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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

개미투자자 100원으로 30조벌기-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3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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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496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자신이 좋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있다면 좋겠다거나 아주 좋겠는데 
이런 마음을 일으켜 갖고 
현실을 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는가를 놓고 
이런 인과문제가 하나같이 문제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에 대해 분별하는 내용 가운데 
옳다고 보게 되는 내용과 
옳지 않다고 보게 되는 내용이 또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 부분에서는 승의제 차원에서 
그런 내용 자체를 본래 논의할 바탕이 없다고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그렇지만, 그래도 분별을 한다면 
그 가운데에서 옳다고 보게 되는 내용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내용을 또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본래는 실재나 감각현실에 2 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이 부분을 살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는 
2 도 있고 3 도 있고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현실이고 
현실에서의 분별인 것이다. 

그럴 때  
2 더하기 2 는  4 라고 답하는 것은 옳지만, 
2 더하기 2 는  5 나 9 라고 답하면 엉터리다. 
이런 구분을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 분별영역에서는 
소설도 있고 
상상으로 그려 놓은 만화책도 있고 
시인이 쓴 시도 있고 
기타 철학자의 사변적 주장도 있고 
과학자가 주장하는 내용도 있고 
등등 수많은 분별 작용이 있다고 할 것인데 

이런 것들에는 
일단 분별하는 가운데에서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 엉터리가 많이 들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분별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희론의 바탕에서 분별을 행하고자 할 때는 
그래도 옳은 분별을 해야 한다고 보고 

이것을 구분해서 
분별하는 가운데 가장 옳다고 볼 내용을 
불교에서는 다시 세속제라고 표현하여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것은 분별이 희론임을 전제로 할 때도 
다른 견해는 이러이러해서 
그 자체로 엉터리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그래도 비교적 옳은 내용을 세속제라고 
구분해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록 그것이 기본적으로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해도 
그렇게 세속제를 확립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현실에서는 바로 이런 세속제를 바탕으로 
언어를 떠난 승의제를 얻을 수 있게 되기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살피면서 
또 이와 함께 현실에서 예민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내용 
즉 어떻게 하면 소원을 뜻대로 다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미 보았지만, 

소원이 100 % 성취되었다고 여기게 되는 어떤 정지 단면을 놓고도 

그 상태에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바로 승의제의 차원에서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사정이 그렇지만, 

그러나 어떠어떠한 상태는 그런 소원이 전혀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고 


그러나 그와 달리 어떤 상태는 그런 소원이 

성취된 상태로 보게 되지 않는가. 



투자를 했다면 


비록 이 어느 경우나 그 정지단면에서 

자신이 문제삼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승의제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는 투자액보다 많은 수익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경우와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앞의 문제와 관련해서 

살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


자신이 투자한 종목을 매도한 다음

급 상승하고 

매수하면 급격히 하락하면 

투자자 마음이 어떻게 되는가. 

속이 쓰린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 신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이런 투자를 하면 

초단위로 변화하는 가격에 

마음이 편할 도리가 없게 되고 

그런 상태로 오래 생활하면 

결국 몸도 상하게 마련이라고 본다. 


직업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이 

나이가 들면 오래 이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는 것도 그런 사정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특히 이처럼 가격 변동이 심한 종목에 투자하는 경우는 

기존의 주식투자나 선물거래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는 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고 보는 것이 일반이다. 


기업을 경영하거나 사업을 하면서 

여유자금을 재태크 차원에서 관리하는 일이나 

원래 주식이 갖는 본 취지가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닌데 


시세변동에 올라타서 시세차를 거두어 수익을 얻기 위해 

임하는 것은 

결국 그 원리가 도박의 원리와 같은데 

도박장에서 직접 도박을 하는 것보다 

더 문제가 많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도박장과 이런 거래소의 거래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수익을 얻어도 거래에 참가한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수익을 거두고 

손실을 볼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clean 한 도박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성격이 도박의 중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을 

더 증폭시키고 심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이런 거래소에서는 

지렛대 (leverage) 효과를 제시하면서 신용거래를 허용하는데 

수익이 발생할 때는 상당히 좋다고 할 만하지만, 

자신이 주사위를 매번 던져서 숫자를 맞추어내는 

신통력이 있다거나,  

또는 매번 주사위를 던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숫자가 

나타나게 할 신통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순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할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는 상태와는 달리 

대단한 심적 압박을 갖게 만드는 원인도 되는 것이다. 


앞에 붙인 표에 

변동하는 가운데 기록한 최고가 408 최하가 243 이런 숫자가 

그런 입장에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것이고 

생사를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숫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이런 거래를 통해 

큰 수익을 거둔 경험이 있게 되면 

이후 꾸준히 씨를 뿌리고 

성실하게 물도 주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노력 자체를 

외면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한 번 잘 투자하면 은행에 10 년 예금하거나 

사업을 열심히 해서 얻는 수익을 

바로 거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 부분에 관심을 더 기울이지 


밭에서 씨를 하나하나 뿌리고 

가꾸는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중독증상이 생겨날 때 

옆에서 말려주는 이가 있으면 좋은데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대단히 cool 하고 

clean 한 측면이 있기에 

일일히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컴퓨터 게임에 몰입해서 

날밤을 보내는 아이들처럼 

어른들도 이런 종목에 빠지면 

본업을 제치고 이런 분야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평생을 보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보낸 평생은 

그것이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정리해야 하는가. 


거래소 그래프 변동표에 접착되어 달라붙어

자신의 삶의 궤적이 그렇게 표시되는 가운데 

한 평생이 그렇게 쉭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어떤 경우에 확실히 

그 중독증상이 해소되는가하면 

그런 거래를 반복하다가 

잔고에 can 이란 글자만 가득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경우가 대단히 현실에 많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위험성을 미리 잘 파악하고 

재태크 차원에서 거래를 하더라도 

여유자금을 놓고 마음 편한 상태로 임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좋지 않고 


심한 경우는 곧바로 

이상한 향 공양 이른바 번개탄 공양을 

올리려고 나서는 경우가 많게 되는 것이다. 


파도물결이 일어나는 바다에서 

자신만은 남과 달리 

늘 잘 올라타고 잘 내릴 수 있다고 자신도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단히 희박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관적인 내용만 제시하면 

환영을 받겠는가. 


그래서 또 그런 위험성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지만,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면서 대박 수익을 거둘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잘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인과 문제나 

어떤 것의 본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갖는 가치는 

다른 것과 어떤 경중의 차이가 있는가 

문제등을 다각도로 살펴나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살필 때 

가장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다음을 먼저 잘 확인해보자. 


즉, 눈을 감고 

금괴 1 톤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따고 할 때 

그렇게 마음에 떠올리는 그런 금괴의 

무게나 길이를 잴 수 있는 

저울이나 자가 마음에 있는가. 


이런 것이 있는지 

잘 먼저 확인해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눈에 줄자도 보이고 

무게를 재는 저울도 보인다고 하지만, 

그러면 거기에 그 길이나 무게가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이 줄자나 저울의 눈금을 보고 

분별하는 그 영역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할 것인가. 


지금 이것을 먼저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현실에서 매 경우마다 이것을 문제삼으니 

어딘가에는 그것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 일단 확인해보자는 의미다. 


이미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 있는 

문제점을 반복해 살폈는데 

여기서도 똑같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금괴의 크기를 재고 

무게도 달 수 있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이므로 

그래서 그것을 일단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그렇게 문제삼는 

길이나 무게를 놓고 

길이를 재는 자는 어느 영역에 있고 

무게를 재는 저울은 어느 영역에 있다고 할 것인가. 



[...]

투자를 잘 해서 대박 수익을 얻는 방안을 
살피는데 
과거의 상인들의 내용을 살피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된다고 본다. 
중국의 상인 가운데 유명한 상인으로 
도주공 치이자피(鴟夷子皮) 범려라는 이도 유명하고 
여불위라는 상인도 유명한데 
이들이 다 나라를 주무르는 정도의 수완을 
가졌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우선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한 나라의 재상으로도 활약했는데 
오나라에게 월왕이 포로로 잡힐 때 
같이 어려움을 극복한 가운데 
정작 구천이 뜻을 이루자. 

곧바로 나라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도주해갔는데 
그곳에서도 바로 거부를 이루어 소문이 나고 
그래서 또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처럼 매번 옮겨 다니며 천금을 세 번을 이루었는데 
떠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 지인들에게
다 나누어 주면서 그렇게 부를 이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어서 
매번 시기와 상황에 맞추어 잘 적응해서 부를 이루고 
몸도 보전하였다고 하여 
중국 상인들에게 상인의 신 정도로 
평가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를 진나라의 왕으로 만든 인물이다. 
여불위는 기이한 재화를 보게 되면 
사야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진시황제의 아버지가 불우한 상황에 있을 때 
거금을 들여 그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고 
그 후로 중국을 뜻대로 주물렀다는 이야기가 유명한 것이다. 

알고보면 한국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부여의 상인집안의 한 여인인 소서노라는 여인은 
주몽을 도와 주몽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자신의 아들 가운데 온조는 백졔를 세우게 하고 
또 자신의 아들인 비류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기초를 세우게 했다는 
것인데 
한 여인이 그렇게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도 역시 그런 유명한 상인이 있다. 

아래는 그 기원전 시대에 그 상인이 살았던 주택지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다.





세싱에 상인이란 많고 많은 법이고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할 상인을 떠올리고자 할 때 
앞에 소개한 도주공이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 도주공을 소개하려고 할 때마다  
매번 그 이름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거친 다음에 그 이름을 복사해 넣게 된다. 

그런데 위 인도의 상인은 
경전 첫머리에 수없이 나오기 때문에 
대단히 그 이름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널리 알린 
상인이어서 
경전을 대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기억할 도리 밖에는 없는 상인이기도 하다. 

결국 투자를 한 번 잘 해서 
최소한 부처님과 함께 계속 이름을 후대로 전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적어도 부처님 당대부터 지금까지 즉, 2560 + 80 여년 동안 
세계적으로 경전을 대하는 이들에게 
각인이 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이 상인은 부처님 당대에도 고아나 과부를 거두어 보살펴서 
이름 자체를 급고독장자라고도 불리웠는데 

그보다 유명한 이야기는 
땅에 금을 깔아서 땅을 사서 
그것을 부처님에게 수행자들이 기거하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절로 바친 일이 유명하다. 


경전에 기원정사 또는 기수급고독원 등으로 나오는 곳과 
제타숲(jetavana)이 바로 그곳이다. 

이는 오늘날 스타워즈에서 나오는 
제다이기사 즉 제타숲의 수행자들이 수행하던 곳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는 사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여하튼 
스타워즈 시나리오 작가가 이를 모델로 해서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는 
이 곳은 본래 기타 또는 제다(制多-Jeta)라고 하는 
사위성 파사닉왕의 태자)의 소유였는데 

어느날 급고독장자가 그 태자의 땅을 보고 
부처님에게 바치려고 그 땅을 사려고 하자, 

태자가 우회적으로 이 땅은 팔지 않겠다는 뜻으로 
땅에 황금을 깔면 그 만큼만 팔겠다고 하였는데 
급고독장자가 정말 황금을 가지고 와서 
깔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태자가 
왜 상인이 그런 무리한 투자를 감행하는가 궁금하여 
급고독장자 수달다(sudatta)에게 그 사정을 캐물어 
그 사정을 알아낸 다음 

기타태자도 공동 투자를 하기 위해 
반절은 남기고 
반절만 그렇게 급고독장자에게 판 다음 
그 땅을 부처님에게 바쳐서 
그래서 그 사원의 이름이 
기수[=기타 태자가 소유했던 숲[樹+ 급고독+ 원 => 기원정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기원전 당시의 상인의 저택이 
현재 저 정도 규모로 남아 있는 정도이니 
여하튼 대단한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치를 알아본다는 점에서 
단순한 상인과는 차원이 달랐던 점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슈라바스티(śrāvastī[) 한자어로는 사위성이라고 하는 

지역에 있는 

기원정사가 그곳인 것이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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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인도에서 또 하나 전설적인 투자를 행한 인물로는 

아소카 왕을 떠올릴 수 있다.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모래 한 줌을 투자해서 

인도 전체를 얻은 인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그 아소카왕이 인도를 전체를 차지하고 

인도 전역에 세운 탑주라고 한다. 


인도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런 유적을 통해서 

그 일부분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데 

여하튼 모래 한 줌으로 지도에 보이는 광활한 인도를 차지했다는 것이니 

투자 수익률만 놓고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 정도 자료만 놓고 
현실에서 
어떻게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투자를 해야 

이처럼 나라를 세우거나 
그 이름을 수천년을 이어가면서 
남길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점도 가치의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 [pt op tr] fr





투자의 비밀이란, 
결국 생각할 변수가 너무 많으면 
국회의원들에 둘러싸인 
장군처럼 된다는 점이다. 

그런 사정으로 
약간 무식하게 임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나 무식한 이의 조종키는  
보통 누가 갖고 있다고 보는가. 

투우장에서 황소를 놓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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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이전 글들에서 

투자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투자란 수익을 얻고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좋음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것인데 

그로 인해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받으면 되겠는가. 


그래서 좋음에 따르는 부작용과 위험성을 

살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방편에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특히 중독현상이 강한 부분에서 

주의를 기울이고 잘 임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독현상이 문제된다고 

완전히 이것을 배제하는 것만 능사라고 오해하면 

오히려 곤란하다. 


그러나 약간 좋은 점이 있다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점을 

모두 무시하면 또 곤란한 것이다. 



투자에서 신용으로 

즉 자금을 대출받아 투자에 임하면 

수익을 거둘 때는 

대출받은 자금은 고정이율로 반환하면 되기에 

자기 자본을 기준으로 거둘 수 있는 수익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주사위를 매번 던지면서 자신이 매번 주사위 번호를 알아맞출 수 있다거나 

또는 매번 자신이 원하는 번호로만 나타나도록 만들 수 없기에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자신이 투자하는 부분도 사정이 같다. 


그런데 자신의 기대와 달리 투자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그 자금의 성격이 

자신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고 보는 

여유자금인 경우와 

자신의 생존이나 생계가 바로 직결된 자금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그 자금이 

자신의 자금인 경우와 

타인의 자금인 경우는 또 성격이 달라진다. 


그런데 

손해가 발생하면 누구나 대부분 

속이 상하는 것은 보통인데 

그래도 그것이 자신의 자금이면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주체의 입장은 또 자신과 다른 것이다. 


이는 쉽게 자신을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자신이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을 보는 경우와 

자신이 다른 생명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을 놓고 보는 경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원래는 같게 보고 존중을 해야 마땅한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손해가 발생할 때 

다른 이에 대해서는 

지극히 가혹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투자가 실패할 때 

자신이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으면서 

자책하는 것과 


다른 이가 쫒아와서 압류를 하고 

기타 법 이외의 온갖 수단방편을 다 동원해서 

자금을 회수하려고 하는 경우는 

그 압박의 정도가 다르다는 의미다. 


투자가 실패해서 can 이 되었을 때 

자신은 그래도 can 이란 글자를 보면서 

자신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can 을 다른 의미로 보는 것이다. 


발로 차면 구르면서 소리라도 나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동전이라도 

몇 개 꺼낼 수도 있다고 보고 과감히 차고 굴리고  

그래도 끝내 속이 풀리지 않으면 

발로 찌그려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자신이 자신과 다른 생명을 놓고 

아상도 갖지 않고 타상도 갖지 않고 

차별없이 모두 존중해서 

바이러스나 세균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생명을 다 각기 우주보다 더 가치있다고 

존중하고 대해왔다면 그래도 모르는데 


자신부터 자신만 존중하고 

매끼 식사를 위해 

다른 생명은 고통받으며 지내다가 

끝내 도살당하고 없어져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평소 임해왔다면 


자신도 다른 이로부터 

특별히 다른 것을 기대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아닌가. 



그래서 그런 위험을 미리 

대비하지 않고 

그저 높은 수익률만 쫒아서 임하면 

그 하나의 가능성이 현실이 될 때 

곧바로 벼랑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또 

극단적인 경우에도 별 문제는 없고 

그래서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해도 그런 자세에는 

여전히 큰 문제가 있다고 

또 사정을 제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이다. 



>>>


그것은 모든 좋음의 방편이 갖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생명이나 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범위가 대단히 넓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 그 주체가 

좋다고 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할 것인가.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고 

또 여자는 멋있는 남자를 좋아하고 

그런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문제다. 


좋은데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리고 수행에서는 원칙적으로 

대부분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되는 것을 놓고 

모두 그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라고 제시하는데 


그러나 왜 그것이 좋은데 

그래야 한다고 할 것인가. 


누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그 이유는 그것이 그렇게 좋은 한편 

그렇게 단순하게 좋은 것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하게 좋을 뿐 

좋고 좋고 좋고 좋은 것은 아니기에 

바로 그 부분이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단순하게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면 

그로 인해 그 단순한 좋음만 얻을 뿐

나머지 무량하게 좋고 좋고 좋고를 얻지 못하므로 

그 부분이 알고 보면 손해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좋음이란,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이 다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온갖 측면이 다 좋을 수 있는데 


만일 이 가운데 

나 자신만 

지금 당장 

이 측면에서만 좋고 

나머지가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런 부분이 문제이고 

또 그런 내용 때문에 

그 좋음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음은 반대로 그것에 집착하는 만큼 

나머지 부분의 좋음을 장애하고 

나쁨과 고통을 자신에게 돌려주기에 

또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무량한 좋고 좋음을 얻지 못하고 

대단히 손해를 보는 것인데도 

그러나 당장 그 주체는 그것을 놓고 대단히 좋다고 여기며 

집착을 갖고 대하는 가운데 

그에 접착되어 그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접착 상태로 인해 

또 반대로 무량하게 좋고 좋은 내용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기에 


그 주체가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의해 

좋다고 여기는 것은 

그가 그에 대해 '좋게 여기고 접착을 갖게 되는 그 강도 만큼 '

그것이 더 문제라고 제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는 것을 

제거해야 할 사정은 위와 같은데 

그 사정이 얼마나 간단한가. 


비유를 들어 

현실에서 현미경으로 무언가를 들여다 보는 이는 

그 상황에 놓여 있기에 

들판의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고 


또 들판의 나비에 접착되어 그것을 대하는 이는 

또 바로 그 상황에 놓여 있기에 

넓은 우주를 보지 못하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비유로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산수로 간단히 표현하면 

10 에 접착된 이는 

20 을 보지 못하고 


20 에 접착된 이는 

30 을 보지 못하고 

그런 식인데 


여하튼 무언가에 접착이 되면 

그로 인해 무량한 좋고 좋음을 보지 못하고 

또 얻지도 못하게 되는 문제가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매 순간 10 에만 접착되어 

그것을 착실히 다 얻어나가고 

그것을 모두 모으면 

무량한 좋고 좋음이 얻어지게 된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10 에 접착되면 

그것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그로 인해 무량한 좋고 좋음은 얻지 못하게 되는 

관계가 있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량한 좋고 좋음을 얻는 경우는 

10 은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서 

얻을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무량행문에 임하는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물러서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한 방편지혜를 닦고 수행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에서 모든 방편이 다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청정한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거나, 

청정한 니르바나로부터 본래 떨어져 있는 것도 

하나도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니 무량행문의 수행에 임할 때는 

처음 수행을 하던 상황과 달리 

배우지 않고 닦지 않아야 할 것이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방편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지만, 

수행자는 이런 나쁨을 제거하고 

이를 좋고 좋은 형태가 되도록 

이를 고쳐 사용하는 것이 요망된다고 할 수 있고 


바로 이런 사정으로 

무량행문의 수행은 

삼매와 다라니로 그 내용이 모두 압축되는 사정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그 내용이 무량하고 광대하기에 

그런 사정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같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같이 갖기에 

그것이 오로지 좋고 좋은 방향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수행단계에서부터 

통제를 하는 사정도 있는 것이다. 



원칙적인 수행에 임할 때는 

보통 음악이나 음식 향 기타 등등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는 것을 

모두 절제하고 금하는 것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극단적 고행을 행하는 것보다는 

가장 좋은 수행결과를 얻어낼 수 있도록 

중도를 취할 것을 제시하고 


또 늘 다른 이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며 수행하기 보다 

스스로 진리인 법과 자신에 의존하여 

수행에 임할 것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런 각 극단의 방안이 모두 

다 성불에 이르게 하는 방안인 사정도 

제시되는 것을 경전에서 살피게 된다. 


그 대표적인 분들이 경전에서 그 사례로 제시되는데 

약왕보살님이나 

묘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 등이 

이들 각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로 

또 제시되는 것이다. 



이 분들이 한결같이 현일체색신삼매 내지 여환삼매를 증득하여 

원하는 형태로 자유자재하게 그 모습을 변신해서 

후배 수행자들을 지도하는데 

그러나 또 경전에 보면 각기 조금씩 

다른 특색이 있음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는 수행이란 

현실에서 문제삼는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넓고 길고 깊게 실상을 꿰뚤어 올바로 관하는 가운데 

그 정체나 그 가치를 관하고 

또 그 인과를 살피거나 하여 

수행방안을 실천해나가 수행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보는 것인데 


앞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수행방편을 취하여 수행결과를 증득하는 

사례들이기도 한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행해야 할 

원칙적인 수행노력을 하지 않고 

고행을 행하거나 

또는 음악과 식사 공양만 꾸준히 행한다거나, 

단순히 보살님 명호나 부처님 명호만 

한결같이 극진히 념하여 

수행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또는 경전의 내용을 스스로 연구하고 

궁리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그 자체로는 뜻이 없고 

아무리 외우고 읽어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다라니만 붙잡고 념송하여 

수행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법화경등에서는 

그러한 방안도 모두 성불에 이르는 방편이 된다고 

그 대표적 사례들을 뽑아 제시하고 있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유마경에서는 방편과 속박 및 해탈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고 

합니까? 


보살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空, unyat), 

무상(無相, nimitta), 

무작(無作, apraihita)의 (세 가지 해탈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有方便慧解, upyoptta-prja]이라고 

합니까?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무상· 무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조복시키지만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음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


이런 부분은 

속박과 해탈의 차이의 핵심은 

집착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와 

그 지혜와 방편을 통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그 기준이 됨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왜 하나의 수단이나 방편이 

이렇게 달리 평가받게 되는가는 

세상에서 문제삼는 온갖 좋음을 놓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이 목마를 때 마시면 좋음이지만,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물은 고통을 

주는 것과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무량행문에 있어서는 

단순히 외관만 놓고서는 

그것이 올바른 수행인가 아닌가를 

살피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mun 님의 립싱크 수행이 

문제되는 부분도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본다. 


독경 테이프로 경전을 열심히 듣고 따라 읽는 것 같은데 

그것이 정말 수행자의 마음에서 

임하는가 아닌가

또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듣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그 차이가 있는데 

그러나 이런 립싱크 수행은 

와관만으로는 그것이 쉽게 구분이 되지 않기에 

바로 이 부분에 mun 님이 살짝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표준적인 수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관만 보면 좋고 나쁨에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것 같은데 

잠시 황진이가 나타나 유혹하면 

곧바로 집착 증세를 일으키 임하거나, 


또는 수행자는 여인을 멀리하고 

집착을 제거하라고 했다고 하여 

임신한 여인히 출산을 하려는 가운데 

도움을 요청할 때도 외면해 버린다거나 

하는 것은 

수행의 본 목적과 그 방안에 대해서 

혼동을 갖고 임하기에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현실에서 일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을 놓고도 

그 사정을 쉽게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일단 오락을 즐기기 보다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는 역시 하나의 좋음은 그 좋음을 주는 대신 

그에 접착되기 쉽게 만들고 그로 인해 

무량하게 좋고 좋음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기능을 하기에 


기본적으로 그런 표준적인 수행방안을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임하여 

성적도 아주 우수하고 

남들이 다 원하는 지위도 차지하는데 

나중에 보면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또 그 반대로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나중에 보면 놀라운 성취를 하고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경우도 있는 것은 


또 각 방편이 모두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취지에서 

실질적으로 추구되는 것인가에 따라 

그 사정이 달라지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





>>>


일반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어떻게 투자하면 수익을 많이 내는가 

이 부분인 것 같다. 


왜 많은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많은 수익을 얻어서 그 상태에서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더 나아가 위 답에 다시 앞의 질문을 계속 해나가서 

그 궁극적인 답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러나 그보다는 당장 

원하는 수익을 많이 얻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게된다. 



[...]

현실에서 개미 투자자는 
개인 투자자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몇 십 몇 백만원을 가지고 투자하는 경우부터 
몇 백억 까지 투자하는 큰 개미까지 포함되는 의미라고 본다. 

개인입장에서는 몇 백억원도 상당히 크다고 보는데 
거래소 입장에서는 수만 많고 제각각 따로 따로 움직이면서 
홍수가 나면 떼로 몰살당하는 형태가 자주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개미에 그런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미라는 단어를 보면 뜻 자체가 
이 개미나 저 개미나 다 똑같아 보이지만, 
다 제각각 개성이 있고 다 제각각 아름답다. 

이런 의미가 글자에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개미투자자의 특징은 
한마디로 

주사위를 놓고 이야기하면 
주사위가 던져진 다음 어떤 숫자가 나올지 예측할 신통력이 없고 
더 나아가 
자신이 주사위를 던지면서 주사위 숫자를 원하는 대로 만들어낼 
신통력도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투자한 종목이 자신의 뜻대로 가격이 변동해서 
수익을 얻기를 바라는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위 상태에서 그런 희망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겨우 몇십 몇백만원으로 투자를 시작해보는 
막 알에서 부화한 형태의 꼬마개미형태부터 
일반 개미투자자들은 
일단 몇 십억원 정도를 개인이 운용하는 수준의 큰 개미 
내지는 몇백 억원 정도를 운용하는 슈퍼개미의 반열에 오르기를 희망하고 

더 전문화되면 아예 
동호회원의 자문도 하고 자문료도 받아가며 투자를 행하거나 
펀드를 조성해서 펀드를 운영하는 펀드매니저 내지는 
기관투자자와 동급의 반열에 오르는 정도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 

일단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들다고 보지만, 
바둑으로 치면 
이 정도를 이 분야에서 9 단정도 되는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최종 목적이 그렇다면 
열심히 기보 공부도 하고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러나 수익을 얻고는 싶다. 
이런 경우 
바둑으로 말하면 한 4 급 정도 두는 실력으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수익도 얻고 싶다
이런 경우는 방안이 있다고 보게 된다. 

[...]


본인이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두는가는 대강 안다. 

그런데 이런 실력으로 어디에 나가서 
내기 바둑을 둔다면 아마 백전 백패를 하게 되지 않을까 본다. 

그런데 지기는 져도 
알파고와 붙어도 아주 근소하게 지는 방안은 
알고 있다. 

또 본인은 전문 무역상이 아니어서 
매번 구매하는 상품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가격이나 품질을 놓고 볼 때 
전문 무역상이나 상인을 상대해도 
그다지 실패하지 않고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는 대부분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무역상이나 상인을 상대해서 
자신이 크게 이익을 보는 상인처럼 되려면 
그것은 힘든 것이다. 

그런데 투자를 놓고 생각하면 
아무리 개미 투자자의 입장이라고 해도 
투자는 할 수 있고 
그리고 어느 정도 수익을 거둘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입장에서 
제목을 일단 개미 투자자의 생존 방안이라고 
붙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목표가 
어떤 개미투자자가 자신이 투자를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투자자. 
주식분야로 말하면 세계에서 제일 투자를 잘 한다는 
워렌버핏과 같은 상태가 되기를 희망한다면 
본인의 글 내용을 참조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바둑을 오늘 두기 시작하는데 
바둑으로 세계 최고 수준인 
이세돌 선수나 커제 선수 등을 상대해서도 이기고 
알파고도 상대해서 이기고 싶다고 한다면 
본인 글을 보면 곤란한 것이다. 

그런 경우는 prince 님에게 자문을 구해야 하는데 
본인은 바둑으로 비유하면 이세돌 선수나 커제 선수와 상대하거나 
알파고와 시합을 해도 많아도 15 집 이하로 지는 상태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지는 것은 지더라도 
아주 크게 지지 않고 
재미있게 시간도 보내는 그런 방안을 
생존 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생존 방안에서는 
대략 투자금의 10 배 정도까지의 수익을 
얻은 것 정도가 최대 목표라고 할 것이고 
그 이상이 목표인 경우는 
역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알파고를 상대해서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prince 님에게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알파고에 세계 최고선수가 다 패배했는데 
이 분은 바둑도 별로 못두는데 
어떻게 이기는가. 

그것은 prince 님이 
알파고와 시합을 할 때는 
알파고와 연산 계산이나 논리 시합을 전혀 하지 않고 
달리 시합에 접근하기에 
자신이 이긴다고 그렇게 구라를 제시하는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방안을 공개하면 
개미 투자자는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개미 투자자 덕에 큰 수익을 거두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또 입장이 반대가 될 것이 아닌가. 

[...]

imf 시절 도산한 기업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만 조금 더 버티었으면 
지금은 사정이 달랐을텐데 
이런 하소연을 하는 말도 듣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그 조금을 버티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투자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표를 놓고 자신이 투자를 한다고 하자.
이때 가장 먼저 생각할 점은 
어떤 우표를 구매하면 
그 우표는 최대 언제까지 보존되는가. 

또 그 우표를 투자하는 자신은 언제까지 
존속하는가. 
그런 것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극단적 최극한의 한계점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다. 


우표나 명화를 놓고 생각하면 
어떤 것이 최극한인가. 

그것이 불타거나 물에 젖어 파손되는 시점 등이 
그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경우는 물론 자신이 이번 생에 죽으면 
그것으로 일단락이 나는 것으로 보고 
현실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극한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범위에서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든 연구주제이기도 한데 
라이터화두와 상황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mun 님의 set 이론과도 관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자신이 라이터 부품을 다 직접 구하고 
그것을 조립해서 라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라이터로 불을 켜서 사용하지 못하는 
이는 또 몇이나 되는가. 

현실 상황이 사실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라이터를 만드는 방안을 
전혀 모른다고 해서 
현실에서 라이터는 절대 자신이 사용하지 않겠다고 
임하면 어떤가. 
불편한 것이다. 


또 하나의 내용은 
자신이 라이터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서 
라이터 전문가가 자신 앞에 나타나 
시중에서 몇 백원이면 구할 수 있는 
라이터를 몇 만원에 팔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mun 님과 같은 황제도 
사회에서 요구되는 수많은 전문 분야의 내용을 
다 속속들이 모른다고 해도 
그래도 황제 역할을 잘 할 수 있기도 한 것이다.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것이 투자와 관련해 무슨 관련이 되는가. 


일단 주식을 투자한다면 
주식종목의 끝은 어디이겠는가. 

주식제도가 없어진다거나 하는 것도 끝이겠지만, 
일단 그 회사가 파산하면 
그 종목에 대한 청산절차가 그 끝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일단 자신이 투자하고자 하는 종목에서 
어떤 것이 끝이 되는가부터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금은 언제가 끝인가. 
사람들이 더 이상 금을 가치있다고 보지 않은 시점도 
끝이겠지만, 
금이 있어도 이를 들고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그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화폐는 어떤 경우가 끝이겠는가. 
기술이 발달해서 
가상화폐가 내걸고 있는 기술적 장치가 
모두 무용화되는 시점

그래서 같은 가상화폐를 수없이 많이 쉽게 
만들어내거나 
적어도 같은 정도로 유사하게 거래되는 형태로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거나,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나 네트워크체계가 붕괴되어 
더 이상 가상화폐를 거래할 수 없게 되거나 
법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런 거래를 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게 되는 상황이 그 끝시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그 극한을 점검하는 것은 
자신의 고려 범위를 제한해서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명화에 투자하는데 
어떤 그림의 상태가 너무 낡아서 
한 1 년 지나면 
사라질 것 같은데 
이것을 10 년 보유할 목표를 갖고 
투자하면 되겠는가. 

사정이 그렇지 않으므로 
그런 극한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실은 다음 방안이 절실할 것이다. 

앞에서 이미 주사위 비유를 들었는데 
주사위를 던지고 나서 
어떤 번호가 나올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는 신통력 

또는 주사위를 던지면 던지는대로 
자신이 원하는 번호가 나오게 할 수 있는 신통력 
그런 것을 갖추기를 원할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현실에서 수익을 원하는 대로 얻으려면 
위 방안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이런 방안이 
대단히 많이 강구되는 것이다. 

바둑을 두는데 
그냥 매 수를 점을 쳐서 놓는 
입장이 있다면 이는 바둑 초보의 상태인데 

그러나 그렇지 않고 
상대의 수도 계산하고 
집수도 계산하면서 시합에 임하는 것이 
프로 바둑 기사의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이 방면에서 
서커스 공연을 하는 이나 
마술쇼를 하는 이나 
최면쇼를 하는 이들이 
각 방면에서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수익을 거두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수익을 많이 거두기를 원하면 
전문적인 연구를 오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prince 님이나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수강료를 내면서 
하나하나 배워야 할 일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극한에 가면 알파고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각 종목을 들여다 보고 
계산을 해도 다 파악하기가 힘든데 
알파고는 막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하면서 
임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오늘날 주식 시장에 대한 신문기사는 
이런 알파고 시스템에게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보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하기 힘든 것이다. 


여하튼 이런 방안으로 임하려는 경우는 
이 글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으로 
제시하는 방안은 
주사위를 던지고 나서 
어떤 번호가 나올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는 신통력이나  

또는 주사위를 던지면 던지는대로 
자신이 원하는 번호가 나오게 할 수 있는 신통력이나 
그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입장이 아니고 

이것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잘 생존할 수 있는가만 
념두에 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이터 화두나 
mun 님의 set 이론과 관련되는 내용인 것이다. 




현실에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려고 동호회만 가입해서 
활동을 해보려고 하자. 

등산에 관심이 있다고 가입하면 
비록 그 동호회원들이 
내일 히말라야 등반을 떠난다고 동참하라고 권유하지는 않겠지만, 
초보 상태에서는 
거의 그에 준하는 상태로 보이는 상태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간단히 동네에서 베트민튼이나 탁구나 조기 축구회에 
가입해 활동하려고 해도 사정이 같다. 

동네 운동클럽의 선수들이 
비록 국가대표선수는 아니지만,  
그러나 초보가 대할 때는 거의 그런 상태와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시합을 하면 
백전 백패가 되거나 
큰 부상을 당하고 탈퇴하기 쉬운 것이다. 

이것이 개미 투자자가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해보려고 하는 상황과 대부분 비슷하다. 

특히 거래소에서 투자하는 것은 
그 성격이 대단히 cool 하고 clean 하다고 보는 만큼 
알파고가 오늘 갓 입문한 바둑 초보를 상대해도 
아무 사정을 보지 않고 
그대로 다 패배시키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어떡하는가. 

그래서 일단 현실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잘 확인하고 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주식이던 가상화폐든 거래소에서 
자신과 거래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거래하므로 
대강 아무렇게 임해도 
적당히 되겠지 하고 임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임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거래 상대방은 
수백억원 또는 수천억원의 자금을 놓고 
지금 임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렇게 임하게 되겠는가. 
그러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또 
자신의 거래 상대방이 누구인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일히 잘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임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거래상대가 
바둑으로 치면 
수십억원의 후원을 받고 
놀라운 게산력을 갖추고 시합에 임하는 알파고라고 해도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투자 종목에서 매 시점 어떻게 
가격이 형성되는가는 
일단 그것이 보유자에게 주는 최종 가치와는 별개로 . 
일단 수요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왜 정작 
그 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는 
그렇게 거래에 임하는가. 

여기에 알파고와 커제와 이세돌 선수와 
오늘 갓 바둑에 입문한 초보가 
다 그렇게 섞여 임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체가 하나의 시합이어서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인데 
정작 이를 일일히 헤아리려면 
사실은 골치가 아픈 것이다. 

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그 사정이 위와 같은데 
결국 이 사정을 파악히기 힘든 입장에서는 
답이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력이 없이 
단순히 기대와 희망만 갖고 
점치는 심정으로 거래에 임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겠는가. 
알파고나 이세돌 선수와 시합을 하는데 
매번 점을 쳐서 돌을 두어가면 
경기를 이기겠는가. 

이길 수도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데 
희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격이 수요 공급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은 
수요와 공급을 변동시키면 가격이 변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격이 변하면 
다시 수요 공급이 변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격을 변동시키는 신통력은 위 방안에서 찾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떤 개인의 입장에서 쉽게 되겠는가. 

또 그것이 안 되니까 
개미 투자자의 반열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막연하게 낙관적 기대를 갖고 임하면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개미투자자가 이런 극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일단 처음과 같이 각 극한 지점을 확인하고 
이 각 경우에 자신이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임하는 것이 기본이다. 

수익이 극대로 나는 경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보겠지만, 
그 경우도 그러나 대단히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이런 경우의 문제들도 일단 고려해서 
자신이 그 종목에서 뜻대로 목표를 성취하면 
이후 방향을 turn 할 지점 

즉 수행자의 입장이라면 회향할 지점도 확인하고 

반대로 최악의 극단 상황도 고려해서 
자신이 투자한 종목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나는 경우에도 
어떻게 방향을 돌려 나갈 것인지 등에 대해 
그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극단적인 각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이전 조각글들에서 
소원이 성취되기 위한 핵심은 
왜 그 소원의 성취를 바라는가. 
또 그 소원이 성취된 상태에서는 
그 상태에서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먼저 잘 생각해서 
그에 대한 답을 잘 작성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제시한 것도 같은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위 문제를 잘 풀어서 답을 잘 작성하면 
사실은 곧바로 성취가 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가려고 하는데 
아무리해도 부산가는 차편을 
도저히 구하기 힘들다고 할 때 
위 문제를 먼저 잘 풀면 
곧바로 부산에 가게 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늘 위 문제부터 잘 풀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위 문제를 풀었으면 
그 가운데 성취 후에 할 일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고 

또 성취를 위해 해야 할 일 가운데 
당장 행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행하다보면 
길어도 한 3 일 이내에 그것이 대부분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는 나중에 전문적으로 
수행 이론을 통해서 제시하겠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입장도 있겠지만, 
그 사정을 간단히 핵심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미 다른 글에서 
소원이 100 % 성취된 상태로 여기는 그 상황에서 
그 정지단면을 하나하나 놓고서 살펴도 
정작 그런 내용들에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했는데 
우선 이 내용을 정확히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어떤 a 란 현실은 그것이 성취된 상태라고 보게 되는데 
그러나 한편 어떤 b 란 현실은 또 그와 달리 
그것이 성취된 상태가 아니라고 현실에서 임하게 된다는 것이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사정이 바로 이러하기에 
이런 내용이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하튼 소원의 성취를 위해 중요한 것은 
그 소원 성취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는 일 가운데 
당장 할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은 어느 경우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또 그로 인해 
단순히 마냥 희망만 갖거나 걱정만 하는 경우보다 
소원이 더 신속하게 성취된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도 더 나아가 
앞의 문제를 잘 해결하면 
그로 인해 더더욱 신속하게 소원이 
성취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투자와 관련해서 
이를 살핀다면 

결국 투자를 성공해서 수천억원의 수익을 얻고 
더 나아가 극단으로 가면 
어떤 상태가 되겠는가. 
재벌 회장도 되고 그런 것이 아닌가. 

바로 그런 소원을 갖고 현실에 임할 때 
앞에서 제시한 문제부터 잘 풀고 나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고자 하는가. 
그렇게 되면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것인가 .
이런 문제에 대해 먼저 답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답이 자신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만족시키고 
심지어 부처님 하나님 알라신 등등을 
모두 만족시킨다면 
오늘 안에도 바로 그런 소원이 성취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렇든 아니든 
그런 답을 잘 작성한 다음 

그런 소원이 성취된 상태에서 하고자 하는 일들 가운데 
지금 당장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또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일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하다보면 
바로 신속하게 그렇게 
소원이 성취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보고 안 되면 
그 때 문제를 제기해도 되지만, 
설령 잘 안 된다해도 
그래도 여전히 위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인 것이다. 



예를 들어 거의 불가능한 희망의 한 사례로 
오늘 바둑을 처음 입문했는데 
알파고나 이세돌 선수와 두어서 이기고 싶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느 경우나 당장 할 일은 바둑판 구해서 
기보를 보고 
한 번 두어보는 것부터 해봐야 하는 것은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이기고 나서 시합을 이긴 상태에서 하고자 하는 내용이 
노래 부르고 쉬고 잠자고 그런 것이라고 자신이 여긴다면 
이런 일들은 지금 당장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게 되므로 
그런 것은 지금 당장부터 행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이 안 되는가. 



그 다음 문제를 살피자. 
그런데 일단 최악의 경우와 최선의 경우를 
다 검토하고 대비한다는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이 투자할 금액의 최대한도 
이를 통해 미리 잘 판단해 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최악의 경우 
자신이 투자한 금액이 다 없어지고 
또 추가 손해도 받는다고 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기본적으로 미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려면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다. 

그것은 투자금액이 다 없어져도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보는 범위로 
투자액의 한도를 정하고 
이를 넘어서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상한가.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되어야 
이후 개미투자자의 방안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가 아니면 
또 이후 개미투자자는 
그렇게 차후 방안을 도저히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중요한 것이다. 



앞에서 imf 사태의 문제도 약간 언급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어려운 시기에 좀 더 버틸 수 있었으면 
나중에 상황이 좋게 바뀌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그 사업가가 그러나 정작 
그 당시왜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가는 
바로 위 문제와 관련이 된다. 

그렇게 미리 
그런 극한에 대비가 되어 있으면 
그런 경우에도 잘 넘기고 해서 
결과적으로 무방하게 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못하니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파산해 버렸다는 내용을 반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뛰어난 사업가들이 
한결같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둑을 비유로 들면 
9단 8 단 7 단 이런 수많은 고수가 
알파고와 상대하면 뚝뚝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만 아무 이상없이 
잘 버틴다면 이상한 일 아닌가.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미투자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되면 그렇게 되고 
어떻게 되면 그렇게 되지 못하는가. 
이것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위 문제를 처음에 잘 풀지 않고 
임진왜란 발발하기 이전의 선조대왕처럼 
그저 자신의 기대와 희망만 붙잡고 
현실 상황에 임하면 
곧바로 그렇게 되기 쉽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위 문제를 기본적으로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수행자를 놓고 보면 
이는 어떤 문제인가. 

수행을 잘 해서 이번 생에 생사를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나 이번 생에 수행이 실패하고 
그냥 굶어 죽거나 병들고 중도에 죽어버린다. 
이런 경우의 문제와 같다. 

그러니까 수행자도 이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본 문제를 잘 풀어야 
비로소 이후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행하게 되는 
무량한 수행 하나하나에서도  
잘 임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본부터가 잘 안 되면 
좋을 때는 좋은데 
극한의 상태가 되면 
곧바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상황이 바뀔 때 
앞과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 고비만 조금 더 넘기고 임했으면 
나중에 다 잘 되었을텐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것도 
함께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이 기본문제를 잘 풀고 
그 상태에서 
다음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 쉬기로 한다. 



사실 기본문제만 잘 풀면 
나머지 문제는 
어떻게 알파고와 이세돌 선수를 상대해서도 
근소하게 아슬하슬하게 지는 정도로 
큰 문제없이 잘 두고 

또 그런 가운데에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길 수도 있기도 하게 되는가를 
살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세돌 선수가 시합날 
갑자기 심한 설사증상이나 
중간에 갑자기 독감 증상이 생겨 
시합 중 돌을 던지거나 
또는 알파고가 
갑자기 안에서 전기 내부합선이 발생하거나, 
등등으로 돌을 던지게 되어 
자신이 우승상금을 받는 경우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것을 덤으로 살피게 된다는 의미다. 

원래 실력이나 과거 전력만 본다면 
현재 조 1 2 위를 다투던 한국이
조 최하위를 기록하는 카타르와 시합해 
2-3 으로 져서 
월드컵 진출이 장담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고 
볼 수 있었는가. 

그런데 알고보면 
매 경기나 시합이나 현실은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문제들은 
모두 앞과 같이 기본적으로 양쪽의 극단에 대해 
모두 대비가 잘 되었을 때 
그런 상태에서 그 다음 여유를 갖고 생각해도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개미투자자는 이것이 안 되면 
알파고와 상대하고 
매 상황마다 알파고가 두는 대에 따라 
자신이 도저히 둘 수 밖에 없다고 보는 수를 찾아 
매 번 그렇게 두어 나가기 시작하면 
끝까지 두거나 두지 않거나 
결국 백전 백패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적절한 것이다. 

그런다고 매번 점을 치면서 
두면 이기겠는가. 
그것은 처음 같이 바둑을 시작한 동네 학생하고 두어도 
백전백패라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단 중요한 양 극단의 경우에서 
해당 방안의 핵심 내용으로서 
그렇게 임하면 다 곤란함을 제시하였다. 

[...]

자신의 소원이 뜻대로 
다 성취된 상태를 
먼저 마음으로 가서 
그 상태에 오래 머물러 지내면서 
앞과 같이 모든 극한의 문제를 다 잘 살피고 
풀어 보지 않고 
현실에 임하면 

소원이 뜻대로 성취된 상황이 
오히려 더 문제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당장 대면하지 않은 장래의 내용을 
세세하게 모두 미리 다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보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극한의 
문제를 푸는 것이 갖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 이하의 문제는
'당황하셨나요'라는 질문에 별로라고 답하게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매 경우 
'당황하셨나요'라는 답에 
정작 답은 못하고 단지 노랗게 된 안색으로 
매번 답하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성취되면 
방향을 돌려 나갈 출구가 있고 
또 성취가 되지 않아도 
또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할 출구가 있어서 
이에 대한 대비가 다 갖추어진 상태에서는 

그 안에서 사실은 자신이 무엇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렇게 된 상태이기에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게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다른 전략이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목표 성취를 위한 원칙적 대처방안과 변칙적 대처 두 방안만 있는 것이고 
매 경우 특별한 전략이란 별로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기에 또 
구체적으로 본다면 방안이 무량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경우와 
대비하면 차이가 크다. 

그런 경우는 매번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매 상황에 묶여 끌려 가는 상태인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이 지금 무언가를 할 때 
자신이 이를 묶여서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는 
스스로 검토해 볼 수 있다. 

일단 겉보기는 자유인 것 같은데 
여하튼 자신이 행하는 그 무언가를 놓고 
지금 그만 두고 도저히 빠져 나올 도리가 없고 
도저히 매 순간 그렇게 할 도리밖에는 없어서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본다면 
그것은 묶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묶여 있는가 아닌가가 
바로 전략의 차이를 낳게 하는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어떤 종목을 놓고 
내일 얼마에 사는 것이 좋은가 
얼마에 파는 것이 좋은가 
그런 것을 물어보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정작 그 분야에서 
그다지 성과를 내지도 못하고 
잘 하지도 못하고 
즐겁지도 않은데 
그런데도 계속 묶여 있는 경우도 있다. 

손실이 발생했는데 
원본이 회복이 안 되어서 
나올 수도 없고 
그래서 그 상태로 계속 묶여 있을 
도리 밖에 없다고 보고 
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최극한을 그렇게 원본에 놓고 
상황을 대했기에 그렇게 묶인 것이다. 

그리고 성취하면 방향을 돌려나갈 출구도 
역시 없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일 이 두 극한의 문제가 
잘 대비되었다면 
사정이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관계없는 것이다. 

중간 과정이야 어떻든 
최악의 상태 이전에 손실을 끊어 버린 것으로 보던지, 

또는 아직 최악의 상태가 아니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며 
신경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고 임하던지 

아니면 원래 다 뜻대로 성취하면 
방향을 돌려 나아갈 곳이 자신에게 분명하니 
그렇게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임하던지 
 
어느 경우나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두 경우가 
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처음 임한 그 투자를 
무한하게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을 하기 쉽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영구하게 
그 투자종목에서 머물려 있으려고 그랬다면 
그 기업의 창업주 회장 정도 되는 마음으로 
그것을 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래도 더 좋고 좋고 나은 상태로 방향을 돌려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면 
동시에 그런 노력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왜 처음에 짚을 지고 있었다고 
무한히 짚을 지고 나아가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짚을 진 상태에서 노래도 부르고 
회화공부도 하고 
경치도 구경하고 
경전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짚 지고 다니는 운동도 하면 
좋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지 못하고 
오리지 짚만 지고 그 짚만 신경을 기울이면서 
쓸모없이 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자신이 어느 순간 그렇게 
그에 접착되어 묶여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도 무량행문에서 
그런 자세를 취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중요한 수행덕목은 
바로 수희 원요 회향의 덕목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한자어를 쉽게 풀이하면 
훨씬 더 좋고 좋은 상태를 성취한 상태를 따라 기뻐하고 [수희]

같이 희망하고 즐거이 대하고 [원요]

그래서 방향을 더 좋은 방향으로 돌려 나아간다는 [회향]
수행자의 수행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느 순간 
자신이 자신의 방안에 있는 생명을 차별없이 
모두 최상의 상태로 이끌고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온 생명을 또 그렇게 차별없이 
모두 다 최상의 상태로 이끌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대단한 일이라고 할 것인데 


그러나 이런 상태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에 마냥 무한하게 머물려 있으면 곤란하고 

이제 그 상태를 점점 더 확대해서 
태양계를 넘어 은하계로 그리고 우주로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이 수행자가 취하는 
수희 원요 회향의 덕목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살핀 양 극한 지점에 대한 
검토나 대비나 충분히 되었다면 
바로 그런 상태가 
그 자신을 매 순간 그렇게 방향을 빨리 돌려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이 없으면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매 상황 묶여 버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파고나 고수인 상대가 
두는 돌에 따라 
매번 상황에 묶여서 
희생과 고통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끝내 
그것을 벗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알파고에 전 재산을 다 잃고 
또 아무리 노력해도 알파고를 이길 방안도 보이지 않고 
신통력을 얻어낼 방안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바둑 외에는 할 것이 따로 없다. 
그러면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앞과 같이 극단의 상황에 대해 
이에 대한 대비가 없기에 
그렇게 묶이게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묶인 상황에서는 
바로 그런 사정으로 인해 
매 경우 적절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즉, 그런 경우는 
매 순간 그 문제를 잘 해결할 방안이 있다고 해도 
그 당사자만은 그런 상태에서 
그런 내용이 전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접착에 의한 업의 장애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당사자의 안경에 껌이 잔뜩 붙어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

개미투자자가 
투자를 통해 큰 수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가운데 
극단적인 양 경우를 다 살펴 
이를 검토하고 대비를 하여 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신통력도 없이 
임하면 어떻게 된다고 보기에 
위 내용을 제시하는가 하면 

바로 그런 경우 곧바로 
그는 이후 아귀의 상태로 된다고 보기에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수행을 통해서 성취할 목표상태만 있고 

정작 그것이 뜻대로 잘 되거나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기본적으로 방안이 없이 임하면 
수행을 잘 하거나 못하거나 
아귀와 같거나 지옥 중생과 같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경우나 기본 문제를 
잘 풀고 임해도 임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기본 문제를 푼 상태라면 
다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투자를 했는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곧바로 다 손실을 보았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또 반대로 
자신의 예상과 달리 곧바로 엄청난 수익을 보았다. 
또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 양 극단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에 대해 자신의 답이 있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답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피고 
그 다음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첫 문제를 보자 .

이미 본인이 투자를 원본으로 회복하고 
투자에서 손을 떼었는데 
본인은 이런 경우 이제 관리 주체를 
본인에게서 다른 주체로 넘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른 주체는 여하튼 
그래도 그 원금을 어떤 형태로던 보관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금성격이 수행과 관련되면 
본인은 수행자에게 봉 노릇을 해주시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에게 
관리를 넘겨 버리는 것이고 
자금성격이 생계 유지나 연구실 기본 유지에 관련되면 
doctr 님이나 숙왕화님 등에게 넘겨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doctr 님이 또 투자를 계속해서 
하루만에 30 % 에 달하는 수익을 거두었다고 
흐뭇해 하는 모습을 보았었는데 
또 오늘 보니 다시 다 손실을 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앞의 두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거래소에서 거래를 하는 것은 
그 시점만 놓고 보면 
어떤 상품을 어떤 이는 100 원에 팔기를 희망하고 
또 어떤 이는 100 원에 사기를 희망하기에 
거래가 된 것이어서 
그것만 가지고 살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 상품이 
다음날 150 원이 되는 경우라면 어떻고 
다음날 반대로 50 원이 되는 경우라면 또 어떤가. 

그래서 이를 놓고 알파고나 이세돌 선수나 
개미 투자자나 다 고민도 하고 연구도 하고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주사위 실험이 필요한 것이다. 
주사위는 비록 투자와는 다르지만, 

여하튼 주사위 하나를 놓고 
자신이 매번 주사위 숫자를 잘 맟주는가. 

또는 매번 던질 때마다 원하는 숫자가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주사위 하나가 잘 되어도 
다른 경우는 또 사정이 다른데 

그러나 주사위 하나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다른 경우는 그와 달리 
자신이 그에 대해 
잘 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사정이 또 따로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보았듯 
여기서 살피는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이란, 

그런 신통력을 얻기 위해서 
그 분야에 
서커스맨이 되거나 
마술사가 되거나 
최면술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 가운데 
어떻게 잘 생존할 수 있겠는가 
이 방안을 여기서 살피겠다고 한 것이다. 


주사위 숫자를 예측할 신통력이 없고 
주사위를 원하는 숫자가 나타나도록 할 신통력도 없는데 
그 부분에 여하튼 투자금을 마련해 
투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사위가 에측과 달리 나타나 
손해를 보거나 큰 수익을 보거나 했다는 것인데 
이 각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가 
여기서 살필 문제인 것이다. 

이와 달리 자신이 임하는 분야에서 
매번 어떻게 상황을 잘 에측하고 
원하는대로 내용이 나타나도록 할 것인가는 
이와는 다른 분야인 것이다.  

그래서 여하튼 어떤 이가 
그렇게 100 을 투자했는데 
하루만에 50 원이 되고 
다음날 10 원이 되었고 
다음날 1 원이 되었다. 
어떻할 것인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 문제도 대단히 중요하다. 

하루만에 200 원이 되고 
그 다음날 1000 원이 되고 
그 다음날 10000 원이 되었다. 
이제 어떻할 것인가. 

앞에서 강조한 것은 
이 각 경우 자신의 답이 미리 없으면 
곤란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임하면 
곧바로 아귀의 상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은 앞에 말한 신통력이 있는 경우도 
이에 대한 답이 없이 
그렇게 임하면 
이 역시 성과가 만족스럽거나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어느 경우나 아귀의 상태가 되어 
머물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어떤 좋은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갈구하면서 추구하는데 
성취되기 까지는 그 갈증으로 고통을 받고 
성취되면 그 성취된 상태로 고통을 받는 것이 
아귀의 상태라고 제시되는데 

이 상황들이 하나같이 
바로 그런 상태의 성격을 
온전히 갖추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귀처럼 되지 않으려면 
이 문제부터 잘 풀어야 하는 것이다. 

아귀의 상태에 있는데 
위 문제도 풀지 못하고 
그 상태에서 더 나아가면 
또 이로 인해 
곧 지옥중생의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갈구하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고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매 상황에 분노를 일으키고 임하고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고 
해치면서 임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렇게 접착된 상호간의 작용 반작용의 관계로 인해 
전체적으로 지옥 set 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mun 님의 set 이론의 설명이기도 하다. 



그러면 아귀세계에서 곧바로 지옥세계로 거주지가 
바뀌어서 희망을 갈구하면서 고통받는 상태에서 
이제 전적으로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 걱정 사이에서만 순환하는 
상태로 바꾸어 임하게 되는 것이다. 

투자해서 손실을 받는데 
단순히 손해봐서 속상한 상태로 그치지 않고 

채권자들이 나타나 신체 포기 각서를 요구한다거나, 
어떤 해결사들이 자신을 이상한 곳에 끌고가 구타를 하면서 
채무 이행을 요구한다거나 
또는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도 무언가 노력을 하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그런 노력들이 하나같이 
법에서 금하는 온갖 방안이라거나, 
그런 경우는 
이후 거주 장소가 이상한 곳으로 바뀌어 
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아귀와 같이 지내다가 이후 
지옥과 같은 상태로 옮겨가
지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두 경우가 다 알고보면 같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보고를 받다보면 
로또 복권이 당첨된 이후 
가까운 이들 간에 
서로 폭행 협박 이혼 이런 사건에 휘말리고 
이후 정신없이 소송관계로 날을 지새고 있다는 보고를 가끔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소원하던 몇십억원을 얻고 난 이후 
정작 왜 그렇게 되는가는 
사정이 그렇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는 
재벌 가문에서부터 노숙자까지 
극히 드문 것도 사실이다. 

노숙자들끼리도 좋은 모포나 쉬기 편하다고 보는 위치가 
하나 생기면 그것을 놓고 다투고 

재벌 가문에서 태어나 재벌로 삶을 마치는 
회장과 회장 사장과 사장들끼리도 
서로 누가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는가를 놓고 
서로 대립하고 다투는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위 문제를 먼저 잘 풀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거기에 일단 묶임에서 풀려나는 
열쇠가 하나씩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단 각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그 답은 자신이 마련해야 한다. 

여하튼 그래서 그런 극단의 각 경우 
자신이 취할 방안도 있고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어야 
이후 방안이 찾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지 못하면 
전쟁으로 비유하면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고 하는 상황에서 
어떤 병사가 이것이 너무 두려워 
참호 밖으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처럼 
묶여 버리는 것이다. 


입시공부나 취직을 목표로 하는 상태에 비유하면 
학생들이 아주 공부를 잘 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다 함께 입시지옥의 상태로 힘들게 지낸다거나 
또 합격을 해도 그 이후 
좋은 직위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아귀 다툼을 하면서 보낸다고 
현실에서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 상황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이다. 

원하는 곳에 합격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대단히 좋다고 보고 
제각각 그것을 대단히 희망하고 임하고 난 이후 
바로 그런 집착이 
학생이나 부모 하나하나를 모두 
그런 상태로 묶어 버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 1 등부터 꼴등까지 
또는 승자부터 패자까지 예외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대부분 그런 상태에 임해서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터에 뼈다귀가 떨어질 때 
개들이 몰려 들어 그것을 다툰다면 
개들이 그렇게 모여 다툰 것이고 

그 가운데 어떤 개가 차지하더라도 
그 개가 개인 것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현실 사정이 이렇기에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기본 문제인 것이다. 

수행자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가 생사에 묶이게 되면 
그가 하늘에 있던 지옥에 있던 
그 어느 경우나 그렇게 묶인 상태로 지내는 것이다. 

또 수행자가 
생사를 벗어난 해탈이나 니르바나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 좋다고 보고 수행하더라도 
그런 수행목표나 수행방안 자체에 묶여 버리면 
수행을 잘 행하던 못하던 
그 어느 경우나 그렇게 묶인 상태로 지내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수행자는 
해탈문에 들어서서 
해탈과 청정한 니르바나를 기본적으로 얻은 바탕에서 

이후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과 성불을 목표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야 하고 

그 과정에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해서 
어느 경우에나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상태가 되게 되는 것을 
수행의 고비점으로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상태가 여러모로 좋을 때는 
수행을 잘 하다가 

황진이가 눈 앞에 나타나거나 
몸에 병이 생기거나 하여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거나, 
또는 어떤 큰 사고가 일어나면 
이후 이전 상태로 복귀하게 된다면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내용은 
굳이 현실의 투자문제만 관련된 사항이 아니고 
어느 경우에나 다 공통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에 묶이거나 
수행목표나 방안을 놓고 그에 집착해 묶이면 
그 이후 방안이 없다고 보는 것이고 


투자자는 자신의 파산과 대박에 묶이면 
역시 그로 인해 아귀와 지옥세계의 상태에서 
벗어날 방안도  
별로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은 왜 처음 투자를 하고 
수행자는 왜 처음 수행을 했는가. 

어느 경우나 
뜻을 성취해서 
이를 통해 좋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것인데 

이런 상태에서는 
그것을 성추히거나 못하거나 
어느 경우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일단 쉬었다고 또 살피기로 하자. 

사실 앞 경우에 방안이 마련되었다면 
그것이 그 방안이기도 하므로 
더 살필 사정은 별로 없다. 

그것은 문제 성격이 바뀌었기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 100 원에 사고 파는 거래를 하고 
그 다음날 그것이 50 원이나 150 원이  되었다고 하는 경우 
그 각각은 입장이 서로 각기 반대가 될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차이를 놓고 
제각각 자신이 원하는 상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임하는 상황이 투자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또 개미투자자가 상징하는 상태는 
주사위 숫자를 예측할 신통력도 없고 
주사위를 자신 뜻대로 숫자가 나타나게 할 신통력도 없어서 
많은 경우 뜻과 다른 상태에 임하게 된다고 보게 되는데 
그 매 경우마다 그런 신통력을 구하지도 않는 가운데 
어떤 생존 방안이 있는가를 문제삼은 것이다. 


그런데 앞 기본 문제를 푼다면 
이 문제 성격이 우선 기본적으로 
위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지게 되는가. 

앞 상황에서는 위 문제가 그로 인해 차별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누가 상대보다 더 유리하게 되는가를 놓고 
서로 보고 임하는 것이라면, 

이 경우는 이와 그 성격이 달라졌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100 원이 다음날 50 원이 되고 
또 그 다음날 10 원이 되어 
그렇게 큰 손해를 보고 
그 손해를 회복할 앞과 같은 또 다른 신통력도 없고 
그것을 달리 구할 방안도 없는데 

앞의 문제를 해결한 경우에는 
그런 상태에 놓인 주체에게 
무엇을 달라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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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투자자가 
각 극단의 문제를 미리 잘 대비하고 해결하면 
그 이후 상황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 하면, 
그 이후는 
상대와 대하는 시합이 같다고 해도 
그 의미와 성격이 
그로 인해 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품을 100 원을 주고 
매수 매도인으로서 서로 거래를 했다고 하고 
그것이 그 다음날 50 원이 되거나 150 원이 된다고 할 때에도 
그 어느 경우나 
상대와는 성격이 다른 내용을 대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다. 

쉽게 이야기하면 
상대는 그 다음날 시세를 놓고 
그 거래의 승패를 문제삼는다면 

어떤 이가 자신의 입장에서 
앞과 같이 양 극단의 문제를 미리 해결한 상태에서 
그 상품을 30 년을 단위로 대해 나가는 입장이라면 
바로 그런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 상대와 그 자신은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이고 
수익 손해의 평가도 또 다른 것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수행에 임할 때 
수행자 역시 생사를 받아 현실에서 임하는 것이고 
따라서 매 상황에서 
일반인과 같이 상황을 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바로 이런 사정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우선 경제적으로는 
옷 세벌 무덤가 나무 밑 주거지 그릇 하나 
이런 것만 확보되면 
그 나머지 일체는 
다 덤이라고 보고 대하게 되어 
집착을 제거하고 임하게 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더 나아가 생사 자체를 놓고서도 
그런 생사를 통해 
자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상황을 놓고 

이를 수행자 자신이 수행과정에서 
매 상황에 옷을 달리 갈아 입는 일로 대하면서 
무량한 기간에 걸쳐 수행에 정진해 나가는 것도 
그런 하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면 
수행에 임하더라도 
그런 상황뿐만 아니라 
현실의 매 상황마다 
결국 지옥이나 아귀 중생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별로 없게 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야경전에서는 
수행자가 비록 수행을 하더라도 
그것을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음(유소득)을 방편으로 행하면 

그로 인해 곧바로 
신속하게 그 수행자는 아비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제시하고 

본래 무소유 불가득의 현실 상태와 상응하게  
현실에서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도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상을 취해 그에 머물지 않고 
집착을 제거하고 임해야 한다고 
반복해 강조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그 수행자가 수행을 뜻대로 성취하거나 못하거나 
이에 관계없이 
언제나 수행에 유희 신통 자재하게 
즐겁게 잘 정진해나가고 
그래서 수행목표를 원만히 성취하게 되는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그런 사정이 
역시 강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사정은 
현실에서 개미투자자가 투자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실에서 개미 투자자가 투자를 할 때는 
그 상황에서 
알파고나 이세돌 선수나 커제 선수가 
각기 그 시합장에서 어떻게 임하는가에 관계없이 
자신은 자신의 종목을 놓고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 입장에서 편하게 임하면서 
자신의 투자 목표를 성취해나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고 
양 극단의 상황에 자신이 대처할 방안이 없는 상태가 되면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경우는 
비유하면 
전투 상황에서 여기저기 총알이 날라오고 
여기저기 수류탄이 터지고 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놀라지 않고 
기민하게 행동하면서 
잘 임하지 못하고, 

매 순간 죽게 될까 불안해하면서 
참호에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런 경우 그로 인해 살기는 살았다고 해도 
이후 전쟁공포증에 시달리며 
병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되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


투자를 하는데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잘 모르고 투자를 했다거나 
어떤 사업을 공동으로 투자하고 경영한다거나 
하는 경우 등이 그런 경우다. 

다리를 묶고 달리는 
2 인 3 각 경기를 하는 경우 
결과가 좋으면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제각각 주장하다가 
결과가 나쁘면 또 그것이 상대 때문이라고 
또 제각각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A + B =>  C 의 인과관계 하나를 놓고 
각기 매 경우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뽑아 
주장하면서 시시비비에 임하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




● [pt op tr] fr







>>>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7 번을 반복해 보고 또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 번 좋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무한히 보아야 한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그것이 의미를 잃게 되고 

또 어느 시점부터는 그로부터 고통을 겪게 된다고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막에서 물을 먹던 시점에 물이 지극히 좋았다고 보는 경우가 있는 반면 

수도만 틀면 물을 먹는 상황에서는 물은 그저 물이라고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물 맛을 보게 되면 

물은 지극히 고통과 공포를 주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과 

같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 물과 나중의 물이 그다지 다른 것은 아닌데 

왜 그렇게 의미가 바뀌는가. 


여기에는 MUN 님의 암파리 화두도 

또 관련이 된다고 본다. 


이는 무엇이 좋음이고 아름다움인가를 

연구하기 위한 화두이기도 한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사람은 파리를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나 수파리는 암파리의 뒷다리를 아름답다고 보고 

암파리는 수파리의 날개가 황홀하게 멋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파리로 수시로 변해서 파리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는 

MUN 님의 입장과 달리 

일반적으로는 상상만 할 뿐 그런지 안 그런지 알기 힘들다고 

할 수 있는데 

여하튼 공중을 자유롭게 날라다니는 파리가 

어느 시점에 보면 서로 붙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여하튼 그래서 그렇게 추정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여하튼 이들 파리는 서로를 그렇게 대하는데 

그러나 또 파리는 ○ ○○ 양이나 ○ ○○ 군과 같이 

아름답고 멋진 미녀 미남 배우를 지극히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면서 

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파리는 동료 파리들이 

그런 미녀 미남 배우에 가까이 날라가면 바로 사망에 이르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앞의 내용은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과 똑같은 형식의 문장의 반복을 피하지만, 

역시 각 경우에 마찬가지로 

왜 사람은 그렇게 이상하게 대하게 되는가를 놓고 

똑같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8 M 이상에 달하는 내장에 

가득 대변을 채우고 세균과 바이러스가 

가득 담겨 있고 소변 땀 피 고름이 가득한 

몸에 겉만 피부로 덮어 놓은 것뿐인데 

왜 그것을 아름답다거나 멋있다고 여기고 

대하는가. 

이런 것이 경전에서 제시되는 부정관 수행과 관련된 

현실 문제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목표의 성취와 

TURN 이란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미투자자 생존 이론을 통해 

DOCTR 님이 목표 투자액을 달성하기 직전인 이 시점 

그렇게 쉽게 목표치를 달성했다고 해서 

계속 무한히 그 상태로 나아가면 

결국 본인이 처음 지급한 무한카드와 무한화폐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도달할 뿐 

더 의미는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결국 또 물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대하는 물처럼 여겨지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TURN 할 방향을 찾아내지 못하면 

계속 그 상태에서 그렇게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같은 영화를 무한히 보아도 

매번 재미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아름답고 선하게 될 수 있는가를 

먼저 찾아보아야 한다. 


사실은 같은 영화를 7 번 같은 형태로 보는데 질리지 않고 

앞과 같이 보는 방안은 무언가라는 문제의 답은 

그 문제에 그 답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1 나누기 3 은 얼마인가. 

또는 제곱해서 2 가 되는 양수는 얼마인가. 

이런 문제가 제출될 때 

그 문제가 곧 그 답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있다. 

알고보면 그것이 맞는 말인 것이다 


1 나누기 3 의 답은 1/3 이렇게 적어 놓으면 

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도 √2 이런 형태로 적으면 

그것이 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세계 각국마다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의 희망사항이 다르고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어서 

동시에 그것을 모두 다 성취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볼 때 

어떻게 이것을 다 함께 동시에 성취하고 만족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가 제시될 때에도 마찬가지다. 


위 문제가 바로 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서로의 희망사항이 다르고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어서 

동시에 그것을 모두 다 성취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볼 때 

제 각각 이것을 다 적어 놓고 

이것을 다 함께 성취하고 만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답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느 상황에서 

이것이 어느 한 입장이라도 성취가 되지 않으면 

그 부분이 문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결국 위 문제 내용처럼 되는 것이 

그 답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을 놓고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위 자체에 그것이 성취되기 힘들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데 

그러나 위 문제가 곧 답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사실 어떤 목표가 다 성취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계속 머물거나 

무한히 그런 형태로 나아가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 TURN을 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회향이란 수행덕목과 

깊이 관련된다. 


그래서 사실은 이 방안도 함께 검토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무리 TURN 을 해도 

어느 부분에서는 결국 앞과 같은 문제를 

또 만나게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목표를 다 성취했다고 할 때는 

또 마찬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방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나가고자 한다. 



[...]

수행자 가운데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입장에서는 

외관상 축생 아귀형 지옥 중생과 같은 형태로 

수행에 임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 

무량행문에서 닦아 나가는 방편 지혜를 닦는 수행에는 

본래 그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모든 방편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데 

그 외관만으로는 그것이 잘 구분이 되지 

않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물이 어떤 상황에서는 지극히 좋음을 주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지극히 고통을 준다는 내용도 

바로 이를 설명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행자가 중셍제도를 위해 

이런 무량행문의 수행을 닦다 보면 

그런 성격 때문에 

외관상 축생과 같고 

아귀와 같고 

지옥중생과 같이 임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닦으면 

그로 인해 역시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과보를 받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수행자가 처음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불퇴전위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량행문을 잘못 닦아 나가면 

수행의 성취보다는 

그 스스로 축생이나 아귀 지옥에 갇히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생법인을 증득한 이후부터는 

또 사정이 달라진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수행자가 

설령 무간지옥에 들어가 임하더라도 

그 상태 자체가 극락과 전혀 다르지 않게 

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수행자와 

그렇지 않고 이론상으로만 그렇다고 여기는 

수행자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 구분 경게선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는 스스로 

곧바로 실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갑자기 자신의 손을 망치로 때린 상태에서나, 

펜치로 손톱을 억지로 뽑아 놓은 상태에서도 

그 상태에서 평안할 수 있는가를 살피면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직접 실험할 필요가 있겠는가.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상을 갖지 않아서 

안인을 성취했다고 하는 부분은 

이런 내용보다 더 심한 상태이지만, 

굳이 그런 상태가 아니더라도 

앞과 같은 실험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정말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수준의 

수행자인가 아닌가는 

위와 같은 실험정도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또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런 경우는 또 표준적인 수행방안만을 

취하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가 무량행문을 닦는 과정에서 

축생과 같고 

아귀와 같고 

지옥중생과 같은 형태로 수행에 임하면 

무생법인을 증득한 상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수행자는 문제가 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이론상 

수행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게 되는데 

정작 못하게 되는 것이다. 


축사에 갇혀 지내거나 

사막에서 물없이 지내거나 

물 끓이는 솥에서 담겨 있어야 하거나 하는 상황에서도 

이론상 정려 수행도 하고 반야수행도 할 수 있다고 

할 것이지만, 

정작 그것이 안 된다는 의미다. 


문수보살님과 같은 경우는 

그래서 정려 수행을 닦을 때 

처음에는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만 정려에 들 수 있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행주좌와 어느 경우나 늘 정려 수행을 닦아나갈 수 있다고도 

제시하고 


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그로 인해 자신이 지옥에 무한히 지내게 되는 

방편이라도 다 취해서 제도하겠다고 임하면서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수행을 갓 시작한 입장에서는 

이론상으로는 맞다고 보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수행자가 취하면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LIKE 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과 같이 한자어로는 여에 해당하는 
의미라고 본다. 

그런데 이처럼 a 와 같다는 말은  곧 
그것은 a 가 아니다라는 말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즉 a 와 같다는 말은 
a 는 아니지만, a 와 비슷한 성품을 갖고 있다 .
이런 의미인 것이다. 
즉 유사하지만 아닌 것 = 사이비인 것이다.  

현실이 꿈과 같다라고 표현한다면 
현실은 꿈은 아니다. 그러나 실답지 않아서 
꿈과 유사한 성품을 갖고 있다 
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가운데 
모든 방편이 선악무기의 셩격을 다 갖고 있기에 
배우지 않고 닦아 익히지 않아야 할 내용이 없다고 
경전에서 제시된다. 
그래서 수행자가 닦아 나가는 무량행문 가운데에는 
앞과 같은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축생 아귀 지옥 중생과 같은 형태로 
수행에 임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고 보지만, 
그런데 주의할 점은 그렇게 행하면 
역시 그 결과 그 수행자도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 들어가 
그와 같이 머물게 된다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이 경우에 다른 중생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래도 청정한 니르바나 진여 실재에 상응하여 
여여한 상태로 머물 수 있는 수행자라면 
그런 상태는 다르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 수행자가 임할 때 
어떤 수행자라도 그 외관은 
일반 입장과 그다지 다르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을 놓고 보아도 그렇고 
아라한이 된 스님을 놓고 보아도 그런 것이다. 

먹고 싸고 놀고 쉬고 자고 한다는 것을 
생명이 갖는 공통점이라고 제시한다면 
이것만 놓고 본다면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왜 발우가 필요하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아라한은 아라한이라고 하고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은 중생이라고 
보는 것은 다른 점에 그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무한히 같은 상태에 있어서 
영화를 비유한다면 
같은 영화를 7 번 8 번이 아니라 무한히 또 보고 보는데 
어떻게 질리지 않고 계속 유희자재신통하게 
수행에 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답도 들어 있다고 보게 된다. 


[...]


원래 무량행문의 수행에서 
다라니와 삼매 수행이 대단히 중요한데 
방편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고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고 
또 그 내용이 대단히 방대하고 지엽적이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라이터화두에서 라이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러나 라이터 제조법이 경전에 담겨져야 할 내용이라고 
보지는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담는다면 
개스를 얻기 위해서 이라크나 사우디 유전에서 
개스를 얻는 방안까지 기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뜻을 성취하는 방안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겪게 된다. 

자동차를 움직이고자 할 때 
자동차가 바퀴로 움직인다고 해서 
바퀴를 붙들고 굴리려고 하면 
자동차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자동차를 움직이는 이는 
키를 꼽고 액셀을 밟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것과 
키를 꼽고 액셀을 밟는 것은 얼마나 엉뚱하게 보이는가. 

그런데 엉뚱하다고 해서 창문을 만진다고 
차가 가는 것도 아니라고 보게 된다. 

이 관계가 바로 삼매로 
뜻을 성취한다는 내용이 갖는 관계와 비슷하다고 본다. 

모든 엉뚱한 것이 뜻을 성취하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그렇다고 뜻을 성취하고자 할 때 
눈에 보이는 곳으로 돌진하는 것도 그 방안이 
아닌 것이다. 

위 관계를 보면 결국 차가 움직인다는 것은 
계속된 도미노가 쓰러지는 관계처럼 
인과관계가 이어져서 
처음 키를 돌리고 액셀을 밟으면 
그렇게 차가 움직이게 된다라는 관계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치를 보지 못하는 이는 
차를 움직이려 한다고 하면서 
바퀴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또 나중에 차가 움직이는 것과 
키를 꼽는 것은 엉뚱한 것이므로 
모든 엉뚱한 것을 붙잡으면 
자신의 뜻이 성취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 두 극단이 모두 문제인 것이다. 

삼매의 수행이란, 결국 이런 관계를 잘 살펴서 
자동차 키를 움직여야 차가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삼매를 통해 만들어낸 리모콘으로 그 키를 
움직이면 그것이 그렇게 된다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것은 또 mun 님의 set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고 보게 된다. 

mun 님이 짜장면을 먹기 위해서는 
미국의 들판에서 비행기가 농약을 뿌리면서 
밀을 경작하는 활동이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태양은 열심히 빛을 들판에 보내고 
하늘에서 비도 내리는 가운데 
온갖 것이 다 그렇게 서로 관련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짜장면만 붙들고 늘어진다고 해서 
짜장면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mun 님이 
매일 매일 자신이 원하는 음식 하나를 먹기 위해서는 
우주를 하나의 set 로 놓은 가운데 
이 안에서 각 생명이 그렇게 무언가에 접착되어 업을 행하면서 
서로 작용 반작용의 관계를 형성해야 
그것이 그렇게 나타나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내용은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뜻을 성취하기 위할 때 
삼매를 통해서 이 우주에서 자신의 뜻을 얻는 연쇄적인 
도미노를 일으킬 최초의 도미노를 발견해 내면 
그 삼매에서 만들어낸 리모콘만 작동시켜 
쉽게 성취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엉뚱하게 임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우주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 보아도 
그것은 그렇게 성취되지 않게 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전등을 켜는 것도 같다. 
전등을 켜고자 한다고 해서 
매번 전구를 향해 돌진해서 전구를 만지고 빼고 한다고 해서 
전구가 켜지는 것이 아니고 

조금은 엉뚱해보이지만, 
벽에 붙은 스위치를 찾아내 
그 부분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방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이 서로 엉뚱해 보인다고 해서 
문을 닫는다고 켜지는가.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은 또 아니고 
어떤 경우는 또 그런 경우도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삼매를 통해서 
알아내는 것이 곧 삼매 수행의 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결국 참 예쁘지 삼삼하지 아라바자나 나자바라아 
이 수행공식에 의해서 
앞 부분의 참 부분부터 잘 실천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

일반적으로 
대부분 수행에 곧바로 들어가지 않으므로 

그 부분에 진입시키기 위해 
수행자가 무량행문도 닦고 
온갖 방편도 마련해 내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매 순간 
자신이 접착된 내용만 바라보고 
수행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다가 삶을 마치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일단 그 상대가 
수행으로 연결되는 첫 도미노에 초점을 
맞추게 할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참 예쁘지에서 참!이 의미하는 부분인 것이다. 

예쁘지는 복합함수식을 나타낸다 

f(x)g(y) 이런 식을 나타내는데 

y= f(x)
z= g(y)

이런 두함수가 결합되어 있는 식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수행에서는 

처음 중생이 갖는 온갖 소원을 성취하는 활동이 
도미노 관계로 이어져서 
그것이 수행에 진입하는 부분까지 들어 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y= f(x)는 
현실에서 중생이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함수식이고 

z= g(y) 는 
그런 상태에서 계속 극대로 나아가서 
그렇다해도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까지 이해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해서 
구극적인 수행목표를 향해 진입하게 하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부분이 결합되면 
매 순간 해야 할 부분은 
복합함수의 도함수를 구하는 공식에 의해 

현실에서 각 중생이 소원성취를 추구하는 활동이 
곧 수행에 진입해서 행하는 의미를 갖게 하고 

또 수행에 진입해 가는 매 순간의 행위가 
또 소원성취의 의미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표준 수행방안에 해당하는 
삼학 각종 삼매 수행들을 닦아 나가는 과정을 통해 
행해야 할 수행은 열심히 행하고 
하지 않아야 할 부분은 중지하고 끊는 것을 
삼삼하지라고 표현해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아라바자나는 
문수보살님이 생멸을 떠난 승의제의 내용을 
담은 다라니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경전의 내용을 이 다라니에 담았다는 것으로서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은 
또 나-자- 바 - 라 - 아의 관계로 
도출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로 나는 모든 것에 그 모습과 성품 언어 명칭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나타내고 
아는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아라바자나 다라니는 이런 의미를 
그 안에 담는 가운데 
온갖 경전을 그 안에 포함해 담고 있는 
다라니라고 제시되는 내용인 것이다. 

[...]


이미 아승기란 숫자를 

1000000..... 이런 식으로 표기하려고 하면 

현재 전 세계에 있는 하드디스크를 다 동원해도 

그 숫자를 표기할 수 없다고 제시한 바 있다. 


이미 디스크에 010101 이런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0의 숫자를 적은 것으로 간주하고 

본다고 해도 사정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무량한 방편 지혜나 

무량한 진리는 그런 방법으로는 

어디에 담아서 이동할 도리가 본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문수보살님이 

아라바자나 라는 글자에 그렇게 담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결론적으로 처음의 참 이하 부분은 


삼삼하지 이하에서 전개되는 본격적인 

수행에는 그다지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이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는데 

앞 부분이 다 잘 가동되고 

도미노가 다 동시에 쓰러져서 

결국 현실에서 무한대의 소원이 다 성취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결국 쓸모없는 것임을 이해한 다음 

무원무작 해탈문을 열고 

수행에 들어온 부분부터 할 일을 

찾아서 한다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


일단 300 원이던 3000 원이던 

30 조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면 다 상황이 

같다고 보게 된다. 


300 원을 놓고 임하는 자세는 

나중에 30 조원이 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사실은 대부분 소시민의 경제 생활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30000 원을 놓고 대하는 태도는 


나중에 수십조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설령 123  층 빌딩을 세우고 하는 상태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평소에 미리 그런 상황을 준비하고 

또 그렇게 임하고 훈련하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의사가 되려고 희망하는 초등학생이 있다면 

처음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의사면허증을 발급받았다고 여기고 

그렇게 계속 임하면서 

평소 부족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

그런데 

삶의 모든 것이 대부분 약간의 

도박성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떤 결과를 예측을 하며 행하기는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 예측이 반드시 100 % 맞는다고 보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대충 맞는 경우도 있고 

각 경우마다 사정이 다른데 

그런 사정은 결국 

삶의 매 순간 선택이나 결정이 

도박적인 요소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특히 그 각 경우에 따라서는 그로 인해 

삶이 함께 위험이 많아지고 불안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버스를 하나 타는데 

버스를 타고 나서 매번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되고 

그 확률이 각기 1/2 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그렇지는 않다고 보지만, 

그러나 자신의 예측한 정확한 시간에 

정확히 갈 수 있는 것은 또 아니고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타게 되고 

또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 등도 

또 다 예측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매 선택에는 

약간의 도박성이 들어 있다고 보게도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도박성이 삶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고 

원래 행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을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

도박 중독성향을 일으켜 임하게 되면 

그것은 문제라고 본다. 



그러나 투자하자마자 몇 십 % 씩 바로 

손실금액이 발생하면 

이후 손실을 회복해 내려고 

계속 시세를 보게 마련인데 

어떻게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경우는 문제라고 본다. 


[...]


개미투자자의 생존이론에서 제시한 내용은 

개미투자자는 정확히 미래의 가격 변동을 예측할 

신통력도 없고 

다시 가격이나 거래 물량을 변동시킬 신통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금을 어느 형태로던 보존하고 수익을 얻고자 하는 입장에서 

투자를 행하는 입장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에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여유자금으로 투자하고 

위와 같은 능력이 없이 투자한 것이니 

그 범위에서 상황을 잘 헤쳐나가야 한다고 

일반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최악의 경우에도 무방하다거나 

무방하게 될 방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투자 원금이 다 사라졌는데 

어떻게 무방하게 되는가. 


그러니 그렇게 되어도 무방하다고 볼 범위에서만 

개미투자자는 투자를 해도 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향 공양을 올리게 되기 쉽게 

몰리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그런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앞과 같이 급락하는 경우 등에서 

하루를 보내는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별 내용이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손해를 보아서 조금 씁슬하더라도 

그저 그렇다라고 임할 수 있는 경우와 


얼굴색이 노랗게 되는 경우는 

서로 상황이 다른 것이다.


[...]


투자와 원금 상실의 문제를 살폈는데 

이것이 왜 경전에서 


법에 a 가 없다라는 내용과 

관련이 된다고 하는가. 


그것이 바로 위 내용을 제시하는 취지이기 때문이다. 


앞의 사례를 다시 높고 보자. 

자신이 100 원을 투자했는데 

투자를 잘못해서 그것이 다 사라졌다고 하자. 


사실은 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경전에서는 

그렇게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들을 

죽 나열하면서 

그런 것이 없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있는 것이 없게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경전에서는 그렇게 본래 없는 것을 놓고 

현실에서 각 생명들이 

망상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집착을 갖고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 있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그런가. 

이것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어떤가. 


무엇을 얻어도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잃어도 그것이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혼자 무엇이 생겼다 없어졌다 이러면서 

온갖 번뇌와 고통을 다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꿈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이 사정이 이해가 쉽다. 


꿈에서 황금이 묻힌 동굴을 찾아서 

황금을 다 얻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없던 황금이 있게 되었다고 할 것인가. 


또 그 상태에서 이후 도적이 쳐들어와 

황금을 다 빼앗겼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어디에 있던 황금이 없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꿈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황금이 정말 생겼던 것도 같고 

그것이 다시 없어진 것 같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 상황이라고 경전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유마힐 거사님이 

경전에서 그런 내용은 없다고 반복해 제시해도 

현실에서 사람들이 문제삼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들을 

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없다고 보는 경우가 

대단히 드물다. 


여전히 황금은 황금이고 

또 투자 수익은 수익이고 

손실은 손실이고 

더 나아가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기 자신이라거나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이런 것들이 다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매 순간 대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매 순간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신구의3업]

그런 업을 통해서 

생사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으로 묶여 지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혹[번뇌]-업-고의 관계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지극히 고통스런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데

경전에서 유마힐 거사님은 

그렇게 문제삼는 것이 

없다고 지금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는 


그런 매 극한 최악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어떻게 대하게 되는가와 

바로 직결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꿈에서 황금을 훔쳐간 이가 

자신이 아는 어떤 이라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실답다고 여기는 이는 

그것을 대단히 문제라고 여기고 

꿈을 깨고 나서도 그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황금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인데도 

그로 인해 무언가를 행하게 되면 

그 이후가 엉망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꿈에서 또 그 황금이 자신의 집 마당에 

묻혀 있는 것을 본 이라면 

그런 엉터리 생각 때문에 

자신의 집을 허물고 

금을 캐내려는 노력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엉터리 생각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이후 또 다른 생각과 말과 행위를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그 이후 사태가 생사고통의 상태로 묶이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위 내용을 잘 이해하는가 

하지 못하는가는 


생사고통을 계속 받아나가는가. 

아니면 

깨달음을 통해서 생사를 벗어나고 

그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한히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게 되는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경계선인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불교 경전의 표현들이 

한 번 읽어서 바로바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낯선 표현들로 되어 있고 

그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더라도 

자세히 살펴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현실에 임해나가도록 

변화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


현재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과 함께 


유마힐소설경에서 

현실에서 집착하고 중요하다고 보는 내용들을 나열하여 

법에 그런 a 가 없다는 내용을 살피고 있다. 


[...]


그런데 일반적으로 어느 부분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는가 하면 

100 원을 투자해서 얼마 안 지나 

300 만원이 되는 투자 방안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상화폐 투자에서 

그런 내용이 발생했다고 언론보고가 되어서 

요즘 본 연구실에서도 이에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수행자의 가치투자 문제와 함께 관련해서 

살피고 있는 중이다. 

이를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악화와 법의 이론 


>>>


우선 어떻게 100 원을 투자해서 

300 만원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을 살피기 전에 

기본적으로 다음의 망상분별 문제부터 먼저 확인하기로 한다. 





어떤 망상증 환자가 

매번 무언가를 대하면서 그것에서 C 를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대할 때마다 거기에서 C 라는 생각을 일으킬 때 

그는 그것이 곧 C 라는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prince 님이 그런 주장을 하는 대표라고 할 수 있다. 

a + b =>C  의 관계식을 놓고 

위 관계식이 이미 앞 내용들에 

그런 C 가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관계를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 C 가 a + b 가 있는 그 상태에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 가 C 는 아니라고 해도 

위의 관계에서 a 에서 C 를 또 얻고 또 얻고 하니 

그 a 에 C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무언가 특별한 것]이론과 

representative [대표] 이론과 대단히 관계가 밀접하다. 



예를 들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제기될 때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법(일체존재)에 a 가 없다라는 주장과 관련하여 이런 의문을 

갖게 마련이다. 


자신이 눈을 떠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런 꽃이 없다고 하는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고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은 그 자체가 관념분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해도 

다시 위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감각현실은 매번 대할 때마다 

자신이 꽃이라고 생각하게 되니 

그 감각현실 그 부분은 비록 관념분별 자체는 아니지만, 

매번 대하면 그런 꽃이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그 무엇으로서 

그것은 결국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그런 꽃이라는 생각을 일으켜 갖게 할만한 무언가 특별한 어떤 것 

즉 something special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something special 한 감각현실 그 부분은 

관념분별 영역에 그 대표로서 그런 꽃이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의 골격이다. 


그리고 이 관게를 

존재가 문제되는 각 영역으로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전반에 같은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a + b =>C  관계식 자체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어떤 a 를 그런 상태에서 대하면 

C 를 반복해 얻게 되기에 

그 a 는 곧 C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식으로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어떤 생각을 일으켜 

얻게 되었으면 

그런 사정으로 

실재나 감각현실도 그런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고집해 머무는 것이다. 



>>>



그리고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행하여 

집착하여 머무는 이들의 상태도 대부분 

이런 prince 님의 상태에 준하는 상태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때 

자신이 무언가를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행하기에 

그러므로 그런 분별내용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에 없다고 할 것은 아예 아무 것도 없다고 

하게 된다. 


왜 그런가. 무언가 a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마저도 

분별영역에서는 그런 생각과 그런 a 라는 관념분별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관념분별로서의 a 는 그 마음에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그런 사정으로 

비록 그 내용을 얻지 못해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때는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내용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따지면 이들은 다 같은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논의가 젼혀 아닌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기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기에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여하튼 그런 사정으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켰다거나 행하고 있고 

그래서 그의 마음에 그런 관념분별내용이 있는 것만은 의미하지만, 


정작 그런 내용이 자신이 문제삼는 각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어서 실답게 있다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이 점을 망상분별을 행하는 상태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꿈의 비유나 최면의 비유와도 사정이 같다. 

침대에서 황금꿈을 꾼 이는 

그 꿈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그런 꿈을 꾸게 한 침대라는 상황에 

그런 황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꿈 안에서만 그렇게 얻어지는 것일뿐 

그 꿈을 꾸는 침대의 현실상황에는 없는 것이다. 

최면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마힐소설경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는 것들이 

모두 이와 상황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관념분별 내용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지 않고 

또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또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관념분별 내용은 얻을 수도 없고 


또 실재에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불가득, 공 ] 


그리고 이들이 문제삼는 그 일체의 것은 

모두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의 내용이 없는 것이다. [ 무아, 무자성, 승의 무자성, 무소유]  




이와 같은 사정으로 

법에는 그런 a가 없다라고 제시하는 것인데 

 

prince 님은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서부터 

눈을 뜨거나 해서 

일정 감각현실을 얻으면 그 상태에서 

그 일정부분은 꽃이나 바위로 자신이 생각하게 되니,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주장하고 

실재도 마찬가지고 

실체의 문제도 또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입장인 것이다. 




여하튼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또 현실의 투자 문제에서도 똑같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본다. 


다만 일반적 입장에서는 

100 원을 어떻게 투자해야 300 만원이 되는가 

이런 문제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에 


우선 이 문제부터 천천히 살피면서 

궁극적으로 생사를 벗어나 

무량행문을 어떻게 닦아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그런 상태에 쉽게 임할 수 있는가를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이라는 주제로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일단 다음 문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하튼 무언가가 있다 없다라는 판단에서 

앞과 같은 형태로 1 번 망상을 일으킨 이가 

매번 대할 때마다 그런 형태로 망상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렇게 망상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 망상이 옳은 판단이 되는가 

이 문제부터 먼저 확인하자. 


그렇다고 보는가.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돈이 

그 한장으로 엉터리 가짜 화폐로서 물건을 사기 힘든데 

그것을 모두 모아서 수십억장 쌓아 놓으면 

이제 그래서 그것이 진짜화폐가 된다고 보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고 현실에 임하게 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은 

알고보면 철학 분야에서 결코 

외로운 입장이 아니고 

특히 서양 철학사상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위 문제를 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위 문제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투자 과정에서는 장님 개미투자자의 

반복된 엉터리 예측에 바탕한 투자가 

어떤 결과를 얻게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한 투자자가 매번 왜 그 종목의 가격이 

그렇게 형성된 것인지도 모르고 

다시 한 시간후의 가격이 어떻게 될 지를 모르고 

투자를 행하는데 


이렇게 반복해서 또 투자하고 투자하면 

원하는 수익을 종합적으로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런 문제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처음 1 번이라도 정확히 에측한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러나 한 번도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해서

종합적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존재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정지 단면 하나를 놓고서도 

그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료만 수없이 보고 또 본다고 해서 

그것이 합쳐져서 종합적으로 

옳은 결론을 얻게 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다 같은 성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를 보자. 

투자의 문제를 동전을 던져서 앞 뒷면을 맞추는 홀짝 게임으로 

놓고 생각해보자. 


매번 동전을 던져서 어떤 면이 나올지를 알 신통력도 없고 

또 동전을 던질 때마다 자신이 원하는 면이 나오게 할 신통력도 

없는 어떤 이가 그 상황에서 

1 번 던지고 또 두번 던지고 그런 행위를 반복하면 

나중에 그런 신통력을 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살펴보자. 



대부분 이 실험을 하면 

동전의 앞 뒷면도 잘 맞추기 힘들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투자에 임하는 이는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싶다는 희망에 바탕해서 

자신이 얼마간의 자금을 투자하면 

자신만은 아주 특수하게 예외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임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앞의 문제부터 스스로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동전하나를 던지는 문제에서라도 

그 결과를 매번 잘 예측할 수 있는가. 

또는 동전 하나라도 자신이 원하는 면만 

매 순간 나올 수 있게 공중에 던질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데 왜 수많은 이가 거래를 하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장래의 시장가격의 변동을 

자신이 다 잘 예측할 수 있고 

또는 그 시장가격을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임하게 되는가. 




사실 일반적인 개미투자자와는 달리 

현실 시장에는 다음과 같은 예외가 있다. 


주식을 놓고 말한다면 

일부의 소수주주나 경영인은 

그 회사 자체에서 어떤 좋은 사업 아이템을 

새로 개발한다거나 경영에 혁신을 거두거나 

또는 그와 정반대가 되는 부정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그 주식 가격을 변동시킬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현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이 100 이라고 할 때 

그 가운데 50 이나 60 % 씩의 물량을 거래할 정도의 

어떤 막대한 자금을 갖는 이라면 

공급이나 수요량을 변화시켜서 

가격을 변동시킬 힘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구매량(수요)을 늘려 가격을 올리게 하고 

매도량(공급)을 늘려 가격을 떨어지게 하여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행하여 

원하는 형태로 시세의 변화를 매 순간 이끌어낼 수 있고 

그래서 전반적으로 시세 변동 그래프도 그렇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도 보게 된다. 




또 그가 그런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미리 계획하는 가운데 

생각하면 

미래 시세의 변동과정도 

자신이 미리 잘 예측을 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미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통력이 모두 결여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개미투자자는 

투자를 하여 수익을 거두고자 임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동전을 던져서 어느 면이 나타나는가 문제부터 

잘 확인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또 1 번 그런 상태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데 

그런 상태를 반복하면 없던 신통력이 

그 뒤에는 생겨난다고 볼 수 있는가의 문제도 

또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전 던지기 문제는 

수학에서 다루는 1/2 확률의 문제와 같다. 


이를 조금 더 응용하면 주사위를 놓고 1/6 의 확률문제로 바꿀 수도 있고 

로또 복권의 1/800 만 의 확률 정도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는 확률과 함께 기대값과 

통계에서 문제삼는 중간값 중앙값 최빈값, 평균값 

이런 문제에서도 

많이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결국 이들 수학문제들은 투자와 관련해서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어떤 결과를 예측하고 

임하는가 하는 문제와 기본적으로 관련된다. 








또 가상화폐의 투자와 관련해서는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을 

먼저 살필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실질가치가 적은 화폐가 실질가치가 높은 화폐와 

같은 평가를 받고 시장에서 거래되면 

실질가치가 높은 화폐를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구축(驅逐)]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미 오래 전에 mun 님이 이 내용을 통해  


실질가치가 없는 화폐가 통용되면 

이로 인해 실질가치가 높은 화폐를 새로 만들어내게 된다. [구축[構築)]는  

내용도 나타낸다고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이 

가상화폐투자와 관련되고 

또 수행이론과도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본다. 


시장에서 

질이 나쁜 것과 질이 좋은 것이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점차 질이 좋은 것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앞의 내용이라면 


질이 나쁜 것이 어떤 질이 높은 것과 그렇게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면 


이로 인해 실질가치가 대단히 높은 입장에서는 

그처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받는 상태를 

추구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고 보는데 

그 부분은 뒤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를 쉽게 현실 상황을 놓고 보자. 


우선 처음의 그레샴 법칙은 

현실에서 10 원짜리 동전이나 1 원짜리 

동전이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된다고 본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가운데 

어느 순간 동전을 만드는 재료로서 

동이나 니켈의 재료 가격이 

액면 가격보다 더 높게 되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15 원의 재료비를 들여 

10 원 동전을 찍어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화폐당국은 

그보다 재료값이 덜 들어가는 형태로 

새 동전을 만들어 공급하게 된다고 하자. 


또 어느 순간 대부분의 거래를 카드로만 거래해서 

결제 시스템 상의 숫자변화로만 

결제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자. 




이제 이런 상황에서 

그것들이 모두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나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굳이 실질 가치가 높은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장에는 

실질가치가 적은 것만 남고 

실질가치가 높다고 보는 것은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측면은 앞의 그레샴 법칙과 관련되는 

측면이라고 할 것이다. 





가상화폐와 현실 화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은행이 돈을 만들려면 

위조가 어렵게 인쇄도 해야 하고 

그에 해당하는 실질 자산도 구비해야 하고 

이렇다고 보는데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서 

교환과 거래에 더 유용한 형태가 나타나면 

결국 이들이 같은 평가를 받는 가운데 

기존의 화페가 점차 

그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도 일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자, 

현금이 점차 사라지고 

동전은 더더욱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는 

현실도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 한편  

재료값자체가 

액면의 명목가격보다 더 비싼 동전은 


누군가는 이것을 모두 모아 녹여 

다른 제품을 만드는데 사용하고자 

시도하게 될 것이다. 


이 측면은 뒤의 내용과 관련되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재료값이 비싼 동전들은 

비록 그것이 불법이라고 하더라도 

여하튼 재료값이 비싼 동전이 

다른 결제수단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현실에 임하려 하기 보다는 


좀 더 높은 가치평가를 받는 상태로 

변화하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악화가 활동하면 

실질가치가 높으면서도 

그것과 같은 평가를 받게 되는 다른 입장은 


이와는 차별적으로 좀 더 높은 가치를 받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하게 되어 

더 나은 가치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측면도 있다고 

mun 님이 제시한 것이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어떤 장사가 

쌀을 한번에 두가마씩 들어 올려 

마을에서 대단한 존중을 받았는데 


어느 날 기중기와 같은 기계가 들어와 

수없이 많은 무거운 물건을 

높이 다 들어올린다고 하자. 



또 다른 상황도 있다. 


현실에서 

무예를 10 년씩 닦아서 상대를 쓰러뜨리는데 

어떤 이가 손가락만 움직이면 상대를 쓰러뜨리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하자. 

어차피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목표인데 

더 쉬운 방안이 나온 것이다. 


또 몇 십년 공부해서 

오목도 두고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는데 

어느날 컴퓨터가 이 분야의 최고선수를  

모두 다 제압한다.  


이런 식이다. 


계산도 과거에는 

열심히 산수계산을 훈련하고 

주산도 배우고 암산능력을 키워서 

계산을 했는데 

요즘은 컴퓨터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 


또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초상화화가가 

인물을 그대로 묘사해 그리면 

대단히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로 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사진기로 한번 찍으면 

대단히 섬세하게 같은 사진을 얻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풍경도 마찬가지다. 

포토샵까지 동원하면 더 예술적인 

사진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화가 입장에서 아무리 

똑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되면 사진과 같은 평가를 

받는 것 뿐이 되게 된다. 

그러니 화가가 그런 형태로 예술 창작활동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문제와 같다. 





그런데 여하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같은 평가를 

받는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 놓고 보면 

우선 기존에 그런 활동을 하던 이들은 

이제 그 시장에서는 

없어지게 되는 현상이 일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에 그런 활동을 하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기중기나 총이나 컴퓨터나 사진기와 같은 

기계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런 무대에서는 자취를 감추는 한편 


대신 그 노력에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해서 

무언가 더 가치가 있다고 보는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여 

기존 상태보다 더 가치있는 상태로 변해 가게 된다. 


이런 측면이 있다고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mun 님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에서 

몰아낸다는 구축을 

쌓아서 건설해낸다는 구축의 의미로 

변화시켜 새로 제시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의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곧 현실에서 

전도망상과 집착에 바탕해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각 생명들이 

작용 반작용 관계로 얽히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재주를 피우는 곰과 

이를 통해 돈을 버는 사육사와 

또 이를 바라보고 즐거움을 얻는 관중의 

상태로 얽혀 함께 생사고통을 겪는 가운데 


결과적으로는 mun 님에게 

매일 음식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우주적 세트로 함께 묶여 

기능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수행자는 그런 일은 

기계나 축생이 행해도 무방한 것이라고 관하고 


자신은 어차피 같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고 할 때 

자신의 활동으로 

훨씬 가치가 높은 상태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그 방향을 수행의 형태로 전환해나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돈을 놓고 말하면 

술집에서 술을 파는 아저씨 입장이라고 해도 

매달 1 억 이상을 번다고 하고 


코인만 거래해도 누군가는 

30 조원의 수익을 단숨에 거둔다고 한다면 


어떤 이가 연구를 해서 

한달에 몇 백만원의 급여를 받는다고 하면 

이 활동은 점차 시장에서 

제거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왜 그 노력으로 

술집에서 술을 파는 아저씨나 

코인거래를 쉼없이 행하는 이보다 못하거나 

겨우 동등한 평가를 받는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장에서는 사라지고 

대신 같은 노력을 통해 

훨씬 높은 가치를 갖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게끔 전환이 되게 하는 

힘도 갖고 있다고 제시하는 측면이다. 





알고보면 당신은 

코인 100 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치이고 

많아야 한 10 개 정도일 뿐이야 

이런 평가를 받기에 


당사자가 이에 반발을 하게 되고 

그 자신은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게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업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수십 억원에 해당하는 재화를 만들고 

수익을 거두고 사회에서 존중을 받았는데 


어느날 알고보니 

가상화폐 시장에서는 

컴퓨터에 잔뜩 쌓여 있는 

암호 파일이나 마찬가지 평가를 받거나 

그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어떤가. 


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이 고작 

컴퓨터 전자 암호 파일 몇 천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붙잡고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본인이 어떤 사고를 당하면 

보험회사측으로부터 

결국 이런 전자파일 몇 백개 정도만 

받는 상태로 평가받는가. 


[비서] 넵, 사실입니다. 


어떤가. 


그런 상태가 

현실의 내용이고 사실인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임하면 

곤란하다는 것도 

이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코인이나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 전체가 

그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상태가 되지 않기위해서는 


다시 그 상태에서 

무언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추가로 해서 

자신의 가치가 적어도 

이보다는 훨씬 높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보게 되고 


또 그런 입장에서 

그렇게 자세를 전환해서 

그런 상태를 향해 추구해 나가는 상태가 나타난다면 


바로 이런 측면을 

또 다른 그레삼 법칙의 측면이라고 

mun 님이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수행에서는 

사실 이런 의미의 내용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여하튼 이런 화폐와 관련해 

투자를 한다거나 할 때는 


이 화페나 물건들이 

다 제각각 

일정한 가치를 생산하여  

교환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인데 


이런 가치가 정체되지 않고 

순환이 되면 

원래 시장에 공급된 기본 공급량을 바탕으로 

신용창조를 통해서 

그 실질적 공급량과 가치가 증폭되게 된다는 측면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는 100 원이 A 에게 10 년간 단순히 비닐에 싸여 밭에 

비밀스럽게 보관된 경우와 


그 100 원이 1 초당 1 회씩 계속 각 주체사이를 순환하여 

100 억명 사이를 돌아다닌 경우와의 

그 의미 차이와 관련된다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100 원인데 

어떤 경우는 0 원의 의미를 갖고 

어떤 경우는 ∞ 원의 의미를 갖는 문제가 

이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앞의 형태에서는 

어떤 자금이라도 투자하면 

그것은 곧바로 0 원이 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 투자하면 

그것이 단 100 원이라도 

이후 계속 ∞ 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상태로 

변화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투자와 관련해 

중요한 핵심 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서 어떤 이가 

자금을 어떤 부분에 투자한다면 

그로 인해 그 국가나 사회 전반이 

이처럼 가치가 무한히 증폭되어가는 형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그 반대로 어떤 투자나 행위를 했는데 

그로 인해 전체 국가나 사회가 

전쟁이나 내란 상태로 들어가서 

있는 건물이나 재화를 다 태우고 부수고 한다면 

그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환과 투자이론의 관계에서는 

또 한편 그와 관련된 부작용으로 

밀가루 분식회계의 문제와 

피라미드형 폰지 사기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환이 된다는 것은 

대부분은 판매와 구입이라는 

거래 관계를 통해 이뤄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자잉여와 생산자 잉여의 문제와 함께 

수요 공급의 형성 동기와 

이런 거래의 총량이 

가치 판단의 적정성에 어떤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고 

이는 또 넓게는 교역조건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런 내용들이 모두 투자와 관련해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소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논의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수익- 비용의 관계에서 

어떻게 투자활동을 통해 수입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극소화하는가 하는 

방안이 무언가 하는 것이 또 문제된다. 



알고보면 간단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최극단의 방안이 수행이기도 한 것인데 


그러나 이를 하나하나 살피려면 

상당히 논의하기에 복잡한 

문제라고도 본다. 




여하튼 조금 낯선 개념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기로 하고 


현실의 투자 이론이 

곧 수행자의 가치 투자로서 수행방안의 실천과 밀접하고 

더 나아가 유마힐 소설경에서 제시하는 

내용과도 밀접하다고 보는 가운데 

관련된 내용을 이어서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







현실에서 가장 단순하게 투자를 하는 

개미투자자를 놓고 투자 문제를 간단히 살피면 이렇다. 


먼저 100 이라는 원금을 여유자금으로 갖고 있는데 

그는 우선 이 자금을 다양한 형태로 보유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현금을 그대로 보유하거나 

은행에 예금을 하거나 

금이나 보석과 같은 가치대표재에 투자할 수도 있고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외국 달러화나 일본 엔화의 형태로 보유할 수도 있고 

등등으로 

여하튼 어느 형태로든 그것을 보유하는데 


이 경우에 이왕이면 현재 가치가 높거나 

장차 높아질 형태의 자산으로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이 

대부분의 기본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100을 어떤 품목에 투자했는데 

다음날 시장에서 가격을 확인하니 

50 이 되었다는 경우와 

150 이 되었다는 경우를 단순히 놓고 살펴보자. 


이전 글에도 제시한 바 있는데 

여기에 엉터리 망상분별자 가운데 하나인 

뉴톤과 같은 이가 개입하면 

이 변화과정을 이렇게 분석하게 된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이런 식으로 변화과정에 내재한 법칙을 제시하고 

이것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어제 100 원이 오늘 50 원이 되었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 일단 이 상태로 계속 현상유지될 것이다. 

- 이런 추세로 계속 비례해서 더 가속도로 나아갈 것이다. 

- 아니다 이에 반발하여 내일은 오를 것이다. 



대강 이런 예측을 각각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 

어제와 오늘 누구나 다 보고 확인하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예측을 행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과거 내용은 뚜렷하게 파악하는데 

정작 엉터리로 행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판단부분이다. 


이는 신통한 점술가의 경우도 

사정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과거의 자료를 놓고 

미래사정을 예측해 나가는 입장도 

크게 이와 다르지 않게 된다. 



이는 물리적으로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관계에서 

대부분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일반 망상환자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쉽게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만화책을 하나 구해 놓고 

100 페이지에 그려진 내용은 

그 앞 99 페이지들의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본다면 바로 이런 관계 분석과 사정이 같다고 할 것이다. 


앞 97 페이지의 내용을 찢거나 

다른 형태로 바꾸면 

100 페이지의 내용도 달리 바뀌게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앞에서 

그렇게 현실에서 운동의 변화도 살피고 

그 관계를 운동의 법칙으로 제시하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앞 내용을 대하는 투자자들이 

현실에 수요공급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엉터리인 것이다. 


이것이 홀짝이나 주사위 숫자 맞추기 원리와 

같은 방식이다. 


우연히 한 번 

자신의 예측이 맞을 수는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는 

다시 수학의 확률문제와 관련이 된다. 




주사위를 던지고 숫자를 맞추는 문제에서 

예를 들어 6 이 나올 확률이 1/6 이라고 하는 것은 

6 번 던지면 반드시 그 가운데 1 번은 6 의 숫자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100 번을 던졌는데도 

6 이 그 가운데 한 번도 안 나온다는 사실을 

확률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확률이란 역설적으로 이렇게 

100 번을 던져도 6 이 한번도 안 나오게 될 

그 값을 숫자로 제시해주고자 하는 취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확률값이 1/6 이라는 것은 

주사위를 무한히 던지고 던지면 

그 전체 횟수에서 6 이 나온 횟수가 

1/6 에 가깝게 되어 갈 것이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상태에서 또 다음 번에 

어떤 숫자가 나올 것인가를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6이 계속 99 번 나왔다. 

다음 번에는 어떤 숫자가 나올까 

이 때 확률계산이 어떤 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관계를 보게 되는 입장은 

귀납논증의 추론의 오류와 밀접하게 된다. 


어떤 이가 800 만장의 로또복권을 구매했는데 

799 만장까지 확인해보니 

1 등 당첨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복권들도 이런 경향으로 볼 때 

당첨이 안 될 것이다라고 보려는 추론이 

귀납추론식이 사용하는 추론이기도 하다. 



사실 800 만장이 현실의 복권에서 조합가능한 

총수는 아니므로 

나머지 복권에 1 등 당첨번호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미 앞에 확인한 내용들이 

다음에 확인해보는 복권의 당첨여부와 

어떤 관계나 영향이 있다고 볼 것인가. 

이 문제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기는 곤란한데 

그러나 또 그것이 그 내용을 그렇게 결정하는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다. 


이것이 만화책에서 이전 99 페이지까지의 내용과 

다음 100 페이지째 내용의 관계와도 유사한 것이다. 



현실에서 만화가가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전개할 때 

100 페이지의 내용을 이전 99 페이지까지 전개되어온 내용과 

전혀 동떨어지게 그릴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99 페이지의 내용이 

100 페이지 째 내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앞 페이지를 몇 장 찢거나 

또는 다른 내용으로 바꾼다고 할 때 

100 페이지의 내용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투자 이론에서 

개미투자자의 생존이론을 

수행자의 가치투자 수행방법론과 관련해 

살피는데 

사실 이는 좋음을 어떻게 하면 

가장 넓게 길게 깊게 얻어내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다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


수행자의 가치투자 이론은 
단순하다. 
같은 값이면 좋은 것 
좋은 것이면 더 좋은 것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읿반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서 
a 에서 신경을 기울이고 집중하면 
그 상황에서 다른 b,c 등에 
신경을 기울이기 힘들다는 문제 때문에 
늘 선택의 문제로 제기된다. 

현실적으로 30 조 미만의 가치를 갖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집중하면 

30 조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에 동시에 
마음을 기울이고 집중하기 힘들다.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어떤 드라마를 보면서 
다른 영화를 함께 감상하기가 곤란한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드라마를 하나 보면 
영화는 그 순간에는 보지 못하는 것이고 
영화를 하나 보면 
그 순간에는 어떤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을 투자대상으로 삼아서 
시간과 정력을 쏟을 것인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투자 선택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개미투자자의 생존이론이 
수행자의 가치투자이론과 맞닿아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이다. 

앞에서 30 조원을 놓고 이야기를 했지만, 
생명을 놓고 이야기하면 어떤가. 

예를 들어 
운전하는 이가 
운전 중에 고개를 돌려 
뒷 자석에 있는 이와 5 분간 대화를 하면서 
시속 100 Km 로 달리면 어떻게 된다고 보는가. 
사망에 이르는 사고를 당하게 되리라고 쉽게 보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중요해도 
뒷자석에 앉아 있는 이와 대화를 할 것인가. 
앞을 보고 운전을 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때 각 경우의 가치문제를 비교하는 
가치저울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양자 택일의 비교문제에서도 문제되지만, 
같은 값이면 더 좋고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동가 홍상 원칙의 실현과정에서도 
똑같이 문제된다. 

예를 들어 작업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할 때 
이왕이면 어떤 음악이 더 좋은가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반대로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까가 문제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는 입에 염불이라는 말도 제시되는 것이다. 
놀거나 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좀 더 가치있는 형태가 무엇인가가 
문제될 때 이런 가치의 비교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다 마찬가지라고 볼 때에도 
이왕이면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는 
역시 가치저울에서 문제되는 것들을 올려 놓고 
가치를 비교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자의 선택문제가 
곧 현실의 투자 이론과 같은 원리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곧 이런 문제다. 

30 조원도 문제되지만, 
우주에 있는 모든 화폐나 가치를 다 모아서 
한쪽 저울에 올려 놓고 
다른 한쪽에 자신의 생명을 올려 놓으면 
이 가운데 어떤 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부터 
기본적으로 답을 얻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가치의 경중이 문제될 때 
생명 이상의 가치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상태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 무한하다고 해도 
나중에는 그 시간 동안 계속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면 
차라리 생명이 없는 쪽을 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생명 이상의 가치를 논의할 때는 
생사고통을 벗어난 가운데 
이를 본전으로 확보하고 나서 
그 다음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그리고 성불하는 상태를 
수행자가 추구해 나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적용되는 가치비교와 
선택이론은 
원래 현실에서 행하는 가격비교나 투자이론 등과 
원리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같이 살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30 조원에 온 신경을 기울이면 
그 순간에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을 실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기울이기가 힘들게 된다. 

이 때 어느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나은가. 
또 이렇거나 저렇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때에도 
이 가운데 어느 쪽을 추구하는 것이 낫다고 볼 것인가. 

그런데 이 판단이나 선택을 
잘못 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 당사자가 잘못된 망상분별을 행하고 
무언가에 집착하기 때문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사례를 제시했는데 
일반적으로 운전을 하는 입장에서는 
옆 좌석의 사람이나 뒷자석의 사람을 
오래 보면서 운전하면 곤란한데 
그러나 어떤 경우는 그렇게 행하면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갓난 아이가 뒤에 앉아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래로 쿵하고 떨여졌다. 

그래서 운전 중에 뒤로 고개를 돌려 그 상황을 
바라본다. 

이런 사례도 있는 것이다. 



그처럼 무언가에 집착하면 
그 집착으로 왜곡된 판단을 하고 
선택을 잘못 행하게 되는데 

현실에서는 기본적으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임하는 가운데 
그런 사례에 해당하는 상태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대단히 많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현실에서 매 순간의 선택이 
어떻게 보면 
그로 인해 나타날 결과를 정확히 매순간 
에측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선택해나가는 것이므로 
도박의 성격을 갖는다고 제시한 바 있는데 
사실 이렇게 되면 
삶은 그에 비례하여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

현실에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업을 행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숲속에 
음식점을 만들어 놓고 사업을 하면 
잘 되겠는가. 
이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거리에서 어떤 사업을 어떻게 해야 
수익을 뜻하는 바와 같이 
많이 거둘 수 있는가의 문제는 
대부분 또 어려운 선택문제가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놓고 보면 
무언가 답이 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그 이후 결과를 자세히는 알 수 없는 그런 어려운 문제가 
되어 
이런 상태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은 
곧 주사위 던지기 도박을 한 것처럼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수행을 이런 식으로 임하면 
원칙적으로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개미투자자의 투자과정에서도 
똑같이 문제된다고 보고 

그것이 100 원을 투자해서 100 억을 벌고자하는 
개미투자자의 투자 과정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수행과정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100 원을 투자했는데 
0 원이 되고 100 억이 되는 것을 
주사위나 동전던지기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도박이므로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수행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둘은 같은 가치 투자의 이론에 
의해 확실한 수익을 거두는 원칙에 의해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0 원을 투자했다면 곧 이상한 향공양을 올리려 시도하거나 
공연히 분주한 깡통 상태가 되기 쉽고 

수행자라면 이상한 수행처로서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축사를 택해 
이후 수행을 해나가게 되는 상태가 되기 쉽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

일단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에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투자를 함에 있어서 
미래를 예측하거나 변화시킬 신통력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손실을 보지 않고 
잘 투자해서 수익을 거두는가라는 
기본 방안부터 살펴서 

최종적으로 유마힐 거사님이 
어떻게 법에 대해서 관하고 
또 후반부에 보이듯 
작은 방에 세계를 넣기도 하고 
향적여래님으로부터 음식을 받기도 하는 등의 
상태까지 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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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에서는 
개미투자자의 생존방안과 

유마힐 소설경에서 제시된 문제를 

샅샅이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 문제를 반복해 살피는 것은 

두 문제가 모두 

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미투자자가 수익을 조금 얻어보려고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갑자기 

깡통만 하나 들고 

거리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거나 


또는 번개탄과 같은 것을 놓고 

이상한 향공양을 올리려고 분주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극적인 일이라고 본다. 


가치저울에 

한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와  

그 투자액을 양쪽 저울에 올려 놓고 비교할 때 

생명이나 신체가 갖는 그 가치를 숫자로 비교해 

표시할 도리가 없이 대단히 소중한 것인데 

왜 그런 상황에 몰리게 되는가.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이 작용하고 

그런 상태에서 눈이 가리워지고 

당장 직면하는 고통을 평안히 참는 수행도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면에 불이 둘러살 때 

100 층에서도 창문밖으로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게 되듯 

그렇게 상황에 몰려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모로 살펴보아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국가나 사회의 측면에서도 

그런 한 개인이 그런 지식을 습득하고 

생활하게 되고 또 그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는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그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당사자나 가족들이 겪는 고통도 

역시 대단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 이런 비극을 방지하고 

2차적으로 개미투자자가 원하는 것처럼 

100 원을 투자해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될 수도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개미투자자가 수억명인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제로섬 게임이나 축구결승전처럼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2000 년전의 상황과 

지금 상황의 기본 재료가 같으므로 

현재 누군가 123 층 빌딩을 보유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자산을 갖고 살게 된다면 

제로섬 원칙에 의하면 그외 나머지는 

2000 년전의 상황을 기준으로 

모두 다 그 보다 훨씬 못한 상태로 

지내야 한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이제 그런 방안이 무엇인가를 놓고 

또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개미투자자의 끝판왕과 있다 없다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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