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ril Mokaiesh - Le Cri Des Essoufles Dave - Laisse-Moi T'a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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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sfed--잡아함경_K0650_T0099.txt ☞잡아함경 제38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요즘 경전 코너를 거의 살피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단 다음과 같은 연구실 수칙을 정해보았다.
- 책상 의자에 꼭 필요한 경우 외로는 5 분 이상 연속해 앉지 않는다. - 계속 서서 입력작업해도 나중에는 발이 아프게 되는데 연구실 내에서도 지팡이, 부목을 사용해 서서 입력작업 등을 한다. - 어느 정도 작업을 하고 나면 쉬면서 흡연을 하고픈 마음이 생기는데 흡연을 하려면 무조건 먼저 계단 오르내리기를 65 회 정도를 하고 난 후 흡연을 한다. 쉴 때 되도록 운동만 하고 마치는 방안으로 휴식 방안을 점차 바꿔 나간다.
대강 이런 방안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기간을 연장시킨다면,
이 기간에 연구작업을 통해서 중학생 졸업생 수준을 기준으로 해서 각 경전 부분을 처음 대할 때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일일단상코너를 통해서 쉽게 이해하고 수행으로 진입할 수 있게끔 전 경전 부분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 다음 경률논 코너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에서 조금 더 심도가 깊은 경전 공부가 진행될 수 있도록 각 주제별로 논의를 해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 본 페이지에서도 집착을 제거하는 수행과 사칙연산 이런 제목으로 긴 글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해당 경전부분과 직접 관련성을 찾기가 조금 어렵다.
이것은 그래서 본 조각글 코너로 모두 옮겨 놓기로 했다.
글을 쓰고 나서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것 같은데 각 부분마다 핵심 키워드를 뽑아 소제목을 붙이고 조금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는 과정에서 조금 시간이 많이 걸린다.
벌써 1 주일째 이 부분에 머물러 있는데 건강도 건강이지만, 작업을 오래 반복하다보니 각 부분이 특성이 없이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건강을 회복하는 연구 수칙도 새로 도입하고 각 페이지 체계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여기는 잡담을 비롯해 소재가 제한이 없다. 그런데 경률논 코너에서의 조각글은 니르바나 행복론을 또 서술해가기로 했다.
문제는 이것을 다 함께 잘 해나가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이다.
◈Lab value 불기2563/03/23/토/08:28
● 집착을 제거하는 수행과 4칙연산문제
집착을 제거할 필요성에 대해서 살폈다.
우선 집착을 제거하고 현실에 임해야 할 사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었다.
- 집착은 고통을 얻게 되는 원인이다.
- 집착에 바탕해 행하면 그에 따라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된다.
- 더욱이 집착은 뜻하는 바를 잘 성취하게도 하지 못한다.
- 집착을 갖고 성취를 한다해도
그것은 가치가 대단히 큰 것에 대해 눈을 가려 얻지 못하게 하면서
가치가 대단히 적은 것을 얻게 하는 것뿐이다.
- 더욱이 집착을 갖는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또 그것은 무상하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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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수행의 방향
여기서는 현실 상황에서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수행은 어떤 방향으로 행하여 나가게 되는가를
가치와 관련한 4 칙연산의 방법을 통해서 살피고자 한다.
집착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살폈는데 이 각각의 내용에 대한 반대 뱡향으로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 집착은 고통을 얻게 되는 원인이다. >> 집착을 해야 그 내용에 대해 즐거움을 얻게 된다.
- 집착에 바탕해 행하면 그에 따라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된다. >> 집착을 해야 그것을 성취하게 되고 즐거움을 얻는다.
- 더욱이 집착은 뜻하는 바를 잘 성취하게도 하지 못한다. >> 집착을 하고 간절히 희망을 그려나가야 그 뜻을 성취할 수 있다.
- 집착을 갖고 성취를 한다해도 그것은 가치가 대단히 큰 것에 대해 눈을 가려 얻지 못하게 하면서
가치가 대단히 적은 것을 얻게 하는 것이다. >> 가치가 크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해야 가치가 큰 것을 얻는다.
- 더욱이 집착을 갖는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또 그것은 무상하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 현실은 대단히 생생하게 반복해 얻어지고 자신뿐 아니라 영희 철수를 비롯한 다수가 함께 얻고
수천년전이나 수천년후에도 무량하게 반복하여 매우 다양하게 얻는 내용들로서 대단히 실다운 것이고
그것은 오래 지속되어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이론상 앞 내용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현실에서 여전히 망집을 갖게 하는 사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시 '그러나' 라는 접속어를 붙여
현실에서 일정하게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입장들이 또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입장이기도 하고
또 마파순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결국 망상분별=>집착=>집착에 바탕한 업 => 3 악도의 생사고통
이렇게 이어지는 관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들 내용에 대해 그것이 정말 그처럼 분별하고 대할만한 실다운 내용인가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따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위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현실에서 어떻게 임해야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을
현실에서 가치와 관련한 4 칙연산의 방법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행하는 수행이란 간단히 말하면 일반적으로 좋고 나쁨에 대해 집착을 가진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행하게 마련인 반응자세를 중단하고 매 경우 그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는가를 여기서는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 하나의 현실에 대한 경전과 일반적입장의 차이
여하튼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현실을 놓고 각기 취하는 입장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르다.
○ 공통적인 측면
그런데 수행자 역시 일반적인 입장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분별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재료 자체를 감각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본 바탕에서
각 주체가 현실에서 일정한 재료 자체를 엇비슷하게 얻고
그에 대해 감각하고, 느끼고, 분별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좋고 나쁨을 얻는 것 자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갈증이 날 때 시원한 물을 마시면 대부분 시원하다고 여기고
또 갈증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갈증이 나는 상태보다 갈증이 사라지는 상태가 좋다.
그런데 현실에서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본 바탕이 공하다고 관하는 수행자 입장이라고 해서 이런 내용 등이 일반인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대부분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내용(-)를 지금 당장 겪어야 하는 상황
또는 그런 고통을 장차 겪게 되리라 예상하고 두려움을 갖게 되는 상황
또는 즐거움이나 좋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내용(+)를
바라지만 그것이 뜻과 같이 성취되지 않아 갈증을 일으키는 상황
또는 그런 좋음이 성취되지 않으리라고 여겨지거나
또 이미 성취된 어떤 좋음이 점점 사라져가는 가운데
그것이 모두 없어질 것을 걱정하거나 절망을 갖게 되는 상황
그리고 그런 좋음이 사라져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된다.
문제는 이처럼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하는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관하고 대하고 또 어떤 자세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좋고 좋음을 얻어내려 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수행자의 입장이던 일반인의 입장이던
생사현실에 임하는 이상, 이미 생사현실에 묶인 상태에서 현실을 대하는 것은 차이가 없다.
수행자는 그런 상태에서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려고 수행을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 입장
엇비슷한 현실을 놓고 어떤 사정으로 각 입장이 서로 달라지는가하면
같은 현실 내용을 놓고
그 내용의 정체를 넓고 길고 깊은 관찰을 통해 실상을 꿰뚫어 관하고 대하는가
아니면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통해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지금 당장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그 측면만 붙잡고
그것을 피상적으로 대하는가에 따라
그 입장이 달라지는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본 바탕과 각기 현실에서 얻는 재료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정체나 본질에 대한 판단 자체가 다르고 그에 따라 취하는 자세가 다른 것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넓고 길고 깊게 광장심관찰을 통해서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현실을 대할 때는
경전에서 제시된 것처럼 그런 현실에 그런 것 자체나 그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관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떠 대하게 되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것은 외부세계나 외부 대상도 아니고 마음과 떨어져 있고 마음과는 별개인 외부의 물질도 아니고 외부의 객관적 실재도 아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도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신이나 영희 철수가 아니고 자신이나 영희 철수 등이 이번 생에 임시적으로 잠시 걸치는 옷과 같은 것이다. 무한히 이어지는 삶에서 각 생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형태의 생명형태로] 살아가게 되는가가 생사고통의 문제나 수행과정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자신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관하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을 갖고 현실에 임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다.
○ 일반적인 입장과 수행자가 생사현실을 고려하게 되는 사정
생사현실은 그 성격이 침대에 누어 자면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그 성격이 같아서 꿈과 같다고 제시한다.
즉, 생사현실은 그런 내용을 다른 영역들에서 얻을 수 없고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얻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 꿈처럼 그 성격이 실답지 않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비유하면 꿈과 같고, 환사가 일으키는 환술과도 같고 요즘 상황을 놓고 비유하면 게임기나 만화 영화 속의 내용과도 그 성격이 같다. 그 각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단지 각 영역에서 일정한 조건에서 얻는 내용이기에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생사현실은 정작 꿈과 같을 뿐 꿈은 아닌 것이다. 즉, 생사현실은 수많은 사람이나 각 주체가 그런 상황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대단히 반복해 얻는 한편 그런 사정은 수천년 전이나 수천년 후까지도 반복하는 가운데 무량겁을 나아가게 되고 또 그 내용도 대단히 다양한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내용을 얻고 명료하게 분별하며 대하게 된다. 이런 점이 현실이 꿈과는 다른 점이다.
물론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생사현실이 정말 실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입장도 있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런 입장이 대부분이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사정으로 생사현실을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켜 대하게끔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감각과 분별과정을 통해 얻는 현실 내용을 그대로 삶의 기본 바탕으로 삼고 이를 대하게 된다.
그리고 수행자도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비록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생사현실 안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겪게 되는 생사고통을 외면하고 무시하며 방관하고 지나칠 수가 없게 된다.
즉, 그냥 그대로 방치하면 무수한 중생들이 무량겁에 걸쳐서 그런 형태로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어 나간다.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어중간하다.
● 생사현실에 대한 각기 다른 대처방안의 문제
생사현실에서 당장 극심하게 겪게 되는 생사고통의 상황이 곧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에 경전에서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적용해보자.
예를 들어 경전에서는 현실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서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사정이 그렇기에 이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 자체가 문제가 된다거나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거나 하는 요청 자체가 제기되지 않고 성립되지도 않는다.
햔편 생사현실 영역에서도 만일 어떤 수행자가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대로 이 현실의 일체가 본 바탕이 공하고 그리고 자신이 분별하는 내용 일체가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 영역에 본래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런 상태로 현실 일체를 그 측면으로 100%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생사현실에서 만나는 생사고통 일체는 이론상 문제될 리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정말 현실의 본 사정이 그렇고 수행자가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이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해서도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수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다.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를 실답게 여기고 대하게 되는 사정을 앞에서 대략적으로 살폈는데 마찬가지로 경전에서 비록 이런 현실 내용을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 사정 때문에 그런 원칙적인 내용을 100% 받아들이고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에서 평안히 임할 수 있는 수행자가 오히려 대단히 희박하다. 이는 현실에서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손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쇠톱으로 자른다. 또는 도끼를 사용해 자른다. 이런다고 가정할 때 그 상황이 꿈처럼 실답지 않기에 그 상황에서 평안히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금강경 등에서는 억울한 사정으로 왕에 체포되어서 눈을 뽑히고 코나 사지를 절단하는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상을 일으키지 않고 따라서 분노도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고 안인을 성취했다는 내용이 제시되지만, 문제는 현실의 수행자 가운데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임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희박하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을 놓고 경전 내용을 100% 받아들여서 대하는 입장과 일반적으로 생사현실 자체가 곧 생생하고 실다운 내용이라고 받아들이면서 경전 내용을 0% 받아들이는 입장 사이에서 어중간한 상태로 수행자가 현실에 임해 수행을 행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만큼 생사현실이 그런 특성을 갖기에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즉 실답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주체에게 엇비슷한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 매순간 대단히 생생한 형태로 반복해 생사현실을 대하게 되기에 이를 실답게 여기고 대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런 일반적인 입장에서 수행을 처음 시작하게 되기에 경전에서 제시하는 방안도 각 단계별로 조금씩 다르게 된다는 사정도 있다.
불교내에는 기본적인 근본 불교의 입장과 대승의 입장이 있는데 이런 차이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된다.
이 사정을 여기서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본 바탕인 실재를 바탕으로 해서 각 주체가 현실에서 감각현실이나 관념 분별의 형태로 각 영역에서 얻게 되는 각 내용들의 관계는 비유하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처럼 사실은 엉뚱하다. 이는 어떤 주체가 각 영역에서 각 내용을 생생하게 얻더라도 그것들은 마치 침대와 그 침대에 누어 꾼 황금이나 바다꿈의 관계처럼 다른 영역에서는 얻지 못하는 엉뚱한 내용을 그렇게 얻는 것이고 따라서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나타내는 비유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고 이에 바탕해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면 거의 대부분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집을 일으키고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정 때문에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 자체를 아예 처음부터 갖지 않도록 그 근본을 모두 제거하고 본 바탕의 영역만 남겨 놓는 상태를 우선 기본적인 수행 목표상태로 설정하게 된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때문이라고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꿈을 생생하게 꾸더라도,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누구나 이해한다. 그런데 만일 사정이 이와 달라서 어떤 이들이 꿈만 꾸면 거의 예외없이 그 꿈을 실답게 여기고 임하는 가운데 문제상황에 빠지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실답지 않은 꿈을 반드시 꾸어야 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있다면 처음부터 아예 꿈 자체를 꾸지 않고 임하도록 하는 방안을 먼저 취하는 것과 같다.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이후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현실도 사정이 위와 같다.
본래 그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그 재료 자체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각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이들 재료를 얻고 난 후에는 거의 대부분 이에 관련해 망집을 일으켜서 이후 그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 문제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실답지 않은 가운데 이런 망집과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이런 재료 자체를 처음부터 얻지 않는 상태를 일단 수행목표로 설정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 수행에서 기초적인 입장에서는 일단 그 주체가 더 이상 업의 장애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지 않도록 쌓여진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제거하는 기본 수행을 하고 그 이후 이런 망집을 또 다시 일으킬 근본 바탕을 아예 제거하여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로 열반 해탈 상태에 드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게 된다.
그러면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본래 생사고통 문제 자체를 제기할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하는 실재를 본 바탕으로 하여 더 이상 생사고통을 일으킬 재료 자체를 얻지 않는 상태가 되어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다.
이를 앞의 꿈의 비유를 통해 이해한다면 꿈만 꾸면 그 주체가 그 꿈안에서 문제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그처럼 실답지 않고 문제만 일으키는 꿈은 앞으로 일체 꾸지 않도록 꿈을 꾸게 되는 근본 조건을 아예 제거하고 그 나머지만 남겨 둔다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또 꿈 안에서는 그런 존재는 일체 존재 자체가 파악되지 않는 상태로 되는 것이기도 하다. [灰身滅智]
그런데 이런 내용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면서도 대승에서는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중생을 제도해나가야 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 사정은 무엇때문인가.
앞과 같이 수행을 하면 우선 원칙적으로 그런 수행을 하는 잘 성취하는 수행자 개인은 그런 생사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한 수행자가 위와 같은 수행을 통해서 열반에 들면 그 수행자 자신은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이후 더 이상 문제가 없게 된다. 또 그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처음부터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의 되는 측면만 붙잡고 대하면 그 입장에서는 생사현실은 일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데 그런 본 바탕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런 수행자가 처했던 상황처럼 본 바탕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 망집을 일으킨 다른 중생들은 그런 전제에서 여전히 무량한 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상태로 남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처음 수행자가 생사고통을 벗어난 것처럼 원칙적으로 수행에 정진해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온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생사고통을 벗어난다고 할 때 그 자신을 놓고 보면 생사고통의 문제가 일체 해결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 외 무량한 중생들은 여전히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여전히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방치된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또 이런 경우, 그런 중생들이 스스로 각기 알아서 원칙적인 수행방안을 통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오는 것은 무량겁에 걸쳐서 기대하기가 힘들다는 문제가 있게 된다.
이런 상황을 비유로 이해해본다면, 어떤 삶의 문제가 어떤 암벽으로 된 산을 올라가 넘어서야 그 상태에서 해결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런 경우 어떤 이는 맨손으로 암벽을 수직으로 등반해 올라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나머지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제각각 알아서 그 암벽으로 된 산을 맨손으로 수직등반해 올라가 넘어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방치하면 무량겁에 걸쳐서 그렇게 하는 이가 거의 없게 된다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와 같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수행자가 자비심을 바탕으로 다른 중생들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아나게끔 하고자 하는 취지로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 안으로 다시 직접 들어가 망집을 일으킨 중생들에 눈높이와 수준을 맞춘 가운데 그런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벗어나올 수 있게끔 할 다양한 방편을 시설해 만들어내서 이를 통해 끝내 중생들이 수행에 진입하게끔 하고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끝내 벗어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 다시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런 노력을 수행자들이 생사현실에서 들어가 수행해 성취할 것이 다시 요구되고 그래서 그에 관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결국 대승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처음 맨손으로 암벽을 수직으로 올라가 벗어난 이는 그 자신은 그렇게 벗어나왔지만, 남아 있는 일반적인 입장을 놓고 보니 그렇게 해서는 무량겁에 걸쳐 스스로 벗어나올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보기에 다시 산을 내려가서 구불구불 산을 빙빙돌아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산길도 만들고 또 어떤 구간은 돌을 쌓아 계단도 만들고 또 때로는 위험한 능선 구간에는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도 시설해 만들고 또 곳곳에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휴식시설도 만들고 또 벼랑에는 잔도를 붙여 시설해 걸어갈 수도 있게 하고 나중에는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만들고 엘리베이터 시설도 만들고 해서 다양하게 일반인들이 각기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서 산에 오를 수 있게 노력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는 의미다.
그래서 각 주체가 이런 여러 방안을 통해 산에 올라가서 넘어가면 그 상태에서는 망집상태에서 있다고 여기고 대한 그런 생사 고통 일체가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고 보지만, 정작 그렇지 못한 상태는 본 상태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망집에 바탕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생생하게 반복해 겪게 되고 또 거의 대부분 무량겁에 걸쳐 그 상태를 스스로 벗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점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하게 될 때는 한편으로는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이나 생멸 자체를 얻을 수 없다는 측면 즉 경전에서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100% 측면을 잘 이해하는 한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런 경전의 원칙적인 입장을 거의 0%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망집에 바탕해 생사현실을 대하고 업을 행해나간다는 이 두 측면 사이에 놓여 수행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연꽃이 더러운 연못에 몸을 담근 가운데 물들지 않고 연꽃을 피워낸다는 비유가 상징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원래 생사고통의 상황에서 수행을 하여 해탈문을 통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면 그 주체는 니르바나 해탈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데 그러나 여전히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시 그 해탈문을 거꾸로 하여 생사생멸문안으로 들어와 생사현실에 임하여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게 되면 이 두 측면의 내용이 어중간하게 겹쳐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각 경우마다 구체적으로 조금씩 상황이 다른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극단적으로 보면 생사현실에서 문제되는 온갖 생사고통의 문제를 오로지 100%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측면만을 가지고 대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또 반대로 수행자 자신부터도 그런 본 바탕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일반적인 입장과 거의 차이 없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0 % 정도 받아들인 상태에서 점차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고 수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그런 노력도 하는 한편, 다른 중생도 그렇게 되도록 함께 이끄려고 노력을 병행해가는 경우도 또 있다.
또는 아예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0%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일반적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생사 현실에 임하는 경우가 제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현실단면에서 이 각 경우마다 어떻게 이 문제를 대하게 되는가를 한편 살피고 그 가운데 어떤 방안이 가장 나은가를 또 살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찾는다면 한편으로 사실과 가치에 대해 가장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 또 한편, 3계 6 도 안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제각각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 모두 맞추어 이들을 다 제도할 수 있는 수많은 방편지혜를 모두 다 잘 갖추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한 가운데 중생을 잘 제도해내는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결국은 생사현실안에서 성불한 부처님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수행자는 끝내 이런 이상적인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 수행을 해나가는 다양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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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현실에 임한 가운데 그런 수행을 집착을 갖지 않고 수행에 임해야 할 사정은
물론 엄격한 진리에 관련한 사실판단과 가치의 크기가 문제되는 내용들을 저울에 올려 놓고 가치를 비교하는 가치판단을 넓고 길고 깊은 관찰을 통해서 행하면 결국 경전의 내용이 옳기에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다해도 여전히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런 생사현실 내용을 대단히 반복해서 무량하게 얻어나가므로 오히려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을 실답다고 망집을 일으켜 반응해가면서 문제 상황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는 한편 바로 그런 현실 사정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현실 일체를 실답다고 보는 가운데 생활을 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도대체 이런 일반인의 입장이 무엇이 문제이길레 이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입장에서 올바른 진리나 가치에 대한 판단을 잘못 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판단이기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그 대강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비유하면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본 바탕의 실재를 놓고 살필 때 본 바탕의 내용 - ...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는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처럼 다른 영역에서 얻는 내용과 엉뚱한 관계다.
이들은 마치 침대에 누어서 생생하게 꾼 바다나 황금꿈이 침대와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분별을 일으키면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모두 그처럼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 밀어 넣고 이해하려 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이 분별한 내용들이 실답다고 여기는 것이 우선 문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과를 손으로 집어 눈으로 보고 사과를 두드리며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사과 냄새를 맡고 입으로 사과 맛을 보고 손으로 사과의 촉감을 얻는다고 할 때도 이들 각각의 내용들이 갖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본 내용은 귀로 듣는 영역에서 얻을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와 같지만, 이런 내용을 반복해 얻는 가운데 각 주체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과는 그런 내용을 원래 그 구성성분으로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내용들이 다 함께 실답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집어서 옆에 있는 철수나 영희에게 건네면
그것을 철수나 영희가 받아서 역시 마찬가지로 사과라고 여기면서 현실에서 생활하기에 자신이 대하는 사과는 곧 외부 세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고, 자신의 손이 사과에 닿으면 촉감을 반복해 느끼고 또 영희나 철수도 그런 사과에 손을 닿으면 촉감을 느낀다고 보고하기에 자신이 대하는 그런 감각현실이 마치 자신이나 영희 철수의 외부에 있는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감관이나 영희 철수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또한 각 주체의 마음 밖에 따로 있는 외부물질이고 자신과 영희나 철수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인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또 한편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그 부분을 매번 반복해 대하게 되고 자신이 어딘가를 가고자 움직이려 하면 그 부분이 따라 움직인다는 경험 때문에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임하게끔 된다. 또 그런 상황에서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영희 철수 등 타인과 타인의 것 등이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보는 가운데
다시 그 생멸이나 생사도 그처럼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판단 자체가 사실과 어긋나는 잘못된 판단이기에 우선 문제다.
이들은 알고보면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마음안 내용이다.
사과를 영희나 철수와 함께 자신이 보고 만진다고 할 때 보게 된 모습과 만져 얻는 촉감 등은 하나같이 자신이 눈을 뜨거나 만져서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이지, 외부세계의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도 그렇게 얻어진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서 얻은 것이 아니다.
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나 영희나 철수라고 보는 부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희나 철수도 자신이 눈을 떠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그런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 무엇을 보거나 만지는 것도 아니다.
또 영희나 철수가 사과를 건네받는 상황도 자신의 마음안 내용을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고 영희나 철수도 그런 마음 내용을 건네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자신이나 영희 철수가 그런 내용을 그렇게 보고 그렇게 여기게 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모든 생활이 앞과 같은 잘못된 판단을 기초로 행해지고 있기에 수많은 잘못된 판단이 이로부터 증폭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는 그 부분이 삶에서 가장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뜨면 얻게 되는 그 내용 일체는 자신이 눈과 관계되는 정신 부분에 맺혀지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서 멀리 산도 보고 도시모습도 보고 거리도 본다면 그것은 비유하면 하나의 그릇과 같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잠시 들어온 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 마음은 마치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이 눈을 뜨고 보는 순간에도 볼 수 없고 또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비유하면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처럼 일단 비유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비유하면 이런 내용들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을 차라리 실질적인 자신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도 알고보면 자신의 정신 가운데 눈과 관련해서 얻는 감각현실을 담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마음과 함께 귀, 코, 입, 몸과 관련한 마음 및 이런 감각과 분별을 행하지 않는 경우에도 일정하게 활동하는 마음을 비롯해 이런 마음들을 파생 분화시킨 근본 정신을 '차라리' 실질적인 자신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인 형태로 이런 정신 안에 담겨진 내용 가운데 일부분 즉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을 거꾸로 자신이라고 붙잡고 매 순간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거꾸로 뒤집혀져 전도된 잘못된 현실 판단의 하나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얻어내는 자신의 정신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현실에서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그 부분은 그 생에서 그런 정신이 얹혀져 잠시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을 눈이나 귀, 등등의 감관이 상대해 얻어낸 내용이라고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정신이 관계하지 않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와 이들 각 정신이 얻는 내용들의 관계는 비유하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처럼 사실은 엉뚱하다. 어떤 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이 아무리 생생하고 엇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내용을 다수가 반복해 얻는다해도 그것을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사정은 그 관계와 위와 같기 때문이다.
여하튼 기존에 반복해 살핀 것처럼 현실 일체에 대해 기본적인 진리나 가치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에서 판단하면서 생을 출발하고 생을 마치는 상태이기에 이것이 삶 전체의 내용을 거꾸로 뒤집힌 상태로 임하게 만들게 된다.
결국 현실에서 티끌과 같은 부분을 붙잡고 평생 집착하며 임하면서 업을 행하는 가운데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장구하게 묶여 지내게 되는 근본 사정이 위와 같다.
그래서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일으키는 망상분별을 먼저 잘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위와 같은 판단이 진리 및 가치 전반에 대한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진 잘못된 판단이라고 해도 이것이 정말 심각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은 따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각 주체가 행하는 판단이 완전히 엉터리라고 해도 그런 판단을 행하는 주체가 살아가는 동안 그런 판단을 통해서 어떤 고통을 전혀 겪지 않는다면 그 판단이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것을 문제삼을 필요는 그다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2 더하기 2 는 4 라는 것도 모르고 5 라고도 하고 대변을 자신의 장난감으로 알고 만지고 논다고 해도 그로 인해 그 아이가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고 가정하면 문제삼을 필요가 그다지 없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행하는 분별이 망상분별이어서 그것이 대단히 잘못되어 거꾸로 뒤집혀진 진리 및 가치판단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희희낙락하게 잘 지내는 상황에서는 정작 그 망집도 일단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러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사정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거꾸로 뒤집혀진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그 망상분별이 거꾸로 뒤집혀진 잘못된 판단인 것도 문제지만,
그런 판단에 바탕해서 가치판단을 행하고 소원을 일으켜 업을 행하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 그로 인해 대단히 극심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되기에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망집을 일으키지만, 희희낙락하며 지내는 가운데 그로 인해 당장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런 망집도 별 문제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마치 현실에서 사실이 아닌 환상적인 영화나 연극 소설 만화를 보고 꾸며낸 엉터리 이야기로 즐거움을 느끼고 시간을 보낸다고 할 때 비록 그 영화나 연극 소설 만화 등이 엉터리라고 해도 문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경우 그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그 생사고통이 발생하게 된 근본 배경을 살피게 되면 하나같이 그 근본 원인이 바로 이 망집에 바탕하고 있기에 이 망집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망집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그 과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엉뚱한 부분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대하고 또 그에 바탕해 엉뚱한 내용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대하고 또 나쁜 것이라고 여기고 대하면서 집착을 일으키게 된다.
쉽게 말해서 현실에서 책상에 있는 지우개가 하나 떨어지거나 없어진다고 해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대부분 본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 지우개가 대단히 소중한 것이라고 여기고 대하면 그것이 굴러 떨어지거나 없어지면 큰 문제라고 여기면서 임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누구나 수많은 것에 집착을 갖고 대하는데 이 모든 집착은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근본이 되어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판단이 잘못된 엉터리라는 점이 문제다.
그런 가운데 앞과 같은 사례에서 책상 위의 지우개 하나를 누가 칼로 자르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고 임하지만, 자신의 팔을 붙잡고 톱으로 자르려고 하면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따라 도저히 할 수 밖에 없다고 보게 되는 반응을 매 순간 행해나가게 마련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상식적인 일이다.
그래서 그런 망집 상태에서는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좋고 나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응과 자세를 취하기 마련이다.
1- 즉 자신이 무언가 집착하여 무언가를 대단히 좋다고 여기게 되면
우선 그 주체는 그런 좋음(+)을 아끼고 다른 생명에게 그것을 베풀지 않게끔 된다.
2 - 또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 예를 들어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명예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게 된다.
3- 또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의 좋음 예를 들어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명예 등이 다른 주체에 의해 침해를 받고 나쁨(-)을 얻게 되면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그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갖고
상대를 용서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그 상대에게 보복하여 해치려고 하게 된다.
4- 그리고 또 한편 자신의 이해관계가 직접 관련되지 않으면 다른 이의 억울한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방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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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에 바탕해 이처럼 한 주체가 취하는 반응 자세는 물론 그 주체 입장에서는 자신이 집착을 갖는 좋음을 많이 얻어 유지하고 자신의 뜻을 잘 이루게 되는 방안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그렇게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반응 자세는 그 주체가 처음 망집을 일으킨 후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바탕으로 할 때
자신이 갖는 소원과 집착하는 내용을 위해서 매순간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이 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각 주체는 매 순간 그런 자세로 매 순간 선택하고 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망집에 바탕해서 위와 같은 자세로 업을 행하게 되면 그런 집착을 통해 얻고자 한 좋음도 끝내 잘 성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그렇게 되는 사정은
어떤 주체가 욕계 내에서 일으킨 망집상태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 바탕에서 어떤 소원을 일으키고 추구하는 일체의 활동이 단순하게 그 주체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런 형태로 업을 행하며 욕계 현실에 임하는 다수 주체 사이에서 서로간에 업의 장애를 일으키는 형태가 되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한 주체가 배가 고파서 닭을 잡아 먹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현실 장면은 하나다.
그런데 닭을 잡아 먹는 자신이 이 현실을 이해하는 측면과
잡아 먹히는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측면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무언가 좋음을 집착하여 그를 열심히 추구하며 업을 행해 나가는 것이 욕계내에서 임하는 각 주체 서로 간에 가해와 피해의 관계로 얽히게 만들고
자신의 뜻대로 최종적으로 좋음을 가져다 주지는 않고 오히려 자신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자신을 묶는 업의 장애가 된다.
그래서 그 인과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간단히 보면 좁게 자신이 입장에서 짧게 지금 당장 그리고 얕게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그 측면에서 좋다고 본 내용은
넓게 보아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모두 좋다고 볼 내용도 아니고 길게 보아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량하게 좋음을 주는 내용도 아니고 깊게 보아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좋다고 볼 내용이 아니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집착한 가운데 좁고 짧고 얕게 협단천 관찰 방식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은 넓고 길고 깊게 그리고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살필 때는 좋고 좋은 내용을 주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 주체가 대단히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이 관계를
망집 번뇌 => 업 => 3 악도의 생사고통 [혹-업-고]의 관계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고 경전에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각 주체는
위와 같은 관계로 그런 상태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그런 사태를 예방하려면, 미리 이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만드는 가장 근본이 되는 망집부분부터
미리 잘 제거해야 한다.
집착을 제거할 때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집착을 갖던 것들에서 어떤 물건이나 가치가 적다고 보게 되는 것들은 그에 집착하게 되면 대단히 가치가 적은 것이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그로 인해 대단히 가치가 큰 것을 대신 잃어 버리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하면 이를 통해 그런 집착을 일반적으로 잘 제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팔을 하나 끊어 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 물건을 하나 거리에 버릴 것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시하면 대부분 물건에 대한 집착은 잘 제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집착을 갖지 않고 버려야 한다는 부분이 평소 자신이라고 본 부분이거나, 자신의 생명 신체 이런 부분이 되면 상당히 어렵게 된다.
그러나 평소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것들이 알고보면 자신의 마음에 잠시 들어와 있는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생사과정을 통해서 실질적인 자신으로 볼 부분은 오히려 매 순간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면서 생사과정에서 계속 이어져 나가는 근본 정신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한 바탕에서 그런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무량겁에 걸쳐 받게 되는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얻게 하는 수행덕목을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 경우 현실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다운 자신과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집착은 제거하지만,
대신 무량겁에 걸쳐 생사를 이어가는 아뢰야식과 같은 근본 정신이나
이를 통해 무량겁에 걸쳐 얻어낼 무량한 복덕과 지혜 또는 수행덕목과 수행목표 등에 대해 집착을 옮겨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처음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나아가는 상황 또는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묶인 상태에서 이를 벗어나려면 어떤 수행이 필요한가.
그것은 망집에 바탕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행하게 되는 행위 반응 자세를 중지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수행을 해서 그간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해소하는 수행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원래 가치와 관련한 4 칙연산과 수행자의 수행이란 주제로 살피려고 한 내용은 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전제로 살필 부분을 대강 살피느라 글이 길어졌다.
주제는 다음이다.
현실 일체가 실답지 않다는 경전 내용을 100% 받아들인다면 이론적으로 그 상태에서 현실에서 생생하게 겪는 극심한 생사고통 자체를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비유하면 지금 글자로 다음과 같이 적는 것과 사정이 같다. 지금 지구의 인류가 갑작스런 천재지변으로 모두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또는 자신의 팔 다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자신의 온 가족의 상황이 마찬가지다. 이렇게 글로 적었는데 글을 적는 이나 보는 이나 이것이 실다운 내용이 아니고 허구적인 내용임을 아는 것이다.
물론 현실 상황은 감각이나 느낌도 비교적 생생하게 함께 얻는 가운데 이런 분별을 행하는 상황이어서 위 경우와는 다르지만, 수행자가 그런 현실 내용이 일체 실답지 않다는 것을 100%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마치 위 글자를 놓고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비유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일체(5온)가 공함을 깨닫고 일체 고액을 쉭 벗어나 건너가는 상황과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론은 이론이지만, 현실에서 수행하는 수행자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수행의 문제다.
한편 일반적 입장은 더욱 사정이 어렵다. 일반적 입장은 경전 입장과 달리 현실자체가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이고 그래서 경전 입장을 놓고 보면 거의 경전내용의 0%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간에 수행자가 생사현실안에서 위치해 한편으로는 자신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한편 또 다른 중생도 그런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수행하는 것인데 생사현실이 그렇게 이론처럼 간단하지 않음을 앞에서 살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이 잘려나가는 경우처럼
당장 생생하게 감각하고 고통을 느끼는 상황이 일반인이나 수행자나 가장 문제로 보는 상황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간절히 희망하고 구하지만, 그 뜻처럼 성취되지 않는 경우['구부득고']들도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생사묶임에서 벗어날 것인가가 문제된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인 내용을 통해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원칙적인 방안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 내용을 이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런 상태에서 그 상황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경우가 대단히 희박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는 더더욱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일단 그런 상태가 되기 전에 기본적으로 그렇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되는 3 악도 즉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 묶여 지내지 않도록 미리 그렇게 묶이게끔 만드는 업을 중지하고 반대로 그런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해소하는 수행을 하여서 일단 그런 3 악도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요구된다.
물론 여기에는 처음에 살핀 문제 즉 무엇을 실질적인 자신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같이 관련된다.
만일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본다면, 이제 이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면 그것으로 자신과 관련된 일은 모두 끝이고 그 이후 이어질 내용이 없다고 보는 단멸관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갓난아이와 노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다른데 왜 평소에 이것을 하나의 철수로 함께 묶어 보게 되는가부터 먼저 잘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한 주체의 일로 보게 되는 것은 이들 각 내용 사이를 이어주는 실질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업자가 회사원이 되었다라고 할때 실업자와 회사원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 둘을 연결시켜서 실업자가 회사원이 된다고 말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실업자와 회사원이 모두 철수이기에 실업자인 철수가 나중에 회사원이 되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갓난아이와 노인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내용이 완전히 다르면 이 둘을 연결시켜 갓난아이가 노인이 되었다고 말할수 없다. 그런데 갓난아이와 노인이 모두 실질적으로 근본정신부분에서 이어지고 있기에 이 둘을 관련짓게 된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사정이 그렇기에 한 주체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고 그 주체가 축생이나 아귀 지옥세계에서 다시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는 것을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 자신의 정체나 세계의 구조부터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사정도 함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생사고통이 문제가 되므로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현실에서 그런 세계에 들어가 묶이게 하는 업을 미리 중지하고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수행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계, 정, 혜 3 학 가운데 가장 기본되는 계의 항목들이다. 바라밀다 수행에서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이 부분이 그 부분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되는 수행이 되는 사정은 생사현실에서 이렇게 임해야 업의 장애가 해소되어서 3 악도에 묶여들어가 임하게 되지 않게 되고 현실적으로 그런 바탕이 되어야 그 이후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생사묶임에서 벗어난 이후 다시 생사현실에 묶여 고통을 받아나가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자 할 때에도 무량겁에 걸쳐서도 그런 중생이 직접 알아서 그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기를 기대하기 곤란하고 수행자가 그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그런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생사현실에서 우선 그 수행자부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풀려나 벗어나야 할 뿐 아니라, 다시 그 생사현실에서 그 수행자가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하여 수행자부터 다른 이들이 접촉하기 모두 꺼려하는 극심한 전염병에 걸려 있고 도 수행자 자신부터 자신의 생계조차 해결못하고 궁핍하고 그리고 심지어 자신부터 현실에서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서 지내고 있다. 또는 자신부터 노예 상태로 구속당한채 묶여지내고 있다. 만일 이렇다면 이런 수행자가 그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을 이끌어서 제도하는 것이 대단히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수행자 자신이 그 생사현실에 들어가 그 생사현실에서의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 생사현실에서 요구되는 규범을 잘 지키고 준수할 뿐 아니라, 계를 성취시켜서 그 자신부터 생사묶임에서 벗어나고 또 복덕자량을 구족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이 되어야 이후 지혜자량도 성취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것이 생사현실에서 성취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성취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기본 수행이다.
간단히 보면 원래 100% 경전에서 제시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행위나 주체 상대 대상 그런 자체를 일체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생사현실 안에서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는 것을 놓고 그 수행자는 그런 본 사정을 이해하는 한편 다시 생사현실안에서의 사정도 함께 이해해서 그에 눈높이를 맞추어 그런 좋음(+)을 아낌없이 필요한 이들에게 베푸는 수행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기본으로 요구된다. [보시]
또 역시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무언가 보호하고 지킬 바를 전혀 얻을 수가 없음을 이해하지만 또 한편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한 중생들이 집착하는 것을 헤아리고 그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다른 중생들이 집착하는 좋음(+) 예를 들어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반대로 다른 중생들이 집착하는 나쁨(-)을 가하지 않는 수행이 요구된다. [정계]
또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자신이 집착하게끔 되는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등을 침해받아서 나쁨(-)을 받게 되는 경우 원칙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여 그 감각현실에 상을 일으키지 않고, 상을 취하여 머물지 않고 즉 일정 부분이 나라고 여기며 대하는 아상이나 자신의 생명 목숨 이런 상도 일으키지 않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그런 고통을 가하는 상대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또 미움이나 원망도 일으켜 갖지 않고 또 그에 대해 고통을 상대에게 보복해 되돌려 주려고 하지 않고 평안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참는 수행이 요구된다. [안인]
그리고 이런 상태로 계속 정진하는 것이 기본적인 계의 수행덕목이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서 좋고 나쁨에 대해 일반적으로 반응하는 일반적 자세와는 극단적으로 반대 방향이 된다.
그래서 좋고 나쁨에 대해 망집에 바탕해 집착해서 행하게 마련인 행위를 행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에 장구하게 묶여 지내게 된다는 그 사정과 인과관계를 한편으로 잘 이해하는 한편
반대로 그런 생사현실에서 그런 매 상황마다 그처럼 행하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수행에 임하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게끔 만드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한편 그 반대로 무량한 복덕을 받게 된다는 그 사정과 인과관계를 또 한편 잘 이해해서 현실에서 이런 수행을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일단 자신부터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그 이후의 수행도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는 바탕이 마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 내용을 언뜻 대하면 수행자가 매 경우 좋고 나쁨을 놓고 행해야 한다는 수행 내용을 살펴보면 이미 그 자체가 대단히 그런 수행을 하는 수행자에게 손해를 당장 직접 주게 되고 고통스러운 내용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다음 의문이 일어나게 된다는 의미다.
잘 생각해보자.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남에게 베풀라고 한다면 당장 자신의 좋음부터 줄어들고 손해보지 않는가.
또 자신의 배고픔도 면하고 좋음을 마음껏 성취하려면 다른 생명도 함부로 해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런 경우 다른 생명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그런 것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만큼 자신의 뜻은 성취할 수 없게 되고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또 더 심한 부분은 안인을 성취하는 부분이다.
지금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가 위협한다. 조금 더 심한 경우는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자신을 붙잡아 묶어 두고 자신의 손과 발을 끊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그처럼 고통을 주고 재산을 가져간다. 그런 상태인데 그런 상황에서 이것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참아야 한다는 안인 수행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내용인가.
그렇게 하면 당장 그 수행자부터 죽어 없어진다. 그러면 그 이후 무슨 수행이 가능하기에 그런 수행을 무량겁에 걸쳐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지옥에 들어가서 극심한 고통을 반복해 무량하게 받는 상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처음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수행 덕목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그 자체가 이미 그 수행자가 지옥 상황에 들어가 있는 것과 거의 같은데 무슨 이런 수행으로 지옥이나 3 악도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는 수행이라고 제시하는가.
이 부분이다.
언뜻 보면 그렇게 여겨지기에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처음 경전 내용을 100%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사실 이 어느 경우나 다 마찬가지로 차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경우에는 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공하여 얻을 수 없고 차별이 없는데 하필이면 수행방안을 택해서 임해야 한다고 하는가가 오히려 의문일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 경전 내용을 0 %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수행 방안 자체를 취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왜 하필이면 수행방안을 택해서 그렇게 임해야 한다고 하는가가 의문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놓이는 수행자는 이 사이에서 어중간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가운데 업의 장애를 해소하여 일단 3 악도에서는 벗어나기를 원하고 또 한편 중생제도를 위해 복덕자량을 구족하기 위해서도 수행을 하는데 이런 수행방안이 현실 문제가 된다.
그래서 기본적인 계의 항목부터 잘 성취해야 하는데 그 내용을 놓고 보니 그 수행자체가 벌써 상당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내용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되는가.
경전 입장을 만일 100% 받아들이면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차별없이 공한데 왜 하필이면 그런 수행을 해야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도 다시 동가홍상의 내용에 의해 생사현실에서 3 악도의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복덕자량을 구족할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가치저울을 놓고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같은 4 칙연산을 잘 해서 각 경우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를 놓고 그 인과관계를 잘 이해하고 이에 따라 수행방안을 잘 실천해 성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부분을 잘 생각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가치와 관련한 4 칙연산을 임할 때 그 인과관계를 다음처럼 단순하게 이해하는 입장이 현실에 많다.
어차피 100 에 해당하는 (+)를 자신이 다른 이에게 베풀면 자신이 100 에 해당하는 (-)를 자신이 받는 것과 같다. 그것을 통해서 나중에 100 에 해당하는 (+)라는 복덕을 받게 되어도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런 수행으로 잃는 (+)는 지금 당장 느끼는 손해다. 그로 인해 나중에 받게 된다는 복덕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어차피 결과가 마찬가지라면 왜 그런 수행을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가.
나머지 부분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이 관계를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현실에 대단히 많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는 경우도 대단히 드물다.
거기에는 앞의 100% 와 0 % 를 전제해도 위와 같은 수행을 왜 하필이면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 사정과 이유에 대해서 그런 의문을 갖고 임하게 되지만,
그 사이의 어중간한 상태의 수행자는 또 마찬가지로 이 양쪽의 의문을 다 함께 갖고 현실의 매순간에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위와 같은 수행덕목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말처럼 이론처럼 쉽지 않다. 특히 갖고 있는 좋음(+)을 조금 나누어주거나 또는 장차 받을 좋음(+)을 그저 받지 않고 희생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금 당장 생생하게 나쁨과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것도 자신이 평소 가장 애착을 느끼고 대하는 자신의 손과 발 눈귀코 등을 다 찢기고 잘리우는 상황에서 그것을 평안히 받아들이고 임한다는 부분에서는 대부분 그 내용을 성취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부분을 성취해야 비로소 수준이 높은 수행자가 되고 온갖 방편 지혜를 구족해서 중생을 제도해나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부분이 이론처럼 말처럼 쉽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여하튼 일단 가치의 4 칙연산부분부터 좋고 나쁨을 놓고 수행과 일반적인 반응 자세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런 내용이 제시되는가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물론 취할 수 있는 각 방안을 나열해 놓고 그 이후 같은 자세를 취하는 다른 주체와 관련해서 다른 주체는 또 이에 대해 어떤 반응 자세를 취하게 되는가를 살피면서 연이어 나타나는 한 3 단계만 잘 헤아리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살피면 수행과 일반적인 자세가 갖는 차이는 단순하지 않고 일반적인 반응자세는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증폭해 받는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수행은 그 반대 방향인 극단적인 차이가 있게 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을 놓고 잘 살펴야 한다.
>>> 글을 쓰다보니 어떤 부분은 과거에 많이 살핀 부분이기도 하고 또 요즘 너무 피로해서 자주 쉬는데 이제 원래 주제로 잡고 살피고자 하는 부분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그러나 글이 이미 너무 길어진 상태이고 또 일단 쉬어야 한다고 본다.
>>>
우선 수행을 함에 있어서 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행하기 마련인 반응을 취하지 않고 수행방안을 취하는 것은 그런 수행 방안이 상대방을 해치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자신의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결과를 얻게 하는 것이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 자신이 그런 방안을 취하면 상대가 어떻게 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등을 일일히 계산하여서 그 결과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a 를 행하면 그에 따라 대가관계로 상대가 자신에게 b 를 행한다. 그런 결과 자신이 어떤 이익을 보게 된다. 이렇게 계산하고 a 를 행하는 것은 장삿꾼이 행하는 내용이다.
흥보와 놀보라는 이야기 속에서 놀보도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비록 놀보가 제비 다리를 고쳐준 것은 사실이더라도 누가 보아도 놀보가 제비다리를 고쳐준 행위는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가 하면 그 사정이 위와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삿꾼이 지금 물건값을 지불하면 1 년 후에 그보다 훨씬 비싸게 사야 할 물건을 싸게 미리 사게 된다고 계산해서 미리 물건값을 지불하는 것은 장삿꾼의 행위인 것이고, 이를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서 무엇이 좋은 과보를 얻는 방안인가 자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 즉흥적으로 임하는 가운데 그런 수행을 하게 되는 것도 또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는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고 무량한 복덕을 쌓는 길이어서 그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과보를 받고자 즉 무언가 얻을 바 있다고 여기고 그 과보에 집착하여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 수행자가 어떤 보시를 행하거나 하는 경우 상대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대가관계로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그런 수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그런 보시를 할 때 물건이면 일반인적으로 그 물건을 사용해서 즐거움을 얻듯, 수행자도 그것을 자신이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손해로 여기면서 장차 수익을 얻기 위해 치루는 비용으로 여기거나, 장차 수익을 얻거나 과보를 얻으려고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앞의 내용들은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수행자는 이런 수행을 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무량한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 하는 방안임을 알기에 그것을 선택해 열심히 정진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런 수행에 본래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생사현실 안에서는 다시 인위적으로 무소득(얻을바 없음)을 일부로 방편으로 삼아서 수행에 임해 이들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대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이 유치원교실에 들어가 유치원생을 잘 교육하고자 유치원생에 눈 높이를 맞추어 임할 때 아이들이 집착하는 장난감과 딱지나 구슬이 교육에 많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많이 얻는가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유치원 선생님이 그렇게 임하는 것이 정말 그런 수행으로 장난감과 딱지 구슬을 많이 얻는 것이 목표이기에 그렇게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상황이 생사현실에 임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자 수행하는 수행자의 상황과 마찬가지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자신부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하고 다시 지혜자량을 쌓고 중생을 제도할 복덕자량이 필요하고 또 그런 복덕자량을 얻으려면 그런 계의 수행이 필요해서 수행하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사현실에서 얻는 복덕자량이 정말 얻을 바가 있다고 집착하면서 그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사정을 위 유치원 상황을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왜 생사현실에서 매 좋고 나쁨에 대해 일반적으로 취하게 마련인 반응자세를 취하면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고 반대로 그런 수행방안을 취하면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고 무량한 복덕 자량을 얻게 되는가 그 관계를 이해하려면 욕계내에서 각 주체가 각 상황마다 일정한 반응을 할 때 그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가를 놓고 관계를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앞에서 어떤 주체가 어떻게 임하면 무량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고 또 반대로 어떻게 수행에 임하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끔 되는가 하는 그 사정을 이해해보기 위해서 각 경우마다 그 이후 대략적으로 3 단계를 나아가고 또 그렇게 무량하게 나아가면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현실이 본래 차별없이 공하여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왜 하필이면 그런 수행방안을 제시하게 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함인 것이고 그렇게 미리 이해타산을 따져서 수행에 임하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점을 미리 주의해야 한다.
○
4 칙연산부분은 수식 표현이 글로 어려워서 고민 중이다.
단순모형으로
갑이 1,2,3,4 의 반응체계로 처음 무언가를 행한다.
그래서 좋음 (+) 1 을 얻거나 지키려고 한다.
이 때 이를 대하는 을이 다시 1,2,3,4, 의 반응체계로
이에 반응하여 자신의 좋음 (+) 1 을 얻거나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한 3 단계를 그렇게 나아가면서 서로 반응해간다.
이 때의 갑 을 양쪽의 (+) (-) 의 단순총계를 한편에 놓는다.
두번째 모형으로
갑이 원래 일반적으로 취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매 경우 처음 행한다.
그러나 을은 그 때마다 원래 일반적으로 반응하는대 매번 행한다.
이런 단순 모형을 놓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반응할 때
갑 을 양쪽이 결과로 얻게 되는 (+) (-) 의 단순총계를 한편에 놓는다.
또 세번째 모형으로
이번에는 갑과 을이 모두 서로 원래의 반응방식과 반대 방향으로 행한다.
이런 단순 모형을 놓고 또 같은 방식으로 서로 반응할 때
갑 을 양쪽의 (+) (-) 의 단순총계를 한편에 놓는다.
이렇게 하고나서,
이 각각을 비교해본다.
이렇게 갑을 관계에서 가치와 관련한 4 칙 연산이 이뤄진다고 할 때
자세히 보면 갑이 1,2,3,4, 를 취할 때
을이 취하는 방안도 또 제각각 다른 1,2,3,4 를 취하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또 조금 복잡해진다.
통상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
갑이 행위 모형에서 2 을 처음 취하면
즉 다른 이가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면서 무언가를 추구하면,
그후 상대방 을은 이에 대해 이후 3 즉 보복방안을 취하고
이후 거기에 갑도 다시 3 즉 보복방안을 취하고
이후는 상호간에 반복해서 3-3-3-3 을 취해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이것이 이후 갑을 사이 이외로 사회 문제가 되므로
제 3 자가 이에 개입하게 된다.
이 경우 역시 이 둘을 3 의 방안으로 대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이 갑을을 체포하거나 억제하게끔 된다.
물론 가해 피해 관계 한 단면에서
피해자는 이미 피해를 본 상태라서 방치하지만
가해자는 체포 구금하고 감옥에 가두어 이런 사태를 방지하고 예방하고자 한다.
결국 이런 각 주체가 각 입장에서 취해 나가는 반응들이
종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는 것이 사회현실의 모습이 된다.
그런데 시공간여행의 4 칙연산이라는 것은
첫 단면에 놓인 각 측면의 내용의 정체를 잘 살펴서
근본적으로 이 생사현실의 고통의 문제상황을 벗어나오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 본 바탕-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본래 있다고 할 그대로의 본 바탕 내용
● 감각현실 -
눈,귀,코,입,몸을 통해 얻고 각 주체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
그래서 일반적으로 외부 세계나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기고
또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라고 그 정체를 잘못 여기는 가운데 대하게 되는 감각현실
● 느낌 -- 감각현실이 다시 일으키는 좋고 나쁨의 느낌
● 관념분별 -- 감각현실의 각 부분에 대해
이 부분은 자신이고 이부분은 영희고 꽃이고 바위라는 등등으로 일으키는 관념분별
이들 각 영역의 내용들의 관계는 알고보면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처럼
서로 엉뚱한 내용을 그런 형태로 반복해서 얻어나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따.
이는
게임에서 일정 화면에 마우스를 놓으면
그 때마다 반복해서 아이템이 얻어지거나 폭탄이 터지는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각 내용을 대조해보면 대단히 서로 엉뚱하지만
여하튼 그런 관계로 무한히 무수한 주체들이 그런 내용을 반복해 얻어나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손을 마주치면 손뼉소리를 매번 반복해 듣게 된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손의 모습과 소리는 서로 완전히 엉뚱하다.
그러나 여하튼 그런 형태로 그 내용을 매번 반복해 얻는다.
마치 봄에 뿌리는 씨와
이후 그 씨로부터 나타나는 싹이나 꽃이나 또 가을에 얻는 열매가
서로 대단히 모습이 다르고 엉뚱한 것과도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콩씨를 뿌리면 그런 형태로 싹과 꽃과 열매를 반복해 얻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여하튼 그런 형태로 무한히 반복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자가 시공간여행에서 좋고 좋은 상태를 얻기 위해
기본 4 칙 연산을 적용할 때 적용하는 바탕 내용이 된다.
수행자는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생사현실에서 집착하는 내용들이
그 바탕이나 그런 분별을 일으킨 그 재료자체에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갖기 쉬운 각 내용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반응과 정반대로 매 상황마다 행하면서 꾸준히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시공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여행허가증과 비자가 발급된다.
그런데 그 반대로 하면 그렇게 행하는 그 취지와 희망과 달리
이전보다 더 심한 상태로 묶인다.
이 부분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는 것과
또 반대로 수행을 통해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는 수행과의 차이다.
원래 극심한 고통과 비극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에 대해 안타까움을 같이 느끼는 한편
그런 고통을 준 부당하게 준 이를 찾아내 체포하고 상응한 처벌을 해야 한다거나 예방책을 잘 세워야 한다.
이런 취지의 글이 더 공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반대면에서 그 현장에 놓인 주체가 또 한편
스스로 그 상황을 잘 극복해야 한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수행세계에서는 이 부분이
바로 시공간 여행허가와 그 목적지 쪽에서 입국허가 비자가 발급되는 기본 요건이기에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된다.
불교 전문용어로 안인 수행을 통한 무생법인의 증득과 불퇴전위에 오르는 요건으로 제시되는 내용이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왜 그런가는 자신이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할 어떤 방편
예를 들어 레이저무기를 갖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것을 누구에게 줄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놓고 거꾸로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어떤 이가 조금만 고통을 받는 경우에도
그것을 평안히 잘 참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로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수단과 방편을 다 발휘해 그 상대를 해치려 하는 자세로 일관한다면,
그런 방편이 설령 있다고 해도 제공해 줄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은 그런 방편을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상대에게 제공하면
그로 인해 다른 이들도 해치게 되고
끝내 그 상대도 해치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른이 불을 켜보겠다고 라이터를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라이터를 주지 못하고
그 때마다 사정과 그 취지를 살펴서 일일히 불을 켜주거나 말거나 하게 되는 것과
그 사정이 같다.
그래서 대부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억울한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참고 그런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취하게 마련인 반응을 취하지 않게 되는 상태가
대단히 중요하다.
수행자가 그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다른 세계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여행허가증과 비자가 발급되어
시공간여행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수행자가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임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 취하게 마련인 형태로 반응하는 상태에 머물고 있으면
그런 사정때문에 그 주체가 아무리 희망해도
정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묶이게 된다.
그래서 수행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일반 현실에서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여러 상태도 하나하나 살펴보면
대단히 사정이 억울하고 심하다.
그런데 경전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아무 이유도 없이 묶어 놓고
눈과 코를 잘라내고 손과 발을 자르는 상황에서
상을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임해야 함을 제시한다.
이것이 안인 수행을 통한 무생법인의 증득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어느 극한 상황에서도 다른 중생을 해치는 자세로 임하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시공간여행허가증이 발급되고
또 방문하고자 하는 상대 세계에서도 입국을 허가하게 된다.
쉽게 생각하면, 그렇지 못한 이가 밀림이나 깊은 산이나 강 바다 속 정도만 들어가 보았다고 가정해보면