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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의 논의 본문

연구자료

원인과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의 논의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29.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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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505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A 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생겨나는데 있어서 
그 A 나 A 가 아닌 것이나. 
또는 그 둘다이거나 이것들이 
모두 원인이라고 할 수가 없고 
또 원인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겨남이란 본래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구절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원인이 없다는 내용을 부정한다면 
반대로 원인이 있다는 내용을 긍정해야 한다고 보게 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원인이 있다는 경우도 부정하고 
원인이 없다는 경우도 부정하니 
잘못 생각하면 
이것도 양말의 한 부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기 쉽다. 

양말은 양도논법과도 관련이 되는데 
생각할 수 있는 경우수가 두가지인데 
두가지를 다 부정하고 
세가지나 다섯가지 열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을 다 나열해서 하나하나 부정한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한마디로 그런 시설이나 분별 자체가 
엉터리니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 사정을 그렇게 보지 않으니 
이것이 거꾸로 자체 모순이 되는 
엉터리 주장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현실을 대하고 
현실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소원을 성취할 
방안을 찾고 

그래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면 
라이터를 찾고 불을 붙이고 
그러면 보지 못하던 불도 보고 연기도 보고 
심지어 담배로 인한 병도 얻게 되어서 
문제가 심하다라고 일반적으로 보는 것인데 

앞 내용은 어떤가 하면 
제발 그런 이상한 망상을 전개하지 말아달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의가 보통 복잡한 논의가 아니다. 

만일 이 두 입장을 놓고 
오늘 다수결로 이 가운데 하나를 옳다고 정하기로 한다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입장을 
지지할 것 같은가. 

거의 99% 가 원인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다 이런 식의 주장을 지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수학이던 진리의 문제던 
다수결로 그렇게 정하는 것이 아니고 

다수결을 따라 다니면 
단체로 지옥 관광을 하러 
묶여서 끌려 가는 상황에 처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정이 그렇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하나 시험에 출제하는 경우에도 
그렇고 
현실에서 생명의 수를 놓고 보아도 
인간과 바이러스나 세균 곤충 이렇게 놓고 보아도 
결국   
다수결로 답을 얻으려고 하면 
방향이 이상하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앞에서 위와 같이 원인이 있다거나 없다는 양쪽을 
다 부정했는데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기존에 하던 행위를 전보다 더 심하게 해도 된다거나, 
그런 내용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앞과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본래 무소유 불가득을 전제로 놓고   
현실에서는 이에 상응하게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임해서 

그것은 또 수행의 내용을 택해서 
정진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왜 앞의 전제에서 뒤의 내용이 
제시되는가는 이미 앞 조각글에서 
그 대강의 사정을 밝힌 바가 있다. 

그래서 결국 앞과 같이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이해를 통해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집착을 갖고 
대하기 쉬운 내용을 놓고 
수행자는 그런 집착을 전혀 갖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그 물건을 잃어버린다거나 
손해를 본다거나 
그래서 그 자신이 곧 죽게 된다거나 
등등 온갖 망상을 갖고 
대하기 마련이지만, 

수행자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올바로 관하고 
그런 가운데 

복덕자량을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런 수행에 그런 자세로 
집착없이 정진해나간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결국 남의 창고의 곡식알을 세고 
은행원이 평생 
다른 이 예금 통장의 금액을 계산하고 
돈을 세는 행위처럼 
자신에게는 큰 효용이 없는 내용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

>>>

이미 중론송에서 제시된 명제를 보았는데 

아무리 불교 각 종파의 공통된 스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용수보살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해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다시 살짝 살펴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답) 모든 법이 자체에서 생겨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며

그 둘을 합한것에서도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알라. 


『중론』sinsu 30. p.02b06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중론』sinsu 30. p.02b07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1-1)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āṃ nāpy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



그런데 이런 입장은 용수보살 혼자서 

독단적으로 이렇게 제시하는 내용도 아니다. 


이미 불교계에서 널리 읽히는 반야심경에서도 

관자재보살님이 

이와 같은 취지로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고 

또 반야심경이 핵심을 추렸다고 하는 

대반야바라밀다경전의 내용도 그러하고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은 

여타 불교 경전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종이를 태우면 연기가 나오고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는 없던 열매가 생겨나는 것을 

뻔히 다 보는데 

왜 생겨남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음처럼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위 논의를 꿈을 놓고 비유해보자. 


어떤 이가 자면서 꿈을 꾸는데 

꿈에서 없던 황금을 지하실에 내려가서 

캐내는 꿈을 꾸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꿈을 놓고 꿈에서 

그런 없는 황금을 새로 얻었다거나 보았다거나 

하는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꿈에서 그런 내용을 얻고 

황금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했다거나 

그런 내용은 있는데 


그 내용이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지금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제시할 때 

부처님이나 관자재보살님이나 

용수보살님이나 

다 언어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부정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 

원인이라거나 

생겨남이라거나 하는 등등의 언어로 표시하고 있고 

또 그 언어에 해당하는 관념분별도 역시 그처럼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그런 언어의 내용이나 

관념분별의 내용은 그런 형태로 

그런 차원에서 있다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여기서 있다라는 것은 

그렇게 그런 차원에서 

그런 의미로 있다는 것뿐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뿐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말하면 

어떤 것의 존재에 대햐여 그 본 정체가 문제될 때 


존재의 영역을 

고정불변하는 진짜라고 할 실체 -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언어) 


이런 식으로 영역을 나누어 살핀다고 하면 

지금 문제삼는 것들은 하나같이 

관념분별 (언어)의 영역 

희론의 성격을 갖고 실답지 않고 할 영역에서는 

그처럼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현실에서 각 생명이 그것을 집착하고 

그것을 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데 알고보면 

그 내용은 


그에 해당하는 진짜라고 할 실체도 없는 것이고 ( 무아, 무아소[나의 것이 없음], 무자성, 승의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무소유)


다시 실재 영역에서는 

어떤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분별영역에서 그렇게 분별한 내용에 해당하는 것을 

얻을 도리가 없고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것이고 ( 일체개공, 불가득, 필경리, 공)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 한 주체가 정신 안에 

생생하게 그 내용을 얻는다고 할 수 있는 감각현실의 영역에서도 

비록 그 내용은 각 부분을 다른 형태로 생생하게 얻는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정작 그 감각현실에서도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 자체는 얻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한 주체는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고 하면서 

그 때마다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렇게 관념분별로 얻는 내용을 가지고 


그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믿고 주장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전도몽상 증상이고 

이런 관념분별에 바탕해서 

탐욕과 번뇌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갖고 

임하기에 


바로 생사고통에 묶여 돌고 돌아다니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고 

진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중생이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고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놓고서

중생은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 있다고 집착하면서 생사고통에 묶여 돌아다닌다고 

그 관계를 제시하는 내용으로서 

이것이 바로 혹(번뇌)-업(신구의3업)- 고(생사고통)의 관계이기도 하고 

무명-행-식 ------노병사의 12 인연의 관계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 관계식은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각 중생이 어쩔 도리 없이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본 바탕이 그렇지 않은데 

근본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실답지 않은 내용인데 

그런 생사를 받고 고통을 받아나가므로 


그 관계를 지혜를 통해서 잘 관해서 

그 망상집착과 집착을 제거하게 되면 

그런 결과를 받지 않게 된다고 하는 

관계식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위 내용을 환멸연기의 관계로 취하여 

수행에 임하면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그러나 원래 본 바탕이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데도 

어떤 주체가 마치 최면에 걸리고 홀린 것처럼 

망상을 일으켜서 현실에 임하면 

그로 인해 업을 행하고 

그 업의 장애에 서로 묶여서 

무한히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관계도 설명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도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용수보살도 중론송에서 이런 12 연기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데 

이렇게 제시하면 

앞에서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내용과 

자체 모순이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잘 관하고 

그런 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나와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생멸이라고 할 때 생은 

무언가가 없다가 있다라고 관념분별하고 

이 내용을 묶어서 생한다라고 관념분별하는 것이다. 


멸은 또 반대다 있다 + 없다 

이렇게 두 내용을 묶은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이제 무언가 A라고 하는 것이 

없다가 있다고 본다면 


왜 이렇게 된 것인가를 놓고 

다시 그에 원인이 있다고 하는 입장과 

원인이 없이 그렇게 된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생을 인정할 때 

그것을 전제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명제에서는 

용수보살이  

그 모든 경우수를 다 검토해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전제하면 

그로부터 가능한 경우수가 이러이러한 것이 있는데 

그 모든 경우수를 다 검토해보니 

하나같이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어떻해야 하는가. 

처음 전제한 내용을 허물어야 한다고 

이를 통해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일반 입장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처럼 무엇이 생한다 멸한다라는 내용을 

관념으로서는 가질 수 있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 내용을 다른 존재영역에서도 얻을 수 있고 

그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고집하지 말라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일단 논의를 하는 본 취지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있다라고 하거나 

없다라고 하면서 

그 각 경우마다 집착을 하고 임하는 것을 

시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꿈과 같은 상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꿈에서 없던 황금을 새로 얻었다면 

황금이 생긴 것이라고 

꿈에서는 당연히 보는 것이다. 


또 그렇게 있던 황금이 

물에 빠져 없어지면 없어진다고 

꿈에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는 그렇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꿈에서 황금을 얻었다고 해서 

없던 황금이 잠자는 공간 어디에 생겨난 것인가. 


또 꿈에서 황금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잠을 자고 있던 곳에서 있던 황금이 

어디로 없어져 버린 것인가. 


그 둘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결론은 이것인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상대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가의 부분에서 

조금씩 설명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것은 상대가 어떤 식으로 그런 

주장을 하고 고집을 피우는가에 따라서 

그에 맞추어서 대응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논의는 또 어떤 상대가 

어떤 입장에서 그런 고집을 피우는가에 따라 


그 입장까지 같이 살펴야 하기에 

상당히 복잡해지는 측면이 있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망상증 환자가 

계속 자신이 어떤 망상을 일으키고 

그것이 있다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소란을 피우는데 


이 환자를 대하는 의사가 

환자의 치유를 위해서 어떤 방안을 

취하는가 하면 


일단 그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환자가 주장하는 내용 

대부분을 일단 다 긍정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환자의 치유를 위해서 

일단 그렇게 하는 것이지 

환자의 망상이 옳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그런 환자의 주장을 다 받아들여주면 


그 상태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나아가면 

자체적으로 큰 모순이 발생하고 

문제점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여주고 환자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있다고 해도 이런 문제가 생겨나고 

없다고 해도 이런 문제가 생겨나는데 


사정이 그러니 

그처럼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망상 분별을 계속 갖고 

그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행해 나가려고 하는가. 


이렇게 거꾸로 물어 보는 것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의사는 이런 논의를 하는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이것이다 아니다라고 

제시한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주장을 그렇게 하는 이가 

스스로 그런 망상을 계속 갖고 

행위해나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스스로 헤아려서 

알아서 중지하고 벗어나오라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환자별로 상태가 다 다르니 

그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용수보살님이 그렇게 

일일히 처방을 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입장에서 

다시 그 환자별로 상태를 다 살펴야 하니 

조금 번잡하고 복잡한 논의가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원래는 어떻게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가하면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처럼 

이미 그 간단한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이 방안으로 

쉽게 결론을 얻고 


망상분별을 중지하고 

집착을 갖지 않고 

벗어 나와야 하는데 

그러나 그 고집의 정도가 상당히 심한 

중증 환자가 오늘날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상당히 많았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임하는 입장들이 

오늘날도 상당하지만, 

과거라고 해서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감각현실을 하나 놓고 그것이 A 라고 자신이 생각할 때 


그 감각현실이 그대로 그 A 라는 관념분별인가를 

한번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가?


그렇지 않은데 

왜 그 감각현실을 자꾸  A라고 하는가. 

이것을 스스로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논리학에서는 어떤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감각현실에서 구하게 되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앞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런 사실은 스스로 자명하다

그것이 A 라는 것은 즉자적으로 곧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가면 곤란한 것이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이나 각 생명이 

이런 증상을 겪는가는 또 사정이 있다. 


그래서 다음 문제를 또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 주체가 그런 A 라는 관념분별을 

얻은 것인가. 


그것을 또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감각현실이 그대로 그런 관념분별인 것도 아니라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실재나 감각현실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형식으로 다시 살펴보면 

마찬가지 내용을 얻는 것이다. 


이를 다시 꿈을 놓고 비유하면 

꿈을 깨서 잠자던 침대를 놓고 

그 침대가 그대로 꿈에서 본 황금인가. 한 번 묻고 


그런 침대를 떠나서 

자신이 그런 꿈을 꾼 것인가 한 번 묻는 작업을 통해서 


자신이 꿈에서 본 황금과 

자신이 그런 꿈을 꾸게 된 그 잠자던 침대와의 

관계를 잘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통해서 

얻어야 할 중요한 내용은 


그래서 자신이 

현실에서 문제삼고 집착하는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그 일체의 것은 

자신이던 생명이던 기타 등등 그 모든 것이 


본 정체와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갖는 망상과 집착을 제거해내는 것이 

수행의 핵심사항인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생사 고통의 묶임에서 일단 풀려날 계기를 마련하고 

그에 바탕해서 수행의 방안을 취하면 

또 이로 인해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묶여 있는 자신의 업의 장애로부터도 풀려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곧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이다. 


그리고 이전 글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 바탕에서 수행자는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 성불 등을 목표로 

다시 무량한 수행을 닦아 나가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잘 정리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

>>>


일단 논의의 기본 취지가 위와 같은데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논의는 어떻게 행할 수 있는가를 

이어서 검토해보자. 



이 논의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자신들이 각기 문제삼는 어떤 A 의 

실재나 실체를 직접 얻고 확보할 도리가 없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사정이 그런데 

그런 실재가 어떠어떠하다고 누군가 주장할 때 

이 주장을 논파하려는 용수보살의 입장은 

더더욱 그런 것이다. 


용수보살의 입장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 주장자는 

그런 실재나 실체의 내용에 대해서 

그런 망상적 주장을 고집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상대의 주장이 

잘못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만일 어떤 상자에 꽃이 들어 있는데 

어떤 이가 그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계속 그 상자에 자신의 황금이 들어 있다고 주장을 한다고 해보자.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주장을 논파하려는 이는 

그 상자를 직접 열어서 

그 상자에 황금이 없음을 보여준다거나 

황금 대신에 꽃이 들어 있음을 보여주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논의는 그런 성격의 논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하고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일으킨 다음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 각 영역에 그처럼 실재한다거나, 


자신이 감각하고 얻는 그 내용이 

그대로 그런 실재의 내용이라고 까지 

고집을 세우고 주장하는 상태들인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들이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은 

모두 정신 안에서 일정한 화합관계를 통해서 

그렇게 얻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그 논의가 초점을 맞추는 

그 실재의 내용은 본래 

어떤 주체도 얻어낼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체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바로 그처럼 자신이 얻을 수 없는 

실재의 내용을 놓고 

그런 주장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고집하는 망상환자는 

단지 그런 주장을 고집을 세워 주장할 뿐 아니라 

그에 바탕해 온갖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생사 고통에 그대로 묶여 

끌려가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는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매번 잠만 자면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지르고 식은 땀을 흘려대는 

환자의 상태와 사정이 비슷한 것이다. 



그러니 일단  

소송에서 사용하는 방식처럼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여주고

가정적 항변을 사용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지만, 


상대가 주장하는 대로 그렇다고 하자. 


일단 이렇게 하고 나서 

그렇게 되면 

그 상대는 이제 도저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제시해주어서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임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미 생한다는 내용은 

없다 + 있다라는 두 내용을 결합시켜 

관념을 갖는 내용이라고 보았다. 


A 가 생한다라고 표현할 때 

그 표현을 사용하는 이가 그 표현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런 A 가 없다라고 본 순간에는  

그런 생함이 있는가. 


또 그가 A 가 있다라고 본 순간에는 

그러면 그런 생함이 있는가. 


물론 상대는 그 두 내용을 합친 가운데 

생함이란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 영역에서는 그런 식으로 

그 관념을 만들어 가질 수는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관념이 가리키는 감각현실은 

위와 같이 있다고 하는 정지단면이거나 

없다고 하는 정지단면들인데 

그 어느 정지단면에서도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위와 같이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미 각 주체가 

현실에서 그 내용을 얻는 현상 안에서 

그런 문제가 나타난다고 지적하는 것은 

원래 논의의 핵심 주제라고 할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앞 문제부터 일단 해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런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감각현실에서조차도 그런 내용이나 관계를 

얻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런 내용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의 영역까지 

밀고 들어가려고 하는가. 


이런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색상과 

귀로 듣는 소리을 놓고도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눈으로 색상을 보는데 

귀로 대해도 그 내용을 얻던가. 


그래서 귀로 대하는 내용 들 안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무엇을 자신이 얻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서 

함부로 다른 영역으로 그런 주장을 

적용시키려고 나서면 곤란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매번 화합관계로 자신의 정신에서 

각 내용을 얻게 되는 주체는 


본래 그런 관계를 떠난 실재의 내용을 

얻어낼 수 없는 사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논의하는 초점이 바로 그런 내용이라느 

사정을 통해서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이 잘못임을 밝히는 

다양한 방안이 동원되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이 

이미 어떤 다른 것과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성립시키는 것 자체가 곤란한 경우 

그 사실이 바로 그 내용은 

실재의 내용이 아님을 반증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문제삼는 것은 

자신이나 어떤 관계를 떠나 실재한다고 보는 내용인데 

어떤 경우는 그 자체로서 

그런 내용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념분별은 

이런 사정이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떤 이를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은 

그런 내용이나 관계를 떠나서 

아버지라는 내용이 실재한다고 볼 수 없음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상대가 일정한 주장을 하면 

그 주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실재에 대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해서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제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논의가 

주된 내용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감각현실과 관념분별과의 관계에서 

격자이론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것도 사실은 비슷한 성격을 갖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자꾸 무언가를 대하면서 

그것이 영희다라고 주장하는데 


그 부분을 놓고 하나하나 살펴보자. 


손이 영희인가. 

피부에 붙어 있는 세균이 영희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하면서 

이제 영희가 아니라고 본 부분을 

다 검게 칠해보자. 


그러면 이상하게 영희라고 처음 보았던 

그 부분을 포함에서 

전체가 다 검게 칠해지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유라고 할만한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이 

그런 감각현실에 그대로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함을 인정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생한다라는 관념도 

없다 + 있다의 두 내용을 합한 관념이라고 하는 것도 

사정이 같다. 


격자이론을 통해서 

무언가 없다고 하는 정지화면이나 

무언가 있다라고 하는 정지화면이나 

두 정지단면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이상하게 그 두 내용을 합치면 

그는 거기에서 생한다라는 내용을 분별해 일으키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런 내용이 여하튼 

그 두 정지화면이던 

그것을 합쳐 놓은 내용이던 간에 

그런 감각현실에 그 내용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각 부분에 하나같이 영희가 없고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그 부분을 다 합치면 

영희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심하면 이런 관계를 

그대로 그 내용을 얻지도 못하는 

실재에 밀어 넣고 


그것이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에서도 

사정이 그렇다. 

이렇게 주장하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그 안에 고정되고 영원불변하여 

진짜라고 할 본체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라고 


과거 플라톤이라는 망상환자가 한 때 추리하고 

주장한 것처럼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어떤 문제를 일으키기에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자꾸 

반복해 경전에서 제시하는가하면 


바로 이런 근본 무명과 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으로 인해 


각 생명이 헝악한 고통을 받는 세계에 

각기 처하게 되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생생하게 얻는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을 하나같이 

매번 실다운 진짜라고 대하면서 

그 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기에 그런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 현장에서 해결하던 


그런 상태에 가기 전에 

미리 한 일곱보전에 미리 방지하던 


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그것이 모두 원만하게 잘 해결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조금 한가하고 


생계나 자신이 집착하는 문제와 

바로 직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의 문제를 놓고 

잘 헤아려서 


스스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찾아 들어가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얻어야 

비로소 그런 묶임에서 풀려날 계기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최면쇼에서 보던 

그 우스꽝 스럽지만, 

하나같이 진지하게 고통을 겪는 그런 입장처럼 

입장이 바뀌는 것이다. 


감각하는 배경화면은 배경화면대로 

하나같이 생생한 가운데 


그것을 대하는 주체는 

자신이 메뚜기 형태이던 

바퀴벌레 형태이던간에 

자신이 태어나서 익숙하게 대해 온 형체를 자신이라 집착하는 가운데 


그렇게 매번 고통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생생한 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 생생한 감각현실을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집착을 풀었던 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것이 안 된 상태는 

위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풀었던 이라면 

또 그런 고통을 받는 세계로 

자신이 직접 묶여서 끌려 내려가지 않을 

수행도 큰 문제없이 잘 했을 것이지만, 


앞에서 처음 그렇게 보지 못했다면 

사실은 그런 수행도 

그렇게 잘 할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서로 같은 증상을 겪는 생명들이 서로 얽혀 

계속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가 

무량하게 이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부처님이 

그 근본 사정이 

각 생명이 기본적으로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그런 집착을 갖고 

그런 업을 행하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제시한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이해해서 

해탈문을 찾아서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얻어야 

그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


자신이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그런 내용이 실재에도 그처럼 존재한다고 
제 마음대로 집어 넣고 집착을 일으키는 가운데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는 현장에 
자신이 묶여 이끌려 드는 상황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대하는 현실의 
정체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과 
같은가를 늘 잘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자꾸 그런 현실을 대하면서 
다른 시감상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 현실을 대해 
그런 시감상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정말 그 내용이 그것인가라고 
거꾸로 되물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이는 자신이 현실에서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렇게 꾼 꿈 내용이 현실의 실다운 내용인가라고 
묻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통해서 
왜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온갖 내용이 
사실은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하고 
그렇기에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해야 
생사고통에서 벗어난다고 제시하는가를 
헤아려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중론송 자체는 
대단히 간결하고 

그에 붙여진 주석서는 또 다른 분이 
설명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혼동이 가중되는 경우가 많다. 

한 주제를 가지고 2 인 3 인 그리고 
상대의 주장까지 섞여지면 
왠만한 상태로는 그 복잡한 사정을 
다 헤아려 살피기가 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어떤 부분을 영희라고 보고 

그 영희가 자신에게 다가와서 
꽃을 건네 준다고 현실에서 매번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내용을 놓고 
거기에 그런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고 하고 
그것이 실답지 않은 내용이고 

따라서 그 영희가 있건 없건 
사라지건 나타나건 
집착을 갖지 말고 
현실에서 수행에 올바로 임하고 
정진하라는 내용을 제시받으면 

그것이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자신의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이것을 대하면 
오히려 이런 주장이 
거꾸로 궤변이고 
자체적으로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내용으로 
대하고 

나중에는 무시하고 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생사고통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온갖 험악한 세계에 끌려가 
가지가지 생생한 고통을 겪게 마련인데 
알고보면 그 내용은 현실에서 
자신이 익숙하게 대한 내용들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그 상황에서 자신은 그런 고통을 
직접 겪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지나친 것뿐이지만, 

이제 자신이 입장이 바뀌어 그것을 대하면 
그것이 하나하나 다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현실에서도
그 내용은 무량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의 생사만 문제삼았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한해에 얼마나 많은 축생들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갔는가. 
이런 내용만 하나 놓고 보아도 
쉽게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정신을 차리고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고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용은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취지로 어떤 식으로 
논의를 하는가를 잘 파악해야 

언어로 인해 혼동을 겪지 않고 
논의를 따라갈 수가 있다고 
기본적으로 보게 된다. 

처음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할 때 
어떤 이가 
그런 언어 자체가 없다거나 
그런 관념분별 자체가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하면 
어떤가. 

언어만 가지고 이해하면 
그런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접근하면 
왜 이 논의를 진행하는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용을 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경우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봐도 
똑같은 증상을 일으키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논의의 기본 취지가 무엇인가부터 
잘 파악하고 
얻을 수 없는 실재에 대해서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의존해서 
어떻게 그와 관련된 논의를 진행해 나가게 되는가를 
잘 파악해 가야 한다고 본다. 


[...]


그런데 이런 논의에서도 
이런 부작용이 있게 된다. 

기껏 중생들이 집착하는 것을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실재의 공함에 대해서 논의하는데 

어떤 이가 그 공하다는 내용에 
다시 집착을 일으켜서 
그것을 붙들고 임하면 
바로 그 상황이 그런 부작용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하던 것에 
집착을 제거하고 
해탈문을 통해 해탈을 얻고 

그 바탕에서 수행에 임하여 
원만히 수행을 성취해야 하는데 

이 두분에서 둘다 거꾸로 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 문제인 것이다. 

또 그런 문제에 대해서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이 똑같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고 
그러나 그런 바탕에서 
무량하게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인데 

이 두 내용을 각기 엉뚱하게 취하고 
나가면 바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으니 
=> 수행을 하등 할 필요가 없다. 

아무렇게 행하거나 
아무것도 행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심지어 전도몽상 상태에서 집착에 바탕해 
행하던 행위를 극단적으로 해나가도 무방하다. 

이렇게 나아가는 경우가 그 한 문제이고 


다시 수행을 해야 하고 
수행을 하면 
무량한 복덕을 얻게 된다 
이렇게 제시된 부분을 붙잡고는 

그러니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관하고 그에 집착을 일으켜 임하면 

처음 일반적 입장에서 집착을 바탕으로 
일으켜 가졌던 그 모든 부작용이 
그 수행자의 수행과 관련해서 
다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시해준 내용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양 측면을 다 그대로 
부처님이 제시해준 대로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속하게 아비지옥에 수행자가 들어가게 마련이라고 
제시하는 것도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여하튼 상대가 엉터리 주장을 행하고 
고집을 세울 때 

그것을 논파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방안을 사용하는 가운데 

주로 상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오류의 결론을 필연적으로 도출하게 된다는 관계를 통해 
일종의 귀류논증을 행하게 되는데 

이 귀류논증에 대해서도 
다양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그것은 서양 논리학자들이 
주로 견고한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귀류논증식을 사용하는 배경 때문이다. 


상대가 
그것은 A 이다. 
이렇게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로부터 이러이러한 엉터리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처음 주장이 엉터리라고 비판한다고 할 때 

서양 논리학자들은 이 내용을 가지고 
어떤 결론을 얻어내는가 하는 것이 바로 문제다. 

앞과 같이 비판하면 그 비판을 통해 
대부분 그것은 처음 'a 이다'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보고 . 
그러니 이제 위 주장은 
그것은 A 가 '아니다'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중론송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용수보살님은 
'A 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A 아니다'라는 주장도 잘못이라고 비판한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능한 모든 경우수롤 놓고 
잘못이라고 비판하면 

바로 앞과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용수보살님이 
스스로 자체 모순되는 궤변을 제시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고 

어디까지나 상대가 그런 식으로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등으로 
망상분별을 행하고 고집하면 
그 어느 경우나 
그런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상대입장에 들어가 제시한 것 뿐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비판을 행하는 용수보살님의 입장은 
그 가운데 어떤 주장을 행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전반적인 사정을 잘 파악하면 
이후 논의 내용을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살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각 내용을 그렇게 일일히 
상대의 전모망상 증상을 따라가면서 
살피려고 하기 보다는 

경전에서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을 
붙잡고 
깊이 삼매에 들어서 
연구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보게 된다. 

곧바로 직접적으로 그 사정을 살피는 것이 
사실은 더 간단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철학자 ○○ 라는 이가 
방대한 저술을 해서 주장을 펼친다고 할 때 
그 내용이 엉터리라고 해서 

하나하나 그 내용을 다 살피고 
그 주장을 받아들이면 
어떤 잘못을 만난다고 밝혀서 
그 주장을 논파하려고 하면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엉터리인데도 
번역부터 시작해서 
그 주장 하나하나를 다 살펴야 
사실은 그런 비판이 원만하게 이뤄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번잡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데 
용수보살님이 대표적으로 27 항목을 놓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그런 것이 당대에 상당히 
사람들이 고집을 세우고 
엉터리 주장을 전개하는 양상이 심각했기에 
그런 것을 대표적으로 뽑아 논파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사정만 이해하고 
책을 덮고 
수행항목을 찾아서 
수행에 곧바로 임하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되는데 

그러나 또 한편으로 
여가가 생기면 
그런 내용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도 
필요한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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