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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11-27_마하반야바라밀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9. 11. 27. 21:48



®

『마하반야바라밀경』
K0003 
T0223

마하반야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마하반야바라밀경_K0003_T0223 핵심요약





♣0003-001♧
『마하반야바라밀경』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ulien Dore - Brown Ears.lrc






마하반야


베푸는 이[施人]와 받는 이[受人]와 재물(財物)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능히 단나바라밀을 구족하느니라. 죄가 됨과 죄가 되지 않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시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찬제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며, 몸과 마음이 정진하면서 게으르거나 쉬지 않기 때문에 비리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고, 어지럽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기 때문에 선나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며, 온갖 법은 얻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made in https://clova.ai/voice/


불교경전 특히 반야부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문이 보여서 뽑아 보았다. 

그 사정을 알고보면 간단한데,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첫문장만 잘 이해하면 나머지 문장은 다 같은 구조 같은 성격이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이 구조는 또 대승경전 거의 대부분을 관통해 제시되는 공통적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교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금강반야바라밀경도 이 구조를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반복해 이 내용을 살펴왔기에 
또 여기서 살펴야 하는가는 의문인데 
과거 글이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일일단상을 살피다보면 
이 내용부분을 반복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입장에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면서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핵심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 내용을 또 다시 살펴야 하는가가 고민이다. 

이런 내용이 제시된 사정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보면 과거에 『회쟁론』을 살필 때 처음 제시한 내용을 
다시 제시해야 할 듯도 하다. 
그런데 과거글을 순서대로 정리해서 링크를 걸 수 있는 형태가 되면 모르지만, 
지금 과거글을 다시 찾아 링크를 붙이는 것도 번잡해보인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입장을 가정해서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는 형태로 살펴보기로 한다. 
>>>

먼저 위 부분에서 다음 문장만 뽑아 살펴보자. 
베푸는 이[施人]와 받는 이[受人]와 재물(財物)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능히 단나바라밀을 구족하느니라
이렇게 제시한 문장을 놓고 
일반적입장에서 이 말이 단나바라밀[보시바라밀] 즉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베푸는 행위를 하라는 이야기인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가. 
당연히 해야한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경전의 위 구절도 그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게끔 된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베푸는 행위를 한다거나 하라고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런 행위를 하는 주체와 그 행위의 상대(대상) 그리고 베푸는 무언가 좋은 것[객체], 
그리고 베푸는 행위가 있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것이 없다면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고 또 하라고 제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게끔 된다. 

그래서 위 문장이 과연 그렇다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아니라고 답하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이 우선 이해가 잘 안된다. 

더 나아가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무엇을 베푸려면
그 주체는 적어도 자신이 베푸는 상대가 누구이고
베푸는 물건이 무엇인가를 의식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엇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묻게도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현실에서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보시바라밀다를 행하려면 
그런 망상분별을 떠나서 현실에서 
그런 주체나 대상이나 상대에 대해 분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즉, 현실에서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무언가에 대해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그런 상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그런 상에 머물러 그에 바탕해 무언가를 행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위와 같이 행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또 그렇게 해야 그 보시바라밀다가 원만하게 성취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공덕도 함께 무량하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이해하기 힘들게 되고 
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제시되는가하는 사정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경우수를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여러 형태로 한번 나누어서 살펴보자. 


- 이 사정을 간단하게 살피기 위해 베푸는 이- 받는 이[대상] - 베푸는 물건[객체] - 베푸는 행위 가운데
베푸는 주체만  놓고 간단히 나열해 살펴보자. 나머지는 위와 같은 형식으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1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있다. - 그리고 베풀어야 한다. 
2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있다. - 그리고 베풀지 않아야 한다. 

3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 - (그래서) 베풀지 않아야 한다. 
4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 -  그래서 베풀어야 한다. 


단순히 얻을수 있고 없음을 나누어 본다면 
위 문장과 관련해 대조적인 형태의 문장을 위와 같이 달리 나열해 볼 수 있다. 

경전은 위 여러 유형 가운데 마지막 유형 4를 제시한 것이다. 
이는 '베푸는 주체는 얻을 수 없다 + 사정이 그렇기에 베풀어야 한다' 이런 형태다. 
그래서 이 말이 다른 경우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놓고 살펴야 한다. 

우선 경전에서 위 여러 유형 가운데 마지막 유형 4를 제시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마지막 유형이 아니고 
다른 유형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하면 각 경우마다 큰 문제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그 큰 문제는 단순히 말로만 큰 문제가 아니고 
바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끔직한 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는 상황 
즉 3 악도, 지옥 아귀 축생의 상황에 그 주체가 묶여서
장구하게 고통받고 신음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서 지내게 되는 상황을 초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 문장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또 위 내용이 경전에서 대단히 중시되는 핵심이 된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 이해가 쉽지 않을 뿐이다. 


가장 기초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오히려 상식적으로 윤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내용
즉, 무언가 좋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자신이 집착해 취하지 않고 
다른 필요한 이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여하튼 해결된다고 해도 
다시 앞 문장 부분이 문제된다. 

현실에서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베푸는 물건'이나 '상대' '배푸는 행위'를 얻을 수 있는가. 
그런데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제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그래서 그런 주체나 행위도 본래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가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이것이 이해가 잘 안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입장에서 제시할 수있는 
기본적 의문이다. 

이것을 이해를 잘 하려면 
결국 과거에 『회쟁론』을 살필 때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기초적으로 제시했던 
내용을 다시 반복해 서술해야 한다. 

처음엔 이 문제가 간단해 보였지만.
이렇게 문제되는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조금 복잡하다. 
그래서 고민이 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가장 기초적인 이드 문제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어떤 좋음이 있을 때 
이것을 자신이 취하고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이 
대부분의 생명의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이런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충동을 
최근 심리학자가 Id 이드라고 표현하는데 
그 철자가 신분확인과정에서 자주 언급하는 아이디이기도 하기에 
이것이 어떤 한 주체의 본 정체 확인과정에서도 중요하다. 






이것은 결국 장차 3 악도에 들어갈 상태의 주체인가. 
아니면 수행을 하는 수행자인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지 말고 
후자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여러 수행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한다고 하는가를 설명해보자. 
본성적으로 좋은 것을 다 자신이 취하려고 하기 마련인데 
왜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오히려 자비 정신을 갖고 
다른 생명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가. 
그 근거가 도대체 뭔가. 왜 그래야 하는가. 
이렇게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무조건 경전에서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 근거를 잘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것부터 열심히 연구하고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다. 

이 문제는 현재 사무량심 즉 자비희사에서 
자, 비, 희, 사가 각기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생명에 대해 광대무변하게 
자비의 정신을 갖고 왜 대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하는 문제로 
별도로 상세하게 다룰 계획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일단 여기에서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문제가 별로 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은 기본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을
가장 기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런데 누구나 좋은 것을 자신이 갖기를 원하는데 
왜 그런 좋은 것을 다른 생명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을 때 
일반적으로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내용에만은 별 이의가 없이
합의가 쉽게 이뤄질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윤리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제시되고 
문제가 제출되면 대부분 학생이 그것이 답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답을 적어도 
현실에서 그렇게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사업을 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는 처세술을 제시하는 입장이 되면 
아예 노골적으로 2와 같은 형태의 정반대의 내용을 철칙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이처럼 제시한다. 

돈을 벌고 싶다면 
절벽에 두 손으로 매달린 상태에서 한손을 떼고
나머지 한손으로 절벽이나 나무가지를 잡고 있는 심정으로
자신이 갖게 된 재산을 쥐어야 한다.
이런 형태로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설령 그렇게 내용을 제시하지 않아도 
대부분 현실에서 그렇게 임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직장을 다니는 이가 
한달에 일정한 수입을 얻었다고 할 때 
그 가운데 생계비를 빼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요구하면 
이 세상에 그것을 실천할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를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이와 완전히 정반대의 내용을 
반복해서 제시한다. 

그래서 처음 이 내용은 쉽다고 여기지지만 
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그렇게 하기 힘든 한편, 
왜 경전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에 대해
그 근거를 스스로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임하도록 변화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언뜻 보면 윤리교과서에서 늘 쉽게 대한 아주 간단한 내용들 같지만, 
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제시되는가 그 근거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고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생략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Francois Feldman - Je Te Retrouverai.lrc

그런데 여하튼 기본적인 근본경전에서 수행덕목으로 제시하는 내용이 잘 실천되는 상태에 이르면 

일정한 기본 수행덕목을 잘 성취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이른바 일반적인 상태와는 상태가 달라진 
현인 내지는 성인의 상태가 된다고 평가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그런데 이제 반야부 경전들에서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른 제자들 상대로 
다시 위 앞부분 내용이 강조되어 제시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는 앞에서 간단히 살폈다. 
현실에서 무언가 수행을 한다면, 
그런 수행을 하는 주체, 그리고 그런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대상이나 객체를 그렇게 얻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대부분 여긴다. 

그런데 그런 것이 현실에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될 때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이 단계에서 문제된다. 

그래서 알고보면 이것은 초급 수행자가 대해야 할 내용이 아니고 
어느 정도 수행덕목을 잘 성취하고 일정한 수준에 이른 
고급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경전에서도 기초단계에 있는 수행자에게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곤란하고
오히려 그런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함부로 제시하지 말라고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정이 있다. 
현실적으로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경우 
즉 가장 기초적으로 요구되는 기본 수행덕목마저도 잘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경우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면 그로 인해 곧바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비유하면 막 초등학교에 들어온 학생을 상대로 
중학교나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울 
음수 양수 무리수. 방정식, 미분 적분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곤란하다. 
그러면 그로 인해 산수의 이해나 계산에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 사정이란, 우선 그 내용도 잘 이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인 한편 
그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 내용을 깊게 잘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오히려 그런 내용으로 인해 앞에서 제시한 여러 유형가운데 
이제 3 의 유형을 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다. 

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런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자신 그리고 
그 대상이나 객체가 그처럼 실재하고 얻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행한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우선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 사정을 그 상태에서 이해하게 되면 
결국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보는 것은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끔 된다. 

현실에 그런 주체나 객체 행위를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현실에서 그런 수행덕목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할 필요없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또는 아무렇게 해도 된다. 

이렇게 결론을 취하고 현실에 떡 임하게 되기 쉽다. 
그것은 위에 나열한 항목 가운데 3 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된다. 
이를 통상 악취공견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위 내용에 따른 기본적인 부작용이다. 

그리고 이런 부작용은 
처음 단계에서 기본적인 수행덕목을 완전히 잘 성취한 상태가 아닌 경우에는 
대단히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처음에 
매 상황마다 본성적 감성적인 반응을 하는 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접하게 되면
그 내용을 바탕으로 곧바로 위와 같이 이해하고 임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기본 수행덕목을 아주 원만하게 잘 성취한 상태가 아니면 
반야부 경전에서 제시하는 이들 내용이나 3 해탈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부작용이 많이 발생하게된다. 

그리고 설령 그런 기본 수행을 잘 성취해도 
이들 내용을 강조해서 자꾸 대하게 되면 
이제는 그런 수행을 계속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처럼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기 쉽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처음 일정한 수행덕목을 그처럼 제시했다면 
그냥 그것만 제시하고 그 수행덕목만 원만히 잘 성취하면 되지, 
그런 상태에서 멈추면 어떤 문제가 있기에 
다시 앞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가하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는 제시한 수행덕목을 놓고
이를 1 과 같은 형태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즉, 그런 수행덕목을 해야 하고 
그리고 그런 수행덕목에 해당한 내용과 이로 인해 성취하는 각 내용들을  
현실에 그처럼 얻을 수 있다고 이해하면서
수행을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 앞부분의 잘못된 이해때문에 이로 인해 역시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수행덕목을 그처럼 행하기에 
처음 2의 상태처럼 수행을 전혀 하지 않고
감성적 본능적 반응에만 충실하게 행하여 겪게 되는 생사고통의 문제는 일부 제거되지만, 
그러나 앞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기에 
그로 인해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상태에 머물면 그로 인해 다시 3 악도로 향해가게끔 된다. 
이런 사정이 결국 반야부 경전의 니리품(지옥품)에 제시되는 내용이다. 
이는 수행을 잘 하기는 하는데 그 수행덕목이 그렇게 현실에 실재한다고 여기면서 
행할 때 그 수행자에게 발생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본 수행과정을 잘 마친 상태에서 
다시 반야부 경전에서 제시하는 이들 내용을 잘 이해하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그런 수행을 해야 하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얻을 수 없다. => 그런데 그렇게 얻을 수 없는데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라고 제시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그래서 간단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이 문장 하나를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가 대단히 많다. 

그런 가운데 4 번 문장을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덕목을 잘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장을 구성하는 앞부분과 뒷부분을 모두 잘 이해하고 
그 각 부분에서 요구되는 수행자세를 잘 갖추어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고 수행덕목을 구족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나아가면 
다시 또 다른 내용이 제시된다. 

이른바 명호가 주로 금강으로 시작하는 수행자들이 등장하는 
조금 더 어려운 경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과 관련된 문제로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내용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가장 표준적으로는 
표준적인 수행덕목이 제시된다. 
그런데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이런 선교방편만 고집해서는 
도저히 제도하기 힘든 상태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가 오직 그런 방편에만 머물면 
그런 상대는 제도 대상에서 제외하고 포기하게끔 된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하고 수행에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쉽다. 
그래서 제도를 위한 방편에 제한을 두지 않고 
수행에 임하는 내용이 다시 추가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하튼 단계별로 이런 여러 문제가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경전을 대하는 이의 단계가
경전 내용과 맞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고 
또 내용을 이해하더라도 그 본 취지와 달리 
내용을 적용해 실천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상에서 이런 주제를 살필 때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미리 헤아리면서 
초점을 맟춰 내용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문제도 어려운 문제다. 

그러면 원래 경전 사정은 어떤가. 
경전은 그런 문제가 크게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 입장에서 기초과정이 해결되지 않은 입장에서는 
반야부 경전을 본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실천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문장이 이해가 되야 다음 문장을 또 이어 살피고 
그렇게 내용이 이해되어야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힘들다. 

더 나아가 다라니나 삼매 등의 내용이 제시되는 경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봐도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각 경전의 단계에 맞고
그 수준에 맞는 상태에서 각 경전을 찾아 읽고 수행하게끔 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위 문장을 놓고 
이런 설명을 붙이지 않고도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서 이 내용을 대하면 
굳이 이런 설명을 반복하지 않아도
죽 읽어나가면서 그 내용을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일일단상처럼 매번 뽑혀 나오는 내용을 놓고 
그것을 가장 기초되는 상태를 기준으로 
이들 내용을 쉽게 접목시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려는 입장에서는 
조금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는 제 각기 다른 경전에서 이런 여러 입장이 제시될 때 

이런 각기 다른 입장이 외관상 갖는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결국 이들 내용을 놓고 그 사정을 하나하나 잘 이해하는 것도 또 필요하다. 

그것이 불교 경전에서는 3 승과 1 승의 관계나
방편과 진실의 관계를 이해하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여러 내용이 
향하는 최종 목표점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이를 대하면 이 내용의 이해가 쉽다. 

이런 여러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현실에서 어떤 한 주체가
장구하게 극심한 고통을 겪거나 공포를 겪는 
상태를 반복하는 문제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는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생노병사의 문제만 놓고 보면 
여기에서 자유로운 이는 현실에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 고통이 직접 문제되는 그 상황을 놓고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결국 앞에서 제시한 내용처럼 하나하나 내용을 제시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성취해가면서 
점점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처음에 제시한 기본 수행덕목은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우선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에서 
스스로 기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시 그것을 잘 성취해도 
뒤에 제시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역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문제가 완전하지 않은 한편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이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잘 제도해 벗어나게끔 이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점점 그 단계와 수준을 높여서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해가야 한다. 

이렇게 이들 각 내용의 사정을 이해하고 대하면 
내용 이해가 쉬어진다.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문제로 비유해 
이들 내용을 이해하면 
첫 부분은 우선 환자가 그렇게 수행덕목을 실천하지 않으면 
우선 그 환자부터가 병을 나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뒷 부분은 환자가 그렇게 병을 치유하고 건강해졌다고 해도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 환자가 
다른 병에 걸린 환자들을 상대로 치료행위를 할 도리는 없음을 의미한다.
환자가 병이 나았다고 그것마으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가 자신의 병을 낫더라도 
다시 다른 환자를 상대로 병을 치유하는 상태가 되려면 
그 상태에 다시 좀 더 많은 내용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런 사정과 수행의 사정이 비슷하다. 
아라한의 상태는 자신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면 
자신이 이렇게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의미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 - Le Soldat Rose.lrc 



앞 부분에서 그 자세한 내용은 모두 생략하고 
대강의 큰 윤곽만 제시했다.
그런데 이들 자세한 내용은 과거에도 많이 반복해 살피기도 하였지만,
이 내용을 여기에서 다 나열해 살피면 분량이 상당히 많아진다. 
또한 현재 대장경을 좀 더 살펴야 하는데 이 부분도 장애가 발생한다. 

그런데 또 이렇게 윤곽만 간단히 제시하고 마치면 
문제만 제시하고 구체적 내용은 하나도 살피지 않고 끝나니 곤란하다. 

앞에서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과 관련해 나열해 살필 수 있는 여러 형태를 
다음 4 가지로 제시했다. 

1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있다. - 그리고 베풀어야 한다. 
2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있다. - 그리고 베풀지 않아야 한다. 

3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 - (그래서) 베풀지 않아야 한다. 
4 베푸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 -  그래서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상태가 안 좋은 경우는 2 의 경우다. 
즉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자신이 대하고 생각하는 내용이 
현실에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믿는 한편, 
그런 바탕에서 다시 수행덕목은 일체 행할 필요가 없고 
당장 자신의 본성과 감성에 바탕해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얻기 위한 일을 잘 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현실에 집착해 임하는 경우가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그래서 그런 일반적인 상태에서 
처음 근본경전들에서 제시하는 기본 수행덕목을 잘 실천해 
성취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장 급하다. 
현실을 보면 이렇게 하여 수다원이나 아라한의 상태에 이르러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 부분이 더 중요하다. 


지금 반야경전에서 제시하는 주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위와 같은 1 의 단계로도 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런 반야경전의 내용을 먼저 제시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바로 그 부작용이 발생하게끔 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우선 일반적인 2 의 상태에서
먼저 1의 상태로 넘어가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 
10 선법과 같은 수행을 통해
일단 3 악도는 벗어나고 하늘의 상태에 이르는 수행이 가장 기초적이다. [인천교]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늘과 인간세계를 여러번 오가는 가운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다원 등의 상태가 되는 것부터가 
불교 경전에서 제시하는 기본 수행내용이 된다. 

그 다음 그 상태에서 3과 4 의 앞부분에 제시된 내용이 
왜 그렇게 제시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뒤따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서는 사정이 그렇다면 
이론상 3 과 4 가 다 무방할 것인데 
왜 하필이면 경전에서는 4 의 형태를 제시하는가를 
추가적으로 잘 이해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되려면 
가장 먼저 기본적으로 
일반적으로 2 와 같은 일반적인 상태로 머물면 그것이 왜 심각한 문제가 되고
그래서 1 에 제시된 형태부터 먼저 잘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처음에 생략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앞에 제시한 사정들로 인해 이후 논의를 해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예를 들어 현실에서 무언가 좋은 것이 있을 때 
이것을 왜 자신이 집착해 취하지 않아야 하고 
또 취했으면 아끼지 않고 그것을 다른 생명에게 베풀어야 하는가 
이런 내용부터 그 사정과 근거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는 아주 간단히만 살피기로 한다. 

길을 세 사람이 걸어가는데 황금덩어리가 떨어져 있다. 
또는 3 사람이 산에 가 사흘 굶었는데 앞에 고구마가 딱 하나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대부분 일반적으로 본능적 감성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향해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의미다. 
모든 생명이 자신 입장에서 자신에게 좋은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내용이다. 
그래서 뜻대로 잘 되면 문제가 없다. 


지금 처음 일정한 수행덕목이 제시되는 사정은 
그런데 이와는 다른 사정이다. 

이것은 다음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좋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어떤 사람 세명이 길을 가다가 
세명이 모두 중상을 입고 길에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다. 
또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산에서 세명이 절벽에서 떨어져 굴러서 
다 제각기 손과 다리가 부러져 있고 올라오지 못하고
심각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살피기로 하자. 
이런 상황이 현실에 없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이보다 극심하게 고통을 받는 상태가 일일히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널려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병원 중환자실 근처를 방문해보아도 그 사정을 쉽게 알 수 있고 
조금 시야를 넓게 해서 축사 근처를 방문해보아도 그렇고 
또는 축생들이 도살되는 도살장을 방문해보아도 그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1 년에 돼지나 닭 소가 각기 600 만 마리씩 도살되고 있다고 할 때 
그 도살 현장도 문제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지낸 축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힘들고 축사도 좁고 더러운데
그렇게 묶여 지내다 때가 되면 도살장에 끌려가 도살된다. 
이런 상황에 지금 자신이 놓이지 않았기에 이는 별로 문제가 안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만일 자신이 이런 상황에 있다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현실에 전혀 없다거나 
이들 내용이 그런 상태가 지금 아닌 자신과는 앞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면 사실 별 관계가 없다. 
그런데 알고보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처럼 생사고통을 직접 극심하게 받는 사례들을 놓고
이와 같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반복해 받아나가는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이란 이부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위 문제를 잘 봐야 한다. 

위와 같이 당장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서 
그 생사고통을 해결할 방안이 전혀 없다면 어떡하는가. 
그렇다면 아무리 그런 생사고통이 이때저때 여기저기에서 반복해도 

그 순간마다 각 주체가 그것을 그냥 반복해 겪고 견뎌야 한다.
이렇게 제시하고 끝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방안이 있다면 그 방안을 찾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방안이 있다.
그리고 그 방안이 결국 경전에서 위처럼 나열해 제시한 내용이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잘 실천하면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게 된다. 
이렇게 이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해가면 간단하다. 

그런데 우선 그런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되고 
또 이해가 잘 안되기에 현실에서 막상 매 상황마다 그 실천이 잘 안 되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결국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에 묶여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 문제를 기본적으로 잘 해결해야 한다. 

우선 극심하게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황에서 
당장 그것을 벗어나올 방안은 없는가.

있다. 

그런데 그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살피면 
그 이전에 그런 생사고통을 받기 전에 
그렇게 된 원인이 있음을 또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앞에 제시한 사례를 놓고 보면 
우선 길가나 절벽에서 떨어져 고통받는 경우는 
그 직전에 그 주체가 행한 행위가 만일 없었다면 
그래서 그렇게 되기 직전에 길이나 절벽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면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살피면 그 이전 이전에 행한 
행동이나 말과 생각을 그렇게 취해 행하지 않았으면 
그런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례를 놓고 
그 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을 찾으려면 
이 두 경우를 놓고 찾으면 된다. 

그래서 가장 원칙적인 방안을 찾는다면 
그런 생사고통을 당장 극심하게 받는 그 상황에서도 
곧바로 적용해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가장 원칙적인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 원칙적인 방안은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원인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원칙적인 방안을
그처럼 당장 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그 상황에 직접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비록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그런 원칙적인 방안이 있더라도 
가능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직접 당장 겪는 상태에서 적용하기 보다는 
그 원인 단계에서 미리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훨씬 쉽고 간단하다. 


예를 들어 위 사례에서 지금 절벽에서 떨어져 
손과 발이 부러진 상태에서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그 상항에서 그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보다는 
사실은 절벽에 떨어지기 직전에 
그렇게 절벽에 떨어질 행위나 판단을 행하지 않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쉽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가장 처음 기초적으로 제시되는 내용이 
곧 경전에서 기초적으로 제시하는 수행덕목의 내용들이다. 

즉, 비록 지금 당장 어떤 생사고통을 겪지는 않지만, 
장차 겪게될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런 수행덕목을 평소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편 
이런 수행덕목을 행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수행덕목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수행덕목의 하나가 
앞에서 처음 제시한 내용
즉, 무언가 좋은 것이 있을 때 이를 아끼지 말고 
필요한 이에게 베풀라는 내용과 같은 수행덕목이다. 

이는 결국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원칙적 방안보다는
훨씬 간단하고 일반적으로 행하기 쉽다는 의미다. 

그래서 경전에서 가장 먼저 기초적으로 제시하는 방안은 
일반적인 2 의 상태에서 
1의 상태로 자세를 변환해서 현실에 임하라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느 경우나 원칙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은 무언가 하면 
알고보면 4의 앞부분에 제시된 내용들이다. 

이 사정을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지금 당장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겪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4는 무엇이라고 앞에 제시하는가.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는데 무엇이 문제되겠는가.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그 내용을 잘 실천하고 임하면 
사실은 이런 경우에도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내용을 그런 상황에서 적용해 
그 상황에서 매순간 생생하고 실답게 겪는 고통을 벗어나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다만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면 
사실은 수행자가 장구하게 수행을 행하여 
안인(인욕)바라밀다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불퇴전위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수행을 행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런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생사고통을 벗어나오는 것은 극히 힘들다.  

그래서 기초적으로 이 방안보다는 우선 방편상 
1의 방안을 통해 자세를 전환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4 에서 제시하는 원칙적인 방안은 
이 1의 방안을 성취하는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즉 고통을 당장 받는 상태 D에서도 c 로서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을 방지하려면 그 원인단계에서 먼저
A 를 하지 않고 b 를 열심히 잘 행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자. 

그런데 일반적으로 매 상황에서
그렇게 A 를 하지 않고 b 를 열심히 잘 행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대단히 힘들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c를 바탕으로 임하면
그런 내용을 모두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이것부터가 대단히 실천하기 힘들다고 보게 되고
그래서 이들 방안은 하나같이 어느 경우나 다 힘들다고 보는 것도 현실이다. 
다만 그렇다해도 여전히 원인단계에서 그런 수행덕목을 행해 벗어나는 것이 
고통을 직접 받는 상황에서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벗어나는 방안보다는
훨씬 낫고 간단한 것만은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본래 원칙적인 입장에서 보면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어느 경우나 생사고통을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는 보게 되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처음 제시하게 되는 기초적인 방안을 중시하고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 원인단계에서부터
그런 수행덕목을 그런 바탕에서 잘 성취할 수 없었다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런 방안을 통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쉽게 예를 들어 평소 여유있고 안락함을 느끼면서 
희희낙락하고 지내는 상황에서 
경전에서 제시된 4 와 같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내용을 그처럼 실천할 수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그가 절벽에서 정신없이 굴러 떨어지고
그리고 손과 다리가 부러져서 극심한 통증을 느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 처할 때
그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이런 의미다. 

설령 평소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하고 
꾸준히 여러 수행을 잘 실천하고 수행했더라도 
정작 앞에 황진이가 갑자기 나타나 유혹한다거나,
기타 앞에 든 사례처럼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손발이 부러져 간신히 
매달려 있게 되면 그 수행자마저도 정신이 황망한 상태가 되는 가운데
평소 그렇게 열심히 수행해온 내용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원칙적인 방안이
가장 원칙적인 생사고통의 해결방안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방편상 가장 기초적 방안부터 
잘 성취해낼 것이 강조된다. 

그것이 넓게 보면 부처님의 입장에서 3 승을 나눠 제시한 사정이기도 하고 
또 각 단계나 각 경우마다 수행덕목의 내용을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제시하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가장 기초적으로 
일반적으로 2 의 입장을 취하던 상태에서 

왜 1 의 입장으로 자세를 변화해 임해야
장차 겪게될 극심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해결할 수 있는가부터 이해하는 것이 시급하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DALIDA - Laissez Moi Danser.lrc



그러면 일반적으로 2 의 입장을 취하던 상태에서 

왜 1 의 입장으로 자세를 변화해 임해야 
장차 겪게될 극심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해결할 수 있게 되는가. 


그 사정은 간단하다.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좋음을 많이 오래 누리기를 원한다. 
이 사정이 수행자나 일반입장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같은 바탕에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2 의 방안을 취하고 
정작 1의 방안을 취하지 않게 되는 데에는 사정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사정은 
그 주체가 대하는 현실과 자신 스스로의 정체를 
스스로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어떤 좋음을 얻는 방안을 찾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가운데
그 방안을 찾아서 실천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배가 고픈 장뱔쟌의 상태라면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낸 방안이란 
빵집에 들어가서 무조건 빵을 들고 도망가는 것이 
방안이라고 여기고 행하게 된다. 
그리고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이 과정을 살피면 
그로 인해 딱 30 분간은 그런 바탕에서 뜻을 뜻대로 성취하게 됨을 보게 된다. 
즉 빵을 훔쳐서 먹고 배고픔을 면해서 처음 목표한 뜻이 
그 방안으로 성취됨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그런 뜻을 성취하는 방안이 되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에서 이 문제를 
조금만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그것은 좋은 방안이 아님을 쉽게 보게 된다. 
즉 30 분 후이거나 1주일 후 경관이 나타나서 
장발쟌을 체포하고 그 이후 10 년간 교도소에서 구금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 전체 내용을 놓고 살피면 
처음에 생각한 그 방안이 그다지 좋은 방안이 아님을 보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이제 다시 
처음 장발잔이 관찰한 내용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넓고 길고 깊은 관찰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할 
다양한 건전한 방안이 제시되게끔 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의 표준적인 규범 내용이나 방안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본능적인 id이드의 감성적 충동에 곧바로 반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제 사회적인 규범을 함께 받아들여
내심과 외관의 상태가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도 적절히 이를 조화시켜 
현실에 임하게 된다. 

즉 내심으로는 몹시 배가 고프고 빵이 먹고 싶고 그런 빵을 주지 않는 상대가 밉다고 하자. 

그런데 외관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배가 고프지 않은 척하고 참는 가운데
빵집 주인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자신이 빵집주인을 도우며 일할 자리가 없는가 묻는다.
이런 형태가 현실에서 취해진다. 
그것은 내심에 따라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반응을 취하는 경우보다 
이런 방안이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처음 장발쟌이 생각해낸 방안도 문제지만, 
그러나 그런 현실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좀 더 넓게 관찰해 제시하게 되는 이들 방안도
마찬가지로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이들 내용을 다시 한층 더 넓고 더 깊고 더 깊게 관찰한다면 
처음 장발쟌이 생각한 방안이나
그 바탕에서 다시 제시하는 내용들 전체가 
처음 장발쟌이 취한 해결방안과 모두 그 성격이 마찬가지로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수행덕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앞에 제시한 두 문제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정지된 한 단면을 정지시켜 놓고 
그 상황에서 문제되는 현실 내용과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이 
본 정체가 무언가부터 정확히 잘 판단해야 한다.
[이는 앞 4 문장에서 앞부분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면 
그로 인해 어떤 상태가 초래되는가하는 '인과'를
대단히 넓고 길고 깊게 잘 살펴야 한다. 
[ 이는 앞 4 문장에서 뒷부분과 주로 관련된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경우와 처음 차이가 크게 나게 되는 부분은 
어떤 주체가 살다가 죽게 되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단멸관을 취하는 일반 입장에서는 단순히 이렇게 이해한다. 
자신이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영희나 철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는 자신이나 영희ㅡ 철수와 관련시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이떤 내용을 놓고 그 인과를 살피더라도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그 관계를 살피게끔 된다. 

왜냐하면 관찰을 하더라도 자신은 자신과 관련된 문제만, 좁게,  
그리고 그 기간도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영희 철수가 살다 죽는 그 순간까지만, 짧게,
그리고 외관으로 잘 보이는 측면까지만 피상적으로, 얕게 관찰하고
그런 바탕에서 무언가 좋음을 얻는 방안을 찾게 된다. 

이것은 비유를 한다면
장발쟌이 빵가게 주인이나 경찰에게 체포되기 전까지만 그 관계를 살피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빵을 훔쳐 도망가고 잡히지 않는 것이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리고 장뱔쟌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도망가 잡히는 일은 없다.
설령 잡히더라도 지금의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매 순간 임하려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리고 정말 그런 판단처럼
어떤 주체가 죽음을 맞이하면 그것으로 그와 관련되는 것이 모두 끝이라면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없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정지된 한단면을 놓고 
그 전후과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① 우선 눈을 뜨고 자신이라고 본 내용은 

눈을 감으면 다 사라진다. 
그렇다고 자신이 사라지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즉 눈을 뜰때 자신이라고본 내용은 눈을 감는 상황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② 여기에 다시 추가 실험을 해야 한다. 
자신이 지금 감각하는 활동과 또 무언가를 놓고 이런 저런 판단 분별을 행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모두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되면 어떤가를 놓고 앞과 같이 또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술을 많이 마시거나 길을 가다 망치를 맞고 의식을 잃어서
감각도 못하고 분별도 못하는 의식상실 상태가 되었다가 깨어났다고 해보자. 
이 경우 감각도 못하고 분별도 못한 상태에서는 
그처럼 감각이나 분별도 못하고 있기에 자신이 없어진 것인가라는 문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자신은 비록 잘 모른다해도 옆에서 간호하는 입장에서 관찰해보면 
큰 차이는 없다. 여전히 그런 상황에서도 호흡이나 소화와 같은 기본적인 활동은 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이후 의식을 깬 상태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두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있는 자신의 정체가 무언가부터 기본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③ 그리고 여기에 다시 또 추가실험을 해야 한다. 
자신이 죽었다. 아니면 영희나 철수가 죽었다. 
그래서 화장터에 가서 화장을 하고 매장을 했다. 
이 전후 순간에 자신이나 영희 철수가 계속 이어지는가 아닌가를 또 살펴야 한다. 
만일 이 부분에서 장례를 치루고 화장을 마치고 난 후로는 
앞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나 영희 철수와 이어지는 내용이 아무 것도 없다면 
정말 거기까지만 자신이 현실에서 고려하면 된다. 
왜냐하면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런가가 문제다. 

그렇지 않다. 
그런 사정을 자신이 화장터에 가서 경험하고 나서 확인하면 늦다. 
그 사정은 현질 한 단면에서 그 전후를 놓고 다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각 상황의 전후에서 확인되는 자신의 본 정체는 
그 상황에서만 갑자기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현실에서 계속 그런 형태로 있기 때문이다. 

즉 눈을 감아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런 내용은 눈을 감을 때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계속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눈을 뜬 상황에서도 여전히 확인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화장터에 들어간 이후로도 이어지는 자신의 정체란 
꼭 화장터에 들어간 이후에만 있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니고 
지금 현실 단면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그 실험을 먼저 잘 마쳐야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이 되면 
현실에서 어떤 문제를 살필 기간부터가 달라지게 된다. 
앞에서 단멸관을 취하고 좁고 짧고 얕게 이 문제를 살피면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만
그리고 자신이 분별하는 외관만 놓고 이 문제를 살피게끔 된다. 
그러나 앞과 같이 기본 정체를 잘 확인한 바탕에서는 
하나의 문제를 살필 때 
대단히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여 방안을 찾게 됨으로써 
그 내용이 일반적 입장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2의 입장을 고집해 취한다면 
기초적으로 그런 방안을 버리고 1 의 방안을 취하게끔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수행덕목이 제시되는 사정이다. 

간단히 말하면 
2 번 입장에서 당장 자신에게 많은 좋음을 가져다 준다고 보고 취하는 방안은 
하나같이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고 
그와 완전히 정반대가 된다.
그리고 바로 현실에게 대부분 상황마다 매순간 그렇게 임한 것이 
바로 그가 생사고통을 다양한 형태로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되는
원인이다.  

그런데 처음 단계에서 이처럼 이런 내용을 살펴서 
그런 수행덕목을 행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에 제시한 ①②③과 같은 내용은 사실은
불교안에서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처럼
마음과 관련한 깊은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가는 부분에서 살펴나갈 내용이고, 
처음 수행을 막 시작하는 상태에서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을 우선 그대로 
믿어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것이 시급하게 요구된다. 

예를 들어 한 주체의 마음과 관련해서 
①의 실험은 제 1,2,3,4,5, 식을 스스로 확인하는 실험이고
②의 실험은 제 6,7 식과 관련되고 
③의 실험은 제 8 식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선 이처럼 간단히 제시하지만, 
이 내용이 그렇게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수행덕목을 행하여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문제도 
위와 같이 제시하면 조금은 불완전하고 문제가 있게 된다. 
물론 나중에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살피고자 하지만, 
여기서 일단 몇가지만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행덕목을 행하면
그로 인해 그 주체는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복덕을 얻게 된다.

그래서 다음처럼 이야기할 수는 있다. 
수행덕목을 행하면 => 이를 통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복덕을 얻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가 이 내용을 놓고 
그런 상태를 얻기 위해 예를 들어 복덕을 얻기 위해 그런 수행을 행한다. 
이렇게 이 내용을 이해하면 조금 문제가 된다. 

위 두 내용이 서로 같아보이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시역법(장삿꾼의 행위)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둘이 어떤 차이가 있게 되는가를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 문제를 이렇게 살펴보자 

어떤 갑이 을이 궁핍하고 굶주려 지내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빵을 주었다고 하자. 
그리고 나중에 을이 그로 인해 굶주림을 면하고 지내다 보석을 얻고 
과거에 갑이 자신을 도와준 일에 고마움을 느끼고 보석을 갑에게 주었다고 하자. 

그래서 이것을 죽 이어서 제시하게 되면 
갑이 빵을 보시하니, 그로 인해 보석을 얻게 된다. 
이런 형태로 제시할 수는 있다.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경전에선 이런 내용을 이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을 통해 이런 내용을 제시받게 된 어떤 병이라는 주체는
이 내용을 대하고 이에 담긴 관계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 
=> 
보석을 얻으려면 지금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면 된다.
또는 빵을 굶주린 이에게 주는 것은 나중에 보석을 얻기 위해서다. 
이렇게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들은 내용이 서로 같아 보이지만,
그 성격과 그 의미가 모두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이 문제를 다시 이렇게 보자. 
갑이 을을 만나 을이 안타까워서 빵을 그냥 주었다. 이런 경우가 있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는 갑이 시장에 가서 고구마를 사는데 돈이 부족해서 
갖고 있는 빵을 주니 상대가 고구마를 주었다. 이런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들을 놓고 보자. 
윤리시간에 앞의 경우는 선행에 해당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용은 비슷해보이지만 두번째 경우는 
비록 그 갑과 을이 서로 악을 행한 것은 아니더라도 
갑이 어떤 선행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뒤의 경우는 갑은 단순히 시장에서 그런 거래를 하거나 장사행위를 한 것 뿐이다.
즉, 빵을 팔고 그 대금으로 고구마를 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런 장삿꾼이 하는 행위를 열심히 하고 나서 
윤리시간에 자신이 그렇게 선행을 했다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엇비슷해보이지만, 이 두 내용이
큰 차이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처음 가장 기초되는 수행으로 
인천교에서 제시하는 10 선법을 소개했다. 
하늘을 믿고 그런 선행을 행하면 그 하늘에 가게 된다고 소개한 내용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처럼 인천교에서 제시하는 하늘에 가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이런 이런 10 선법을 행하면 안 된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기에 그치면 곤란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함을 
목표로 제시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가장 기초적으로 이런 10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렇게 이 내용을 제시받을때 
그 수행자가 자신이 하늘에 가기 위해서, 그런 선을 행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하면 그것은 그 성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가난한 이를 위해서 빵을 보시한다. 
이런 경우가 구체적으로 문제된다. 

그런 경우 빵을 베푸는 행위가 선행이다. 

그런데 외관은 같은데 
그렇게 베푸는 자가 이를 통해서 
자신이 하늘에 가기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고 의식하고
그렇게 행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하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시장에서 고구마를 사기 위해 갑이 빵을 제공한 경우를 놓고 보자. 
이 경우 그런 시장의 거래는 선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만일 상대 을이 고구마를 주지 않는다면 
갑이 그 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관계성을 보게된다. 

그래서 갑이 그 경우에 빵을 제공한 것은
그 경우 을이라는 상대가 고구마를 자신에게 제공한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갑이 빵을 건넨 것은
외관상 빵을 건넨 것은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그 실질이 장사행위이고 선행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경우를 조금 더 달리 바꿔 보자. 

시장에서 거래할 때 갑이 오늘 자신에게 빵을 주면 
을이 일주일 후에 부산에 배가 도착하면 상품을 주겠다고
서로 말하고 거래를 행할 수 있다. 
이는 미래의 상품에 대해 거래를 하는 경우다. 

그래서 갑이 지금 을에게 빵을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배가 도착하자 
을이 갑을 만나 어떤 상품을 주었다. 
이런 경우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경우 외관만 놓고 보면 
갑은 그냥 어느날 빵을 건넸고 
또 이후 을은 다시 어느날  그냥 상품을 건넨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외관은 갑과 을이 제각각 선행을 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내용은 그런 거래를 행하는 데 그 사이에 기간이 있었을뿐 
처음에 제시한 장사행위의 거래와 그 성격이 하등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경우 처음 갑이 빵을 그냥 건넸다고 해서 
그것을 어떤 선행을 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게 된다. 
즉, 갑이 그 당시 그냥 어떤 댓가를 받지 않고 빵을 건넨 것은
사실은 1 주일 후에 을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래일 뿐이지 
선행이 아니다. 

그래서 10 선법을 행하라고 할 때 
매번 장삿꾼이 거래하는 마음으로 거래행위를 하고
자신이 마치 선행을 한 것처럼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래서 외관상 선행처럼 보이는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차이가 없어도 
그 행위를 할 당시 그가 마음 안에서 어떤 취지로 어떤 의도로 했는가에 따라 
그 행위가 갖는 의미와 성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를 놓고 다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칼을 들고 어떤 세사람이 똑같이 거리를 달린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찰이 위험해보여서 세사람을 모두 붙잡았다. 
그런데 상황을 파악해보니 세사람의 내용이 다 다르다. 
갑은 앞에 부상당한 사람이 있어서 그를 구조하려고 그렇게 달려갔다. 
을은 요리하다가 갑자기 불이 나 정신없이 급하게 뛰어나와 그렇게 한참 달려갔다. 

병은 그런데 건물에 들어가 강도행위를 하려고 그렇게 달려갔다. 

사례는 적절해보이지 않지만, 이런 각 경우를 놓고 살펴보면
이 각 경우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각 경우 비록 외관은 차이가 없지만, 
그런데 각 주체가 그 행위를 할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외관을 취했는가에 따라서 
그 행위의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그 각 경우마다 서로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례에서 경찰관이 병을 구금하게 될 때
외관이 같다고 갑 을까지 구금하면 문제가 된다.
오히려 갑은 포상행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외관이 같은 을이나 병까지 포상을 해야 한다면 또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이나 수행덕목에 관련된 이치가 이와 같다. 

결국 외관은 같아보이지만, 
어떤 이가 이런 선행을 하면 이런 과보를 받는다. 
예를 들어 이런 행을 하면 하늘에 간다. 

또는 이런 행을 하면 지옥에 간다. 

이런 관계를 제시할 때
이런 관계를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게 되면 
외관은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인데 
이런 사정으로 그런 행위를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런 과보를 받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처음에 왜 그런 수행을 해야 하는가. 그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제시하라고 할 때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관계성을 제시하게는 되지만, 
엄격하게 볼 때 이는 불완전하고 문제가 되는 내용이 된다. 

즉, 부처님이 10 선법과 같은 선행을 하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본 마음에서는 그런 행위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자신에게 좋음을 가져다 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취하고자 반응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렇게 다른 이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를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 상태에서 그런 수행을 그렇게 행해야만 한다고 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그 내용을 위와 같이 제시하게는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놓고 앞과 같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다시 조금 불완전하고 문제가 된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처음 부처님이 제시하는 그 관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즉 어떤 하늘을 믿고 선행을 행한다. => 그러면 하늘에 올라가 지내게 된다. 
이 내용은 맞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이제 이 내용이나 그 관계를 그처럼 보거나 경전에서 듣고
어떤 경우는 부처님을 믿고 마음 자세를 기본적으로 바꾸고
그런 행위를 행해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는 그런 내용을 보거나 듣고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행하면 고통을 벗어나고 하늘에 올라간다고 하므로
그 관계를 그철머 헤아려 계산하고 그런 사정을 고려해서 
그렇게 고통을 벗어나고 하늘에 올라기 위해서는
지금 악행을 중지하고 선행을 해야 한다고 임한 경우는 

서로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언뜻보면 결국 그런 악행은 중지하고 그런 선행에 해당하는 외관을 취해 행위를 였기에
위 두 내용이 서로 같아보이지만,
그런데 그 성격이 다르다. 

즉 이 가운데 어떤 하나는 선행이고 
또 어떤 다른 하나는 시역법,
즉 장사꾼이 미래 좋은 상품을 얻기위해 지금 무언가를
비용을 치루거나 지불하는 거래나 장사꾼 행위의 성격을 갖는 것 뿐이다. 
그래서 각 경우에 차이가 발생한다. 

쉽게 이야기한다면 
흥보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발견하고 다리를 고쳐 주었다. 
이것은 선행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놀보가 흥보가 그렇게 해서 복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고 나서 
비록 그가 일부로 다리를 부러뜨린 것은 아니더라도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보게 될 때 자신도 제비를 치료해주면
그런 복을 제비가 가져다 주리라 기대하고 
그런 제비를 고쳐주었다면 그것은 선행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고 
놀보가 나름 잘 계산해 장사행위나 거래를 그렇게 한 것이 된다. 

외관은 차이가 별로 없다고 보지만,
왜 각 경우마다 그런 다른 차이가 있게 되는가는 
다시 앞에 든 사례를 놓고 잘 살피면 된다. 

그래서 달라진다. 

그런데 부처님 입장에서 
그런 선행을 해야 하늘에 가게 된다는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상대로 
이 사정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어떻게 설명하게 되는가. 
결국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각 내용에 따른 인과를 이처럼 제시해주는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것은 사정이 그러니까 
그런 사정을 그처럼 미리 고려하고 잘 계산해서 
미리 잘 거래나 투자를 행하라고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그런 의미라고 여기고
이 내용을 그렇게 이해하고 수행에 임하게 되면 
결국 아무리 많이 그런 행위를 외관으로 열심히 행해도 
그로 인해 결국 원하는 하늘에 가지는 못한다. 

인천교의 바탕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렇게 임하고 평소 행한 경우는 자신은 그런 행위를 통해
하늘에 곧바로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행하고
또 그로 인해 자신만은 하늘에 쉽게 올라가리라 여기지만,
정작 입구에서 쫒겨 난다. 

왜 그런가는 앞에서 이미 사정을 밝혔다. 
그 상대는 장삿꾼처럼 그런 사정을 고려해서 
교활하게 그것을 미리 계산하여 매 순간 장사를 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각 경우 선행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장삿꾼이 만일 하늘에 들어가 지내게 되면 
하늘의 다른 이들도 굉장히 불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이 현실에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큰 차이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다음 문제를 살피자. 

경전에서 일정한 수행덕목을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또 예를 들어 다른 생명에게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좋은 것이 있을 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게 행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시 해보자. 

장래에 그렇게 행하면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또 좋은 복덕을 많이 얻게 된다.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반대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장구히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장 가운데 어떤 부분은 맞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일부 문제가 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위 관계
즉 일정한 수행을 행한다.
=> 그러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복덕을 얻는다.
이 관계는 사실이고 맞다.

그런데 사정이 그래서 
하늘에 가기 위해 그런 수행을 한다고 여기면서 
그런 사정으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게 복잡하다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취하게 되는 반응을 중지하고 
그런 수행을 현실에서 굳이 행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를 해야만 한다고 제시하려면
그런 행위는 도대체 어떤 마음을 어떤 내용을 바탕으로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제시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경우 그런 보시행위를 하면 그로 인해 복덕을 얻는다. 
이 관계자체는 맞다.

그런데 그런 관계 자체가 
각 순간에 그런 보시를 그렇게 해야 할 근거나 이유 취지라고 제시하면 
문제가 발생하고 조금 잘못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행위를 매순간 행하는 어떤 주체는
어떤 근거에서 어떤 마음에서 하고 또 해야 한다고 제시할 것인가.
이것을 잘 살펴서 답해야 한다. 

사실 위 이야기 안에 그 답이 들어 있기는 하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laude François - C'est La Même Chanson.lrc


장황하게 앞에 내용을 적었는데 이를 다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현실에서 각 생명들이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반복해 받아나간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려면 가장 원칙적인 방안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보다는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원인단계에서 
그 원인이 되는 업을 중단하고
그와는 반대로 수행덕목을 잘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내용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처음 2와 같은 입장에서 반응해가던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각 주체는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현실과 자신 스스로에 대한 정체 판단 과정에서부터 잘못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어떤 것의 정체나 그와 관련된 인과판단도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좋은 상태도 잘못 판단하지만,
다시 이를 성취하는 방안으로 잘못된 방안을 찾아
매 순간 반복해 업을 행해 나간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이것이 혹-업-고의 관계로 제시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그 상황을 변화시켜 벗어나오려면 
먼저 경전에서 가르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기본 되는 수행부터 잘 성취해 이 상태에서 벗어나와야 한다. 
이렇게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취지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여러 내용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앞과 같은 현실 사정 때문에
부처님이 수행덕목을 성취해야 하는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각 업에 따른 인과를 제시해주게 된다. 
즉 이런 업을 행하면 이렇게 고통을 받게끔 된다. 
반대로 이런 수행을 행하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된다. 
이런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대해 이해하고 그 자세를 전환한다고 할 때 
주의할 부분이 있다 .
비록 일반적으로 그런 변화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잘 되지 않기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그런 내용을 제시해서 이끌게 되는 것은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 변화해야 할 목표상태는 
그런 사례에서 그렇게 든 그 상태자체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사례로 든 상태와 
이런 내용 및 그 관계를 그처럼 제시받고 수행을 시작한 상태는 
엄밀하게 보면 차이가 있다. 

즉 처음에 사례로 든 상태는 
그런 내용이나 관계를 그처럼 고려하고 계산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즉 이런 행위를 하면 그 댓가로 이런 과보를 받는다고 그 사정을 알고 
이것을 고려하고 계산해서 그런 과보를 그 댓가로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위 내용을 제시받고 변화가 된 입장은 사정이 이와 다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통해 변화를 이루려고 수행을 한다면 
처음 사례에 든 그 처음 상태 그 자체로 변화가 되는 것을 목표로 
수행을 해서 그 상태를 원만히 성취해야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이 무엇이 다른가.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선행을 해 그로 인해 복덕을 얻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었다면
그 처음 사례에서 그 주체는 그 행위로 어떤 댓가를 그처럼 얻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니다. 
단지 고통을 받고 어려움울 겪는 어떤 생명이 있을 때
그 생명을 구해 고통을 제거해주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상대가 되거나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 자체가 좋아서 그렇게 한 것 뿐이다. 

그런데 그 관계를 이후 제시받는 입장은 이와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그처럼 제시받고 이를 통해 이후 수행에 임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좋은 복덕을 얻으려고 하는 입장은 
수행을 통해 처음 그 사례로 들어진 그 상태자체를 목표로 잡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제가 달라져서 
자신은 그 관계를 다 알고 그런 행위를 하게 된 상태이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추가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행위를 하면 그런 과보를 받는다는 사정을 
비록 잘 이해는 하고 잘 알지만, 
그런 행위를 할 때 방편을 통해서 
'자신은 그것 때문에 그런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무언가 그것을 통해 얻을 바가 있어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아무 것도 본래 얻을 바가 없는데[무소득]
그런 바탕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로 임해야 비로소 
처음 사례에 든 원 상태와 비슷해진다는 의미다. 

흥보와 놀보의 사례를 놓고 이 내용을 잘 검토해보자.
놀보가 흥보가 어떤 행위를해서 그로 인해 복을 받는 사례를 보고
그 관계를 처음 이해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상티에서 흥보처럼 자신도 복을 받으려고 한다고 해보자. 

이 때 그냥 그 행위만 그렇게 따라 하면 처음의 흥보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 경우 행위는 같은데 놀보의 경우는 흥보와 다른 점이 있다. 
즉, 그런 관계나 내용을 미리 파악하고 그것을 다 계산하고 고려한 가운데 
이제 그런 바탕에서 그런 과보를 결과로 얻어내려는 취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계기를 통해서 좋은 상태로 변화하려면 
여기에 추가 노력이 필요하다. 
즉, 놀보가 비록 그 관계를 그렇게 잘 알았지만,
자신이 흥보처럼 복을 받으려면
이후 어떤 계기로 다친 제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런 내용을 미리 고려해 계산해서
그런 마음으로 제비를 치료해주려고 임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록 그런 사정을 잘 알았지만 사정이 그렇기에 
놀보는 단순히 그렇게 임하면 안 되고 다시 여기에 추가노력을 해서 
다시 흥보의 처음 상태처럼 되어야 한다.  
즉, 놀보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런 치료는 단지 고통을 당하는 제비의 고통을 덜어주고 
낫게 해주고 좋은 상태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 자체가 좋아서 그렇게 행한다. 
그리고 이런 치료를 통해 어떤 댓가를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자기 최면을 한 백번 정도 행하고
흥보의 원 상태로 변화해서 그것을 그렇게 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임하면 가장 기초적인 수행이 비교적 원만한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인천교와 같이 하늘에 가기 위해 노력하는 입장에서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비로소 2 에서 1 의 상태로 변화하는 노력이 원만하게 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는 입장도 사정이 또 같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반야경전에서 대단히 강조된다. 
즉 각 수행을 이미 잘 성취한 수행자들을 상대로 
부처님이 다시 강조하는 내용은 다음이다. 

즉, 수행을 행하더라도 
처음 4 에서 제시된 내용을 다시 덧붙여서 
그 본 사정을 잘 이해한 가운데 
그 수행 역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위해 행하더라도
역시 이를 통해 얻을 바가 없음 
즉 무소득을 방편으로 임해야
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게 된다고
반복해 강조해 제시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4 의 내용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자신 부터 생사의 묶임에서 잘 벗어나와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도 
우선 현실과 자신의 본 정체애 관련해 올바른 판단을 잘 해서
기본적으로 이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분별 즉 잘못된 판단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묶임에서 벗어난다는 처음의 수행목표가 
원만히 성취된다. 

앞의 1의 방안만으로는 조금 불완전하다고 보는 사정이 있다. 
우선 1의 방안은
원칙적인 해결 방안을 곧바로 직접 적용하면, 
이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생사고통을 잘 해결하고 벗어나지 못하므로
방편상 원인단계에서 일단 그런 방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위 1 의 방안은 불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면 
결국 1의 방안을 통해 기본적으로 급한 문제는 해결하고 
다시 4의 원칙적인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 
이런 의미다. 

이것은 무슨 사정인가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병을 치유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약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약은 그 증상은 치유하지만, 
다시 그 약이 일정한 부작용을 다른 부위에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또 약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약도 또 사정이 같다. 
이런 경우와 같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가장 원칙적인 방안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사실은 4 의 앞부분에 제시된 내용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 방안은 이 방안대로 바로 사용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 방안을 바로 제시해 사용하기 힘들다. 
결국 불완전하지만, 처음에는 임시방편으로 1과 같은 방안을 제시해서 
문제의 큰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위와 같은 문제가 남기에 불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처음 1 에서 3과 4 가 같이 제시하는 앞부분의 형태로
일단 다시 변화된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원래 원칙적인 일체개공 제법무아의 입장이다. 

그런데 3과 4가 다 함께 앞 부분을 같이 취하더라도 
3 의 형태를 제시하지 않고 하필이면 4 의 내용을 
제시하는 사정이 또 달리 있다. 

수행자가 오직 자신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어떻게 보면 위 방안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런데 수행자가 
그 자신만 생사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중생도 다 함께 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결국 4의 입장을 경전에서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앞 부분을 통해 
생사고통을 받는 번뇌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제거하는 한편 
뒷부분의 내용을 통해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또 다시 무량하게 행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쌓는 수행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3,4 의 앞부분이 공통하지만, 
그런 입장 때문에 굳이 4의 내용만 취해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 2에서 1로 변화해서 제시한 내용과 
외관이 같다. 
그런데 그 의미가 다르다. 

처음에는 그것은 방편상 자신이 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요구된 수행덕목의 의미가 크다. 

그런데 4의 단계에서는 그 외관은 같지만 
그 행위가 갖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즉 자신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생사를 받으면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도록 이끌 수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그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자량을 구족하고 다시 그 바탕에서 그런 제도에 필요한 
지혜 자량을 구족해내는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를 위한 수행이 요구된다. 
그 내용이 처음 자신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수행과 내용이 같지만, 
사정이 이와 같기에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것이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면서도 
다만 그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그런 생사현실에 들어갈 때는 
역시 그런 방안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사정을 처음 앞에서 어떤 병에 걸린 환자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퇴원하는 문제와
다시 이 환자가 병을 치유해 건강하게 될 뿐 만 아니라.
이후 다시 다른 환자들의 다양한 병을 잘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문제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제시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어떤 위장병에 걸렸을때는 
그 병만 잘 고치면 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내과의사가 되려면 단지 그 병 하나만 그렇게 치료한 상태로는 부족하고 
자신은 걸리지 않은 온갖 병을 놓고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또 그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도 함께 익혀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의사가 되려고할 때 그가 그가 내과의사가 되고자 한다고 해도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외과수술이나 해부학 기타 안과 이비인후과 등등의 과목까지 함께 다 배우게 된다. 
그런데 정작 개업할 분야는 내과라면 왜 이것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필요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바탕에서는 그 내과지료를 잘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하고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곤란하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에서도 적용된다. 

그래서 수행자가 처음 자신의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할 때도 이런 사정을 잘 깨닫는 것이 필요하지만 ,
더 나아가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수행할 때는 한층 더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대승 입장에서의 보리심을 일으키고 구한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내용이 달라진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기본적으로 다음 의문을 먼저 잘 해결해야 한다. 

자신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면 그뿐이지 
왜 공연히 힘들게 다른 생명들까지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 힘든 수행을 다시 생사를 받아가면서 행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잘 해야 한다. 

처음 보시를 해야 한다고 제시할 때 
제기한 질문과 그 성격이 조금 비슷하다. 

위 질문에 답을 잘 해야 그 이후 수행이 원만히 잘 진행될 수 있다. 
만일 그 답이 좀 잘못되거나
아예그 질문에 자신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고  
자신은 자신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면 끝이라고 임하면
그 경우 수행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이 처음 근본경전에서 기초적으로 제시하는 내용과 
이후 대승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갖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처님 입장에서는 일단은 
처음 자신의 제자들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당면 목표로 두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 제자들이 일단 수행을 잘 성취해서 
그들이 제각가 생사고통의 묶엠에서 일단 벗어난 상태에서 
이후 이들을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에 진입시키기 위해 
반야경전에서 4 와 같은 내용을 추가로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이는 다음 의미다. 
처음 2 상태에서 1로 변화했다. 
그런데 다시 1과 다시 3,4를 놓고  비교하면 
3,4 의 첫부분이 다시 달라졌다.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이 이해되고 성취되지 않으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3과 4를 다시 비교하면 
여전히 그 뒷부분이 다르다. 
이것을또 어떤 차이가 있기에 4 와 같이 제시하는가를 
또 잘 이해해야 한다. 

각 경우마다 차이가 크다. 
우선 처음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장구하게 받아가는 상태와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게 된 상태가 갖는 차이만큼 차이가 크다. 

그리고 두번째는 단지 생사고통을 받지 않을 뿐인 상태와 
그 상태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춘 상태가 갖는 차이만큼 차이가 크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c Lavoine - Tu Ne Peux Pas Savoir.lrc



● 이제 끝으로 
4 의 앞부분에 제시된 내용이 왜 그렇게 제시되는가를 이해해보자. 

이는 과거에 많이 반복했으므로 간단하게만 제시한다. 

경전에서는 
현실에서 무언가에 대해 상을 취하지 말고 
상에 머물러 행하지 말라고도 제시한다. 
그래서 보시를 하더라도 
그런 바탕에서 보시를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 내용이 4 의 앞부분내용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먼저 상을 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자. 

자신이 어느 때 사흘 굶은 영희를 만나 사과를 건네주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눈을 감고 이런 생각을 해본다고 하자. 

이 경우 '나' '영희' '사과' '사과를 건넨다' 이런 내용이 하나같이 다 마음에 떠오른다. 

우선 이렇게 눈을 감아도 마음에서 잘 떠오르는 내용을 분별이라고 한다. 
생각해서 그렇게 떠올리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자어로 표현하면 상(想 범어Saṃjña)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눈을 떠서 이에 해당하는 행위를 현실에서 하고자 한다면,
이후 어떻게 임하는가가 우선 문제된다. 

처음에 사과만 놓고 이 문제를 살피자. 

자신이 눈을 감고 떠올린 사과는
마음에서 생각하고 분별해서 떠올리는 생각이고 분별내용으로서
상(想 Saṃjña)에 해당한다. 
그런데 배고픈 영희에게 사과를 건네려 한다고 할때
자신이 마음에 떠오른 이런 '생각내용'을 건네 주려고 한 것인가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면 이런 생각에 바탕해 주고자 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을 우선 현실에서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상황이 이렇다고 해보자. 
눈을 떠서 책상을 보니까 책도 있고 연필도 있는데 
그 옆에서 사과가 한 두개 있다고 하자.
처음 눈을 뜰 때 이 모습 전체를 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과를 집어 영희에게 건네려 한다면
여기서 어떤 일정한 부분을 사과라고 보는 가운데 그 부분을 집어 건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사실은 그런 감각현실 안에서 그처럼 '사과' 상을 그렇게 취하는 행위다.

이것을 잘 이해해보자. 
원래 눈을 떠서 보면 사과 부분만 동그랗게 오려져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 전체가 하나로 전체적으로 얻어진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과는 어디 있는가라고 찾는다면 
우선 그 전체에서 숨은 그림찾기 하듯 사과에 해당하는 부분을 먼저 찾게 된다.
그래서 사과로 보이는 부분을 찾게 되면 
이제 자신이 그 부분을 마치 가위로 마음에서 오려내는 듯한 것처럼 
분별을 행하며 이 부분을 대하게 된다. 
즉 자신이 사과로 보는 그 부분은 사과고 
나머지 부분은 예를 들어 책상이거나 책이거나 연필이거나 그렇다고 여기는 가운데 

각 부분을 그처럼 나누고 묶어 분별을 행하고 이를 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바로 감각현실로 얻는 그 전체 내용을 놓고 
각 부분에 대응해 마음에서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가며 분별을 행해 
감각현실 가운데 일정 부분은 그처럼 자신이 분별한 사과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여기며
각 부분을 각기 대응시켜 취하는 활동을 분별영역안에서 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에서 기본적으로 상을 취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머물고 무엇을 행해나가면 
그것이 바로 그처럼 상에 취하여 머물고  행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한 주체가 의식을 갖고 행하는 활동은 거의 대부분이 이런 형태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길가에 서서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내리고 어느 점포에 들어가서 
물건을 산다거나 하는 행위가 대부분 이에 바탕해 이뤄진다. 


그래서 처음 '사과'라는 생각을 갖고 현실에 임해 사과를 찾게 되면 
그런 일정부분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과라고 여기며 임한다면 
그것이 곧 그 부분에 대해 '사과'라는 상(相 Lakṣaṇa )을 취하고 머물고 행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나 영희가 무엇인가라고 할 때도 
감각현실의 각 부분을 그런 관념내용에 대응시켜
각 부분을 그처럼 취해 대응시키는 활동을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감각현실을 얻는 제 1,2,3,4,5, 식을 말하고 
분별을 행하는 제 6 식을 제시했다. 

그런데 앞에서 4의 문장에서 처음 제시한 것은 
현실에서 그렇게 베풀 사과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표현상 '얻을 수 없다'[불가득]나 '있는바가 없다'[무소유]를
서로 같은 의미인 것처럼 혼동하고 혼용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우선 엄밀하게 '얻을 수 없다'와 '있는바가 없다'는 서로 다르다. 
'얻을 수 없음'은 '있음' '없음'을 함께 떠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문제는 '있음' '없음' '얻을 수 없음' 이들 모두를 함께 놓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사과를 준다거나 베푼다'는 그 상황에서
정작 문제삼는 사과는 얻을 수 없다. 또는 없다. 이렇게 보통 제시한다. 
그리고 한편 그런 현실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앞에 제시한 것처럼 
자신이나 영희 사과 등등에 대해 그처럼 상을 취하고 머물러서는 곤란하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 내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즉 이렇게 생각한다. 
'저 책상위에 저기 있는 것이 사과가 아니고 무언가. 
사과가 저기 저렇게 있는데 왜 이 상황에서 
사과란 '얻을 수 없다'거나, '없다'고 제시하는가. 
그리고 그런 가운데 그런 일정 부분을 취해 그 부분이 사과라고 여기면서
그 부분을 놓고 그처럼 일정하게 상을 취하고 행하면 왜 안 된다고 하는가.' 
또 그렇다면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생활해나갈 수 있다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대승경전 전반에서 대단히 반복해 제시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고 생사고통을 벗어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해탈]
생사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니르바나,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데
대단히  중요한 핵심 내용이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하면 
이후 수많은 대승경전에서 반복해 제시되는 이런 성격의 각 문장이나 구절을 대할 때마다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경전 내용을 잘 파악하게 되고 
더 나아가 경전 내용을 잘 실천해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수행을 잘 성취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이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되면 
이후 대승경전 각 부분에서 
무엇이 '있다'거나 또는 '없다'거나 아니면 '있다 없다를 모두 떠난다'거나 하는 내용이 제시될 때마다
이 구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매번 그런 각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동을 일으키면서
대승 경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만 제시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런 경전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 어떻다고 제시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인가에 대해 
끝내 잘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결과 결국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고
그런 상태로 장구하게 기존 망상분별에 바탕해 업을 쉼없이 행해가면서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끔 된다. . 
그래서 이 부분의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선 이 현실 상황에서 그런 사과를 '얻을 수 없다'라는 것은 
눈을 떠서 현실을 대할 때 일정한 내용을 일체 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그런 감각현실을 전혀 감각해 얻을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또 그런 상황에서 일정 부분을 대하면서 '그 부분은 사과다'라는 식으로 아예 분별을 못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래서 우선 위 문장이 앞에 나열한 내용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어떤 이가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뜰 때 그 순간 얻게 되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다시 그런 상태에서 마음에서 각 부분은 사과라거나 영희라고 분별하는 생각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그런 가운데 다시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되면 이런 내용을 얻고 분별을 행하지만, 
자신이 그런 감각을 하거나 않거나 관계없이 그 본 바탕에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내용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러면 현실 내용은 □ - ○ -  △ 형태로 표시햘 수 있다. 
이는 결국 언어표현으로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내용이다. 

이런 상태에서 현실에 
베푸는 이나 물건이나 베푸는 상대나 베푸는 행위를
'얻을 수 없다'[불가득]거나 '있는바가 없다'[무소유]라고 경전에서 표현하는 내용은 
이 현실 상황에 앞에서 표시한 것과 같은 □ - ○ -  △ 내용 자체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가장 처음 이 구절 부분을 이처럼 오해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 예를 들어 사과나 영희를 '얻을 수 없다'거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가장 간단히 제시하면 다음을 제시하는 취지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 - ○ -  △ 을 놓고
일정한 관념내용 △은 다른 영역 실재□나 감각현실 ○ 영역에 그처럼 '있다' 
그리고 다른 영역 실재□나 감각현실 ○ 영역의 일정부분은 바로 그런 △'이다.' 
이런 식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또 나머지 내용들도 각기 이런 형태로 여기면서 그 내용이 실답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감각현실을 놓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일정한 감각현실 ○은 다른 영역 실재□나 분별 영역 △영역에 그처럼 '있다'  

그리고 다른 영역 실재□나 분별 영역 △영역의 일정부분은 바로 그런 감각현실 ○ '이다'. 

이렇게 망상분별을 행하면서 이들 감각현실을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일으키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그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키고
다시 그런 집착에 바탕해 현실에서 업을 행해 나간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그런데 이들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은 
현실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이는 

□ - ○ -  △ 을 놓고 그 상호관계를 살필 때 
△라는 분별 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라는 분별 내용은 감각현실 영역에 '없다'. 
또 
○ 라는 감각현실 내용은 본 바탕이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 라는 감각현실 내용은 관념 영역에 '없다'. 
이런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들은 마치 꿈과 같이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침대에 누어 꾼 황금꿈을 꾸었다고 할 때 

비록 그 내용은 생생하게 얻어도 
그런 꿈을 꾼 바탕이라고 할 침대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인데도
그처럼 현실에서 얻는 것이기에
비록 각 주체가 이들 내용을 아무리 장구하게 반복해 얻는다 해도 
이런 사정으로 그 하나하나 내용은 결국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취지다.

이는 또 비유하면 
일정한 게임화면이 게임을 하는 다수에게 대단히 많이 
일정한 형태로 반복하더라도 
그 하나하나 화면에 있는 내용은 현실과는 떨어진 
실답지 않는 내용이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원칙적으로 제거하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우선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상황을 놓고 이해해보자. 

어떤 이 철수가 라이터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담배를 떠올리게 되는 습관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라이터'란 말에서 떠오르는 것은 무언가라고 물으면 그는 매번 '담배'라고 답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러하기에 
철수가 이제 '라이터는 곧 담배'이다'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라이터에는 담배가 들어 '있다''라고 이해하면 
누구나 이것은 엉터리임을 쉽게 파악한다. 
비록 철수는 매번 라이터를 떠올리면 이 라이터로부터 담배를 다시 떠올리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라이터라는 말이나 생각 내용 안에 담배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라이터는 곧 담배이다'라고 여기는 것도 잘못이다. 

이것은 지금 제시하는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다. 

그런데 현실에서 □ - ○ -  △ 내용을 얻는다고 할때 
이들 내용을 놓고 일으키는 망상분별이 바로 이런 형태다. 


● 감각현실에 대한 망상분별과 무상해탈삼매

앞에서 감각현실에서 일정부분을 대하면서
그 부분은 곧 사과라고 여기면서
일정 부분에 대응해 [사과] 상을 취하는 현실의 사정을 먼저 살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런 상황을 의미한다. 

일정한 주체는 현실에서 눈을 뜨면 ○ 과 같은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데 다시 ○ 의 한 부분이 빨갛고 동그라면 
일정 주체는 그 부분을 그처럼 대하면서
분별 영역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기를
그 부분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사과'라고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분별은 
본래 ○ 영역에는 그런 관념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또 그 감각현실 부분은 관념분별 내용이 아닌데도 
마치 그런 것처럼 잘못 분별을 행하는 것이기에 망상분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치솔은 '강아지'가 아니고 
치솔에는 '강아지'가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떤 이가 매번 치솔을 대하면서 그것이 강아지라고 여기고 
강아지가 거기에 있다고 여기면 
그는 망상상태에 있고 그는 망상증 환자라고 하게 되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감각현실을 대하는 일반적인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와 같다. 

즉, ○ 라는 감각현실은 우선 관념분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 관념분별도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감각현실 영역에는 관념분별을 본래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관념분별 영역에서도 감각현실은 본래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런데도 현실에서 각 주체는 
비록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 부분에서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되면 
그에 대해 그런 관념분별을 반복해 일으킨다는 사정으로 
위와 같이 망상분별을 행하게끔 되는 것이다. 
즉, ○ 과 같은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대하며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게 되면 
그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은 곧 자신이 일으킨 그 분별 내용이고 
또 그런 감각현실부분에는 자신이 일으킨 그런 분별 내용이 그렇게 들어 있다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고
그런 바탕에서 게속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분별 영역에서 일으키는 이와 같은 잘못된 분별현상을 망상분별이라고 한다. 


이 현상을 앞에 비유로든 내용과 대조해서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욕계 현실에서 처음 문제되는 망상분별 상태란 이 현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그가 무엇을 놓고 '사과'나 '영희' 또는 '자신'이라고 여기는가하고 

상대에게 물으면 바로 위와 같이 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일정주체는 자신이 감각한 감각현실 ○ 의 '일정 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이 바로 자신이 생각한 그런 '사과'나 '영희' '자신'이다'라고 여기는 한편 
또 그런 ○ 의 일정부분에 그런 내용들이 그처럼 '있다'라고 여기고 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이것이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하는 망상분별 증상이다. 

감각현실의 한 부분을 의미하는 상(相) 이나
생각내용을 의미하는 한자 상(想)을 살펴보면 
이 사정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무 목(木)과 눈 목(目) 그리고 마음심(心) 이런 글자가 합쳐져서 각 글자를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떠서 자신이 사과나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이 경우 눈을 떠 얻는 그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나타내는 것이
곧 상(相 범어 Lakṣaṇa)이란 글자가 나타내는 내용이다. 

다시 그런 가운데 그 부분을 대하면서 그 부분은 '사과나무'라고 생각하고 분별을 일으킨다면 
그런 생각과 분별 내용은 곧 한자 상(想 범어 Saṃjña)이 가리키는 내용이 된다.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거나 일으키고 나서 
이들 내용과 관련해 일으키는 망상분별이 이처럼 대단히 심하다. 

그리고 이후 현실에서 업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이에 바탕한 가운데 행하는 내용이 된다.
그리고 모두 이에 바탕하여 욕계 특히 욕계 내 3 악도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즉 현실에서 문제되는 생사고통은 바로 이 바탕의 연장선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현실에서 온갖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 바탕이자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욕계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제거하려면 
가장 근본적으로 이런 망상분별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원칙적인 방안이 된다. 

이런 형태의 망상분별이 만일 잘못된 분별이 아니고 올바른 판단이라면
이런 분별에 바탕해 행하는 업과 
이로 인해 겪는 생사고통도 정당하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이다. 
그런데도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본래 그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그처럼 장구하게 반복해 겪어 나가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즉 현실 각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내용이 없다. 
따라서 그가 문제삼는 그 각 부분은 자신이 분별하는 그런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번 망상분별을 일으킨 후에는
그런 부분을 대하면서 반복해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고
다시 그런 각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망상을 일으키면서 
이후 그에 바탕해 죽 임하고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후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 
묶여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살펴보자. 

현실에서 무엇을 두고 사과나 영희라고 하는가부터 살펴보자.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살폈다. 
눈을 뜨면 ○과 같은 감각현실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그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에 대응해 각 부분을 관념영역에서 묶고 나누면서 
그 가운데 일정부분은 '사과'라고 분별을 일으키고 
또 일정부분은 '영희'라고 분별을 일으킨다. 
또 마찬가지로 일정부분은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가 이렇게 분별한 내용은 사실은 △ 영역에 자리잡는 내용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 주체는 눈을 떠 ○ 내용을 얻는 동시에 분별 영역에서 그런 분별내용△ 을 일으켜서
그런 상태로 현실에 임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다음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 의 일정부분은 바로 자신이 분별영역에서 일으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영희'이다'. 또는 사과'이다'.
이런 식으로 여기고 그 부분을 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 의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 '영희'가 그처럼 '있다'.
또는 사과가 그렇게 '있다'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처럼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망상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분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엄격하게 보아 분별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분별영역에서 그렇게 망상을 일으켜 분별내용과 감각현실을 대하는 상태가 문제다. 


그런데 이 현실 상황에서 그 주체가 눈을 떠 일정한 감각현실 ○ 내용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다시 이에 대해 분별 영역 △ 에서 이런 분별 저런 분별 즉 '영희' '사과' '자기자신' 이런 여러 분별이나 생각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현실상황에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 못했다거나, 그런 분별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그가 생각하는 그런 분별 내용이 감각현실 ○ 영역에 그처럼 '있다'거나 
감각현실 ○ 영역의 일정 부분이 바로 그런 분별 내용'이다'라고 여기면 곤란함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우선 기본적으로 잘 정리해야 한다. 
이것을 이처럼 그 사정을 잘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우선 무상해탈 삼매의 수행이다. 

현실에서 ○ 내용을 얻고 그런 상태에서 일정한 분별을 행하는 것은 
마치 처음 비유에서 철수가 라이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를 통해 담배를 매번 떠올리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라이터라는 생각이나 글자에 담배가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감각과정에서 눈을떠 ○ 내용을 감각현실로 얻고
그런 상태에서 그 각 부분을 대해 이 부분은 '영희'고 이 부분은 '사과'라고 매번 분별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 감각현실 안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그 감각현실 부분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잘 이해하고 정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눈을떠 ○ 라는 내용을 얻을 때 
이것을 전체로서 일합 상(相 범어 Lakṣaṇa)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내용이 곧 자신의 마음과 다른 외부 세계이고 
또 이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면서 
또 이는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마음현상과는 다른 외부물질이라고
일반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렇게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이들 내용은 자신 뿐 아니라 영희나 철수 더 나아가 메뚜기 박쥐 이런 생명들도 다 함께 얻는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기초적으로 사정이 그렇지 않고 
이렇게 눈을 떠 얻게 되는 감각현실은 
그런 내용이 아니고 마음안 내용이고 
또 이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한 외부대상은 없다. [유식무경]
이런 사정까지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눈을 통해 얻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하고
이를 통해 얻는 감각현실의 사정이 위와 같음을 이해한다면
귀나 코나 입 몸을 통해 얻는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감각현실 내용도 역시 사정이 이와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안이비설신으로 얻는 색성향미촉의 정체가 그와 같다고 잘 이해해야 한다. 

글만 따라 이해해가다보면 이를 통해 쉽게 이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 임해 생활하게 되면 거의 대부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분별을 행하지 않고 현실에 원칙적으로 임하고자 한다면
당장 평소 잘 하던 식사도 할 수 없고
평소 잘 타고 다니던 자동차조차도 이후 타기 힘들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이론적으로 이 내용을 이처럼 잘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당장 생사현실에서 바로 벗어나오기 힘들고 
여전히 위와 같은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해야 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현실에서 임할 수 밖에 없게 된 깊은 사정이 또 있다. 
그것은 알고보면 이번 생을 출발하기 이전에
현실에서 그렇게 임할 수 밖에는 없도록 
매듭이 단단히 지어진 채 생을 출발하게 된 배경 사정때문이기도 하다. [ 3 능변 ]

그래서 무상해탈삼매가 현실에서 갖는 실천적 의미는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이 망상분별이라는 사정을 잘 파악한 가운데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에서도 
그에 따라 행하게끔 되는 반응을 억제하고 평안히 참고 견디는 안인 수행을 
성취하여 극복하게 함에 큰 의미가 있다. [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가리왕 사례 ]
또 한편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함으로써 
이후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행하게끔 되는 업을 중지하게 하여 
이후 생에서 지금 생을 출발하게 된 형태처럼
업의 장애에 묶인 가운데 원치않는 형태로 3악도에서 
생을 반복하게 되는 현상[분단생사현상]을 방지하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 



● 본 바탕 실재에 대한 망상분별과 공해탈삼매
 
그런데 이런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가운데
다시 이런 현실 내용을 얻게 된 그 본 바탕은
본래 어떤 내용인가를 또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있거나 없거나, 
또는 자신의 감관을 대하여 감각을 하거나 않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으로 실재가 무엇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여기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지만, 
경전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라고 제시하는 내용은 주로 이 부분과 관련된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 대해 기본적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면 
이후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망상분별을 다시 증폭해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실재'가 무언가는 비록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이를 그렇게 일반적으로 많이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하는 이들이나 현실에서 병을 치료하는 의사나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나 법정에서 판결을 하는 법관이 
평소 이런 실재에 대해 그것이 무언가를 놓고 문제삼는가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처럼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분별은 
사실은 아주 특수한 범위 
즉 현실의 정체에 대해 아주 깊이 있게 살피는 입장
즉 철학을 연구한다거나, 경전에서 다루는 문제를 놓고 깊게 논의하고 살피는 입장에서 
주로 발생하는 특수한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현실 내용을 놓고 그 올바른 정체가 무언가라고 깊게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검토할 때는 
본 바탕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데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는가라는 주제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현실 내용은 그 본 바탕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는 가운데 얻는 실다운 내용인가 
아니면 침대에서 꾼 황금 꿈을 꾸는 꿈 처럼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데 
다만 현실에서 그런 조건에서 얻는 실답지 않은 내용일 뿐인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 사정으로 실재가 무언가를 논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킨 망상분별이 그대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것의 정체를 올바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본 바탕의 실재는 어떠한가를 살필 때도 이들 망상분별이 바탕이 되어서 
자신이 현실에서 얻고 생각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처럼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입장에서는 
역시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본 바탕에서도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처럼 있고 
따라서 그런 내용은 실재하고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또 자신이 눈을떠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런 내용은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이 있기에 얻는다라고도 잘못 분별을 한다. 


그래서 우선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지금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그런 본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그런 본 바탕의 실재가 아니다. 
더 나아가 본 바탕의 실재영역에서는 현실에서 어떤 감관 등이 관게해 얻게 되는 그런 내용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 [불가득]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는 그런 감관과의 관계를 떠난 내용이 무언가를 문제삼는 것이고 
반대로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는 그런 감관이 관게에서 화합해 얻게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통해서만 내용을 얻는 주체는 끝내 그런 내용을 얻어낼 수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본 바탕의 실재 영역에는 아무것도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재란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내용을 화합해서 얻게 되는 주체 입장에서는 
이런 관계를 떠나서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은 끝내 얻어낼 수 없고 [불가득]
따라서 이들 실재는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무엇이다라거나 아니다라거나 
무엇과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등으로 일체 분별을 행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 이분법상의 분별을 일체 떠나고 그런 언어표현을 떠난다. [불이]
그래서 이런 상태를 단지 나타내기 위해 
본래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시설해 이런 상태를 표현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고 얻을 수 없다[불가득 공]이란 표현은
아무 내용이 '없다'[무]거나 어떤 내용이 '있다'[유]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왜 실재가 공하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가. 

이는 다시 꿈의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쉽다. 

침대에 누어서 잠을 자는데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꿈을 깨서 바다에서 얻은 황금을 생각한다고 하자. 
이처럼 꿈에서 본 황금이 실다운가.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것인가. 
이것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러면 꿈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꿈 내용은 실답지않다.
그런 내용은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그런 꿈을 전혀 꾸지 않았다거나,
또는 꿈에서 그런 황금을 얻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분명 생생하게 황금의 꿈을 꾸고 그러한 내용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그런 꿈을 깨고 나서 침대를 보니
꿈에서 꾼 황금은
그런 꿈을 바탕이 된다고 할 침대를 놓고 아무리 뒤져 보아도 보이지도 않고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꿈 내용은 그런 꿈을 꾼 바탕이 되는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단지 그렇게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그런 조건에서만 임시적으로 일시적으로 얻은 내용일 뿐이다. 
따라서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사정이 그러므로 아무리 생생하게 황금꿈을 꿈에서 꾸었다고 해도 
그것을 실다운 황금으로 여기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고 
그런 바탕에서 무언가를 행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문제 상황에 있을 때 
그런 현실 내용을 얻게 된 그 본 바탕의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공하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도 역시 
그 내용이 꿈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취지다. 

그래서 본 바탕이 공함을 잘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비록 매 순간 생생하게 얻고
또 명료하게 분별을 일으키게 되어도
그에 대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공해탈삼매문의 내용이 된다. 


● 무원무작해탈삼매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무상삼매해탈 그리고 여기서 제시하는 공삼매해탈은 
무원무작삼매해탈과 함께 3 삼매 해탈의 기본 내용이 된다. 
참고로 무원무작삼매해탈은 앞과 같이 망상분별에 바탕해 현실에서 일으켜 갖게 되는
온갖 부질없고 쓸데없는 일체의 희망을 남김없이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쓸데없는 일체의 업을 제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그 사정은 이런 내용에 바탕해 매 순간 업을 행하는 것이
결국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상분별에 바탕한 이들 내용은 일체 남김없이 제거하고 
올바른 깨달음에 바탕해 올바른 서원으로 바꾸어서 수행덕목을 실천해가는 형태로 
이것을 바꿔야 한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



● 참된 진짜의 존부문제 - 무아 무자성 판단문제 

그리고 하나 더 첨가한다면 
여하튼 현실 내용과 관련해 존재를 문제삼고 살피는 
□ - ○ -  △ 형태로 표시한 각 영역 내용.
즉 언어표현으로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이라고 표현하는 영역안에 
앞에서 본 꿈과는 성격이 달라서 
각 조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임시적으로 얻어지는 실답지 못한 내용이 아니고 
꿈과는 달리 고정 불변한 내용으로서 
어느 경우나 어느 영역에서나 그 내용이 참되게 있다고 할 
진짜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된다. 


꿈은 매 경우마다 그 내용이 다르고 
그 꿈을 꾼 바탕이 되는 침대 등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사정으로 꿈은 실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은 이와 성격이 다른가.
그래서 이런 내용은 이런 꿈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고 
따라서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할만한 것인가가 문제된다.  

자신이 현실에서 사과나 영희 또는 자기 자신을 분별하고 
무엇이 그런 사과나 영희나 자기자신이라고 대할 때 
그런 내용이 꿈과는 성격이 달라서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아닌가
또 그런 참된 진짜 내용[아,자성]이 어딘가에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을 실답게 여기고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것인가 아닌가와 관련해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과나 달을 하나 본다면,
그것은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가 다르고 
색안경을 쓰고 볼 때나 벗고 볼 때가 다 다르다. 
자신이 어떤 순간에 얻는 내용이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면 이런 각 경우 그렇게 달라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런 조건이 충족될 때만 얻는 일시적 내용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하나같이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꿈과는 다른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런 현실 내용과 관련한 참된 진짜의 내용은 따로 어디인가에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앞과 같은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그런 내용이 어딘가에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사정이 그렇지 않다.
따라서 경전에서 결론적으로 그런 내용은 없다고 제시한다.
경전에서 무아 무자성등의 표현이나 무소유라는 표현이 이와 관련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함께 잘 정리해 이해해야 한다. 


결국 경전에서 무소유 불가득 공이라고 반복해 표현하는 내용은
현실 내용이 집찾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나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님을 강조해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참된 진짜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본 바탕의 실재는 무엇인가의 각 내용은 서로 관련된다. 

왜냐하면 만일 실재 영역이 무언가를 문제삼을 때 
실재 영역에 지금 문제삼는 그런 참된 진짜의 내용에 해당하는 아나 자성이 그렇게 있다면 
본래 그 내용을 그렇게 제시하면 되고 
실재가 아무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고 공하다고 제시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불가득 공이라고 제시하게 된다. 
또 이 말은 그런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아나 자성은 없다는 내용도 함께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종합적으로 무소유 불가득 공이라고 표현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GIC SYSTEM - Cherie Coco (Feat Soprano).lrc


글을 짧게 줄이려고 했는데 날을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형태로 서술되어 있어서 다시 조금 수정을 했다. 
그리고 약간 빠진 부분도 발견된다. 
여하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마치기로 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각 내용은 여하튼 
본 바탕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가운데 현실에서 얻게 되는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또 참된 진짜라고 할 내용도 아니다. 
또 현실내용에 대응해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어떤 참된 진짜가 따로 어딘 가에 있고
그런 진짜 내용에 바탕해 얻게 되는 그런 내용도 아니다.
그래서 결국 현실 내용은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불교 경전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불가득] 진짜 내용이 없음[무소유]을 제시하는 취지는 
여기에 있다. 

더욱이 현실에서 문제삼게 되는 일체 문제는
분별영역에서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문제삼게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분별내용은 본래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또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어떤 분별을 행할 때
그런 분별에 해당하는 내용이 다른 영역
예를 들어 본 바탕이 되는 실재나, 또는 현실(감각현실)에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일반인이 여기고
일으키게 되는 망상분별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비록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현실 내용은 꿈과 마찬가지로 실답지 않다.
따라서 그런 현실 내용을 실다운 내용으로 잘못 여기고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 대승경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러해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면,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일정한 수행은 왜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를 
또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그런 전제라면 앞에서 본 3 이나 4 나 다 무방하다고 해야 할 듯한데
왜 그 가운데 하필 4 와 같은 형태로 내용을 제시하는가의 문제다. 


그 사정은 결국 수행자는  
본 바탕의 사정이 그러함을 한편으로 잘 이해해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일단 생사현실에 묶인 상태에서 처음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할 입장인 경우는
우선 수행자 자신도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수행을 통해 
단계적으로 생사고통을 잘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 비록 자신은 그런 수행을 통해
이제 생사의 묶임에서 잘 벗어나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면,
다른 생명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그 수행자도 함께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하는 한편, 

다시 그런 생사현실 안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려면 
그 수행자가 그 생사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통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생사현실안에서 일정한 수행을 일체 할 필요가 없다거나, 
또는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잘못 여길 수 있지만, 

바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수행자는 그런 생사현실에서 
본 바탕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한편으로 잘 관해 
일체의 망상분별과 번뇌를 근본적으로 잘 제거하는 한편,

다시 그런 바탕에서도 
본 바탕의 사정은 원칙적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한편,
여전히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끔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수행을 원만히 잘 실천하고 성취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 경우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다고 3의 형태를 취하게 되면 
본 바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안에서는 자신은 자신대로 매 경우 하필이면 생사고토을 극심하게 
받는 형태로 임하게 되는 한편 
사정이 그러하기에 또 다른 중생도 구제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 원칙적으로만 앞 부분만 강조하면 
매번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해 
원칙적인 방안만으로 그 상태를 잘 극복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된다. 
이론상 불가능 한 것은 아닌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대단히 기대하기 힘든 
사정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 그런 바탕에서 안인을 잘 성취해서 
매 경우 스스로는 잘 벗어나올 수 있다고 해도 
그 경우는 다른 중생을 제도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잘 구족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3 의 방안은
비록 본 바탕의 사정은 그렇다해도
생사현실 안에서는 스스로도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으면서 
원칙적인 방안만으로 잘 벗어나오지 못하는 한편 
다른 중생도 역시 생사고통에서 잘 벗어나오게 할 수 없다는 문제를 갖게 된다. 

그래서 본 바탕의 측면을 놓고 
3과 4의 후반부에 제시된 차별적인 내용은 
본래 차별을 세울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필이면 그 가운데 굳이 3의 방안을 취할 이유가 별로 없는 한편 
어차피 차별이 없다면 이왕이면 
수행자자신도 비록 실답지는 않다지만,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를 예방할 수도 있는 한편, 
그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
다른 중생을 잘 제도해나갈 수 있는 4의 방안을 표준적인 방안으로 
제시하게끔 된다. 




한편 경전에서 제시된 4와 같은 내용은 다음 내용도 함께 제시한다. 

즉, 본 바탕의 사정이 그와 같이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생사현실안에서 수행자가 그런 바탕을 잘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하여 
무소득을 방편으로 그런 수행을 하게 되면 그런 상태를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즉,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갖는 서원은 
본래 본 바탕이 그런 내용을 얻을수 없는 것이이기에 
성취가능하게 된다는 사정을 함께 나타낸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만일 본 바탕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과 달리 
무언가 진짜에 해당하는 고정된 실체가 있고
그래서 실재는 불가득공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바탕에서는 오히려 그런 서원을 일으켜 갖는다해도 
그런 사정으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정도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의 사정이 오히려 그렇지 않기에 
오히려 현실에서 수행자가 그런 서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 간단히 마친다. 






































































 

















































 






















 

 








































◆vike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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