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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고통에서 탈출의 실패 본문

연구자료

생사고통에서 탈출의 실패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28.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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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500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세상에서 이상한 일이 많은데 

어떤 사건 사고에서 그 사고를 자신이 일으켰다고 

권총이 법정에서 자백을 하는 경우처럼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권총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또 한편으로 그 사정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권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총알을 발사해서 

상대가 크게 다쳤다. 자신이 없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그 사고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을 받아들이면 

오늘 대법관들은 다 사표를 내야 할 지도 모른다. 


대법관들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는 맞는 것 같지만, 

이 권총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총이 그 사건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계속 주장하고 나서면 

이것은 권총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권총을 특별히 더 사랑스럽게 대하게 되고 

권총의 주장을 다 받아들이고 나서도 

용서해줄 밖에 없다고 보게 되는 이상한 상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 뒤부터 

그 권총은 이제 권총의 취급을 받지 않고 

그런 수준 높은 상태로 평가를 받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있다.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온 생명을 제한없이 차별없이 모두 다 좋고 좋게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주려고 서원을 일으켜 갖고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고 제시할 때 


prince 님이 그전까지 인류만 그렇게 대상으로 

삼아도 충분하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생명 뿐만 아니라 온 존재자들을 다 

최상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세간에서 문제되는 모든 사건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나선 적이 있다. 


그래서 사실 그 당시 권총의 문제를 생각한 것인데 

그것이 이치에 맞는가. 


일단 범위를 좁혀도 문제지만, 

범위를 공연히 넓혀서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좋고 나쁨을 문제삼는 생명을 넘어서 

그런 문제를 갖지 않는 대상까지 포함시켜서 

최상의 상태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또 이상한 것이다. 


본인이 오늘 1 대당 10 억 짜리 차를 지급받았다. 

2 호선 노선을 가고 싶을 때는 새 차를 타고 다니라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가 다 부서지거나 본인이 손이 하나 잘라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을 때 

prince 님의 입장을 취하면 어떻게 되는가. 


손이 잘라질 때 받을 수 있는 보험료나 손해배상액을 

산정해서 전철차량 10 억 원의 값과 비교한 다음 

선택을 해야 하는가. 


10 억을 다 반영하지 않더라도 일단 온 존재자를 고려의 범위에 

넣었다면 일단 어떻게든 생각을 해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신의 손을 희생시키면 좋다고 보겠는가. 


물론 다 좋게 하면 되는 것이지 

왜 굳이 그런 양자택일의 상태에 들어가서 

그런 문제를 고민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포함시키겠다는 것은 결국 이런 문제에서 

그것을 고려 대상으로 삼겠다는 취지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차량이나 10 억원 자체는 문제가 안되지만,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기울이는 어떤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 역시 생명이기에 

역시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입장을 또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그런 경우는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런 주체를 고려하지 않을 때는 

그 물건만 놓고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문제를 삼는다고 하자. 

그 물건에게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보다 더 좋고 

나쁜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자신이 감정을 이입시켜서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그렇게 임하는 어떤 생명때문에 

또 그런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좋고 나쁨을 

문제삼는 생명만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에서 prince 님이 공연히 

물건을 놓고 문제삼으면 

그런 prince 님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사실은 prince 님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되어서 

어떤 사물을 놓고 그처럼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공연히 그런 사람때문에 그 사물까지 그 입장을 고려해 주어야 

하는 문제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기껏 예술품이라고 만들었는데 아무도 

아름답게 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을 그래도 쓰레기로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 것은 

그것을 놓고 그것이 가치있다고 공연히 신경쓰는 

그 한 사람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 사람마저 없다면 그것은 독자적으로 

가치가 있다거나 만드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거나 하면서 

그래도 보존해야 한다고 나서거나 

이 사물이 천을 덮어주는 것을 좋아할 것 같으니 

덮어주어야한다거나 유리 장식을 해주어야 한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경우도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렇다고 보는 망상증환자가 있어서 그런 것 뿐이다. 



그런데 여하튼 prince 님이 그런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모든 사고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나서서, 

또 본인이 개입해서 

사실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innocent 라고 

선언을 해주고 무죄 방면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것은 

prince 님이 그런 사건 사고를 보고 

그 사고를 그렇게 인식하고 문제삼지 않으면 

적어도 prince 님에게 그 사건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게 임하므로 prince 님이 그 사건의 

한 원인인 것도 사실인 것이다. 


위 상황에서 prince 님을 빼고 넣고 해봄에 따라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현장에서 권총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해도 

권총은 책임을 질 입장이나 주제가 아닌데도 

권총이 책임이 있다고 나서도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대법관을 포함해서 

본인까지도 권총은  

innocent 라고 무죄 방면을 할 것인데 


prince 님은 그런 입장도 아닌데 

그러나 prince 님을 그 상황에서 빼고 넣고 함에 따라 

분명 차이가 있기에 

또 prince 님 입장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이길래 

이 모든 사건에서 prince 님을 

innocent 라고 선언해서 무죄방면하게 되는가. 



그것은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사정을 설명한 바와 같다. 


아무리 prince 님이 

현실에서 무엇이 있었다고 하고 

생멸과 생사 고통이 있다고 주장을 해도 


정지된 한 단면이던 연속 상황이던 

그 어느것에도 

prince 님이 주장하는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얻었다고 해도 사정이 그렇고 

잃었다고 해도 사정이 그런 것이다. 



이를 꿈을 놓고 비유하면 

꿈에서 황금을 얻었다고 해도 

없던 황금이 그 상황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황금을 다시 잃었다고 해도 

있던 황금이 그로 인해서 그 상황에서 없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꿈에서는 

그렇게 황금을 얻었다거나 잃었다고 하는 

꿈 내용은 그렇게 꾼 것이다. 


그리고 현실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은 별 도리가 없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배를 잡고 뒹굴면서 

prince 님이 모든 사고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면서 

자백하는 모습도 보아주어야 하고 

또 이후 그에 따라 여러가지를 행하는 것도 

또 이어서 보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 사정이 이렇다. 


그러나 뻔히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그렇게 나서니, 

얼마나 또 그 심성에서 평가할 부분이 많다고 

보겠는가. 



원래 어떤 곳을 좋다고 여행을 

연구원들이 같이 떠날 때가 되면 

prince 님은 동참을 잘 하지 않는다. 


기껏 같이 가는 경우는 

둘레길 입구 정도일 뿐이다. 


본인과 생각이 이 부분에서 비슷하다. 


힘들게 올라간다고 해도 

결국 거기에서 오래 있지 않고 

곧 바삐 내려올 텐데 

무엇하러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가. 


올라갈 때 근육 무리하고 

내려올 때 관절 충격받는데 

그것이 정말 건강에 도움이 되고 

즐거움과 재미도 주고 

심지어 보람도 있고 그렇다는 말인가. 

그리고 본인 입장에서 그것이 

끝내 얻기 힘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는 데 

도움이라도 준다는 말인가. 


하나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미 쳬육계에서 

근육운동은 

한 30 초만 최대로 근육을 사용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각 부분을 스트레칭하고 

릴렉스해서 이완시켜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관절도 무리가 없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힘들게 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좋다면 하루에 만킬로를 달리면 

그로 인해 무병장수하리라 보지만, 

대부분 그 다음날 장례식장에 주빈으로 

임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도 운동이 좋다고 보는 것은 

전신에 피도 순환이 되고 

각 부분이 순환하면서 활동을 하기에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자신이 마음만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100 kg 푸대를 들고 

여기서 저기로 쉼없이 옮겨야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또 그런 효과가 얻어지므로 

그렇게 해서 순환을 하면 좋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효과는 

술이나 약품으로도 얻어질 수도 있고 

또는 따뜻한 온수에 몸을 담구어도 얻어질 수 있고 

어떤 마찰 기계로 마찰을 해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효과가 

정려나 삼매 수행으로도 다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던지 같지만, 

원하는 효과만 정확하게 얻어내고 

그에 들어가는 노력이나 비용이나 시간을 줄이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도록 목표를 정하고 임하면 

바로 방안이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prince 님은 굳이 

먼 곳으로 여행을 가려고도 하지 않고 

설령 북한산이라도 한 번 가게 되면 

입구 언저리에서 적당히 있다가 

시간을 보내고 


something special 이론이나 

Paul David  관련 구상 등에 대한 이야기만 

주로 듣고 내려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좋다고 보게 된다. 


이에 반해 숙왕화님은 

동네 마실만 같이 한 번 갔다오려고 해도 

전속력으로 임하고 

자전거만 한 번 타고 갔다오려고 해도 

역시 전속력으로 임하고 해서 

같이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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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노예나 죄수가 되어 묶여 지내거나 

생노병사에 묶여 고통을 받는 상태를 

안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묶임에서 풀려난 상태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해탈(解脫; vimokṣa)이란 글자 자체가 

풀려나고 벗어난다는 의미인 것이다. 



묶임과 해탈의 관계를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자. 


개스실이 운영되는 수용소가 있다고 하자. 

어떤 이가 이 수용소를 향해 가는 기차나 

수용소에 있는데  


그런데 원하면 자유롭게 이를 벗어날 수 있는데도 

어떤 이가 굳이 그런 상황을 선택해 

그렇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지 않지만, 

다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해서 

묶여 그렇게 있는 것인가. 




현실을 놓고 보면 

수용소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 대부분이  

다 함께 원하지 않는데도 

다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상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도 굳이 찾고자 한다면, 

영화에서 본 

쉰들러 아저씨 같은 분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는데 

그 외로는 별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수용소장이나 병사는 

그런 묶임에서 풀려난 상태이고 

고통을 받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 생각하기 쉬운데 

과연 그런가를 놓고 또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그렇지 못했다고 보게 된다. 


어느 수용소장이나 병사가 오늘 자신은 

이곳에 있기 싫으니 스위스로 여행이나 떠나야겠다고 

하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인가. 


상대적으로 수용소에 수용된 이들보다는 

덜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알고보면 역시 같이 생노병사에 묶여 있고 

또 행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경로만 조금 다를 뿐 

역시 생사에 묶여 고통을 받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나중에 이 수용소에서 벌어진 범죄가 

문제되었을 때 그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은 명령을 받아 어쩔 도리가 없이 

그런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주장함을 놓고 보면 

그런 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알고보면 수용소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은 이들의 

고통도 문제지만, 

수용소에서 지낸 이들이 다 함께 생사에 묶여 

고통을 받은 사실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런 현실을 놓고 

해탈을 기본적인 수행목표로 잡고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t op tr] 투자와 번개탄과 지혜 광명


이미 투자와 관련해 

현실 경제생활에서 

노예나 죄수의 상태로 고통에 묶이기 쉬운 요소를 

보증, 생명보험 , 화재보험, 주식투자 도박 등을 놓고 

이전 조각글에서 살폈는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도 많을 것이다. 


사실 보증이나 보험 주식 일반이 모두 다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의원이 의원생활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제시했는데 

현실에서 존경받는 직업의 하나인 의원생활을 놓고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현실적으로 그런 사례가 많이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이 죄인이 되어 교도소에 묶이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의 중간의 애매한 경계선에서 

자신들이 활동한다는 상황을 그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이는 없다라는 

세간의 말이 있는데 

의원이 아니라고 해도 

정말 세세하게 비리를 찾고 또 찾으면 

무엇하나라도 나오지 않는 이가 세상에 있을 것인가. 


여기에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마음의 내용을 놓고 

이를 문제삼으면 도대체 누가 이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사실은 이것이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사정이 그러니까 다 그렇게 묶여서 

지옥에 함께 들어가버리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하고 


사정은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런 묶임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아보고 

그래서 수행에 진입해 들어가자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와 같다고 그 위험성을 제시하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고 

자신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악에서도 떨어져 있고 

그래서 본래의 상태도 청정하고 

또 현실에서도 이에 상응하게 청정하게 지낸다고 

주장하는 백백교 신자가 주변에 있다.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니 할 말은 별로 없는데 

그런 주장과 관계없이 

현실에서는 대단히 단단하게 그런 고통에 묶여 지내면서도 

그러나 정작 자신은 노예나 

감옥에 있는 죄수나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의 상태와 달리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 

자유롭고 평안하게 뜻과 같이 잘 지내고 있다고 

전도망상 속에서 생각하며 지내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사실 명백히 노예나 죄수 환자의 상태로 지내는 이보다 

더 상태가 심각하고 예후가 안 좋은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할 것이다. 


적어도 노예나 죄수 환자는 

자신이 묶여 속박되어 생활하고 있고 

병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자신이 

상태가 이상함을 자각하면 

의사가 이 환자는 병원을 나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보게 되는 것처럼 

어떤 이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렇게 생사고통에 속박되어 묶여 있음을 자각하고 있으면 

오히려 그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생사고통에 묶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풀려나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방안은 쉽다. 


이미 앞에서 

수용소의 상황을 놓고 

그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 질문을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아보면 

자신의 상황이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현재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도 하고 자세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앞의 질문을 여기에 해보는 것이다. 


원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자신이 굳이 원해서 그렇게 선택해 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에 대해 

대부분 망상증 환자는 

자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것을 그렇게 원하고 선택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답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여기에 한 번 더 

질문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수많은 좋고 좋은 내용이 무량하게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처럼 신발에 붙어 있는 껌과 같이 

쓸데없고 가치없는 것을 굳이 희망하고 

붙들고 있는 것인가. 


즉 수많은 좋고 좋은 것을 다 버리고 

왜 하필이면 굳이 그런 쓸데없는 희망을 갖고 

그렇게 임하게끔 되어 버린 것인가. 


이것에 대해 다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앞 조각글에서 투자와 관련하여 

보증이나 생명보험 화재보험 주식 도박 이런 것들의 위험성을 

제시했는데 

모든 보증이나 보험 투자가 다 그렇다고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는 의원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거닌다고 하는 표현이 

위험이 매우 높은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처럼 

반드시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보고 제시하는 항목들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증 생명보험 화재보험 주식 투자 등이 문제라고 해서 

모든 보증이나 모든 보험이나 

모든 주식투자가 다 문제이겠는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문제라고 해서, 

또 반대로 나머지 현실 영역은 그런 위험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대부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보는 

이런 사례들이 특정한 경우 

고통에 묶이게 만드는 사정을 살피는 가운데 

사실은 현실의 내용이 모두 위 사례와 같은 성격으로 

각 주체를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끔 

진행되어 나가고 있는 사정을 제시하려는 취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생명이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전도몽상을 일으킨 이후 

탐욕과 분노와 각종 사견의 번뇌에 묶여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로 

제시되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현실에서 거의 드문 것이다. 

이런 글을 올리는 본인은 예외이겠는가. 


다시 점검 질문표를 제시해보자. 


자신은 자신의 몸에서 자유로운가. 

거울을 보면서 오늘은 조금 젊고 

유명한 ○○○ 배우의 모습으로 활동해야겠다고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쉭 변해 활동할 수 있는가. 


조금 근본적으로 질문을 한다면 

생노병사 전체를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겪어 나간다고 할 것인가. 


즉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늙어가고 

원해서 병에 걸리고 

원해서 자신의 장례식장과 관이나 화장터에 그렇게 들어가는가. 



그리고 현실의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중독현상의 폐해를 살폈는데 


잠이 올 때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원해서 매일 잠을 자는가. 


식사를 하지 않아도 몇 주 몇 달 몇 년을 

보낼 수 있는데도 

그러나 매 경우 굳이 식사를 하기를 원해서 

식사를 하는 것인가. 


그외 기본적인 생리현상 전반이 

다 마찬가지다. 


DOCTR 님이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고 하는 점에서 

생명이 공통된다고 제시하는데 

이는 알고보면 벌레나 지렁이나 소나 돼지나 

인간이나 기타 생명이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묶임에서 자유롭게 풀려나 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생명이 그다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쓰는데 

이 대목에서 춥고 배고프다 이런 메세지를 갑자기 듣게 되는데 


춥고 배고플 때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자신이 벗어날 수 있는데도  

일부로 원해서 그런 상태를 찾아 선택해 

그렇게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신은 매 순간 자신이 어디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자신이 자유롭게 희망한다는 그 희망 자체가 

무엇에 묶여서 그렇게 갖게 된 것인가를 

여기서 문제삼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자신의 마음에 들어 있는 

근본 무명과 그에 바탕해 일으킨 전도망상과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견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손님과 같은 존재들[객진]인데 

그런데 이것이 자신인 것처럼 스스로 여기면서 

자신이 이들에 묶여서 그렇게 

생노병사 고통을 받아나간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그 상태에서 또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권이나 증권 등에 

투자를 하고 종목을 선택을 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


자신이 이번 주 복권 당첨번호를 

원하면 다 알아낼 수 있고 

기타 모든 것을 다 잘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자신이 원해서 

일부로 당첨번호가 아닌 그런 번호를 선택하는 것인가. 


그래서 비록 당첨을 원하지만, 

그러나 정작 매번 당첨되지 않는 번호를 선택하기에 

이를 자신이 자유롭게 번호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즉, 자신의 마음에서 

알려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굳이 하필이면 매번 틀린 답만 

그렇게 자유롭게 원해서 선택해 기재하는 것인가. 

이런 의미다. 이고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각 생명은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자유롭게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고 


또 무언가 좋아보여서 탐욕이 불처럼 일어나는 상황에서 

탐욕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자유롭게 탐욕을 일으켜 

그렇게 접착되어 임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인가. 


생사고통에 자신을 묶어 사역시키며 

고통의 세계를 향해 끌고 가고 있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기본적 번뇌를 놓고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망상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손님인 이들 내용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묶여 생사 고통을 받는 각 세계의 수용소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을 자각해야 

비로소 수용소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에 올라타지 않고 

올라타 있더라도 내려올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전도 망상 편집증세에 대해 

자각부터가 되지 않으므로 

도무지 벗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보게 되는 

세상을 세상이라고 여기고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한없이 묶여 끌려 가는 것이다. 


[...]

단지 자신이 그 과정을 모른다고 

그것을 자유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어려운 수학문제가 시험에 나와서 

자신이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터리 답을 자신이 적어 내는데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적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의 상태에서 선택한 것이라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자신이 그 수학문제의 답을 다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렇게 일부로 원해서 틀린 답을 매번 

선택하고 적어내는가 이런 질문이기도 하다.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그러나 틀린 답을 자신이 고르고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그 답을 기재했기에 

자신이 그것을 자유의 상태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노예나 감옥에 갇힌 죄수도 

자유로운 상태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예가 무거운 돌을 날라 성을 쌓거나 

죄수가 감옥에 갇혀서 생활한다해도 

그 노예나 죄수도 역시 그런 활동을 

자신이 일단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행위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가 묶임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면 

죄수나 노예도 역시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


현실에서 자신의 손과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스스로 묶여 있지 않고 
그래서 자유롭게 매 순간 선택해서 
무언가를 행한다고 여기고 임하면서 
생사 현실에 묶여 지내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니 그렇다면 한 번 내버려 두어보자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정말 그렇게 방치하면 
거의 예외없이 
99.9 % 생사 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수용소에 묶여 끌려 가는 것을 
그대로 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내버려 둘 도리 밖에 없는 것은 
내버려 두지 않고 억지로 행하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나게 마련이고 

또 설령 그렇게 억지로 행하였다 해도 
억지로 행하여 얻는 결과는 
그 자신의 결과가 되지 못하기에 
사정이 그런 것이기도 하다. 

망상 상태에서는 대부분 
자신이 알아서 자유롭게 잘 하고 있는데 
다른 이가 옆에서 간섭을 하고 잔소리를 하면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고 
또 정반대 방향으로 더 고집을 갖고 
나아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상대와 시시비비를 놓고 따지면 
그 상태는 더 악화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이런 경우 
내버려 둘 도리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사정이 그렇기에 
경전에서는 
비록 중생에 대한 무량한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대하는 부처님마저도 
중생들을 상대로 두 번 사정을 이야기 한 다음 
그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로 방치해서 
그대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게 할 도리 밖에는 
없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생사고통을 스스로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되더라도  
어느 계기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 
벗어나올 계기를 찾는 것이 
억지로 강제로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예후가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다 잘 알아서 행하고 있는데 
어디에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 끌고가는 
족쇄가 있다고 하는가 하면서 
이것이 무슨 뚱단지 같은 이야기인가 하고 
거꾸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사실 현실에서 손과 발에 채워져 있는 족쇄는 
보이지 않고 
처형을 당하는 단두대에 행렬을 지어 서 있는 
줄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생사 고통을 받는 수용소를 향해가는 행렬에 
족쇄가 채워져 줄 서 있는 실질적인 상태가 아니고 
그로부터 풀려나 있는 경우를 보는 것은 
대단히 드문 것이다. 


경전에서 이런 상황을 다양한 표현으로 비유하여 
제시하는데 
떼지어 있는 축생들은 
그 축생의 수는 늘고 줄고 하는 가운데 
정작 그 자신들은 그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이들이 하나같이 도살장을 향해 줄 서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처럼 
생명들이 모두 그와 같은 상황이라고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는 세계로 
각 생명을 묶어 끌고 가는 족쇄는 
각 생명의 마음에 들어 있는 
분노와 탐욕 어리석음의 번뇌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난 경우가 
현실에서 드문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또 생명은 
이 번뇌에 묶여 사역을 쉼없이 당하고 
또 한편 다른 생명을 사역시키면서 
생사 고통을 받는 세계로 쉼없이 끌려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므로 
수행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이런 묶임에서 풀려날 수 있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투자와 관련해서 
위험한 상황에 묶이고 감옥에 갇혀 고통받기 쉬운 
항목을 
보증 생명보험 화재보험 주식투자 도박 등을 나열해 
제시했는데 이 경우 다 그렇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이런 항목에서 잘못 임하면 
곧바로 번개탄 공양을 올리면서 사라지기 쉽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은 
그런 사정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알고보면 그 근본원인도 역시 앞에서 
제시하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원인인 것이다. 

각 현실상황에서 투자나 선택을 잘못 행하는 이도 
앞의 수학문제 비유처럼 
자신이 옳은 답을 알고 있는데 
일부로 틀린 답을 매번 자유롭게 적어나가는 상황이 결코 
아닌 것이다. 

사실은 자신은 알고 싶어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매번 엉뚱한 답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면서 
그렇게 끌려가고 있는 상황인 것 뿐이다. 

그런데 전도망상속에서 
단지 그 답을 자신의 손으로 매번 
기재하기에 그것을 놓고 자신이 자유롭게 
원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임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 사실 그 사정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

도박이던 알콜이던 담배든 
중독현상을 일으키고 임하는 이는 
그 하나하나의 행위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손과 발을 이용해서 
그렇게 다 행하는 것이다. 

마약 중독에 걸린 이도 
자신의 손으로 마약을 집어 
흡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약중독자가 그 마약을 
자신의 손으로 흡입하니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보고 전도망상 편집증 환자들을 
하나같이 그대로 내버려두면 
대단히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담배가 해롭다지만, 
현실에서 그 폐해가 더 심한 사례로 
마약이나 알콜중독 도박중독 등을 들기도 하고 

또 투자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탐욕에 바탕해 행하는 행위가 모두 해롭다고 보지만, 
그래도 더 위험성이 높은 경우로 
보증이나 생명보험 화재보험 증권투자 선물거래 등을 
제시한 것이지만, 

알고보면 전도망상 편집증에 바탕해  
탐욕과 분노 이러석은 견해를 일으켜 
이에 접착되어 행해 나가는 행위 일체가 
다 같은 성격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극심한 사례의 결과를 
번개탄 공양이라고 
상징해 표현해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사정을 잘 관하고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의 묶임에서 풀려나
해탈을 얻고 
청정한 니르바나를 기본적으로 확보하고 
무량행문에 임하는 경우는 
외관은 같아 보이지만, 
그 사정이 그와 정반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수행의 세계에서 
온갖 낙하산과 부당한 뒷구멍을 곳곳에 파놓고 
수행에 임하게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수행이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 같다면 
같이 학교에 들어갔으면 
똑같이 노력해서 공부하고 시험보고 
그리고 진학을 해도 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는 시험도 보지 않고 
그냥 쑥 다들 희망하는 학교에 합격해 다니고 
그런 경우가 있다면 
누구나 분노를 일으킬만하지 않은가. 

최근 문제되는 어떤 사건도 
그런 모습 때문에 대부분 분노를 일으키면서 
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알고보면 수행자 세계에서 
그런 각종 편법과 뒷구멍을 파서 
제공해주고 
곳곳에 원하는 곳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게 
해주는 분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문제인가. 

그런데 바로 이런 분들의 대표가 
곧 수행자들이 대단히 존중하고 
찬탄하는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이기도 한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이나 약사여래님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 
문수보살님 보현보살님 
이런 분들이 하나같이 
바로 그런 일들을 하시는 분들인 것이다. 

수행자의 세계를 일반인들의 현실세계로 놓고 본다면 
매 경우 비정상적이고 불합리다고 보는 내용을 
수행자에게 제공해주는 분들이 
바로 이분들인 것이다. 

원래는 수행자가 발심하고 수행을 하고 
최후 일생보처의 보살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3 무량 아승기겁 이런 기간에 걸쳐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인데 

그 기간을 대폭 단축시켜서 
곧바로 성취시켜주고자 하는 분이 
알고보면 아미타 부처님인 것이다. 

관세음보살님의 이력을 보면 
그 분 자체가 초지에서 8 지보살까지 곧바로 
단계를 뛰어 넘어 간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세계에서 
크게 문제될 만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 같이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수행하는 
수행자이고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수행을 시작했으면 
다 같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데 

도대체 어떤 편법을 동원했기에 
어떤 분은 곧바로 일생보처 보살이 되고 
어떤 분은 초지에서 곧바로 8 지 보살이 되고 
그러는가. 

더 나아가 
지옥에 마땅히 들어갈 만한 업을 행하여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고 
생노병사에 묶여 고통을 받을 만하므로 
생노병상의 고통을 받는 것이고 
소원이 성취되지 못할 만하니까 
그렇게 소원이 성취되지 못하여 
고통을 받는 것인데 

그런 분들이 왜 또 하나같이 
다른 수행자를 상대로 해서 
그 때마다 부정한 청탁을 받고 
매번 지옥에서 청탁인을 구출해내고 
병을 고쳐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고 그러는가. 

그리고 왜 생사 고통에 묶여 지내야 하는 중생을 
그렇게 바로 바로 풀어주고 
보리를 성취시켜주는가. 

그래서 알고보면 이런 내용들은 
세상에서 누구나 문제삼는 
지극한 부정과 비리의 현상이라고 
해햐 하지 않는가. 


이런 입장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러나 세속의 입장과 달리 
수행자의 세계에서는 
이런 상태를 성취시켜 주는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지극히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봉타래 수행자가 
수행자에게 봉 노릇을 해주시는 
부처님과 보살님에게 올라타 
쉽게 수행을 하려고 임하는 것도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세속에서 금지하는 선물법을 어기고 공양을 올리고 
대단한 부정과 비리가 일어나는 현장인 것 같은데 
그 극한의 상태를 
바로 무량수부처님이 수행자에게 제공해주는 
무량지혜 광명 이런 표현이 
상징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마지 못해 번개탄 공양 선택하게끔 몰려 있는 상황과 

반대로 생사의 묶임에 벗어나고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기본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수행자가 소신 공양을 올리는 상황과 

청정한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을 위해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과정과 

다시 이를 성취한 다음 
후배 수행자들을 위해서 
수행자들의 봉 노릇을 하는 가운데 
무량한 지혜 광명을 무상으로 제공해주시는 
부처님이나 대력 보살님의 상태는 
각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번개탄 공양과 소신 공양 그리고 무량한 지혜 광명이 
상징하는 것은 
현실에서 외관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보지만, 
그 실질적인 의미 차이가 대단히 큰 것이다. 

[...]

중생이 생사에 묶여 돌아다니게 되는 삼계 육도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표현하고 
각 중생이 존재를 문제삼는 내용을 6-6-6 의 
18계로 나누어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
이렇게 영역을 나누는데 

왜 수행자가 일정시점에서 
수행의 방향을 법계로 돌려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가. 

이런 것을 놓고 연구중인 것이다.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는 경우라면 
일정 교차로에서 핸들을 돌려 
TURN 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본인이 다라니도 외우고 
경전의 기본 게송도 외우려고 노력하는데 

매번 매 상황에서 그 내용을 떠올려 보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수많은 내용을 원하면 다 떠올릴 수 있고 
원하면 떠올리고자 하는 그런 내용을 떠올릴 수 있는데 
매 순간 그렇게 그 내용을 일부로 떠올리지 않고 
엉뚱하게 잘못된 내용만 붙잡고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원하는 게송 내용을 떠올려 내고 싶은데 
그런데 뜻과 같지 않게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꽃을 대하거나 바위를 대하거나 하면 
그것이 꽃이다 바위다 이렇게 생각하고 임하면 
그만이지 

왜 그 매 순간마다 
그 생각 대신 
게송이나 다라니나 경전 내용을 떠올려 내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사실은 
그런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놓고 
분별하는 영역은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들로 채워 놓고 
음미하려고 하는 취지에서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렇게 되면 
훨씬 낫다고 보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

같은 현실을 대하면서 
어떤 경우는 번개탄 공양을 올릴 수 밖에 없게 몰리는 가운데 묶여 버리고 
어떤 경우는 빛에서 무량한 지혜 광명을 얻고 청정한 보배가 가득한 것을 
보게 되는가. 

그런 차이는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일어나게 되는가는 
결국 앞에서 제시한 
법계와 관련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워 놓고 
연구를 진행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경전이나 책에서 대하는 내용은 
다 믿거나 말거나 부류에 속하는 
내용처럼 다 여겨지게 마련인데 
그 중에는 정말 
스스로 사실이 아니고 소설이라고 하면서 
제시하는 내용도 있는데 반해 
그와는 반대로 내용은 엉터리인데도 
그것을 제시하는 이나 대하는 이나 
하나같이 진지하게 사실이며 진리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결국 사정이 이렇게 복잡하기에 
어떤 내용이던 믿거나 말거나의 사항이 된다고 
보게 되지만 
불교 경전의 사정은 또 어떤가. 

불교경전은 그런데 
부처님 자신부터 그 내용이 
희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밝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 단순한 희론은 아니고 
현실에서 대하는 그 모든 내용이 
그처럼 실답지 않은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취지에서 
제시되는 그런 희론으로서 진리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


일반 현실에서 전도몽상에 바탕해 생사고통에 묶여서 번개탄 공양을 올리게 몰리는 상황과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인하고 회신멸지의 상태를 향해 소신공양을 올리는 상황과 

무량행문을 닦아 나아가며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과 같이 

수행자 자신이 수행을 통해 하나의 향이 되어 향공향을 올리는 상황들을 제시해보았는데 

그 끝에는 또 이를 성취해 

부처님이 후배 수행자의 성취를 위해 봉노릇을 하면서 무량한 수명과 지혜를 무상 제공해주는 

상태까지 함께 살펴보았다. 


그런데 청정한 니르바나를 얻고 
무량행문을 닦아 나갈 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면 
수행자가 아니라고 제시하는데 

왜 수행자에게 봉노릇을 하는 무량수부처님은 
또 왜 수행자에게 무량한 수명을 무상 제공하고 
무량한 지혜 광명을 제공해주는 것인가. 

[...]


본인은 몇년에 걸쳐서 같은 게송을 

외우는데도 번번히 외어지지 않아 

고민인데 


TV 등을 보다보면 

어떤 어린이는 그냥 척 보면 

줄줄줄 다 내용을 외우기도 하고 


외국어도 몇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또 한 몇초 

거리를 바라보는 가운데 

거리에 있는 간판과 전화번호를 다 외우고 

심지어 몇 주 지나서 또 물어봐도 

또 꺼내내는 모습도 보게 되고 


수십자리의 숫자를 

죽 늘어세워 놓고 

몇 초 보지 않고 

바로 그 답을 척척 적어내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안된다고 

다른 이도 다 자신처럼 잘 안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또 남들이 

놀라운 서커스 공연이나 

마술 공연이나 

최면 공연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거꾸로 서커스맨이 줄에서 떨어지면 그 때 놀라겠다거나 

마술쇼에서 동전이 비둘기가 되지 않으면 그것이 

놀라운 일이라거나 

최면쇼에서 저 사람이 과거전생에 자신이 개로 생활했음을 

알아내지 못하면 놀라운 일이라고 

평범하게 이를 대하고 바라보게 되지만, 


정작 자신이 그 가운데 하나라도 

잘 할 수 있는가를 놓고 살피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또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제도 달인 쇼를 하는 분을 

오래만에 다시 보았는데 

이 분이 세계 각 곳에 오지를 방문해서 

활약하는 데에는 

그만한 내공이 쌓여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보게 되는데 


그저 TV 에서 그렇게 보여주는 모습만 

보면서 

자신도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면 대단히 곤란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또 뜻을 갖고 

쉼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면 

성취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그 각 면을 다 같이 놓고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조금 성취했다고 까부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러나 또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업의 장애때문에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미리 체념하는 것도 지극히 곤란한 것이다. 


나중에 보면 현실에서 장애자라고 보고 

외면하는 이들이 

세상에서 놀랍다고 보는 놀라운 성취는 

다 하면서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게 되는 것이다. 


황제라면서도 

멀쩡한 상태로 아무에게도 인기가 별로 없어 

혼자 살아가는 mun 님이 있는가 하면 


손과 발이 없어도 

미인과 결혼해 아이를 잘 낳고 살아가는 "

닉 브이치치와 같은 이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한쪽 면으로 편견을 

갖고 대할 일은 아니고 

업의 장애가 자신의 성취를 방해해도 

꾸준히 수행 노력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




>>>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주제로 논의하는 가운데 

이런 해탈이 손쉬운 일이 아님을 

일상적으로 보게 된다. 


해탈을 가장 어렵게 하는 원인은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또는 꽃이나 바위라고 여길 때 

그런 내용이 그 현실에 정말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전도망상 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여기는 입장은 

누구일까. 


일반적으로는 현실에서 무언가를 놓고 

그것에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 당사자 자신이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이는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곰이 공 위에서 재주를 피울 때 

곰이 그런 상황에서 그 각각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게 된다면 


곰이 그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다고 볼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곰이 재주를 피울 때마다 수익을 거두는 조련사나 

그런 공연을 보고 즐거움을 얻는 관중이 

사실은 그로부터 피해를 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무언가 좋은 것을 놓고 집착을 가질 때 

그런 전도몽상에서 벗어나 

수행을 하라고 제시하면 


그 전도몽상에서 지내는 상태에 있는 이가 

가장 먼저 자신이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처럼 

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수행에서 가장 먼저 기본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어떤 이가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아끼면서 대할 때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베풀라고 하는 보시의 수행덕목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강조하면 

그런 보시를 하는 이가 

그로 인해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고 여기면서 

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이런 수행은 

자신을 기망해서 무언가 자신으로부터 

좋음을 빼앗아가기 위해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이 앞의 비유를 놓고 보면 

공 위에서 재주를 피우는 곰에게 

그런 행위를 하게 된 전도몽상에서 벗어나 수행을 하라고 하면 

곰이 가장 불쾌하게 여기고 

거부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그런 경우 곰 자신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본다고 

스스로 여기기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본인이 불어 노래에서 

엉뚱한 시감상을 해서 

자꾸 붙여 놓기에 

많은 지적을 받고 있다. 


혹세무민하고 

전도몽상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어 노래에서 

그런 내용이 본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에 

바로 이런 시감상이 

현실에서 사람들이 전도몽상을 일으키는 

과정을 오히려 쉽게 이해시킨다고 보게 된다. 


또 그런 시감상을 하면 재미도 있지 않은가. 



본인이 불어 노래 안에서 

불어가 왜 한국어와 유사한지에 대해 

메세지를 전하는 곡이 있다고 제시하고 


이것은 꿈에서 왜 이것이 꿈인가를 설명해주는 

꿈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제시했는데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은 

전도망상이 전개되는 현실 안에서 

이를 바탕으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을 현실 밖에서 따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상황은 마찬가지다. 


꿈의 비유를 든다면 

꿈 안에서 꿈이 꿈이어서 실답지 않음을 깨닫고 

꿈에 과도히 집착하지 않고 

임하기 위해 꿈안에서 수행을 만일 한다면 

이것이 현실의 수행과 비슷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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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의 묶임에서 중생을 탈옥을 시키려고 노력하다보면 

그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그것을 싫어하지만, 

또 이와 함께 그로 인해 더 손해를 본다고 보는 측에서

또 이를 상당히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본인은 본다. 


곰이 갇혀 있는 축사에서 

곰을 탈출시키려고 하면 

곰도 싫어하지만, 

더 싫어하는 것은 

축사에 곰을 가두어 놓고 있는 조련사가 

대단히 싫어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중생제도에 임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문제가 늘 있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수행자는 이런 경우 

조련사부터 탈옥시키는 것을 

그 방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조련사와 곰 그리고 관중까지 

동시에 다 좋고 좋은 상태로 이끌어서 

이를 통해 곰을 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런 방식을 

일반적으로 천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곰을 묶임에서 풀려나게 하기 위해 

조련사와 관중을 일정한 장소에 묶어 놓고 협박하거나 

감옥에 가두어 곰을 풀어주는 

일종의 해결사가 취하는 문제 해결방식과는 

다른 방식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하튼 처음 

곰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관중이나 조련사를 포함해 

심지어 곰 자신으로부터도 심한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기에 

상당히 수행자가 어려움에 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노래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그런 상태에서 

곰이나 조련사가 아끼는 공을 

더 던져주면 

그것을 놓고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며 

졸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복덕을 얻어도 그 정지단면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관하면서도 

그러나 수행은 오로지 그처럼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방안에 따라 

얻을 것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사정이 바로 그와 같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곰이나 조련사를 

그 묶임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하고 

니르바나를 얻게 해줄 수 있는데 


그러나 곧바로 니르바나를 제공하려고 하면 

그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더 공포스럽게 여기고 

이와는 반대로 전보다 더 많은 재주를 피우게 되고 

더 심하게 묶이는 것을 오히려 희망하면서 나아가게 되기에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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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내용은 

전도몽상 상태를 기준으로 

좁고 짧고 얕게 관하면 

그 자체가 당장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되는 일을 행하고 

그것을 불확실한 장래의 좋음을 얻기 위해 

감수하라고 제시하는 것처럼 여기게 되기 쉽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대하는 것 자체가 전도몽상의 증상이 

심각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수행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손해나 희생이나 부담이라고 보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수행을 통해서 무량한 복덕을 얻는 관계도 

비록 그런 수행이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제시하지만, 


그러나 이를 장삿꾼의 계산에 바탕해서 

무량한 복덕을 얻기 위해 그런 수단과 방편을 사용하라고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이 상황을 비유하면 

이는 어떤 쇼핑센터에서 샘플 음식을 제공하면서 

판촉활동을 하는 경우와 비슷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누구나 풍요롭게 살기를 원하는데 

그런 풍요를 얻는 방안으로 생각하게 되는 방안이 

댜앙하게 있다. 


대부분 쉽게 생각하는 방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을 긴 시간에 걸쳐서 씨를 뿌리고 물울 주고 해서 

생산해내는 것은 힘들다고 누구나 보고 


그보다는 그런 좋은 것이 보이면 

그것을 바로 취해 갖거나 

또는 몰래 훔치거나  하는 방안을 쉽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뒤의 방안을 사용한 이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나중에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연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훔치되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방안을 

지혜를 써서 찾아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즉 이번에는 자신이 실수해서 잡혀 감옥에 

들어왔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잡하지 않아야 겠다. 

이런 생각에서 

그것을 얻되 잡히지 않게 될 방안을 

연구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좀 더 교묘한 절도나 강도 행위를 

고안하기 위해 감옥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훈련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와는 반대되는 방안으로 

쇼핑센터의 사장이나 회장은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좋다고 보는 것을 샘플로 만들어 

마구 뿌리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손해인데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 


사실 그것만 보면 손해인데 

그러나 그런 샘플을 뿌려대는 이는 

대부분 그렇게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행위하는 사업가가 

큰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많이 보는 것이다. 


보시를 하면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는 관계는 

사실 위 두 방안 가운데 

뒤 방안의 인과관계를 단순하게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이해인 것이다. 


앞에서 샘플 맛보기 상품을 제공하는 행위는 

장삿꾼의 입장에서는 

보시가 아니고 선전 판촉행위의 하나인 것뿐이다. 


그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상품가격에 포함된 것이기도 하고 

결국 최종 상품 구매를 하게 만들기 위한 

미끼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샘플을 무료로 제공하는 행위만 놓고 

보면 

장삿꾼의 마음은 

이를 통해 장차 무언가 수익을 얻어내려는 

계산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에서 강조하는 보시는 

이와 성격이 다른 것이다. 


또 경전에서 반복해 주의를 덧붙이는 내용도 

이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수행을 하면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수행을 함에 있어서 

그 수행으로 그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하여 

장삿꾼의 마음과 계산을 행해 

그런 수행을 하면 

곤란하다. 

단순히 곤란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마음 

즉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음(유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하면 그로 인해 

더 빨리 지옥에 입소하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런 사정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쉽게 생각하면 흥보가 순수한 마음에서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면 

그로 인해 복을 받지만, 


놀보가 이 관계를 지켜보고 

일부로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주면 그로 인해 화를 받는다는 

동화의 이야기가 이와 관련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은 

복덕과 지혜를 얻는 내용을 또 하는 것이지 

아무 것이나 다 해도 무방하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하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수행을 할 때 

그런 것을 얻기 위하여 

장삿꾼의 마음으로 계산하고 분별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을 결과에 집착하는 가운데 

수행을 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즉, 수행을 통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지도 않는데 

그런 수행을 굳이 하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원인행이 되는 

내용을 하는 것이 곧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도 이 관계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하는데 

정작 그런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그런 수행으로 얻을 결과에 집착하면서 

수행을 하면 오히려 안 된다고 하니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니겠는가. 


prince 님과 같은 입장에서는 

만일 뒤와 같이 그런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런 수행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나 앞과 같이 그런 결과를 얻게 되기에 

그런 수행을 한다면 

결국 장삿꾼의 마음으로 계산하고 

수행을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목적이라면 

그냥 곧바로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하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금강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보시에는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나 그 물건이나 

보시라는 행위도 모두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사정이 그렇기에 

상에 머물거나 상을 취하지 말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그런 수행을 해야 하고 


또 그런 수행을 하면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을 얻게 된다. 

이렇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수행을 한다거나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수행을 한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극락세계를 만든 아미타부처님이나 

하늘의 주인 입장이라면 

장삿꾼처럼 그런 계산을 통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에게 

입국 비자를 발부해주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부처님이나 하늘의 왕이나 주인 입장에서 

상대가 갖는 장삿꾼의 마음이나 계산을 

잘 모른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그런 입장에서 왜 그런 장삿꾼을 

받아들이겠는가. 


장삿꾼이 입장을 거꾸로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그 자신은 또 그렇게 그런 장삿꾼을 대하겠는가. 


그래서 

상대가 한 만원 지불하고 

하늘이나 극락세계를 모두 

자신의 것처럼 마음껏 다 사용하기를 희망하면 

자신은 들어주겠는가.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수행도 하지 않는 경우를  

환영하며 받아들여줄 것인가. 


그것은 또 더더욱 그렇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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