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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1-20_별역잡아함경_010 본문
『별역잡아함경』
K0651
T0100
제10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별역잡아함경_K0651_T0100 핵심요약
♣0651-010♧
『별역잡아함경』
제10권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별역잡아함경 제10권
역자 미상
190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당시 독자(犢子) 범지(梵志)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여래를 위문한 후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의심이 약간 있어서 묻고 싶습니다.
당신께서는 아시는 것이 많사오니,
원컨대 듣고 살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다면 그대가 묻고 싶은 대로 물어라.”
■ 독자가 물었다.
“몸과 나는 하나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나는 대답하지 않노라.”
그가 또 물었다.
“몸과 나가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일도 나는 대답하지 않노라.”
독자가 다시 말하였다.
“지금 제가 ‘나와 몸은 하나입니까?’라고 물었으나 당신은 대답하지 않으셨고,
‘몸과 나가 다른 것입니까?’라고 물었으나 당신은 역시 대답을 하지 않으니,
그런 일도 오히려 대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능히 여러 제자들에게
여기에서 죽은 후 저기에서 태어난다고 수기하십니까?
■ 하늘과 인간 속에서 당신이 그들에게 ‘여기에서 죽은 후 저기에 태어난다.’고 수기하셨다면,
어찌 몸은 여기에 머물면서 나만이 저 다섯 갈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몸과 나는 다른 것이 됩니다.”
■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취함[取]이 있으면 그에게 ‘태어남을 받는다.’고 수기하고,
만약 취함이 없으면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노라.
또 독자여! 비유컨대 저 불[火]이 취함이 있으면 타고,
취함이 없으면 타지 않는 것과 같다.”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저는 취함이 없이 타는 불을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떤 불이 취하지 않는데도 타는 것을 보았는가?”
독자가 또 말하였다.
“비유컨대 큰 불이 매우 치성한 것을 볼 때 맹렬한 바람이 불꽃을 없애면
불을 여의고서 타는 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불꽃을 끊는 것도 취함이 있는 것이다.”
독자가 말하였다.
“불을 여의고서 타는 것을 보았는데,
무엇을 취한다고 여기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불꽃을 끊으면 바람으로 인하여 타게 되나니,
바람의 잡음 때문에 불꽃이 잠시 멈추게 되고,
바람의 힘 때문에 불꽃을 끊는 걸 볼 수 있노라.”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불은 그럴지 몰라도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 왜냐 하면 몸이 여기에서 죽으면 의식은 저기에서 태어나니,
그 중간에 무엇이 그 취함이 되겠습니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를 당하면 애욕으로 취함을 삼나니,
애욕과 취함의 인연으로 중생이 태어남을 받게 된다.
일체 세간이 모두 취함을 좋아하나니,
일체가 다 취함을 애착하기 때문에 일체가 다 취함이 원인이 된 것이다.
중생들은 취함을 보면 기뻐하나니,
일체 중생이 모두 그 취함에 들어간다.
여래ㆍ아라한은 취함이 없기 때문에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했노라.”
독자가 말하였다.
“저는 지금 큰 볼일이 있어서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지여! 알아서 하라.”
독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19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당시 독자 범지가 존자 대목련(大目連)의 처소에 왔었는데,
그곳에 와서는 존자에게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 있었다.
■ 이때 독자 범지는 대목련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여기에서 죽은 후
저기에 태어납니까?
나아가 태어남도 아닙니까,
태어남 아님도 아닙니까?’라고 질문하면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그 밖의 사문이나 바라문은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뜻에 따라 말해 주는데 말입니다.
내가 예전에 사문 구담에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납니까?’라고 물었는데도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시고,
또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죽으면 또한 저기에서 태어납니까?
또한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며,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까?’라고 물었는데도 모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뜻을 그 밖의 다른 사문과 바라문은 모두 대답해 주는데,
사문 구담께서는 무슨 일로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 목련이 대답하였다.
“그 밖의 사문과 바라문들은
색(色)이 원인[因]으로부터 생긴 것을 알지 못하고,
색의 소멸도 알지 못하고,
색의 의미도 알지 못하고,
색의 허물도 알지 못하고,
색의 벗어남도 알지 못하나니,
이런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색에 집착하며,
내가 저 색을 내었다고 하거나 내가 저것을 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색에 집착하며,
내가 저것을 내었다고 하거나 저것을 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색에 집착하며,
내가 저것을 낸 것도 아니고 저것을 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여래께서는
색이 원인으로부터 생기고
색이 원인으로부터 없어짐을 실답게 아시고,
색의 의미를 아시고,
색의 허물을 아시고,
색의 벗어남을 아십니다.
여래께서는 실답게 아시기 때문에
색이 저것을 냈다고 할 때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나아가 색은 생김도 아니고 생김 아님도 아니라는 것을 아셔서
집착을 두지 않으시니,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뜻은 너무나 깊어서 한량이 없고,
끝이 없어서 헤아려 알 수도 없으며,
방소도 있지 않아서 가고 옴도 없으며,
적멸하여 모습이 없습니다.”
독자 범지는 존자 대목련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19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은 어떤 질문이 있으면,
모두 적절하게 순응하면서 대답합니까?
즉,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고 하며,
나는 저기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다’라고 합니까?”
독자가 다시 말하였다.
“구담께서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무슨 까닭으로 적절하게 순응하여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은
색(色)이 원인으로부터 생긴 것을 알지 못하며,
색의 소멸도 알지 못하며,
색의 허물도 알지 못하며,
색의 의미도 알지 못하며,
색의 벗어남도 알지 못하나니,
색이 원인으로부터 생긴 것을 잘 알지 못하고,
나아가 색의 벗어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색에 대하여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하며,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고 하며,
저기에 태어나지도 않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면서 모두 다 집착을 내니,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부처님께서 또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그렇지 않아서
색의 원인을 알며,
색의 소멸을 알며,
색의 의미를 알며,
색의 허물을 알며,
색의 벗어남을 실답게 안다.
여래는 색의 원인과 색의 소멸과 색의 허물과 색의 의미와 색의 벗어남을 실답게 아나니,
색을 실답게 알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난다고 함과
나아가 태어남도 아니고 태어남 아님도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모두 집착하지 않으니,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니라.”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뜻은 매우 깊고 광대하고 한량없고 가이없어서 헤아릴 수가 없다.”
■ 부처님께서 다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서 물음에 따라 억지로 대답하지만,
■ 만약 여래에게
‘나의 색이 그것을 내었습니까,
그것을 내지 않았습니까?
또한 그것을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했습니까?
그것을 낸 것도 아니고, 내지 않은 것도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이는 올바른 이치[義理]가 없는 것이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으며,
‘내가 저것을 냈다는 것과 나아가 낸 것도 아니고
내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는 것에 대하여 모두 대답하지 않노라.”
독자가 말하였다.
“보기 드문 일입니다,
구담이시여! 당신과 제자는 뜻[義]과 뜻,
구절과 구절의 의미까지 모두 똑같아서 차별이 없습니다.”
독자가 또 말하였다.
“제가 다른 때에 사문 목건련의 처소에 가서
이 구절과 의미로써 저 목건련에게 물었는데,
구담이시여! 그 역시 이 뜻과 구절의 의미로써 저에게 대답함으로써
지금 구담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저는 지금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교법이야말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며,
또한 일찍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니,
뜻과 이치가 서로 따르면서 이 질문에 잘 대답하신 것입니다.”
독자 범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193 그때 존자 승제가전연(僧提迦旃延)이 나제성(那提城)의 군식가(群寔迦)가 사는 곳에 있었다.
당시 독자(犢子) 범지(梵志)가 볼일이 있어서 그 성에 왔다가 그곳에 이르렀는데,
볼일을 다 마치고는 저 존자 승제가전연의 처소에 가서 문안하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서 존자에게 아뢰었다.
“나는 의문이 있어서 묻고 싶으니,
만약 한가하시다면 너그럽게 저의 질문을 듣고서 해결해 주십시오.”
존자가 그에게 말하였다.
“독자여! 나는 그대의 질문을 들어 주겠으니 그리 아시오.”
■ 독자가 여쭈었다.
“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은 누가 와서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납니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모두 다 잘 대답해 주는데,
■ 어찌하여 사문 구담께서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납니까?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대답하시지 않으십니까?”
존자가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물으리니,
그대가 아는 대로 나에게 대답하시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因)이든,
연(緣)이든,
행(行)이든,
근본이든,
지어감에 따라 생긴 것이든,
색(色)이든,
무색(無色)이든,
상념이 있든,
상념이 없든,
그리고 이 인(因)으로 말미암든,
이 연(緣)으로 말미암든,
이 지어감으로 말미암든,
이 근본으로 말미암든,
이 지어감에 따라 생긴 것으로 말미암든
남김 없이 적멸해서 상념이 없음도 다한 자리입니다.
이처럼 인연도 있지 않고,
지어감도 없고,
상념도 없고,
다해서 소멸한 법도 없다면
여래께서 어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하고,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독자가 말하였다.
“가전연이시여!
그러한 인(因),
그러한 연(緣),
그러한 지어감[行],
그러한 근본,
그러한 지어감에 따라 생김,
그리고 색(色)이니,
무색이니,
상념이니,
상념 없음이니 하는 법들이 남김 없이 사라지고,
사라졌다는 상념도 없다면,
이 모든 법은 인연이 없는 것이니,
여래께서 어찌 그것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독자는 가전연의 말을 듣고 나서
마음에 기쁨을 품고 존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부처님 제자가 되신 지 얼마나 됩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지 이제 3년이 지났습니다.”
독자가 말하였다.
“가전연이시여! 당신은 큰 이익을 얻으셨습니다.
능히 대중 속에서 몸과 입과 지혜와 변재가 그와 같으시니,
짧은 시간에그러한 일을 갖출 수 있었으니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독자가 또 말하였다.
“나는 지금 볼일이 있어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존자가 말하였다.
“알아서 하시오.”
독자 범지는 존자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19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라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을 마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의문이 약간 있어서 지금 여쭙고 싶은데,
만약 한가하시다면 너그럽게 해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뜻대로 묻으라.”
독자가 말하였다.
“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은 누가 와서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납니까?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모두 잘 대답해 주는데,
어찌하여 구담께서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납니까?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올바른 이치가 없다고 하면서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묻겠으니 아는 대로 나에게 대답하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因)이든,
연(緣)이든,
행(行)이든,
근본(根本)이든,
행에 따라 생긴 것이든,
색(色)이든,
무색(無色)이든,
상(想)이 있든,
상이 없든[無想],
그리고 이 인(因)으로 말미암든,
이 연(緣)으로 말미암든,
이 행(行)으로 말미암든,
이 근본으로 말미암든,
이 행에 따라 생긴 것으로 말미암든
남김없이 적멸해서 상이 없는 다한 자리[無想盡處]이다.
이처럼 인연도 있지 않고 행도 없고,
상도 없고,다해서 소멸하는 법도 없다면,
내가 이 인연 따위도 없고 다해서 소멸하는 그 법에서
어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며,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겠는가?”
독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한 인(因),
그러한 연(緣),
그러한 행(行),
그러한 근본,
그러한 지어감에 따라 생김,
그리고 색(色)이니,
무색(無色)이니,
상(想)이니,
상 없음[無想]이니 하는 법들이 남김 없이 사라지고,
상 없음도 다한 자리라면,
이 모든 법은 인연이 없는 것이니,
제가 어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독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에 기뻐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희유하나이다, 구담이시여.
당신과 제자가 말한 뜻과 구절의 의미는 똑같아서 차별이 없습니다.”
독자가 또 말하였다.
“제가 예전에 볼일이 좀 있어서 일찍이 저 나제성 군식가가 머물던 곳에 가서
사문 승제가전연에게 그와 같은 일을 물었는데,
그도 이러한 뜻으로 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즉, 뜻과 구절의 의미와 그 문자까지도 지금 말씀하신 바와 조금도 다름이 없고 전혀 착오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제가 지금 드물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법은 옛적에도 없었고 일찍이 말씀하신 적도 없으니,
뜻과 이치가 서로 따르면서 이 물음에 잘 대답하신 것입니다.”
독자 범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19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영축산(靈鷲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일체 중생이 나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대답하지 아니하셨다.
그가 또 여쭈었다.
“나가 없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역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독자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내가 언제나 사문 구담에게 이런 뜻을 묻기만 하면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시는구나.’
그때 아난이 여래를 모시고 곁에서 부처님께 부채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독자의 말을 듣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독자가 묻는 것에 대하여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대답하지 않으시면 독자는 분명히
‘내가 여래에게 물었지만 전혀 대답을 않는다.’고 하면서 삿된 소견만 더할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옛적에 그가 ‘일체 모든 법에 나가 있는 것 같다’고 물었는데,
내가 저 독자의 물음에 대해서
예전에도 어찌 ‘일체 경에서 나가 없음을 말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면 곧 도리를 어기는 것이니,
그 이유는 일체 모든 법은 모두 나가 없기 때문이니,
어찌 나를 가지고 그에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면, 장차 그의 예전부터 어리석고 미혹된 것을 더욱 늘려 줄 뿐이다.
■ 또 아난이여! 만약 나가 있다고 말하면,
즉시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만약 나가 없다고 말하면 즉시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여래의 설법은 두 쪽에 치우치는 것을 여의고서 중도에 합하는 것이다.
즉,이 모든 법은 무너지기 때문에 항상함이 아니요,
지속되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
항상함도 아니고 끊어짐도 아닌 것이다.
■ 원인[因]이 있고 이 원인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게 된다.
만약 원인이 생기지 않으면 저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곧 행(行)이 있고,
행으로 인하여 식(識)이 있고,
식으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으로 인하여 촉(觸)이 있고,
촉으로 인하여 수(受)가 있고,
수로 인하여 애(愛)가 있고,
애로 인하여 취(取)가 있고,
취로 인하여 유(有)가 있고,
유로 인하여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고 죽음[老死]과 근심과 슬픔과 온갖 괴로움 등 온갖 고통의 쌓임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果)의 소멸도 있는 것이니,
무명이 소멸하면 행도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육입이 소멸하고,
육입이 소멸하면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하면 수가 소멸하고,
수가 소멸하면 애가 소멸하고,
애가 소멸하면 취가 소멸하고,
취가 소멸하면 유가 소멸하고,
유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어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 등 온갖 고통의 쌓임이 소멸하며,
이 소멸마저 다하면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19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당신께서는 자못
‘세계는 항상함이니,
오직 나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견해를 짓고 이론을 세우십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러한 소견을 세우지 않고,
‘오직 나만이 알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독자가 또 여쭈었다.
“당신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면,
온 세계는 모두 무상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또한 ‘세계는 무상하니,
오직 나만이 알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독자가 또 여쭈었다.
“당신께서는 또 ‘세계는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한데,
오직 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또한 ‘온 세계는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無常)하기도 한데,
오직 나만이 혼자 알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 독자가 또 여쭈었다.
“당신께서는 또 ‘온 세계는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함도 아니며,
항상함 아님도 아니고 무상함 아님도 아니니,
오직 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또한 ‘온 세계는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함도 아니며,
항상함 아님도 아니고 무상함 아님도 아니니,
오직 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 독자가 또 여쭈었다.
“세계는 끝이 있으며,
세계는 끝이 없으며,
또한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며,
끝이 있지 않음도 아니고 끝이 없지 않음도 아니며,
몸이 곧 목숨이고 목숨이 곧 몸이며,
몸이 목숨과 다르고 목숨이 몸과 다르며,
중생의 신아(神我)가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있다고 하며,
없다고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며,
있는 것 아님도 아니고 없는 것 아님도 아니다’라고
구담 당신께서는 지금 그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계가 끝이 있고, 끝이 없으며,
나아가 있음 아님도 아니고 없음 아님도 아니다’라는 소견을 짓지 않고
이론도 세우지 않는다.”
■ 독자가 다시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당신께서는 지금 이러한 법에서
무슨 허물을 보았기에 하나의 소견도 취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또한 ‘세계가 항상하니,
오직 이 일만이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어리석고 어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소견은 얽매이고 막혔으며,
그러한 소견이 행해지고 관찰되는 곳은
그러한 소견의 티끌로 더럽혀져서 깨끗하지 못하고,
소견의 얽매임이 괴로움과 함께 하면서 능히 해치기도 하고,
능히 근심과 괴로움과 함께 하여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과 뜨거움을 받게 함으로써 온갖 근심과 걱정을 내게 한다.
만약 소견의 얽매임과 상응하면 곧 어리석은 이며,
또한 배움이 없다고 말하며,
또한 범부라고 말할 것이니,
능히 생사(生死)의 소용돌이를 더욱 키울 뿐이다.”
또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항상하다고 하며,
무상하다고 하며,
또한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하며,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함도 아니라고 하며,
그리고 세계는 끝이 있다고 하며,
끝이 없다고 하며,
또한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하며,
끝이 있음도 아니고 끝이 없음도 아니라고 하며,
중생의 신아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서도 있다고 하며,
없다고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며,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 하며,
있음 아님도 아니고 없음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데,
■ 누구라도 그러한 소견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이라고 말할 것이며,
또한 배운 것도 없다고 말하며,
또한 범부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사의 번뇌와 더러운 때만 더욱 키워서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과 뜨거움을 받게 하며,
온갖 근심 걱정을 내게 하고 안락이 없게 하니,
이 때문에 나는 그런 소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가 또 여쭈었다.
“당신께서 그런 소견을 분별하지 않으신다면,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은 어떤 소견입니까?”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세존께서는 영원히 온갖 소견을 모두 다 없애 버려서 도무지 어떤 소견도 없다.
비록 보는 바가 있어도 마음에 취하거나 집착하는 것이 없으니,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를 보며,
괴로움이 쌓인 진리를 보며,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를 보며,
괴로움이 사라지는 도에 이르는 진리를 보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명료히 알고 나서
온갖 법은 모두 탐애와 번뇌의 결박이라고 보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나와 내 것이라는 것이며,
소견으로 취하거나 집착함이라고 말하며,
또한 교만이라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법은 걱정거리이다.
그러므로 모두 마땅히 끊어 없애야 하며,
이미 끊어 없애면 열반의 적멸함과 청정함을 얻으니,
이렇게 올바로 해탈하면
비구들이 다시 몸을 3유(有)에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자는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당신은 지금 어떠한 인연을 보았기에 무생(無生)의 자리를 말씀하십니까?”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물으리니,
그대의 뜻대로 대답하라.
가령 어떤 사람이 그대의 눈 앞에서 큰 불덩이를 태운다면
그대는 이 불이 타는 것을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그 불덩이가 그대의 앞에서 꺼진다면 그대는 불이 꺼지는 것을 알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그대에게
‘이 불이 꺼졌는데 동쪽으로 갔습니까,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나아가 아래쪽 등의 여러 곳 중에서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반드시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는다면 마땅히 진실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즉, ‘만약 풀과 나무와 마소의 똥이 있으면 이 불은 섶과 서로 어울리면서 문득 타고 꺼지지 않을 것이요,
만약 풀과 나무와 소똥이 모두 없어지면 이 불은 곧 꺼지는데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겠습니다.”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렇도다.
만약 색(色)을 여래라고 말하거나 수ㆍ상ㆍ행ㆍ식을 여래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여래는 이미 그와 같은 색을 끊었기 때문이며,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로 모두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다라(多羅) 나무를 끊으면 다시 나지 않듯이,
여래도 그와 같아서 다섯 쌓임을 끊고 나면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고 적멸해서 상념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무생법(無生法)이다.”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제가 지금에 비유를 말하겠으니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뜻대로 말하라.”
독자가 곧 말하였다.
“비유컨대 성읍(城邑)이나 마을에서 멀지 않은 평탄하고 넓은 곳에 사라숲[娑羅林]이 있는데,
이 사라숲은 벌써 백천 년 동안 가지와 잎이 모두 떨어졌고
오직 알맹이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 구담께서도 지금 그와 같으셔서 온갖 번뇌의 결박을 이미 끊으셨고,
네 가지 뒤바뀌고 삿된 미혹도 모두 소멸해 버려서 오직 견고한 참법신[眞法身]만 있습니다.
구담이시여! 저는 지금 볼일 때문에 곧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알아서 하라.”
독자 범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갔다.
19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물었다.
“구담이시여! 가령 어리석은 이는
‘세상은 항상하니, 오직 이 일만이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진실하지 않다’고 하며,
나아가 나는 저기에 태어나지 않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다’라는 소견을 짓고 이론을 세웁니다.”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며 이러한 말을 한다.
즉, ‘세상의 색은 모두 다 항상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 소견을 고집하여 진실로 여기고 있으며,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고 하고,
항상하다고 하고,
무상하다고 하고,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하며,
항상함도 아니고 항상함 아님도 아니라고 하며,
세상은 끝이 있다고 하고,
끝이 없다고 하고,
끝이 있음도 아니고 끝이 없음도 아니라고 하며,
끝이 있음 아님도 아니고 끝이 없음 아님도 아니라고 하며,
몸이 하나이고 정신[神]이 하나라고 하며,
몸이 다르며 정신이 다르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난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나는 여기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지도 않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니,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가령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소견을 취하지 않고 그러한 이론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다시 그런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그런 말을 하지 않나니,
요컨대 ‘세계는 항상하니 이 소견만이 옳고 그 밖의 소견은 그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색을 잘 알아서 그 성품과 모양[性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이러한 이론을 짓지 않는다.
즉,
‘세계는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거나,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거나,
항상함도 아니고 항상함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소견이 그것이다.
또 세계는 끝이 있다고 하며,
끝이 없다고 하며,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하며,
끝이 있음도 아니고 끝이 없음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몸은 하나이고 목숨도 하나라고 하며,
몸이 다르고 목숨도 다르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하며,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저기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고 하며,
저기에 태어나지도 않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또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그 성품[性]과 모습[相]을 분명히 알아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이러한 이론을 짓지 않는다.
즉,
‘식(識)은 항상하니,
이렇게 보는 것이 옳고 달리 보는 것은 그르다’라고 하는 것이며,
의식은 무상하다고 하며,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하며,
항상함도 아니고 항상함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또 식은 끝이 있다고 하며,
끝이 없다고 하며,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하며,
끝이 있음도 아니고 끝이 없음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몸이 하나이고 목숨이 하나라고 하며,
몸이 다르고 목숨이 다르다고 하며,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하며,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또 알지 못하는 이도 아는 이처럼 말하며,
보는 이와 보지 못하는 이도 아는 이처럼 말하며,
이해한 이와 이해 못한 이도 역시 그런 식으로 말하며,
통한 이와 통하지 못한 이도 그런 식으로 말하며,
모습이 있음과 모습이 없음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며,
그 뜻이 깊고 얕은 것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며,
잠을 깸과 잠을 깨지 못함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
독자 범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19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셨다.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제게 약간의 의문이 있는데,
만약 들어 주신다면 질문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셨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에도 역시 그와 같이 물었으나 부처님께서는 역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당신과 친밀하였기에 제가 좀 여쭙는 것이니,
부디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셨다.
‘독자 범지는 오랫동안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해서 아첨과 거짓이 없으며,
묻는 것마다 모두 알기 위한 것이지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니,
나는 마땅히 그가 아비담(阿毘曇)이나 비니(毘尼)에 대해 묻는 것을 들어 주어야겠다.’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묻고 싶은,
의심나는 것을 망설이지 말고 묻으라.”
독자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온 세간에는 착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있느니라.”
그는 또 여쭈었다.
“그렇다면 착한 것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있느니라.”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부디 저를 위하여 착한 법과 착하지 못한 법을 말씀하셔서 저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십시오.”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러 가지로 착한 법과 착하지 못한 법을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대를 위하여 대략 그 요점만을 말하겠다.”
■ 부처님께서 또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애욕은 착하지 못한 것이요,
애욕을 떠나는 것은 착한 법이다.
성냄과 어리석음은 착하지 못한 것이라 칭하지만,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나는 것은 착한 법이라 칭하며,
살해하는 것은 착하지 못한 것이요,
살해하는 짓을 떠나는 것은 착한 법이며,
도둑질함과 삿된 음욕과 거짓말함과 악담함과 이간함과 탐냄과 성냄과 삿된 소견은
착하지 못한 것이라 말하고,
그와 같은 것들을 떠남과 바른 소견은 착한 법이다.
내가 그대를 위하여 세 가지의 착하지 못한 것과 세 가지의 착한 것,
열 가지 착하지 못한 것과 열 가지의 착한 것을 말했노라.”
■ 부처님께서 또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나의 제자가 이 세 가지의 착한 것과 착하지 못한 것,
그리고 열 가지 착한 것과 착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서 실답게 알 수 있다면
문득 애욕이 다하게 될 것이며,
성냄과 어리석음도 영원히 없어지고
탐욕과 온갖 악도 남김 없이 없어질 것이다.
능히 탐욕과 어리석음을 없애기 때문에 모든 애욕의 번뇌가 몽땅 다하며,
그 번뇌가 다하기 때문에 샘이 없게[無漏] 되어서
마음이 해탈을 얻고 지혜가 해탈을 얻으며,
견법(見法) 속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증지(證知)하여 법을 얻으니,
스스로 태어남이 다하고 범행이 수립되고 할 일을 이미 끝내서
다시는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음을 안다.”
독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느 하나의 비구로서
부처님의 교법에서 샘이 없음[無漏]을 성취하여
마음의 해탈을 얻고 지혜의 해탈도 얻으며
견법 속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증지하여 법을 얻으니,
스스로 태어남이 다하고 범행이 수립되고 할 일을 이미 끝내서
다시는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 이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그 법을 얻은 이는 하나와 둘, 그리고 셋, 넷이 아니라
5백 명에 이르는 많은 비구며,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고 지혜의 해탈도 얻어서
현재의 법에서 자신이 증득하였노라.”
독자가 또 여쭈었다.
“부처님의 교법에서 어느 하나의 비구니로서
마음의 해탈을 얻고 지혜의 해탈도 얻은 이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교법에서 비구니들로서 이 법을 얻은 이가 하나와 둘,
셋이 아니라 5백 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효가 무척 많느니라.”
독자가 또 여쭈었다.
“저 비구와 비구니를 제외하고
어느 하나의 우바새로서 의혹을 벗어나 저 언덕에 도달한 이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불법 중에서 모든 우바새로서 의혹을 벗어나 저 언덕에 도달한 이가
하나와 둘과 셋이 아니라 5백 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효가 무척 많나니,
그들은 5하분결(下分結)을 끊고 아나함(阿那含)을 성취하여 욕계에 돌아오지 않노라.”
독자가 또 여쭈었다.
“비구ㆍ비구니로서 범행을 닦는 이와 우바새를 제외하고
어느 하나의 우바이(優婆夷)로서
의혹과 후회를 없애고서 의혹을 벗어나 저 언덕에 도달한 이가 있습니까?”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불법 중에서 이 법을 얻은 이가
하나와 둘과 셋이 아니라 5백 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효가 무척 많나니,
그들은 5하분결(下分結)을 끊고 아나함(阿那含)을 성취하여 욕계에 돌아오지 않노라.”
독자 범지가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비구ㆍ비구니와 우바새ㆍ우바이로서 범행을 닦는 이를 제외하고
이 불법 중에서 혼자 집에 머물면서
5욕락을 누리는 우바새로서 의혹을 벗어나 저 언덕에 도달한 이가 있습니까?”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불법 속에서 하나와 둘과 셋이 아니라 5백 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효가 무척 많나니,
그러한 사람들은 남녀의 무리들과 함께 가까이하고 거주하면서 향과 꽃과 영락과 좋은 비단옷을 몸에 걸치고,
좋은 전단향과 온갖 미묘한 향을 그 몸에 바르며,
금과 은과 갖가지 보물을 사용하고 지니며,
노비와 동복(僮僕)의 수효도 무척 많나니,
이러한 시끄럽고 복잡한 속에 있으면서도★★
능히 3결(結)을 끊고 수다원(須陀洹)을 성취하여
결정코 삼보리(三菩提)에 이르러서 온갖 괴로움의 경계가 다한다.
아주 둔한 근기는 운(運)에 맡겨 일곱 번을 태어나는데,
세 가지 나쁜 갈래에는 태어나지 않고 인간과 천상에 유전하면서
자연히 온갖 고통의 변제(邊際)를 다하게 된다.”
독자가 또 여쭈었다.
“비구ㆍ비구니와 우바새ㆍ우바이로서 범행을 닦는 이를 제외하고,
또 애욕 속에 있는 우바새로서 수다원을 성취한 이를 제외하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우바이가 된 여인으로서
애욕 속에 있으면서도 의혹을 벗어나 저 언덕에 도달한 이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불법에 있는 모든 우바이로서 애욕 속에 있으면서도 의혹을 벗어난 이가
하나와 둘과 셋이 아니라 5백 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효가 무척 많나니,
그 모든 우바이는 비록 집에 있으나 우바새처럼 3결(結)을 끊고 수다원을 성취하였노라.”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당신께서는 보리로서 이미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범행을 닦는 비구ㆍ비구니와 우바새ㆍ우바이와
애욕에 처해 있는 우바새와 애욕에 처해 있는 우바이 등의 사람들이라도
도의 행(行)을 갖추지 못하면 곧 지엽적이 되어서 원만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또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당신께서는 지금 이미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셔서 과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비구ㆍ비구니와 범행을 닦는 우바새ㆍ우바이와
애욕에 처해 있는 우바새와 애욕에 처해 있는 우바이도
모두 과위를 증득하게 되면 부처님 교법에서 구족한 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독자는 또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제가 지금 즐겁게 비유를 말하겠으니,
부디 저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뜻대로 말하라.”
“비유컨대 하늘에서 큰비를 내리면 내리는 대로 물이 흘러서 큰 바다에 들어가듯이,
당신의 교법도 마찬가지라서
남녀 노소와 아주 늙은 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법의 비를 맞아서
오래 지나면 다 열반에 나아가게 됩니다.
거룩하십니다,
구담이시여.
거룩합니다,
미묘한 법이여.
거룩합니다,
부처님 교법(敎法)에 능히 들어가는 이들이여.”
독자가 또 말하였다.
“제가 지금 여쭙겠습니다.
가령 출가해서 범행을 닦는 사람은 얼마 만에 부처를 이룰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외도의 이학(異學)들이 불법 속에서 출가를 구하면,
먼저 그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넉 달을 지낸 후
대중 스님들 속에서 마음과 뜻이 조복되고 부드러워진 후에야 계(戒)를 받게 되지만,
반드시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니,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서 정하게 된다.”
독자 범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말하였다.
“만약 출가를 허락하셔서 계를 받게 된다면,
설령 4년이라도 저는 하겠사온데 하물며 넉 달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까 그대에게 두 종류의 사람을 말했는데,
누구에게나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말하였다.
“구담께서는 아까 정말로 그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지금 저 독자에게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어라.”
비구들은 부처님의 분부를 받자 곧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까지 주었다.
비구법대로 존자 독자는 도를 부지런히 닦아서
반 달 안에 배움의 지위[學地]를 갖추고서 법을 알고 법에 도달하고,
법을 보고 법을 깨달았으며,
이미 배움의 과위[學果]를 얻고서는 알고 이해하며 법을 증득하였다.
존자 독자는 ‘나는 지금 부처님 처소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즉시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배움의 지위를 모두 증득하여 알았습니다.
부디 세존께서는 거듭 저를 위해 말씀하셔서
저로 하여금 법을 듣고 마음을 해탈케 하소서.”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 “네가 만약 마음의 해탈을 빨리 구하고 싶다면,
마땅히 두 법을 닦아야 하고
마땅히 두 법을 배워야 하고
마땅히 두 법을 넓혀야 하나니,
두 법은 이른바 지혜와 선정을 말한다.
만약 그와 같이 닦고 익히고 넓힐 수 있다면,
이야말로 갖가지 경계를 알며
온갖 경계를 통달하며
무수한 경계[界]를 아는 것이라고 칭한다.”
부처님께서 또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비구가 만일 애욕과 악과 착하지 못한 것을 여의어서
지각[覺]과 살핌[觀]으로 초선(初禪)에 들어가고 싶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마땅히 두 법을 닦아야 하나니,
바로 선정과 지혜이다.
나아가 4선(禪)과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와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와 불용처(不用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자여!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을 얻고 싶다면 모두 다 그와 같은 두 법을 배워야 하고,
신족통을 배우려 하거나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배우려 하거나
전생 일을 알려 하거나
하늘 눈과 하늘 귀를 얻으려 하거나
번뇌가 다한 지혜를 얻으려고 할 때도 마땅히 두 법을 닦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법을 더 넓히면 갖가지 경계를 알며 온갖 경계를 통달하며 무수한 경계를 안다.”
존자 독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 갔다.
대자비의 여래께서 갖가지 인연으로 가르치고 지도하시니,
■ 독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조용한 곳에서 혼자 앉아 부지런히 닦고
마음이 방일하지 않으면서 항상 선정에 있었다.
족성자(族姓子)로서 수염과 머리털을 깎은 것은
바로 위없는 범행(梵行)을 닦기 위한 것이니,
이 때문에 현재의 법에서 자신(自身)이 증득하게 되고
나의 태어남이 이미 없어지고 범행이 수립되고
할 일을 마쳐서 다시는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부처님 처소에 오고 있었는데,
존자 독자가 비구들을 보고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어디에 가려고 합니까?”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부처님 처소에 가서 친견하고 공양을 올리려 합니다.”
독자 비구가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부처님 처소에 가면
저의 말로 세존께 ‘기거가 편하시며 병이나 괴로움은 적습니까?’라고 문안을 드려 주시고,
또 저를 위하여 ‘독자 비구는 이미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법을 위해 공양하면서
부처님의 행하신 바를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여쭈어 주십시오.”
그러자 비구들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존자 독자 비구가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세존께 ‘기거가 편하시며 병이나 괴로움은 적습니까?’라고 문안을 드려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독자 비구는 또 ‘저를 위하여 부처님께
〈저는 이미 수행으로 부처님말씀을 따르고 있으며,
세존께서 행하신 바를 제가 이미 갖추어 얻었습니다〉라고 여쭈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보다 먼저 천자가 나의 처소에 와서
‘독자 비구는 이미 아라한을 성취했다’고 말하였다.
내가 가장 먼저 알고 있었고
천자가 그 뒤에 전달했는데,
그대들은 지금 천인보다 더 뒤에 말하는구나.”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저 독자가 이미 아라한을 성취했다고 수기하셨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신명(身命)과 목련
보기 드문 일과 가전연
전에 없었던 것과 나 있음
여러 가지 소견과 어리석음
독자가 출가한 것이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1/20/월/22:40
- 얻을 수 없음을 이해시키는 언어 방편시설에 대한 망집
『별역잡아함경』 제 10 권에서는 '독자'라는 이가 부처님께 다양한 질문을 한다.
그런데 희론을 일삼고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고 정말 궁금해 질문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쳐 나중에 아라한이 되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독자'가 계속 질문을 던지는데
부처님이 답을 왜 안하셨는가가 문제된다.
경전에서도 밝히듯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알고보면
과거에 이미 경전에서 말씀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독자'가 질문할 때는 답을 왜 안하셨는가가 문제된다.
불교신자라면 일체가 무상하다라거나
또는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어 무아다.
또 생명은 생사과정에서 윤회한다.
그래서 죽으면 하늘에서 태어나거나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내용을 경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이 독자가 질문할 때는 왜 그런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답을 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이전에 『종경록』을 살필 때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살폈다.
그 사정이 『별역잡아함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 이때 독자 범지는 대목련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여기에서 죽은 후 저기에 태어납니까?
나아가 태어남도 아닙니까,
태어남 아님도 아닙니까?’라고 질문하면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 당시 독자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일체 중생이 나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대답하지 아니하셨다.
그가 또 여쭈었다.
“나가 없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역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 독자가 또 여쭈었다.
“당신께서는 또 ‘온 세계는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함도 아니며,
항상함 아님도 아니고 무상함 아님도 아니니,
오직 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0651-010♧ 『별역잡아함경』
(목건련의 대답)
■ 이러한 뜻은 너무나 깊어서 한량이 없고,
끝이 없어서 헤아려 알 수도 없으며,
방소도 있지 않아서 가고 옴도 없으며,
적멸하여 모습이 없습니다.”
■ 부처님께서 독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색을 잘 알아서 그 성품과 모양[性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이러한 이론을 짓지 않는다.
즉, ‘세계는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거나,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거나,
항상함도 아니고 항상함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소견이 그것이다.
■ 만약 그 성품[性]과 모습[相]을 분명히 알아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이러한 이론을 짓지 않는다.
■ 이 행에 따라 생긴 것으로 말미암든
남김없이 적멸해서 상이 없는 다한 자리[無想盡處]이다.
이처럼 인연도 있지 않고 행도 없고,
상도 없고,다해서 소멸하는 법도 없다면,
내가 이 인연 따위도 없고 다해서 소멸하는 그 법에서
어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며,
나아가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겠는가?”
■ 옛적에 그가 ‘일체 모든 법에 나가 있는 것 같다’고 물었는데,
내가 저 독자의 물음에 대해서
예전에도 어찌 ‘일체 경에서 나가 없음을 말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면 곧 도리를 어기는 것이니,
그 이유는 일체 모든 법은 모두 나가 없기 때문이니,
어찌 나를 가지고 그에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면, 장차 그의 예전부터 어리석고 미혹된 것을 더욱 늘려 줄 뿐이다.
■ 또 아난이여! 만약 나가 있다고 말하면,
즉시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만약 나가 없다고 말하면 즉시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여래의 설법은 두 쪽에 치우치는 것을 여의고서 중도에 합하는 것이다.
즉,이 모든 법은 무너지기 때문에 항상함이 아니요,
지속되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
항상함도 아니고 끊어짐도 아닌 것이다.
■ 원인[因]이 있고 이 원인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게 된다.
만약 원인이 생기지 않으면 저것도 생기지 않는다.
♣0651-010♧ 『별역잡아함경』
이들 내용은 『종경록』을 살필 때 본 내용과 같은 맥락임을 볼 수 있다.
그래도 구절이 다르므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별역잡아함경』에서 부처님도 과거에는
일체 경에서 나 없음[무아]를 말했음을 밝힌다.
그런데도 독자가 물어볼 때는 답을 하지 않은 사정이 있다.
부처님께서 무상이나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 연기 윤회
이런 것을 말씀하실 때는 치우친 견해를 떠나서
있는 그대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방편시설로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들을 그런 취지로 잘 이해해야 마땅하다.
또 『금강경』에서 제시되듯,
그런 사정으로 비록 부처님이 언설을 통해 일정한 말씀을 하시지만
사실은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설법은 결국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제시한 방편
즉, 강을 건너는 일종의 뗏목으로 여기라는 말씀의 취지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
'독자'는 오늘날로 말하면 이면 이고 아니면 아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하라는 식으로 임하는 심한 망집환자 상태다.
그래서 무슨 답을 해주어도 부작용이 발생하는 상태로 부처님이 보신 것으로 나타난다.
그 사정이 위 경전에 나타난다.
■ 또 아난이여! 만약 나가 있다고 말하면,
즉시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만약 나가 없다고 말하면 즉시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여래의 설법은 두 쪽에 치우치는 것을 여의고서 중도에 합하는 것이다.
상대가 망집상태에서 늘 잘못 이해하고 나아가는 상태에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해야 한다.
오늘날 경전을 대하는 독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문제될 때 대부분 다음 자세를 취한다.
즉, 이면 이고 아니면 아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해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형태로 제시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우 답답하게 여긴다.
그리고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반복해 대하면
그 때 그 때 마음대로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해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잘못 생각하게도 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해야 한다.
있고 없음의 문제에 대해서
과거에 이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문제되는 사정을 자세히 살핀 적이 있다.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3483#069
sfed--금강삼매경론_K1501_T1730.txt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sfd8--불교단상_2562_08.txt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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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 아주 독특한 커피를 맛 본 이에게 다가가
그 커피가 맛이 쓴가 아니면 쓰지 않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때 그 사람이 그 맛을 말로 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니 쓰면 쓰고 쓰지 않으면 쓰지 않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왜 말을 하지 않는가. 이렇게 따져 묻든 경우와 같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커피 맛 하나 조차도 쓰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않다 이렇게
간단히 나눌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어떤 커피를 마실 때 어떤 맛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맛부터 본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부터도 쉽지 않다.
이런 감각현실을 넘어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그 상황이 한층 더하다.
그리고 경전에서 그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사정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경전에서 목건련존자나 가전연존자. 그리고 부처님이
다 비슷한 사정을 말씀하신다.
방소도 있지 않아서 가고 옴도 없으며,
적멸하여 모습이 없습니다.”
...
남김없이 적멸해서 상이 없는 다한 자리[無想盡處]이다.
이처럼 인연도 있지 않고 행도 없고,
상도 없고,다해서 소멸하는 법도 없다
...
♣0651-010♧ 『별역잡아함경』
답하기 어려운 사정을 위와 같이 제시한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눈을 떠서 볼 때
누군가 서 있다. 그리고 자신을 보더니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그래서 저기 달려 오는 것이 영희인가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또는 거리에 영희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이 때 일반인 입장에서 말하면 쉽다.
저기 영희가 달려온다. 영희가 저기 있다고 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인이 대부분 같이 걸려 있는 망집증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증상 때문에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어떤 이가 망집을 떠나서
다른 이를 망집을 떠나게 하기 위해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려면 답하기가 곤란해진다.
앞과 같은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 놓고 살핀다면
그 상황에 그런 '영희'는 얻을 수 없다.
또 영희가 달려옴이 있는가를 살피면 '달려옴'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심지어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부분을 '영희'라고 잘못 여기고
무언가를 달려온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망집증상이 대단히 견고하다.
현실의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런 망집증상과
그에 바탕해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그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어서
상대가 이해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정을 제시하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도 정도 따라 다르다.
만일 상대가 경전에 나오는 독자처럼 망집상태가 심하면
어떤 언설도 부작용을 일으키기 쉽다.
특히 경전에 나오는 독자와 같이 이런 망집을 심하게 일으킨 상황에서는
언어로 진술된 내용을 놓고 접착시켜서 이해한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영희가 없다고 답하면
독자와 같은 경우는
어떤 이가 눈을 떠 보게 되는 모습마저도 없다고 하는 것으로 잘못 여긴다.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하는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데 다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제시하면
또 이제 반대로 극단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그런 눈으로 보는 감각현실로서 그런 영희 모습에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와 같은 내용도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영역도 사정이 그러하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의 영희도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접착시켜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살피려면
그가 갖고 있는 이런 접착 증세부터 먼저 해결하고 살펴야 한다.
그가 갖는 대표적 증상은 다음이다.
우선 현실에서 그런 이에게 어떤 것을 영희라고 여기는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즉 그는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 가운데 일정부분이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라고 여기며 현실을 대한다.
그리고 영희라는 말이나 분별 내용이 곧 그런 부분을 가리킨다고 여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망상분별 증상이다.
그리고 이처럼 존재가 문제되는 영역의 내용을 모두 접착시켜서 이해한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이 문제되면 역시 마찬가지로 임한다.
그리고 참된 진짜의 실체가 있는가 문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임한다.
그런데 경우를 나누어 보자.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은 얻어진다. 즉, 눈을 떠서 보니 무언가가 보인다.
그리고 그 부분이 영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희라는 생각은 그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하자.
이런 경우 복잡하다.
관념 영역에는 영희란 생각을 일으켜 얻고 있다. 그래서 있다.
그런데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간단히 있다 없다로만 나눠서 말해야 할 듯 하지만, 사정이 복잡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실답게 있지 않다' 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 말은 아주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선 문제삼는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얻는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대해서 일정한 관념분별도 일으킨다.
그런데 그 감각현실 부분에는 그런 관념분별은 얻을 수 없다.
그 관념분별은 관념분별 영역에서만 있다.
그런 관념분별은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 부분은 그런 관념분별이 아니다.
따라서 그 감각현실 부분이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켰다고해서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거나,
그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즉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라거나,
영희가 그 부분에 있다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영희도 그렇지만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도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대부분 현실에서 이렇게 임한다.
영희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손가락으로 역시 일정부분을 가리키면서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자신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도 이와 사정이 같다.
이것을 현실에서 상을 취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대부분 가장 기본적으로 일으키는 망집현상이다.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이 사정이 앞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전에서 '이름뿐이다'라고 이 사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취지에서 보살이나 반야바라밀도 다 이름뿐이다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문제삼게 되는 그런 내용은 얻는다.
그래서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이 그처럼 얻어진다는 그런 측면에서는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있더라도 '실답게 있는 것'은 아니다.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내용은 역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라고 할 참된 내용도 없다.
즉, 그렇게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을 그런 조건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얻고 있을뿐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경전에서 주로 '없다'라고 하는 표현은 이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앞과 같은 측면으로 '다른 영역'에서 그런 내용이 '있고 없음'을 따지는 것이
어떤 것이 실다운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주로 문제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목건련 존자가 오고감이 없다라고 말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오고 간다고 보게 되는 그 상황을 놓고
경전에서 그 상황에 '오고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없다라고 표현하면
망집을 일으켜 각 영역의 내용을 접착시켜 대하던 입장에서는
모든 영역에서 그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일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극단으로 나아간다.
이제 그 극단을 수정하려고 다음과 같이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주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얻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반대로 극단으로 나아간다.
이 때는 그런 것이 모든 영역에서 다 얻어지고,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사정들이 대단히 복잡하게 각 문제마다 있다.
이런 경우는 그렇게 언어표현을 이해하고 대하는 그 상대 입장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방편적으로 언어시설을 통해 그런 문제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경우는
일단 그런 언어에 대해 상대가 갖는 망집 증상부터 먼저 잘 치료하고
그런 상태에서 방편시설을 제시해야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내용을 제시해도 부작용이 생긴다.
처음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집착증상을 제거하려고
가장 기초적으로 무상하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상대가 집착하고 대하는 것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망집증상을 갖는 이는 경우는 이 말로 일체가 없다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나중에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 부처님이 아주 없게 된다고도 잘못 여긴다.
그래서 열반경 등에서는 이런 망집증상을 제거하려고
상락아정이라고도 표현하고 다시 '있다'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처음 부작용을 해소시키고자 이렇게 표현해 제시하지만,
그런데 이 경우도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어렵다.
어떤 이가 죽어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는가 아닌가의 문제도 사정이 같다.
이 문제를 독자가 이해하려면
처음 현실에서 영희라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먼저 놓고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가 있다고 보는가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
만일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가운데
그런 영희가 저기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영희의 상(想-분별내용)을 바탕으로 감각현실의 부분을 취한 것이다.
즉, 상(相)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영희의 상을 취하기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아상을 취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윤회가 진행된다고 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여기는 상태 이후에는
그가 그런 바탕에서 평소 어떤 업을 행했는가에 따라 이후
축생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하늘에 가서도 살아갈 수 있다.
경전에서 다음부분이 관련된다.
■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취함[取]이 있으면 그에게 ‘태어남을 받는다.’고 수기하고,
만약 취함이 없으면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노라.
그런데 앞 상태에서 그런 상을 제거하면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망집을 시정하는 것이 무상해탈삼매 수행이다.
그런 바탕에서는 생사의 묶임에서 기본적으로 떠나게 된다.
원래 기본적으로 여래와 축생을 극단적으로 놓고 이 문제를 살필 수 있다.
일반적 입장에서는 여래는 올바로 깨달은 분이고 축생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차이가 있다.
한편 이 문제를 앞에 서술한 여러 측면을 놓고 보면
그 사정이 위와 달라진다.
○ 기초 단계에서 생사고통을 예방하기 위한 가르침
우선 현실의 망상분별 상태를 100% 일반인 상태처럼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피면 위 내용이 적용된다.
즉 여래와 축생의 차이는 극단적이다.
그 중간에 수행자나 일반 인간이 있다.
그런데 만일 본 바탕의 측면을 100% 붙잡고 임한다고 가정하면
일체 언설을 떠나고 그런 차별을 세울 수 없다.
그런 것을 모두 차별없이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본 바탕에서는 앞과 같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나 생사 자체를 얻을 수도 없다 .
그러니 그런 것이 문제이므로 그것을 해결하라는 요청자체도 없다.
본 사정이 이렇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본 바탕의 측면만 강조하고
생사현실을 방치할 수 없다.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지만, 꿈과는 또 달라서
각 주체가 대단히 매순간 생생하게 진짜처럼 여기며 대한다.
그리고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다수의 주체가 유사한 현상을
무량겁에 걸쳐서 반복한다.
그래서 실답지 않지만, 이런 상태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방치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생사현실에 들어오셔서
그 사정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방편시설을 통해 점차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도중이다.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 이 문제해결이 곧바로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초적으로 각 중생이 집착을 갖는 것들이 '무상'함을 강조해서
원인단계에서 생사고통을 받게 될 업을 행하지 않도록 먼저 이끌게 된다.
그래서 일단 그런 업으로 겪게 될 생사고통을 예방하게끔 하는 것이다.
○ 고급 단계로 불퇴전위에 이르게 하기 위한 가르침
그런데 점차 수행단계가 높아지면
이제 본 바탕의 측면을 99% 정도 기준으로 잡고
생사현실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 역시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차별없이 일체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게 된다.
최근 살폈던 『잡보장경』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문수사리보살님이 다음고 같은 극단적인 말씀을 하신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천자여,
여래라 함은 곧 허공의 경계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공이 곧 여래요,
여래가 곧 허공이어서 허공과 여래는 둘이 없고 구별도 없습니다.
♣0022-103♧ 『대보적경』 3) 문수신변품(文殊神變品)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일반적인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치에 맞지 않다.
일반 생사현실에서 부처님은 깨닫고 사리분별을 잘 하시고 설법을 잘 해주시는 분이다.
허공은 그런 특성이 없다.
그리고 현실에서 허공을 놓고 부처님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그런 측면이 아니다.
그래서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차별 일체를 얻을 수 없고 공하다.
따라서 본 바탕의 이런 측면을 기준으로 잡고
생사현실에서 일으킨 망집 일체를 남김없이 제거하라는 취지다.
그래야 수행자가 불퇴전위를 오를 수 있게 된다는 취지다.
이렇게 입장이 다르다.
여기서 살핀 문제는
영희라는 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다는 과정만 놓고서도 다 똑같이 적용된다.
현실 한 단면에서 일정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그 부분이 영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집을 일으킨 상태다.
그런 상태에 있는 상대에게 그 망집을 벗어나게 하려면
일단 상대가 이해하는 언설을 통해서 일단 방편시설을 해서
점차 그런 내용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방향을 수행으로 돌려서 쌓여진 업의 장애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상태에서 장차 받게될 생사고통을 일단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수행을 계속 행하면
일단 생사고통이 덜한 하늘과 인간을 7 번 정도 오가는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점차 현실의 본 정체를 깨닫게 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 핵심이 기본적으로 일으키는 망집과 근본 어리석음 무명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다음 그런 상태에 이른 수행자가
다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계속 행하게 된다.
이는 앞과는 다른 측면이 된다.
그런데 지금 『별역잡아함경』에서 살피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단 그 당사자가 그런 망집을 제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일단 생사의 묶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당면 목표다.
그리고 생사묶임에서 벗어난 수행자가
이후 다른 중생의 제도를 위해 수행할 때는
그런 본 바탕의 사정을 잘 깨닫고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여래는 허공이다. 허공은 여래다.
이런 구절을 놓고 잘 음미해야 한다.
부처님을 놓고 생각한다면
허공을 대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설법을 기대하는 경우는 현실에 별로 없다.
허공은 부처님이 갖는 특성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데 이것은 생사현실에서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하게끔 하기 위한 취지다.
즉, 본 바탕의 측면을 99% 정도 기준으로 잡고
생사현실에서 분별을 행하는 입장에게 그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시키려는 취지다.
그리고 본 바탕의 측면을 그처럼 정확히 파악하고
생사현실을 대할 때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게 된다.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극심한 고통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고 불퇴전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처럼 본 바탕의 측면을 99% 배경에 놓고 현실내용을 1% 정도 취해 대해야 한다.
아무리 본 바탕은 그렇다해도 정작 제도할 중생은 생사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구절을 그런 측면에서 잘 음미해야 한다.
엄격히 보면 본 바탕에서는 허공도 얻을 수 없다.
여래도 얻을 수 없다.
같다는 것도 없을 수 없다.
다르다는 것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여래가 허공과 같다거나 여래가 허공이라고 할 바도 얻을 수 없다.
여래와 허공이 다 함께 차별없이 공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공함은 본래 같다거나 다름을 모두 떠나는 것이다.
또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다거나 아니다라는 것도 모두 떠난다.
그러니 여래도 공하고 허공도 공하다고 해서 공으로 치환해서
허공과 여래를 같다고 할수도 없다.
공은 어떤 값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같고 다름도 떠난다.
본 사정은 그렇지만, 공한 본 바탕의 측면을 99% 정도 기준으로 놓고
현실에서 분별하는 각 내용을 대하면 그렇게 언설로 표현하게 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꿈에서 '바다'와 '황금'꿈을 꾼다고 하는 경우와 같다.
침대에서는 본래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이 상황에서 꿈 속 내용을 기준으로 분별을 일삼는 상태를 깨우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침대가 있는 현실 상황을 99% 붙잡고
당신이 꿈에서 본 '황금'은 '바다'다. 이렇게 말하게 된다는 의미다.
여하튼 현실에서 대부분 한 단면에서 한 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이 자신이라거나, 영희라고 일반적으로 여기고 대한다.
이처럼 감각현실의 각 부분을 취하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망집 증상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그 바탕에서 그 업으로 인해 이후 생사과정에서
축사에 갇혀 돼지의 몸이 되면 그것을 놓고 또 자신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곧 3 악도의 현실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량겁을 나아간다.
그래서 방치하기 곤란하다.
◈Lab value 불기2564/0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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