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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2-25_종경록-K1499-094 본문
K1499
T2016
제9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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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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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1499-094♧
제94권
❋본문
◎[개별논의]
○ 2016_1008_140826_can_ct27
○ 2018_0419_141754_can_ar45
○ 2016_1009_160419_can_exc
○ 2020_0525_190902_can_ar29
○ 2020_0606_193725_can_ar31
○ 2018_0418_150924_can_exc
○ 2020_0525_174349_can_ar36
○ 2018_0419_140810_can_ct2
○ 2020_0606_193352_can_bw17
○ 2018_0418_123552_can_ct27
○ 2018_0419_140236_can_ct27
○ 2020_0606_125250_can_bw17
○ 2020_0606_174927_can_ct27
○ 2020_0606_174131_can_bw17
○ 2016_1008_130840_nik_ar45
○ 2020_0606_181235_can_bw17
○ 2020_0606_124238_can_ct27
○ 2018_0419_125105_can_ct27
○ 2020_0525_171855_can_ct27
○ 2020_0606_133431_can_ar6
○ 2020_0606_131422_can_ct27
宗鏡錄卷第九十四 ...
K1499
종경록 제94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대체로 앞의 장(章)에서 설명한대로 종경(宗鏡)의 큰 종지는 분명해졌다.
앞에서 비록 문답으로 의심이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믿기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으뜸 근기[上根]는 겨우 보기만 해도 단번에 총지(摠持)의 문으로 들어가겠지만,
중간 근기나 열등한 근기는 비록 본다 하더라도 오히려 의심의 땅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제 거듭, 믿는 힘이 아직 깊지 못해서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끊지 못한 이를 위하여,
다시금 대승경(大乘經) 1백 20 본(本)과 여러 조사의 어록[祖語] 1백 20본과 성현들의 문집(文集) 60 본
도합 3백 본에 있는 내밀한 말씀을 인용하여
한 불승(佛乘)의 참된 가르침을 총괄하겠다.
말하자면 하나의 글자를 들적마다 그지없는 교법의 바다를 포섭하고
하나의 이치를 세울 적마다 그지없는 참된 말씀을 거둔다고 할 것이다.
낱낱이 드러내는 종(宗)은 마치 용궁(龍宮)에서 두루 보는 것과 같고,
겹겹이 인용하는 증명은 마치 취령(鷲嶺)에서 친히 듣는 것과 같다.
널리 구름위에 잠을 자고 눈[雪]에서 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지식(善知識)에 같이 참여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오묘함을 찾는 이로 하여금 원만한 종[圓宗]에 모두 들게 하면
옛 부처의 총림(叢林)을 찾음은 마치 밝은 해에 다다른 것 같고
조사(祖師)의 문지방을 밟음은 마치 깨끗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큰 깨달음이 뚜렷해져서 곧 육안(肉眼)인데도 부처의 눈에 원만히 통하고,
의심이 탁 트여서 범부의 마음인데도 참된 마음이 나타나리니,
실제로 안다 함은 법계를 손바닥 안에서 지적한다 할 것이요 몸소 증득함은 묘한 종지를 가슴 속에서 찾는 것과 같아지리라.
대반야경(大般若經)에 이르되,
“모든 여래는 동일한 데에 계시고 제 성품은 청정하여 샘이 없는 경계[無漏界]에 속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세 세상의 모든 부처님은 10방에 머무시면서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널리 설하시되
모두 본 성품의 ≺공≻[本性空]을 부처 눈[佛眼]으로 삼지 아니함이 없나니,
해석하여 보자.
본 성품의 ≺공≻이란 곧 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인 것이니,
본 성품이 곧 제 성품의 ≺공≻이요 그대로 청정하다는 뜻이다.
이 마음은 범부와 성인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고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러한데
중생이 알지 못하므로 모든 부처님은 이를 인하여 가리켜 주시고,
함령(含靈)에게 현재 갖추어졌으므로 조사들은 이를 위해 서로가 전(傳)하나니,
그러므로 이르되,
“이것을 여의고는 따로 방편이 없다”고 한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말이나 문장으로 설하는 법은
작은 지혜의 허망한 분별이라
이 때문에 장애가 생겨서
자기의 마음을 분명히 모른다.
자기의 마음을 분명히 모르거늘
어떻게 바른 도를 알겠는가
그 뒤바뀐 생각으로 말미암아
온갖 악(惡)만 더욱 자라나느니라.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이르되,
“두 진리[二諦]와 일승(乘)의 도를 믿으면 다시는 다른 데로 나갈 데가 없나니,
이 중생은 빨리 해탈하게 되느니라”고 했다.
또 이르되,
“도(道)란 비록 색상(色像)으로써 볼 수 있거나 헤아림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작용이 있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중생의 마음도 이는 물질이 아니어서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며 거친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속박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이것은 보이는 법이 아니기는 하나 역시 이것은 존재하느니라“고 했다.
보적경(寶積經)에 이르되,
“온갖 법은 허망하여 꿈과 같나니,
생각뿐이기 때문이다”고 했고,
또 이르되,
‘스스로가 모래톱[洲渚]을 만들고 스스로가 돌아갈 데를 만들되 법이 모래톱을 만들고 법이 돌아갈 데를 만드나니 따로의 모래톱이 없고 따로의 돌아갈 데란 없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기신론(起信論)에 이르되,
“법이란 곧 중생의 마음이니라”고 했나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향하는 바 모두가 마음이거늘 어찌 돌아갈 데가 있겠는가.
스스로의 경계에 머무르는 것이요 따로의 방소(方所)는 없다.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ㆍ중간ㆍ아래라는 법과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과
진실하고 진실하지 않는 법이라고
또 다시 행하지 아니하게 되며
이것이 남자다 이것이 여자다라고
역시 분별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법을 다 얻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리니
이것을 보살행(菩薩行)이라 한다.
온갖 법이 ≺공≻하여 아무 것도 없어
언제나 머무르는 것도 없고
또한 생기거나 소멸함도 없나니
이를 지혜로운 이가 친근할 데[親近處]라 한다.
모든 법이 있다거나 없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라 하며
생김이다 생김이 아니라 하여
뒤바뀐 생각으로 분별할 적에
조용한 곳에 있게 되면서
그 마음을 닦고 껴잡게 되면
편안히 머물러서 동요하지 아니함은
마치 수미산과 같아지리라.
온갖 법은 모두
아무 것도 없다고 자세히 살피기를
마치 허공은 견고함이 없어서
생기지도 아니하고 나오지도 아니하며
동요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아서
항상 한 모양[一相]에 머무름과 같은 것을
바로 친근할 데라고 하느니라.
해석하여 보자.
만일 한 마음이 한 모양의 문에 들어가면
오히려 항상 머무름[常住]의 법조차 없거늘,
어찌 일어나거나 소멸한다는 인연이 있겠는가.
자연히 동요하지 않음은 마치 산과 같고 마음의 편안함은 마치 바다와 같으리니,
말하자면,
보살행을 하는 처소가 모든 부처님이 계신 데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의 게송에 이르되,
“법 성품[法性]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부처님들 그 안에 계신다”고 했다.
대집경(大集經)에 이르되,
“무엇을 보살이 닦는 심념처(心念處)라 하느냐 하면,
이 심성(心性)을 관하되 안 6입(入)의 마음이라고도 보지 아니하고 바깥 6입의 마음이라고도 보지 아니하며,
안팎 6입의 마음이라고도 보지 아니하고 5음(陰) 안의 마음이라고도 보지 아니하며,
18계(界) 안의 마음이라고도 보지 않느니라.
이미 그렇게 보지 않고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마음과 인연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는 것인가.
만일 마음과 인연이 다르다면 동일한 시간 동안에 두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요,
만일 마음이 곧 인연이라면 다시 자기 마음을 관할 수 없음은 마치 손가락 끝이 제 손가락 끝을 댈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마음 또한 그와 같으리라’고 한다.
이렇게 관하고 나서 마음을 보게 되면,
머무름도 없고 항상 변하거나 달라짐도 없어서 소연(所緣)의 처소가 소멸된다”고 했다.
또 이르되,
“하나의 법이거나 하나의 법의 모습이거나 하나의 법의 광명도 보지 않나니,
만일 이러한 소견이라면 이를 불법의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한다”고 했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되,
“어느 때 바가바(婆伽婆)께서 신통대광명장(神通大光明藏)에 드시어 3매(昧)를 바르게 누리시니,
모든 여래께서 빛나고 장엄하게 머물러 지키는 곳이요 모든 중생들의 청정한 본각(本覺)의 자리이며,
몸과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서 평등한 근본 자리이어서,
10방에 원만하며 둘이 아님[不二]을 따르고 둘이 아닌 경계에서 온갖 정토(淨土)에 나타내셨다”고 했다.
또 이르되,
“선남자야,
모든 중생의 갖가지 허깨비[幻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하게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나왔나니,
마치 허공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다.
허깨비 같은 허공꽃은 사라지더라도 허공의 본성은 파괴되지 않나니,
중생의 허환(虛幻)한 마음도 허깨비에 의하여 사라지나 모든 허깨비가 다 사라졌더라도 본각의 마음은 요동하지 아니한다.
허깨비에 의해 본각을 말할지라도 역시 허깨비며,
본각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역시 허깨비를 여의지 못한 것이며,
본각이 없다고 말할지라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허깨비가 사라져야 요동하지 않는 경지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모든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이 온갖 허망한 허깨비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하나니,
멀리 여의려는 마음을 굳게 집착하기 때문에 마음이 허깨비 같은 것도 또한 멀리 여의어야 하며,
허깨비를 멀리 여의었다는 생각도 멀리 여의어야 하며,
허깨비를 멀리 여의었다는 생각을 다시 멀리 여의었다는 것까지도 또한 멀리 여의어서 더 여읠 것이 없게 되면 모든 허깨비가 없어지리라.
마치 불을 구할 때에 두 개의 나무를 서로 비벼 불이 나서 나무가 다 타 없어지면 재는 날아가고 연기까지 사라지는 것처럼,
허깨비로 허깨비를 닦는 것도 이와 같아서 모든 허깨비가 비록 다한다 하더라도 아주 없어지게 되지는 않느니라.
선남자야,
허깨비인 줄 알면 곧 여의어지므로 방편을 쓸 필요가 없으며,
허깨비를 여의면 그대로가 깨닫는 것이라 점차(漸次)도 없느니라.
모든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은 이에 의해 수행해야 되리니,
그리하여야 모든 허깨비를 영원히 여의리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허깨비인 줄 알면 곧 여의어지므로 방편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함은 허깨비는 정해진 모양이 없고 제 성품이 언제나 여의고 있는지라 여읜 그대로가 ≺공≻이다.
곧 모든 범부와 성인의 더럽거나 깨끗한 만 가지 법이 모두가 허깨비와 같고 ≺공≻과 같기 때문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방편을 쓰면서 여의려고 하겠는가.
허깨비를 여의면 그대로가 깨닫는 것이라 점차도 없다고 함은,
여의게 되는 그때에 바로 온전한 큰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므로 곧 여의고 곧 깨달음이 평등하여 하나로 비추어서 벌써 앞뒤가 없거늘 어찌 점차가 있겠는가.
밀엄경(密嚴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모든 세간은
마치 더울 때의 뜨거움과 같아
모든 것이 진실한 모양이 아니어서
없는데도 허망하게 분별하느니라.
깨달음은 깨달을 바[所覺]로 인해 생기고
깨달을 바는 능히 깨달음[能覺]에 의하나니
한 가지를 여의면 두 가지가 없어지는 것은
마치 빛과 그림자와 같느니라.
헤아림과 헤아릴 바[所量]의 일은
다만 하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이렇게 하면서 분별할 뿐이니라. ◂
능히 앎[能知]과 알 바[所知]의 법은
마음에서 망녕되이 헤아릴 뿐이니
만일 알 바가 없음을 알면
능히 앎도 곧 있는 것 아니니라.
마음은 법의 제 성품이 되고
사람으로서 서두를 바라
8지(地) 가운데에 들어가면서
그는 맑고 깨끗하게 되느니라.
9지에서는 선정을 행하여
10지에서 크게 깨달음이 열리면
법의 물이 정수리에 부어지면서
세간에서 가장 높은 이 되느니라.
법신은 다함이 있음이 없어
이것이 부처의 경계인 것이니
마지막엔 마치 허공과 같듯이
심식(心識)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또 이르되,
“그때에 금강장(金剛藏)보살이 여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어진 이들이여,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쓸모 없는 의론과 훈습(熏習)으로 모든 업에 매이게 되어 끊임없이 윤회함이 마치 바다가 바람으로 인하여 모든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항상 생기고 항상 소멸하며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 하지도 않는데도 중생들은 스스로 깨닫고 알지 못하여 자기의 식을 따르면서 뭇 경계들을 나타낸다.
만일 스스로가 분명히 알면 불이 나무를 태우는 것 같아서 곧 모두가 사라져서 샘이 없는 지위[無漏位]에 들어간다.
그를 성인이라고 한다”고 했다.
능가경(楞伽經)에 이르되,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란 이 마음일 뿐이니,
갖가지 바깥의 모양은 모두가 다 없다.
저 어리석은 범부는 나쁜 소견에 집착하여 자기와 남을 속이므로 모든 법이 진실하게 머무는 곳을 분명히 볼 수가 없느니라.
대혜(大慧)야,
온갖 법이 사실대로[如實]라 함은 오직 마음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환히 통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문수(文殊)와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10방의 여래와 대보살들이 스스로 머무는 3마지(摩地)에서는 견(見)과 견의 반연[緣]과 생각하는 모양이 마치 허공꽃과 같아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견과 반연이 원래 보리(菩提)의 묘하고 깨끗하고 밝은 본체이거늘 어찌 그 가운데 이것이요 이것이 아니라 할 것이 있겠느냐.
문수야,
내가 이제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가 문수인데,
다시 이것이 문수라 할 문수가 있겠느냐,
문수가 없겠느냐.’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참말 문수이오니 이것의 문수가 없나이다.
왜냐 하면,
이것의 문수가 있다면 두 문수가 되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수가 없는 것 아니오니,
이 가운데 이것이다 아니다 할 두 가지가 없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 묘하고 밝은 견과 모든 허공과 티끌도 역시 그러하여,
본래 묘하고 밝은 위없는 보리의 깨끗하고 원만한 참 마음인데 허망하게 물질과 허공과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되었으니,
마치 둘째 달[第二月]과 같거늘 어느 것은 이것이 달이라 하고 어느 것은 달이 아니라 하겠느냐.
문수야,
하나의 달만이 참된 것이므로 그 중간에 이것이 달이다,
달이 아니다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에 견과 티끌을 보고서 갖가지로 밝히는 것을 허망한 생각이라 하나니,
그 가운데서 이것임,
이것이 아님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 참되고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으로 말미암으면 그대로 하여금 지(指)와 비지(非指)에서 능히 벗어나게 하리라’고 하셨다.”고 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이르되,
“‘출가한 사문(沙門)이란 욕심을 끊고 사랑을 버리며 자기 마음의 근원을 아는 이다.
부처의 본래 이치를 통달하고 함이 없는 법[無爲法]을 깨쳐서 안으로 얻는 바도 없고 바깥으로 얻는 바도 없다.
마음이 도(道)에 얽매이지도 않고 업(業)을 맺지도 아니하며 생각도 없고 짓는 것도 없다.
닦는 것도 아니고 증득한 것도 아니며 모든 지위를 지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가장 높게 되므로 그를 이름하여 도라고 하느니라.’
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을 보면서 무상[非常]함을 생각하고 세계를 보면서 무상함을 생각하며 신령한 깨달음[靈覺]이 곧 보리라고 보나니,
이러한 심식(心識)이라면 도를 얻음이 빠르리라’고 하셨다.”고 했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러한 중생의 마음은 실로 따로 경계가 없다.
왜냐 하면,
마음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요 진리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니라.
티끌에 물들기 때문에 3계(界)라 하고 3계라는 마음을 따로의 경계라 한다.
이 경계는 허망하여 마음을 따라 변화하여 생기므로 마음에 만일 허망이 없으면 곧 따로 경계가 없느니라.’
대력(大力)보살이 말하였다.
‘마음이 만일 깨끗한데에 있어서 모든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깨끗할 때에는 3계가 없어야 되겠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보살의 마음은 경계를 내지 아니하고 경계는 마음을 내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보게 되는 모든 경계는 보게 되는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
마음이 허깨비[幻化]가 되지 않는다면 보게 되는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대방광입여래지덕불사의경(大方廣入如來智德不思議經)에 이르되,
“모든 법의 참 모습[實相]을 모두 다 분명하게 통달하면,
제 성품의 평등함은 마치 허공과 같느니라”고 했으며,
또 이르되 “하나의 법 안에서 온갖 법을 환히 알면,
무분별지(無分別智)가 항상 앞에 나타나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하나의 법이란 바로 자기의 마음이며 이 마음은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이 되므로,
자기 심성 가운데서 온갖 법을 환히 알게 되거늘 무슨 분별이 있겠는가.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이르되,
“심히 깊은 이치란 곧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이다.
첫째가는 이치란 곧 중생의 경계[衆生界]요,
중생의 경계는 곧 여래장(如來藏)이며,
여래장은 곧 법신(法身)이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무릇 마음이란 모든 법의 총지(摠持)의 문이 되고 만유(萬有)의 진실한 성품이 되나니,
그러므로 첫째가는 이치라고 한다.
섞이고 뒤섞인 마음의 생각 때문에 중생이라 하고 이 마음의 경계가 곧 중생의 경계이다.
진여의 성품으로부터 일어나므로 여래라 하고 모자라거나 줄어짐이 없으므로 갈무리[藏]라 하며,
항하 모래만큼 공덕을 쌓고 모았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왕경(仁王經)에 이르되,
“맨 처음의 한 생각이 8만 4천의 바라밀을 완전히 갖춘다”고 했다.
집복덕삼매경(集福德三昧經)에 이르되,
“마치 유리(琉璃)의 보배 그릇은 어디에 있거나 간에 그의 성품을 잃지 않는다.
그와 같이 만일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게 되면 비록 집에 있다[在家] 하더라도 이 사람은 집을 떠난 이[出家]라고 말해야 하리니,
이 법계의 체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그러므로 마음을 깨쳐야 도(道)를 얻는 것이므로 견성(見性)하는 이것을 집을 떠난 이라고 한다.
만일 견성하게 되면 집에 있는 이라도 집을 떠난 이가 되지만,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집을 떠난 이라도 집에 있는 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阿難)이 아직 견성하기 전에는 스스로 참회하며 말하기를,
“내 몸이 비록 출가했다고는 하나 마음이 도에 들지 못하였구나”고 했다.
불지경(佛地經)에 이르되,
“청정한 법계[淸淨法界]인줄 알아야 하다는 것은,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의 갖가지 모양에 두루하기는 하나 갖가지 모양이 있다고 말로 할 수 없음은 체성이 오직 한 맛[一味]뿐이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러한 여래의 청정한 법계는 비록 갖가지 모양들의 알 바[所知] 경계에 두루 이르러 있기는 하나 갖가지 모양이 있다고 말로 할 수 없음은 체성이 오직 한 맛 뿐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청정한 법계란 곧 한 마음의 뒤섞임이 없는 법계이니,
법으로 계(界)를 삼거늘 어찌 경계가 있겠는가.
곧 온갖 물질 안에는 모두 허공의 성품이 있으므로 온갖 법 안에는 모두 안락한 성품이 있는 것에 견주나니,
이 성품을 숨겨 가리기 때문에 알 바의 경계를 따라 그 정량(情量)에 응하여 갖가지 경계가 나타나게 된다.
만일 ≺공≻으로써 밝히면 곧 ≺공≻이 있어서 나타나고 만일 물질로써 밝히면 곧 물질이 있어서 나타난다.
밝히는 것에 따르고 그것에 따라 나타날 뿐이므로 나타나게 되는 갖가지의 모두는 허망한 마음으로 생기면서 서로가 얻을 수 없나니,
한 맛 뿐인 참 마음은 잔잔하면서 동요하지 아니한다.
불공견색경(不空羂索經)에 이르되,
“진언(眞言)을 지니는 이는 마음을 마음에 두어 자기의 마음을 관(觀)하면,
모든 부처님ㆍ여래를 지으면서 아주 뛰어나게 높고 미묘함이 광대하게 나온다”고 했다.
보살지경(菩薩地經)에 이르되,
“성인의 도에 헷갈린 이는 진리의 도가 자기 마음에서 생김을 모르므로 항상 몸을 괴롭히면서 해탈하기 구할 뿐이다.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으면서 그 때리는 근본을 찾을 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대장엄론석(大莊嚴論釋)에 이르되,
“마치 사자를 때리고 쏠 때에 그 사자는 그 사람을 쫓아 오는 것과 같고,
또한 어리석은 개를 때리게 되면 그 맞은 기와나 돌을 쫓으면서 그 때린 근본을 찾을 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자란 지혜 있는 사람이 그 근본을 알고 구하면서 번뇌를 소멸시키는 데에 비유하지만,
어리석은 개란 바로 외도(外道)가 다섯 가지 열[五熱]로 몸을 지지면서 마음의 근본을 모르는 데에 비유한다.
법집경(法集經)에 이르되,
“온갖 것이 이 한 마음일 뿐임을 알면 마음의 자재함[心自在]이라 하고,
그 손바닥 안에서 모든 값진 보배들이 나오고 또한 허공으로 곳집을 삼으므로 물건의 자재함[物自在]이라 하며,
온갖 몸ㆍ입ㆍ뜻의 업(業)은 지혜로 근본을 삼으므로 지혜의 자재함[智自在]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만일 하나의 법을 받아 지니면 온갖 불법은 저절로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나이다.
왜냐 하면,
이 하나의 법이 이른바 대비(大悲)이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이것이 동체대비(同體大悲)이니,
이 자비의 성질은 모든 중생계에 두루하기 때문에 한번 뿌림에 널리 적시는 난초와 쑥이 똑같이 번성하고 한 생각으로 거둔지라 삿됨과 바름[正]이 모두 구제된다.
대관정경(大灌頂經)에 이르되,
“선정 닦는 비구는 다른 생각이 없이 하나의 법만을 지킬지니,
그런 뒤라야 진리를 보게 된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하나의 법을 종(宗)으로 삼으면 모든 티끌이 붙을 데가 없고 다른 인연이 저절로 끊어져서 묘한 성품이 환해지나니,
뜻이 하나에 돌아가야 하는데 어느 지혜인들 밝지 않겠으며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었는데 무슨 의심인들 풀리지 않겠는가.
요점을 추린 뜻[旨]이므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보운경(寶雲經)에 이르되,
“온갖 법은 마음을 우두머리로 삼나니,
만일 마음을 안다면 온갖 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부처님들께서는 마음에서 해탈을 얻나니
마음이란 때[垢]가 없어 청정하다 했고
다섯 갈래[五道] 정결해서 물들지 않나니
이를 이해하는 이 큰 도[大道]를 이루네.
해석하여 보자.
다섯 갈래는 마음에서 연유한다.
마음의 체성은 항상 청정한지라 비록 다섯 갈래를 두루한다 하더라도 그의 빛깔[色]을 받지 않으므로 다섯 갈래에 따르더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한 모양[一相]에 있는데도 오른 것 아니며 법계에 전개하는 데도 두루하지 아니하고 작은 티끌에 들어가는데도 오므라들지 않나니,
진여의 한 마음은 본 성품이 청정하여 늘거나 줄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법은 온갖 것을 능히 거두는데 마치 남상(濫觴)의 한 방울 물이 4해(海) 물의 젖는 성질과 차별이 없는 것과 같고 겨자씨 구멍 속의 허공이 10방 허공이 포용하는 것과 구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되,
“하늘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생긴다”고 했나니,
여기서는 하나를 얻음으로써 도를 얻는 것이다.
또 이르되,
“성인은 하나를 안아 천하의 법식을 삼는다”고 했나니,
곧 이 종경(宗鏡)에서는 선문(禪門)의 법식이 된다.
대방등다라니경(大方等陁羅尼經)에 이르되,
“사리불(舍利弗)이 문수(文殊)에게 물었다.
‘기(記)를 받음에는 무엇에서 구해야 합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여여(如如)한 성품 안에서 구하여야 하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여여한 성품이란 곧 모든 중생의 참 마음의 성품이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되,
“중생의 여(如)가 곧 샘[漏]이 다한 해탈의 여이니,
온갖 법이 모두 여에 들어가 체성이 없는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해탈이니 중생의 심행(心行) 중에서 구한다”고 했다.
인과경(因果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온갖 지은 선과 악은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
그러므로 참된 출가는
모두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대법구다라니경(大法炬陁羅尼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비사카(毘舍佉)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빛깔 모양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느니라.
저 심식(心識)의 경계는 뜻[意]으로만 아는 것인 줄 알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눈으로는 볼 수 없느니라.
비사카야,
모든 중생에게 있는 마음과 뜻은 말로는 할 수 없나니,
부처님의 지혜로만 아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 이르되,
“오늘 이 자리 안에 있는 수많은 대중들은 저마다 보는 것이 같지 않나니,
어떤 이는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여래께서 세간에 1겁(劫) 동안 또는 감겁(減劫)의 겁 1겁 동안 또는 한량없는 겁 동안 살고 계심을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여래의 키 한 길[丈] 여섯 자 되는 몸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작은 몸을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큰 몸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보신(報身)이 연화장(蓮華藏)세계 바다에서 천백억의 석가모니 불을 위하여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설하신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법신(法身)이 허공과 같아 분별함이 없고 모양도 없고 장애됨도 없으면서 법계에 두루하여 같아짐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곳의 산숲과 토지와 모래며 조약돌 따위를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7보(寶)를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 곳이 바로 삼세의 부처님들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라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곳이 곧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들의 경계인 진실한 법이라 보기도 했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부처는 일정한 형상이 없는데 식(識)을 따르면서 스스로가 거칠다거나 미묘하다고 분별하며,
경계는 다른 모양이 없는데 마음으로 인해서 공연히 짧다 길다 하고 보나니,
말하자면,
실제로 증득한 법문의 도리는 종경(宗鏡)으로 돌아간다 할 것이다.
여래흥현경(如來興顯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행하시는 성품과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심성(心性) 안에 있는 것이라
모양이면 모양이 같은 모양이어야 한다.
현보장경(現寶藏經)에 이르되,
“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슨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이 다 불법입니까.’ 문수가 말하였다.
‘무처님의 지혜로 깨달을 바니라.’ 또 물었다.
‘어떻게 부처님의 지혜로 깨달을 바입니까.’ 이에 대답하기를 ‘자기 마음의 여(如)를 이해하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수행자분경(修行慈分經)에 이르되,
“모든 법의 체성과 모양은 미세하여 모두 다 비고 고요하건마는,
범부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분별하여 모든 경계를 내고 스스로 분별하는 가운데서 도리어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
아직 마음의 제 성품을 분명히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꿈 속에 있는 것 같아서 망녕되이 모든 경계를 집착하는 것이니,
다시 ‘온갖 3계(界)는 모두 다 ≺공≻이라 ≺공≻은 ≺공≻을 장애하지 않는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고 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에 부처님이 신통의 힘으로
다시 변화하여 산과 성(城)을 만들어
높고 험한 백천가지 모양으로 되었나니
장엄하게 꾸며짐이 수미산(須彌山)과 대등했네.
한량없는 억(億) 개의 꽃으로 된 동상은
모두가 여러 가지 보배 숲으로 되어
향기가 널리 자욱했나니
대단한 그 향기 일찍이 맡지 못했었네.
하나하나의 보배로 된 산중에
모두가 부처님 몸 나타내어 보이시니
그 안에는 라바나(羅婆那) 야차 대중과
함께 머물러 있게 되었네.
10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는
모든 부처님의 몸에서 나타났고
부처님 제자와 야차들은
모두가 그 산으로 와 모였네.
그런데 여기 능가의 성[楞伽城]에
있게 된 모든 대중들은
제 몸이 변화된 능가성 안에
들어가 있음을 모두 보았네.
여래의 신력으로 만든 것이라
그 능가성 또한 동일하였고
모든 산과 동산 숲의
보배로 장엄된 것 또한 그러하였네.
낱낱의 산중에 계신 부처님은
다 크게 지혜로운 물음이 있으셨고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몸 속에서 증득하신 법을 말씀하셨네.
백천 가지의 미묘한 음성 내어
이 경법을 말씀하고 나시자
부처님과 그리고 부처님 제자들은
모두 다 사라져 없어져버렸네.
라바나 야차는
홀연히 자기 몸을 보았더니
제가 본래 있었던 궁정에 있었고
그 밖의 물건은 다시 아니 보였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아까 보였던 것 누가 만들었으며
설법을 한 이는 그 누구였던가
이 누구에게 들은 것이며
내가 보았던 것 무슨 법이어서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인가.
저 모든 부처님 국토와
그리고 모든 여래의 몸인
이러한 모든 미묘한 일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것이 꿈에서 기억한 것일까
이것이 요술로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진실한 성(城)과 읍(邑)이었을까
건달바성(乾達婆城)으로 되었던 것일까
눈병으로 허망하게 보았던 것일까.
아지랑이로 생겼던 것일까
꿈에서 석녀(石女)가 낳은 것일까
내가 불 바퀴[火輪]를 보았던 것일까
불바퀴의 연기로 보았던 것일까
내가 보았던 것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스스로 깊이 생각하기를
모든 법의 체성은 이와 같아서
자기 마음만의 경계일 뿐이라
마음 속에서 증득하여 알리라.
그런데도 모든 범부 무리들은
무명에 가리고 막히게 되어
허망하게 마음으로 분별하면서
능히 깨닫거나 알지 못한다.
능히 보는 것[能見]과 그리고 볼 바[所見]는
모두 다 얻을 수 없으며
설하는 이[說者]와 그리고 설할 바[所說]의
이러한 따위도 역시 없는 것이다.
부처님 법의 진실한 체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법의 모양은 한결같이 이러한데
자기 마음만으로 분별할 뿐이다.
물건을 보고서 진실이라 여긴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뵙지 못하리니
분별하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아도
역시 부처님을 뵈올 수 없네.
모든 행(行)이 있음을 보지 않으면
이러한 이를 부처라 하지만
만일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여래를 뵙게 되리라.
온갖 모든 경계를
지혜로운 이로서 이렇게 관찰하면
몸을 바꾸어 묘한 몸 얻으리니
그 분을 바로 불ㆍ보살이라 한다.
허공잉보살경(虛空孕菩薩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온갖 모든 법의 모양은
진실하여 아는 이 없나니
만일 사람이 5음(陰)에 머무르면
여섯 감관[六根] 모두가 가리고 막힌다.
해석하여 보자.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진실하여서 앎도 없고 보는 것도 없지만 겨우 알거나 보는 것이 있어서
곧 식음(識陰)에 떨어지기만 하면
한 마음은 트이지 아니하고 여섯 감관은 어둡고 막히리니,
끝내 봄이 없는 봄[無見之見]을 보거나 앎이 없는 앎[無知之知]을 알게 되지 못한다.
만일 봄이 있는 봄[有見之見]이라면 온갖 것을 보지 못하지만 만일 앎이 없는 앎이라면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그런 까닭에,
현호경(賢護經)에 이르되,
“만일 보살이 4념처(念處)를 관하게 되면 볼 만한 법이 없고 들을 만한 소리도 없다.
듣거나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는 법도 없고 생각할 수 있는 법 역시 없다.
그러면서도,
또한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은 볼 수 없을 뿐이기 때문에
오직 한 참 마음만으로 바깥에는 법이 없음을 본다”고 했다.
보성경(寶星經)에 이르되,
“그때,
세존은 묘음범왕(妙音梵王)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무엇 때문에 눈을 잠시도 떼지 않느냐.
모양이 업는데도 나를 보는 것이냐.
선남자야,
어느 한 법이 있기에 부처라고 하느냐.
어떤 한 물건이 있기에 이름이라 한다고 해야겠느냐’고 하셨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름과 본체는 모두 ≺공≻하며 묘한 뜻은 여기에 있나니,
그러므로 보는 것을 끊어야 여래를 뵙는 것이요
있다 없다고 보면 다 이는 허망이다.
종경(宗鏡)에 들지 못했거늘 어찌 참된 부처를 말하겠는가.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에 이르되,
“모든 법은 항상 스스로 존재하건마는
중생이 통달하지 못하여 장엄(莊嚴)을 일으키지만,
법과 법이 저절로 생기고
법과 법이 저절로 소멸하며
법과 법이 생기지 않고
법과 법이 소멸하지 아니하며
법이 생기고 법이 소멸하되 성품은 이전하지 않나니,
이것이 보살 대사(大士)로서의 도(道)라 평범하고
속된 이로서는 미칠 바 아니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모든 법이 항상 스스로 존재한다 함은 참 마음은 바꾸어지지 않고 성품이나 모양이 한결같다는 것이요,
중생이 통달하지 못하여 장엄을 일으킨다고 함은
외도는 단견(斷見)을 고집하고
소승은 무상(無常)을 증득하며
보살은 범부와 소승을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으면서 항상 복된 일을 닦고 무위(無爲)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지혜의 못에 깊이 들며 광대하고 장엄한 구름으로 만행(萬行)을 일으키고 생각생각마다 열 가지 바라밀을 원만히 하면,
단견ㆍ상견(常見)을 지닌 외도의 굽은 나무를 삿된 소견의 빽빽한 숲에서 뽑아 내고,
진리에 편벽된 소승 과(果)의 난쟁이 몸을 해탈의 구덩이 밑에서 건져 올리리라.
그런 까닭에,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제7 원행지(遠行地)에서는 열 가지의 방편과 지혜로 뛰어난 도를 닦아야 하나니,
이른바 비록 ≺공≻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매를 잘 닦는다 하더라도 자비로써 중생을 버리지 아니하며,
비록 모든 부처의 평등한 법을 얻는다 하더라도 항상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즐기며 비록 공지(空智)를 관하는 문에 들었다 하더라도 복덕을 부지런히 닦고 익힌다.
비록 3계(界)를 멀리 여의었다 하더라도 3계를 장엄히 하며,
비록 마지막에는 모든 번뇌의 불길을 고요히 껐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이 일으키는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불길을 끄기 위하느니라.
비록 모든 법이 마치 요술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제 성품이 둘이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마음에 따라 업을 짓되 한량없이 차별한다.
비록 온갖 국토가 마치 허공과 같음을 안다 하더라도 청정하고 미묘한 행으로써 불국토를 장엄히 하며,
비록 모든 부처님 법신이 본 성품에는 몸이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상호(相好)로써 그 몸을 장엄히 하며,
비록 모든 부처님 음성의 성품이 ≺공≻하고 고요히 사라져서 말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따라 갖가지의 차별된 청정한 음성을 낸다.
비록 모든 부처님을 따라 세 세상이 이 한 생각 뿐임을 분명히 안다 하더라도 중생의 뜻의 앎과 분별함에 따라 갖가지의 모양과 갖가지의 시기와 갖가지 겁(劫)의 수로써 수행을 하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경에서 말씀한 “비록 ≺공≻ㆍ무상ㆍ무원의 삼매를 잘 닦는다”고 하는 것은 범부의 유(有)에 집착하고 낙(樂)을 따르는 소견을 다스리는 것이요,
“자비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2승의 ≺공≻에 빠지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소견들을 다스린다는 것이니,
아래의 모든 구절의 뜻을 다 이렇게 해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성문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연각은 자비가 없어서 둘 다 보살이 하는 두 가지 이익되는 행을 잃고 있다”고 했다.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에 이르되,
“수진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은 3해탈문(解脫門)을 좇지 않으면서 도를 구해야 합니까.’ 문수가 대답했다.
‘천자여,
≺공≻을 좇으면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고 무상(無相)에서도 도를 이룰 수 없으며 무원(無願)에서도 도를 이룰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가운데서는 마음[心]ㆍ뜻[意]ㆍ식(識)이 없어서 생각 또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니,
마음ㆍ뜻ㆍ식이 있어서 생각생각마다 움직여져야 그 도를 이루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만일 3해탈문을 취하면서 증득하려 한 이면 이는 곧 실제(實際)의 바다에 빠져서 신령한 각[靈覺]의 근원을 저버리는 것이니,
성품을 버리면서 ≺공≻을 좇는데 어찌 큰 도를 이루겠는가.
만일 곧장 심성을 신령하게 안다면 생각생각마다 보리 과위가 원만해져서 단견의 아주 없다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않거늘,
어찌 상견의 실제로 존재한다는 길을 밟겠는가.
그렇게 하며 뜻을 일으킨다면 큰 작용이 앞에 나타나서 얻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취한 것도 아니고 버린 것도 아니다.
진리로부터 행(行)을 일으키므로 체성과 작용이 서로가 거두어 행은 진리에 계합되고 말거나 펴는 것이 한 동아리리니,
말하자면 마음과 마음마다 도(道)에 합치하고 생각생각마다 진리에 명합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환원관(還原觀)에 이르되 작용[用]인 즉 파도가 뛰어오르고 바다가 끊듯 하되 온전히 참된 체성으로 운행하는 것이요 체성[體]인 즉 거울이 개끗하고 물이 맑듯하되 모두가 인연을 따르면서 고요한 데로 모여지는 것이니,
이는 곧 체성을 여의지 않는 자용이라 그 작용은 파도가 뛰어오르듯 하고 작용을 여의지 않는 체성이라 체성은 언제나 잔잔하고 고요하다.
체성이 비록 잔잔하고 고요하기는 하나 언제나 만 가지의 인연에 있고 작용이 비록 파도처럼 뛰어오르나 한결같이 한 동아리에 명합한다.
대방광사자후경(大方廣師子吼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전만(電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법은 한 글자일 뿐이니,
이른바 없다[無]는 글자니라.
본래 말로 설명할 것이 없거늘 어디서 말로 설명하겠느냐.
선남자야,
설명할 것 없는 이것이 참된 설명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때,
정신(淨身)보살이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받잡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설명할 것이 없는 것이 참된 설명이라면,
벙어리로서 말하지 않는 것도 설법이어야 하겠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선남자야,
네가 말한 대로 벙어리로서 잠잠한 것이 설법일 뿐만 아니라 벙어리 아닌 이 역시 모두가 설법이로되 법을 알지 못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모든 중생들이 설법을 하면서도 법을 모르나이까.’ ‘선남자야,
마치 나면서부터 장님이 햇빛 속에 있으면서도 해는 보지 못하는데 곁에 있는 사람이 그를 위해 다른 음성으로 말해 주어야 비로소 해가 있음을 아는 것처럼,
이러한 모든 법은 모두 법계에 들어가고 법계에는 글자가 없으며 모든 글자의 성질을 여의었으므로 모든 중생으로서는 널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자세히 알아야 한다.
아직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한 사람이 통상의 견해에 의지하여 다른 이의 말하는 것에 따라 망녕되이 말함이 있음이,
마치 저 장님이 햇빛은 보지 못하면서 곁 사람의 소리만을 듣는 것과 같거늘,
어찌 해 자체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만일 눈을 떠서 몸소 보게 된다면 곧 본래 이름이나 말이 없음을 알 것이니,
그러므로 말이 있으면 종지를 상실하여 법계를 통달하지 못한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 법계에 들어가고 법계에는 글자가 없으며 모든 글자의 성질을 여의었다”고 한 것이다.
만일 한 글자라는 것이 마음의 법계임을 깊이 통달한다면 저절로 말 길이 끊어지고 당연히 앎의 정(情)이 없어지겠거늘,
어찌 이것이 변설의 지혜가 없어서 다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마치 조론(肇論)에 이르되,
“석가(釋迦)는 마갈(摩竭)에서 방문을 닫았고 정명(淨名)은 비야(毘耶)에서 입을 막았으며,
수보리는 말이 없음을 부르짖어서 도(道)를 드러냈고 제석(帝釋)ㆍ범왕(梵王)은 들기를 거절하면서 꽃을 뿌렸다”고 함과 같나니,
이렇다면,
진리는 신령이 타는 수레[神御]가 되나 입으로써는 잠잠하고 있거늘 어찌 변설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 변설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 결호의품(決狐疑品)에서 이르되,
“이에 아사세왕(阿闍世王)이 말하였다.
‘원컨대,
유수(濡首)여,
저의 의심을 풀어 주소서.’ 유수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의심하고 계신 것은 항하 모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왕은 구호받지 못할 것을 알고는 걸상에서 떨어졌다.
마치 큰 나무가 부러지면서 땅으로 쓰러지는 것과 같았다.
대가섭(大迦葉)이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편안하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유수 동진(童眞)께서는 큰 지혜의 갑옷을 입은지라 좋은 권도 방편으로 이런 말을 하시기 때문이니,
서서히 물으십시오.’
그때에 왕은 곧 일어나서는 유수에게 물었다.
≺아까 말씀하시기를,
항하 모래만큼 많은 부처님도 저를 위해서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수가 대답하였다.
‘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먼지와 어둠과 재와 연기와 구름과 안개로 허공을 더럽힐 수가 있다≻고 한다면,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 유수는 또 물었다.
‘설령,
대왕께서 이 허공을 가져다가 씻어서 깨끗하게 하겠다≻고 한다 하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깨끗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유수가 말하였다.
‘이 때문에,
아까 ≺항하 모래만큼 많은 부처님ㆍ세존이라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모든 중생들은 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인 줄 모르기 때문에 망녕되이 더럽다ㆍ깨끗하다ㆍ헷갈렸다ㆍ깨쳤다고 하는 생각을 내어 스스로 몰락하고 드디어는 의심없는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고 결단할 것이 없는 가운데서 결단하기를 구한다.
만일 진실로 알게 되면 탁 트이면서 뜻이 녹아 이내 온갖 더럽거나 깨끗한 모든 법이 모두 허공의 성품과 같다는 것을 보리니,
이미 허공의 성품이 더럽히거나 깨끗이 할 수가 없다는 것을 통달한지라 비로소 본래의 마음이 일찍이 헷갈렸거나 깨쳤던 일이 없음을 깨치게 된다.
설령 생김이 없고 얻음이 없는 도리를 말한다 하여도 그것은 다 한 동안의 근기 따라 쓰는 방편인 것이다.
만일 종경(宗鏡)에 들어가서 묘한 뜻이 환히 밝아지면 오히려 의심하거나 의심이 없다는 것조차도 없거늘,
어찌 해결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품겠는가.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계집아이가
밤에 자다 꿈에서 아이를 낳고는
살게 되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마치 사람이 술을 먹고 취했을 땐
땅이 모두 빙빙 돎을 보게 되지만
그 실은 일찍이 땅이 동요된 일 없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마치 깨끗한 허공에 뜬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에 나타날 적엔
그 달이 물 속에 들어간 것 아니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마치 사람이 제 혼자 기뻐하며
거울을 잡고서 얼굴을 비출 때
거울 속의 그 형상은 얻을 수 없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마치 사람이 산골짜기에 있으면서
노래하고 울고 웃고 말하는 메아리를
그 소리를 그대로는 들을 수 없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해석하여 보자.
미치고 취하고 보고 듣고 하는 일이 어찌하여 진실이겠는가.
정신이 흐리거나 꿈을 꾸는 경계에서 근심하거나 기뻐하는 것은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니,
거울 속의 형상이 누구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며 골짜기의 메아리가 무엇에서 일어나 온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입능가경(入楞伽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능가왕(楞伽王)에 게 말씀하셨다.
‘마치 어떤 사람이 물속과 거울 속에서는 자기의 형상을 보고 등불과 달이 있는 데서는 자기의 그림자를 보며,
산 골짜기에서는 스스로가 메아리를 듣고는 문득 분별하면서 취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듯이,
이것 또한 그와 같다.
법과 법이 아닌 것은 분별일 뿐인데,
분별 때문에 버리거나 여의지 못하여 다시 더욱 온갖 허망만을 자라게 할 뿐 적멸(寂滅)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나니,
적멸이란 이른바 한 마음이요,
한 마음이란 바로 가장 훌륭한 3매(昧)이다.
이것에서부터 스스로 거룩한 지혜를 내는 것이니,
여래장(如來藏)으로써 경계를 삼는다.
법왕경(法王經)에 이르되,
“모든 법 가운데서 만일 높다 낮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삿된 설명인 것이라 그 입을 부셔야 하고 그 혀를 찢어야 한다.
왜냐 하면,
모든 중생은 마음에 때가 끼면 동일하게 때가 끼고 마음이 깨끗하면 동일하게 깨끗하다.
중생이 만일 병들면 동일하게 병이 들고 중생이 약을 구하면 동일한 약을 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많음을 말한다면 그것을 뒤바뀐 것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허망한 분별로 선악의 법을 분석하여 온갖 법을 파괴하기 때문이요,
근기 따라 법을 설하여 불도를 끊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동일한 병이라 하나의 약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마음으로 병이 되었으면 하나의 마음으로 약이 되는 것이니,
마음이 생기면 법이 생기고 마음이 소멸하면 법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많음을 말한다면 그것을 뒤바뀐 것이라고 한다는 것은,
만일 자기 마음을 살펴보면 오히려 하나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많은 것을 말하겠는가.
마음 밖에서 법을 본다면 그대로가 뒤바뀐 것이다.
마치 미친 마음으로는 귀신을 보고 병든 눈으로는 꽃을 보며 없는 가운데서는 있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거늘,
어찌 진정(眞正)한 것이 되겠는가.
근기 따라 법을 설하여 불도를 끊는다고 함은,
그 사람의 근기가 있다고 고집하면 벌써 큰 뜻에 어긋난 것이다.
다시 법이 많다는 것을 설한다면 실로 바른 종[正宗]을 깨뜨리는 것이다.
마치 법화경(法華經)에 이르되,
“만일 법을 깊이 사랑하는 이라면 역시 많다고 설명하지 않나니,
마음의 법은 매우 깊어서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다.
이미 많다고 설명할 수 없는지라 적다고도 설명할 수 없다.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하지도 아니하고 적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덜어내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않기 때문에 생기지도 아니하고,
덜어내지도 않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아니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온갖 법은 생기지도 아니하고
온갖 법은 소멸하지도 않나니
만일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늘 앞에 나타난다.
또 약왕(藥王) 보살이 이르되,
“내가 두 팔을 버리면 반드시 부처님의 금빛 몸으로 되리라”고 했다.
두 팔 그것은 곧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의 두 가지 법이다.
만일 생멸과 단견ㆍ상견을 버린다면
반드시 부처님이 앞에 나타나서 단번에 부처의 몸이 될 것이므로,
“반드시 부처님의 금빛 몸으로 되리라”고 한 것이다.
무애제총지경(無涯際總持經)에 이르되,
“한 생각 동안 삼세의 모든 법이 다 평등하다는 것을 알면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그 사람은 마침내 다른 행(行)도 없고 다른 마음도 없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무애제총지경이란 것은,
그 이름으로 종(宗)을 드러낸 것으로서 참 마음은 끝이없어서[無際]만법을 한데
지니게[摠持] 되며 하나의 본체로 거두어 돌아가기 때문에 평등[平等]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통달한 사람은 마침내 다른 행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 밖에는 차별이 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다른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 속에서 생각을 일으킬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화엄경(華嚴經)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되,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하게 될 때에,
눈으로는 마침내 깨끗하지 못한 부처님 세계가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다른 모양의 중생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하나니,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기 때문이다”고 했다.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에 이르되,
“모든 중생은 모양이 없고 모두가 법계와 같아서
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님을 잘 안다.
왜냐 하면,
법계 그것은 곧 모든 중생의 마음 경계이기 때문이니,
이것을 신행(信行)이라고 한다”고 했다.
지세경(地世經)에 이르되,
“3계(界)는 모두가 식(識)이요 이는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일 뿐이어서
역시 형상도 없고 방소도 없으며 법의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법의 바깥에도 있지 아니한데,
범부는 허망으로 상응(相應)한 속박을 받아
식음(識陰) 가운데서 ≺나≻[我] 또는 내 것[我所]이라고 탐착을 내느니라”고 했다.
영락경(瓔珞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나 지금 있는 30억 대중들에게 금강(金剛)같은 입으로 결정된 뜻을 말하리라.
불자들아,
나의 옛날 법회(法會)에 1억 8천만의 때[垢] 묻지 않은 대사(大士)들이 있었는데,
곧 그 법회에서 한 성품의 근원을 통달하여,
단번에 둘이 없고[無二] 모든 법은 다 하나로 합쳐진 모양[一合相]임을 깨달았으므로,
그 법회에 나가서는 저마다 10방의 세계에서 이 영락(瓔珞)을 설하였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또 이르되,
“행(行)은 마음에서부터 얻어지므로
마음이 깨끗해지면 도(道)를 이룬다”고 했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되,
“성인에게는 끊는 바가 없고 범부에게는 생기는 바가 없나니,
이 두 가지는 법 성품의 평등한 모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범부에게는 마음 밖에 법이 있다고 잘못 집착하는지라
망녕되이 법의 생김을 보게 되지만
만일 성인이라면 마음 밖에는 법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므로
생길 만한 법이 없는 것이니,
범부에게는 생김이 없고
성인에게는 끊을 것이 없음을 환히 안다면
이것이 한 마음에 둘이 아닌 법문[一心不二法門]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법 성품의 평등한 모양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니,
하나의 법도 법 성품의 밖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화엄경(華嚴經)의 게송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법 성품은 온갖 곳에 두루하게 있어서
모든 중생과 국토와
3세(世)에 모두 있어 그 밖의 것 없나니
역시 형상으로 얻을 만한 것도 없네.
승적보살소해제법경(勝跡菩薩所解諸法經)에서 이르되,
“법은 한 글자일 뿐이니,
이른바 없다[無]고 하는 글자이다.
본래 말로 할 것이 없으므로,
설명이 없는 이것이 참된 설명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마음이란 한 글자 중의 왕이므로 그지 없는 교의 바다[敎海]를 모두 포섭하고,
마음이란 모든 부처 지혜의 어머니이므로 그지없는 참된 말씀[眞詮]을 널리 펴낸다.
만일 밝혀서 결정코 믿어 든다면 여래께서 늘 설법하지 않아도 이것을 두루 갖춘 다문(多聞)이라고 하나니,
역시 이는 “원하옵건대 적게 들으면서 이치를 많이 알게 하소서”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열반소(涅槃疏)에 이르되
“열반이라는 이치는 크고 왕성하여 그지없으므로
하나를 들려고 하면 모든 것을 가리고
짠 것을 지적하게 되면 바다라는 것을 말하게 된다” 하니,
그것이 하나의 마음이다.
법구경(法句經)의 게송에 말했다.
삼라(森羅)와 만상(萬像)은
한 법으로서 나타난 대상인데
어떻게 하나의 법 가운데서
갖가지의 것이 있다고 보겠는가.
또 이르되,
“비록 천 문장의 글귀를 외었다 하더라도 글귀의 이치가 바르지 못하면,
하나의 요긴한 들음으로 뜻을 없앨 수 있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비록 천의 문장을 외었다는 것은 다만 음성을 따를 뿐이요 바른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의 요긴한 것 보다 못하다는 것은 만일 한 마음이 만법의 긴요한 것이 됨을 안다면 그 종지를 통달하게 되고 뜻이 사라지게 된다.
뜻이 사라지면 경계가 ≺공≻해질 것이니,
만법은 언제나 비어서 뜻을 따라 형상을 내기 때문이다.
불사의광보살경(不思議光菩薩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온갖 일여(一如)가 아닌 법까지도
평등하게 일여의 법 안에서 머무나니
이것을 깨달아 분명히 알고 나면
허물도 없고 공덕도 없다.
해석하여 보자.
온갖 일여가 아닌 법이란 것은,
바로 마음 밖에서 제 나름으로 허망하게 고집하는 자체가 없는 법인 것이니,
만일 허망하여 진실이 없음을 알면 온갖 모든 법은 평등하게 일여의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게 된다.
이렇게 깨달아 알면,
밖에서는 대상이 될 만한 법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니,
더러움과 깨끗함이 모두 ≺공≻하기 때문이다.
가사익경(伽思益經)에 이르되,
“보살에게 교화받는 중생도 공덕이 없음은 상대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요 허물된 것이 있어야 공덕을 드러냄은 참 마음이 모든 곳에 두루하기 때문이니,
다시는 허물이 될 만한 한 법도 없다‘고 했나니,
이미 다스리게 될 허물이 없는지라 다스리는 공덕 또한 없어서 두 가지 모두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허물도 없고 공덕도 없다’고 한 것이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 이르되,
“선주(善住)천자가 문수에게 물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출가(出家) 하기를 구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문수가 말하였다.
‘만일 출가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참된 출가의 법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만일 출가를 구한다면 이것은 3계(界)와 5욕(欲)으로 미래 세상의 과보 등을 구한 것이라,
그는 마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법을 증득하지 못하고 마음이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짐짓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만일 자기 마음을 증득하면 곧 무위의 도리에 들어가지만,
만일 이 무위의 도리라면 마음이 없이 내야 하나니,
이렇다면 이것이 참된 발심이요 이것이 참된 출가이다.
법화삼매관경(法華三昧觀經)에 이르되,
“이른바 10방 3세(世)의 중생으로서 크거나 작거나 한 번만이라도 ‘나무불(南無佛)’ 하고 부른다면 장차는 모두 부처가 되리니,
하나의 대승 뿐이요 2승도 없고 3승도 없다.
모든 법은 한 모양[一相]이요 한 문[一門]이어서 이른바 생멸도 없고 필경에는 ≺공≻한 모양이니,
이 대승만이 있고 2승은 없다.
이러한 관(觀)을 익히는 이는 5욕이 저절로 끊어지고 5개(蓋)가 저절로 없어지면서 5근(根)이 더욱 자라나 곧 선정을 얻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한 번이라도 ‘나무불’이라고 부르면 장차는 모두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만일 법계의 함생(含生)인 3승(乘)ㆍ5성(性)이 한 마음에 귀명(歸命)하면 성불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자기 마음인 한 모양과 한 문을 여의고는 그 밖에 다시는 귀의할 만한 법이 없고 둘도 없고 셋도 없어서 결국에는 비고 고요하다.
이렇게 관하는 이는 5욕이 저절로 끊어지나니,
6진(塵)의 경계는 망념(妄念)에 따라 있으므로 망념이 없다면 경계가 없어지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끊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5욕을 끊지 않으면서도 모든 감관이 깨끗해진다.
모든 감관이 깨끗해지면 5개가 저절로 없어지고 5근ㆍ5력(力)이 저절로 더욱 자라나면서 곧 선정을 얻을 뿐만이 아니고 6도(度) 만행(萬行)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성취한다.
마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이르되,
“≺공≻한 마음은 동요하지 아니하여 여섯 가지 바라밀을 두루 갖추느니라”고 함과 같다.
마음이 ≺공≻하면 온갖 것이 다 ≺공≻하여지므로 “오직 이 대승만이 있고 2승은 없다”고 한 것이다.
잡장경(雜藏經)에 이르되,
‘선을 행하면 복이 따르고 악을 실천하면 재화(災禍)가 따르는 것이니,
메아리는 소리에 응(應)하고 선악은 음성과 같아서 하늘ㆍ용ㆍ귀신들이 주는 것도 아니요 조상의 사당에서 주는 것도 아니다.
그를 조작하는 것은 마음이요 이루는 것은 몸과 입이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음은 높은 이가 되기도 하고
마음은 하인이 되기도 하며
속의 마음에서 악을 생각하면
말로도 나오고 행위로도 지어져서
죄와 괴로움이 저절로 따르나니
수레바퀴에 치어서 죽느니라.◂
마음은 법의 근본이 되므로
마음은 높은 이가 되기도 하고
마음은 하인이 되기도 하며
속의 마음에서 선을 생각하면
말로도 나오고 행위로도 지어져서
복과 즐거움이 저절로 따르나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름과 같느니라.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Jonasz - Je Voulais Te Dire Que Je T'attends.lrc
종경록 관련 용어풀이
ꊱ종경록
‡종경록
ω종경록
종경록_위키백과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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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dict/종경록_cf.txt ☞
● 일체가 마음이고 공하다는 대승 수행의 어려움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대승경전을 대하면 우이독경 상태가 되기 쉽다.
글자는 써 있어서 읽지만
그 글자가 가리키는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가운데 어렵게 여기는 부분들이 있다.
현실에서 누구나 세상현실에 생멸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 자신과 영희나 철수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영희나 철수의 생사와 오고감 등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영희는 영희고 철수가 아니다. 또 철수는 철수고 영희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모두 본래 아니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또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의 것이 그 단면에 얻을 수 없다.
같고 다름도 얻을 수 없다.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
현실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 사정을 밝히는 것이 인과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고통을 받는 것은
그런 업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한번 일정한 업을 행하면
무량겁에 그 걸쳐 그것이 사라지지 않아 그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멸한다고 할 그 무엇을 본래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어떤 것의 생멸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이 생멸하는 인과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
그래서 오락가락하게 된다.
이미 이 내용을 앞에서 살폈다.
본래 현실이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데도 한편으로 이러이러한 업을 행하면
이런 형태로 생사를 받아 나간다.
이렇게 두 측면의 내용을 함께 제시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런 관계로 이런 내용이 나타나게 된다고 제시한다.
이것이 유무의 극단을 다 떠나는 내용과 관련된다.
유의 극단은 다음과 같다.
무언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결정적으로 실답게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무유정법]
그런데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반대로 현실에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으로 다시 치우쳐 이해한다.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업을 행하면 어떤 과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한편, 실답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있지만 마치 꿈처럼 있다.
꿈 내용은 꿈 꾸는 상황에서 그처럼 얻는다.
그러나 꿈을 구는 침대에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이 실재와의 관계가 이와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게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그 두 측면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 수행에 갖는 의미가 크다.
무언가를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은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무언가 본래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실답지 않고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을 현실에서 화합해 얻게 되는 측면이 있다.
이 측면에서는 다시 무량한 선법을 닦고 수행을 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한다.
그리고 성불한다.
이런 내용들을 얻는 것을 이 측면에서 목표로 하게 된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다 함께 잘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수행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두 측면이 다 하나같이 어렵다.
말처럼 쉽지 않다.
비유하면 이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백척 즉 30 m 정도되는 대나무 봉 위에서 서로 앉아 바둑을 둔다.
바둑에 지면 아래 절벽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상대는 커제나 이세돌과 같은 바둑 9 단이다.
이기기 힘들다.
이 상황에서 처음 실재가 공하다는 측면은 다음을 말한다.
그 상황에 본래 그런 것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설령 바둑 게임에 져서 벼랑에서 떨어지게 되어도 무방하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일을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현실에서 일체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되는 마음의 기본 기제나 구조도 그로 인해 영향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무방하다고 여기고 평안하게 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을 제시한다.
=> 그리고 현실에서 바로 이 측면을 통해서 안인을 성취한다.
그리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가리왕과 인욕선인의 상황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가리왕에게 붙잡혀 억울하게 사지를 절단당하며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그렇게 고통을 받지만, 정작 그 상황에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다.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이런 측면을 통해서 현실에서 그런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본래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을 이런 현실에 적용해서 극복하고 벗어나야 한다.
이런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말은 대단히 쉽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일체가 공하다는 말을 한 10 번 념하고 자신의 손가락 하나만 붙잡고 아주 조금만 톱으로 잘라보자.
그런 경우 조차도 전혀 쉽지 않다.
그러나 위 내용은 이런 상황에서 본래 차별없이 공하고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통해 잘 벗어나오라는 내용이다.
다만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한 이후 이런 상태를 증득하는데는 대단히 오랜 수행이 필요하다.
만일 상황이 이와 다르다고 하자.
그래서 평소 안락하고 즐겁게 지내는 상태라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생사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내용이 큰 효용이 없다.
그렇다하던 그렇지 않다고 하던 현실에 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생사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깨달음이 효용을 발휘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즉 도저히 견디기 힘든 생사고통에 당면한 경우가 그런 경우다.
한편 이를 예방하기 위한 수행도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아끼는 것을 베푼다. 계를 지킨다. 이런 수행도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이런 수행도 일반적으로 대단히 행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에도 위 내용이 효용을 발휘한다.
현실에서 수행할 때 수행자가 어렵게 여기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나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에 임한다.
그러면 그 각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다.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하고 현실에 임한다는 것은 현실에 이런 효용을 갖는다.
=> 한편 현실이 본래 공함은
본 바탕 실재 영역에 아무 내용도 전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공함을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이해하면 잘못이다.
즉, 무의 극단에 치우치면 곤란하다.
현실 내용은 실답지는 않다.
즉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내용을 각 영역에서 화합하여 얻어낸다.
마치 꿈과 같다.
침대에서는 바다나 황금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침대에 누어 꿈꾸는 가운데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것과 사정이 같다.
사정은 그렇지만 꿈에서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각 영역에서 얻는다.
색성향미촉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본 바탕 실재나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색은 귀로 소리를 듣는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반대로 소리는 색을 보는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색을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도 없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끔과 성격이 같다.
다만 현실은 꿈과 성격은 같지만 또 한편 꿈과는 다르다.
다수가 일정한 내용을 일정 시기 상황에서 일정 조건이 되면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꿈과 달리 이를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이는 마치 게임 화면 내용이나 만화와 사정이 같다.
게임 화면 각 내용은 하나도 실답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게임을 하면 그런 내용이 그처럼 반복된다.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그렇게 실답게 여기는 그 정도에 비례해서
그런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잘 극복할 수행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생사현실이 완전히 꿈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어도 수행이 그다지 필요없다.
그러나 생사현실은 꿈과 같지만, 또 한편 위와 같이 꿈과는 다르다.
그래서 꿈과 달리 대부분 이를 대단히 실답다고 어긴다.
그리고 이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래서 매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실답게 여기게 되는 그 정도에 비례해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잘 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다시 구족해야 한다.
그래야 그 생사현실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고 임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중생을 제도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이런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이는 위 비유에서 바둑 9단인 상대와 바둑을 두어서
즐겁게 잘 두어 끝내 이길 수 있는 상태까지 이르러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도 말하기는 쉽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역시 대단히 어렵다.
현실에서 바둑을 둔다면 대부분 9 단이 아니라 1 단 실력을 갖춘 이만 상대해도 번번히 진다.
현실은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현실내용과 같은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대 생사현실에서 그처럼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마음에서 화합해 얻는다.
그런 가운데 그런 현실에서 다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복덕을 얻고 무량한 방편 지혜을 닦아 나간다.
그래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해 중생을 제도한다.
이런 수행은 바로 이런 측면을 말한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이 경전에서 모두 함께 제시된다.
한편으로는 일체가 마음내용이고 실답지 않고 공함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극한적인 생사고통을 잘 견디고 평안히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를 통해 모두 생사현실 일체를 그대로 극락과 같은 상태로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무량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해 나간다.
그렇지만 본래 제도할 중생은 하나도 얻을 수 없다.
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량한 보시를 해야 한다.
그래야 무량한 복덕을 성취하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 단면에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 보시하는 행위, 보시하는 물건 하나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상을 취하거나 상에 머물지 않고 쉼없이 무량하게 보시를 행한다.
이런 것이 수행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측면도 결코 쉽지 않다.
● 1심과 진여의 관계
『종경록』에서 『밀엄경』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
헤아림과 헤아릴 바[所量]의 일은
다만 하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이렇게 하면서 분별할 뿐이니라. ◂
...
이런 가운데 있고 없음에 치우친 양극단과 현실을 혼동하기 쉽다.
유의 극단 = 실답게 있다. => 그렇지는 않다.
무의 극단 = 아무 것도 전혀 없다. => 그렇지는 않다.
그런 가운데 현실 내용을 얻는다.
이를 다음처럼 이해해보자.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를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내용
이렇게 놓고 이해해보자.
이들 각 영역에 어떤 내용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실재의 공함이란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음을 뜻한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실재에는 아무 내용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장님이 색을 보지 못한다.
장님이 귀로는 눈으로 보는 색을 얻을 수 없다.
또한 그 상황에서 귀로 듣는 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각 영역에서 그처럼 얻는다.
또 소리를 듣는 영역에서는 색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관계와 사정이 비슷하다.
현실에서 색성향미촉법을 각 마음 영역에서 얻는다.
이런 공한 실재를 #
감각현실은 ●
관념분별내용은 □
이렇게 표시해 놓고 이해해보자.
현실에서 감각현실 ● 과 관념내용 □ 을 일으켜 얻는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선
실재 #는 감각현실 ● 이 아니다.
또한 감각현실 ● 은 실재 # 가 아니다.
실재 #는 관념내용 □ 이 아니다.
또한 관념내용 □ 이 실재 # 가 아니다.
더 나아가
감각현실 ● 은 관념내용 □ 이 아니다.
또한 관념내용 □ 이 감각현실 ● 이 아니다.
이런 상태다.
예를 들어 자신, 영희, 철수, 생멸, 생사, 오고감., 같고 다름 등등이다.
그런데 이들 관념분별의 사정이 이와 같다.
공한 실재를 본바탕으로 하여 감각현실도 얻는다.
그런데 그런 분별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수행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즉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꿈과 성격이 같다.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는 것이다.
즉 침대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들을 꿈에서 꿈꾸는 것과 성격이 같다.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망집 - 업을 바탕으로 처하게 되는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취지다.
그래서 『종경록』에서 다음 내용을 뽑아 인용한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 이르되,
“모든 여래는 동일한 데에 계시고 제 성품은 청정하여 샘이 없는 경계[無漏界]에 속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세 세상의 모든 부처님은 10방에 머무시면서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널리 설하시되
모두 본 성품의 ≺공≻[本性空]을 부처 눈[佛眼]으로 삼지 아니함이 없나니,
...
실재의 공함을 이해해야
현실이 꿈과 마찬가지임을 이해하게 된다.
즉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본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마음을 통해 그처럼 얻는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이 아무리 다수에게 수없이 반복해도
그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래야 현실에 집착을 갖지 않게 된다.
또 그래야 현실 각 상황에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업장을 제거할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에 처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만일 실상이 공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에서 갖는 망집을 잘 제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망집에 바탕해 매순간 도저히 행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며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의 본 바탕이 공함을 이해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생사고통을 당면한 상황에서도 이를 통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또 그런 생사고통을 미리 예방하는 수행도 현실에서 힘들지 않게 여기고 잘 성취할 수 있다.
● 마음 내용의 의미
현실에서 얻는 일체 내용은 그 성격이 그 주체의 마음내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 일체가 마음이라고 할 때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한 주체가 자신의 모습도 보고 영희 철수 등도 본다.
그래서 현실 일체가 마음이라고 할 때
이 마음이 누구의 마음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또 그 마음은 몇개인가 등을 생각해야 한다.
즉 세상에는 자신의 마음 하나뿐인가.
자신이 보는 영희 철수 등등으로 수없이 있는가.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한편 실재와 마음의 관계도 주의해야 한다.
현실은 마음에서 얻어진 내용을 뜻한다.
그리고 마음은 그런 현실 내용을 바탕해서 시설하게끔 된다.
마음은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보거나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을 있다고 시설하는 사정은 위와 같다.
즉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마음을 그처럼 시설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마음 밖에 본래 어떤 내용이 있는가를 찾게 된다.
이렇게 찾는 것이 본 바탕 실재다.
그런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본래 있다고 할 내용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본 바탕 실재는 그런 마음을 떠난 내용이다.
그런 실재는 마음이 얻지 못한다.
또한 마음은 마음 자체를 직접 얻지 못한다. 보거나 만지지도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실재나 마음이나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마음과 진여 실재를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일체는 일체가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내용을 얻는데 관여하는 것이 마음이다.
한편 본 바탕 실재는 그런 마음과 관계하지 않고도 본래 있다고 할 어떤 내용이다.
그래서 마음은 현실 내용과 실재 두 측면 사이에 놓인 경계선과 같다.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경계로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들이 현실 일체다.
반면 그런 마음과 관계하지 않고도 있다고 할 마음 밖 내용이 실재다.
이처럼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 현실 내용과 마음은 모두 실재 진여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거울과 거울면 내용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들이 또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로 그 지위를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영희나 철수의 마음을 어떤 과정을 통해 시설하게끔 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자신은 자신의 마음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더욱이 다른 주체 영희나 철수의 마음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영희나 철수가 제각각 마음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부분도 아니다.
자신은 영희의 마음을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영희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자신 마음 밖에 영희의 마음이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된다.
부처님과 자신의 관계도 이와 사정이 같다.
부처님은 깨달았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한다고 하자.
부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자신의 마음 밖에 부처님의 마음을 따로 시설한다.
그런데 이 문제와 성격이 같다.
현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런데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마음 밖에 다른 주체의 마음 예를 들어 영희나 부처님의 마음도 따로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 마음 밖에 다시 그런 주체의 마음들이 따로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마음을 시설하는가.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보는 영희의 모습이나 영희의 말, 행동 등을 근거로 영희와 영희의 마음을 시설한다.
이럴 경우 이를 근거로 자신의 마음 밖에 영희의 마음을 있다고 시설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같은 근거로 몸이나 바위 꽃은 왜 마음 밖에 그처럼 있다고 시설할 수 없다고 하는가.
즉 왜 마음 밖은 차별없이 공하고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를 또 생각해야 한다.
실재가 공하다.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마음 밖에 어떤 내용을 얻지 못함을 제시한다.
이 사정은 자신의 마음을 기준으로 할 때 영희의 마음이나 몸이나 바위 꽃이나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자.
한 조각품을 자신이 영희와 철수와 함께 본다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보는 현실 일체는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이다.
그 안에서 보는 영희나 철수의 모습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한편 이 상황에서 영희나 철수가 대하는 현실 일체도 역시 영희나 철수 제각각의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이다.
영희도 역시 그 안에서 자신이나 철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처럼 서로 다르다.
조각품을 다 함께 대할 때도 이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은 정면에서 조각품 정면 모습을 본다.
영희는 옆에서 조각품 옆면 모습을 본다.
철수는 뒤에서 조각품 뒷 모습을 본다.
사정이 이렇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서로 하나의 조각품을 대하는 듯 하다.
그러나 서로 보는 내용을 서로에게 보고하면 그것이 서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보는 모습이 객관적 실재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보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이 아니다.
또한 철수나 영희가 대하는 대상도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더욱이 자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도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음 밖에 있는 마음과 별개의 물질도 아니다.
이렇게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진 이들 내용을 관찰하면
각 부분의 특성이나 성격이 다 다르다.
즉 평소 현실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
영희나 철수의 몸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
그리고 생명체가 아닌 바위나 조각품처럼 무정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
이들의 각 부분의 특성이 제각각 다르다.
이들이 다 같이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마음내용임에도 이처럼 각 부분의 특성이 다르다.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여 가야겠다고 마음을 갖고 움직인다고 하자.
이 경우 그에 따라 변화하는 부분은 위 각 부분 가운데 일부다.
그런 부분이 평소 자신의 몸으로 여기고 대하게 되는 부분이다.
한편 영희나 철수가 어디론가 가겠다고 하고 움직일 때도 이와 사정이 비슷하다.
한편 자신의 몸으로 여기는 부분이 다른 조각품에 닿는다고 하자.
이 경우도 사정이 다르다.
이는 밖에서 공이 굴러와 조각품에 닿는 상황과 다르다.
앞 경우에는 그 상황에서 촉감을 얻는다.
그런데 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한편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몸 부분에 닿아 촉감을 얻는다.
이는 또 자신의 몸이 조각품이나 바위에 닿아 촉감을 얻는 경우와 또 다르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 마음안 내용 각 부분의 특성이 제각각 다름을 파악하게 된다.
물론 이들은 서로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그 상황에서 설령 눈을 감아 그 내용을 보지 못해도 그런 촉감은 얻는다.
그래서 이들은 각 내용을 각 감관을 통해 동시에 함께 얻는 부대상황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눈을 뜨고 대하면 이들 각 부분에서 그런 다른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처음에 시설한다.
그리고 이들 현실 일체가 그런 마음 안에 들어와 얻어진 마음내용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현실 사정이 곧 '자신'의 마음을 처음 시설하는 바탕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설령 자신이 영희나 철수의 말이나 동작을 보았다고 해서
이들 현실 내용 일체를 영희나 철수의 마음내용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이다.
다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나 영희 철수나 유사성이 많이 파악된다.
그런 가운데 처음 위와 같은 사정에서 그런 현실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시설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있다고 시설하게 되는 사정은 현실에서 얻는 이런 내용들에 바탕한다.
즉, 자신이 얻은 현실 내용 일체와 그 가운데 일부인 자신의 몸의 관계를 이처럼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들을 바탕으로 이들 일체 내용을 얻는데 관여하는 '자신'의 마음을 시설한다.
그런데 그 사정이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몸이나 영희 철수나 그 사정이 엇비슷하다.
그래서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대하는 영희나 철수도 그런 마음을 그처럼 제각각 시설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내용을 영희나 철수 입장에서 제각각 관하면 또 마찬가지로 스스로 그런 상태를 파악하게끔 된다.
그러나 영희의 마음은 영희의 마음이다. 영희의 마음안에 자신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다. 자신의 마음에 영희나 철수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기준으로 하면 영희나 영희 마음은 그 마음 밖에 있다고 할 어떤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다른 바위나 물 등의 실재가 공하다고 하는 측면과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각 주체마다 제각각 마음으로 현실을 대하는 것 뿐이다.
이는 현실에서 달이 뜨면 천개의 강마다 달모습이 천 개씩 비추이는 상황과 같다.
한편,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시설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이 마음의 본 바탕 실재는 무언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그 마음의 실재는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측면은 다른 것과 차별이 없다.
즉, 현실 내용은 마음을 통해 얻는다.
그러나 정작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에 얻어진 내용을 바탕으로 마음을 그처럼 시설해 있다고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의 본 바탕이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는 마음과 관계하지 않고도 마음을 떠나 본래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 실재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 경우 마음에 얻어진 색성향미촉법 등의 본 바탕 실재는 공하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 내용을 얻게 한 마음의 본 바탕은 또 무언가를 마찬가지로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 경우 마음의 실재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과 실재의 공함을 서로 혼동하지 않고 잘 구분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4/12/25 |
○ 2020_0525_190224_can_ab13.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eter-Paul-Rubens-perseus-and-andromeda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egonia_x_tuberhybrida_1005Pink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éophile-Alexandre_Steinlen_-_Tournée_du_Chat_Noir_de_Rodolphe_Salis_(Tour_of_Rodolphe_Salis'_Chat_Noir)_-_Google_Art_Project
그래도 재채기를 자주 하면 사람들이 놀라게 된다. 숙왕화님이 기침이 걸렸다고 하니 배를 사가지고 와 끓여 주었다. 그리고 쉬었다. 숙왕화님은 혼자 길을 떠났다.
그런 가운데 얼굴의 한 부분이 마치 치통을 앓듯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오늘 연기(인과)에 대해 내용을 적으려고 했다. 여전히 감기 기운이 남아서 쉬었다. 그리고 글을 미루려고 했다. 그런데 위 노래를 듣다보니 다시 연기에 대한 내용을 듣게 된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조금 더 적기로 했다. 현실에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현실에 임하는 대부분이 망집상태에서 현실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생멸한다고 여긴다. 이 경우 생멸이란,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 들고 남이 있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눈을 뜨고 대한다고 하자. 꽃이 어제는 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꽃이 피어 있다. 또 멀리 보니 깃대에 바람이 부는지 기가 펄럭인다고 하자.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각 현상이 생겨나고 멸한다고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깃발이 무엇때문에 흔들리는가가 문제된다. 또 바람에 처마에 달린 방울이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경우도 비슷하다. 없던 방울 소리가 그렇게 나타나 들린다. 그래서 이 방울소리는 어떻게 나게 된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는 현실에서 보는 생멸의 원인을 찾는 문제다. 이것이 현실의 연기에 대한 판단문제와 관련된다. 깃발이 무엇때문에 흔들리는가 깃발때문인가 바람때문인가. 또 방울이 왜 소리나는가, 방울 때문인가 바람 때문인가 하는 문제는 승가에서 문제삼는 대단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다. 그런데 이것이 승가난제(僧伽難提 saṃghanandi)란 이가 해결해 답한 문제이기도 하다. 방울 소리는 방울 때문도 아니도 바람 때문도 아니다. 그저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답한다. 그러면 마음이 소리를 내지 않다가 홀로 소리를 낸 것인가. 그런데 그렇지도 않다고 답한다. 마음 자체는 또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고 본래 적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가난제는 그렇지도 않다고 제시한다. 다만 삼매의 경지가 아니라 그렇게 여기게 된다고 답한다. 즉 본래 마음에도 그런 생멸은 없다. 그런데 망집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그처럼 얻고나면 그렇게 여기는 것 뿐이다.
현실에서 낭떨어지에 사람이 떨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대단한 고통을 겪고 장애상태로 지내게 된다. 여기에 아무 원인이 없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그 원인을 제시한다. 먼저 떨어기기 전에 그 방향으로 걸어간 것이 원인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 방향으로 걸어간 것은 다시 일정한 망집을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어 그 방향에 그가 찾는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고 여겨서 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그처럼 망집번뇌 - 업 - 고의 관계로 얻는다. [혹업고] 그런데 이것이 곧 생사현실의 연기(인과)의 관계다. 그리고 이런 연기에 바탕해서 그런 고통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한다. 즉 그런 고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미리 예방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기본 수행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연기관계는 생사현실에 그렇게 문제삼을 내용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런 내용이 그처럼 생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떤 것이 있고 그 생멸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망집에 바탕한다. 즉, 처음 현실 한 단면에 그렇게 일정 부분이 무엇이라고 상을 취하는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현실 한 단면을 놓고 그 내용의 정체를 깊게 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그 현실 단면에 본래 그렇게 취할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문제삼을 주체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사정은 앞처럼 확립한 연기 관계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관계를 연기 즉 공이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C 라는 현상이 a + b => C 이런 관계로 얻어진다고 하자. 예를 들어 방울 + 바람 => 방울소리 이런 식으로 연기(인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현실에 그렇게 문제삼는 a 나 b 그리고 C 등을 먼저 망집에 바탕해 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 단면에서 상을 취해 그런 방울이나 바람이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방울소리가 나타나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들 각 관계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방울 + 바람 => 방울소리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ㅏ 그런 가운데 C 의 생주멸을 a + b => C 의 연기관계로 관하게 된다. 이는 다음의 상호관계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일정한 상황에서 a 나 b 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C 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a 와 b 가 함께 있다고 하자. 그러면 C 를 얻는다. 이런 경우 그 a 와 b 그리고 C 를 인과 연기의 관계에 있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각 단면을 깊게 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 어느 한 단면에도 그런 a 나 b 그리고 C 등을 얻지 못함을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C 의 생멸도 얻지 못한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 C 가 어떤 요소에 의해 셩겨났는가도 역시 말할 수 없다. 망집을 벗어나 현실을 올바로 관하면 본 사정이 이와같다.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임한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에서 각 부분에 상을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 각 부분에 자신이 분별을 일으킨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망집을 일으킨다. 현실에서 실재 # 를 바탕으로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을 각기 일으켜 얻는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그 주체는 그런 관념분별 □ 이 그 감각현실 ● 부분에 그처럼 있다고 잘못 분별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안경을 찾는다고 하자. 안경을 보지 못할 때도 마음에 안경을 떠올린다. 이 경우 안경은 마음안의 관념내용 □ 이다. 그런데 방을 찾다가 어느 부분에 안경을 찾았다고 여긴다. 이 경우 안경이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그가 가리키는 그 부분의 본 정체는 그가 얻는 감각현실 ●의 일 부분이다. 그런데 감각현실 ● 은 관념내용 □ 이 아니다. 또 감각현실 ● 부분에는 그런 관념 내용 □ 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관념내용 □ 은 그런 감각현실 ● 이 아니다. 또 그 관념 내용 □ 에는 그런 감각현실 ● 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그럼에도 그런 감각현실● 을 대해 그런 관념분별 □ 을 일으킨다. 그러면 그는 그런 사정으로 그런 감각현실 ● 부분이 곧 그런 관념내용 □ 이라고 잘못 분별한다. 그래서 찾던 안경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처럼 손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이다. 그런 내용이 없는 부분을 취해 그런 부분이 곧 그런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예외없이 이런 바탕에서 생활에 임한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서 상을 취하면 그에 바탕해 그런 것의 생멸과 생사가 있다고 여기게끔 되는 것이다. 또 그렇다면 그런 바탕에서 이들 각 부분의 관계를 그처럼 또 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눈으로 손과 손이 부딪힘을 본다. 그런 상황에서 촉감을 느낀다. 그리고 손뼉 소리도 듣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은 모두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엄밀히 보아 시각 내용이 청각 정보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각 내용이 촉각 정보를 얻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보지 않아도 각기 소리와 촉감을 얻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은 엄밀하게 연기관계에 있는 요소가 아니다. 단지 각 감관으로 그런 내용을 동시에 함께 얻는 부대상황의 관계에 있는 것 뿐이다. 이는 마치 번개와 천둥소리의 관계와 같다. 눈으로 보는 번개빛이 천둥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상황에서 각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바탕에서도 다시 무엇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런 현상이 있게 되는가 그 관계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a + b => C 라는 인과 연기 관계를 위와 같은 사정을 바탕으로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색은 눈에 의존해 얻는다고 제시한다. 이 경우 마음이 얻어낸 결과물이 색이다. 그래서 그렇게 얻어낸 색을 대상으로 눈이 관계해 그 색을 얻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색을 얻는 감관인 눈도 눈 스스로 보는 그런 부분으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부분도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 내용 간에 각기 그 상황에서 어떤 내용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른 내용이 있고 없게 되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차유고피유 차무고피무....] 그리고 이런 관계성이 파악되면 이들을 연기관계가 있다고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여하튼 현실 각 내용 간에 그런 관계를 파악해 a + b => C 를 확립해 제시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시 이를 바탕으로 본 바탕에 그런 요소나 그들 요소간의 관계를 그처럼 본래 제시할 수 없음도 이를 통해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연기 즉 공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처음 망집에 바탕해 확립하게 되는 a + b => C 라는 식안에 모두 제시되어 있다. a + b => C 라는 내용은 그 자체가 C 라는 내용은 본래 그 앞 부분에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진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관계식은 그 자체가 그렇게 얻어진 C 가 그런 조건에서 그처럼 얻어진 무상한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런 조건이 아니면 그것을 얻지 못하고 허물어짐도 함께 나타낸다. [ 무상 ] 또 그 내용이 대단히 좋지 않은 것이라면 그런 형태로 고를 겪게 된다. (고고) 그리고 이 각 내용이 그처럼 무상하므로 또 고를 겪게 된다. (행고) 또 그 내용이 좋은 경우는 그런 조건이 아니면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조건이 제거되면 허물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런 내용을 좋다고 집착하게 되면 고통을 겪게 된다. (괴고) [고] 한편 a + b => C 라는 관계로 얻어진다는 사실은 그렇게 얻는 C가 꿈과 다른 참된 진짜의 실체가 아님도 제시한다. [무아, 무자성] 꿈은 꿈을 꾸는 상황에서 그런 조건에서 일시적으로 얻는다. 그리고 그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그리고 현실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꿈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위 식은 C 가 그런 성격의 내용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꿈과 달리 참된 진짜 내용을 찾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현실에서 이런 연기 관계로 얻는 C는 그런 참된 진짜 내용이 아님을 함께 제시한다. [무아 무자성] 그리고 현실에서 그처럼 C 를 얻는다고 할 때 그런 관계를 떠난 본 영역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제시한다. 현실은 마음과 관계해서 그 일체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떠난 본 바탕의 영역이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마음을 통해 현실에서 얻는 일체는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한편 실재영역에서는 그처럼 현실에서 마음으로 얻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 생멸과 생사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본 바탕은 그런 연기관계로 마음에서 얻는 현실 내용 일체를 떠난다. 그래서 본 바탕 실재는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난 열반 적정의 상태임을 파악하게 된다. [ 열반 적정] 한편 현실에서 일체 내용은 한 주체의 마음이 관계해서 얻는다. 그런 가운데 이런 마음을 떠나 본래 있는 본 바탕의 상태는 마음으로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바탕의 영역에서는 마음에서 얻는 그 일체를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공]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은 현실에서 확립하는 연기의 관계를 통해 이처럼 확립할 수 있다. 또 반대로 현실에서 파악하는 연기관계는 이런 바탕을 통해 성립할 수 있다. 만일 현실이 무아 무자성 공하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전제에서는 이런 생멸이나 이런 관계도 세울 수 없다. 또 현실이 본래 공하다는 사정은 바로 이런 연기관계를 확립해 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파악하는 인과 연기관계와 실재의 공함은 이런 상호관계가 있다. 그래서 현실 각 단면에 본래 이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도 이와 같은 관계를 통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연기 즉 공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한편 그처럼 본래 얻을 수 없지만, 망집을 일으켜 현실에 어떤 내용을 취해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의 생멸을 그처럼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 그 생멸은 위와 같은 관계로 얻는다고 여기게 된다. 현실에서 방울과 바람이 있어야 방울소리가 울린다고 여긴다. 또 왼손과 오른 손이 부딪혀야 손바닥 소리가 난다고 여긴다. 만일 손과 손을 부딪혀 소리가 나는가 안 나는가를 놓고 내기를 한다고 하자. 100 번 내기를 하면 소리가 난다는 쪽이 100 번 다 이기게 될 것이다. 현실 사정이 그렇다. 그렇지만, 그 상황의 어느 단면에도 그런 손이나 소리는 얻을 수 없다. 그 사정을 바로 그런 현실 내용의 관계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한 주체의 생사나 생멸은 처음 망집을 일으켜 상을 취해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임하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처음 그런 현실에 임해 그렇게 관하게 하는 마음의 기제나 구조가 바탕에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고 임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그 망집 상태에서는 무궁한 겁에 걸쳐 그런 상태로 생사를 반복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는 연기나 인과의 관계를 그처럼 시설해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한번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런 바탕에서는 무량겁에 걸쳐 그 업이 사라지지 않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낭떨어지에 떨어져 고통을 겪는 경우 그것이 아무런 원인없이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런 고통을 겪게 한 일정한 관계가 있다. 낭떨어지에서 떨어지기 전에 낭떨어지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걷게 된 것은 그 앞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고 분별했기 때문일 수있다. 그래서 그처럼 낭떨어지를 향해 걸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를 그처럼 파악하게된다. 그것이 혹 - 업 - 고의 관계다. 즉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한 망집과 그에 바탕한 탐진치 번뇌 =>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뜻과 말과 동작[신구의 3업]을 통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관계를 파악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바탕으로 이런 생사고통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이를 바탕으로 바람직하고 좋은 내용을 무량하게 성취하고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미리 생사고통을 받아나갈 관계를 중단해야 한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한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업을 일으키게 하는 망집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한편 장차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가 이미 쌓여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노력과 함께 반대로 그런 업의 장애를 해소해야 한다. 즉 수행을 통해 그런 업장을 제거해야 한다. 과거에 염산을 바닥에 쏟았다고 하자. 그래서 큰 문제라고 하자. 그러면 일단 더 이상 염산을 바닥에 쏟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과거에 쏟은 염산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중지 노력과 함께 또 한편, 과거에 쏟은 염산을 처리해 제거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이후 양잿물과 같은 알칼리를 다시 부어서 중화를 시켜야 한다. 그래야 염산으로 인해 이후 발생할 부작용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런 사정과 같다. 이는 손에 칼로 상처를 내서 피가 흐르는 경우 치료 방안과도 같다. 우선 칼로 상처를 내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고 멈춰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손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에 붕대를 감고 피를 멈추게 하고 소독약도 바르고 치료를 해야 한다. 그래야 상처가 나지 않은 원 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게 될 업을 분주히 행해 왔다고 하자. 이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도 이와 사정이 같다. 먼저 그런 업을 중단하고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한다. 그와 함께 과거에 쌓아 놓은 업장을 해소할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이다 좋음(+)을 아끼지 않고 베푼다. [보시] 상대가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쁨(-)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다. ( 정계) 한편 상대가 나쁨(-)을 가하면 이에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고 평안히 참는다. ( 안인) 그리고 모든 있는 선을 키우고 없는 선은 새로 만들어 낸다. 또 반대로 이미 있는 악은 키우지 않고 없는 악은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런 행을 꾸준히 행한다. ( 정진) 이렇게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을 꾸준히 행하면 처음 쌓여 있던 업의 장애가 점차 해소된다. 그리고 이것이 다 해소되면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게 된다. 그 이후 수행을 계속 정진하면 이제 복덕 자량이 이로 인해 생사현실에 구족해 쌓이게 된다. 예를 들어 부채만 가득한 마이너스 통장을 가진 상태에서 저금을 꾸준히 행한다고 하자. 처음에는 마이너스 형태의 부채가 점차 없어진다. 그런다가 이후에는 자산이 점차 쌓이게 된다. 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런 기본 수행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려면 현실 단면에 그처럼 문제삼는 내용을 본래부터 얻을 수 없다는 사정도 한편 잘 이해해야 한다. 이런 사정을 잘 관해야 생사현실에서 행하는 수행도 힘들게 여기지 않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각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게 된다. 위에 제시한 수행덕목은 하나하나 살피면 현실에서 대단히 행하기 힘들다. 이들은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 좋다고 여기고 집착하는 내용이다. 또는 대단히 싫다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경우에는 그 각 경우에 도저히 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래서 그 각 경우에 도저히 할수 밖에 없다고 여기면서 매순간 행하게 되는 업이 있다. 그것이 곧 그 주체를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처하게끔 한다. 이것이 무명 망집 번뇌[혹]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 => 생사고통의 관계식이다. [혹업고] 생사고통을 그저 우연하게 추첨을 통해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체가 그 이전에 그처럼 망집을 일으켜 매순간 꾸준히 그런 업을 행했기 때문이다. 낭떨어지에 떨어져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그저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낭떨어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또 그가 일정한 분별을 잘못 행해 그렇게 행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 희귀한 보물이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그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간 것이다. 그리고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례만 그와 사정이 같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관계가 모두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처음 이 관계식을 바탕으로 미리 앞 단계에서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 낭떨어지에 떨어져 허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원칙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완전히 망집을 제거해 상을 취하지 않고 안인을 성취한다면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이론상 가능하기는 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 상태에 곧바로 이르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미리 앞 단계에서 원인을 제거하고 예방하는 것이 훨씬 쉽고 낫다. 그래서 기초적 수행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연기관계를 통해 고통을 예방하는 수행을 행하는 가운데 끝내 생사를 완전히 벗어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이를 통해 가장 근본적으로 기본되는 망집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이 생사현실에 본래부터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서 상을 취하게 되면 그런 것의 생멸이 그런 연기관계를 바탕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망집 자체를 제거하면 이를 통해 그런 생사현실에 그런 생멸을 문제삼을 것을 얻을 수 없음를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런 생멸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또한 그런 것의 생멸을 나타나게 하는 그런 관계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끝내 생멸을 완전히 벗어나려면 이런 사정을 위 내용을 통해 잘 이해해야 한다. 한마디로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무유정법이 이런 사정을 나타낸다. 그런데 망집을 바탕으로 상을 취하면 그와 반대가 된다. 그리고 분별을 일으켜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있다고 잘못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생멸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생주멸은 매번 일정한 관계로 생주멸하게 된다고 또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그런 망집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현실에서 파악하는 바로 그런 인과관계를 통해 현실 그 하나하나의 단면에서 그런 내용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또 수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처음부터 곧바로 이런 망집을 제거하고 신견을 제거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생사현실에 임해 활동하는 데에 있어서 그런 망집 신견은 출생 이전부터 갖춰져 출발하기 때문이다. [구생기신견] 그리고 분별을 할 때에는 다시 이런 바탕에서 새로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다. [분별기신견] 그런데 이 분별은 또 다른 부작용을 그 위에 다시 쌓아가게 된다. 칼로 상처를 내 피가 흐르면 그 자체도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피가 흐르면 이후 과다 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또는 처음 몸 상태가 안 좋아 혈압이 높을 수 있다. 이것도 문제다. 그런데 그 상태로 계속 지내면 혈압이 높아서 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그 상태로 계속 지내면, 심장도 비대해지고 신장도 기능을 상하게 된다. 한편, 처음 어떤 부위가 다쳐서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이것도 문제다. 그런데 그 고통이 계속되면 다른 활동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게끔 된다. 그래서 그로인해 다시 다른 큰 사고를 또 겪게 된다. 현실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출생 이전에 이미 일정한 망집을 바탕으로 신견을 갖고 출발한다. 이후 각 주체는 그런 바탕에서 다시 일정 부분을 취해 스스로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움직이고자 마음을 갖고 움직이면 일정 부분만 변화해 움직인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 매 순간 그런 부분이 곧 자신이라고 잘못 분별한다. 즉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 가운데 극히 일 부분을 자신이라고 거꾸로 잘못 분별해 상을 취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게 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그런 망집 신견을 바탕으로 출생해 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설령 그런 망상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런 배경 사정으로 인해 여전히 그 부분은 그런 특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모임에 너무 바빠서 자신의 손과 발이나 머리을 미처 분별하지 못하고 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 머리라고 여기는 부분을 떼놓고 모임에 가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분별을 해서 그 부분이 그렇게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출생 이전에 형성된 신견에 배경 사정이 있다 [구생기신견] 그리고 이후 그 주체가 이후 성장한 후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일으키는 망상분별은 이에 바탕한다. 그런데 이 후발적인 망상분별을 방치하면 이후 이에 바탕해 또 다른 업을 증폭해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다시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게끔 하는 업장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이 후발적인 망상분별[분별기신견]을 그대로 방치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들을 모두 잘 제거해야 한다. 『금강경』에서는 이런 사정으로 다음처럼 제시한다. 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임하면 수행자가 아니다. 상을 취하고 임하기에 그런 바탕에서 생사에 묶인다. 이런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한다. 그런데 그런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망집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다. 그런데 중생제도를 하려는 수행자는 2 중적이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임하더라도 위와 같은 사정을 잘 관하고 그 측면을 취해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이 곧 열반의 상태가 된다. 즉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생멸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런 망집을 떠나 대하면 그 생사현실에 본래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곧 열반이라고 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생사현실에서도 생사를 벗어난 니르바나(열반)의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극한 고통도 이런 입장에서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하게 임한다고 하자. 그래서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생사현실에서 증득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생사현실 일체 상황에서도 그런 바탕에서 모두 극락처럼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적용하면 그 반대가 된다. 본래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망집을 일으켜 이를 대하면 얻을 수 없는 그런 생사고통과 생멸이 거기에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 경우는 본래 열반인 상태가 생사고통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자칫 연기관계를 기계적 인과관계로 이해하면 부처님이 제시한 연기를 바탕으로 숙명론을 잘못 취하기 쉽다. 그리고 모든 생사현실을 과거의 업에 의해 피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해해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데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한편으로는 무량겁에 걸친 내용을 연기를 통해 제시한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 하나하나의 단면에 본래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무유정법] 생사현실에서는 한편으로는 인과관계가 적용된다. 그 하나하나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고 실답지 않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각 내용을 마음에서 그처럼 얻는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그런 관계로 얻는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통해서 다시 그 각 내용이 본래 공하다는 사정도 파악하게 된다. 이는 마치 만화 내용이나 게임과 같다. 일정한 다수가 일정한 관계로 그런 내용을 일정한 조건에서 반복해 얻는다. 사정이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는 다른 영역이나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이와 사정이 같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그런 관계를 통해 그 안에서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생사현실 각 내용은 그런 인과의 관계로 얻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정으로 각 단면에 그런 생사를 벗어날 해탈문이 그렇게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런 생사현실의 본 바탕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공해탈문] 한편 자신이 무엇이라고 여기고 상을 취하여 손으로 가리키는 그 부분에 정작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명상을 취한다. 그리고 이에 가장 집착을 갖고 임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갖는 온갖 집착은 여기에 근원한다. 따라서 그처럼 현실에서 그런 상을 취하여 임하지 않아야 한다. [무상해탈삼매문] 그리고 한편 그는 그런 망집에 바탕해 좋은 내용을 얻으려 추구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분주히 업을 행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망집에 바탕해일으킨 부질없는 소원을 남김없이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행한 업을 모두 중단하고 끊을 수 있다. [무원무작해탈문]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수행자는 다시 반대로 임할 수 있다. 즉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그 측면을 99% 취한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성취할 수 있는 안인을 갑옷으로 삼아 수행에 임한다. [무상해탈삼매 => 안인, 무생법인 ] 그런 가운데 망집에 바탕한 소원은 제거하고 보리심을 바탕으로 자비심을 바탕으로 임한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해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켜 현실에 임한다. 보리심을 바탕으로 대하면 본래 그런 생사고통은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중생은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고 겪지 않아도 될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겪어 나간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자비심을 갖고 이들 중생을 제도하려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한다. 그리고 중생이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아집에 바탕한 소원을 관하고 이들 내용에서 주어를 바꾸어 임한다. 즉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모두 좋은 상태를 성취하는 가운데 끝내 보리(깨달음)을 얻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나아가 다시 성불하여 중생제도를 할 수 있게 하도록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서원의 성취를 위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쌓고자 수행에 임하게 된다. [무원무작해탈삼매 => 보리심과 자비심에 바탕한 광대무변한 서원] 이것이 현실에 임해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수행자의 기본 자세가 된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는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래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 한 가운데 생사현실에 집착하게 되면 자칫 수행자가 자칫 중생의 망집 상태처럼 되기도 쉽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중생제도를 위해 임하는 수행자는 본 바탕의 측면과 생사현실의 측면에서 각 경우마다 잘 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안에서 수행자 자신부터 기본수행덕목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또 그렇게 되어야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원만하게 잘 제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2 중적인 측면을 갖게 된다. 한편으로는 생사현실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 측면을 통해서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고통과 번뇌를 제거한다. 그리고 수행과정을 힘들게 여기는 측면도 이를 통해 제거한다. 그런 한편,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임해 그 측면에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중생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모두 잘 성취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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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행화타(自行化他)
장(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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