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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2-26_종경록-K1499-057 본문
『종경록』
K1499
T2016
제5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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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1499-057♧
제5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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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鏡錄卷第五十七 ...
K1499
종경록 제57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무릇 능가경(楞伽經)에서 밝힌 세 가지 식은
진식(眞識)과 현식(現識)과 분별사식(分別事識)인데,
이 중의 세 가지 식은 여덟의 식 안에서 어떻게 분별이 되는가.
【답】 진식은 본각(本覺)을 말하고,
현식은 제8식을 말하며,
나머지 일곱 가지를 싸잡아 분별사식이라고 한다.
비록 제7식은 바깥 대경을 반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8식을 반연하기 때문에 일일이 분별한다고 한다.
진식은 본각을 말한다 함은 곧 제8식의 성품이다.
경에서 아홉의 식이라는 설명이 있는 것은 여덟의 식 이외에
9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니,
이것이 곧 진식이다.
만일 성품의 거둠에서 본다면 역시 여덟의 식을 여의지 않나니,
성품이 온갖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문】 아뢰야식 등의 여덟 식만을 설명해도
세속 이치[俗諦]에서는 이미 드러났거늘,
어떻게 열한 가지의 식(識)을 해설하는가
또 어째서 자세함과 간략함 따위의 모든 식을 해설하는가.◂
【답】 모양[相]으로 인하여 성품[性]을 드러냄에는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요,
끝[末]을 껴잡아 근본으로 돌아감에는 스스로 단유(端由)가 있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이르되,
“만일 결정코 온갖 법에는 식만이 있다고 밝히지 않는다면 진실한 성품은 나타날 수가 없고,
만일 열한 가지 식을 갖추어 설명하지 않는다면 세속 이치를 설명하되 다하지 아니하며,
만일 전 5식만을 해설한다면 세속 이치의 근본만을 얻고 세속 이치의 차별된 이치를 얻지 못하며,
만일 세속 이치를 해설하되 두루하지 아니하면 진식이 명료하지 못하고
진식이 명료하기 못하면 세속 이치를 버림에 다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열한 가지 식을 갖추어 해설하여 세속 이치를 통틀어 껴잡는다.
그러므로 세속에 성품 없음[無性]을 분명히 알면 곧 진공(眞空)을 요달하고,
진공은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파괴되지 않은 모양이요
세속의 존재[俗有]가 비록 존재한다 하더라도 항상 체성은 공허하다.
그러므로 인연을 따름[隨緣]은 있는 것이 아닌 참된 이치[眞諦]라 현상[事]과 다르지 않으면서 나타나고,
고요히 사라짐[寂滅]은 없는 것이 아닌 세속 이치라 항상 진리와 다르지 않으면서 성립된다”고 했다.
위에서 인용된 두 가지 식ㆍ세 가지 식ㆍ여덟 가지 식ㆍ아홉 가지 식ㆍ열한 가지 식 등은
한 마음의 종[一心宗]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오갖 모든 제도[度]의 문은 부처 마음이 첫째가 된다”고 했으며,
또 이르러 “부처님이 말씀하되, ‘마음을 종(宗)으로 삼고,
문 없음[無門]을 법의 문을 삼는다’고 하셨다”고 했다.
말한 종이란 마음의 진실된 곳이니,
그 참 마음의 성품에서 보면 그 도리에 따라 체성[體]과 작용[用]의 두 문이 열린다.
곧 기신론(起信論)에서 세운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과 같다.
진여 이것은 체성이요 생멸 이것은 작용이다.
그러나 모든 식은 체성과 작용의 두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체성의 마음이 바로 적멸(寂滅)의 마음이니,
곧 아홉 식의 체성이다.
둘째 작용의 마음이 바로 생멸(生滅)의 마음이니,
곧 전8식의 작용이다.
체성과 작용은 숨고 드러남의 두 마음임을 해설하나니,
작용이 곧 체성이기 때문에 생멸이 곧 생멸하지 않음이요,
체성이 곧 작용이기 때문에 생멸하지 않음이 곧 생멸이다.
생멸은 성품이 없는지라 작용이면서도 많지 않고,
적멸과 수연(隨緣)은 체성이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여럿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지라
체성과 작용은 언제나 명합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지라 체성과 작용은 언제나 명합하고,
하나이면서도 여럿인지라 체성과 작용은 항상 나타나나니,
식의 성품 이것은 체성이요 식의 모양은 이것은 작용이다.
체성과 작용은 서로서로 이룩하되,
모두가 종경(宗鏡)으로 돌아간다.
유식소초(唯識疏鈔)에서 이르되,
“식의 성품과 식의 모양은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고,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는 모두 식뿐[唯識]이라고 하는 것이니,
원성실성(圓成實性) 이것은 식의 성품이요,
의타기성(依他起性) 이것은 식의 모양이라고 모두가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혹은 모든 무위법(無爲法)을 식의 성품이라 하고,
득(得) 등의 분위(分位)와 색(色) 등의 소변(所變)을 식의 모양이라 할 수도 있나니,
모두가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식으로서의 상응함을 심소라 하고 식으로서의 제 성품을 심왕이라 하나니,
심왕이 가장 훌륭하므로 주인[主]이라고 일컫는다.
좇는 마음을 섭수하면 마음으로 돌아간다[歸心]고 하고,
득등(得等)의 분위와 색 등의 소변을 겸하여 껴잡아 견분(見分) 등에 돌아가면 모양을 없앤다[泯相]고 하나니,
성품과 모양은 서로가 여의지 않으므로 통틀어 식뿐이라고 한다”고 했다.
어찌하여 식뿐이라고만 하고 경계뿐[唯境]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가.◂
【답】 경계는 마음의 분별로 말미암아 나고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기 때문에 식뿐이라고 하지만,
식은 경계의 분별로 말미암아 나지 않고 경계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경계뿐이라고는 이름 할 수 없다.
【문】 마음 이것은 경계라는 집에서는 증상연(增上緣)이라 경계는 마음을 빌려서 생기므로 식뿐이라고 하지만,
경계 이것은 마음이라는 집에서는 소연연(所緣緣)이라 마음은 경계를 빌려서 생기므로 경계뿐이라고 이름해야 한다.
【답】 마음을 여의고 경계에 집착하는 이것은 허망이라 허망한 마음을 막기 위하여 식 뿐이라고 하지만,
마음을 깨치면 나[我]가 없고 침몰한 데서 벗어나는지라
두 인연에 결부하면서 경계뿐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또 경계가 있고 경계가 없는 것은 모두가 자기 마음이요 그 마음에서 모두가 생긴다.
첫째,
만일 있는 경계에 반연하여 마음을 낸다면 이것이 곧 자기 식의 상분(相分)이니,
온갖 실재의 경계는 능연(能緣)의 마음을 여의지 않으며 자기 식 외에는 실로 그런 경계가 없다.
둘째,
만일 없는 경계를 반연하여 마음에 생긴다면 마치 독산의식(獨散意識)과 같나니,
과거와 미래와 허공 꽃과 토끼 뿔 등의 온갖 없는 법을 반연할 때에도 마음은 역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백법초(百法鈔)에서 이르되,
“예전에는 이르기를 ‘반연에는 생각[慮]을 내지 않음이 없되,
바르지 않다’고 했다”고 한 것과 같다.
【문】 어째서 바르지 않은가.
【답】 마치 허공 꽃과 토끼 뿔과 같은 온갖 없는 법을 반연할 때도 마음은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반연에는 생각을 내지 않음이 없다고 하느냐 하면,
그러므로 알라.
독영경(獨影境)에서
속마음의 상분(相分)이 있으면 이 상분을 견분(見分)에서 볼 때는 역시 소연연(所緣緣)의 이치가 이루어지지만,
만일 속마음의 상분이 없다면 그 마음은 곧 생기지 않는다.
당(唐)의 삼장(藏)이 이르되,
“경계는 진실이 아닌데도 생각이 일어나고 증험하며 앎은 식이 있어서일 뿐이다”고 했다.
비록 제 나름으로 분별한 성질의 것이거나
비록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속마음의 상분은 마음을 끌어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 구절로 분별된다.
1은 그림자[影]는 없고 바탕[質]이 있으면 그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2는 그림자는 있고 바탕이 없으면 그 마음은 생기게 된다.
3은 그림자와 바탕이 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는 그림자와 바탕이 모두 없으면 마음 또한 생기게 되나니,
곧 근본지(根本智)로 진여를 증득하는 그것이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되,
경계가 있으면 마음을 끌어낸다.
만일 진리로 경계를 삼으면 지혜의 마음을 끌어내고,
만일 세속 이치로 경계를 삼으면 식의 마음[識心]을 끌어 낸다.
그렇다면 아직 마음이 없는 경계는 있지 못하며
일찍이 경계가 없는 마음은 없다”고 했다.
【문】 여덟의 식 가운데서
인위 (因位)에서 보아 초지(初地) 이후에는 몇 가지 식이 무루(無漏)를 이루는가.
【답】 고덕(古德)이 해석하며 이르되,
“6ㆍ7의 두 식만이 무루를 이룬다.
6은 곧 제6식으로서 초지 문 안의 22의 심소는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며
7은 곧 제7식으로서 22의 심소는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룬다.
이 두 지혜와 상응하면 다 함께 장애의 물듦[障染]을 여의기 때문에 무루라고 한다.
만일 5ㆍ8 등의 식은 결정코 이것은 유루(有漏)이다”고 했다.
【문】 어째서 제6식이 무루를 이루게 되는가.
【답】 초지에서 무루에 들 때에는 2장애를 분별하는 종자(種子)와 현행(現行)의 습기를 끊기 때문에 무루이다.
【문】 제6식은 미혹을 끊을 수 있어서 미혹을 끊는지라 무루를 이루지만
제7식은 혹을 끊을 수 없거늘 무엇 때문에 역시 무루를 이루는가.
제6식은 바로 능의(能依)의 식이니,
능의의 식인지라 무루를 이룬다.
제7의 소의 역시 무루를 이루나니,
제6식이 생공(生空)ㆍ법공(法空)의 두 공을 관할 때에
제7식 안에서는 다 함께 아집(我執)ㆍ법집(法執)을 내되 현행(現行)이 조복되면서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제7식은 무루를 이룬다.
【문】 무엇 때문에 제8식 이것이 유루인가.
【답】 제8식 이것은 총체적인 업보[總報]의 주인으로서,
종자를 지니며 훈습을 받는다.
만일 인위 중에서 무루를 이룬다면 곧 온갖 유루의 잡염(雜染) 종자는 모두가 흩어져 소멸되기 때문에 이내 성불하게 되거늘,
어째서 다시금 2겁(劫) 동안을 수행할 것인가.
【문】 앞의 다섯 식은 이미 총체적인 업보의 주인이 아니거늘,
어째서 무루를 이루지 않는가.
【답】 앞의 다섯ㆍ감관은 바로 제8식의 친(親)한 상분이다.
능변(能變)의 제8식이 벌써 유루라 소변(所變)의 다섯 감관 또한 유루이다.
다섯의 감관 이것은 소의로서 오히려 유루인지라 능의인 다섯의 식 또한 유루를 이룬다.
위에서와 같이 경론에 의거하여 모든 식을 분별하였으나,
열리고 닫음이 같지 않되 모두 체성[體]과 작용[用]에 의한다.
체성에서 보면 차별이 없으면서 차별되고 전부 작용을 하는 체성이라 작용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요,
작용에서 보면 차별되면서도 차별이 없고 전부 체성을 하는 작용이라 체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온 바다가 물결을 이루되 바다를 잃지 않고
온 물결이 바다를 이루되 물결을 장애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야
식의 성품을 궁구하고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아야 마음의 근원을 궁구할 수 있다.
마치 고덕(古德)이 이르되,
“모든 식의 문에서 보면,
비록 하나거나 여럿임이 정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 이는 체성과 작용의 연기(緣起)요 근본과 끝이 서로 섭수한다.
근본이란 아홉의 식이요,
끝이란 다섯의 식이다.
근본으로부터 끝을 향하여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끝으로부터 근본을 향하여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기 때문에 조용하면서 맺히지 않고,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동요하면서 어지럽지 않다.
조용하면서도 맺히지 않기 때문에 전혀 이것은 연기요,
동요하면서도 어지럽지 않기 때문에 연기 이것은 진여이다.
진여 이것이 연기이기 때문에
열반마다 생사(生死)하지 않음이 없나니,
곧 8과 9가 6과 7이 된다.
연기는 진여이기 때문에 생사마다 열반하지 않음이 없나니,
곧 6과 7이 8과 9가 된다.
생사마다 열반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법계(法界) 모두가 생사요,
열반마다 생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법계 모두가 열반이다.
법계 모두가 열반이기 때문에 생사는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법계 모두가 생사이기 때문에 열반은 고요한 것이 아니다.
생사는 뒤섞여 어지러운 것이 아닌지라 중생이 곧 부처요,
열반은 적정한 것이 아닌지라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법계가 어기기 때문에 열반 이것이 생사라고 말하나니
곧 진리는 망정[情]에 따라 작용하며,
법계가 순종하기 때문에 생사 이것이 열반이라고 말하나니,
곧 망정은 진리에 따라 작용한다.
이렇게 분명할 때에,
망정은 진리 밖의 것이 아니고 진리는 망정 밖의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망정은 진리 밖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實]에 즉(卽)하여 6과 7이 8과 9로 된다고 설명하는 까닭이니 진실이란 체성이며,
진리는 망정 밖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假]에 즉하여 8과 9가 6과 7로 된다고 설명하는 까닭이니 거짓이란 작용이다.
거짓과 진실이 걸림이 없기 때문에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하고,
체성과 작용이 걸림이 없기 때문에 공(空)과 무(無)가 공할 만하다.
인과 법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절대(絶待)임을 말하고,
공과 무가 가히 공하기 때문에 묘용(妙用)임을 말하나.
이렇게 설명한다면 역시 이는 망정을 배제하는 말이다.
그 지극한 진실을 논한다면 이름과 모양[名相]으로써 얻을 수 없으며,
지극함이란 두 가지 진리로써 밝힐 수가 없다.
이름과 모양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말과 형상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두 가지의 진리로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있다 없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르되,
‘지극한 진리는 말이 없고 현인ㆍ성인은 잠잠하며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도 소멸한다’고 했나니,
바로 신령함[神]으로써 알 수 있고 마음으로써는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문】 깨달음의 바다[覺海]는 근원이 맑고 하나의 마음은 고요하거늘,
어떻게 맨 처음에 모든 식의 물결이 일어나는가.
【답】 비록 “식의 물결이 일어나는 곳은 좇아옴도 없고[無從] 비롯됨도 없고[無始] 생김도 없다[無生]”고 말한다 하더라도
식의 성품을 궁구할 수 있으며,
다만 모르는 결에 갑자기 생각이 생김은
마치 맑은 물결 위에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을 뿐이다.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되 용솟음치는 큰 물결은 하늘까지 넘치고,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로되 뒤바뀐 미친 마음은 경계에 두루하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참된 법이 하나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서로 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생각이 동요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고 했다.
이는 바로 근본무명은 가장 미세함을 나타낸 것으로,
아직 능(能)ㆍ소(所)와 심왕ㆍ심소의 차별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응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니,
심왕과 심소가 같이 상응한 것이 아니다.
이 무명만이 물듦의 법의 근원이 되고 가장 미세한 이것이요,
다시는 물듦의 법으로서 이의 근본이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홀연히 생각이 일어난다’고 한다.
무명이기 전에는 따로 법이 있어서 비롯되고
모이게 되는 근본이 없기 때문에 ‘비롯됨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홀연히’라는 뜻으로서, 시절에 결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요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므로 시초가 없는 것이다.
또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이르되,
“ ‘여실(如實)히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의 마음이 일어난다’ 함은,
이는 곧 근본불각(根本不覺)이 일어나는 인연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인연이 여(如)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면서 존재한다.
어떠한 법 중에서 여하지 않느냐 하면,
세 가지 법안에서 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여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무슨 뜻이 있느냐 하면,
여긴다는 뜻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 법이냐 하면,
첫째는 실지(實知)의 한 법이요,
둘째는 진여(眞如)의 한 법이요,
셋째는 일심(一心)의 한 법이니,
이것을 세 가지 법이라 한다.
실지의 법이라 함은 온갖 깨달음[一切覺]을 말하는 것으로 곧 능히 통달하는 지혜[能達智]요,
진여의 법이라 함은 평등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곧 통달할 경계[所達境]며,
일심의 법이라 함은 일법계(一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곧 의지할 체성[所依體]이니,
이 세 가지 법에서 모두 어기기 때문에 무명이 원래 일어난다.
이 때문에 ‘여실히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나니,
저 세 가지 법은 모두 1을 지키는 가운데서 끝내 여의지 않기 때문에 통틀어 1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논에서 이르되,
“무명이 훈습된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여서 맨 처음에 그 업식(業識)을 이루고,
이 업식으로 인하여 다시 전식(轉識) 등이 생긴다”고 했다.
논의 해석에서 이르되,
“맨 처음의 불각을 제1의 업상(業相)이라 일컫나니,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에 차별이 없고 심왕과 생각하는 법이 분석될 수 없으면서
오직 자세히 움직이고 숨어서 흐른다는 이치가 있을 뿐이므로 업(業)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움직이고 흐르는 것은 불각으로 말미암을 뿐이다.
제2의 전상(轉相)은 업상의 생각으로 소의를 삼기 때문에,
회전하여 능연(能緣)을 조작하고 운전하면서 요별하는 모양을 이룬다.
제3의 현상은 요별하면서 이전하는 것으로 소의를 삼는지라
쓸모없는 이론의 경계가 완전하게 앞에 나타나고,
소연(所緣)의 상분이 원만하게 퍼지므로 이에 의하여 견분(見分)은 저 상분을 나타낸다.
또 동요의 모양[動相]이란 동요는 업식이 되고 그 이치는 극히 미세하다.
본각의 마음은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온 체성이 미약하게 움직이고
미약하게 움직이는 모양은 아직은 바깥으로 반연하지는 못함은 곧 불각 때문이니,
본각으로부터 불각의 생김이 있는 것이 곧 업상이 된다.
마치 바다의 미약한 물결이 고요함에서부터 미약하게 움직였으나 아직은 이로부터 본래 처소로 이전하지 못한 것과 같다.
전상이라 함은 무명의 힘을 빌려서 업상을 도와 회전하여 능연을 이루는 것이니,
능견(能見)의 작용이 있으면서 외면(外面)을 향하여 일어남을 곧 전상이라 한다.
비록 전상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다섯 대경의 반연할 경계 모양을 나타내지 못함은,
마치 바다의 물결이 바람의 힘을 빌려서 미약하게 움직이는 것을 돕고 이로부터 물결을 치며 옮아가면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
현상이라 함은 전상으로부터 이루어진 현상이니,
바야흐로 물질의 대경인 산ㆍ하천ㆍ대지 등의 기세간(器世間)이 있게 된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에서 이르되,
“그때,
세존이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먼저 다시 무슨 모양으로 머무르며 관찰합니까’고 물었지만,
‘허깨비 몸인지라 허깨비로 보면 바로 평등함에 머물러서 그[彼]와 나[我]라는 것이 없다’고 이렇게 관찰해야 하나니,
이렇게 관찰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느니라.
그러나 모든 유정들은 오랜 옛 겁(劫)으로부터
처음 찰나식(刹那識)은 목석(木石)과는 달랐나니,
태어나면서부터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을 얻어서 각각 스스로 한량없고
수 없는 염오와 청정한 식의 근본이 되느니라.
처음 찰나의 말로는 할 수 없는 겁으로부터 금강(金剛)의 마지막 한 찰나에 이르기까지
말로 할 수 없고 말로는 할 수 없는 식(識)이 있으면서 모든 유정들의 색법(色法)ㆍ심법(心法)의 두 법을 내었나니,
색은 색온(色蘊)이라 하고 심은 4온(蘊)이라 하지만 모두가 쌓이고 모인 성질로서 진실을 숨기고 가리느니라”고 하였다.◂
옛 해석에서 이르되,
“처음 찰나식은 목석과는 다르다 함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처음의 식은 어느 갈래[趣]를 따라 생위(生位)를 계속하는 동안에 맨 처음 찰나의 제8식이니,
식에는 연려(緣慮)가 있으므로 목석과는 다르다’고 한다.
어떤 이는 설명하기를 ‘처음 식은 마치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모든 식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전상(轉相)ㆍ업상(業相)ㆍ진상(眞相)이다.
진상이라 함은 본각(本覺)의 참 마음으로서 허망한 인연이 의뢰하지 않으므로 스스로의 참 모양이라고 한다.
업상이라 함은 근본무명이 일어나 움직여 극히 미세한 업식이 되기 때문이며,
전상이라 함은 이는 능견(能見)의 모양으로서 앞의 업상에 의하여 회전하며 능연(能緣)을 이루는 것이니
비록 능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소연(所緣)인 경계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상이란 곧 경계의 모양으로서 앞의 전상에 의하여 경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고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자기 마음으로,
몸과 몸의 안립(安立)을 나타내는 수용한 경계를 단번에 분별하여 안다”고 하였나니,
다음과 같은 즉 근신(根身)과 바깥 기세간의 색깔 등의 다섯 대경은 언제나 저절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3세(細)인 곧 본식(本識)이기 때문이요,
맨 처음의 업식(業識)이 시초가 됨은 일어나는 문[生起門]에 의하여 차례를 삼기 때문이다.
또 오랜 겁으로부터 온지라 때에 시초가 없고
과거와 미래에도 체성이 없음은 마음만으로 허망한 생각을 훈습하여
그것을 시초로 삼아 진리를 어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조용함에서부터 동요를 일으킴을 업(業)이라 하고,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아감을 옮아감[轉]이라 한다.
진여의 성품은 더하거나 줄어들 수 없으므로 참 모양이라 하고,
또한 진식(眞識)이라고 하나니,
이 진식은 곧 업(業)ㆍ전(轉)ㆍ현(現) 등의 세 성품이요
곧 신령하게 아는 성품으로서 허공과는 같지 않으므로 공통하게 식이라 한다.
또한 스스로의 모양[自相]이라 함은 다른 것을 의뢰하여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지혜 모양[智相]이라고도 함은 깨달아 비추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르되,
“본각인 참 마음은 허망한 인연을 의뢰하지 않으며,
참 마음의 체성 이것이 곧 본각으로서 움직여 옮는 모양이 아니니,
이것은 깨달음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해석에서 이르되,
“처음 찰나식은 목석과는 다르다고 함은,
한 생각의 식은 깨닫는 것과 느낌이 있기 때문에 목석과는 다른 것이니,
곧 앞생각 가운데에 끝의 마음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했다.
보게 되는 붉고 흰 두 더러운 것도 바깥 기세간의 목석의 종류와 같은 것이나,
이 식이 생길 때에는 그것에 의해 몸을 삼기 때문에 목석과는 다르다.
【문】 먼 겁(劫)에서도 시초가 없다면 어찌하여 처음 식[初識]이라고 하는가.
【답】 과거와 미래는 체성이 없고 찰나마다 훈습은 현재에 속할 뿐이며,
현재에서 바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킬 때에 허망한 생각은 진리를 어기므로 처음 식이라 하는 것이요,
이것이 과거에 식이 시작하고 일어남이 있어서 처음 식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알라.
가로로는 온갖 곳을 싸잡고 세로로는 한량없는 때를 꿰뚫는 것이니,
모두가 이는 지금 현재 의 한 마음이요 다시는 따로 이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나는 오랜 옛적을 보는 것이 마치 오늘날과 같다”고 했나니,
그러면 삼세의 망정이 소멸되어 때[時]가 없는 바른 길에 계합하면
하나의 참된 도(道)가 나타나서 유식(唯識)의 원만한 종(宗)을 증득하리라.
【문】 경에서 밝힌 대로
“처음 찰나식은 목석과는 다른지라 태어나면서 염오와 청정을 얻어서
각각 스스로 한량없고 수없는 염오와 청정한 식의 근본이 되고,
처음 찰나의 불가설(不可說)의 겁으로부터 금강의 마지막 한 찰나에 이르기까지
불가설 불가설의 식이 있으면서
모든 유정들의 색법ㆍ심법의 두 법을 내었다”면,
염오도 있고 청정도 있으며 생김도 있고 소멸도 있으리니,
이 식을 생멸문(生滅門) 안에 결부하면 몇 가지의 생멸이 있는가.
【답】 참된 문[眞門]은 성품을 따라 묘하게 생멸 없음[無生]에 합하고,
세간 모양[世相]은 인연을 따라서 분류되고 생기고 다하는 것과 같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대혜(大慧)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식에는 몇 가지의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함[生住滅]이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식에는 두 가지의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함이 있어서
사량(思量)으로는 알 바가 아니니,
유주(流注)가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함과
상(相)이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하느니라’ ”고 하였다.
옛 해석에서 이르되,
“유주라 함은 제8식만을 지목할 뿐으로서,
세 모양[三相]이 미세하고 은밀하여 종자와 현행이 끊이지 아니함을 유루라 한다.
무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처음에 업식(業識)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生]고 말하고,
오랜 겁 동안 서로 잇기 때문에 머무른다[住]고 말하며,
금강정(金剛定)에 이르러 한 생각을 평등하게 깨치면
근본의 무명이 끊어지므로 유주가 소멸한다[滅]고 한다.
상이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한다 함은,
그 밖의 일곱 식이 마음과 경계에서 거칠게 나타나기 때문에 상(相)이라고 하며,
비록 7이 8을 반연하고
6에서 보면 미세하기는 하나 4혹(惑)이 갖추어져 있는지라 역시 “거칠다[麤]”고 말한다.
때문에 그 현식(現識)에 의하여 자기 종자와 모든 경계의 인연이 합하여 7을 내므로 상이 생긴다고 하고,
오랜 겁 동안 훈습한지라 상이 머무른다고 하며,
끝으로부터 근본을 향하여 점차로 조복하여 끊으면서 7의 자리까지 가득 차므로 상이 소멸한다고 말한다.
앞의 생김과 소멸에 의하여 미혹과 깨침의 의지[依]를 세우고,
뒤의 생김과 소멸에 의하여 염오와 청정의 의지를 삼으며,
뒤는 짧고 앞은 길므로 일이 두 가지로 구별되나니,
바로 이것이 유주가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함과 상이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바닷물이 바람을 만나면 변하여 파도의 모양을 이루듯이
마음의 물이 경계를 만나면 은밀히 유주(流住)의 생김을 이룬다.
앞의 물결이 뒤의 물결을 이끌어 큰 바다를 치면서 끊어지지 않듯이
새로운 생각이 옛 생각에 잇달아 마음 바다에 뛰놀면서 언제나 일어나나니,
이로부터 맑은 근원이 어지럽게 되고 깨달음의 바다를 혼미하게 한다.
그러므로 알라.
진실로 인하여 허망을 일으켜 불각(不覺) 무명의 동요함은,
마치 물로부터 물결을 이루되
전혀 이것은 바깥의 바람으로 치게 됨과 같으며
안팎의 화합된 인연은 싹을 내어
마침내는 능견(能見)의 마음을 이루고 곧 볼 바의 경계를 나타낸다.
비춤[照]으로 인하여 지혜 거울이 갑자기 생기고 지혜로 인하여 곱거나 미움을 분별하나니,
이렇게 취하고 버리는 것으로부터
망정은 사랑과 미움으로 나뉘며
마음은 변하여 다섯의 대경에서 집착함이 굳게 되어
6정(情)의 감관을 향하여 계속되면서 끊어지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애욕의 강 밑바닥에 빠지면서도 조심함이 없고 오욕의 불길 속에 태우면서도 두려워함이 없으며,
마음에 달게 여겨 검은 성[黑城]의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생명이 없어지기 까지 꿈집[夢宅]의 덧없는 영화를 탐내면서 깨나기도 어렵고 깨치기도 어렵다.
만일 맨 처음의 한 생각을 환히 알면 생김과 소멸이 어디서부터 오겠는가.
생멸 없음에 단번에 들어가 본래의 참된 깨달음에 복귀하리라.
그러면,
대경대경마다 고요히 사라져서 6취(趣)의 무리가 얽매기 어렵고,
생각생각마다 오묘하여져서 9결(結)의 그물이 훔쳐 매지 못하리니,
마치 큰 바다에 바람이 쉬면 잔 물결조차도 일지 않는 것과 같다.
동요의 모양이 본래 공함을 관찰하고 인연으로 생김이 체성 없는 줄로 보면,
깊은 근원의 축축한 성질이 잔잔해지고 맑아져서 삼라만상이 명백하게 드러나리라.
그런 까닭에 현겁정의경(賢劫定意經)에서 이르되,
“온갖 것의 공함을 분명히 아는 것을 한 마음[一心]이라고 한다”고 했다.
【문】 종경(宗鏡)으로 현묘함을 찾고 있거늘,
어떻게 식을 해설하는가.
【답】 다만 식의 성품은 오묘해서 본말(本末)을 궁구하기 어려울 뿐이요,
부처님만이 능히 알 수 있고 아래 지위에서는 알지 못한다.
자취도 없고 형상도 없되 만유(萬有)의 근본이 되고,
깊을 뿐이요 오묘할 뿐이로되 뭇 성인의 근원이 된다.
마치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의 오도심식품(五道尋識品)에서 이르되,
“그때,
세존은 현식(現識)의 나아갈 바,
도식(道識)ㆍ속식(俗識)ㆍ
유위식(有爲識)ㆍ무위식(無爲識)ㆍ
유루식(有漏識)ㆍ무루식(無漏識)ㆍ
화식(華識)ㆍ과식(果識)ㆍ보식(報識)ㆍ무보식(無報識)ㆍ
천식(天識)ㆍ용식(龍識)과 귀신(鬼神)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迦)ㆍ인비인(人非人)의 식이며,
위로는 28천(天)까지의 식과 아래로는 무구지옥(無救地獄)까지의 식을 보이려 하시면서,
그 때 세존은 이내 태(胎) 안에서 구쇄해골(句鎖骸骨)을 나타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가득 채우고는 아기타(阿祈陀)에게 말씀하셨다.
‘이 해골의 식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대답하였다.
‘분별하지 못하겠나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분명히 통달하지 못하였사오며
수행의 힘은 아직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미륵(彌勒)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하늘 안에서 아직 신통을 얻지 못했는가.’
미륵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성취한 것도 있고 성취 못한 것도 있나이다.’
‘그대는 구쇄해골을 자세히 살피어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알게 하며 분별하고 결단하여 의심으로 걸림이 없게 하라.’
그때,
미륵보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금강칠보신장(金剛七寶神杖)을 집고 구쇄해골을 들고는
그 해골의 음성을 들으며 이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사람은 죽으면 성냄의 번뇌가 많은지라 식(識)은 용(龍) 안에 떨어지겠으며,
(다시 다른 뼈를 휘저으면서) 이 사람의 전생 몸은 10적(跡)의 행을 갖춘지라 천상에 가 나겠으며, ◂
(다시 다른 뼈를 휘저으면서) 이 사람은 저 생에 계율을 깨뜨렸는지라 지옥에 가 나겠나이다’ 하고,
이와 같이 뼈를 휘저어서 유루ㆍ무루와 유위ㆍ무위며 28천(天)으로부터 아래로 무구지옥에 이르기 까지
나아갈 선악의 과보와 백흑의 행보[白黑行報]를 알았다.
하나의 모자람이 없는 전신사리(全身舍利)가 있었는데,
그때에 미륵은 지팡이로 휘저으면서
이 식에 대해 추구하고 찾았으나 마침내 그 처소를 알지 못하자,
이렇게 세 번을 휘젓고는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사람의 신식(神識)은 마침내 알지 못하겠나이다.
장차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은 아니옵니까.’
‘그대는 부처의 지위를 계승하여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어 위없는 도를 이룰 터인데,
어째서 사리를 휘저어 보면서도 식의 처소를 모르는가.’ ◂
미륵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은 불가사의라 한량없사오며,
우리들의 경계로써는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옵니다.
이제 의심이 있사오니,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해설하여 주소서,
다섯 갈래[五道]에 대한 신식은 그의 선악에 나아갈 바를 모두 다 알 수 없어서
감히 의심이 있지 않사오나,
여래의 처소에서 이제 이 모자람이 없는 사리에 대해 이 식을 말씀하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사리의 유포(流布)는 그대들의 경계로써는 분별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리는 바로 나의 사리라
어찌 여래의 신식을 찾고 궁구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분별하리라.
여래의 상ㆍ중ㆍ하의 식과 살바야(薩婆若)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같지 않느니라.
초주(初住)의 보살은 아직 근기와 덕의 힘이 서지 못한다.
비록 신통을 얻은 2주(住) 보살이라 하더라도 천안(天眼)으로써 자세히 살펴야 나아갈 바의 퇴지(退地)와 불퇴지(不退地)를 알며,
또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것을 보거나 혹은 또 동방의 수없는 부처 세계에 나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계율을 받들며 걸림이 없음을 보기도 하며,
또한 저 수기(授記)를 받은 겁수의 1겁 2겁으로부터 백천억 겁까지를 아느니라.
혹은 어떤 보살로서 3주(住)의 자리면
사리를 보고는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나아갈 바를 알기도 하나
4주(住)의 해할 바의 식과 나아갈 바는 보지 못하며,
4주 보살은 1주ㆍ2주ㆍ3주의 사리 법을 보기는 하나 다시 5주의 사리의 식법(識法)과 나아갈 바는 보지 못하며,
내지 부처님만이 부처의 신식의 생각한 바를 아느니라’고 하셨다.
단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신식은 형상이 없는 법이라
다섯 가지 요소[五大]로 집을 삼으며
선과 악의 행을 분별하게 되고
가고 오고하면서 참과 거짓을 구별한다.
식이 착한 길[善道]의 것임을 보이면
영원히 안온한 길에 이르며
식은 제6을 왕으로 삼고
그 밖의 요소[大]는 가장 같지 않다.
【문】 마음[心]과 식[識]이란 두 가지 이름인데,
어느 것이 훌륭하고 열등한가.
【답】 마음은 여래장(如來藏)이요,
마음은 진여(眞女)의 성품이로되,
식은 마음에서 나는 바라 하나의 법도 참 마음의 성품으로부터 생기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모든 법이 생기게 됨은 마음만으로 나타난 바다”고 했나니,
마음 이것은 근본이라 훌륭하지만 식 이것은 의지[依]라 곧 열등하다.
마치 원각소(圓覺疏)에서 이르되,
“생김의 법은 본래가 없고 온갖 것은 유식(唯識)이니,
식은 꼭두각시요 꿈과 같으며 이는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고 함과 같다.
【문】 만일 식에 그 체성이 없다면,
어떻게 이 마음이 얻어지는가.
【답】 식의 근본이 바로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에는 체성이 없으며 이 한 마음이라면,
어떻게 경계는 식으로부터 생기고 경계를 포섭하여 식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겠는가.
만일 공통으로 논한다면 본래 이것은 하나의 마음이요 마음이 변하여 식이 되며 식은 모든 경계를 변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경계를 포섭하여 식으로 돌아가고 식을 포섭하여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 앞에서 이미 식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하였지만,
어떤 것이 지혜[智]인가.
마치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이르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식이라 말한 것은
눈으로 알 바의 빛깔과
귀로 알 바의 소리와
코로 알 바의 향기와
혀로 알 바의 맛과
몸으로 알 바의 접촉과
뜻으로 알 바의 법(法)을 요별하는 것이니,
이것을 식이라 하느니라.
지혜라 말한 것은,
안에서 고요하고 밖에서 행하지 아니함은 오직 지혜에 의지할 뿐이며
하나의 법에서 분별과 갖가지 분별을 내지 않음을 바로 지혜라고 하느니라.
또 사리불(舍利弗)아,
경계로부터 생김을 바로 식이라 하고
작의(作意)로부터 생김을 바로 식이라 하며
분별로부터 생김을 바로 식이라 하지만,
취함도 없고 붙잡음도 없고 반연할 바[所緣]도 없고 요별할 바도 없고
분별이 없는 것을 바로 지혜라 하느니라.
또 사리불아,
식이라고 말한 것은 유위(有爲)의 법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무위(無爲)의 법 중에서 식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니,
만일 무위의 법을 요달하면 이것을 지혜라고 하느니라”고 함과 같다.
또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요하지 않은 것 이것이 생각[想]이요
고요히 사라진 것 이것이 지혜[智]이니
만일 생각의 제 성품을 알면
문득 모든 생각에서 떠난다.
만일 있는 생각[有想]을 버리게 되면
이야말로 도리어 있는 생각이며
그는 생각의 희론(戱論)을 행한지라
이 사람은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마음을 짓되
이 생각을 누가 일으키며
이 생각을 누가 증득할 것이며
누가 이 생각을 소멸할 수 있을까.
생각의 법을 일으키는 것
모든 부처님도 얻을 수 없나니
곧 이 곳에서 있게 된다면
나[我]도 없고 취하거나 집착함을 여윈다.
만일 그 마음 생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생각을 일으키게 되겠는가
만일 마음이 해탈하게 되면
그는 곧 말미암아 일으킴이 없다.
만일 해탈을 증득하게 되면
마음은 곧 불가사의하며
마음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불가사의함을 성취하게 된다.
나는 본래부터 생각하기를
마음자리에 편안히 머무르고 나면
온갖 마음을 버리오리니
원컨대 불가사의 이룩하여지이다.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의 과보로
함이 없음[無爲]을 보게 된다면
한 생각 동안에 모든 중생의
온갖 생각들을 분명히 알게 된다.
중생 이것이 곧 마음이요
마음 이것이 곧 여래이니
모든 부처의 불가사의로
이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되느니라.
【문】 심왕(心王)의 미묘한 뜻과 여덟 식의 참 근원을 바른 도리로 뚜렷하게 밝히면서
성인의 교법에 의거하여 정량(定量)을 삼았고
본체[理]와 현상[事]을 나란히 들은지라
이미 조그마한 의심조차 끊어졌지만,
심소(心所)의 문은 어떻게 열면서 뛸 것인가.
【답】 여기서는 제2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을 말하겠다.
이 심소는 6위(位)로서 모두 51의 법이 있다.
변행(遍行)에 5종이 있고,
별경(別境)에 5종이 있으며,
선(善)에는 11종이 있고,
근본번뇌에는 6종이 있으며,
수번뇌(隨煩惱)에는 10종이 있고,
부정(不定)에는 4종이 있다.
변행이라 함은 네 가지 온갖 것[四一切]에 두루한다는 것이다.
네 가지 온갖 것이란,
1은 성질의 온갖 것[性一切]이니,
곧 3성(性)으로서 첫째는 선(善)이요,
둘째는 불선(不善)이요,
셋째는 무기(無記)의 성질 등이다.
2는 땅의 온갖 것[地一切]이니,
곧 9지(地)로서 첫째는 욕계의 다섯 갈래[五趣] 땅이요,
색계의 4선(禪)인 넷의 땅이며,
무색계의 4공(空)인 넷의 땅이다.
3은 때의 온갖 것[時一切]이니,
때는 곧 동일한 찰나의 때이다.
이 작의(作意) 등의 다섯 가지 심소는 모두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때의 온갖 것이라 한다.
4는 함께하는 온갖 것[俱一切]이니,
함께한다는 것은 곧 모든 마음 등과 여덟의 식이 두루 함께한다는 것이다.
뜻으로 말하면,
“이 작의 등의 다섯 가지 변행심소는 8식의 심왕과 함께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동시에 서로 응하는 다섯 가지 수(數)가 있다”는 것이다.
또 여덟의 식이 함께 일어날 때에는 모두 변행심소의 다섯 가지 수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함께하는 온갖 것”이라고 한다.
곧 네 가지 온갖 것은 바로 돌아다닐 바[所行]요 두루할 바[所遍]요,
촉(觸) 등의 다섯 가지 수는 바로 능히 돌아다님[能行]이요 능히 두루함[能遍]이니,
두루함[遍]이란 원만[圓]하다는 뜻이고,
돌아다님[行]이란 노닐며 돌아다닌다[遊履]는 뜻으로서 경계를 반연한다는 뜻이다.
다만 견분(見分)만으로 능히 반연[能緣]하는 네 가지 온갖 것만을 취하고 안의 두 분[內二分]은 취하지 않나니,
안의 두 분은 서로서로가 반연할 뿐이요 곧 바깥으로 온갖 것을 반연하지는 못한다.
또 별경의 욕(欲) 등의 다섯 가지 수라면 돌아다님은 있되 두루한 것은 아니니,
돌아다님 이것은 능연(能緣)이요 두루함 이것은 소연(所緣)으로서 곧 즐길 바 등의 네 가지 경계[四境]이다.
네 가지 경계는 능연인 욕(欲) 등으로 하여금 두루 반연할 바가 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돌아다님은 있되 두루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네 가지 구절로 분별해야 한다.
1은 이것은 돌아다니기는 하되 두루한 것은 아니니,
곧 별경이다.
2는 이것은 두루하기는 하되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니,
곧 진여이다.
3은 두루하기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나니,
곧 변행이다.
4는 두루한 것도 아니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곧 물질 등이다.
현양론(顯揚論)에서 이르되,
“심소유법(心所有法)이란,
만일 법이 아뢰야의 종자로부터 나는 것이라면,
심소에 의해 일어나는 것과
마음이 함께하면서 구르는 것과 상응한 것이다.
그것은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변행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1의 작의(作意)라 함은 마음 일깨우는 것을 체성(體性)으로 삼으며
반연할 바 경계에 대해 마음을 인도하는 것을 업용(業用)으로 삼는다”고 했다.
【문】 작의는 종자 지위에 있으면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인가,
현행(現行)에 있으면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인가.
【답】 종자 지위에 있으면서 마음을 일깨운다.
작의의 자성(自性)은 밝고 날카로운지라 비록 종자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어떤 경계가 이르게 되면 심심소(心心所)의 종자를 일깨워 일어나고 나타나게 한다.
비유를 들면,
마치 같은 한 방에서 잠을 자는데 바깥에서 도둑이 왔을 때에,
대중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 본래 잠이 적은지라 이내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것과 같나니,
이 사람이 비록 자신은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깨워서 일어나게 한 것이다.
또한 속마음의 상분(相分)이 비록 견분(見分)과 같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으레 마음의 공능(功能)을 끌어냄이 있는 것처럼,
지금의 작의 역시 그러하여 그 작의의 종자는 벌써 그 모든 심심소의 종자를 일깨워서 현행을 내고 난지라 작의가 현행한다.
또 마음의 현행을 인도하여 앞의 대경에 나아가게 하나니,
곧 이 작의에는 두 가지의 공능이 있다.
첫째는 마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 일깨워서 일어나게 한다.
둘째는 만일 일어난 뒤라면 인도하여 대경으로 나아가게 한다.
첫째의 것이 바로 체성이요,
둘째의 것이 바로 업용이다.
2는 촉(觸)이다.
감관[根],
경계[境],
식[識]의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분별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수(受)의 의지(依)가 업용이 된다.
또 세 가지 화합의 이것은 원인이요,
촉 이것은 그의 결과이니,
심심소로 하여금 경계에 접촉하게 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의지할 바[所依]가 업용이 된다.
접촉이 만약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그 밖의 느낌[受]의 한 심소조차도 생길 수가 없다.
온갖 마음과 심소가 화합하여 앞의 경계에 같이 접촉하게 하는 이것이
접촉 자체만이 지니는 성품이요,
곧 모든 마음이 경계를 반연할 때에 모두가 이는 접촉이 지닌 공능의 제 성품이며
곧 이 접촉은 저 세 가지 화합과 비슷하게 느낌 등의 의지할 바가 되는 이것이 접촉의 업용이다.
3은 수(受)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체성이 되고,
욕망하며 반연하는 것이 업용이 된다.
4는 상(想)이다.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의 훈습을 반연 삼아 모양을 취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말과 의론을 내는 것이 업이 된다.
또 상(想)은 제 경계의 분제(分劑)를 세우나니,
만일 마음이 일어났을 때에 이 상이 없다면 경계의 분제 모양을 취할 수 없다.
경계에 대하여 형상을 취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갖가지 명언(名言)을 시설하는 것이 업용이 된다.
갖가지의 명언은 모두가 상에서 말미암으며 이것이 상의 공능이다.
5는 사(思)이니,
생각하는 마음을 말한다.
온갖 선악의 총체적인 업보와 개별적인 업보를 조작하는 것이 사의 체성이 되고,
착한 품류 등에 대해 마음을 부리는 것이 업용이 된다.
촉 등의 다섯 가지 법은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있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변행이지만,
그 밖의 것은 변행이 아니다.
별경(別境)에도 다섯 가지가 있지만
욕(欲) 등은 마음에 두루하지 않기 때문이며,
네 가지 경계가 따로따로라 별경이라고 한다.
1은 욕이니,
즐길 바의 경계에 대해 희망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애써 함[動]의 의지가 업용이 된다.
또 온갖 일에 대해 관찰하려고 하는 이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며,
만일 관찰하려 하지 않고 경계로 인한 세력에 따라 저절로 반연한다면 전혀 욕이 없는 것이니,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욕은 변행심소가 아니다.
2는 승해(勝解)이니,
결정할 경계에 대해 그에 알맞는 대로 똑똑히 아는 것이 체성이 되고,
이끌어 옮아갈 수 없는 것이 업용이 된다.
또 삿됨과 바름 따위의 교리로 증명하는 힘을 말하는 것으로,
취할 바의 경계에 대해 살피고 결정하여 똑똑히 지니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다른 인연으로 끌어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계에 망설이는 것은 승해가 전혀 없으며,
살피어 결심한 것이 아니면 역시 승해는 없으므로 변행에는 속한 것이 아니다.
3은 염(念)이니,
익혔던 경계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분명히 기억하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등지(等持)의 의지할 바가 업이 된다.
또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종류의 경계 중에서는 기억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설령 예전에 체험한 것이라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으면,
염은 역시 생기지 않기 때문에 염은 반드시 변행심소의 소속이 아니다.
염과 정(定다)은 의지할 바가 되므로 업용이 되고,
바른 선정[正定]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선정의 의지가 업용이 된다”고 말한다.
4는 정(定)이다.
등지(等持)라고도 하나니,
관(觀)할 바 경계에 대해 오로지 한 가지 반연에만 마음을 쓰는 것이 체성이 되고,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며 지혜의 의지가 업이 된다.
또 정으로 말미암아 오로지 마음을 써서 산란하지 않게 하면 이에 의하여 결택(決擇)하는 지혜의 생김이 있지만,
만일 마음을 매어 경계 자리에 오로지 쏟지 아니하면 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변행심소가 아니다.
5는 혜(慧)이니,
관할 바 경계에 대해 간택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의심을 끊는 것이 업이 된다.
또 경계를 관하는 것이 아니고 우매한 마음속에서는 간택이 없기 때문에 변행심소에 속한 것이 아니니,
이 별경심소의 다섯 가지는 자리에 따라 있거나 없는 것이며 소연과 능연이 반드시 함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善)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1은 신(信)이니,
본받을 것이 있고 덕이 있고 능함이 있는 것에 대해 마음의 청정한 것이 체성이 되고,
믿지 않음[不信]의 장애를 끊고 보리(菩提)의 양식을 얻어 웬만해지는 것이 업용이 된다.
또 식론(識論)에서 이르되,
“믿음은 마음의 청정함을 성품으로 삼나니,
이 성품은 맑고 깨끗하여 마음 등을 깨끗하게 할 수 있고 마음은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청정함이란 이름을 붙였다.
마치 수청주(水淸珠)가 흐린 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믿음 이것만이 청정하게 할 수 있고 그 밖의 선 등은 모두가 청정할 바이기 때문이다.
심왕을 주인으로 삼는지라 마음의 청정함만을 말하고 심소는 말하지 않았으며,
물은 마음 등에 비유하고 수청주는 믿음의 체성에다 비유했다.
수청주를 넣었기 때문에 흐린 물은 이내 깨끗해지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드디어 청정해진다”고 했다.
2는 참(慚)이니,
제 자신에 대하여 왕성하게 그리고 법에 대하여 왕성하게 저지른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체성이 되고,
제 부끄럼이 없음[無慚]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용이 된다.
3은 괴(愧)이니,
세간에 대하여 왕성하게 저지른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체성이 되고,
남 부끄럼이 없음[無愧]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4는 무탐(無貪)이니,
존재함이 있는 기구에 대해 싫어하여 여의고 고집함이 없으며 간직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집착함도 없는 것이 체성이 되고,
탐냄[貪]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5는 무진(無瞋)이니,
모든 유정들에 대해 마음으로 손해 끼침이 없이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이 체성이 되고 성냄[瞋]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6은 무치(無癡)이니,
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체성이 되고,
어리석음(癡)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7은 정진(精進)이니,
마음이 용맹하여 타락함이 없고 자신을 가벼이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게으름[懈怠]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8은 경안(輕安)이니,
묵직함을 멀리 여의고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화창하게 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추중(麤重)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9는 불방일(不放逸)이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이 모두 섭하여 정진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방일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10은 사(捨)이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통틀어 거두는 것이 체성이 되고,
이 사에 의하여 마음이 평등하게 되고 마음이 정직하게 되면 마음에서 발동함이 없으므로 이 발동함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이 된다.
11은 불해(不害)이니,
모든 유정들을 괴롭히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가엾이 여기고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체가 되고,
해침[害]의 장애를 끊는 것이 업용이 된다.
근본번뇌(根本煩惱)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1은 탐(貪)이니,
5취온(取蘊)에 대하여 좋아하고 감추고 보존 집착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자기와 남을 해쳐서 나쁜 길[惡道]에 나아가는 것이 업이 된다.
2는 진(瞋)이니,
유정들에 대해 손해를 끼치려는 것이 체성이 되고,
성냄 없음[無瞋]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3은 자만[慢]이니,
남은 자기보다 못하고 자기는 훌륭하다고 헤아리면서 마음으로 높은 체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난체함이 없음[無慢]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4는 무명(無明)이니,
진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바르게 아는 것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5는 삿된 소견[邪見]이니,
다섯의 소견이 체성이 된다.
첫째,
살가야견(薩迦耶見)이니,
5취온에 대해 나[我]와 내 것을 헤아리면서 지혜[慧]를 더럽히는 것이 체성이 되고,
나 없음[無我]과 뒤바뀜 없음[無顚倒]의 견해를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둘째,
변집견(邊執見)이니,
5취온에 대해 단견(斷見) 또는 상견(常見)을 고집하면서 지혜를 더럽히는 것이 체성이 되고,
덧없음과 뒤바뀜 없음의 견해를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셋째,
삿된 소견이니,
원인과 결과를 비방하면서 지혜를 더럽히는 것이 체성이 되고,
분별기(分別起)만으로 바른 소견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넷째,
견취(見取)이니,
앞의 세 가지 소견과 소견이 의지할 바 쌓임[見所依蘊]에 대해 가장 훌륭하고 첫째가는 것이라 헤아리면서
지혜를 더럽히는 것이 체성이 되고,
분별기만으로 괴로움[苦]과 청정하지 않음[不淨]과 뒤바뀜 없음의 견해를 장애하는 것이 업용이 된다.
다섯째,
계금취(戒禁取)이니,
앞이 모든 소견과 소견이 의지할 바 쌓임에 대해 청정하고 해탈하고 벗어나게 된다고 고집하면서
지혜를 더럽히는 것이 체성이 되고,
분별기만으로 앞에서와 같은 뒤바뀜 없음의 견해를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해석에서 이르되,
“살가야견이란 이를 번역하면 신견(身見)이다.
견취란 논(論)에서 이르되,
‘온갖 다툼[鬪諍]의 의지할 바가 업이 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모든 소견과 의지할 바 쌓임에 대해
가장 훌륭하여 열반의 청정한 법을 얻을 수 있다고 고집하는 이것이 견취이니,
이로 말미암아 저마다 서로가 모든 소견 등을 훌륭하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온갖 의도들의 다툼은 이로 인하여서 일어난다.
계금취란 또 이르되,
‘이익이 없는데도 애쓰며 수고하는 것의 의지할 바가 업이 된다’고 했나니,
모든 소견에 의하여 받게 된 계율로서 이 계율은 훌륭하고 열반을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계로 말미암아 온갖 외도들은 머리 뽑는 계[拔髮戒] 등을 받아 지니어서 이익이 없이 애쓰고 수고한다”고 했다.
6은 의(疑)이니,
모든 진리[諦]에 대해 망설이면서 결단하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분별기만으로 의심 없음[無疑]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문】 이 열 가지 번뇌는 어느 식과 상응하는가.
【답】 제8의 장식(藏識)에는 전혀 없고,
제7의 말나식(末那識)에는 네 가지가 있으며,
제6의 의식(意識)에는 열 가지 모두를 갖추었고,
앞의 다섯 식에서는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옛 해석에서 이르되,
“다섯의 식[五識]에는 세 가지 뿐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만(慢) 등은 없나니,
만 등은 반드시 수념분별(隨念分別)과 계탁분별(計度分別)이 있으면서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자만으로 말미암아 칭량문(稱量門)에서 열등하다 훌륭하다 함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의심으로 망설임은 간택문(簡擇門)에서 일어나고 소견은 추구문(推求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나,
다섯의 식은 이런 따위의 행상(行相)이 없기 때문이다.
7식에서는 아치(我癡) 등의 네 가지 번뇌를 갖추고 있으나
오히려 자세히 살피면서 결단하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날 수가 없고,
나[我]를 애착함으로 말미암아 진(瞋)은 나게 되지 않는다.
하나의 심왕(心王) 중에는 두 가지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 밖의 소견은 생기지 않는다.
수번뇌(隨煩惱)에는 스무 가지가 있다.
석론(釋論)에서 이르되,
“이것은 번뇌의 분위차별(分位差別)로 등류의 성질 뿐이기 때문에 수번뇌라고 한다”고 했다.
이 스무 가지 종류에는 세 가지구별이 있다.
분(忿) 등의 열 가지는 저마다 따로따로 일어나기 때문에 소(小) 수번뇌라 하고,
무참(無慚) 등의 두 가지는 불선(不善)에 두루하기 때문에 중(中) 수번뇌라고 하며
도거(掉擧) 등의 여덟 가지는 염심(染心)에 두루하기 때문에 대(大) 수번뇌라고 한다.
1은 분(忿)이니,
현재의 거슬린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분이 나게 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성냄 없음[無瞋]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2는 한(恨)이니,
과거의 거슬린 일에 대해 원한을 맺으며 버리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성냄 없음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3은 부(覆)이니,
잘못 범한 일에 대해 남이 타이르거나 타이르지 않거나 간에 지었던 나쁜 일을 숨기는 것이 체성이 되고,
허물을 들추어서 후회함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4는 뇌(惱)이니,
잘못 범한 일에 대해 남이 타이르면 추악한 말을 퍼부으면서 마음이 난폭해지고 참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착한 벗[善友]을 장애하는 것이 업용이 된다.
5는 질(嫉)이니,
다른 이가 지니고 있는 공덕과 명예에 대해 마음에 시새우면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인자(仁慈)함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6은 간(慳)이니,
쌓고 모으면서 괴상하게 집착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탐냄 없음[無貪]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7은 광(誑)이니,
남을 헷갈리게 하여 진실 아닌 일을 나타내면서 마음에 속이는 것이 체성이 되고,
사랑하고 공경함[愛敬]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8은 첨(諂)이니,
그를 속이기 위하여 거짓으로 공손하고 순종한 체하면서 마음에 번듯하지 못한 것이 업이 된다.
9는 교(僑)이니,
세간에서 흥성함 따위를 믿고 뽐내면서 꺼리는 바가 없는 것이 체성이 되고,
싫어 여윔[厭離]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0은 해(害)이니,
유정을 괴롭히면서 가엾이 여김도 없고 측은하게 여김도 없는 것이 체성이 되고,
해치지 않음[不害]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1은 무참(無慚)이니,
잘못된 죄악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부끄러움[慚]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2는 무괴(無愧)이니,
세간에 대하여 잘못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남 부끄러움[愧]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3은 혼침(惛沈)이니,
마음으로 하여금 흐리멍덩하게 하는 것이 체성이 되고,
비발사나(昆鉢舍那)를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4는 도거(掉擧)이니,
바르지 않게 찾고 구하는 마음에 의하여 고요하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사마타(奢摩他)를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5는 불신(不信)이니,
본받을 것이 있고 덕이 있고 능함이 있는 것에 대해 마음에 깨끗하게 믿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믿음[信]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6은 해태(懈怠)이니,
마음에서 힘써 하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올바르게 애씀[正勤]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7은 방일(放逸)이니,
온통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체성이 되고,
멋대로 놀아나지 않음[不放逸]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8은 실념(失念)이니,
더러움에 물들어서 기억되지 않는 것이 체성이 되고,
잊지 않고 기억함[不忘念]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19는 산란(散亂)이니,
닦을 바 착한 마음에 대해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바깥 일에 내닫고 흩어지는 것이 체성이 되고,
등지(等持)를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20은 부정지(不正知)이니,
세 가지 업[三業]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지혜를 더럽히는 것이 체성이 되고,
바르게 앎[正知]을 장애하는 것이 업이 된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lain Bashung - Un Âne Plane.lrc
● 마음 현상에 대한 경론 표현의 맵핑 작업 필요성
한 주체가 현실에서 온갖 내용을 얻는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소리를 듣는다.
등이 한 주체가 대하는 현실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일정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늑하고 좋다. 상쾌하다.
이는 감각에 바탕하지만, 감각기관으로 얻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얻는다.
즉 무언가 보는 가운데 아늑하고 상쾌하고 좋음을 얻는다고 하자.
무언가 보는 내용은 눈에 의존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면서 좋다고 느끼는 느낌은
이를 감관에 의존해 얻는 것은 아니다.
같은 노란 색을 보더라도 어떤 경우는 기분이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기분이 불쾌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감관에 의존해 얻는다고 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그렇게 얻는 내용에 대해 일정한 분별을 한다.
지금 이런 정신 현상을 글로 적는 것도 표현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명백히 다른 주체도 함께 눈으로 대하고 만질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논의에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영희가 새로운 물건으로 '빠삐옹'을 사가지고 왔다고 철수에게 말한다고 하자.
그런데 글자도 보고 말소리도 듣지만, 정작 빠삐옹이 무엇인가를 알기 힘들다.
이 경우 영희가 손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킨다.
그처럼 손으로 가리킨 부분이 자신이 '빠삐옹'이라고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 경우 그렇게 손으로 가리킨 부분을 대하면
일단 눈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령 눈으로 못 보아도 다른 감관을 통해 내용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그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표현을 읽고 읽어도 그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찾아내기 힘들다.
정신 현상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현재 『종경록』 제 57 권을 살피고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이런 부분과 관련된다.
그래서 내용 파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우선 마음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 마음을 다시 하나로 묶기도 한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와 마음의 관계를 살피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질 수도 없다.
사정이 그렇다.
그런 가운데 여러 표현이 나열된다.
이 과정에서 각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처음 문제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빠삐옹'이란 표현을 하고
다시 '옹빠삐' 란 다른 표현을 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것을 서로 다르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정작 그 각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구분하기 힘들다.
현실에서 그 표현들이 가리키는 내용을 보거나 만질 수 있지 않다.
그런 경우 빠삐옹과 옹빠삐가 각기 무엇을 가리키는 지부터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 가운데 어떤 점에서 이것이 다르다고 하는지 조차도 파악하기 힘들다.
마음 현상과 관련된 표현들의 특성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이것을 살피는 입장에서는 글을 읽어도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를 먼저 해소해야 한다.
물론 이들 내용을 몰라도 현실적으로 누구나 눈을 뜨면 무언가를 본다.
또 소리도 듣는다. 느낌도 얻는다. 그리고 분별도 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 저런 활동을 한다.
그것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이 어떤 구조로 된 마음과 그 기제를 바탕으로
평소 이런 활동을 분주히 하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논의는 이런 부분을 일정한 표현을 통해 시설하면서
그 각각의 관계나 성격 등을 논의한다.
이런 경우 이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야 한다.
지도를 보면 각 부분에 특수기호가 표시된다.
그 지도는 현실에서 대하는 지형이나 거리에 있는 건물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지도에 사용된 특수기호가 가리키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지도를 살펴도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다.
이것이 맵핑과 관련된다.
그래서 각 기호나 표현을 대할 때 이들이 가리키고 이와 상응한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 처음에 중요하다.
그런데 지도의 경우와 마음현상 논의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지도를 놓고 현실과의 대응관계를 살피면 각 기호가 나타내는 바를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도 각 부분에 △ 이런 표시가 있다고 하자.
그 부분을 찾아가보니 그 표시가 된 곳마다 산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기호는 산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음현상을 나타내는 표현은 이런 작업이 상당히 곤란하다.
마음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그래서 이 표현을 각기 대하면서 각 주체가 서로 엉뚱한 것을 제각각 달리 대응시킬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해도 서로 간에 이를 다시 파악해 수정하기도 힘들다.
다른 이의 마음이나 그 마음 속 내용을 서로 간에 직접 보거나 만져 파악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이 어려움이 증폭된다.
이와 관련해 처음에 살필 문제는 다음이다.
감각과 관련해 12345 식을 왜 나열하는가
이런 문제부터 살펴야 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처음 눈을 감는다. 그러면 보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다가 눈을 뜬다. 그러면 무언가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처음 제 1 식이란 표현이 동원된다.
여하튼 제 1식은 이 현상과 관련된 그 무엇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기초적인 문제를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현상이 있다.
그런데 이 현상에 있어서 그런 제 1식을 설정하지 않아도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제 1 식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허무화된다.
본래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따로 제 1 식이라고 표현할 아무 내용도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굳이 그런 제 1 식을 시설해야 할 특별한 사정도 또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
최소한 제 1 식은 눈을 볼 때 어떤 모습을 보는 작용과 관련된다.
이 현상에 관여하는 마음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제 1 식을 시설해 제시해야 할 사정이 있다.
설령 그 제 1 식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도 그렇다.
그것이 처음 제 1 식이란 표현을 시설하는 첫 출발점이다.
이 배경 사정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 부분은 다른 식에 비교하면 사정이 낫다.
그런데 나머지 제 7 , 8 식 등에 들어가면 사정이 더 달라진다.
현실에서 누구나 이런 식을 갖고 있다고 제시된다.
그런데 정작 거의 대부분 이들 식이 매 순간 얻는 내용을 스스로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려움이 더 많다.
제 12345 식은 그 식 자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식을 통해 얻는 내용 자체는 매 순간 생생하게 얻었다.
그런데 제 7 식 제 8 식 이런 경우는 그 둘다 불명료하다.
그래서 이 부분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들 논의를 살피려면 먼저 기초적으로
이런 식을 그런 표현을 통해 따로 시설하게 되는 배경사정부터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식을 시설하게 되는 배경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로 인해 그 식 자체가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그 식이 매순간 얻어내거나 보관한다는 내용 자체가 명료하게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벌거숭이 임금님이 입는 보이지 않는 투명 옷과 성격이 비슷하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님이 그런 옷을 입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옷을 입고 있다는 임금님 자신부터 옷을 안 입은 것과 입은 것의 차이를 구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어렵다.
그런 사정으로 일단 기초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과연 제 1식이라는 마음을 시설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런 마음이 없으면 보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는가.
카메라 렌즈를 놓고 사진을 촬영한다고 하자.
설령 그런 것을 있다고 시설하지 않아도 사진촬영 결과가 사진기 모니터에 보인다.
이처럼 한 주체가 보는 현상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현상에 굳이 별도로 제 1 식과 같은 마음을 시설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한 주체가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사진기처럼 설명할 수 있다면 제 1식부터 허구적인 내용이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무언가를 보는 과정이 과연 이런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제1,2,3,45,6,78, 식은 선험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이가 무조건 그런 식이 있을 것 같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무조건 그런 마음이 있다고 명칭을 시설하고 내세워 주장하는 형태는 아니다.
설령 그처럼 그런 마음을 오로지 생각만으로 즉 사변 추론을 통해 무조건 시설해 제시했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현실 경험을 통해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할 경우와 있다고 할 경우에서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검토할 때 그렇게 시설해 제시한 내용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허구적이고 사변적으로 내세우는 희론적인 주장에 그치게 된다.
예를 들어 한 주체는 실재를 얻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런 실재를 얻는 어떤 식이 있다고 시설한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그런 식을 어떤 주체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또 그 식이 얻어내는 실재 내용도 그 사정이 같다. 끝내 얻어내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어떤 차이도 현실에서 찾지 못한다.
사정이 그런데로 그런 식이 무조건 있다고 어떤 이가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허구적인 희론에 그치게 된다.
처음에 어떤 이가 그런 식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추론해 시설해 내세운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것이 인정받으려면 현실내용을 통해 그것이 인정받아야 한다.
즉, 그 식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차이를 현실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보이지 않는 마음을 있다고 시설하는 배경사정
처음 감각에 관여하는 제 1 식 등은 현실 경험을 통해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제 1 식이 없다고 하는 경우와 있다고 하는 경우가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현실 경험을 비추어 보면 없다고 하는 경우는 현실 경험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있다고 하면 현실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처음 제 1 식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그렇다해도 제 1 식을 어떤 주체가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사변적으로 내세우고 주장하는 명칭은 아니다.
그리고 같은 사정으로 처음 제 1,2,3,4,5 식등의 시설이 인정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검토함에 있어서 어떤 이가 그 마음을 빼고 넣고 하면서
이 각 내용들을 검토해볼 수는 없다.
현실에서 어떤 요소가 어떤 결과에 관여하는가를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요소를 그 상황에서 뻬고 넣고 하면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 요소가 그런 내용을 얻는데 관여하는가 여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씨가 열매를 맺는데 서로 관련이 있음을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다음처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밭에 씨를 뿌린 부분이 있다.
그리고 씨를 뿌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가을 수확기에 이들 각 부분의 차이를 살피면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식이 현실 내용을 얻는데 관여하는가 여부는 그런 형태로 파악하기 곤란하다.
자신이나 다른 이에서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넣고 빼고 할 방안이 없다.
사정은 그렇다.
그래도 현실에서 각 주체가 경험하는 현실내용을 검토해 이를 시설하게 된다.
즉, 그런 제 1 식 등이 있다고 시설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을 현실 내용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끝내 그런 내용을 찾아 내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처음 시설해 제시하는 제 1 식부터 결국 말뿐인 희론적 내용으로 그치게 된다.
마음은 그 주체가 어차피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 표현을 대하는 이는 무언가가 없다고 하는 상태와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런 상태에서 무조건 명칭만 만들어 붙이면 그런 마음이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온갖 허무하고 엉뚱한 내용도 다 그런 형태로 시설해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경전 등에서 제시하는 식들은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런 식들을 하나하나 시설해 제시하게 되는 그 배경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제 1 식 등을 시설하는 사정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내용이 있다.
이들 현실 내용은 각 주체가 눈으로도 보거나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전후로 살펴보니
제 1 식등이 없다고 하면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처음 이렇게 가정한다.
마치 사진기 형태로 각 주체가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즉 외부물질과 내부 육체 물질요소가 서로 관계하여 변화한다.
호수에 돌을 하나 던진다. 그러자 이후 파장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 파장이 끝내 호수가에 닿는다.
나무 조각을 연이어 도미노 형태로 쌓아 놓는다 . 그리고 하나를 쓰러뜨린다. 그러자 옆 조각이 연이어 쓰러진다.
이런 형태로 마음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진기가 화면을 나타나게 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빛 => 전기의 전류 => 화소의 변화
사진기 화면이란 이런 물질간의 자극 - 반응의 관계로 화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단순히 이런 관계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오늘날도 일부 생리학자들의 입장이 이와 같다.
어떤 물체 => 빛이 닿아 반사하는 파장 => 망막의 변화 -> 시신경의 화학적 변화 => 도미노현상으로 연이은 변화 => 뇌세포의 흥분
이런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별도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따로 시설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이 상황에 마음이 있어야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위 내용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실을 찾아내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위 관계만으로 그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하자. .
그런데 그 현상은 마음을 전제하면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설명 그 마음을 직접 보지는 못해도 이런 사정으로 그런 마음이 있다고 시설하는 것이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그런 내용을 찾아내야 한다.
처음과 같이 어떤 이가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주장이 잘못임을 제시하려면 다음을 하나하나 현실에서 밝혀야 한다.
우선 생리학자 주장과 같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두 경우를 비교한다.
이 두 경우는 현실적으로 외관상 물질적으로나 육체적 상황이 같다.
그래서 생리학자 주장이 맞다면 이 두 경우에서 각 주체는 차별없이 일정한 내용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단순히 사진기 형태로 어떤 변화가 일정 부분에 있다는 주장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차이를 설명하려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별개 요소로 마음을 시설해야 한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찾아지기에 경전 등에서 제 1 식을 처음에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다.
『수능엄경』과 같은 경전에서 그 사정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종을 두드려 울린다. 종소리가 난다. 이것만으로 어떤 주체가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자.
이는 생리학자가 이해하는 방식과 같다.
그런데 현실을 검토해보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 현실 외부에 차이가 없다.
그리고 각 주체들마다 귀도 다 정상적으로 있고 평소 작동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떤 이는 소리를 듣고 어떤 이는 듣지 못한다.
그런데 이 차이는 무엇때문인가.
이런 형태로 처음 주장이 현실에 들어 맞지 않음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또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오히려 처음 생리학자의 주장이 그대로 적절한 것으로 해야 한다.
눈이 관계해 내용을 얻는 경우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빛이 있고 앞에 사물도 있고 눈도 있다.
한편 각 부분도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런 사정만으로 무언가를 보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각 주체마다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놓고 각 주체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또 살펴야 한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거나 잠을 자거나, 의식을 잃거나
또는 깊은 정려 수행을 하거나 기타 각 경우를 하나하나 놓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들 각 경우도 육체 상황이 별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이후 이들이 다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만일 위 상태가 아예 다르다면 또 별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푸줏간에 놓여진 동물의 사체를 놓고 실험하는 것은 이와는 다르다.
그런데 어떤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직전 직후는 육체 상황에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그 직전과 육체조건만 같게 되면 다시 그 주체가 보고 듣고 하게 되는가도 또 검토해야 한다.
생리학자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고집하면 그런 것도 가능하다고 할만하다.
심지어 그런 조건이 되면 현실에서 무조건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른 이의 뇌를 잘라서 보면 한 부분에는 자신이 보는 영상이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생리학자의 주장이 맞다면 이런 경우 모두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단순히 그런 것만으로는 눈을 통해 내용을 얻는 현상에 대해 설명이 곤란하다.
그런 가운데 현실을 검토해보면 생리학자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제 1 식등을 따로 시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배경사정을 설령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한 주체의 마음은 그 마음 자체를 얻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어려움은 남게 된다.
그래도 위와 같은 배경 사정을 파악함으로써,
현실에서 그런 마음이 있다고 시설하게 된다.
그리고 한 주체가 감각해 현실 내용을 얻는 것은
결국 그런 마음이 관여하여 얻는 것이라고 제시하게 된다.
나머지 식도 사정이 같다.
그런 사정도 없이 그저 명칭만 나열하면 그 때마다 그런 특수한 식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 마음을 12345678 식등으로 나눠 시설하는 배경사정
그런데 여기에 다시 다음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처음 그렇게 하나의 식을 시설해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왜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별개의 1,2,3,4,5,6,7,8 등의 식을 시설하는가를 또 살펴야 한다.
『종경록』에서도 그런 문제를 검토한다.
예를 들어 다음 부분이다.
...
또 어째서 자세함과 간략함 따위의 모든 식을 해설하는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다.
처음 앞과 같은 사정으로 하나의 식을 있다고 시설하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처음 그 식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하는 일체 내용을 다 담당해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분별도 하고 내용을 저장 보관하는 일을 모두 다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즉 그렇게 일일히 1,2,3,4,5,6,7,8 식으로 나누지 않아도 된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나눠야 하는가 그 사정을 또 살펴야 한다.
처음 눈이 보는 것과 소리를 듣는 내용을 놓고 보면 그 특성이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단순히 그런 사정으로 제 1식 제 2 식을 구분했다고 하자.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51 가지 심소를 나열한다.
그것은 그 각각이 그렇게 구분할 특성이 다른 것으로 각기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각각마다 별도의 식을 배당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또 아니다.
즉,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단순히 특성이 다르다고 각 경우마다 식을 나눠 시설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식을 시설한다면 다음처럼 수많은 식을 따로 세워야 한다.
...
이런 감각 내용을 대하지도 않고 홀로 갑자기 생각을 떠올리는 독영분별식
이런 감각을 하는 가운데 좋고 나쁨의 느낌을 얻는 느낌식
꿈을 꾸는데 관여하는 몽중의식.
정려과정에서 기능하는 정려식
이런 형태로 수없이 세워야 한다.
색상을 얻는 부분이 있다.
이 경우 색상을 구분하면 2만 개 이상의 색상을 구분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2 만개 다른 색상마다 별도의 식을 세워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왜 그런가를 또 검토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먼저 식을 1,2,3,4,5,6,7,8 로 나눠 배열하는 배경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을 현실 경험과 관련시켜 하나하나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해도 정작 그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은 매 경우 직접 보거나 만질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배경사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각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사변적 선험적 희론만 나열하고 그치는 상태가 된다.
보지도 못한다. 만지지도 못한다.
그런 가운데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벌거숭이 임금님이 입은 두 투명옷이
이 부분이 기능이 많고 저 부분이 안 좋다.
이런 식으로 희론을 진행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런 내용부터 기초적으로 잘 검토하고 살펴야 한다.
이 경우에도 다양한 문제가 있다.
● 마음은 마음만으로 자체분열해 내용을 얻는가. 또는 마음이 상대하는 대상은 오로지 마음뿐인가 문제
단순하게 감각에 관여하는 식과 분별에 관여하는 식을 놓고 살펴보자.
먼저 분별에 관여하는 제 6 식을 놓고 살펴보자.
분별을 단순히 분별내용을 스스로 떠올려서 다시 분별하기도 한다.
한편 분별은 어떤 경우에는 감각내용을 얻는 가운데 동시에 이 내용을 대상으로 놓고 분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는 하나의 식이 다른 식내용을 대상으로 내용을 일으켜 얻는 경우가 된다.
그런데 처음 감각에 관여하는 식도 사정이 그런가를 또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현실에서 옆에 철수를 놓고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이는 1이라는 관찰자가 눈을 떠 얻는 내용을 대강 표시한 것이다.
이 상황에 옆에 철수가 있다.
그래서 철수에게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경험하는가를 보고하게 한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철수가 눈을 뜨면 보인다고 보고한다.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 관찰자 1 입장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우선 그런 변화는 2 와 같은 철수 영역안의 일이라고 추정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철수가 무언가를 본다는 과정을 검토하면
그것이 철수 안 영역에서의 마음 내용을 놓고 무언가를 얻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철수를 놓고 화분을 치우거나 가리거나 할 때마다 다른 보고를 한다.
또 예를 들어 철수 눈을 수저로 가리거나 치우거나 할 때마다 다른 보고를 한다.
이런 사정으로 철수는 철수 영역 밖의 내용과 관계해서 무언가를 보게 되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즉 철수는 철수 영역 '밖'에 있는 어떤 사물을 대상으로 철수 영역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이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상황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한편 한 주체가 얻는 일체는 모두 마음뿐이고 그 마음내용에는 그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본래 없다고 제시한다.
이것이 유식론에서 내세우는 유식무경설이다.
그런데 이 유식무경설을 극단으로 치우쳐 이해해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러면 위 내용을 다음 처럼 이해하게 된다.
즉 한 주체의 마음 밖에는 일체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 내용은 오로지 자신 마음을 바탕으로 마음이 자체 분열해 내용을 얻는다고도 이해하게 된다.
또는 마음은 자신 마음안 다른 식의 내용을 대상으로 내용을 얻는다고도 설명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앞의 경우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철수의 근본 식안의 들어 있는 종자가
무언가 계기로 싹을 터서 눈을 통해 보는 식안에 내용을 얻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게도 된다.
그러나 이는 극단적 입장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한편, 근본정신으로서 제 8 식을 세울 때 어떤 내용을 이에 보관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시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보관 저장되는 내용은 제한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통해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그리고 눈을 감았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직전에 본 내용이 마음 어딘가에 그대로 보관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다음 순간에 꺼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마음 내용 가운데에서는 경험한 내용을 저장했다가 다음 순간에 되살려 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들을 우선 서로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저장될 수 있는 형태는 업과 명언이라고 일단 시설하게 된다.
이는 그런 내용이 보관되고 저장되고 다시 꺼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감각현실처럼 그런 형태로 저장될 수 없는 내용도 매 순간 얻는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마음안에서의 현상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것도 그런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경우 눈을 떠 보는 무언가를 보는 것은 근본식에 저장된 종자를 바탕으로 얻게 된다고 설명하게도 된다.
그래서 매 순간 근본식에 저장된 종자가 싹이 터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를 설명하게도 된다.
아니면 눈이 매순간 대하는 것은 외부 대상이 아니고 그런 식의 어떤 내용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여하튼 한 주체의 마음은 오로지 자신 마음안의 내용들로만 내용을 얻는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현실의 각 내용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예를 들어 철수가 다가와 자신이 전혀 겅험하지 못한 내용을 보고한다고 하자.
프랑스에 갔더니 에펠탑이 있다.
그런데 그 옆에 어떤 이가 다시 이상한 조각품을 만들었다.
이런 내용을 보고한다고 하자.
그리고 사과를 하나 자신에게 건넨다.
이런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 곤란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건물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눈으로 본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을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이 다 함께 본다.
또 지금 아니지만 앞으로 이 건물 앞을 지나가는 이가 당분간 다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이나 마음안에 보관된 내용만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와 같은 입장에서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이 '공종자'라는 표현이다.
이는 수많은 사람이 같이 대하는 내용도 오로지 자신의 마음안에 보관된 종자라는 의미다.
단지 그런 한 주체의 마음안 종자가 어떤 사정으로던 철수나 영희의 마음안 내용과도 서로 같을 뿐이다.
이렇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건물을 하나 부수고 거리에 새로 세우는 경우
이 건물앞을 앞으로 지나갈 이들의 마음안에
미리 모두 그런 공종자를 심어 놓거나 변경시켜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설명해야만 현실 일체를 끝내 오로지 자신 마음안'만'의 요소들로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입장이다.
위 그림과 같은 상황을 놓고 다시 살펴보자.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철수의 마음이 마음안에서 일으킨 변화라고 하자.
그렇게 놓고서 위 현상을 살펴본다고 하자.
그렇다면 관찰자 1은 왜 그런 과정을 위처럼 보게 되는가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현실에서 한 사람이 건물을 수리하거나 어떤 사물외관을 변경시키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것을 그 주체안에 들어 있는 공종자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일단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건물을 수리하는 일은 이것을 변경시킨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지켜보는 철수는 그 때마다 그런 내용을 보게 되고 또 그 사정을 보고한다.
이는 철수 영역 밖의 내용이고 자신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가.
자신이 자신 마음 내용 가운데 공종자 부분을 변경시켜서 그렇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신이 철수 영역 밖의 사물을 변경시킬 때 그로 인해 매번 철수 마음안 공종자가 변화하게 된다고 해야 한다.
또 온 세상의 마음안 종자도 다 함께 변화하게 된다고 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앞으로 그 사물을 대할 이만은 다 함께 변화하게 된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건물 외관을 바꾼 것을 같이 대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한 주체가 얻게 되는 결과로서 내용물 자체는 마음안 내용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나아가면 이처럼 지나친 주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실 각 경우를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은 오로지 마음 밖 무언가를 외부 대상으로 해서만 내용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나치다.
분별에 관여하는 마음은 또 사정이 이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안 내용을 살피면
다음 순간으로 보관 저장되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내용도 있다.
그래서 이런 현실 내용을 놓고 추후 살펴야 할 문제가 많다.
한편 마음이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마음이 관계하지 않고 마음 밖에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은 무언가가 문제된다.
이것이 실상이나 실재와 관련된 문제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이 관계한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이런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한다.
그래서 실재가 무언가 문제되면 마음은 이를 끝내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불가득 공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어떤 것을 근본적 마음이라고 시설한 다음
그것만은 위와 같이 문제삼는 실재를 그대로 얻어 확보한다고 하자.
마음과의 관계를 떠난 그 무엇을 찾는 가운데 어떤 마음만은 그대로 그 내용을 얻는다고 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한다.
그것은 그 마음을 떠나서도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 마음을 시설해 제시할 수 있는가를 놓고 또 검토해야 한다.
이는 또 다음 문제와도 관련된다.
● 마음이 상대하는 대상과 마음이 얻어낸 결과물의 일치여부
현실에서 특이한 차를 한 잔 마신다고 하자.
이 때 그 맛을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대상으로 해서 분별하고 언설로 기술한다고 하자.
어떻게 분별하고 기술해야 처음 본 그 감각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얻을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세하게 언설로 기술하고 관념분별을 세세하게 해도
그런 내용은 처음의 감각현실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상대해 일으킨 분별내용을 놓고 보자.
이 경우 그 분별내용이 그가 상대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분별 내용은 끝내 감각현실과 일치하게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를 실험할 수 있다.
자신이 영희를 보지 않고고 영희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이 내용을 스스로 잘 붙잡아 확보해 보자.
그런 가운데 이 내용 안에 현실에서 직접 눈을 떠 대하는 영희의 모습이
단 한 부분이라고 찾아지고 얻어지는가를 검토해보자.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관념내용은 감각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각현실에 대해 그것이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해
관념영역에서 감각현실 그대로를 얻어내야 한다고 고집하면
끝내 그런 상태를 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감각을 통해 얻는 차 맛에 대해 아무리 분별해도 그것은 차맛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일체 분별을 아예 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있다고 하자.
그래서 분별 영역에서 아무 내용도 얻지 않는 상태로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다시 그 상태가 문제삼는 차맛의 상태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이 경우는 엉뚱한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곧 그 차맛이라고 잘못 고집하는 현상만 없는 것 뿐이다.
이 사정을 잘 놓고 문제되는 실재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어떤 이가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래서 마음으로 그 내용을 그대로 확보해 얻어내려고 한다고 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은 그 실재를 그대로 직접 얻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앞의 문제와 성격이 비슷하다.
근본 정신은 그런데 이처럼 문제되는 실재를 그대로 확보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보자.
우선 근본 정신은 현실에서 스스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처음 눈이 관계하는 제 1 식 안식의 경우에서부터 그렇다.
그래도 그것을 제 8 식이라고 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제 1 식과 유사한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래도 그것이 무언가 내용을 얻기 때문에 식이라고 명칭을 붙여 시설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정작 제 8 식이 얻는 내용을 스스로 파악하기 곤란하다.
다만 현실의 여타 경험을 통해서 그런 제 8 식을 시설해야 할 사정을 파악하는 것 뿐이다.
그런 가운데 여하튼 제 8 식을 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삼는 실재는 이런 마음과 관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제 8 식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그 안에 이런 실재를 그대로 일치하게 담아 얻는 상태가 될 것인가.
이것을 또 살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 해도 각 마음은 실재를 떠나 따로 있다고 할 내용은 아니다.
비유하면 마치 거울과 거울면에 비추어진 모습과 비슷하다.
처음 마음을 통해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본 바탕의 내용을 찾는다.
그리고 이것을 실재라고 칭한다.
그런데 마음은 그런 실재를 본래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또 마음은 끝내 문제삼는 그 실재를 있는 그대로 확보해 낼 수도 없다.
그래서 이 실재와 마음의 관계를 다시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마음이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것만으로도 문제삼는 실재와는 거리가 있게 된다.
그렇다고 마음안 내용을 다 비운다고 해서
문제삼는 실재 그대로가 그 안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또 한편 이 어느 경우나 그 마음은 본래 문제삼는 실재를 떠나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이들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 마음이 자신 이외의 다른 주체의 마음을 별개로 시설해 제시하는 배경사정
또 다음 내용도 문제된다.
눈이 관계해 내용을 얻는 마음을 처음 제 1 식으로 시설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안 식은 마음 밖의 외부대상과 관계해 내용을 얻는다고 해보자.
처음 1 이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검토하면 그처럼 이해하게 된다.
철수는 '철수 영역 밖의 내용'을 상대해 어떤 내용을 '철수 영역안에서' 얻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철수의 마음이 관여하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하는 그 일체 내용은 사실은 관찰자 1이 눈을 통해 본 내용들이다.
그리고 정작 철수는 관찰자 1이 마음안 내용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철수 자체도 관찰자 1의 마음안의 한 부분도 아니다.
그래서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1의 마음의 한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을 상대해 무언가를 얻는 상태가 아니다.
다만 관찰자 1의 입장에서는 그 마음안에서 철수가 무언가를 보는 상황을 그처럼 보게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혼동하면 안 된다.
즉 관찰자 1 자신은 철수가 보는 과정을 그렇게 파악한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안 각 부분들이 그렇게 서로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그런 내용을 그렇게 보고 얻게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관찰 내용을 바탕으로 관찰자 마음 밖에 별개로 철수가 있다고 시설하게 된다.
또 철수의 마음도 있다고 또 그처럼 따로 있다고 시설하게 된다.
이 내용이 『종경록』에서도 제시된다.
‘그대는 구쇄해골을 자세히 살피어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알게 하며 분별하고 결단하여 의심으로 걸림이 없게 하라.’
그때,
미륵보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금강칠보신장(金剛七寶神杖)을 집고 구쇄해골을 들고는
그 해골의 음성을 들으며 이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사람은 죽으면 성냄의 번뇌가 많은지라 식(識)은 용(龍) 안에 떨어지겠으며,
(다시 다른 뼈를 휘저으면서) 이 사람의 전생 몸은 10적(跡)의 행을 갖춘지라 천상에 가 나겠으며, ◂
‘그대는 부처의 지위를 계승하여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어 위없는 도를 이룰 터인데,
어째서 사리를 휘저어 보면서도 식의 처소를 모르는가.’ ◂
...
해골을 놓고 미륵보살에게 어떤 해골은 지금 어느 세계에 가서 있는가
이런 것을 묻는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보는 해골 모습 자체는 미륵보살의 마음안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이를 바탕으로 미륵보살 마음 밖에 그 해골의 주인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본 내용은 부처님 마음안 내용이다.
그러나 해골 주인의 위치를 찾을 때는 부처님 마음 밖에서 찾는 것이다.
미륵보살님이 부처님 모습을 본다고 하자.
이 경우 그 부처님이 미륵보살님 마음 안에 보인다.
그렇다고 부처님 자체가 미륵보살님 마음안 한 부분ㅇ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미륵보살님 마음 한 부분을 부처님이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이 두분이 서로 한 내용을 같이 대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이 상황을 이해할 때 다음처럼 이해한다고 하자.
이 경우 제각각 자신의 마음안 내용을 붙들고 이처럼 대화를 나누는 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주체와 같은 내용을 붙들고 대화를 한 것도 아니다.
제각각 자신 마음안 내용을 갖고 대화한 것이 된다.
심지어 그 대화나 다른 주체도 그 주체의 마음 안 내용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오로지 혼자서만 그런 활동을 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의 해골을 가지고 두 사람이 살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황에서 그 해골이 누구의 마음안에 들어 있는 해골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이것이 미륵보살의 마음안에 있는 해골이라고 하자.
그러면 부처님은 다른 주체의 마음안에 있는 해골을 붙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면 그 해골의 주인의 위치도 오로지 미륵보살 마음안에서만 찾아야 할 것이다.
또 그 반대로 부처님의 마음안에 있는 해골이라고 하자,.
그러면 미륵보살은 자신 마음 밖에 있다고 할 부처님 마음 안의 해골을 붙잡고 이야기한 것이 된다.
그러면 그 경우 그 해골을 있다고 본 그 부처님 마음 안 문제일 뿐이다.
또는 제각각 마음안 내용이지만 어떤 사정으로 그 내용이 같을 뿐이라고 하자.
이는 제 8 식안에 있다고 설정하는 공종자 관념과 내용이 엇비슷하다.
이런 경우 제각각 자신 마음안 내용을 붙들고 살핀다.
단지 그 내용이 다른 주체 마음안 내용과 어떤 사정으로 내용이 같은 것 뿐이다.
그런데 이 경우 우선 자신 마음밖의 내용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기에 이런 사정을 파악하는가부터 문제된다.
즉 어떻게 다른 주체 마음안 내용을 확보하는가.
그래서 그것이 같고 다름을 파악할 수 있는가.
그런데 다른 이 마음안 내용을 확보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굳이 자신 마음안의 내용을 붙들고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경우 직접 다른 이 마음 내용을 함께 붙들고 살펴도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 경우처럼 미륵보살님이 부처님 마음안의 내용을 붙들고 함께 논의해도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서로간에 주고 받는 말소리나 글도 그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본래 그것은 해골처럼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그것을 다른 주체가 건네준 자신 마음 밖 내용이라고 할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 한 주체가 대하는 일체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와 상응해 그 주체 마음 밖에 다른 내용을 시설하기가 본래 곤란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자.
그리고 심지어 각 주체간의 마음 내용에서 서로 같고 다름까지 분별할 수 있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면 굳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마음뿐이라고 전제할 수 없다.
한 주체의 마음 밖에 그런 내용이 있고 얻을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주체는 본래 그 마음 밖 내용을 끝내 못 얻는다.
그런 사정으로 마음과 관계를 떠나 있다고 할 실재를 얻지 못한다고 한다.
또 그런 사정으로 실재를 공하다고 표현한다.
사정이 그렇다고 마음밖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이는 유무 양쪽을 모두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파악한 내용이 마음 밖에 그대로 있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집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이해하면 지나치다. .
또는 그런 가운데 오로지 마음만으로 현실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나아가면 지나친 것이다.
심지어 문제삼는 공한 실재도 알고보면 그 본질이 마음이라고 하면 더 지나친다.
그렇게 임하면 현실내용부터 설명하기 곤란하게 된다.
● 마음이 마음 밖 외부와 관계하며 마음내용을 얻는다는 경우의 문제
눈을 떠 무언가 보는 과정을
마음이 마음밖 내용과 관계해 얻는다고 이해해보자.
이 경우 그런 마음만으로 곧바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마음이 있는 한 늘 내용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눈에 의존해서 어떤 것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얻는 내용이 마음안에 얻어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는 근본정신인 제 7 식이나 제 8 식을 이해할 때도 참조해야 한다.
우선 현실에서 눈이 무언가를 보고 내용을 얻고 이에 대해 제 6 식이 각 부분을 분별한다.
그런데 우선 제 6 식이 감각내용을 대할 때 무조건 이를 대하기만 하면 분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분별내용을 얻는 제 6 식과 별개로 이런 내용을 얻기도 하고 못 얻기도 하는 데
의존하는 의근을 또 이와 별개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서 내부에 제 6 식이 내용을 얻는 과정에 의존하는 식을 또 하나 시설해야 한다.
만일 이 경우 제 12345 6 식만으로 이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각 식이 한편 내용을 얻으면서 동시에 마치 안식에서 눈이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제 6 의식 안에서 전 의식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고도 설명한다.
약간 엉성하다.
또 그렇다면 제 123456 식이 있는한 제 6 식은 감각현실과 관련해 늘 내용을 얻어야 한다.
눈처럼 의존하는 근이 없이 마음만으로 내용을 얻는다면 그렇게 이해야 한다.
또 한편 이 경우 의식을 잃어 제 6 의식이 기능하지 못하다가 분별을 하게 되는 상황도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그래서 이런 123456 식과 별개의 식을 또 달리 제 7 식을 시설해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의식 분별을 잃고도 일정한 활동을 행하는 부분을 섦병하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일정한 과거 내용을 저장 보관해 꺼내는 현상이 있다.
그런 사정 때문에 별도로 제 8 식을 시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제 8 식과 제 7 식의 관계를
현실 표면에서의 감각을 담당하는 제 12345식과 제 6 식의 관계처럼 이해하게 된다.
즉 제 8 식 안의 내용을 상대해 제 7 식이 분별한다.
이런 형태로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과 배경에서 현실의 제 12345 식과 제 6 식의 표면적 관계가 나타난다고 제시한다.
즉 현실 표면에서 그런 형태로 내용을 얻는 것은 그 배경에 제 8 식과 제 7 식의 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8 식을 이해하려면 처음 제 1 식부터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제 1식은 매 순간 외부대상을 상대해 내용은 얻는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서 그 내용을 보관하지 못한다.
즉, 다음 순간에 그 직전에 얻는 내용을 되살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 제 8 식은 완전히 제 1식과 같은 형태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우선 제 8 식은 현실에서 과거에 경험한 내용의 일부가 보관 저장되어 꺼내진다는 현실에 바탕한다.
그런 사정으로 처음 이 제 8 식을 그처럼 시설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제12,3,4,5 식만 놓고 봐도 각 식이 얻는 내용이 서로 엉뚱하다.
색은 소리와 비교하면 대단히 엉뚱하다.
소리는 냄새와 비교하면 또 대단히 엉뚱하다.
그런데 감관에 의존해 각기 감각현실을 얻는 성격은 같다.
또 다음 순간에 그 내용을 다시 되실려 얻지 못하는 특성도 같다.
그래서 통상 제 12345 식을 묶어 칭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안식은 이식이 얻는 소리를 대상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은 아니다.
또 이식은 안식이 얻는 색을 대상으로 해서 무언가를 듣는 것이 아니다.
다른 식도 사정이 같다.
이런 점에서 분별을 담당하는 제 6 식과는 특성이 많이 다르다.
한편, 그런 가운데 제 8 식도 무언가를 얻기에 마음이라고 칭한다고 하자.
이들 내용이 현실에서 표면상 얻는 내용과 똑같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래도 무언가 얻어지거나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것을 직접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제 8 식안에 보관된 내용과 현실에서 표면상 얻는 내용과의 관계를 또 살펴나가야 한다.
과거에 보관된 내용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사정이 그렇기에 처음 제 8 식을 시설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현실에서 얻는 모든 일체 내용을
이 제 8 식에 근원을 찾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물론 현실 내용을 얻는데 관여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오로지 제 8 식에 보관된 내용'만'으로 현실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마음 밖 요소와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그렇게 입장을 취하면 많은 경우 설명이 곤란해진다.
처음 현실에서 얻는 일체 내용 가운데
다음 순간으로 보관될 수 있는 내용들이 제한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보거나 듣거나 하는 일체 내용이 종자형태로 보관된다고 하기 곤란하다.
즉 업이나 명언만 그런 형태로 보관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 세상 모습을 본다고 하자.
이것은 위 종자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도 앞과 같은 종자로 인해서만 얻는다고 하자.
감각현실 자체는 다음 순간으로 보관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 8 식에는 업과 명언종자만 보관된다.
그러나 그런 종자가 싹이 터서 마음에 나타날 때[현행시]는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조금 이상해진다.
업 종자와 명언종자만으로 현실에서 한 주체가 보는 감각현실도 얻게 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작 감각현실을 보관되지 못한다.
이런 설명이 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가 마음내용이다.
그런데 이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우쳐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실 내용 일체를 놓고 이를 오로지 마음만으로 설명하고 이해해야 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지나친 설명이 뒤따르게 된다.
그런 경우 제 1 식부터 외부를 상대해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하게 된다.
또 그렇다면 제 8 식을 포함해 다른 식도 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 밖에는 일체 아무 내용도 없다는 입장이 일관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무 지나친 내용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시설한 제 8 식이 업종자와 명언종자를 보관할 뿐 아니고
또 독자적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제 8 식의 자체분열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를 마치 제 1 식이 내용을 얻는 것처럼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하자.
그래서 마치 감각을 담당하는 식처럼 또 어떤 외부 대경을 상대해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만일 그렇다면 제 1식부터 처음에 설명을 달리 취해야 한다.
눈과 관련된 인식은 한편으로 보는 내용도 얻고 동시에 어떤 분별도 하고
또 심지어 과거 내용도 그처럼 보관해도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처음에 별개의 식을 따로 시설한 것이다.
즉 안식이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 내용을 통해서 안식을 시설했다.
그런 가운데 그런 내용을 얻는데 동원된 안식은 다른 소리나 냄새를 얻는다고 하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별개 식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제 8 식에 가서는 그것이 다 가능하다고 하자.
그러면서 과거 내용은 과거 내용대로 종자로 보관도 한다.
그런데 또 제 8 식이 어떤 내용을 얻고 못 얻는데는 눈과 같은 별도 근에도 의존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늘 제 8 식 외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해 무언가를 얻는다고 해야 한다.
다른 것을 의존할 필요가 없이 내용을 곧바로 얻는다고 시설한다면 그렇다.
그렇다면 또 그 내용을 현실에서 살아가는 각 주체가 매순간 확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표면상 얻는 내용때문에 장애가 되어서 잘 확인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부분을 파악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마음을 직접 보지도 못한다. 만지지도 못한다.
그런 가운데 사변적으로 온갖 주장을 이런 형태로 펼쳐나가기 쉽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그 주장으로 현실의 각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 간에 자체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지나치게 나아가 임하면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여하튼 이런 여러 입장들을 놓고
현실 각 경우와 대조해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단 다음 경우를 이와 함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마음을 ○ 라고 표시해보자.
마음 밖에 마음이 끝내 얻지 못하는 실재영역의 무언가를 일단 # 으로 가정적으로 표시해보자.
그런데 현실에서 철수와 영희가 사과를 하나 건네서 주고 받고 대화를 나눈다고 하자.
이 경우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제각각 자신의 마음내용이다.
사정은 그렇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각 주체의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전혀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 상황을 각 주체의 마음만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사과를 하나 건네는 상황도 그렇게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제각각 자신 마음안의 내용을 마음이 상대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자신이 다른 영희나 철수와 사과를 주고 받고 대화도 나눈다고 잘못 여기는 것이다.
설령 철수도 사과를 보고 영희도 사과를 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 상황에서 제각각 자신의 마음안에서 각 주체마다 서로 공통된 종자를 붙들고 임한 것 뿐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그렇다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종자가 같다고 하던 다르다고 하던
각 주체는 결국 자신 마음안의 내용만 붙들고 그런 상황을 대하는 상태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된다.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제각각 자신의 마음내용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각 주체의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이와는 달리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각 주체는 마음 밖의 실재를 직접 얻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재가 공하다는 표현은 본래 그런 의미다.
무엇이 있다거나 없음을 모두 떠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마음 밖에 마음이 끝내 얻지 못하는 실재영역의 무언가를 일단 # 으로 '가정적'으로 표시해보자.
그런데 그 실재의 # 에 철수의 마음 ○ 이 관계하여 그 마음안에 ▼ 내용을 얻었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실재의 # 에 영희의 마음 ○ 이 관계해도 그 마음안에 ▼ 내용을 얻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앞 현상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이 상황에서 각 주체가 얻는 것은 여전히 그 각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유식학의 본 입장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내용은 반야 중관에서 제시하는 내용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즉 한 주체가 마음에서 ▼ 를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내용은 마음 밖 영역 실재의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앞에서 실재의 무언가를 일단 #라고 표시했지만, 정작 실재는 각 주체가 직접 얻지는 못한다.
그래서 결국 # 으로 표시한 내용은 불가득 공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 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제삼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또 실재영역에서 그런 ▼은 얻을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즉 어느 입장과도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중관론』의 내용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해심밀경』이나 『유가사지론』에서 제시하는 내용과도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인들이 현실에서 서로 같은 사과를 주고 받았다고 이해하는 현실사정도 설명할 수 있다.
● 마음의 구조와 기제를 시설해 설명하는 사정
앞에서 마음과 관련된 내용을 다양하게 대강 살폈다.
이는 대단히 간략하고 불충분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대강만으로도 대단히 복잡하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몰라도 현실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내용을 살펴야 하는가가 문제될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이런 현실 내용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가 극심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또 사정이 그런 가운데
그런 고통을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만일 그런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않는다고 하자.
또 얻어도 그로 인해 일체 고통을 겪지 않는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살필 효용도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또 그러려면 생사고통의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처럼 겪게 되는 과정이나 원인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원인 단계에서부터 그것을 예방해야 한다.
또 설령 그것이 곤란해 고통에 당면하게 되더라도
그 상황에서 잘 극복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 내용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 생사고통의 정체는
사실은 각 주체가 이해하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은 그렇게 잘못 분별하고
망집을 일으켜서 상을 취하는 전제에서 전개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 떠 대하는 상황부터 문제된다.
한 주체가 그 상황에서 생사를 겪는 영희가 어디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손가락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이 처음 잘못 분별하고 상을 그렇게 잘못 취하는 현상이다.
또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도 그처럼 상을 취해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주체가 겪는 생사고통 일체는
바로 이런 바탕에서 전개되고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부분 부터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은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해갈 때만 겪게 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그 원인단계에서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취지다.
앞 부분에서 영희를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부터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
대부분 그 상황에서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의 정체에 대해 잘못 이해한다.
즉 그 부분은 자신이 대하는 외부 세계의 한 내용으로 잘못 여긴다.
또 그 부분은 자신의 감관이나 주관이 상대하는 외부 대상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또 그 부분은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마음 밖에 있고 마음과는 별개인 외부물질로 여긴다.
현실을 대하고 관찰해 보고하는 이들의 상태가 다 이와 같다.
그래서 생리학자가 어떤 이가 감각하는 과정도 그렇게 보고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자신이 대하는 각 부분은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다수가 대하는 객관적인 실재라고도 잘못 여긴다.
또 이에 준해 현실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즉, 자신은 또 위와 같은 망상분별에 바탕해 현실에서 얻는 색수상행식 가운데 일부나 그 전부를 스스로 자신이라고 잘못 여길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거꾸로 뒤집힌 전도 망상이다.
그래서 처음 확인할 것은 이 일체가 사실은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마음안 내용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위 잘못된 망상분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또 이를 위해서 마음의 구조와 그 기제를 자세히 살펴 이해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내용 가운데 일부를 붙들고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는 망상분별을 제거할 수 있다.
또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해나가는 것도 중단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런 바탕에서 과거에 쌓은 업장을 해소할 수행도 해나갈 수 있다.
그러면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설령 생사고통을 당면하게 되어도 이전과 달리 잘 극복해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망집에 바탕해 그 상황을 대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실 일체가 알고보면 그 자신 마음임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 일체가 자신 마음임을 이해하더라도
또 다음이 문제가 된다.
설령 그렇다해도 그 마음안 각 부분의 특성이 다 다르다.
즉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그 부분
또는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한 그 부분들
또 바위나 물이라고 여기고 대한 그 부분들
이런 각 부분의 특성이 다 다르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자신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사정이 그런데도 왜 그처럼 각 부분이 그렇게 특성이 다른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그렇게 특성이 다르기에 사실상 앞과 같은 망상분별을 일반적으로 일으키게 되는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이 모두 자신 마음안 내용인데도
왜 각 부분이 그처럼 다른 특성을 갖게 된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또 본래 마음내용인데도 왜 앞처럼 잘못된 망상분별을 그처럼 일으키게끔 되는 것인가.
그 사정이 무언가를 또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현실에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되는
그 배경사정을 마음의 구조나 그 기제를 하나하나 살펴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 취지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벗어날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또 자신이 그러하듯 다른 중생도 그처럼 생사고통을 잘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취지로
이런 마음의 구조나 기제를 이해하는 것이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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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4/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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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하게는 상사즉불(相似卽佛). 천태종에서 수행하는 지위인 6즉위(卽位)의 제4. 상사는 두 물건이 비슷하다는 뜻. 진정(眞正)한 오(悟)와 비슷하고, 또 성자(聖者)의 지위와 비슷함을 말함. 곧 3천 3제(諦)의 관념이 상속하고, 그 공이 쌓여 안으로 견혹(見惑)ㆍ사혹(思惑)이 먼저 다하고, 우리의 6근이 청정하여 눈으로는 3천계(界)의 안팎을 분명히 보고, 귀로는 3천계의 안팎 소리를 분명히 듣는 등의 수승한 작용이 나타나는 지위. ⇒<유사어>십신상사도<참조어>십신상사도(十信相似道)
답 후보
● 상사즉(相似卽)
색경(色境)
색신(色身)
색진(色塵)
생득선(生得善)
생법이공관(生法二空觀)
생자필멸(生者必滅)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pt op tr]
● 종경록_K1499_T201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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