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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에서 이름뿐이라는 의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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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지록위마란 말은 대단히
수행에 필수적인 말이라고 보게 된다.
금강경에 바로 그런 사정이 제시된다.
금강경에 유명한 구절의 형식은
즉비고명(則非故名)
실무고명(實無故名)
이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a 즉비 a 고명 a
a 실무 a 고명 a
이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이 실상은 상(相)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실상이라 말씀하십니다.
是實相者則是非相是故如來說名實相
시시상자즉시비상시고여래설명실상
K0013V05P0981a12L;
...
따라서
이는 현실에서
사슴은 실로 사슴이 아니기에
바로 그런 까닭에 사슴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사람들이 사슴이라고 생각하거나
말로 생각하거나
그런 말로 가리키는 부분에
그러한 것을 실로 얻을 수 없다.
이것을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사람들이 사슴으로 보는 것을
새로운 말
즉 지록위마란 말로 표현하면 되는가 .
금강경의 위 구절은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슴이던 말이던
그 안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어떻다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임하면 지옥에
골인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앞의 부분은 아무렇게
아무 것이나 놓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칭해도 된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갖춘 좋은 신체적 특징을
32 상이라고 칭하는데
이런 32 상을 갖추는 이로써는
전륜성왕도 있고 부처님도 있다고 제시된다.
사정이 이러니
32 상만 갖추면
전륜성왕도 부처님과 차별이 없으니
전륜성왕을 부처님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위 구절이 그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32 상도 갖추고 10 력도 갖추고 등등 하여
현실에서 누구나 부처님이라고 보는 분을 놓고
이 부처님에는 실로 부처님이라고 할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로 부처님이라고 할 것을 얻을 수 없는 존재는
우리가 대하는 MUN 님도 그렇고
꽃도 그렇고
축사의 돼지도 그렇다고 할 것인데
그렇다고 그런 까닭에
이들은 모두 법신을 증득한
부처님이라고 칭해야 한다.
이런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해할 만하지 않은가.
이는 금강경과 같은 경전에서
처음 중생을 얻을 수 없다.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하는 물건, 보시하는 행위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보시를 한다고 해도
어떤 물건이 어디에서 사라지는 일도 없다.
보시란 쉽게 말해
사랑방에 있는 물건을 안방에 옮겨 놓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잘 이해해서
버림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원만히 성취하라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고 할 때
그러나 사정이 그러니까 ,.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고
보시하는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제시한 것으로 오해할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앞 내용을 놓고
그렇게 오해한다면
이것이 앞의 해석방식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중생을 괴롭히고
다른 이의 물건을 빼앗고 훔치는 것도
본래 그런 것을 실로 얻을 수 없으므로
다 중생제도나 보시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놓고
prince 님처럼 자신이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자신 마음대로 명칭을 붙이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
지록위마 시감상 방식은
잘못 사용하면
무간지옥행인데
잘 사용하면
불국토 사용 티겟을
곧바로 발부받는 요건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래는 오고감이 없는데
어떻게 오고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전 구절이
대단히 적절한 내용을 제시한다고 본다.
념(기억)과 혜(지혜)와 행을 도로로 삼고
지(사마타)와 관(비발사나- 정려, 선정, 삼매수행)을 자동차로 삼아
그 도로를 오가고
그래서 공 무상 무원 해탈문에 들어서고
그래서 불국토에서
공덕의 궁전의 법왕으로 임한다.
이런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가 자신이 수행에 임하는 현실을 놓고
실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까닭에 그렇게 칭한다는
구조의 어구를 사용할만한 부분인 것이다.
>>>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보살이란
무슨 말뜻[句義]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말뜻이 없는 것이 보살의 말뜻이니라.
왜냐 하면
선현아,
보리(菩提)는 생기지 않고
살타(薩)는 있지 않기 때문이니,
말뜻이 없는 것이 보살의 말뜻이니라.
선현아,
마치 공중의 새 발자국이라 한 뜻은
없어 얻을 수 없듯이,
보살이라 한 뜻도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이 그와 같으니라.
선현아,
마치 요술로 된 일이라 한 뜻은
없어 얻을 수 없듯이,
보살이라 한 뜻도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이
그와 같으니라.
..
여기서 a 란 없고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은
한자어로 무소유 불가득(無所有不可得)로 표현되는
부분이다.
현실에서 무소유라고 하면
소유재산이 없고 소지품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있는바가 없다. 이렇게 번역하게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a 에 대해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없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득(不可得)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상태에서
현실에서 얻는 그 모든 내용과 존재의
본바탕이라고할 실재의 내용이 무언가를 문제삼을 때
그런 내용을 어떤 주체가 직접 얻어낼 도리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눈을 떠서 보니 꽃의 모습을 얻는데
눈을 감으니 그 모습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방금 본 꽃이 아주 없게 된 것인가?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무언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고 할
실재하는 내용은 전혀 없는 것인가.
만일 그런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주제로 어떤 것의 본 정체를 추구할 때
위와 같은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무아, 무자성]의 내용은
만일 그런 내용을 찾을 때
그런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제시하면 되는데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수많은 내용을 얻는다는 각 주체는
그 내용을 하나같이
a + b => C 의 관계처럼
일정한 내용이 화합되고 조건지워진 관계로
얻는 것이므로
그러한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을
직접 끝내 얻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주체도 그렇게 얻지 못하기에
간혹 그러면 아주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오해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이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여
있다 없다의 양변을 다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눈으로 소리를 얻지 못한다고 하여
귀로 소리를 못 듣는가.
그런데 귀먹은 이가
눈으로 소리를 얻지 못한다고 하여
소리는 없다라고 주장하면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눈으로 보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면 그런 모습을 얻고
눈을 감으면 그런 모습을 얻지 못하는데
이 두 내용 가운데 어떤 내용이
본래의 실재의 내용에 해당한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눈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은 눈을 뜬 상태와 같이 그런 내용이 '있다'를 제시한 것처렴 여겨지고
두번째는 눈을 감은 상태처럼 그런 내용이 '없다'를 제시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본바탕의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므로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두 양변을
모두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얻을 수 없고 공하다[불가득, 공]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이 공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니
때로는 있음을 부정해서 '없다'라고 표현하거나 '있지 않다'라고도 표현하고
또 이렇게 표현하면 다시 아예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오해를 하니
다시 이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이제 '없지 않다'라거나 '있다'라는 식으로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게
상대가 이해하는 있다 없다라는 표현으로
공을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인데
그런데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듯하니
또 이런 표현이 다시 혼동을 일으킨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게
있다 없다라는 표현을 통해 혼동이 발생한다고 해서
공은 공하다라고 설명하면
이제 이 설명으로 공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여하튼 실재에 대해 논의할 때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고 [ 무아, 무자성, => 무소유 ]
그리고 실재에 해당하는 그 내용은 직접 얻지 못하고 공하다. [ 공 => 불가득 ]
그런데 이런 사정에 바탕해서
현실에서 그런 내용들을
그처럼 감각현실로 얻고
또 그에 대해 분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아무것이나 붙잡고
아무렇게 명칭을 붙이고
임할 수 있겠는가.
[...]
>>>
이미 경전에 나오는
건행 삼마지란 내용도
이름만 제시되고
그 구체적 내용은 상세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삼마지가 무슨 내용일까가
또 삼마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글자만 보고
이것이 아마
건강하게 수행하게 하는 삼마지가 아닐까 하고
생가해보게 된다.
>>>
그러나 정작 그런 내용을 소개하는
본인은 건강한 상태인가?
그렇지 않기에 또 관심을 갖고
수행에 임하게 되는데
처음 정려수행의 기본 방안은
의식을 기울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 쉬던 숨쉬기 운동을 놓고
자신의 의식과 일치시켜서
숨을 쉬는 동작을 하는데에서부터
그 수행을 시작하라고
경전에서 제시된다.
숨을 들이쉬면서 숨을 세고
숨을 따라
숨이 돌아다니는 곳에 의식을 같이 맞추고
관하고
그것이 수식관의 기본 원리인 것이다.
범어+한자로 안반수의라고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뜻에 따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느 극심한 상태에 자신이 처한다해도
숨쉬고 의식이 있는 한
이것이 가능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더 추가하면
숨을 쉴 때마다
아미타부처님의 지헤 광명이 들어와서
몸 곳곳을 밝게 지혜 광명으로 채우고
그러면서 번뇌를 다 샅샅이 제거하고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다시 그렇게 정화된 지혜광명이
밖으로 나가 상하좌우 온 세상과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고 지혜광명으로 채운다
이런 식으로 시감상을 하면서
임하면 또 그에 따라
좋은 변화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잘 보면
그렇게 해서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다 자신의 뜻처럼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고
이후 이런 삼매 수행이 점점
높은 단계에 이르면
자신과 외부를 모두 변화시킬 수 있는
여환삼매의 상태까지 나아갈 수 있고
나중에는 성불하는 단계에서
모든 번뇌를 다 끊어 제거하는
금강삼매의 상태까지 제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면 이론을 보면
최면에 걸리는 것은
순간이라고 제시하듯
수행자가 정려 수행에 들어
색계에 진입하는 것도
위와 같은 수행을 하면
곧바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정려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꾸 관심을 갖고 행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소개했지만,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만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임하던 상태와는
몸 안에서 차이를 느낌을 알 수 있다.
마음으로 그런 정려 수행을 하고
삼매 수행을 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를 대하기 쉬운데
그런 작은 실험을 통해서라도
마음이 중요하고
그리고 평소
현실에서는 계속 대하는 감각과 분별로
혼탁한 상태이므로
이것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맑게 해야
그런 정신과 함께
가장 근본되는 근본정신이
다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더 나아가 그 안에 들어 있던
무명(어리석음)과 번뇌를 제거하고
대신 밝은 깨달음(보리)를 채울 수 있게 된다는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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