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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교에서 논리와 서술의 의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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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493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원래 어떤 내용을 제시하는데
서양식 방식과 인도식 방식이 있다고 본다.
서양식은 대강 이런 식이다.
s 는 m 이다.
m 은 P 다.
∴ 그래서 s 는 p 다.
그런데
인도식은 대강 이런 식이다.
s 는 p 다.
왜냐하면 s 는 m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m 은 P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m` 와 같은 사례와 같고
~p` 와 같은 사례가 그렇지 않는 것과 같다.
∴ 그래서 s 는 p 다.
두 추론식이 갖는 의미는 서로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여하튼
짧은 내용을 제시할 때는
두 방식에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논의하는 입장에서는 앞의 방식이
낫다고 보기도 한다.
결론은 자신의 마음에 이미 있지만,
미리 제시하기보다는
하나하나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사정을 설명해가면서
결론은 나중에 제시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보게도 된다.
미리 제시한다해도
상대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입장에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겨
미리 거부해버린다면
그렇게 미리 제시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논의하다보면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할 수도 있으므로
일단 자신의 결론은 가설로 자신의 마음에만 두고
이 결론을 도출해내는데 필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제시해가며
결론을 천천히 논증해 가는 것이 낫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입장은
이 과정이 짧으면 좋지만
길어지면 답답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상대가 도대체 무슨 내용을 최종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재미도 없는 내용을 계속 늘어 놓으며
복잡하게 이야기하는가.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종국적으로
어떤 결론을 향하고 있는가.
그런 것을 상대입장에서 파악하기 어렵고
그 결론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지겹게 느껴지기 쉬운 것이다.
인도식은 이 경우와는 다른데
서양 추론식은 서양추론식대로
그 안에 문제를 갖고 있지만,
그러나 인도식은 또 인도식대로
논리 추론식상 또 다른 다양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인도 논리학의 전통에서는
이런 논리의 문제를
어떤 주제를 놓고 시시비비를 다투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승패를 다투는 경기처럼
이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구가 돈다 안 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논의한다면
돈다고 주장하는 이와
돌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가
서로 어떤 자리에서 만나
논리규칙에 의해 논의를 진행해서
여기에서 논의를 하는 어떤 쪽이 이기고 지는가
이런 문제로 이 논리문제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지구가 돈다 안돈다의 문제를
두 사람이 만나 승패를 다투고 논의한 다음
서로 어떤 내용에 합의한다고 해서
안 돌던 지구가 갑자기 돈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데
인도 논리학은
그렇다고 보고 이 논리 문제를 임하는
바탕에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일을 다 대샹으로 가르침을
제시하고
또 한편
세상에서 존중받는 학문체계로
의학이나 이런 논리 추론도 대상으로 삼아 다루고
때로는 왕의 정치문제들도 다루기는 하지만,
그러나 불교의 본 입장은
의학이나 논리학이나 세간의 관심사를
다루는 것이 그 본 취지는 아닌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필요하기에
이것을 같이 살피는 것뿐이다.
그래서 인도의 인명론의 내용이
불교에서 경전이나 논서 등에서
일부 다뤄지지만,
이런 사정으로
부처님이 그런 내용 자체를 제시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이는 불교 경전에서
당시 사상가들이 논의하던
62 견이나 6 사외도의 내용 등을 소개한다고 해서
이들 내용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잘못된 이해인 것이다.
원래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불교 경전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수행자가 오직 불교 가르침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으로 함께 익혀야 할 학문분야가
다양하게 제시되고 [오명]
또 그것뿐만 아니고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수행자가
배우고 익히지 않아야 할 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세상에서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는 그 일체의 내용[진사혹]을
해결하기 위해
수행자가 배우고 익혀야 할 내용은 무량하다고
경전에 제시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가 불교의 가르침을 배울 때에도
중생제도를 위해 기본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할
중요한 내용에 5 명이 제시되는데
1, 문법학이나 훈고학에 상당하는 성명(聲明).
2, 공예와 기술 또는 역학(曆學) 등을 연구하는 공교명(工巧明).
3, 의학과 약학에 상당하는 의방명(醫方明).
4, 논리학인 인명(因明).
5,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는 내명(內明)
이렇게 분류해 제시하게 된다.
이들이 수행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기본적 내용이 된다고 보기에
그런 내용이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약사여래님은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방편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방편을 무량하게 익힌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관세음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대로
중생들이 갖는 소원을 성취시켜줌을 방편으로
중생들이 보리를 얻게 하기 위해
중생이 갖는 소원을 성취시켜 줄 방안을
또 무량하게 익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방편에 대해 수행자가
닦아 나가는 사정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 세상의 온 존재를 놓고
그 일체에 대해 적용되는 내용인 것이기에
세상의 존재 가운데
부처님의 법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본래 있을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만화책이나 소설책도
부처님의 법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그런 사정만으로 이들 엉터리 만화책이나 소설책의 내용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내용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이 미치는 대상인 것이지만,
그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라고 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일체 존재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모든 생명이나 모든 존재가
다 부처님이라거나 수행자라고 볼 수 없는 것과도
사정이 같다.
사정이 이러므로
불교 안에서 질병과 관련된 의학적 문제해결을 위해
다라니가 제시된다거나
또는 논리학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명론의 내용이
경전이나 논서에서 제시된다거나
또는 다른 견해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다른 외도 사상가들의 견해를 소개한다거나 해도
그런 취지에 의해서 제시된 것뿐이지,
이들 내용을 곧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단 주의해야 한다.
세속에서 연구를 행하던 이들이
어느 계기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고
그들 입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논리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하여
인도 논리학이라고 할 인명론 내용이
불교내에 들어오게도 되고
또 그것이 불교 논사들에 의해 변형되어
오늘날 대하는 불교 인명론의 형태를 갖추고
논서에서 일부 제시되는 사정이 있지만,
그 역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자칫 불교내 논사가
이런 문제를 다루었다고 해서
그런 인명론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오해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기에
먼저 이 점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는 그외의 분야로서
의학이나 기술학이나 때로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술도 역시
수행자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면 익히고
배우고 닦아야 할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내용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보는 것이
곤란한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
그리고 이런 내용이
문수보살님의 아라바자나 다라니에서
'나'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망상분별을 전개하고 임하는 세속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면
그 망상분별상태에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이나 내용을 통해서
이 사정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방편상 낫다고 보기에
다시 세속에서 취하는 그런 추론 체계를 통해서
이 사정을 설명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방편상 그런 내용을 빌려서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하고
처음 논의에 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어떤가.하면
서양 논리식이던
인도 논리추론식이던
또는 요즘 논의되는 새로운 망상분별 엉터리 추론식인
기호 논리학이던
귀납추론식이던
기본적으로 하나같이 엉터리다.
그러나 엉터리지만, 또 제각각
약간의 장점도 있는 것이고
또 역설적으로 이들 내용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이것이 또 어느 정도 필요하다.
이런 입장인 것이다.
부처님이 수많은 말씀을 경전에서 하신 것인데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시 부처님이 어느 순간
부처님이 그 동안 한 마디라도 설한 적이 있다고 보는가라고
제자에게 거꾸로 묻고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고
부처님이 설한 그러한 내용 역시도
모두 희론이라고 제시하는데
그러면 왜 희론인 그런 내용을 그렇게
많이 제시했는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역시 경전에 그에 대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런 내용 역시 희론인 것이지만,
그러나 부처님이 그런 희론을 그렇게 제시해주지 않으면
세상의 전도망상분별을 일으켜 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망상분별이 망상분별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 힘들므로
그것이 희론임을 깨닫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런 희론을 제시한 것일뿐
실로 한마디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인 것이다.
그러니 이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하고
경전을 대해도 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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