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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11-18_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11-18_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11. 18. 10:35



®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K0011
T0233

문수사리소설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_K0011_T0233 핵심요약





♣0011-001♧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문수사리소설



Lab value 불기2564/03/01/일/17:15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Lab value 불기2562/11/18/일/10:35



mus0fl--Dave - Pour Un Flirt.lrc 



오늘날 대부분의 범죄 수사는 
현장에 부재한 수사관과 
현장에 부재한 법관과 
현장에 부재한 변호사들이 모여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범죄 현장에는
범인과 피해자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이것을 직접 옆에서 본 증인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증거물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수사를 담당하는 수사관이나 법관 변호사들은 그 현장에 없었다. 
범인이 수사관이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수사나 재판이 엉터리라는 것은 아니다. 
현실 사정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즉 그런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그런 각 사건에 대한 판단을 진행하게 된다.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이란 경전을 살피는 경우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내용에는 
일반인도 의아하고 당혹을 느끼게 하는 내용이 많다.
그리고 평소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수행한 수행자들도 
의아하게 여기고 당혹감을 느끼게 할 내용이 대단히 많다. 


심지어 이런 내용을 대하면 왜 그런 내용이 제시되는가. 
또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행을 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예를 들어 거리에 서 있다면 어디를 향해 가라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아무 곳도 가지 말고 잠을 자야 하는가. 
이런 제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불교 경전 내용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이상한 형태로 임하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그 기본 내용에 대한 
이해가 충실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본 경전은 어렵다. 

그래서 지금 대하는 이런 경전내용을 잘 이해하고 
이에 바탕해 수행하여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가 상당히 어렵다. 

여하튼 이번에 살피는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은 
내용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리고 전문 수행자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각 부분을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나갈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게 이 문제를 접근하는 방안은 
우선 문수사리보살님이 답하는 내용을 
먼저 문수사리보살님이 답한 내용에 
다시 적용해보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경전을 대하면 여하튼 문수사리보살님이
부처님과 일정한 말씀을 한 것으로 제시된다.
여시아문 이 부분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일단 문수사리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놓고 
현장에 부재했던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음미해보기 위해서 
일단 각 부분에서 문수보살님이 말씀했다는 내용과
매번 정반대되는 내용을 진술했다고 일단 우겨보자. 

그리고 그렇게 보고나서 
문수사리보살님이 과연 일정한 내용을 제시한 것이 
상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다시 살펴보자. 


이것은 부처님이나 문수사리보살님이 문답을 나누는 현장에 
직접 있지 않았고 보지도 않았던 일반적 입장에서 
자신이 재판관도 되고 검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어서 판단을 해보는 방안이다. 


경전을 외관상 살피면 
문수사리 보살님은 부처님이 표현한 내용에 대해서 
'외관상'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을 매번 제시함을 볼 수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을 뵈러 온 문수사리 사이의 문답은
첫부분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

그 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진실로 여래를 보았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 법신은 본래 볼 수가 없으니 

저는 중생을 위하는 까닭으로 와서 

부처님을 뵈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대화가 아님을 판단할 수 있다. 


부처님을 보러 왔기에 
여래를 보았는가라고 물었는데 
볼 수가 없으니, ~~부처님을 뵙는다. 
이런 형태로 제시한다. 


상식적으로 '볼 수가 없다'와 '뵙는다'는 형식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표현이다.
그런데도 이 둘을 관련시켜 제시한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점점 더 심해진다. 





뒷부분에서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만약 의지함이 없다면 무엇을 위하여 설하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설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이름자가 없는 까닭입니다.” 

...


경전을 보면 문수사리보살은 무언가 내용을 말로 제시했다. 
그런데 자신이 설한 것이 없다고 제시한다. 


문수사리보살님이 이렇게 부처님의 질문에 매번 응한다. 
그래서 수사나 재판 변호를 동시에 맡은 일반적 입장에서도 
문수사리 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놓고 
문수사리 보살님을 같은 방식으로 다시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즉, 문수사리 보살이 위와 같이 제시한 내용을 놓고 
그것이 외관상 그와는 정반대되는 표현을 한 경우와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표현인가를 살펴보자. 

만일 그런 정반대되는 표현과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표현이
아무 차이가 없다면
정말 아무 의미없는 표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그 표현이 다른 표현과 차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하튼 문수보살님이 그런 표현을 한 것이 의미가 있다. 
이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부처님의 입장과 비슷해진다. 

즉 현실에서 어떤 것은 망상 번뇌고 생사고통이고 중생이고 오염이고 
이에 반해 어떤 것은 깨달음 보리이고
어떤 것은 그런 상태를 벗어난 부처님이라고 구별해 설한 것이 된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은 
보리나 중생이나 열반이나 차별이 없다고 제시한다. 

그러니 이 내용에
문수보살님과 정반대되는 표현이나 모순되는 표현을 새로 내세워서
그것도 그렇다고 하고 문수보살님의 주장을 다 무시해보자 
과연 그런 의미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은 다 그렇지만, 
문수보살님 주장만은 그럴 듯한가. 

이렇게 문수보살님의 주장을 문수보살님의 주장에 대해 한번 적용해 본다.
그래서 당시 현장에 부재했던 일반인 입장에서 
이 내용이 도대체 무엇을 제시하는 내용인가를 
잘 음미해보며 살펴나가자.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살펴 나가는 것도 한 방안이다. 

그러나 앞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도 있다.
그러면 도대체 문수사리 보살님이 어떤 취지에서 
그런 내용을 주장한 것인지를 파악하기 쉽다. 




문수보살님의 주장을 일단 자신의 주장에 직접 적용해서 
문수보살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문수보살님의 표현은 원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상태와도 같다고 하자. 
그리고 세상에서 온갖 사고는 다 일으키고 
온갖 횡설수설은 다 제시하는 일반 범부와 차별이 없다고 간주해보자.
그리고 그 내용을 모두 지워버리자. 
그래도 좋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해서 연구를 시작해보자. 

과연 그럴까. 








mus0fl--Les Charlots - Psychose (Toujours).lrc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이란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별 생각없이 읽다보면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혹감을 느끼기 쉽다. 

그런데 수행자가 오랜 기간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무언가 자신이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런 수행자도 이런 내용에는 상당히 당혹감을 느끼게 되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선 가장
일반적인 입장부터 고려해서 살펴보자. 

현실 상황은 이렇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무언가 소원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신의 소원이 뜻대로 성취되어서 좋다고 여긴다.
그래서 희희낙락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의 소원이 뜻대로 성취되지 않아서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고통받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거리를 가다가 복권을 하나 심심해서 샀다.
그런데 그것이 사상최대의 당첨금 150 억원의 당첨이 되었다.
그래서 신이 난다.
그래서 앞으로 그 막대한 돈으로 무엇을 사고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하나하나 목록을 작성중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거리를 가다가 뺑소니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해서 
전신에 장애가 발생하고 통증이 심하고
일정 부분은 마비된 상태에 처해 있다. 

그리고 범인을 체포했는데
알고보니 재산이 하나도 없고 보험도 없다. 
막대한 치료비를 병원에서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부담하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도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다. 

극단적인 예들을 들었는데 현실 상황이 대강 이렇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는 희비가 엇갈린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받아 나간다.

그래서 이것을 문제로 보는 가운데 
각 주체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소원을 뜻대로 잘 성취할까를 놓고 
열심히 고민도 하고 노력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대하다 보면 
이 두 입장이 다 당혹감을 느끼는 한편 
심하면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일단 그것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지금 억울한 사고를 당해
신체 각 부분에 심한 통증을 느껴서 불편하고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청구가 되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 

이런 현실에 그런 내용이나 그 생멸이나 오고감 자체가
전혀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일반적 입장에서는 대단히 엉뚱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기 쉽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껏 열심히 노력을 했다거나
여하튼 대단히 좋은 상태를 막 성취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아니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일반적 입장에서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내용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 수행자도 이와 상황이 비슷하다. 
기껏 세속을 떠나 열심히 수행을 했다.
그래서 수행하지 않는 상태와 다른 좋은 상태를 얻는다고 노력 중이다.
또 어느 정도 무언가를 얻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그러니 상당히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 어려운 수행의 최정점에 부처님이 계신다. 
부처님은 수행을 최종적으로 원만히 다 성취해내 존중받는다. 
그런데 문수사리보살님이 부처님과 관련해 제시한 내용이 다 앞 경우와 성격이 같다. 
 

그래서 첫 문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부분이 문수사리보살님이 부처님을 만나서
처음 나누는 다음 내용이다. 

...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한밤중에 대광명이 열 겹[10중十重]으로 밝게 비침을 보고 

미증유함을 얻어 마음에 기쁨이 넘쳐서 한없이 뛰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와서 예배하고 

여래를 친근하고 아울러 감로의 묘법을 듣기 원합니다.” 



그 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진실로 여래를 보았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 법신은 본래 볼 수가 없으니 

저는 중생을 위하는 까닭으로 와서 

부처님을 뵈옵니다

...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와 같이 여래를 보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실로 보는 것이 없으며, 

또한 보는 것이 없다는 모양도 없습니다.” 


그 때 사리불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저는 지금 그대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 여래를 봅니까?” 


문수사리가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대덕 사리불이여, 

나는 이와 같이 여래를 보지 못합니다.” 


...



이 부분부터 살펴보자. 


우선 일반인 입장을 놓고 처음 판단해보자. 
일반인 입장에서 대하는 현실은 다음과 같다. 

자신은 사람이다. 
그런데 얼굴도 대강 그렇고 갖고 있는 재산이나 지위도 대강 그렇다. 


그런데 부처님은 일단 자신과는 다르다. 
왕자였기도 했고 또 출가해서 대단히 뛰어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도 1 명 없다. 
그런데 당시 문명시설도 열악한 상황에서 
제자를 1200 명 정도를 출가시켜 가르쳤다.

한편 자신은 집안에서도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신의 과거 어머니나 부인 아들 사촌 형제까지 
다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 수행하는 상태로 만들었다. 

그것도 현실에서 현재 왕후이고
또 그대로 있으면 장차 왕이 될 상태에 있는 이들까지
출가시켜서 가르치는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차이가 크다. 


그런데 한편 
현실에는 자신보다 한참 못하다고 보는 다른 생명도 많다. 

그 가운데 축사에서 지내는 돼지를 한번 대표로 살펴보자. 

돼지는 더러워 보이는 축사 안에서 지낸다. 
그리고 축사 주인이 제공하는 조금 더러워 보이는 음식물을 섭취한다. 
그 좁은 우리 안에서도 배설도 한다.
그리고 정신없이 살을 찌우고 있다. 
이렇게만 극단적인 경우를 놓고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문수사리 보살님이 부처님을 찾아 갔다는 것이 이 사건의 첫 계기다. 
즉, 빛이 보이는 이변을 경험하고 부처님을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문답을 나누고 있다. 

그러니 또 이상하다. 

그래서 앞에 처음 제시한 방식대로 
문수보살님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그 내용을 바탕으로 문수보살님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처음 이렇게 제시한다. 

여래 법신은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대하면서도 
여래 법신은 볼 수가 없다고 제시한다.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사정은 일반적인 영희나 철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가. 

또 극단적으로 돼지축사에서 지내는 돼지의 경우에서는 법신을 볼 수 있겠는가.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법신을 볼 수 없는 사정은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돼지우리나 영희나 철수가 잠자는 집에 찾아가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그 장소에 갔는가. 
그 뒷 문장을 놓고 다시 질문을 이어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문수사리 보살님에게 
여래를 보는가 하고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저는 실로 보는 것이 없으며, 

또한 보는 것이 없다는 모양도 없습니다.” 

..


그런데 그것이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런가.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상태라면 
왜 하필이면 굳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에 찾아가서 그러는가. 
즉, 영희나 철수 집이나 돼지우리에 들어가 그렇게 하지 않고 
하필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에 걸어가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럴 사정이 특별히 없으면 갈 이유도 없다. 
또 갈 수 있는 수많은 곳도 많다. 
그래서 하필 부처님이 계신 그 장소로 찾아가 
그런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면 도대체 무슨 사정 때문에 그런 것인가.
 
상식적으로 갖게 되는 이런 의문을 먼저 제기해보자.
그리고 그 답을 우선 한번 찾아보기로 하자. 

문제는 논의하는 이는 경전에 나오는 상황에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추리만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현실 수사나 재판 상황과 마찬가지다. 
수사나 재판을 위해 문수보살님이나 부처님을 증인으로 요청해도 
이에 응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직접 문수보살님에게 여쭤볼 가능성이 없어서 
답답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혼자서라도 문수보살님 입장에서 제출 가능한 여러 답변을 놓고 
또 그 이후 문제를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단  무자격 법관 기분을 내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잠시 휴정..




mus0fl--Rose - La Liste.lrc

곧바로 원래 경전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다만 증인을 비롯해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부재 상태에서 살펴 나가야 한다. 



여하튼 이런 상태에서 두번째 부분 이하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제시된다. 
역시 그 대부분이 일반적 입장에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현실에서는 저기에 영희가 있고 
그리고 영희가 넘어져서 다리가 골절되고 
피가 흐르고 있어서 문제라고 해보자.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문수사리보살님의 주장을 그대로 적용하면 
그런 고통을 당하는 영희가 당장 분노를 일으켜서 
문수보살님에게 돌이라도 집어 던지기 쉽다. 


다음 내용이 그와 관련된다. 

... 

바탕[상相]도 없고, 

형상[형形]도 없으며, 

오지도 아니하고, 가지도 아니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니요,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여하게[여여如如]게 실재하여 

가는 것도 아니요, 오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요,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처함도 아니요, 처하지 아니함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청정함도 아니요, 더러움도 아니며, 

생겨남도 아니요, 멸함도 아닙니다. 


제가 여래를 뵈옴도 

또한 다시 이와 같습니다.” 

...


물론 경전 내용만 놓고 보면 
이는 일단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놓고 제시한 내용이다. 

그런데 문수보살님 입장을 잘 살피면 
위 내용은 단지 부처님 법신만 유독 그렇다는 의미에서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법신까지도 포함해서 
현실 일체가 그렇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 이하 내용과 전체적 내용을 종합해 살피면 
문수보살님이 이런 입장임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런 입장임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몇몇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보리와 중생은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다른 것도 없고 작위도 없고 

이름도 없고 

바탕도 없어, 

실로 있는 바가 없습니다.” 

...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도 필경에 얻지 못함이요, 

일체 불법도 또한 얻지 못하며, 

얻지 못하는 가운데는 얻고 얻지 못함이 없는 까닭입니다. 

...

즉 우리가 현실에서 대하는 일체가 
위와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를
당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적용하면
대단히 당혹스럽고 황당한 내용이 된다. 



나중에 보면 
문수보살님은 
대단히 극심한 고통을 겪는 지옥 중생을 놓고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지옥은 현실의 고통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 
그리고 축생이 겪는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 

그런데 다른 경전에서도 문수보살님 입장은 대부분 이와 같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처해 그런 주장을 대하면 당혹스럽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분노까지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앞의 상황에서 영희가 
돌을 집어 문수보살님에게 던지기 쉽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문수보살님이 처음 제시한 주장을 거꾸로 제시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현실에서 이렇게 사건이 전개된 상황에서
서로 같은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야 경전에서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이 갖는 의미를 오히려 파악하기 쉽다. 

현실에서 영희가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이 그런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영희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영희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과 그 생멸이나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외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문수보살님이 이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해 큰 공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희는 극심한 분노를 일으켜 돌을 집어서 던졌다. 
그래서 어이없이 문수보살님이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하자. 

그리고 영희가 그 상황을 놓고 문수보살님처럼 거꾸로 주장한다. 
여기에 그렇게 던져진 돌도 없다. 
그리고 자신이 돌을 던지거나 던지지 않는 일도 얻을 수 없다. 
또 그로 인해 문수보살님이 피를 흘리거나 하지 않은 일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러면서 자신이 피해를 보상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사과를 해야 할 일 자체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우를 객관적 입장에서 살피면 조금 더 황당해진다. 

만일 이런 식이라면 
각 경우마다 일단 가장 힘이 세서 
상대를 가격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할 지도 모른다. 

세속에서 말이 안 통하면
일단 몽둥이를 사용해 상대가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처음 그런 현실에 그런 내용 자체를 처음부터 얻을 수 없다고
반복해 제시했다.
그런데 상대가 이렇게 하면 그런 주장을 한 입장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물론 문수보살님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문수보살님은 결코 호락호락 
그런 가격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 뿐 아니라
설령 지옥에 들어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라고 해도 
문수보살님만은 평안하게 임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런 상태도 아닌 이들이 
문수보살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런 상황마다 다 그렇게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런 경우에도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이 해결방안인가?

그런 경우에도 실력으로 일단 상대를 해치울 수 있는 상태라면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상대처럼 그런 고통을 직접 겪지는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떡하는가. 
그래서 그런 상대로부터 자신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상태를 놓고
이에 문수보살님 주장을 그대로 적용해서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기고
그래서 그래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이후 살펴야 할 문제다. 


>>>


그런데 이런 영희 사건의 심리를 진행하는 입장
그리고 그래도 전문 수행가를 지향하면서 경전을 살펴나가는 본인 입장에서는 
원칙적으로는 문수보살님의 입장이 맞고 옳다고는 본다. 

문수보살님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경전에서 보듯 부처님도 그 내용이 옳다고 인정하신다. 

그리고 과거 조각글에서도 본ㅇ니도 그런 내용을 많이 반복해 제시했다.
그래서 이런 내용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를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은 문수보살님과 달리 
체력도 약하고 질병도 많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 뒤에 제시되는 여러 상황을 놓고 
조금 오래 검토를 해야 한다. 

당장 팔만 하나 부러지거나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에서 적어도 본인은 이론을 당장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많이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뒷 문제를 조금 더 오래 검토해야 한다. 

잘못 사인을 하면 그 내용을 반대로 적용받게 된다.
그래서 본인이 바위에 깔린 상태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하며 
상대방이 반대로 나설 수도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 제시되는 그 내용이 정말 옳은가 아닌가는 
이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니 곰곰히 검토를 해야 한다. 




mus0fl--eric vincent - Etrange Mélancolie.lrc

쉬는 중에 항의성 메시지를 들었다. 
논점이 되는 것을 다 넣으려고 하지 말라는 메세지가 반복해 들린다.
그래서 이를 반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핵심을 간단히 줄여 살피기로 한다. 





우선 다음 내용을 살피자. 


...

사리불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설한 바는 점점 더 알지 못하겠습니다.” 


문수사리가 사리불에게 답하였다. 

“알지 못함은 곧 반야바라밀이요, 

반야바라밀은 이것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알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

이것도 앞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알지 못함은 곧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한다.
그래서 현실의 온갖 것을 그 실상을 꿰뚫어
넓고 길고 깊게 관해서
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는 데 요구되는 깊은 지혜를 
반야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이 반야를 핵심주제로 살피는 반야바라밀경 안에 
'알지 못함'이 반야바라밀이라고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도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되고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표현상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자.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덧셈 2 더하기 2 가 무언가를 물어 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그 답을 몰라서 당황하는 한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아이가 대단히 어려운 
반야바라밀다를 지금 실천 수행중인 상태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외관상 표현만 놓고 보면 그렇다. 

『반야심경』에서는 깊게 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 건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란 대단히 중요한 수행덕목이다. 
그것을 깊이 닦으면 일체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로 세상을 관하고 대하지 못하면
일체의 고통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일체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는 핵심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 세상에서 대부분 사정을 알지 못해 멍하게 지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중이었다고 보게 된다. 
어떤 문제가 제시될 때마다
그에 대해 내용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렇다고 이후 그로 인해 아무 고통도 받지 않게 되는가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전제로 하면
사리불 존자가 문수보살님과 대화하면서 점점 더 알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리불 존자가 반야바라밀다를 점점 닦고 있는 중인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런데 문수보살님께서 과연 그런 취지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런데 끝 부분에 조금 뉘앙스가 다른 구절도 들어 있다. 

반야바라밀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 한편 알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런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철부지 유치원 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선생님에게 붙잡혀서 
왜 2 더하기 2 가 5 라는 것도 아직까지 모르는가.
그리고 남들을 따라 앵무새처럼 4 라고 어리석게 답하는가라고 힐난을 당한다고 하자.
이처럼 이상한 선생님과 유치원생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가운데 도대체 누가 반야바라밀다를 제대로 닦고 있는가를 
위 내용을 적용해 이해해보아야 한다. 

사리자 존자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런 사리자 존자가 말씀하듯, 

매 구절 하나하나 그리고 매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아무리 살펴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만 계속 답하고 현실에 임하면 
그것이 정말 부처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반야바라밀다를 잘 닦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경전에 나오는 각 구절을 놓고 그렇게 적용해보자. 
과연 그런가. 

한문 하나만 나와도 전 그런 글자를 잘 모르겠다. 
사위국은 어느 곳인가가 문제되어도 모르겠다.  
그곳이 며느리국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매 구절 매 경우마다 일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이 반야바라밀다를 닦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해보아야 한다. 









다시 다음 문제를 살피자. 

문수보살님이 열심히 주장을 제시한다. 
그런데 정작 한 말씀도 한 바가 없다고 주장을 하신다. 
그런데 그 문장의 내용 자체가
이미 그런 내용을 일정한 언어표현을 통해 제시하는 상황과  
자체적으로 모순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보게 된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사례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꾸 화를 낸다. 
그래서 옆에 있는 이가 화를 벌꺽 내면서 
더 이상 화를 내지말라고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너무 시끄럽다. 
그래서 어떤 이가 도서관에서 의자를 끌거나 연필을 떨어뜨리거나 
누가 말을 조금이라도 하면 그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제발 조용히 좀 하자 이러면서 벼락같은 소리를 매번 외친다고 해보자. 
이것도 이상하다. 

옆에서 보면 자신이 제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정작 조용히하자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예를 여럿 제시할 수 있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도 그런 이상한 상황을 대하게 된다. 





다음 부분이다. 

...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만약 의지함이 없다면 무엇을 위하여 설하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설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이름자가 없는 까닭입니다.” 

...

당시 현장에 없었던 입장에서 
글자로만 이 내용을 대한다.
그래도 이상하다. 
위 문장이 언어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표현이면
무언가를 그런 단어를 통해서설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장 내용이 그런 이름자도 없고 
또 설한 것이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일반적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구절은 
경전을 살피다 보면 많이 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불교계에서 금강경을 널리 대한다.
여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부처님이 직접 제시한다. 

그런데 이제 이런 내용이 
과연 무슨 입장인가를 잘 검토해보자. 

우선 이 문제의 검토를 위해서 
문수보살님이 어떤 내용을 제시하는 전후 맥락에서 
문수보살님이 내용을 제시하는 각 부분에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과는 표현상으로나 
실질적 의미로나 극단적으로 정반대되는 내용을 
하나같이 다 집어 넣어 보기로 하자. 


>>>

예를 들어 이렇게 해보자. 

그 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진실로 여래를 보았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부분에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은 다음이다. 

“세존이시여, 

여래 법신은 본래 볼 수가 없으니 

저는 중생을 위하는 까닭으로 와서 

부처님을 뵈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반대로 바꾸어 보자. 
한 구절에서 두 부분이 이어지면 한 부분만 정반대로 해도 충분하다. 
두 부분을 다 바꾸면 오히려 원래대로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여래 법신은 본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중생을 위하는 까닭으로 와서 
그래서 이렇게 이 장소에 와서 부처님을 뵈옵니다. 


이렇게 답한다고 하자.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도 이처럼 반대되는 내용을 넣어보기로 하자. 
아니면 아예 더 극단적으로 
만화나 어떤 소설에 나오는 내용을 임의로 뽑아서 넣는다고 하자. 
그래서 각 내용이 제시되는 전후 맥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마구 집어 넣는다고 해보자. 

어떤 언설이 행해졌는데
정작 그런 언설을 행한 바가 없다고 제시한다.


문수보살님이 경전 각 부분에서  
이미 일정한 내용을 많이 제시했다고 일반적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 각 부분의 그런 표현이 설해진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꼭 그렇게 자리잡고 제시되어야 할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 부분을 비운다고 해보자. 

정말 그렇다면 그렇게 표현된 부분에 
설령 그런 표현만 있어야 할 사정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즉, 굳이 어떤 특정한 표현이 거기에 있어야 할 사정이 본래 없다. 
또 어떤 표현만의 특별한 가치나 의미가 따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표현과 차이를 음미하기 위해 
그 표현 대신 아주 엉뚱한 표현을 넣어 비교해보자. 
그리고 외관상 원래 표현과 정반대되는 표현을 통해 비교해보기로 하자.


그런 내용을 비록 일정하게 제시했지만, 
본래 그런 단어나 언설을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위와 같은 경우도 무방한가를 검토해보자.
그래서 위와 같이 일체 설한 적이 없다고 보게 되는가를 검토해보자. 

그러나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문수보살님이 그렇게 제시한 표현 형태로만
그 각 부분에 그렇게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정 때문에 반대로 다음 내용을 제시한 것인가를 검토해야 한다. 
즉, 만화나 소설과 같은 내용을 아무렇게나 넣어 제시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그 내용 그 형태대로 제시해야 한다. 
또 현실에서도 그 내용대로 그렇게 관해야 가장 적절하다.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를 검토해보자. 
 
이런 양 입장을 놓고 어떤 것이 더 적절한가를 잘 살펴야 한다. 


우선 기본적으로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 자체는 다음이다. 

만화책에 나오는 어떤 구절도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과 
그 본 바탕의 사정은 서로 차별이 없고 다르지 않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만화책에서 어떤 구절을 임의로 뽑아
경전 각 부분을 대신해 채워 넣어도 관계없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런데 문수보살님 입장에서 
한편으로 그렇게 일체가 차별을 얻을수 없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경전의 각  부분은 왜 다른 것과 차별을 세워 
그 부분들은 오직 그런 내용 그런 형태로만 제시해야 한다고 하게 되는가.
이런 문제를 또 이와 관련시켜 살펴야 한다. 






따라서 그런 상태로 한번 만들고 
이와 대조해 원래의 표현이 갖는 의미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대하는 현실에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런 자신이나
또 그가 영희나 철수로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이들의 생사나 생멸 오고감 등등이 다 그렇게 잘못 여긴다.
한편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하다고 제시받은 일정한 수행 내용이 따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수행을 행하는 가운데 얻는 수행결과 및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상태에 이른 부처님이 그렇게 계시다고 잘못 여긴다.
이런 상화에 문수보살님은 그런 것을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생사현실에서는 도대체 어떤 이가 그런 내용을 그렇게 관하고 
또 그에 바탕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만화에서 이런 구절이 나왔다. 
다 넣지 말고 일단 숨겨라. 

그래서 이런 구절을 임의로 뽑았다고 하고
경전 각 부분에서 문수보살님이 일정한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에
위 구절을 무조건 넣어 놓고 내용을 한 번 검토해보자.

그 사정은 본래 문자나 언설이나 성품이나 모양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 문구나 저 문구나 어차피 그 사정이 다 마찬가지아닌가.
그러니 이 구절을 넣으면 어떻고 저 구절을 넣으면 어떤가. 
그래도 무방하고 관계없다.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보며 
엉뚱한 문구를 넣어 보기로 하자.
그리고 각 경우에서 문제를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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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수사리소설 반야바라밀경에서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입장은 
부처님의 입장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부처님이 그 내용을 인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도 
사실은 그와 같다. 

그런데 이 원칙적인 내용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현실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망집현상과 관련된다. 
그래도 현실에서 생활하게 되면 
여전히 그 망집의 대부분이 그런 형태로 잔류해 남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망집이 잔류되는 그 사정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반복해 살폈다. 

사실은 엉터리다.
그런데 그것이 대단히 실다운 내용인 것처럼 여겨진다. 
또 그런 판단에 바탕해서 임하지 않으면 
현실에서 단 한 순간도 생활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런 망집을 붙들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증폭시키게 된다. 
또 경전에서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내용을 대하더라도
여전히 그 망집을 잔류시켜 현실에 임하게끔 된다. 


그래서 결국 일반적 입장과 경전의 입장이 너무 그 차이가 크게 된다. 
그리고 일반적 입장에서 이런 경전 내용을 바로 대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어리둥절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은 그 만큼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하고 
또 이러한 바탕에서 수행에 임해야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야만 
수행자가 이를 바탕으로 불퇴전위라는 높은 수행단계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인의 입장이나 
수행을 시작한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정이 또 그 만큼 많다. 

그래서 처음에 앞과 같은 형태로 
하나하나 반대로 살펴보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놓인 현실 사정과 
수행을 통해서 도달해야 할 원칙적인 입장 사이의 
간격이 대단히 넓다. 


원칙적인 입장은 다음이다. 
현실은 그렇지만, 그런데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제발 해결해달라고 요청을 한 적도 일체 없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먼저 기본적으로 잘 확인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앞에 제시한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간단히 이어서 살피자. 

우선 첫 문제부터 살피자. 

현실에서 당장 부처님을 만나 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전에 제시되는 그런 부처님이 현실에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해보자. 

이 경우에 부처님을 대하는 각기 다른 입장이 경전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다. 

당시 부처님은 과거는 왕자신분이었다지만, 
출가후 탁발 구걸을 하며 수행을 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거지가 밥그릇을 들고 구걸을 하는 것과 외관상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을 당시 대한 일반인 가운데는 
다음처러 대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은 생계를 유지하기 하루 종일 열심히 밭도 갈고 일한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구걸을 하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며 밥을 건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이 가운데는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당대 상당히 부유하게 지냈던 한 상인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과 그 설법이 갖는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장소를 물색한다.
그리고 어떤 적당한 숲을 발견하고
그 숲을 구매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 숲이 그 나라의 태자가 소유한 숲이었다.
그리고 그 태자는 그 숲을 굳이 팔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 숲에 금을 깔면 그 부분만큼만 팔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 상인이 정말 금을 가지고 와서 깔기 시작해서 
결국 그 숲의 반절은 그렇게 해서 그 상인이 구매해 기증하고 
그렇게 하는 그 사정을 의아하게 여긴 태자도 그 사정을 상인으로부터 알아듣고 
나머지 반절은 그 태자가 직접 기증했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아직까지도 그 상인이 살던 저택이 남아 있다고 해서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요즘 상태로만 평가해도 
본인의 연구실보다는 상당히 좋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시 각국의 왕이나 일반인들은 
이런 부처님을 대단히 존경하고 공경 찬탄하였다. 

그런데 물론 또 그 당시에도 부처님과 입장을 달리하고 
배척하고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계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가해 
가르침을 배웠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면모가 다 다르다. 

그런데 제자들이 전반적으로 부처님을 대단히 
존중하고 따랐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일반인데 
또 수보리 존자처럼 상당히 이상하게 부처님을 대해서 
그것이 경전에 제시된 내용도 살필 수 있다. 

수행 중에 스승인 부처님이 가까이 오면 
제자된 도리로 벌떡 일어나 예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이 다가오는데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그대로 
자신 할 일만 했다는 내용도 제시된다. 

오늘날 같으면 따로 예절 교육을 한 1 주일 따로 받아야 할 상태다. 
그런데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가 상당히 수준이 높은 상태에 이르렀다고 특별한 평가를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여기 문수사리소설 반야바라밀경에서 
문수사리보살님이 또 부처님을 뵙고 
제시하는 내용도 대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현장을 직접 관찰하면서 살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각 경우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약간의 혼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적어도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부처님은 극히 높은 분이고 공경하고 찬탄할 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분이 부처님인가 아닌가는 도대체 
어떻게 분별하는가가 첫 문제다. 

앞에서도 이미 대략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차이를 살폈다.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사례로 현실에서 축사에서 지내는 돼지와
앞의 부처님을 놓고 
도대체 무엇을 무슨 이유로 돼지라고 하고 
도대체 무엇을 무슨 이유로 부처님이라고 보는가라는 문제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

상식적으로 부처님이 부처님인 것은 
부처님이 모든 생명과 함께 공통적으로 갖는다고 보는 성품도 갖지만, 
부처님만 특유하게 갖는 일정한 성품을 부처님이 갖는다고 보기에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아닌 생명이나 일반 사물을 
구분하게 하는 성품들이다. 

또 그 성품을 조금 세분해 보면 
수행자 가운데 생사의 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아라한과 함께 갖는 성품도 있지만, 
그러나 아라한은 갖지 못한 성품을 또 부처님은 특별히 갖는다고 보게 된다. 

그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법신이라는 표현으로 제시된 내용과 관련된다. 
즉 생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 같이 해탈신을 이루고 있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또 아라한과 달리 법신을 증득했기에 
부처님 제자 가운데 이런 분들은 단순히 아라한이지만, 
부처님은 부처님이라고 현실적으로 
구분해 대하게 된다는 현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수사리보살님이 여하튼 
현실에서 그런 차별을 바탕으로 해서 
일단 부처님을 찾아 뵌 것은 사실인데도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런 법신은 정작 볼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눈이 나빠서 그렇다거나, 
원래 그것이 있기는 하지만,
마치 눈이 직접 볼 수 없는 소리나 냄새와 성격이 같다거나
그런 사정으로 볼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인가. 

아니면 그런 법신도 역시 실답게 있는 내용이 아니기에 
그렇다라고 제시한 것인가도 조금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지금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의 입장을 감안하면 
후자에 더 가깝다고 이해해야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해서 그래서 보지 못한다거나 
원래 눈은 소리나 냄새나 촉감을 보지 못하듯 
그런 특성으로 부처님이 다른 일반인과 달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서 해탈신을 이뤘다고 하고
또 이미 해탈한 여러 아라한과 다시 달리
법신까지 증득해서 부처님이라고 다시 차별적으로 구분하지만, 
그 법신이 갖는 특성이 
본래 눈으로 보는 어떤 색이 아니기에 
그래서 보지 못한다는 단순한 사정을 제시하기 위해
법신을 보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런 법신이란 본바탕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상한 것이다. 

부처님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과 달리
그런 법신을 증득한 분이이게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런 차이가 있기에 
문수보살님도 부처님을 그렇게 찾아 뵈었다고 보게 되는데 

정작 그렇게 찾아뵙고 나서는 
부처님께 부처님을 다른 생명과 구분짓는 그런 법신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처님인줄 알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인가. 

첫 문제는 이런 문제다. 


이에 대해 본인이 갖는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문제 성격을 이렇게 놓고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이 옳은가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의미다. 

수행자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 이런 현장을 동참해서 직접 관찰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문수사리보살님이 
부처님을 도대체 무슨 특성으로 

부처님이라고 보고 그렇게 찾아 뵈었는가도 이해하기 힘들디. 

여하튼 다른 돼지나 다른 생명과 달리 대한 것이ㅏㄷ.

'법신'은 결국 그렇게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다른 존재와 구분하게 하는 그 핵심적 특성이다.
그런데 왜 이를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를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경전 전반을 통해 문수보살님의 사정을 살피면 
대부분 수행자들은 언젠가는 이 문수보살님을 직접 만나서 
지금 경전에서 제시된 대화와 같은 대화를 
분명 비슷한 형태로 한번 나누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 경전에 제시된 문답 내용을 잘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수보살님을 친견하여 대화할 때
그 각 사정을 잘 이해하고 대해야 한다. 

경전에 의하면 문수보살님도 언젠가는 성불한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이 갖는 서원이 광대무변하다.
그래서 그 성불 시기가 대단히 멀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어떤 이가 오늘 처음 발심하고 수행하여 무량겁 후에 성불한다고 하자.
그래도 여전히 성불하지 않고 계속 수행중인 문수보살님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우에 문수보살님이 대하게 되면 
분명 본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과 비슷하게 
내용을 제시할 것을 미리 예상해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이 내용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mus0fl--Marie Laforet - Notti Nottingham.lrc

이제 앞에 두번째 제시한 문제를 살피자. 

무언가를 놓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형식으로 각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문수보살님이 일정한 내용을 제시한다. 
그렇게 제시하면서 
문수보살님은 그런 이름자도 없고 
그래서 설한 바가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아래 경전에 우선 다양한 내용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들을 참조하면서 
그런 가운데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그 내용이 무슨 의미인가를 
살펴보자. 


대략적으로만 제시된 핵심을 나열해도 상당히 많다. 


반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
선근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는 것인가. 
>>>
반야바라밀은 법을 얻기 위하여 닦는 것이 아닌가. 
반야바라밀이란 어떻게 닦는가. 
>>>
보시[檀]바라밀 등 여러 수행은 무엇을 얻는 것이 있는가.
>>>
일반적으로 세상사람들이 있다고 보는 다양한 내용들 
눈으로 보는 색,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얻는 맛 
몸으로 얻는 촉감 등을 비롯해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가 얻을 수 있는 것인가. 

>>>

세상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하고 
그 안에서 온갖 내용을 얻고 생사고통을 겪어 가는 
욕계나 색계 무색계는 어떤가. 

>>>
번뇌는 또 어떤가. 
>>>
부처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은 법계를 깨치겠는가. 
>>>

법계와 부처님의 경계는 실로 있는 바가 있는가 없는가. 

>>>
지혜를 가지고 번뇌를 끊을 수 있는가. 
>>>

반야바라밀을 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여래는 생사고통을 받지 않고 생사의 묶임에서 떠난 열반에 드는 것인가. 
>>>
부처님이 생멸함이 있다고 할 것인가. 
>>>
실제 가운데에서 부처와 범부의 차별이 있는가. 
>>>

여래는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가. 

>>>

여래를 중생들이 복을 심는 위없는 복전이 되는가. 


>>>

... 등등이다. 

이런 각 주제에 대해 문수보살님이 
일정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주제에 일반적인 경우에서 답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불교 개설서나 사전에서 제시되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문수보살님이 답하는 내용을 살펴 검토해보자. 

그런데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내용은
상식적으로 외관상 모순되거나 파격적이다. 


어떤 주제를 놓고 살펴도 비슷하다. 


어떤 이가 수행을 하면 
어떤 좋은 내용을 얻게 되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상식적으로는 그런 차이가 있기에 그런 수행을 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깨달음이 무엇인가. 이런 주제도 마찬가지다. 
깨닫지 못해서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이들 상태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만드는 깨달음(보리)의 정체가 무언가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그런 것이 있기에 
그런 것을 얻으면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부처님도 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얻지 못하면 현실에서 보듯 
생사고통을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받아나간다. 
이렇게 차이가 있다고 보게 된다. 

물론 이런 주제에 대해 답할 수 있는 내용을 나열하면 상당히 다양하다. 

그런데 일반적인 내용과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대조해 보면 
상당히 특별하다. 

그리고 이런 전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그런 이름자를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설한 바가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부분 전체가 특별하다. 

그래서 그렇게 제시하는 사정을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제각각 입장에서 분별해 언어로 표현해 제시한다. 
그런데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그런 사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 일체는 
그런 본 바탕에서는 하나같이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 사정에서 그와 같이 제시한다. 




그런데 두번째로 다음을 살펴보자. 


사정이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만화책이나 소설책에 나오는 구절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각 경우에 그렇게 제시해도 되는가를 살펴보자. 

문수보살님이 각 경우에 답한 내용은 이와 다르다. 
그래서 그것만의 어떤 다른 의미가 특별히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주장과 
자체적으로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만화책의 한페이지에 나오는 구절을 뽑아서 제시한다고 하자. 
그래서 '펑크다' 이런 알수 없는 구절을 답으로 제시해보자. 
그러면 대부분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라고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도무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사실은 문수보살님이 답한 내용도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래서 정도 차이일 뿐 위 내용과는 별 차이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또는 더 심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매 경우마다 벽돌을 떡 앞에 내민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도 검토해 봐야 한다. 

이 대목에서 상식적인 입장도 중요하다. 
수행자들이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일반적 내용도 중요하다. 
그런데 또 위와 관련해 
예를 들어 유마힐소설경에 나오는 유마힐 거사처럼 
아예 침묵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는 경우도 함께 고려해 봐야 한다. 

이들은 일반적 입장에서는 비상식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경전에서 그렇게 제시되는 사정을 검토해야 한다. 


이 글을 적는 본인 입장은 
사실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원칙적인 입장이 옳다고 본다.
한편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면
사실은 그런 경우마저도 별 문제가 없다.

일반적으로는 다음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나쁘다라고 표현과 
이것은 좋다라고 표현은 각기 그 의미차이가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각기 다른 표현에 상응해
현실에서도 그처럼 차이나는 그 무언가가 따로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모두 망집에 의해 일으킨 것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 사정이 된다.
이런 바탕에서 각 내용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입장을 극단적으로 철저하게 적용하면 
앞에 제시한 것처럼 
매 경우마다 대단히 엉뚱하게 벽돌을 앞에 내미는 경우 조차도 
사실은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런 원칙적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역시 
망집에 걸려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정말 매 경우에 그렇게 만일 제시하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게 된다.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런 벽돌을 대해 무언가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로써 망집을 벗어나기도 힘들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은 적어도 그런 것은 아니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본 바탕은 언설을 떠난다. 
그래서 아예 일체 언설을 표시하지 않고 침묵을 하는 경우도
그런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침묵으로 어떤 내용을 얻기는 힘들다.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그 전후에 무언가 언설로 표현한 내용이 있었기에 
맥락을 통해 미루어 상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침묵만이 가장 적절한 답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를 놓고 그렇게 매번 분별을 행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분별에 따라 실다운 무언가 차별이 있다고 여기는 자세가 문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마당 앞에 그냥 바위가 하나 계속 있는 것처럼 
시종일관 침묵상태면 곤란하다. 
그리고 매번 벽돌을 앞에 내밀어서 모든 경우에 대한 답을
얻어내라고 해도 곤란하다.  

또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대단히 엉뚱하고 걸맞지 않는 구절 
즉 만화책에 나오는 구절을 무조건 갖다 대어도 곤란하다. 

어느 경우나 그런 각 내용들이 다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어떤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차별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다. 

매 경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렇게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와도 별 차이가 없다. 


이 문제를 처음에 간단하게 살폈다. 

현실에서 각 중생이 어떤 고통을 
대단히 진지하게 겪는다. 
그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런데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사정은 그런데도
그러나 이상하게 생사현실에서는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킨다. 
그런 바탕에서 실답지 않은 고통을 그렇게 매순간 진지하게 겪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사현실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은 부처님대로 일정한 시설 방편을 마련해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끔 하신다. 

그리고 문수보살님은 문수보살님대로 
그런 취지에서 일정한 내용을 그렇게 제시한다. 

그리고 유마힐 거사님이 침묵을 지킨다면  
이 역시 유마힐 거사님이 그런 취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다음과는 다르다. 
즉, 본 바탕에 그런 생사고통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러니 그런 바탕에서 각 중생이 겪는 생사고통도 
사정이 그러므로 역시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즉 그 상태 그대로 무한히 방치해도
본 바탕이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다.
그냥 아무렇게 내버려두자. 
이런 입장과는 적어도 다르다. 

원래 본 바탕을 놓고 보면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이를 문제삼는 것은 
본 바탕에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니다. 
본 바탕은 본래 그런 사정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각 주체들이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들을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망집을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것이 문제인 것 뿐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생사현실은 꿈이나 환영자체는 아니다. 
생사고통은 꿈처럼 환영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본 사정이 그렇다고 하여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을 그대로 방치하고 
겪으라고 방치할 도리도 없다.
그리고 이런 사정 때문에 이와 같은 경전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본래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이런 사정을 잘 관하는 분들이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들이 그런 생사고통을 잘 벗어나게끔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편 시설을 마련해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상대가 놓인 각 사정에 맞추어
각종 방안으로 각 내용을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가 그런 사정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각 수행방안을 원만히 행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끔 한다. 


이들 각 내용들은 하나같이 
본 바탕이 공하다.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만 그렇게 제시하고 방치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니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대로 다 방치하고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런데 경전 입장은 이와는 다르다.

그래서 위에 나열한 여러 내용이 제각각 의미가 있다. 
또 그런 점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이 
원칙적으로 옳다는 것은 
원칙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제시한 내용을 
곧바로 이해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는데는 
각 중생의 상태에 따라서 대단히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 원칙만 제시하고 방치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결국 이런 문제를 놓고 
조금씩 입장이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원칙적으로 본 바탕의 사정을 놓고 
만화책의 내용까지도 다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제시해야 한다. 

원칙적인 측면은 그렇다. 

그런데 이 원칙적 내용이 중요한 것은 
수행자가 수행을 정진해 나가는 과정에서다.
그런 가운데 끝내 망집에 붙잡혀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불퇴전위와 같은 수준 높은 단계에 올라야 한다.

그러려면 결국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수행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mus0fl--Maxime Le Forestier - Education Sentimentale.lrc


글을 대강 마쳤다. 
앞에 제시한 내용 첫 부분을 놓고 마무리를 지어 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대부분 부처님이라고 보는 부처님을 놓고 
부처님에게 법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때 문수보살님의 입장은 경전에서 살폈는데 
만일 이와 조금 다르게 다음처럼 제시하면 어떤가. 

...
부처님의 법신은 얻을 수 있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제가 이렇게 찾아 뵙고 인사드립니다. 
...

이렇게 답하면 어떻겠는가. 


문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놓고 대하면 이것은 또 이상하다. 
그런데 사실은 위 내용도 큰 문제는 없다. 
원래 언어표현이 그렇다. 

문수보살님이 경전에서 제시된 것처럼 
부처님 여래의 법신을 볼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은 
실재가 공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한편
부처님에 해당한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망집을 제거하기 위해 제시한 내용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실재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 무언가가 그렇게 있다고 망집을 일으키면 
그 망집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때로는 없다라는 표현도 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에 대해
또 극단적으로 잘못 치우친 견해를 취해서 
이제는 그런 내용은 아주 없다고 또 치우쳐 망집을 일으키기 쉽다. 

그런 경우에는 앞과 같은 표현이나
상락아정과 같은 표현도하게 된다. 
이런 표현도 그 병을 치유하게 하는 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표현은
그런 상태에 가깝게 이르게 하기 위해서 
생사현실에서 일종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시설들이다. 

이 경우 그런 언어표현 자체가 
그 언어 시설로 가리키고자 하는 상태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그런 취지로 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전을 보면 문수보살님도
역시 그런 사정을 그렇게 제시하고 있다. 

볼 수 없지만 ~~~ 뵙는다. 

알지 못하지만, ~~~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닦을 바를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닦는다. 


이런 표현은 약간 오락가락하고 애매하다. 
그런데 그렇게 오락가락 애매하게 제시하는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 

현실 생활에서 경전의 내용과 극단적으로 입장이 달라지는 그 부분을 살펴보자.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는 
문수사리소설 반야바라밀경 안에서 
상에 관한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조금 이해가 쉽다. 


>>>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차별이 없는 가운데 

부처가 있고 범부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왜냐하면 부처와 범부는 

둘이 없고, 차별도 없고, 

한 모양이요, 모양이란 것도 없기[1상무상一相無相] 때문이니라.” 


>>>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 만약 생하였다면 

법계도 또한 마땅히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계와 여래는 한 모양[1상一相]이요, 

두 가지 모양이 없으며, 

두 가지 모양을 얻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

문수사리가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있는 것도 없고 있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한 모양[1상一相]이거나 모양이 없고, 

하나도 없고 둘도 없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반복해서 하나의 모양이거나 모양이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一相無相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해보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거리에서 눈을 떠서 
현실을 대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일반인은 눈을 떠서 다음 분별을 행한다. 

저기 있는 부분은 영희다. 
저기 있는 것은 자동차고 집이다. 
이 부분은 내 몸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한다. 

이 때 이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그 현실 내용에 대해 
그는 동시에 다음 작업을 행한다. 

즉, 눈을 떠 본 그 전체 내용을 놓고 
각 부분을 그렇게 묶고 나누면서 대응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그에게 당신이 영희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주저없이 그렇게 나누고 묶은 그 일정부분을 영희라고 가리키게 된다. 

이것이 현실에 임하는 일반적 입장이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상(相) 과 상(想)이란 한자어만 놓고 잘 살펴도
일반적인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상(相)이란 글자는 
나무 목자木에 눈 목 目자를 덧붙인 형태다. 

상(想)은 한편 그런 내용을 대해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한 내용을 의미한다. 
그래서 상(相)에 마음 심心을 덧붙인 형태다. 

그래서 목목심 이 글자를 놓고 이 상황을 먼저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처음 상(相)이란 글자는
어떤 이가 처음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상황에 대응된다. 
이는 눈을 감으면 없어지는 내용이다. 

그런데 목목심을 붙인 상(想)은
그런 내용을 대한 상태에서 그가 다시 일으킨 생각과 관련된다. 
이 생각은 앞의 상(相)과 다르다.
즉, 눈을 감아도 어느 정도 계속해서 그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내용을 구분하고 상(相)과 상(想)의 관계를 살펴보자. 



일반인이 처음 상(相)에 대해 일으키는 망집은 다음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이런 감각현실은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이라고 잘못 여긴다. 

정신 밖에 있는  정신과는 별개인 외부물질이이라고 잘못 여긴다. 

이것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잘못 여긴다.
그래서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모든 이가 함께 대하게 되는 내용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또 이런 감각현실에 대해 자신이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 각 부분이 무엇무엇이라고 분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분별내용을 놓고도 앞과 마찬가지 형태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자신이 그렇게 일으킨 그런 분별내용은

그 감각현실에 그렇게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 감각현실은 곧 그런 분별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 자신이 생각하는 분별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갖고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사정으로 그 관념분별은 감각현실과 관련해 얻는 실다운 내용으로 잘못 여긴다. 
한편 본 바탕인 실재와 관련해서도

앞과 마찬가지 사정으로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한 단면의 내용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킬 뿐 아니라.

변화나 생멸을 놓고도 그런 형태로 이해한다.



참조 ●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망상분별
http://buddhism007.tistory.com/4615 



이 현상이 바로 일반 중생이 생사고통을 겪는 기본 바탕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살펴야 한다. 
실재의 공함은 그 바탕에서 또 같은 형식으로 살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실재 자체를 문제삼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그래서 이 부분부터 먼저 잘 파악하기로 한다. 

처음 눈을 뜨고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전체로 하나다. =>  一相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생각하는 
나라거나 영희라거나 자동차란 상을 본래 얻을 수 없다, => 無相 

이 의미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상을 얻고 나서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분별에 의해 각 부분마다 영희,  자신, 자동차 등의 모습이
각기 그처럼 따로 묶이고 나뉘어 그 감각현실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 감각현실에 그런 모습을 얻을 수 없다. 
얻는 것은 전체로서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분별을 행하면서 대하면
각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각 내용에 상응한 모습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망집현상이다.

이 경우 원래 처음 얻는 그 감각현실은 아무 차이가 없다. 
다만 그가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그것을 대하는 가운데 
마치 그런 각 부분의 감각현실이 그처럼 묶이고 나뉘어진다고 여긴다.
한편, 심지어 그런 형태로 그렇게 얻어졌다고 망집을 일으키며 대하게 된다. 
자신이 그렇게 묶고 나누어 분별을 하지만, 
그러나 본 감각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매번 분별할 때마다 그에 따라 그 부분이 그렇게 
나뉘고 묶이게 된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면 상(想) 즉 분별에 따라서 

감각현실 각 부분에 대응시킨 그런 상(相)을 그 분별에 바탕해 따로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相)에 접착되어 임하게 된다. 

그깃이 경전에서 말하는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자신이 거리에서 영희가 저기에서 온다고 여긴다.
그런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자신이 일정 부분이 영희라고 여기고 임한다.
그리고 그 부분을 계속 분별로 떼어 그 부분을 대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계속 무언가 업을 행해 나간다. 
그리고 현실의 일반적인 상황이 대부분 이와 같다. 

그래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상을 취하고 임하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부처님이나 문수사리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자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그리고 대단히 어리둥절하게 여기게 된다. 


한편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을 실상이라고 표현한다. 
이 실상을 찾고 구하는 측면에서는
그런 실상은 끝내 얻지 못하고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것도 함께 이해해야 
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을 잘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즉 현실에서 얻는 목목 상이라는 감각현실은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즉,  본 바탕이 공하여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바탕에서 그런 목목 상을 얻어 낸 것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한편 목목상을 바탕으로 목목심 상을 일으키는 경우도 이 관계가 마찬가지다. 
목목상에서는 목목심상의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전체로 하나의 상일 뿐이다.  
거기에 아상이나 인상 등등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주체는 그런 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을 대한다.
그에 따라 그런 각 내용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그처럼 대하는 망집 상태에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 부분은 돼지이고 
이 부분은 돼지와 다른 사람으로서 영희나 철수이고 
또 이 부분은 아주 특별한 부처님이라고 분별을 행하고 
그렇게 임한다. 
그런데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닦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처음부터 어떤 분별을 전혀 행하지 못하는 
바위나 물 모래가 그런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이런 저런 분별을 행하던 일반인이 분별을 행하면서 
수행을 하는 가운데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닦는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닦아 행하는 분별은 
그런 분별할 바를 그런 영역에서 하나같이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분별이다. 

즉 생사현실에서 저 부분이 영희다, 철수다, 자동차다,
그리고 이 부분은 자신의 몸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각 부분을 그렇게 대한다. 

그러나 그런 분별내용을 그런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 
또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서도 얻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동시에 함께 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일으킨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고 
무언가를 수행하고 닦아야 한다. 


그처럼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고 
아예 눈이나 신체에 독을 발라서 
아무런 감각도 분별도 처음부터 행하지 못한 상태로 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수행은 아니다. 

즉, 그런 감각과 분별을 일상적으로 행한다.
그런 상황에서 다만 그것을 재료로 일으키게 되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 내용은 경전내 다음 내용과 관련된다. 

...

“여래의 경계 및 나의 경계는 곧 두 모양이 아니며,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곧 보리를 구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리의 모양을 여의면 

곧 반야바라밀인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나란 모양[아상我相]을 알되 

집착하지 아니하며 

알지도 못하고 집착도 없으면 이는 부처님이 아실 바요, 

불가사의는 앎이 없고 집착이 없으며 

곧 부처님이 아실 바입니다. 

... 

그래서 다음 상태들은 서로 차이가 있다.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태와   
문수사리 보살님이 제시하는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상태는 차이가 있다. 


분별을 행하기는 하지만 분별이 없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일정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지만, 
정작 그런 말을 떠나고 자신은 말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사람을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태와의 차이는 다음 구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제가 만약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물러서 
능히 이렇게 설한다면 
곧 이것은 생각이 있음이요, 
곧 나란 생각에 머무는 것입니다. 

만약 생각이 있어서 
나란 생각 가운데 머문다면 
반야바라밀은 곧 처소가 있음이요, 
반야바라밀이 만약 없는데 머문다면 
또한 이것은 나란 생각이요, 
또한 처소(處所)라고 이름할 것이며, 

이 두 곳을 떠나 머물 바 없는 데 머문다면 
모든 부처님이 편안히 적멸에 처함과 같아 
생각하는 경계가 아닙니다. 

...

결국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집은 
앞 부분과 관련되고 
그런 분별을 행하지만, 
그런 분별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고 
집착을 제거해 임하면서 수행에 임하면 
그것이 올바른 수행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머물 바는 없는데 => 그렇게 머무는 것이다. 

이 내용은 반야경전에서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까닭에 그러그러한 수행을 집착없이 분별을 떠나서 행한다.
그러면 무량한 복덕과 그런 수행결과를 '얻는다'. 
이런 형태로 자주 제시된다. 


그래서 이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십주비바사론』에서 
부처님이 갖는 많은 특성을 나열한다. 
결국 수행을 하면 이런 특성을 얻어내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런 수행을 할 때 
그런 수행 내용이나 그로 인해 얻는 상태가 하나같이
본래 얻을 수 없음을 한편으로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집착없이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 사정을 지금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없이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하면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런 수행결과를 성취한다.
그리고 무량한 복덕과 수명 지혜를 얻게 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참고 sfed--십주비바사론_K0584_T1521.txt ☞10주비바사론 제10권

http://buddhism007.tistory.com/5249


그래서 이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지금 문수사리 보살님이 
거리에서 여기저기 오가고 
경전에서도 부처님이 계신 장소로 걸어가서 뵙는다. 

그러나 문수보살님이나 부처님은 
이 상황을 놓고 그 상황에 
그런 문수보살님이나 부처님이나 그 오고감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기에 
또 역설적으로 바로 앞과 같은 내용이 얻어진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있다고 보는 내용은
이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여기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처음에 제시한 측면의 사정을 그렇게 관하지 못한다. 
즉, 그렇게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는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을 정작 얻어낼 수 없다는 사정을 제대로 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놓고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갖고 대한다.  [망상분별 집착]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업을 행한다' [업]
이런 부분이 문제다. 

그리고 그 부분 때문에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 묶여 들어간다. [생사고통]


수행자도 역시 그 부분 때문에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역시 이와 마찬가지 상태로 묶여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반야 경전전반에서 강조해 제시한다. 


반야경전에서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내용도 
대단히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도 사정이 같다. 

앞에 제시한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차별이 없는 가운데 

부처가 있고 범부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왜냐하면 부처와 범부는 

둘이 없고, 차별도 없고, 

한 모양이요, 모양이란 것도 없기[1상무상一相無相] 때문이니라.” 


>>>

부처님께서 부처가 있고 범부가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 이유로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자. 
그리고 그 이유를 놓고 앞의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을 
곰곰히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앞 부분에 제시한 구조와 같다. 
즉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러그러한 수행을 집착없이 분별을 떠나서 행한다.
그러면 무량한 복덕과 그런 수행결과를 '얻는다'. 
이런 구조다. 

둘이 없고 차별도 없고 한 모양이고 무상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부처와 범부의 차별이 있게 되는 근거 사정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했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이러이러하게 행하면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얻는다고 제시하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최정점에 부처님이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극심히 겪는 중생과 
부처의 차별이 그 바탕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중생과 부처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차별상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내용이 나타난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처음 내용으로 돌아가 살피면 이해가 쉽다. 

문수보살님이 여기저기 오고간다. 
그 상황을 놓고 여기에 그런 문수보살님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에서 그렇게 잘 오가신다. 
이런 관계다. 

경전에서 각 경우마다 본 바탕의 내용과 
현실의 내용을 이렇게 관계지어 제시한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만일 앞 부분이 그렇지 않다면 어떤가를 살피면 이해가 쉽다. 

앞이 그렇지 않아서
만일 본 바탕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적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공하지 않다고 전제하자. 

그러면 그 바탕에서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 일체도
그렇게 나타나거나 얻을 수도 없다. 
그리고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그런 망상분별 집착도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런 관계로 앞 내용이 제시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구조를 살필 수 있는 내용도 
본 경전에 많이 제시된다. 
따라서 그 각 부분을 그처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다. 

...

생각도 없고, 

지음도 없으므로 

곧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며, 

모든 부처님의 태어나는 곳인 까닭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생겨남이 없는 까닭이다. 

...

생겨남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근거로 
모든 부처님이 태어난다. 
이런 구조다. 

전후 문장은 상식적으로는 상호 모순되어 보인다. 
그래서 일반적 입장에서 

이런 경전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쉽다. 

그런데 이들 서로가 서로를 근거하고 설명하는 내용이 된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vgyv9655

◈Lab value 불기2562/11/18/일/10:35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ldebert - Des Chatons Dans Un Panier.lrc

☎잡담☎

♥ 잡담 ♥왜조용히하라며시끄럽게말하는가.왜욕하지말라고하며욕하는가.왜화내지말라고하며화내는가.

글 쓰다가 잠시 쉬는 동안 
식사를 하며 인턴연구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 시험을 망쳐서 원래 자신이 희망했던 분야로 가지 못하게 된 입장치고는 
표정이 너무 밝다. 
그리고 재수생활 하면서 미뤄왔던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운전학원을 알아본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계획에 대해서는 
새로 가는 대학 캠퍼스에서 새로 친구도 사귀고 
앞으로 놀 계획을 열심히 구상하는 듯 하다. 

그래서 이왕이면 본인 경험을 통해 대학 캠퍼스보다는 
그 뒤에 있는 산을 잘 활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약간의 팁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가끔 본질적인 것보다 부수적인 것이 좋음을 더 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조금은 의아하다고 보게 된다. 

원래는 이런 경우 당사자가 조금 우울해하고 
주변에서 격려차원에서 위로가 될 조언을 좀 해주려 나서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정이 무엇때문인가는 조금 궁금하다. 

과거에는 잡당성 글은 별도로 조각글에 달기도 하고 
또 글이 길어져 조금씩 끊어 쉬고 이어 쓸 때마다 
예술 작품 사진이나 풍광사진 등을 많이 붙였다. 

요즘은 그냥 음악하나만 붙이고 이어 쓴다. 

그리고 음악도 과거에는 불어-영어-한글번역가사를 일일히 붙였는데 
지금은 그것도 생략하고 있다. 

그것은 체계가 바뀌고 난 후 경전 부분은 경전파일에 붙여 놓는 형태가 되어서 
너무 많은 자료나 다른 내용이 붙여지면 정리과정에서 힘이 들기 때문이다. 

따로 정리하는 조각글란의 글과는 또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경전에 붙이는 조각글은 경전 내용과 관련된 내용에 집중해야 하므로 
조금 자제를 해야 한다. 

>>>

그런데 일단 문제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조금 또 쉬면서 살피기로 한다. 

일단 내용을 검토하는 법정안에 
폭력적 분위기가 나타나 소란하기도 하다. 
그리고 당장 큰 부상을 당한 환자 치료도 해야 한다. 
내용도 복잡하다. 
역시 무자격 법관의 기분을 느끼면서 
일단 잠시 휴정하고 이어 나가기로 한다. 

쉬고 난 다음에 이어 살필 문제는 
물론 경전 이후 부분에 제시되는 내용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제시된 것인가도 검토해야 하고 
살펴야 할 내용이 많고 많다. 
일단 쉬자. 



>>>

쉬는 동안 이웃으로부터 
음악이 너무 시끄럽다는 항의를 받았다. 
그간 몇 년간 음악을 그렇게 들었왔는데 
그간 이웃에게 불편을 주는지 미처 몰랐다. 
미리 음악설비를 하기전에 주변을 살피고 
음악 볼륨을 어느 정도 올려야 
주변에 방해가 안되는지 미리 충분히 점검을 하고 음악을 들어왔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음악이 도무지 끊기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래서 소리는 비록 작아도 거슬렀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으면 볼륨이 알게 모르게 커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음악을 듣는 본인의 귀가 잘 안들리게 된 상태일 수도 있다. 
경우는 여럿인데 일단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누군가가 현실에서 무언가로 불쾌와 고통을 느낀다는 점이 현실 문제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많은 글을 적지는 않았다. 
그런데 글을 이어 적는 과정에서 이미 적은 부분을 다시 검토하면서 오타도 수정하고 
표현도 수정하는 작업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서 상당히 많이 작업을 한 상태다. 
그래서 쉬어야 한다. 

그런데 앞처럼 문제만 여럿 제출하고 
이 문제를 서둘러 살피지 않으면 상당히 답답한 상태로 오래 남게 된다. 
그런데 문제 해결 방안은 이미 대단히 많이 제시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먼저 살피는 것이 
문제해결에 기본적으로 도움이 된다. 


>>>

여기까지만 간단히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부족한 부분은 기회가 되면 
또 나중에 보충하기로 한다. 

원래는 부족하지만 대강 마무리 짓고 쉬려고 했는데 
노래를 듣다보니 무언가가 잘 해결되었다는 메세지가 들려서 
정말 그런가 하고 이 노래도 올린다.

한편  조금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데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노래에서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메세지가 
들려서 좀 평안하게 쉬기로 한다. 




이웃에서 오늘 음악이 너무 시끄럽다고 항의해서 
쉬면서 이것을 살폈다.
그렇게 크지 않는데 
왜 이것을 크다고 했을까를 놓고 살펴보다가 
스피커 하나가 바깥 부분에 노출되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 스피커를 안쪽으로 옮겨 위치해 놓았다. 

그런데 아마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경전에서 살피는 문제는 아직 해결이 멀다. 
 
즉 각 생명이 각 세계에서 무량한 기간에 걸쳐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도 없는데도 
그러나 대단히 진지하게 받아나간다.
래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만으로 이미 다 해결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따로 더 해결할 어떤 것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이는 수행자가 장차 성취할 목표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간 조각글에서 반복한 내용을 충분히 살핀 경우는 
위와 같은 내용들이 제시되는 기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 전체 내용이 상쾌하지 않고 어지럽게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부족한 내용들은 이전 조각글을 참조하거나 

또 다른 기회에 이어서 보충해나가기로 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251#9655
sfed--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_K0011_T0233.txt ☞문수사리소설 
sfd8--불교단상_2562_11.txt ☞◆vgyv9655
불기2562-11-19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2017_0111_212045_nikon_ab52.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atue_of_Xuanzang._Wild_Goose_Pagoda,_Xi'an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n_jose_MRG_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H-C-Fassett-Ellice-Is-1900



♥Politecnico di Milano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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