들이 현실에서 그렇게 작동하려면
다시 제 8 식과 제 7 식이 먼저 전제되어야 함을 이해하고
그것을 찾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이 경우에서도
그런 1,2,3,4,5,6 식이
제 8 식과 제 7 식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와는 거꾸로
제 8 식과 제 7 식을 바탕으로 그렇게 분화 생성되고
그 상태를 전제로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 순서를 잘 정리해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하튼 이 세부과정은 이 정도로 대강살피고
여기서 살필 문제는
무엇이 먼저 전제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각 영역에서 각 내용을 얻게 되는가.
그리고 다시 그렇게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들을 재료로 해서
현실에서 각 주체는 다시 관념영역에서 어떤 망상분별을 일으키는가.
또 각 주체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어떤 형태로 업을 행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업에 의해 어떤 상태에 처해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기본적으로 살필 문제는
과연 자신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 부분이
죽음을 맞이해서 무너지고 사라지면
원래 그런 내용을 얻게 한 그 기본 바탕이 함께 무너지는가.
그래서 한 번 죽으면 그 관계는 끝인가.
그래서 단멸관이 옳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그와 관계없이 무량겁에 걸쳐서
앞에 제시한 형태로 유지되는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또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지금 현실 단면과 그 전후를 놓고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서 앞과 같이 여러 정신을 찾아내 시설한 다음
이 내용과 그 정신이 얻어내는 내용
그리고 또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의 내용을 놓고 이 관계를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선후나 분해 조립의 역순관계를 여기서도 주의해야 한다.
즉 이런 오류를 일으키면 안 된다 .
자신이 최종적으로 이런 '망상' 분별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이나 각기 다른 정신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나아가면 곤란하다.
쉽게 예를 들어
어떤 시인이 낙엽을 보고 시집간 누님이 연상되어 떠올랐다.
사정이 그러니까 낙엽에 그 누님이 있다고 해야 할인가.
그렇지 않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자신이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고
그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자신이 행한 분별 내용대로 각 영역이 그렇게 구분되고
그에 따라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렇게 여기며 그에 집찾을 갖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에 따라 그런 전제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후발적으로 표면적으로 일으키는
뒷부분의 망상분별과 업을 제거하면
일단 그로 인해 앞으로 발생할 문제는 제거되지만,
그렇다고 처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기존에 무량겁에 걸쳐
쌓아놓은 업의 장애도 함께 제거하는 노력을
기본적으로 병행해야 그 상태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런 재료를 얻게 한 기본 사정은
자신이 망집을 일으켜 대한 그 부분이
자신이 망집에 바탕해 여기는 죽음과 같은 현상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볼 때
그런 내용을 보게 하는 마음과
그 내용과의 관계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그런 내용을 보게 되면
그런 마음이 자신에게서 생겨나고 보지 않으면 없어지는가.
그렇다면 육체와 마음의 관계도 그렇다고 보게 되고
단멸관을 취하는 것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 사정을 처음 단게에서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하나 보게 될 때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런데 마음은 그런 내용을 얻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그런 것을 보거나 보지 못하거나 그런 내용의 생멸과 관계없이
미리 그렇게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정은 현실 한 단면과
그 전후 과정에서도 그렇지만,
이번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처음 이번 생에서 자신이 보는 형태와 함께
그 정신이 결합되어 분화생성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반대로 이번 생을 마칠 때도
또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사정으로 각기 시설한
제 8 식과 제 7 식 그리고 이후 분화생성되는 123456 식의 관계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이해해야 한다.
현실의 단면과 그 직전 직후의 사정이 그렇고
또 그 사정이 달라질 사정이 따로 없기에
그 관계로 무한하게 이어져 나간다는 것이
바로 생사윤회가 무량겁에 걸쳐 전개된다고 제시하는 사정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에서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의 재료나 분별 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살피면
현실에서 자신이 일으킨 실답지 않은 망상분별이 옳고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게 되지만,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얻는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에서도
그 상호관계가 잘못된 망상분별인 사정을 이미 앞에서 살폈다.
그래서 이미 그것이 문제 증상이고
그 증상을 방치하면 이후 증상이 더 악화되어서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이미 살폈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에서 임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임하게 만드는 일정한 배경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임하게 된 것임을
앞에서 1,2,3,4,5,6,7,8의 관게를 통해서 다시 덧붙여 살핀 것 뿐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 사정들 때문에
현실에서 평소 행하듯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그런 부분을 붙잡고 업을 행해 나가는 것이
적절하고 옳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지만,
그 문제는 단순히 현실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노력만으로
간단히 곧바로 쉭하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노력과 함께
그런 상태를 만든 근본원인까지 같이 제거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그 근본 배경이 되는 사정까지 해결된다.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원인이 제거되면
그로 인해 이후 후발적으로 그런 상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행한 업의 장애로 생긴 문제는 또 여전히 남아 문제가 되므로
다시 이 문제도 해결해서 바람직한 상태로 만드는 병행 치유노력을 행하는 것이
함께 요구된다.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방안들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을 놓고 보면
마치 대반야바라밀다경은 오로지
실상이 차별없이 공하고 그런 실재와 감각현실 분별이 일체가 실답지 않아서
그것을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만 계속 제시한 것처럼 잘못 이해할 수 있지만 ,
그렇지 않다.
경전을 직접 살피면 쉽게 확인하겠지만,
위 문제상황을 놓고
종합적인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원인은 원인대로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수행방안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중에는
자신의 그런 생사고통은 그것대로 치유하고 벗어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고
자신과 엇비슷하게 망집을 일으켜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 자체가 그 재료 자체만 놓고 보면 본래 그런 문제가 없고
생사현실이란, 본래 그런 문제가 없는 본 바탕을 따로 떠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생사현실 즉 니르바나라는 사정을 잘 관하는 한편 [생사 즉 열반]
그런 바탕에서 그 재료를 놓고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그런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쌓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수행을
무량겁에 걸쳐 또 해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기본 사정 때문에
수행은 수행대로 무량겁에 걸쳐서 이어지는 일이 되고
또 반대로 그런 망집을 일으켜서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는다는 문제도
그 문제대로 그렇게 무량겁에 걸쳐 이어지게 되는 문제임을
기본적으로 잘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그러그러한 전제에서
생을 출발해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분별을 일으키면서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현실에 그런 내용과 그 생멸과 생사가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그런 전제에서 이후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은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이지만,
또 한편,
그런 내용을 얻게 한 그 바탕이 되는
그 각 재료나 정신은 그것대로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런 재료나 그런 정신에 대해
다시 잘못 망상분별을 행할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와 관계없이
그런 언어시설을 통해 가리킨 그 내용은
그런 분별과 별도로 매 생사과정을 통해
그런 형태로 이어지고 나타나게 된다는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자신이 분별을 행하고 그것을 일정한 언어로 표현할 때
그 분별 내용이나 언어시설 자체와
그런 언어시설을 통해 가리킨 그 재료를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다시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비유를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
분별 영역에서 사람이라고 분별할 때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얻어지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앞의 라면-바위-사과-벽돌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들은
그 재료대로 그렇게 각 영역에 그처럼 반복해 나타나고
그렇게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 이해가 되어야
경전에서 제시하는 각 내용과
현실에서 임하여 살아가는 자신과 세계의 본 정체나 관계에 대해서도
그 사정을 잘 파악하게 되고
더 나아가
실상이 차별없이 공하고
일체가 마음에서 얻어진 내용이라고 하는 가운데
왜 그런 바탕에서
일정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가 하는 사정까지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번 생의 이번 현실 한 단면과 그 직전 직후 등을 놓고
먼저 이론적으로 그 관계를 먼저 잘 파악하는 것이
이런 여러 사정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다고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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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렇게 이 페이지를 마치고
부족한 부분은 나중에 또 보충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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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시가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반야바라밀다는
마땅히 물질[色]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물질을 여의고서 구하지 말 것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여의고서 구하지 말 것이며,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일체지(一切智)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일체지를 여의고서 구하지 말 것이며,
도상지(道相智)와 일체상지(一切相智)에서 구하지 말 것이며, 도상지와 일체상지를 여의고서 구하지 말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교시가야, 반야바라밀다와 구하는 것과 물질과 내지 일체상지(一切相智)와
♣0001-427♧이와 같은 온갖 것들은
다 상응하는 것도 아니요,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빛깔도 없고 볼 수 없고 대할 수 없는 한 모양, 즉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가 있지 않아서 도무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있지 않아서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우는
반야바라밀다는
물질이 아니요,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내지 일체상지가 아니요, 일체상지를 여읜 것도 아니며,
물질의 진여가 아니며
♣0001-427♧ 물질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며, 내지 일체상지의 진여를 여읜 것도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이 아니요, 물질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내지 일체상지의 법 성품이 아니요, 일체상지의 법 성품을 여읜 것도 아니니라.”
何以故?憍尸迦!如是諸法皆無所有都不可得。由無所有不可得故,諸菩薩摩訶薩所學般若波羅蜜多,非色,不離色,廣說乃至非一切相智,不離一切相智;非色眞如,不離色眞如,廣說乃至非一切相智眞如,不離一切相智眞如;非色法性,不離色法性,廣說乃至非一切相智法性,不離一切相智法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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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2/12/10 |
♥ 잡담 ♥경전표시기호의 교체 요즘 대장경 연구체계를 계속 정비중이다. 경전명을 한글로만 적을 때도 바로 핫키로 찾아줄 수 있도록 기존에 특수기호로 Π을 사용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기호이기에 일반적으로도 종종 사용하는 다음기호 『 』 로 바꾸었다. 이 기호는 일단 다음 핫키 ㄱㅇ ,l 로 입력하게 된다. 어떤 방안이 좋은가는 조금 더 사용해가면서 테스트를 마치고 문서작성 스크립트에 포함시키게 될 것이다. 『 』 기호는 단행본의 책명을 기재하는 등의 다른 용도로도 사용한다고 보지만, 해당 기호가 있는 부분에서 핫키를 누른다고 해도 이로 인해 큰 문제는 없으리라 본다. 경전번호를 사용하면 편하기는 한데 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두 방식을 병용하기로 한다. Π 기호는 그간 몇번 정도 사용했는데 해당 부분을 찾아가 기호를 변경하고 통일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본다. |
문서정보 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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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blo-picasso-madeleine-1904.jpg!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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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nheri-vihara
♡쌍봉사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buddhism007.tistory.com/3926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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